안녕하세요? 내일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축일이네요. 전에 제가 예수회원들과 나누고 싶어서 썼던 글 함께 나누어요. 수련원 형제들에게 강론으로 할려고 썼었는데 무슨 사정이 생겨서 못 했었지요.
내일 축일 미리 축하드려요.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대 축일이지요. 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프란치스꼬 하비에르 축일을 맞으며
프란치스꼬 하비에르! 그는 누구인가? 성 이냐시오의 첫 동료의 한 사람인 하비에르라는 인물을 단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호칭이 있다면, 무엇일까? 광막한 동방의 대지를 달렸던 선구자인가?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거친 바다를 건너는 목숨을 걸었던 모험가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지녔던 사도인가? 미지의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된 선교사인가? 이 모두이면서도 그 어느 호칭도 그를 표현하기에는 뭔가 미진한, 채워지지 않은 어떤 것이 있다. 그는 예수회원이었고, 파견받은 자로서의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 이제 막 시작된 수도회, 예수회의 회원의 모습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니, 그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호칭이 있다면, 오직 예수회원이리라.
그의 축일을 맞으며, 그가 선구자로서, 사도로서, 선교사로서, 무엇보다 예수회원으로서 광막한 미지의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걸었던 그의 삶의 여정을 따라 더듬어 보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리라.
그가 포르투갈 리스본을 떠나 인도 고아(Goa)에 도착한 것은 항해 13개월만인 1542년 5월 6일이었다. 고아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했던 일은 크게 다섯 가지, 병원 사목, 병원 밖의 환자 사목, 아이들에 대한 교육 사목, 죄수들에 대한 사목, 그리고 설교었으니, 그것이 앞날의 예수회 사도직의 전형이 된다.
그는 고아에서만도 할 일이 너무 많아 잠 잘 시간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그에 대한 계획은 더 원대한 것이었고, 이에 따라 그의 시야는 더 멀리 더 넓게 펼쳐 있었으니, 그는 고아에서의 사목에 머물지 않고 미지의 땅을 향해 끊임없이 떠나는 영원한 방랑객이 된다.
그의 전도 여행은 크게 나누면, 4차 전도 여행으로 나눌 수 있겠다. 제 1차 여행은 인도 남부 해안을 중심으로 한 전교, 제 2차 여행은 남태평양 말라카 (Malacca)와 몰루카(Molucca)에서의 전교, 제 3차 여행은 일본 전교, 제 4차 여행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샹촨 (Sancian)섬에서 끝난 중국 전교이다. 이를 간략히 살펴보자.
제 1차 전도 여행은 코모린 곶(Cape Comorin)과 진주잡이(The Pearl-Fisher)라 불리는 해변을 따라 펼쳐진 트라벤코르 (Travancore)지방을 중심으로 한 남부 인도 전역이었다. 타는듯한 더위와 언어 장벽을 뚫고 낯선 사람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손을 뻗쳤을 때, 그가 거두는 놀라운 결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적, 바로 그것이었다. 황량하고 척박한 곳이었지만 진리에 대해 갈증을 느끼던 땅에 열정에 넘친 프란치스꼬 하비에르의 설교는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였으니, 트라벤코르 지방에서 단 한달 사이에 만 명에게 세례를 베풀게 된다. 그러나 선구자들의 삶이 늘 그러하듯 그에게 기적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1545년에 겪어야 했던 현실은 엄첨난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다른 종족들이 그의 전교지역에 침입, 학살을 감행하였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전쟁을 중재하기도 했으나 마나르(Manar)섬에서는 한 지방 족장에게 600여 명의 새로운 신자들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이 사건 후, 그는 코친(Cochin)에서 다시 고아로, 고아에서 바씬(Basscin)으로, 거기서 네가푸탄(Nagapatan)으로 등 여러 지역으로 전교지역을 옮기며 광활한 인도의 평원을 가로질러 해안 끝 작은 마을까지 두루 다녔다. 병자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병자들 앞에서 복음서를 읽는 데 시간을 다 보내게 되었지만, 그 이외에도 아이들을 더 가르쳐야 했고 세례를 주는 일, 기도 드리는 일, 질문에 답하는 일 등 끝없는 일 가운데서 그는 이냐시오의 관대함을 구하는 기도에서처럼 휴식을 구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휴식은 동료 예수회원들을 그리며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예수회원으로서의 동료들과의 일치와 연대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었으니, 그는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에 "여기서의 제 휴식은 끊임없이 당신들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끊임없이 새롭게 응답하면서 그는 하느님이 자기를 새로운 미지의 섬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프란치스꼬 하비에르는 1545년 9월 말레이(Malay)반도에 있는 말라카로 향했으니 장장 2000 여 마일에 이르는 그의 제 2차 전도 여행의 서막이었다. 말라카에서는 약 4개월간 머물면서 그곳의 원주민들 뿐 만 아니라 본국 식민주의자들의 회심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낮에는 고백성사를 주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이 없어 거의 단식하다시피 했고, 밤에는 기도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고 한다. 1546년 1월, 그는 다시 남태평양의 몰루카로 가서 약 1년 반을 머물며 암보이나(Amboina)를 중심으로 한 여러 미지의 섬들을 다니며 전교했는데 말레이어로 성가를 부르며 원주민들을 매료시키기도 한다.
약 3개월 동안은 식인종이 산다고 알려져 포루투갈 식민당국에서 가지 못하도록 만류하였던 모로(Moro)섬에 가서 그 곳의 미개한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하느님의 넘치는 은총을 체험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는 그곳을 식인종의 모로 섬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의 섬이라고 불렀다. 그가 그곳 섬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그저 미소를 짓고 덥썩 껴안는 것이었다. 사랑에는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과 행동으로 족했던 것이다. 1547년 4월, 그는 다시 말라카로 돌아와서 그곳에 있던 세 명의 동료 수사들과 함께 말라카 교회의 기반을 닦는데 몇 개월을 보내게 되는데 이때, 일본인 야지로(Yajiro)를 만나 일본 전도를 계획하고 인도로 돌아온다.
인도에 돌아온 하비에르는 15개월간 고아와 실론(Ceylon)과 코모린 곶을 왕래하면서 전교지의 기반을 튼튼히 닦으며 일본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1548년 5월 20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야지로를 비롯한 일본인 세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일본 전교를 꿈꾸며, 머리 속에는 말로만 듣던 이상적인 신비의 나라 일본을 그리고 있었다.
1549년 4월 15일 하비에르는 코스모 데 토레스(Cosmo de Torres)신부와 쥬안 페르나데즈(Juan Fernandez)수사와 그가 영세를 준 세 일본인 신자와 함께 드디어 고아를 출발하여 일본을 향했으니, 제 3차 전도 여행이었다. 4개월의 힘든 여행을 한 후 쿠슈(Kyushu)의 가고시마(Kagoshima)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일년동안 전교하며 열정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진리를 외쳤지만 겨우 몇십명 정도의 신자를 얻게 된다. 한달 사이에 만명에게 세례를 주던 인도와는 너무나 다른 상황이었다. 그래서 보다 효율적인 전교를 위해 그가 세웠던 계획은 일본의 왕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 준비로 그는 일본의 고유한 풍속과 예법을 익히고 일본어를 배웠다. 그러나, 일본의 왕은 그가 상상했던 절대 군주적 권력을 행사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포루투갈의 왕과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으며, 일본인들도 자연과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하는, 그가 이상으로 그리던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기대를 걸었던 대학이라는 곳도 권력층의 자제들을 모아놓은 사원에 불과하여 그는 적지 않은 실망을 체험하기도 한다.
왕을 만나러 미야코에 간 그는 초라한 행색으로 대궐 문 앞에서 쫓겨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실제로 왕보다 다이묘오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가장 강력한 다이묘오가 사는 야마구치로 갔다. 거기서는 방법을 바꾸어, 교황 대사의 자격으로 고관의 차림으로 위엄을 갖추고 다이묘오에게 가서 선물을 주면서 신임을 얻게 된다. 그는 야마구치의 다이묘오에게서 전교할 권리와 거처하면서 방문객을 맞을 절간도 하나 받게 되었지만, 일본은 이전 전교지와는 달리, 복음이 스며들기에는 너무나 메마르고 척박한 땅이었다. 두 달동안 전교했지만 단 한 사람의 신자를 얻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온갖 수모와 경멸을 받으면서도 실망하지 않고 전교하는 이들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차차 세례를 청하게 되어 이년 후, 그가 떠나올 때는 약 오백명의 신자가 생겨났다. 어느 정도 기반을 닦은 후, 1551년 11월 일본 교회를 토레스 신부와 페르난드즈 수사에게 맡겨두고 그는 인도로 다시 돌아온다.
인도에 돌아온 그는 이미 이년 전에 그가 동방의 지부장으로 임명을 받은 것을 알게 된다. 그의 앞에는 여러가지 복잡한 사건들과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나, 늘 그러했듯이 그의 시야는 더 먼 곳으로 향해 있었다. 온갖 신비의 나라, 중국에의 선교가 그것이었다. 1552년 4월 17일, 그는 중국을 들어가기 위해 다시 고아 항을 출발하게 되니, 미완성으로 끝난 그의 제 4차 전도 여행이었다. 중국 대륙을 들어가기 위해 전초기지로서 그가 도착한 곳은 상촨(Sancian)이라는 섬이었다. 상촨에 도착한 그는 작은 성당을 세우고 환자를 방문하고 고백성사를 주는 등의 전교를 하며 중국에 들어갈 방법을 모색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은 그가 계획했던 일을 성취함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당신 뜻에 온전히 맡김으로서 그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하셨으니, 그는 거기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46세의 나이로 중국 선교를 눈 앞에 두고, 하비에르는 그가 그리던 영원한 생명으로 간 것이다.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던 안토니오에 의하면, 그는 의식의 혼미를 거듭하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회의 형제들을 생각하며 기도하였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과의 긴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안토니오가 이제 하비에르가 숨을 거두리라는 것을 알고 그의 손에 초를 쥐어 주자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평온한 마음으로 그의 영혼을 하느님께 맡겼다고 한다.
사부 이냐시오의 편지를 받으면, 이냐시오가 있는 로마를 향해 무릅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읽던 프란치스꼬 하비에르. 그는 1622년 3월 12일 이냐시오와 함께 시성됨으로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영원한 동반자가 된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전도여행을 간략히 더듬어 보면서 갖게 되는 느낌은 그가 얼마나 철저히 예수회원으로 살았는가에 대한 경이이다. 예수회원의 가장 큰 특성 중의 하나는 융통성이다. 복음이라는 절대적 진리 앞에 모든 것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정신, 바위처럼 강하되 물처럼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 것이다. 식인종이 산다는 모로 섬을 향해 떠나면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잃을 모험을 해야 함을 알았기에 두려움없이 그곳에 갔고 그곳에서 원주민들과 어울리기 위해 그들처럼 벌거벗고 함께 춤추던 던 하비에르. 그가 일본의 다이묘오를 만나기 위해서는 누추한 옷을 벗어 던지고 화려한 고관의 옷으로 갈아입고 위엄을 갖추고 당당하게 나서는 모습을 보면, 그가 얼마나 상황에 따라 적응할 수 있는 예수회원으로서의 융통성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보다 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유로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서 하느님의 위로를 체험한다는 것을 알면서 그들을 두고 떠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모두들 당신을 찾는다는 말을 들으시면서 "이 근방 다음 동네에도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고 하신 주님을 본받아 하비에르는 다음 동네로, 다음 지역으로, 다음 나라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미지의 땅에서 그가 당했던 어려움과 위험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리라.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회원으로서의 그의 동료들과의 깊은 일치와 연대였다. 그는 "저는 당신들의 우정과 도움 안에서 살며, 영혼과 육체의 숱한 시련 속에서 당신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저는 당신들이 보낸 편지에서 이름을 오려 제 서원문과 함께 가지고 다니며, 바로 거기에서 위로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그의 모험의 원천은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의탁, 그리고 동료 예수회 형제들에 대한 깊은 일치에서 오는 힘이었던 것이다.
오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축일을 맞으며 우리가 예수회원으로서 참으로 사람들에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은 바로 하느님께 우리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자유와,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같은 영성을 살려는 회원들 간에 이루어지는 일치라는 것을 깊이 묵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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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는 인터넷①』
(≫≪) 미군 희생 여중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