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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0일 대림 제4주일
제1독서 : 2사무 7,1-5.8ㄷ-12.14ㄱ.16
제2독서 : 로마 16,25-27
복 음 : 루카 1,26-38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많은 이가 어려운 순간이 다가오면 “왜?”라는 질문을 합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지?” 식으로 계속해서 “왜(Why)?”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답은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정의를 의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왜(Why)?”가 아니라, “어떻게(How)?”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예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채칼 하나를 선물을 받았습니다.
채칼은 매우 날카로워서 아주 단단한 것도 상관없이 잘 썰렸습니다.
그런데 저의 부주의함으로 손가락 끝이 채칼에 썰린 것입니다.
곧바로 피가 솟구쳤습니다. 이때 저는 어떤 질문을 해야 했을까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도, ‘왜 채칼에 베이었지? 도대체 이유가 뭐야?’라면서
채칼을 이리저리 살펴봐야 할까요? 아니지요. ‘피가 많이 나는데 어떻게 해야지?’라면서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왜(Why)?”만 외친다면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답은 “어떻게(How)?”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더 긍정적이며 희망적인 답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요한의 출생 예고 뒤를 이어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나옵니다.
이 장면에도 천사 가브리엘을 등장시키는데,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느님의 힘이 인간 역사 안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모님의 예수님 잉태로 하느님의 힘이 드러나서 구원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모님으로부터 태어난 아기는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며,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했습니다.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성모님께 예수님 잉태의 소식은 당황스럽게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성모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처럼 불신의 마음으로 의심하지 않습니다.
매우 놀라셨겠지만, 의심의 목소리로 “왜(Why)?”라는 질문이 아닌,
“어떻게(How)?”라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즉,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역시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일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힘이 우리 곁에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마지막 네 번째의 기쁨의 하얀 대림초가 켜졌습니다.
대림시기가 거의 끝나가고,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우리의 구원이 다가옵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와 계십니다. 서둘러 마중을 나가야 할 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나탄 예언자는 다윗 왕에게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 7,16) 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전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오랜 세월 감추어 두었던 신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는 모습을 드러내어 예언자들의 글을 통하여 알려지기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제1독서>에서 예고되었고,
<제2독서>에서 증언된 그분이 마리아에게서 잉태된 경위를 전해줍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천사는 “기뻐하여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기뻐해야 할 이유도 밝혀줍니다.
그것은 그녀가 “은총이 가득한 이”이기 때문이고,
그 은총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기뻐해야 할 이유입니다.
<제1독서>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다윗에게도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계셨던”(2사무 8) 사실을 깨우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오늘 우리에게도 벌어집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사실,
우리가 이미 은총을 가득히 입었다는 이 사실에, “예" 라고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면, 말씀이 우리 안에 수태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구세주의 잉태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잉태!’,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분의 뜻’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도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예”라는 믿음의 응답과 순명,
그리고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루카 1,38) 희망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서 실현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당신 은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아들의 집’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큰 기쁨인가요?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라니 말입니다.
잃었던 어린 예수님은 성전에서 찾았을 때 그는 성모님께 말합니다.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사실, 오늘 <복음>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하였습니다.
“보라. 네가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루카 1,1,31-32)
여기에서 말하는 ‘아들’(바르)의 히브리어 그림글자의 뜻은 ‘집에 거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은 ‘아버지의 집’에 거하는 이이며,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삼아 우리 안에 거하는 이인 셈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아버지의 집’인 성전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야곱이 에사우를 피해 하란으로 가다가 베델에서 꿈을 꾸고서 외쳤던
그 놀라움과 경탄의 유레카를 외쳐봅니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 28,16-17)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마리아와 함께 진정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를 희망하는 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희망이 있다는 이 사실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서 당신의 희망을 실현시키시는 바로 그분이 우리 안에 잉태 되셨습니다.
마치,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희망과 은총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감실이 되고 거룩한 성전이 되셨듯이,
이제 우리 역시 그렇게 하느님의 감실이요,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바야흐로 성탄의 기쁨이 몰려옵니다. 희망이 이미 수태된 까닭입니다.
이토록,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희망이 이미 가득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마리아와 함께 기뻐하며, 받은 그 희망이 실현되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아기 예수님을 탄생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시기에”(루카 1,37),
우리 안에서 당신의 희망을 실현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희망입니다.
사실, 우리는 바로 이 희망으로 구원된 사람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
그래서 천사는 우리에게도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항상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020년 성탄을 기다리면서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약회사들이 잇따라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는 소식입니다.
화이자,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에서 백신을 개발했고 90%이상의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30여개의 제약회사들이 백신을 개발하고 있다고 하니 더 많은 백신이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백신개발이 코로나19를 막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백신을 접종해야 코로나19를 막을 수 있습니다.
공공재로서 모든 사람이 쉽고, 저렴하게 코로나 백신을 맞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의료 종사자, 노약자들에게 먼저 예방 접종이 이루어지고,
다음에 모든 사람에게 접종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2020년 우리는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 곧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고 밝은 빛을 볼 것입니다.
마스크를 벗고 환한 얼굴로 인사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 놓고 악수하고, 포옹하면 좋겠습니다.
성가대는 고운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 좋겠습니다.
함께 먹고 마시면서 친교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이제 곧 터널을 지날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손을 자주 씻고, 거리두기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림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향해 나가는 터널과 같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1주일부터 대림 4주일까지의 내용을 요약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대림 제1주일의 주제는 “깨어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예수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하시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을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의미의 시간을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시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시간에 충실하기 위해서 4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구원의 시간에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지상 최대의 힘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셋째는 시대의 징표입니다.
허리가 아픈데 다리를 주무르면 별 효과가 없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습니다.
교황님의 문헌을 자주 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신문과 방송을 가까이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넷째는 실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실천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대림 제2주일의 주제는 “인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연중 제33주일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주일’로 선포하셨습니다.
교회는 약한 이,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 억울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교황이 되신 후 가장 먼저 찾아 간 곳은 이민자의 섬 ‘람페두사’였습니다.
람페두사 섬은 전쟁과 가난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거치는 중간 기착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고,
세상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서 꿈을 실천하였습니다.
이제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언제가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우리의 행동입니다.
사회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들, 누군가가 도와주어야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희망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모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대림 제3주일의 주제는 “자선”입니다. 제게 감동을 주었던 신학생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 친구는 청소년들이 지내는 사회복지 시설에서 봉사를 하였습니다.
그런 어느 날, 늘 남이 입던 옷을 입는 아이들 생각이 나서 보세 옷가게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옷 가게에는 평소에 입고 싶었던 옷들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옷을 살까, 아니면 평소에 입고 싶었던 그 옷을 살까!
통장에는 200,000원 밖에 없었습니다.
큰맘을 먹고 아이들을 위해서 옷을 사서 사회복지 시설로 갔습니다.
아이들은 무척 좋아하였습니다.
그런데 시설에 계시는 수녀님께서 신학생에게 선물을 하나 준비하였습니다.
그것은 그토록 입고 싶었던 가벼운 패당 잠바였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학생은 보세 옷가게를 다시 찾았습니다.
수첩을 놓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옷가게 사장님이 신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 아이들을 위한 옷과 양발을 한 보따리 주셨습니다.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던 학생은 그날 저녁에 본당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본당 신부님께서 성탄을 축하한다고 하시면서 봉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봉투에는 그날 자신이 사용한 금액인 200,000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신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나눔은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눔은 보다 안전한 곳에 나의 것을 모아 놓는 것입니다.
대림 제4주일의 주제는 “순명”입니다.
이 세상에 죄, 고통, 죽음이 시작된 것은 아담의 불순종이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요셉, 마리아, 예수님의 순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법대로 살았고, 의로운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 소식을 들었고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도 당연한 것이 당시의 법과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마리아와 혼인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상식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고, 그렇게 되면 파혼은 물론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골고타 언덕을 올라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시간에 깨어있다면, 이웃의 고통에 동참한다면,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한다면,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간다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1년에 한번 돌아오는 성탄이 아니라, 우리는 매일 성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든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 주었고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그분을 품어 주셨으며
요한은 오실 분을 미리 알려 주고 이미 와 계신 그분을 가리켜 주었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 31)
한상우 바오로 신부
겨울 찬바람 속에서
우리의 대림은
더더욱 깊어간다.
대림은
성탄을 향해 가듯
성탄은
잉태한 말씀을
탄생시키려한다.
말씀의 잉태이며
말씀의 성탄이다.
말씀은
너만의 성탄이 아닌
나의 성탄
우리 모든 공동체의
성탄이 되게 한다.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성탄이며
성탄은 말씀의 시작이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구원의 삶이다.
말씀은
삶을 비추어준다.
하느님 말씀을
온전히 믿고 받아들이신
성모님의 삶이다.
순종은
먼저 말씀을
받아 삼키는 삶이다.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
돌보아주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탄을
완성시키시는
하느님 말씀이다.
말씀이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떠오른다.
다시
말씀에 충실할 때이다.
말씀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말씀은
믿음을 필요로 한다.
믿음은 서로를 살린다.
믿음 안에서
최고의 정점은
예수님 탄생이다.
맡겨드리는 삶이
탄생이며 믿음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1, 30)
하느님을 진실로 믿는
우리들이길 기도한다.
믿음이 없기에
말씀과 성탄이
간절한 우리들이다.
믿음은 믿음을 구원한다.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다.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믿음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 믿음과 믿음의 결합으로 좋은열매를 맺어야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께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를 예고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믿는 이를 통하여 좋은 열매를 맺는지 그 원리를 알려줍니다.
우선 좋은 열매를 맺었던 한 스승과 그의 제자들에 관한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회계학 교수인 C.J. 스켄더입니다. 그의 제자들은 어마어마한 성과를 거둡니다.
두 명의 제자를 소개합니다. 레지 러브와 베스 트랜햄입니다.
레지 러브는 듀크 대학 시절 미식축구와 농구팀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스타 운동선수였습니다.
그러나 2년 넘게 프로 축구팀에서 그를 선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진로를 바꾸기로 합니다.
다시 듀크 대학에서 행정학과 공공정책을 공부하였고 그때 스켄더 교수에게 배웠습니다.
미국 의회에서 인턴 과정을 하는 중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오바마 밑에서 우편물 취급을 담당합니다.
러브는 오바마 의원에게 극찬을 듣습니다.
“잠도 거의 자지 않고 그토록 많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그의 능력은
보기만 해도 자극이 됩니다. 그는 자기 분야의 달인입니다.”
그리고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레지 러브는 그의 오른팔이 됩니다.
그는 ‘오바마의 그림자’라고 불렸습니다.
레지 러브는 자신이 그렇게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이 된 데에는
스켄더 교수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스켄더의 수업을 듣기 전까지 나는 회계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습니다.
그 시간에 배운 지식이 나에게 백악관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주었지요.”
다른 스켄더의 제자는 베스 트랜햄입니다.
그녀는 숫자와는 관계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 아날로그 시계를 보는 법을 몰랐고 고등학교도 남자친구 덕분으로
수학과목 낙제를 면했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백분율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찌어찌해서 공인회계사 공부를 보게 되었는데,
시험 2주 전에 세 아이 중 두 아이가 수두에 걸려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시험을 치른 그녀는 낙방을 확신하며 실의에 빠졌습니다.
전 과목에 낙제점을 받았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때 그녀의 스승인 스켄더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네가 시험에 떨어지면 네 대출금을 내가 다 갚아줄게.”
베스는 주 전체 시험 응시자 13만 6,525명 중 1위로 회계사가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2등과 3등도 스켄더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스켄더의 학생 중 역대 공인회계사 시험에서 노스캐롤라이나주 전체 3위 안에 들어
메달을 획득한 사람은 마흔 명이 넘습니다.
다른 교수들은 평생 한두 명 만들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스켄더는 그렇게 수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배출하는 것일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 하버드대학 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탈의 유명한 연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젠탈은 샌프란시스코의 한 초등학교에서
모든 아이에게 문제 해결 능력, 어휘력, 추론 능력 등을
객관적으로 측정하여 상위 20%를 잠재적 영재로 분류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아이들의 IQ를 측정했더니 다른 아이들은 8%가 올랐지만,
영재들은 12%가 상승했습니다. 2년 후에는 IQ의 차이가 더 벌어졌습니다.
선생님들은 영재들이 나이가 들면서 아이큐가 더 빨리 좋아진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로젠탈이 영재를 뽑은 것은 사실 ‘무작위’였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20% 안에 드는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20% 아이들을 바라볼 때 영재가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달된 것이고 결과도 그렇게 나온 것입니다.
아이들을 영재로 만드는 것은 아이들의 능력보다 선생님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스켄더 교수가 더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던 것은
제자들에 대한 그의 믿음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자들을 ‘보석 원석’으로 보았습니다.
모두가 보석인데 다듬어지지 않아서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 믿음과 또한 그 믿음을 향한 제자들의 믿음이 결합하자 좋은 열매들을 맺게 된 것입니다.
스승이 믿어준다고 제자들이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가리옷 유다와 같이 끝까지 그럴 수는 없다고 열등감을 유지하려는 제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 대부분은 스승의 믿음에 응답하고 그 응답한 제자들은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참조: 『기브앤테이크』, 애덤 그랜트, 생각연구소]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시어
나자렛의 마리아라 하는 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제자를 뽑아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도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고 하는 천사의 말을 믿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만약 즈카르야가 이런 믿음이 있었다면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나왔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믿고 받아들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정 기간 벙어리로 지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성모 마리아의 믿음은 완벽했습니다.
하느님의 믿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열매인 구원자를 낳았습니다.
결혼한다면 좋은 자녀를 낳고 싶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두 사람의 결혼을 통해 훌륭한 자녀를 탄생시킬 믿음을 가지고 계시고
그렇게 두 명을 혼인시켰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믿음에 응답하는 부부의 자세입니다.
자신들을 통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그 계획을 믿는다면
정말 훌륭한 열매들이 맺힐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자신들이 믿는 만큼의 열매만이 맺힐 것입니다.
유태인들의 자녀들이 그렇게 세상에서 엄청난 성과를 내는 것은 그 부모들을 향한
하느님의 믿음을 다른 나라 부모들보다 그만큼 더 많이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열등감에 빠져있지 맙시다. 우리는 모두 보석 원석들입니다.
그분의 손에 내어 맡기기만 하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만 구세주를 세상에 보내실 수 있었는지를
깊이 묵상하며 성모 마리아의 믿음을 닮아가야겠습니다.
하씨 집안 세우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에 수련소에 오씨 성을 가진 형제들이 여럿 산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농담하기를 하느님도 성모님도 예수님도
자기들과 같은 성이라는 것인데 그 이유가 우리가 기도할 때
'오, 하느님', '오, 마리아', '오, 예수님'하며 기도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오씨 집안에 하느님, 마리아, 예수를 끼여 주는 것인데,
저는 오늘 하씨 집안에 제가 끼고, 여러분도 껴서
하씨 집안을 우리가 같이 세우자고 얘기합니다.
여기서 하씨 집안이란 물론 하느님 하씨의 집안이라는 것이고,
우리 인간 혈육의 성은 버리고 하느님의 성을 가지자는 거지요.
왜 오늘 이런 생각을 하게 됐냐면
오늘 독서에서 늘그막의 다윗이 자기 궁전을 화려하게 짓고
하느님께 죄송하여 성전을 하느님께도 지어드리겠다고 하니
하느님께서는 성전을 짓는 것은 그만 두라고,
오히려 당신이 그 후손을 통해 다윗 집안을 다시 일으키실 거라고
다윗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다윗이 성전을 지어드리겠다는 것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지으려면 제대로 지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다미아노 십자가의 주님께서 당신의 집을 고치라는 말씀을
프란치스코가 건물 성전을 고치라는 줄 알고 아시시에 있는 세 성당을 고쳤는데
주님께서 실제로 고치길 원하신 것은
건물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였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다윗과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성당을 잘 지어 거기에 당신을 처박아 놓고
우리는 우리끼리 우리 궁전에서 희희낙락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안이 바로 당신의 성전이 되길 바라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집안이 하느님의 성전이 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하느님 모시기입니다.
나와 우리 집, 우리 공동체에 하느님 모시기입니다.
먼저 내 안에 하느님 모시기입니다.
그리되면 하느님은 내 밖의 건물 성전이 아니라
내 안의 <나>라는 성전에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주님의 성전이 되기 위해 이 대림절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성전정화인데 구체적으로는 고백성사이고, 고백성사를 보지 않더라도
내 안에서 미움이니 분노니 시기 질투와 같은 악감정들을 몰아내고
근심이나 걱정 같은 쓰레기도 비워버리는 것입니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빈 구유 만들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관은 만원이어서 주님 모실 공간이 없었고
그래서 비어있는 외양간의 구유에서 주님 태어나셨는데
우리 안도 다른 것들로 만원이라면 이 대림 시기에 빈 구유로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나 개인이 하느님 성전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가정과 공동체가 하느님 성전이 되는 것,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실 분, 곧 예수님은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넘어 집안입니다.
당신 집안을 다시 일으키시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뜻입니다.
이렇게 오시겠다는 주님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뻔합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종종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 집에 모셔들이는 것을 잊고 우리끼리 삽니다.
주님은 성당에 모셔두고 우리 집에선 우리끼리 살고 우리끼리 놀러 갑니다.
모든 결정을 독단으로 하거나 같이 하더라도 주님 빼놓고 우리끼리 합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우리 집의 주인은 나이거나 우리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집이 하씨 집안이 되기를 바라고 노력해야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