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인과의 대화│김병모(고려문화재연구원 원장)
허황옥의 차가 四川省을 거쳐
金海로 들어왔다
최석환(본지 발행인)
김병모 교수에게 트레이드마크처럼 따라 다니는 것은 허황옥의 그림자였다. 30년 전 허황옥의 능비에 새겨진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의 비밀을 화두처럼 끌어안고 살았다. 그 결실은 14년 전 사천성 안악을 탐방하면서 극적으로 풀렸다. 지난해에는 안악에서 후한 때 금석문인 「神井記」에 '보주허여황옥(普州許女黃玉)'이 새겨진 명문을 발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게다가 허황옥이 김해로 시집올 때 차씨앗까지 가져왔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김병모(金秉模), 그는 무한한 상상력을 지닌 학자였다. 인류학자이면서도 사물을 직관적으로 파헤쳐보려는 저널리스트적 시각이 앞서 있었다. 14년 전인 1991년 그가 한 신문에 허황후가 인도에서 직접 김해로 온 것이 아니라 중국 사천성(四川省) 안악(安岳)을 통해 김해로 들어왔다는 학설을 내놓자 일파만파로 번졌다. 그는 김수로왕의 후예로 허황옥의 능비(陵碑)에 있는 '普州太后'라는 실마리를 추적하면서 처음 인도 지역을 샅샅이 뒤지다가 '보주(普州)'라는 지명이 인도에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뒤 중국의 고지도를 뒤지다가 사천 안악 지역에 보주라는 지명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뒤 사천성을 직접 찾아 허씨 집성촌을 찾아내고 허황후가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김해로 들어온 경로를 밝혀내기에 이르렀다.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김 교수는 허씨족의 원류를 밝혀주는 후한(後漢) 때의 금석문(金石文)인 「신정기(神井記)」에서 허여왕옥(許女王玉)을 찾아내는 개가를 얻었다. 학계의 시각 또한 제각각이었다. 허황후가 인도에서 직접 들어왔다는 설과 중국을 거쳐 왔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칸슈는 최근 출간한 저서에서 허황후가 인도에서 직접 김해로 왔다는 설을 펴고 있다. 그러나 최근 중국 사천성 아안시 정부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허황후가 김해로 갈 때 차까지 가져갔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해오기로 김해 백월산에 죽로차가 있는데,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로부터 직접 가져 온 차종자라는 전설이 있는데 그 설을 뒷받침할 만한 사료가 없다는 것이 학계의 시각이다. 그런데 최근 차연구가 중의 한 사람이 백월산이 김해 금강사 유지라는 사실을 들고 나왔다. 그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가야차가 전면에 부각된 이상 허황옥이 인도에서 김해로 시집올 때 사천을 거쳐 김해로 왔다는 주장을 해 온 인류학자인 김병모 교수를 만나 허황후를 연구하게 된 동기와 열정을 듣고자 독립문 근처에 있는 고려문화재연구원장실에서 만났다. 김 교수와 인연이 깊은 인류학자인 박정진 씨가 가세하여 한층 분위기를 이끌었다. 김 교수는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93~95년 한국고고학 회장을 지냈고 근년까지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을 거쳐 지난해에는 세계박물관대회 공동조직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에는 한양대 문화인류학 교수와 고려문화재연구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우리 역사 밝히기에 앞장서 오고 있다. 『금관의 비밀』과 『김수로왕의 혼인길』 등의 저서를 냈고 허황후가 중국 사천성을 통해 김해로 들어왔다는 가설을 밝힌 연구가로 그가 밝혀낸 지 15년이 지난 오늘 그의 생각과 사상을 되짚어 본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13년 전에 허황옥이 사천성에서 김해로 들어왔다는 역사의 실마리를 밝힌 이래 처음이지요. 허황옥이 가야로 시집올 때 인도에서 직접 온 것이 아니라 사천을 거쳐 김해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밝히게 된 계기는 어디에서 출발했습니까. 김해시에 있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허황옥(許黃玉)의 능비에 '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陵' 이라는 글이 있는데 그 중 '普州太后'라는 부분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러면 그 '보주'가 어디인가 곰곰이 생각했지요. 처음 인도 어디엔가 있겠지 생각 끝에 인도 지도를 놓고 샅샅이 뒤졌지만 허사였습니다. 그 다음 중국 고지도를 놓고 단번에 보주를 찾아냈습니다. 그 지역이 오늘날 사천성(四川省) 안악(安岳) 지역임을 밝혀내고 당시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92년 섬서성 국립섬서박물관 개관식 때 역사학자 나철문의 천거로 어렵사리 사천을 찾게 되었습니다.
사천성 안악은 보주의 옛 지명이었지요. 보주(普州)는 중국 사천성 안악 지방의 옛 이름이며 허황옥(許黃玉)은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馱國)에서 살다가 중국 사천 지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후예로 당시 중국에 존재했던 허황옥이 이주해서 살았던 땅 지명을 능비에 그대로 사용했었다는 데서 그 실마리를 풀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안악 지역을 답사한 결과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허씨 성을 가진 집성촌과 그 지역에 아직도 있는 보주여관이라든지 보주상점(普州商店) 등 보주라는 지명을 그대로 볼 수가 있었던 점이지요.
당시 보주 땅에는 정부군과 맞선 농민 봉기가 일어났었지요. 그렇습니다. 후한정부군에 맞선 토착인들의 봉기가 두 차례(서기 47년과 101년) 있었고, 그 민중봉기의 주동자가 허성(許聖)이라는 인물이라고 후한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사천성 안악에서 허씨 집성촌도 발견하지 않습니까. 허영선(許永宣) 이라는 족장(族長)을 만났는데 이 동네의 원래 이름은 허가압원(許家鴨原)으로 허씨들이 살고 오리가 놀던 언덕이란 뜻입니다. 안악 지역이 허씨 집성촌이었는데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강제로 해산되어 뿔뿔이 흩어진 사실을 발견했지요.
그 뒤 계속 허씨 원류를 밝히는 작업을 늦추지 않았지요. 그뒤 놀라운 성과는 허씨족의 원류를 밝히는 중요한 사료로 후한 때의 금석문인 「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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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수는 허황옥이 사천에서 김해로 들어올 때 차씨까지 가져왔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 기(神井記)」에 '허여황옥(許女黃玉)' 이라고 쓴 명문이 나왔었지요.
최근 사천성에서 허황옥이 김해로 들어갈 때 차를 가져갔었다는 문제제기가 이루어졌습니다. 허황옥은 서기 48년 배를 타고 가락국에 도착했는데 배에는 20여 명과 함께 결혼예물도 실려 있었는데 그 결혼예물 중에 차가 들어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특히 허황옥 보다 늦게 도착한 그의 오빠 장유화상이 출가한 뒤 가락국의 차문화 전파에 기여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김해 허씨의 시원은 허황후로부터 비롯되지 않았습니까. 수로왕이 사성(賜姓)한 허황옥의 자손은 김해 허씨의 조상이 되었고 김해 허씨와 김해 김씨는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고 믿기에 2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혼인을 하지 않습니다.
김수로왕의 후손들은 혼란스러울 것 같습니다. 교수님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김해 김씨 후손들이 아유타국에 기념비를 세워 허황옥의 고향이 아유타국임은 변함이 없지만 그러나 아유타국에 살다간 사천성 보주 지역으로 이주한 사실도 인정합니다.
2002년 안악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보주태후연구회가 결성되었다지요. 2002년 결성된 뒤 보주태후(普州太后)연구회의 역사연구가 등 6명이 김해시의 송은복 시장을 예방하고 수로왕릉과 허황후비의 능을 참배하고 돌아갔었지요. 그때 글씨 한 폭을 써서 내게 주었습니다. '천년의 그 은덕 향기 되어 흐르네. 수천 년간 감감했던 조상의 뿌리 찾기 두 마리 물고기가 태고를 이었고 황후 한 분이 대양을 건넜다네' 지금까지 허황옥의 이동경로에 대해서만 국한하여 연구해왔습니다. 그런데 허황옥이 김해로 들어올 때 배에 실은 결혼예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던 차에 지난 9월 사천 아안에서 개최된 국제차문화절 행사 중에 사천성 아안시 부시장이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허황옥이 김해로 들어갈 때 차를 가져갔다는 선언을 해 허황옥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지난해 운남성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루트가 차마고도라고 들은 바 있습니다. 차마고도는 잘 알다시피 차와 소금을 실어 나른 길입니다. 허황옥이 김해로 시집올 때 가져 온 결혼예물 중에 단연 차가 있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마치 허황옥이 김해로 온 신행길은 중국이 차마고도를 통해 차가 실크로드를 거쳐 구라파로 전파되는 경로를 연상케 됩니다.
수로왕의 17대 손인 갱세가 661년 조정의 명을 받고 가락국의 시조 묘에 제사할 때 제물 중 차를 올린 기록이 나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허황옥의 오빠 장유화상이 김해로 들어온 뒤 출가하여 차를 전파했다고 봅니다. 아무튼 지금까지 허황옥이 사천에서 김해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밝혀왔으나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허황옥이 차를 전파한 사실은 허황옥의 연구에 새로운 발판이 마련될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
지금까지 가야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들이나 그 여인의 후손들인 김해 김씨나 김해 허씨 문중 어느 누구도 김병모 교수가 주장한 허황옥의 이동경로를 추적해보지 못했다. 김 교수가 1961년 풀었던 허황후릉비의 '보주태후'라는 글의 실마리를 30년 뒤에서야 풀 수 있었던 것은 학문적 개가가 아닐 수 없다. 인류학자 박정진 씨는 김병모의 그런 열정은 인류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허황옥릉비에 새긴 보주태후라는 뿌리를 밝히는 작업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가야차의 시작이 허황옥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뿌리가 사천을 경유, 김해로 들어왔다는 사실과 가야차, 죽로차, 장군차로 각인되는 다시 부는 장군차 바람에 2000년 전 우리 앞에 온 허황옥이 뚜렷이 각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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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병모 (고려문화재연구원) 원장은 오래전부터 위와 같이 주장한 학자입니다.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비(妃) 허황옥(許黃玉, 33년?~189년)은 본래(本來) 인도(印度)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公主)로서, 배를 타고 가야(伽倻)에 왔다고 알려져 있으며, 인도(印度)와 배(船舶)라는 낱말이 함께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녀는 해양세력(海洋勢力)의 일족(一族)이라고 생각됩니다.
인도(印度)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은 당시의 태국(泰國)에도 식민지(植民地)를 구축(構築)하였다고 합니다.
오래전에 김병모 (고려문화재연구원) 원장은, 허황옥(許黃玉)이 인도(印度)를 떠나 태국(泰國)을 거쳐 중국대륙(中國大陸) 사천성(四川省)의 보주(普州)로 이주(移住)한 후 가야(伽倻)에 도래(渡來)한 것으로 추정(推定)하였습니다.
"허황옥(許黃玉)은 인도(印度)에서 직접 가야(伽倻)로 왔다"는 기존의 학설과 좀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차(茶)의 전래(傳來)를 근거(根據)로 하는데, 인도(印度) 동북부(東北部)의 아삼(Assam)은 차(茶)의 생산지(生産地)이고, 중국대륙(中國大陸)의 사천성(四川省) 및 운남성(雲南省)은 차(茶)의 발상지(發祥地)라고 하며, 허황옥(許黃玉)이 가져온 차(茶)는 중국대륙(中國大陸)의 것이라고 합니다.
아유타국은 현 인도가 아니며, 허황옥은 인도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해양세력 일족도 아님니다. 해양세력을 이야기는 "돌배"에 대한 전설을 모르고 떠드는 이야기입니다. . "신정비"에서 "보주"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있지 인도, 태국을 걸쳤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율곤 이중제 선생님의 가야에 대한 저술이 있습니다. 일단 읽어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됨니다.
박자우 선생님은 후한(後漢) 때의 금석문(金石文)인 "신정기"(神井記)를 결정적 증거라고 믿으시는 모양입니다.
'아유타국'은 지금의 '인도'가 아니었다고 박 선생님이 주장하셨으므로, 관련 자료를 소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유타국'이 가공의 존재가 아니라면, 그 위치를 어디로 비정하실 수 있습니까? 궁금하군요...
"신정기"(神井記)에 따르면, 허황옥(許黃玉)의 할아버지(祖父)가 보주(普州) 땅에서 태어났으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의 후손인 허황옥(許黃玉) 또한 보주(普州)에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묘년'에 기근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고향 곧 보주(普州) 땅을 떠나게 되었으나, 허황옥(許黃玉)의 증조부(曾祖父)는 증조모(曾祖母)가 조부(祖父)를 출산할 때가 임박하였기 때문에 그들과 동행하지 못하였다고 "신정기"(神井記)에 나옵니다. 결국, 허황옥(許黃玉) 일가(一家)는 보주(普州) 땅에 살아남아 '허씨족'(許氏族)의 대를 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신정기"(神井記)의 내용을 100% 믿는다면, 허황옥(許黃玉)이 인도(印度)에서 출발하여 다른 곳을 경유하지 않고 바닷길을 이용하여 직접 가야(伽倻)로 왔다는 이야기는 틀린 것이 됩니다. 그런데, 김병모 (고려문화재연구원) 원장은 허황옥(許黃玉)이 보주(普州)에서 태어났지만, 허황옥(許黃玉) 가계(家系)의 고향(故鄕)은 인도(印度)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이었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허씨족'(許氏族)은 태국(泰國)을 제외하고 인도(印度)를 출발하여 보주(普州)를 지나서 가야(伽倻)에 도래한 것이 됩니다. (김병모 원장의 기존 학설이 다소 변경된 것 같습니다. "신정기" 때문인가요?)
일반적으로, 남방(南方) 계통의 도래인(渡來人)들은 대개 해양세력(海洋勢力)의 일족(一族)이라고 보입니다. 허황옥(許黃玉) 가계(家系)의 경우, 북방(北方) 계통의 도래인(渡來人)들은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되므로, 해양세력(海洋勢力)과의 연관성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고 보입니다. "돌배"에 관한 전설을 모르고 떠드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만, 향후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i)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딸 묘견(妙見) 공주(公主)와 그녀의 남동생 선견(仙見) 왕자(王子)는 왜국(倭國)의 히메-히코(姬-彦) 제도(制度)와 관계가 있고, ii)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의 왜(倭)에 관한 기록(記錄)에도 나오는 야마토(邪馬壹; 邪馬臺)의 히미코(卑彌呼; 비미호) 여왕(女王)과도 관계가 있으며, iii) 가야(伽倻)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자손(子孫) 대부분(大部分)이 왜국(倭國)에 진출(進出)한 것으로 보이므로, 허황옥(許黃玉) 가계(家系)는 매우 중요한 '연구 대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가야(伽倻)는 태양신(太陽神) 숭배(崇拜)와 관계가 깊습니다. 야마토(邪馬壹; 邪馬臺)의 히미코(卑彌呼; 비미호) 여왕(女王)의 '귀도'(鬼道) 또한 "고대(古代) 샤머니즘"이기 때문에 태양신(太陽神) 숭배(崇拜)와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박용숙 교수의 책 <샤먼 제국>을 참고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태양신(太陽神)과 고대(古代) 샤머니즘"에 관한 내용은 박용숙 교수의 '핵심 이론'이기도 합니다.
[원문] 其國本亦以男子爲王, 住七八十年, <倭國>亂, 相攻伐歷年, 乃共立一女子爲王, 名曰<卑彌呼>, 事鬼道, 能惑衆, 年已長大, 無夫壻, 有男弟佐治國. 自爲王以來, 少有見者. 以婢千人自侍, 唯有男子一人給飮食, 傳辭出入. 居處宮室樓觀, 城柵嚴設, 常有人持兵守衛.
<三國志 魏書 東夷傳 倭>
[번역문] 그 나라는 본래 역시 남자가 왕이었다. 칠팔십년후에 '왜국'에 난이 있어 서로 공격하고 벌하며 지내다가 함께 여자를 왕으로 세웠다. 일명 '비미호'(히미코)로 귀신을 부리고 능히 백성을 미혹게 하여 이미 성인인데도 남편이 없다. 남자 동생이 있어 나라 다스림을 도왔다. 왕으로써 왔는데 보았다는 사람은 적다. 여자종 수천이 시중드는데도 오직 남자 한명이 음식을 대고, 나고들면서 말을 전한다. 거처하는 궁실과 누각과 성책은 엄하게 만들었고, 항상 병사로써 지키고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
김홍필 선생님은 댓글이 너무 길군요
제 댓글이 길어서 죄송합니다. 제 의견과 관련 자료를 첨부하니까 부득이하게 댓글이 길어졌습니다. 박자우 선생님의 이번 글에 관심이 많아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는 관심이 없으면 아무런 흔적(글)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댓글이 길면 무슨 큰 문제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