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의 안쪽을 걸어요 (외 1편) 정상미 소설을 읽는 밤 잠깐 달래고 가는 게 어때요? 종이의 감정을 따라가면 그들의 처음이 궁금해져요 종이가 활자를 입고 더러 그림을 걸치고 윙크를 날리면 먼 곳의 나무 향이 걸어나와요 종이나라로 가는 길은 보루네오 열대우림행 티켓이 필요해요 입국장에 들어서면 나이테 세관원이 동그란 미소로 맞아줍니다 그녀의 얼굴엔 늘 물기가 묻어 있어요. 꼼꼼하게 짐을 검사하는 이는 커다란 나무에 말 가웃 거름을 보태던 코끼리 총각이죠 그는 기다란 코로 짐들을 뒤적뒤적 간간이 코울음을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아요 친절한 원숭이 기사는 택시를 몰며 저 나무가 자기 집이라 자랑하죠 우림으로 가는 길은 몰이해로 질척거리죠 햇빛의 옹이가 간신히 우림의 정문을 찾아가요 그때 비단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방문객들을 맞이하죠 그의 혀는 반가울 때 갈라져요 책을 읽다가 보루네오국을 들락거릴 때 나무의 속살이 만져집니다 간지럽다고 종이의 눈이 까르르, 누웠던 소설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어요 ㅡ계간 《시인시대》 2024년 여름호
—계간 《정형시학》 2024년 여름호 ------------------------- 정상미 / 본명 정명숙. 1963년 문경 출생. 영남대 가정관리학과 졸업. 방송통신대 국문학과⸳중문학과 졸업. 2013년 《대구문학》 시, 202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조집 『안개의 공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