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유신의 심장을 쏘아 박정희 18년 군사독재 정권 폭압통치를 끝장나게 만든 결심의 동기는 부마항쟁이었다. 1979년 10월 당시 부산 최대 번화가였던 광복동과 중앙동,남포동,일대는 대학생이 중심이 된 시위대와 진압경찰간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시위현장은 시위대에 의해 뒤집힌 승용차와 경찰버스가 여기저기 불에 타고 있었고 길바닥은 시위대가 던진 돌멩이와 보도블록 조각들이 무수히 널려 있었으며 경찰이 발사한 최루가스로 인해 숨을 제대로 쉴수 없을 정도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학생들은 수백명 단위로 시위대를 편성하여 한쪽 시위대가 경찰에 밀리면 다른 시위대가 타방향에서 경찰의 허를 찔러 기습 진출하는 식으로 성동격서, 양동작전식 두뇌플레이로 경찰을 골탕먹였다.
대규모 시위대가 전례없는 전술로 밀어부치는 바람에 경찰이 진압능력을 상실하면서 시위현장 일대가 무법천지로 변하게 되자 군병력 투입을 결정하게 되었고 이때 진압군으로 동원된 부대가 특전사 예하 제3공수 특전여단이었다. 시위현장에 투입된 3공수 여단병력은 시위대를 닥치는대로 곤봉으로 두들겨 패고 체포하여 주둔지인 동아대로 압송하여 또다시 호된 물리적 폭력을 가하였다.
시위대 진압작전과 동시 3공수 여단은 M16소총에 대검을 착검시킨 병력을 군용트럭에 6~7명씩 탑승시켜 좌.우.양측을 향해 소총을 겨눈 사주경계 자세로 위치시키고 운전석 지붕위에는 M60 기관총을 전방을 향해 사격자세로 배치한 상태로 부산시내 전역을 무차별식으로 질주하는 순찰식 무력시위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전술을 구사, 부마항쟁을 조기에 진압하였다.
정권의 지지기반이었던 부산, 마산지역에서의 예상치 못한 뒤통수 맞기식 민주화 시위로 정권붕괴 위기로 치달을뻔 했던 부마항쟁을 3공수여단이 성공적으로 봉쇄, 박정희 정권을 수호하는 대공을 세운 것이다.
질서유지 아닌 정권장악 위한 광주학살
3공수여단이 군사 독재정권 수호용으로 부마항쟁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다면 6개월후인 1980년 5월 광주출동은 신군사 독재정권 창출용으로 투입되었다는 점이다. 김재규 전 중정 부장에 의해 박정희정권이 무너지면서 권력공백이 발생하자 당시 군사정권을 떠받치던 2대 권력기관으로 중앙정보부와 경쟁관계에 있으면서 국가주요 정보를 장악하고 있던 보안사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검,경 수사기관으로 구성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전담 합동수사 본부를 이끌면서 권력의 핵으로 등장, 권력구도가 급변하게 되었다.
보안사가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된데는 위관장교 시절부터 정치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회'라는 파벌을 구축,보직과 진급을 독식하는등 출세가도를 달려온 대표적인 정치군인 전두환 보안사령관겸 합동수사 본부장과 추종세력의 권력욕도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대통령시해사건 수사를 빌미로 권력장악의 걸림돌인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참총장을 12.12군사반란으로 제거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국정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하였다.이들 신군부 세력은 12.12군사반란 이후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준비한 시나리오에 의거 민주정부 수립을 통한 정권장악을 목표로 정국 주도권 잡기에 올인하던 주요정치인과 정파를 제거한후 정권을 탈취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지능적으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적극 방조 내지는 부추켰다.
마침내 서울소재 대학생 10여만명이 참가한 연합시위가 서울역을 중심으로 도심을 마비시킬 정도로 격화되고 광주를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까지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등 '민주화의 봄' 이 전국적인 양상을 띠면서 국민들 사이에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신군부가 노리던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신군부 세력은 정권을 장악할 결정적 호기가 도래되었다고 판단하고 민주화의 상징적 존재이자 정권장악의 최대걸림돌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5월17일 국가전복및 내란음모 수괴로 전격 구속하고 집회,시위등 모든 정치활동을 전면 금지시켰다. 박정희 군사정권 몰락으로 태동한 민주화의 봄을 맞아 1400여년 동안 되풀이 되어온 소외와 차별로 쌓인 한과 설움을 김대중정권 탄생으로 풀어보려던 호남인들에게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속은 일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호남의 한을 풀어줄 메시아로 여겼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속으로 인한 좌절과 절망, 분노는 민주화 요구로 폭발하였다. 계엄군을 동원한 공포 분위기 조성으로 민주화 열풍이 하루 아침에 실종된 타지역과 달리 호남지역은 오히려 항쟁 양상을 띠며 급속하게 확산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전남대, 조선대 등 대학생 중심으로 전개되던 민주화 시위가 점점 시민들 사이에 동참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심상찮은 양상을 띠자 신군부는 부마항쟁 진압으로 폭력성을 갈고 닦은 3공수 여단을 질서유지 명분을 내세워 광주에 긴급 투입하였다.
신군부는 부마항쟁 진압식으로 두들겨패고 무력시위를 하면 곧 평정될 것으로 판단하였지만 구국투쟁의 본고장인 호남이 부산과 다르다는 점을 미처 깨닫지 못한 패착이었다. 곤봉과 군홧발을 이용한 무자비한 구타와 폭력등 초강경진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음을 불사한 항전으로 맞서면서 부상자가 속출하자 의분을 참지못한 광주시민들이 대거 민주화 대열에 동참,광주시 전역은 순식간에 민주항쟁의 성지로 돌변하였다.
물리적 폭력만으로는 사태를 수습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자 광주민중 항쟁을 진압하지 못할경우 전국확산은 불을보듯 뻔하고 만약 전국적 항쟁으로 사태가 악화될 경우 정권 탈취는 고사하고 국민적 단죄를 피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발동, 발포명령 하달과 함께 20기계화 보병사단등 추가 병력을 증파하기에 이르렀고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어 초토화시키는 것으로 화려한 휴가를 즐기도록 명령하였다.
신군부의 발포명령에 따라 전개된 진압군의 무자비한 살육극에 맞서 광주시민들도 시민군을 조직하여 무력항쟁을 벌였지만 그러나 전투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도청전투에서 분패함으로써 10여일에 걸친 광주민중 항쟁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5.18 민중항쟁 정신 부정, 모독 망동 없어야
비록 광주민중항쟁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무자비한 무력진압으로 미완에 그치긴 하였지만 광주민중 항쟁은 반민주 독재권력으로 부터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항거한 숭고한 민주정신으로 계승발전 되고 있다. 광주학살 책임자였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국민적,사법적 단죄를 받았으며 당시 항쟁에 참여하였던 시민들에 대한 국가유공자 지정, 전.사상자에 대한 국가배상, 국립묘지 조성 등 5.18 광주 민중항쟁을 국가적 차원에서 역사적인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런데 요즈음 5.18 광주 민중항쟁을 두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소위 5.18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자임하는 열린우리당의 인권위원장으로 재임했던 이원영의원이 5.18 광주민중항쟁을 부정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이원영의원의 망언은 실언유무를 떠나 참으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이원영 의원은 5월12일 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 장성민 입니다.'에 출연하여 "광주사태에 군이 개입했던 것은 질서유지 차원에서 개입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그런경우로 본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는 이어 "광주는 직접적인 질서유지를 목적으로 바로 투입된 것이고 평택은 군사시설 보호를 위해 군인이 들어간 것으로 조금씩 다르다"고 말함으로써 재차 광주민중항쟁 진압군이 그동안 신군부세력이 줄기차게 내세웠던 폭력시위로 무너진 질서를 회복 시키기 위해 출동했다는 주장을 인정하는 망언을 자행한 것이다.
이원영 의원은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인 '민변'의 부회장을 역임하고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 100인 서명운동에 동참하였으며 집권당의 인권위원장을 맡고 있는 대표적인 민주개혁성향 정치인이다.그러한 그가 광주영령을 모독하고 5.18정신을 부정하는 광주학살 합리화 망언을 내뱉을수 있는 것인지 표리부동하고 천박한 역사인식에 경악을 금치않을 수 없다.
망언 파문이 일파만파로 확산되자 당사자인 이원영 의원이 광주로 내려가 사죄 기자회견을 하고 당대변인의 공식사과,인권위원장직 박탈및 당윤리위원회 회부등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호남민중의 가슴에 남긴 앙금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것 같다. 이원영 의원의 해명마따나 경솔한 실언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실언이라 할지라도 공당의 주요 당직을 맡고 있는 주요인사의 국민화합,역사적 문제와 관련한 말한마디 한마디는 사회적 파문을 불러 일으키고 국민화합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십분고려하여 신중에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특히 한국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고귀한 민중항쟁으로 역사적 차원에서 정리가 되었고 민주적 시대정신으로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 사안을 부정하는 망언은 선거의 유불리를 떠나 본질적인 차원의 문제임을 명심하여 향후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정치권은 물론이고 국민 모두의 관심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첫댓글 그러니 61년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죽일넘입니다..박정희가 없었으면 전두환도 없었을 터이니까요..박정희는 516번을 죽고, 전두환은 518번을 죽어도 민족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ㅠㅠ
그 사람 정신없는 말을 해가지고 가뜩이나 고전하고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