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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1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아가 2,8-14
복 음 : 루카 1,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시간이 날 때마다 직접 운전을 해서 국내 성지순례를 다니고 있습니다.
새벽 3~4시에 출발해서 순례합니다.
성지에 사는 저이지만, 성지순례를 통해 얻는 은총이 너무 커서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벌써 3번째 완주를 앞두고 있습니다.
(성지순례 책자를 보면 현재 우리나라의 성지는 167곳으로 나옵니다).
언젠가 춘천교구 지역을 순례하다가 어느 순례객을 만났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게
“신부님! 어느 성지가 제일 좋으셨어요? 신부님 계시는 갑곶성지는 빼고요.”라고 물으십니다.
잠시 생각하다가 인상 깊었던 어느 성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곳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잖아요.”라고 하십니다.
맞습니다. 지금 한창 성지개발 중이라 아무것도, 심지어 성당도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이곳에 대한 인상이 깊습니다.
예전 갑곶성지의 초창기 때의 모습도 생각나고,
이곳의 미래를 상상하다 보니 계속해서 기억에 남습니다.
성지는 ‘좋다, 나쁘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억나는 곳은 화려한 곳도 볼거리가 많은 곳도 아니었습니다.
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곳입니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곳은 겸손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볼 것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 어떤 곳보다도 감동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단단하게 굳은 마음이 아닌,
말랑말랑하게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반깁니다. 단순히 사촌 동생으로서 성모님을 반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육화하신 메시아를 시편으로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소리로 외쳤다는 점은 그만큼 엘리사벳의 믿음이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믿음의 크기 때문일까요? 먼저 주님께서 겸손하게 다가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직접 주님과 함께 방문하신 겸손을
그의 마음은 주님을 알아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부드럽지만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알아 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해 경배의 노래, 찬미의 노래를 바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세상의 관점을 버려야 합니다.
가장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가운데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겸손을 바라볼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 그러나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오신 분에 대한 기쁨과 반가움으로 벅차올라 있고,
오시는 분에 대한 고대와 기다림, 간절함으로 마음 설레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아가는 노래합니다.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아가 2,8)
또 <복음 환호송>에서는 “어서 오소서. 주 하느님”하고 환호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44) 하고,
‘이미 오신 그분’을 맞이하여 뱃속에서 즐거워 뛰는 아기와 함께 기쁨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마리아의 “행복”을 선언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이는 “말씀” 안에 행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 안에 행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 안에 행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말씀이 왜 행복이 되는 것일까? 대체 무엇을 이루기에 행복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말씀이 구원을 이루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말씀에게도 복된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또 하나의 복을 노래합니다.
“당신의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그러니 마리아가 복된 것은 그녀의 태중의 아기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 아기가 구세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두를 믿으셨으니 행복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 안에서 이미 ‘행복’이 충만했습니다. 이를 두고 성 암브오시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엘리사벳은 잉태한 후에 성령으로 충만했고, 마리아는 잉태하기 전에 충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을 믿고 품으면, 진정 복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어머니”(루카 1,43)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요! 얼마나 벅찬 일인가요!
그렇습니다. 말씀이 잉태되면, 뱃속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교제하며 사귀고 친교를 이루며, 말씀이 오히려 품고 있는 우리를 양육할 것입니다.
우리를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노래가 되고, 기도가 되고, 삶이 되어 탄생할 것입니다.
산골을 찾아가는 노고가 되고, 섬김이 되고,
자신을 헌신하는 봉사가 되고, 사랑이 되어 피어오를 것입니다.
마침내 말씀은 삶이 되고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러려고 말씀은 우리 안에 잉태되십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 요한이 동생인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닦겠지만,
분명 예수님이 먼저 요한을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곧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나무 뒤에 숨은 아담을 하느님이 먼저 찾아와 부르시고,
미디안으로 도망가 있는 모세를 먼저 찾아와 부르시듯이,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어 부르시는 그분의 부르심을 반겨 맞아들이고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방문하시어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1)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
행복하십니다. 어머니!
경청만 하신 것이 아니라, 믿고 영접하셨으니 행복하십니다.
믿고 영접한 것만이 아니라, 순명하셨으니 행복하십니다.
순명한 것만이 아니라, 이루어지기를 희망하셨으니 행복하십니다.
오늘 제가 당신의 희망을 품고, 행복의 찬미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코로나19에 대해서 백신과 치료제는 방패와 창과 같습니다.
백신은 바이러스가 우리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예방하는 의미에서 방패와 같습니다.
치료제는 우리 몸에 들어와서 염증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내보낸다는 의미에서 창과 같습니다.
바이러스는 조기에 발견하고 치료하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이제 곧 치료제와 백신이 나온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치료제를 만드는 제약회사 관계자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국가적인 위기상황에서 기업은 공공재(公共財)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치료약을 만들면 국민들에게 원가에 제공한다고 하였습니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해야 하지만 국가적인 위기상황에서는 국민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국민이 없다면 기업도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치료제의 수출도 국가의 외교적인 판단과 함께 한다고 하였습니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해야 하지만 위기상황에서는
국가의 이익이 기업의 이익보다 먼저라고 하였습니다.
문득 악의 세력으로부터 우리의 신앙을 보호하는 방패와 창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사생활(聖事生活)은 우리를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방패와 같습니다.
세례성사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합니다. 지난날의 죄를 없애 줍니다.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습니다.
병자성사는 지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위로해 줍니다.
고백성사를 통하여 영적인 아픔을 치유하고 하느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성체성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의 몸과 마음을 성전(聖殿)이 되게 합니다.
혼인성사는 하느님의 축복 속에 성가정을 이루게 합니다.
신품성사는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울 봉사자를 선발하는 것입니다.
성사생활만 충실하게 하여도 우리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고백성사를 하기 전에 잘못을 성찰하고,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제가 주는 보속을 해야 합니다. 아플 때 약은 먹어야지 보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에 참례하기 전에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성이 없는 신앙은 광신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이성은 허무할 수 있습니다.
수덕생활(修德生活)은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창과 같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향주삼덕과 복음삼덕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악을 멀리하고, 희망으로 덕행을 실천하며, 사랑으로 선을 실천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악을 행하면 벌을 받을 것을 생각하여 악을 피하고,
희망으로 선을 행하면 상을 받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육신과 세상의 쾌락을 피할 것이며,
사랑으로 자신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열정을 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청빈은 마음과 정신 그리고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살아감으로써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 자유롭게 따를 수 있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며 완전한 나눔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정결은 모든 사람이 그 신분대로 지켜야 할 덕행이지만 특별히 수도자들은 정결 서원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독신을 서약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칩니다.
정결은 하느님과 배우자와 좋은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순명은 자기의 자유의사를 끊어 버리고 오직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교회 장상(어른)께 순명하는 것입니다.
수도자로서의 순명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보다 효과적인 단체 활동을 위해
장상들에게 적극 복종한다는 서약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악의 세력은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우리가 성사생활에 충실하고, 수덕생활을 한다면 우리 또한 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분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5)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루어져가는
믿음의 여정이다.
언제나 주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통해
당신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
행복은
정녕 무엇일까.
믿음이 행복이다.
믿음을 나누는 것이
행복이다.
믿음은
말씀으로 이어진다.
믿음 안에 행복이 있다.
성령 안에 행복이 있다.
하느님 안에 사는 행복이다.
행복은 퍼져나간다.
고통이 있기에
말씀을 찾고
말씀과 함께하기에
행복하다.
믿음은 순탄하지 않다.
고개를 넘는다.
가파르기에
하느님을 일깨워준다.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행복이다.
하느님의 뜻 안에
이루어지리라 믿는
성탄이다.
성숙한 믿음
성숙한 기다림이길 기도한다.
함께 하는 것이 믿음이다.
행복은
정녕 주님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나눔이다.
나눔과 만남
말씀과 행복은
삶 안에서 하나이다.
믿음이 되는 행복으로
초대하는 대림이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더 아름답다.
대림은 믿음이다.
인간관계를 내 마음대로 끊어도 되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내용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가만히 보면 인간관계가 매우 협소해 보입니다.
성경만 보면 성모님이 많은 사람과 교제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지만 그분이 친밀하게 교제한 분들은 손에 꼽을만합니다.
‘모든 사람의 친구는 누구의 친구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제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면 그 깊이가 줄어들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관계란 주님께서 정해주시는 것이긴 하지만,
관계를 끊는 것을 두려워해서 모든 사람과 연결되려고 하는 마음도 바꿔야 합니다.
그러다 누구와도 교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끊을 것은 끊고 맺을 것은 맺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관계가 주님께서 맺어주신 것이 아니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주님께서 맺어주셨다면 반드시 좋은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발전이 없다면 과감히 끊어야 합니다.
40세에 배우 오디션에 나가서 5등을 한 아직도 신인배우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우 허성태입니다.
그는 연봉 7천이 넘는 회사에서 8년을 일하다 결혼하고
6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배우의 길로 뛰어든 사람입니다.
회사의 생활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시장에서 장사하시며 2남 1녀를 잘 키워주신 어머니는 연신 걱정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해주었고 그것 때문에 결혼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늦은 나이에 시작한 연기자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았습니다.
갖은 단역을 거치며 별의별 아르바이트를 다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행복했습니다. 그가 뜨게 된 것은 김지운 감독의 영화 ‘밀정’입니다.
그 영화에서 송강호 씨에게 뺨을 맞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뺨을 맞으면서도 너무 행복했다고 합니다.
그가 존경하는 김지운 감독 밑에서
그가 사랑하는 배우 송강호 씨에게 뺨을 맞는 것은 오히려 영광이었습니다.
물론 아주 유명해진 것은 아니지만 이젠 어느 정도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습니다.
뺨을 맞으면서도 행복하다면 그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허성태 씨는 직장에서 하도 긴장하여 손에 땀이 흐르는 다한증까지 생겼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연봉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지금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행복하지 않다면 자신과 같은 용기를 내어보라고 말합니다.
[참조: “하고 싶은 걸 하세요”, ‘대기업을 관두고 맨땅에 헤딩을 하다’, 허성태, JTBC 말하는대로, 유튜브]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현실의 벽에 부딪힙니다.
자신의 꿈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투자한 것이 아까워서 계속 끌려 다니면서도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관계여서가 아니라 나의 집착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우선은 지금 다니는 직장이나, 혹은 지금 만나는 모든 사람이
다 주님께서 교제하라고 맺어주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과 다 결혼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한 사람만 혼인할 수 있도록 정해주십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그 이상의 선을 넘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관계를 정해주신다고 믿으면 그만큼 끊는 선도 확실해집니다.
그래서 관계를 끊지 못해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느 선에서 끊어야 하느냐인 것입니다.
그리고 끊거나 이어갈 사람을 어떻게 분별하느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겠습니다.
성모님은 그 귀한 시간에 엘리사벳에게 달려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엘리사벳에게 당신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늦은 나이에 아기를 잉태하여 기쁘기도 하겠지만 불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의 도우심이 필요한 곳으로 달려가셨습니다.
또한,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방문을 매우 감사해합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라며 황송해합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면 이렇게 상대를 높여주고 존중해주며 감사해합니다.
서로 행복해집니다. 성모님께서도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라시며
기쁨과 감사, 찬미를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이렇게 만남을 통해서 두 사람에게 성령의 열매가 함께 맺힌다면 이것만큼 좋은 관계는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행복입니다.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만남을 지속하거나 끊는 것은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열매도 맺지 못하는데 만나는 것은
내가 지닌 아주 조금의 성령의 힘도 열매 맺지 못하는 땅에 소진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지속하면 성령께 모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얼마만큼 기다려줘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가리옷 유다를 기다려 준 시간 정도는 노력을 하는 게 옳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3년은 가리옷 유다를 참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반대로 가는 그를 더는 버티지 못하시고 악으로 넘겨버리십니다.
이것은 잔인함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무의미하게 소진하지 않는 성령께 대한 존중입니다.
“아무리 문이 많아도 열리지 않으면 벽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3년 동안 열었는데 행복의 문이 열리지 않으면 그건 문이 아니라 벽입니다.
3년을 다녔는데 점점 더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주님께서 선택해주신 직장이 아닙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나 자녀와 같이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관계가 아니라면
그것에 모든 에너지를 소진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래 만났는데도 성령의 열매, 행복의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그래도 끊지 못하면 그건 나의 집착일 뿐입니다.
좋은 관계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서로 행복합니다.
하느님도 인간과 그런 관계를 맺으십니다.
물론 그분이 우리와 영원한 관계를 이어가시든지,
영원히 관계를 끊으시든지는 우리 각자의 죽음의 시간에 결정이 납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은 기다림과 기쁨에 관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아가 1,1)인 아가는 일종의 ‘사랑 노래 모음집’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독서는 구혼 시절을 회상하는 여인의 노래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두 연인은 만남을 기대하며 서로를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남자를 모르는 처녀로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신 마리아와,
그에 앞서 아이를 낳을 수 없었지만 같은 분의 힘으로
세례자 요한을 가진 엘리사벳이 인사를 나눕니다.
그 만남의 기쁨은 엘리사벳의 태 안의 아기가 뛰노는 즐거움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간절히 기다리던 만남이 이루어져 얻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이라면 그 기쁨은 더욱 크다는 것을 화답송의 시편이 잘 보여 줍니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불러라.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그분 안에서 우리 마음 기뻐하고, 거룩하신 그 이름 우리가 신뢰하네.”
주님 성탄을 앞둔 대림 시기의 막바지에서 구세주께서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아가의 표현처럼 구세주께서는 노루나 사슴처럼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십니다.
이처럼 사랑은 사람들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것을 이루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아기의 잉태와 두 어머니의 만남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구세주께서 오시는 것을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사랑은 행동을 촉진하는 힘입니다.
주님 성탄을 앞둔 우리 또한 어떤 역경 속에서도 오시는 분을 기쁘게 맞이하려면
힘차게 뛰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