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
신도시 들머리 분수공원 언덕바지에 노란 수선화 꽃이 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다. 햇병아리처럼 샛노란 개나리가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전령사였는데 어느 때부터 수선화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보인다. 수목원마냥 꽃나무가 많은 공원에서 딱 한군데 살구나무를 둘러싸고 수선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도 지난 가을 구근을 시범으로 한 곳에만 심어서 관찰하기로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먼저 자란 것들만 꽃을 피웠고 땅에서 싹을 막 내민 어린 것들도 보였다. 샛노란 꽃은 귀여우면서도 앙증맞은 느낌까지 준다.
작년 봄 첫 선을 보인 오륙도 수선화는 노란 물결로 쪽빛 바다와 어우러져 신비스런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때도 이미 코로나가 덮치고 있었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꽃을 배경으로 늘어선 풍광은 환자들이 집단으로 꽃밭에 들어선 것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생각으론 여름이 오면 코로나 바이러스도 바로 끝나겠지 했는데 상황은 더욱 고약하게 꼬이고 말았다. 수선화 뿌리를 캐내지 않았다면 찾는 사람이 없어도 오륙도 수선화는 금년에도 꽃을 피웠을 것이다. 이곳 살구나무 밑보다 40킬로미터나 남녘에 위치한 오륙도인지라 더 일찍 더욱 소담스러운 꽃망울을 터뜨렸을는지 모른다.
아파트 베란다에 군자란이 꽃을 피웠다. 저 홀로 꽃을 피워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군자란은 귀족처럼 보인다. 원산지가 남아프리카로 이름은 군자란이지만 난이 아닌 백합목 수선화과에 속한다. 군자란은 아파트에서 키우기에 적합한 편이다. 흙이 마를 때 한 번씩 물만 주면 되니 저절로 자라고 꽃을 피운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매년 이맘때면 어김없이 주황색 탐스런 꽃을 피우니 군자란이 핀 동안은 실내가 환한 느낌마저 든다. 금년엔 21송이 꽃이 복판에서부터 벌써 5일째 피고 있지만 아직 5송이는 봉오리채로 있다. 군자란은 꽃말 ‘고귀함’ ‘우아함’처럼 소담스럽고 귀티가 난다.
작년 오륙도를 찾았던 탐방객들 중엔 이상화 시인을 흉내 내어 ‘코로나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가 말하는 들판은 바로 해맞이공원에 조성된 수선화 꽃밭일 터였다. 오래 전 대구 달성공원에서 그 고장 출신인 시인의 시비를 만난 적이 있다. 조국 광복을 못보고 떠난 시인이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더욱 애잔하게 다가온다. 시인의 반일 민족의식엔 비탄과 허무, 저항과 애탄이 깔려 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겨 얼어붙어 있을망정 봄이 되면 민족혼이 담긴 국토 즉 조국의 대자연은 우리를 일깨워준다고 일갈했던 것. 국토는 일시적으로 빼앗겼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몸부림 즉 피압박 민족의 비애와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이 담겨 있는 시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해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조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여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습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대하소설 <토지>로 잘 알려진 박경리 작가는 생전에 끔찍이도 꽃을 사랑했다. 그가 사랑하는 꽃은 살아있는 꽃이었다. 그는 생전에 인간들이 꽃의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를 개탄했다. 결혼식장을 비롯한 각종 행사장에 등장하는 무수한 화환을 날카롭게 질타했다. 불과 반시간 길어봐야 두세 시간 보기 위해 생명을 죽이면서 엄청난 양의 스티로폼과 플라스틱 쓰레기까지 만들어 기후온난화를 부채질한다며 지구환경을 걱정했었다. 그 대안으로 지금부터라도 예전처럼 종이꽃인 조화를 만들어 쓰자고 했었다. 엄혹한 코로나 사태 하에서 생전의 작가가 걱정한 지구환경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