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천 변의 아름다운 정자 한벽당
이른 아침, 한벽당(寒碧堂)에 올라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윽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주천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흐르는 물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 너머로는 강 건너 남고산성이 보인다. 내가 나인가 자연이 나인가, 내가 나에게 자연이 나에게 묻는 시간. 아침 정자는 그런 곳이다.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 슬치재에서 비롯된 전주천은 고덕산 자락을 지나 색장동에서 전주시에 이른다. 중바우 아래를 지나며 휘돌아가는 벼랑에 한벽당(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이 자리 잡고 있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남원 광한루, 무주 한풍루와 함께 삼한(三寒)으로 꼽히는 이 정자는 이름의 ‘찰 한(寒)’에 ‘물이 너무 깊어 차가운 기운이 넘치는 곳’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예로부터 ‘한벽청연(寒碧晴讌)’이라 하여 완산팔경의 하나로 손꼽혔는데,《여지도서》에 실린 글을 보자.
관아의 남쪽 5리 성황산 서쪽 기슭에 있다. 깎아지른 듯이 서 있는 돌벼랑이 마치 떨어질 듯이 굽어보고 있으며, 대 아래에는 냇물이 흐른다. 고 참의 최담이 돌 모퉁이를 깎아내고 정자를 지었다.”
조선 태종 때 사람인 월당 최담은 직제학으로 있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했다. 두 아들인 연촌과 덕지도 아버지를 따라 이곳으로 왔다. 세 부자가 강호에서 지내자 사람들은 한나라 때 사람으로 놓은 벼슬을 하다가 “벼슬이 높고 이름을 떨치면 후회할 일이 있을까 한다”며 낙향했던 삼촌 소광과 소수에 비유하였다.
최담이 지은 이 정자의 처음 이름은 ‘월당루(月塘樓)’였다. 깎아 세운 듯한 암벽과 누정 밑을 흐르는 물을 ‘벽옥한류(碧玉寒流)’라고 묘사했는데, 훗날 그 글로 인하여 한벽당이라 바꾸었다. 1683년(숙종 9년)과 1733년(영조 9년)에 중수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1828년(순조 28년)에 완성되었다. 불규칙한 암반에 맞추어 높낮이가 다른 돌기둥으로 전면 기둥을 세우고, 뒤쪽은 마루 밑까지 축대를 쌓아 누각을 조성했다.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 초의선사, 면암 최익현 등의 유명 인사들이 시와 중수기로 찬양하였다. 최담의 15세 손인 최전구가 면암 최익현에게 부탁해 받은 <한벽당 중수기>에는 정자 일대의 풍경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1897년 이곳을 찾았던 최익현은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았던 최담의 행적을 더도 덜도 아니게 정확하게 표현하면서 지식인의 처세를 간파했다.
지금 전주부 향교에서 동쪽으로 가면 속탄 뒤에 숲이 우거져 상쾌한 곳이 있는데, 여기에 한벽당이라는 당이 있다. 이곳은 월담공이 평소에 거처하던 곳으로, 당의 서북쪽에 참의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 주자의 시에 ‘깎아 세운 푸른 모서리(削成蒼石稜)/찬 못에 비쳐 푸르도다(倒影寒潭碧)' 라는 시구가 있으니 한벽당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혹 여기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한다.
한벽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삼면이 개방되어 있고, 마루 주위에는 머름과 계자난간만이 둘려져 있다. 정자 난간에서 보면 전주천이 휘돌아가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고, 강 건너 남고산성이 눈 안에 가득 차며, 한벽당의 바로 동쪽에는 요월대(邀月臺)라는 작은 정자가 마치 하나의 건물인 듯 서 있다.
호남의 제일 도회지로다.
이 고을에서 가장 큰 고을이라
정자가 있는 곳은 장관을 이루고,
자연은 그윽한 향기를 머금었구나.
낮에 배를 띄워 저 달을 맞이하니,
난간에 내리는 비는 가을을 보내는구나.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은 이경여의 시 속에 남아 있는 한벽당에 세월을 덧붙이고 있고, 그 뒤편에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 나오는 전라선 폐철도 터널이 남아 수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2024년 11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