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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2 그들이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왔을 때 주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기도하는 동안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시더니 주께서는 몹시 놀라고 괴로워하기 시작하시더라.
34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혼이 너무 슬퍼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며 깨어 있으라.”고 하시고
35 앞으로 조금 가셔서 땅에 엎드리어 가능하다면 그 시간이 그에게서 지나가기를 기도하시며
36 말씀하시기를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시더라.
37 그리고 와서 그들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 참으로 영은 준비되어 있지만 육신이 연약하구나.”라고 하시더라.
39 그리고 다시 가서 기도하시는데 같은 말씀으로 말씀하시더라.
40 주께서 돌아와 그들이 다시 자고 있는 것을 보시니, (이는 그들의 눈이 무거움이라.) 그들은 주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더라.
41 주께서 세 번째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자고 쉬어라. 이제 다 되었고 그 시간이 왔느니라. 보라,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겨지느니라.
42 일어나서 가자. 보라, 나를 배반하는 자가 가까이 왔도다.”라고 하시더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마친 후 올리브 산으로 향했다(26절). 그 산의 아래쪽에는 "겟세마네라 하는 곳"(32절)이 있었다. 그 지명의 뜻은 "올리브 기름짜는 틀"이다. 겟세마네는 올리브 나무들이 자라는 동산이었다(요 18:1). 그 동산에는 올리브 열매가 익으면 기름을 짜는 틀이 있었다. 올리브 기름을 짜는 방식은 포도즙틀에서 포도주를 뽑아낼 때 사람들이 밟아대는 방식과는 다르다. 어떤 성경 사전이든 제대로 된 사전을 보면 올리브 기름을 어떻게 짜는지 나오는데 필요하면 확인해 보라. 이 의미는 곧 일어날 상황, 곧 그리스도께서 절망에 "짓눌리는" 상황과 매우 잘 부합되는데 주의 혼이 "눌려서" "죽을 지경"(34절)이 되시는 것이다. 주께서 기도하실 때 그의 혼이 압박을 받으심으로 "그의 땀이 큰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눅 22:44).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동산에 계신다(사 50:7-8). 그래서 바울은 고전 15:45; 롬 5:12-13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주 예수를 "마지막 아담"이라 부른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보면 인간의 두 가지 계보가 나오는데 하나는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아담 안"(고전 15:22 참고. 창 5장)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안에서 아무도 죽지 않은 "그리스도 안"이다. 마 1장과 눅 3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계보를 살펴보면 그 안에서 사망이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보에 등장하는 그 인물들이 실제로 죽었음을 알지만 그 말씀을 기록하신 성령의 의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살게 하려 함"(고전 15:22)이기에 그들의 죽음이 기록되지 않은 것이다.
32절로 돌아와서: "내가 기도하는 동안 여기 앉아 있으라." 이 지시는 열두 제자 가운데 여덟 명에게 하신 것이다. 유다는 다락방에 있을 때 그리스도를 배반하러 이미 떠났고 예수께서는 그의 "이너 서클"(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러 가신다(33절). 주께서는 모든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눅 22:40)고 말씀하셨다.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에게 하신 명령은 깨어서 기도하라는 것이었다(33-34, 37-38절).
주께서는 나머지 여덟 제자들에게 주님이 기도하는 동안 앉아 있으라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가셔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구약 성경에서 사람들은 서서 기도하곤 했고(왕상 8:22) 땅에 얼굴을 대고 기도하기도 했다(창 17:3; 민 16:22 참고. 마 26:39). 따라서 성경에는 기도의 "표준 자세" 같은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겸손과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벧전 5:6-7; 약 1:6).
33절: "주께서는 몹시 놀라고 괴로워하기 시작하시더라." 미국의 공립 학교 시스템이 성경을 배척하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모국어인 영어에 무지해졌는지를 알면 놀라울 정도이다. "Sore amazed"(몹시 놀라고)와 "very heavy"(괴로워하기) 같은 표현은 "고어체"가 아니다. 최소한 막 14:33의 문맥상에서 그 사전적 의미는 혼동될 것이 없다.
"Sore"는 여기서 부사형으로 쓰였다. 그것은 "심리적 고통을 겪는; 고뇌하는, 괴로워하는, 혹은 슬퍼하는"의 의미로서 이를테면 "sore at heart"(마음이 아프다) 같은 표현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다음 구절에서 보는 표현이 무엇인가? "내 혼이 너무 슬퍼 죽을 지경이니"(34절).
헬라어 숭상자들은 본문의 "amazed"(놀라고)라는 표현을 갖고 장광설을 늘어놓으면서 킹제임스 성경의 단어가 "이상하기에" 그들이 제시하는 "헬라어 원문"이 없으면 독자가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성경과 성경을 비교하여 성경 단어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도록 막아 놓으셨다. 성경에서는(미국 공립 학교 시스템에서 배출된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기들이 사용하는 현대 어법이 성경과 비교할 때 얼마나 비뚤어진 말투인지를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은 gay라는 단어의 원래 뜻이 happy인데도 그것을 성도착자들에 갖다 붙인다) amazement는 astonishment(1:22, 27)와, trembling은 fear(16:8; 출 15:15; 겔 32:10), 그리고 pain(사 13:8)과 연관된다.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고뇌"(눅 22:44) 속에 계신다.
물론 "very heavy"(괴로워하기)는 마음이 무겁다는 뜻인데 잠 12:25에도 "Heaviness"(근심)가 그런 뜻으로 나온다. "heavy heart"(마음이 우울한)(잠 25:20)이란 슬프고 비참하다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경우 그의 "혼"(34절)이 그랬고 그래서 "WEIGHED DOWN with grief"(슬픔에 짓눌리다) 같은 관용구가 있다. 이런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 "헬라어 원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그토록 슬퍼하셨는가, 또 왜 그는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셨는가(눅 22:44)? 주께서는 "그 시간이 그에게서 지나가기를"(35절) 기도하셨다. 어떤 "시간"을 뜻하는 것인가? 주의 죽음의 "시간"(요 2:4, 7:6, 30, 8:20, 12:23, 27, 13:1)이다. 어떤 죽음 말인가? 내가 한 가지 이야기하겠는데 그것은 주께서 겟세마네에서 당하시는 죽음이 아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실 육체적 죽음도 아니다. 주께서는 그 죽음은 기꺼이 당하셨다(히 12:2).
존 R. 라이스는 여러분에게 히 5:7을 제시하면서 그 "사망"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실 육체적 죽음이라 가르친다. 라이스는 겟세마네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앞둔 상황이기에 다음날 겪으실 죽음에 대해 기도하신 것이라 말한다. "친애하는 존 박사"의 말에 따르면 성부께서는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으셨"고 응답하셨다고 한다. 이것은 시종일관 사적 해석일 뿐인데 밥 존스 대학이 그에게 신문(주의 칼)을 팔 수 있도록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기에 "선하고 경건하며 헌신된 근본주의적" 복음 전도자로서 자기가 성경을 가르칠 실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의 주장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옮겨 주옵소서"라고 "아버지"께 요청한 그 "잔"이 주의 육체적 죽음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그 잔은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를 담은 잔이었다(욥 21:20; 시 11:6; 사 51:17, 22; 렘 25:15; 계 14:9-10, 16-19). 겟세마네에서 이 기도를 하시기 오래 전부터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그 잔을 마셔야 되는 시간으로부터 구해주시라고 기도드렸었다(요 12:27). 게다가 주께서는 결국 그 잔을 마시셨기에(요 18:11) 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거부"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벧전 2:24)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것"(고후 5:21)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는 마귀의 화신이 되신 것이다(요 3:14 참고. 계 12:9; 또한 시 22:6을 보라). 이 죽음은 그리스도에서 십자가에서 육체적으로 당하신 그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내 혼(My SOUL)이 너무 슬퍼 죽을 지경이니"(34절)와 관련된 것이었다. 사 53장 말미를 보라.
사 53:10 -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였기에 주께서 그를 고난에 두셨도다. 주께서 그의 혼을 속죄제물로 만드실 때...."
사 53:11 - "그가 자기 혼의 고통을 보고 만족하게 되리라...."
사 53:12 - "그가 자기의 혼을 부어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며, 또 그는 범죄자들과 더불어 헤아림을 받았으나 그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지며 범죄자들을 위하여 중보를 하였음이라."
세 번에 걸쳐 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죽음이 혼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을 계 20:14에서"둘째 사망"이라 불린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치워주시라고 기도하셨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셨지만 그 요청은 거부하셨다.
그런데 히 5:7에는 더 깊은 진리가 나온다. 알다시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죽음에서 면해주시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자기를 사망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라고 되어 있다. 내가 한 가지 묻겠는데 여러분은 "둘째 사망"이 얼마나 길 것이라 생각하는가? 여러분은 막 9:44, 46, 그리고 48절에서 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다.
"그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여러분이 혹시 지옥에 가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안식교도들의 가르침과 같은 "혼의 멸절"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형벌은 영원할 것이다(계 14:9-10). 여러분은 "소멸케 하시는 불"인 하나님의 진노 아래(히 12:29) 있게 될 것인데 그 기간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되신 것인가? 그가 여러분의 죄들을 위해 영원히 불에 타야 되었는가? 물론 아니다. 왜 차이가 생기는가? 여러분의 죄들을 위해 지옥불에 들어가 있는 죽은 구세주는 여러분에게 영생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롬 6:23)을 주시려면 주께서는 자신이 먼저 영원한 생명을 갖고 계셔야 한다(요일 5:11, 20). 따라서 창 1:1 이전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장차 들어올 죄들을 몸소 담당하시고 그것을 지옥에서 처리하겠다는 약속을 하셨는데(벧전 1:19-20; 계 13:8) 성자께서 성부 하나님과 약속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성자께서 그 일을 해내시면 그에게 "영원한 생명"(목회서신서 주석서에서 딛 1:2 주석을 보라)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 약속에는 그리스도의 "혼"이 "지옥"에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이 들어있으며(행 2:27) 그것은 부활을 예고하는 것이다(행 2:31).
따라서 겟세마네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기도가 들으신 바 된 것은 하나님께서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것에 대한 응답이었고 그것은 마귀가 겟세마네에서 주를 죽이려 했다던지 로마인들이 주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그 죽음에 대한 응답이 아니었다. 성부께서는 주를 지옥의 영원한 사망으로부터 건지셨고(계 1:18) 벌레의 형상으로 무너진 그리스도의 혼을 다시 사람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신 것이다(시 22:6 참고. 마가복음 주석서의 8:36과 9:44, 46, 48 주석을 보라).
36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성부를 "아바"라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아람어 표현이다. 신약 성경에는 이 표현이 세 번 나오는데 모두가 그 뒤에 "아버지"가 따라붙는다(막 14:36; 롬 8:15; 갈 4:6). 이 단어를 일반적으로 설명할 때 이것은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친밀한 표현이라 하는데 영어에서는 daddy에 해당될 수 있다. 내가 읽은 자료에 보면 많은 히브리어 학자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니다. '아바' 뒤에 나오는 헬라어 단어는 o pater - '아버지' 혹은 '내 아버지' - 이다". 즉 그들은 아람어/히브리어 단어 뒤에 히브리어 단어가 따라오면서 그 의미를 정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미국 남부 사람들 중 일부는 90대가 되어도(나처럼) 자기 아버지를 "아빠"라 부르곤 하고, 또 현대 히브리어 사용자들도 abba를 아빠의 뜻으로 쓴다.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놔두고라도 신약 성경에서 이 단어가 쓰이는 용례들은 이렇게 볼 수 있다:
1. 이 표현은 성자 하나님과 성부 사이에 개인적이고 친밀하게 부르는 호칭이었다.
2.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안에 들어오시면서(갈 4:6)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기에(롬 8:15) 여러분 또한 하나님을 그렇게 부를 권리가 있다.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에 속한 유대인의 경우와 달리(마 6:9에 나온 "우리 아버지"를 보라) 여러분은 개인적으로도 하나님과 부자 관계가 성립된다(요 14:20, 20:17).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오니." 여러분은 이 구문과 10:27 같은 구절을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적용함에 있어 유의해야 한다.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행하실 수 없는 어떤 일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히 6:18; 민 23:19; 딛 1:2) 것을 보라.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희생이 아닌 다른 경로로 세상 죄를 제거하실 수 없다(본문 36절). 내가 한 가지 더 말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다면 자녀의 자격을 부인하실 수 없다(딤후 2:13).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옵소서."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오신 또 하나의 이유가 나오는데(1:38 주석을 보라) 자신이 사람으로 오시기 이전에 주께서는 이 말씀을 하셨다(시 40:8 참고. 히 10:7-10). 본문은 예수께서 "고난받은 일들로 순종을 배워서"(히 5:8)를 설명하는 한 부분이다. 주께서는 "죽음에까지 순종하셨으니 십자가의 죽음에까지라"(빌 2:8). 주께서 그렇게 하셨기에 "온전하게 되심으로"(죄없음이 아닌 온전함, 완성된 구원) "영원한 구원의 근원"(히 5:9)이 되셨고 그로 인해 우리가 단번 희생제를 통해 거룩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히 10:10).
한번 기도하시고 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돌아오셨고 그들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셨다. 그때가 제자들이 저녁 만찬을 가진 후 늦은 밤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34절에서 그들에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심각하게 말씀하셨기에 그들은 깨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서도 문제 없이 잠에 빠지는 사람이었다. 행 12장에 보면 베드로는 자신의 처형이 다음 날로 잡힌 밤에 두 간수 사이에서 사슬에 매여 잠이 들었는데 그때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밤새 기도 모임을 갖고 있었다(행 12:5-6).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37절). 그럴 수 없었다. 그 제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준비가 되었다고 자랑했던 사람인데도(31절) 깨어 있어야 할 불침번 시간에 한 시간도 버티지 못했다. 내가 군생활을 하던 시기는 전시였는데 당시는 초병이 경계 중에 잠이 들면 사형도 당할 수 있는 때였다. 초병이 임무 중에 잠이 들면 적이 진영에 침투해서 쓸어버릴 수 있다. 본문 막 14장에서 그들의 적은 유다나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오는 무리가 아니라(43절) 자신의 육신이었다.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 참으로 영은 준비되어 있지만 육신이 연약하구나.”라고 하시더라"(38절).
구원받았다고 해서 여러분의 육신이 변하는 것은 없고 육신은 중생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죄와 타락의 몸이며 휴거 때 몸이 "구속"받기 전까지 계속 그럴 것이다(롬 8:23). 형제들,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크리스찬도 육신의 문제들을 갖고 있었다. 그는 롬 7:18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내가 아노니...." 성령께서 여러분의 육신 안에 거하실지라도(고전 6:19) 성령께서 여러분의 죄의 육신을 다루지는 않으신다.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내주하실 때 여러분의 혼을 육신에서 할례시키신 이유가 그것이다(골 2:11-12).
"...원함은 내게 있으나...." 의지가 있고 영은 - 그리스도 안의 새 사람 - 준비되어 있다(고후 5:17; 엡 4:24; 골 3:10).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선한 것을 어떻게 행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8-19). 세상에, 바울이 이런 말을 하다니, 그런데 사실 여러분과 나도 마찬가지이다. 문제가 무엇인가? 냄새나는 육신이 문제이다.
"이제 만일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행하면 그것을 행하는 것은 더 이상 내[그리스도 안의 새 사람 - 롬 7:22]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20).
"옛 본성의 소멸" 같은 것은 없고 여러분은 죽거나 휴거되기 전까지(고전 15:50-57) 육신과 싸워야 한다(롬 7:23). 그 전쟁 중에 여러분은 육신의 공격과 육신이 그 행위들을 "부패시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롬 8:13; 골 3:5).
막 14장으로 돌아와서: "그리고 다시 가서 기도하시는데 같은 말씀으로 말씀하시더라"(39절). 이것은 "이교도들"의 "헛된 반복"(마 6:7)과는 다른데 이교도들은 묵주를 돌리거나 기도 바퀴를 돌리면서 무의미한 말을 반복한다. 여러분이 마음의 큰 부담 가운데 진실된 기도를 할 경우 다른 방법이 없어서 반복된 기도를 할 수 있다. 여러분은 주께 같은 기도를 반복하여 드리면서 주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오시자 이번에도 그들은 자고 있었는데(40절) 37-38절에서와 달리 이번에는 주께서 그들을 어떤 말로 책망하셨는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40절 말미를 봤을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뭔가 말씀하신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주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더라." 그들은 9:6에서와 같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그 본문을 보라). 내 부친은 군대에서 용납될 수 있는 세 가지 대답에 대해 가르쳐 주었었다: "Yes, Sir!" "No, Sir!" "No excuse, Sir!" 제자들은 잠기운으로 눈꺼풀이 무거워져 있었지만 그들의 주께서 당부하신 대로 꺠어서 기도하지 못한 것에 대해 변명할 말이 없었다.
40절의 "wist"라는 단어는 KJV의 고어체 단어 중 하나인데 그 뜻은 "knew"이다. 이것은 킹제임스 번역자들이 루터 성경의 문체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여기서 "wist"라는 단어는 언어학적으로 볼때 루터 성경의 동일 구절에 나오는 "wussten"과 관련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예를 주신 종교 개혁 성경이 성령의 "사도적 계승"을 통해 전승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러분이 이런 고어체 단어들을 "현대화"시킨 현대 역본들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이런 단어들은 목적이 있어서 들어 있는 것이다.
막 14:41 - "주께서 세 번째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께서 세 번 같은 기도를 하셨고 성부께로부터 세 번 같은 응답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35절 주석을 보라). 이 "세 번"이라는 개념이 성경에는 기도와 관련하여 수차 등장한다. 엘리야가 과부의 죽은 아들을 위해 세 번 기도하자 주께서 아이를 살려주셨고(왕상 17:21-22) 엘리사가 위대한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릴 때에도 세 번 기도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했다(시 55:17; 단 6:10). 베드로는 지붕에서 기도하면서 짐승들을 담은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환상을 세 번 보았다(행 10:9-16, 11:10). 바울은 자신에게서 "육체의 가시"를 제하여 주실 것을 주께 세 번 기도했는데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에서 겪으신 것처럼 바울의 요청도 거부되었다(고후 12:7-9).
물론 나는 끈질긴 기도를 하지 말라는 어떤 제한을 걸려는 것이 아니지만(7:24-26 주석을 보라) 주께서 여러분의 기도에 대해 "안돼"라는 분명한 신호를 세 번 보여주신다면 그때는 여러분이 그 대답을 수용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 문제에 계속 매달리면 주의 뜻을 분별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뭔가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 주의 일이 아닌 자기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일이 행 21장에서 바울에게 일어났는데 성령께서 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세 번 경고하셨지만(행 21:4, 11, 12) 그는 자기 뜻대로 행동했고 그 결과 사역 기간 중 2년을 봉인당하고 말았다.
14장으로 돌아오겠다. 분명히 41절의 "자고 쉬어라"와 42절의 "일어나서 가자"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이 얼마나 되는지 성경은 말씀하지 않지만 우리는 41절의 시간으로부터 주께서 잡히는 시간까지의 간격일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배반당하신 시간은 자정을 넘긴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의탁하셨고 자신이 "죄인들의 손에 넘겨"(41절)지기 전까지 잠든 제자들을 지켜보신다. 그 "죄인들"은 본문의 경우 종교인 집단을 가리킨다: "선임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43절). 그들은 자신이 부정하게 되어 유월절 식사를 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와중에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하기 위한 모의를 하고 있었다(요 18:28). 현대에도 그들의 유형에 부합되는 인간들이 살고 있다: 로마 카톨릭 교황들, 추기경들, 대주교들, 불교 승려들, 그리고 힌두교 성직자들이 그들이다. 여러분이 자신의 구주를 신실하게 즏거하는 증인이라면 그 자들은 주를 살해했던 것같이 여러분도 죽이려 할 것인데(요 15:20; 살전 2:15) 그들은 자기들의 능력이 미치는 한 그렇게 하려 들 것이다.
43 주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 곧 열둘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왔고, 선임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온 큰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그와 함께 있더라.
44 주를 배반한 자가 그들에게 표시를 정해 주며 말하기를 “내가 입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니, 붙잡아서 무사히 데리고 가라.”고 하더라.
45 그가 오자마자 곧장 주께로 다가서며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선생님” 하며 입맞추더라.
46 그러자 그들이 주께 손을 대어 붙잡더라.
47 그때 곁에 서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의 한쪽 귀를 잘라 버리더라.
48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강도에게 하듯이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
49 내가 매일 성전에서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가르쳤으나 너희가 나를 붙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성경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하시니
50 제자들이 모두 주를 버리고 도망가더라.
51 또 알몸에 세마포 천을 두른 한 청년이 주를 따르고 있었는데 청년들이 그를 붙들자,
52 세마포 천을 버린 채 알몸으로 그들에게서 도망가더라.
"큰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43절). 예수를 체포하러 온 이 사람들은 단순히 보안관이나 보안관보, 혹은 경찰관과 그의 "지원 인력" 정도가 아니라 "경찰특공대" 전체이다(50명이나 그 이상). 그들은 "칼과 몽둥이"[칼과 곤봉]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제 여러분은 왜 베드로가 싸우기를 원했는지 알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을 희생하고 주를 탈출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왜 한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 "큰 무리"가 동원되었는지 알겠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다니시는 곳 어디든지 수행원들이 따라다녔기 때문만은 아니라 예수께서 원하시면 자신의 능력으로 폭도들로부터 피하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눅 4:29-30; 요 8:59, 10:39을 보라). 그들은 주께서 빠져나가실 수 없게 일을 확실히 처리하고자 했다.
44절에서 마피아의 "죽음의 키스"가 나오는 것을 보라. 그 입맞춤의 의미는 입맞춤 당하는 자가 죽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입맞춤은 "표시"(a TOKEN)로 정해졌는데 token이라는 단어는 mark의 동의어이다. 유다는 압살롬(삼하 18:18 참고. 행 1:25)이 그의 아버지를 입맞춤으로(삼하 15:5-6) 배반했던 것과(다윗 - 그리스도의 유형)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의 유형이다(요 17:12 참고. 살후 2:3). 적그리스도는 표범으로 상징되기도 한다(계 13:2). 표범의 피부에는 검은 점들이 찍혀 있는데(렘 13:23) 그 점들은 검은 입술을 오므리고 입맞춤한 자국처럼 보인다. 구약 성경에서 입맞춤은 우상숭배와 관련되었다(왕상 19:18; 호 13:2). 따라서 계 13:17에서 적그리스도는 이름이 있고(유다), 숫자를 가졌으며(666 - 계 13:18), 또한 표가 있는 것이다. 그 표는 적그리스도와 그의 형상에 경배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키스 마크와 같은 것이다.
45절의 상황을 정확히 알기 위해 여러분은 본문과 같은 내용을 다루는 요 18장을 읽어봐야 한다. 유다가 예수를 잡으라는 신호로 주께 입맞추기 전에 예수께서는 먼저 주를 잡으러 온 무리들 앞에 나서시어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요 18:4)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라"(요 18:5)고 대답한다.
그 다음 일어나는 상황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원수들 앞에서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그니라"(요 18:5)고 말씀하시는데 여러분이 킹제임스 성경 본문을 보면 거기에 "he"가 이탤릭체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번역자들이 의미의 선명성을 위해 그 단어를 추가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한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요한이 기록한 예수님의 원래 말씀은 "I am"이었다. 그것은 출 3:14에서 하나님께서 "나는 곧 나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모세에게 알게 하신 주의 이름이었다. 주께서는 모세에게 이집트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나이신 분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알리라 말씀하셨다. 히브리어에서 그 단어는 "테트라그라마톤" - "여호와"를 의미하는 네 개의 히브리어 철자(출 6:3) - 이라 알려져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신 자신의 이름을 거기서 선포하심으로써 권능을 드러내셨는데 그 이름은 "알라"가 아니었다. 아테네에서 모셔지던 "알지 못하는 신"에게 아무 힘이 없었던 것처럼(행 17:23) 알라는 여러분에게 어떤 일도 해줄 수 없다. 바울이 그 알지 못하는 신을 창 1:1의 하나님으로 확인해주기 전까지(행 17:24) 그 이름은 많은 신들 가운데(행 17:16) 한 "신"(theos - 헬라어에서 신)을 가리킬 뿐이었다. 알라는 과거에나 지금이나 그런 신이다. 알라는 메카의 카바 신전에 있던 360개의 신들 가운데 있던 달의 신이었다. 알라가 마호메트가 속한 쿠라이쉬 부족의 최고 신이었기에 마호메트가 메카를 정복했을 때 그는 자신의 달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았고, 결국 알라라는 이름에는 그 정도의 의미만 있을 뿐이다. 벅스 버니나 미키마우스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것처럼 알라는 하나님이 아니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성경의 하나님께서 구약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 또 신약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요일 5:20)을 가지셨다는 것이다. 한심하고 가련한 알라에게는 이름도 없다. "신"이라는 단어는 신성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일 뿐이기에 "사람"이 인류를 가리키는 것이나 진배없이 익명이다. 창세기 2장의 "사람"에게는 아담(창 5:1-2)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여러분이 자신의 이름을 가졌다면(랄프, 조지, 빌, 도날드, 해롤드 등) 여러분은 마호메트의 신보다 우월한 존재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성한 이름의 능력을 드러내시자 유다를 포함한 그 온 무리가 뒤로 물러나 엎드렸다. 유다는 예수께 입맞추기 위해 납작 엎드린 상태에서 벌떡 일어나야 했다. 유다는 지옥으로 떨어지기 위해 성경과(21절과 그 주석을 보라) 하나님의 권능을 둘 다 범해야 했다. 그러나 일반적 죄인들도 지옥에 떨어지기 위해 보통 그렇게 한다(12:24; 롬 1:16 참고. 벧전 1:25).
"선생님, 선생님"(45절) - 유다는 한번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지 않았다(13:1 주석을 보라). 상상해 보라, 그리스도의 신성한 이름 앞에 완전히 납작하게 엎드러진 직후에 이렇게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배반의 표시를 접수하자 무리는 예수를 붙잡는다. 옛 격언처럼 "상황이 완전히 폭주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한 사람은 베드로이다(요 18:10-11). 학자들이 소위 "이상한" 복음서라 비하하는 요한복음이 없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절대 몰랐을 것인데 이는 마태, 마가, 누가 모두 칼을 휘두른 그 사람의 신원을 기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 26:51; 눅 22:50을 보라). 사실 요한 혼자 "대제사장의 종"의 이름도 기술했는데 그의 이름은 "말코"(요 18:10)였다. 요한복음은 신학적 "아젠다"를 담고 있기에 역사적 기록을 담은 복음서는 아니라는(요 20:31을 보라)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은 근거없는 망상일 뿐이다.
소위 "공관복음서"들처럼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빠진 역사적 사실들이 나온다. 예를 들어 마태와 마가복음은 그 종의 한쪽 귀가 잘렸다고만 나온다. 누가와 요한복음에는 그 잘린 귀가 "그의 오른쪽 귀"(눅 22:50; 요 18:10)였다고 명시된다.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그 사람의 귀를 고쳐주셨다고 나오지만(눅 22:51)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는 그 내용이 빠져 있다. 온전한 계시를 얻기 위해 여러분은 사복음서 전체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에게는 자유주의자들이 "예수 세미나"를 열고 발언하듯이 어떤 것이 진짜 예수님의 말씀인지 "투표"할 권리가 없는데 이는 복음서의 기술 내용은 사건 현장들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에 근거하기 때문이다(눅 1:2; 요일 1:1).
우리는 3:27 주석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도둑에 비유하시는 부분을 다루었다(48절). 본문에서 주께서는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책망하고 계신다: "내가 매일 성전에서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가르쳤으나 너희가 나를 붙잡지 아니하였도다"(49절). 이 말씀에 일차적으로 연관된 부분은 "고난 주간"의 일, 월, 화요일에 걸쳐 주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신 것이지만 또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 성전에서 가르치셨던 모든 경우에 해당된다.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이 있기 한참 전인 요 7장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성전에서"(성전 안에서)(요 7:28) 가르치셨다고 나온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주께 손을 대는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 이는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요 7:30).
주께서 친히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시기 전에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를 해칠 수 없었다(요 10:18). 그러나 여기서 주께서 잡히신 이유는 "성경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49절)기 때문이었다. 겟세마네에서 시작하여 무덤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에 관한 최소 30가지의 예언들이 성취되었다(잭 칙의 전도지 "유월절 음모?"에 나온 그 명단을 보라). 요한복음 곳곳에 언급된 그 "때"가(이를테면 주께서 우리의 죄를 전가받으시고 그 죄값을 ㅣ르시는 때 - 요 2:4, 7:6, 30, 8:20, 12:23, 13:1) 드디어 왔다.
50절 - "제자들이 모두 주를 버리고 도망가더라." 2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인용하신 기원전 487년의 스카랴 선지자 예언(슼 13:7)이 이로써 그대로 이루어졌다. 여러분은 이때 베드로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이해해야 한다. 베드로가 칼을 뽑았던 것은 제자들 가운데 칼을 가진 자가 그를 포함한 두 명이었기 때문이다(눅 22:38). 베드로 외에 칼을 가졌을 또 한명의 제자가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주를 지키려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하셨다(요 18:11).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상처를 입힌 그 사람을 치유해 주신 다음 자신을 체포하러 온 자들에게 주의 제자들은 놓아주라고 말씀하시고 잡히셨다. 이때 베드로가 어떻게 행동했을 것 같은가? 내가 생각하기로 그는 칼을 떨어뜨리거나 칼집에 넣은 다음 다른 제자들처럼 꽁무니를 뺐을 것이라 본다. 그는 자신이 결코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그대로 행동한 것이다(29, 31절).
나는 왜 베드로가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겠다: 그는 모욕감을 느꼈고 주께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겁쟁이는 아닌 게 분명한데 이는 그가 무장한 무리와 맞설 각오를 하고 있었고 필요하다면 단독으로라도 그들과 싸울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가 바보가 되었다고 생각했기에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보시라고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저주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주께 화가 났기 때문에 벌인 사건이었고 자신의 구주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그런 행동은 문자 그대로 수백만명의 크리스찬들의 삶에서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날밤 동산에서 있었던 사건 중 가장 특이한 광경을 보게 된다. 51-52절에서 우리는 "세마포 천"을 두른 "한 청년"을 보게 된다. 마가복음 외에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성전에서 파견된 무리가 예수님을 제외한 다른 누군가를 붙잡으려 했다는 기술을 하지 않는다. 무장한 자들이 이 젊은 친구를 잡으려 하자 이 청년은 창 39:12의 요셉처럼 붙잡는 자들의 손에 자신의 옷을 남겨두고 "알몸으로" 도주한다. 그가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있었다는 사실 외에 본문에서 여러분은 그의 신원에 관한 어떤 정보도 확인할 수 없다. 여러분은 그가 누구인지 모르며 그가 사도들 중 한 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그가 누구인데요, 럭크만?"이라고 질문할 수 있다. 나는 성경을 150회 이상 정독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르겠다. 만일 여러분이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낸다면 내게 알려달라.
물론 이 사람에 대해서 온갖 추측이 난무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이 나사로라고 추측하는데 그들은 요 12:10-11을 근거로 하는데 이는 나사로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것을 보고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었기에 제사장들이 나사로도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해석가들은 이 사람이 마가 본인을 삼인칭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는데 요한도 그의 복음서에서 종종 그런 삼인칭 화법을 썼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들은 그가 요한이라고 하는데 이는 요한이 아마도 제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가 16:5에서 여인들에게 부활을 선포하는 그 천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손을 까닥하지 않고도 무장한 군인들을 시체로 만들 능력이 있는 천사가 사람들에게 붙잡히지 않으려고 나체로 도망간다는 것은 말이 안되지만). 내가 본 해석들 가운데 가장 기발한 해석은 이 나체의 청년이 죽어서 장사 지내기 위해 세마포에 싸여 있다가 예수께서 자신의 성호의 능력을 사용하여 무리를 엎드리게 하시는 그 순간 그의 죽은 몸이 부활했다는 것이다. 주께서 사용하신 자신의 성호("I am")가 그 죽은 청년을 살렸고 그래서 그는 자기를 살려주신 그 분을 즉시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기에 이 해석은 누군가 정도를넘어 자신의 상상력을 "원래의 본문"에 덧붙인 것이다.
그런 환타지 같은 상상력을 발휘하는 해석들은 제쳐두고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모르겠으면 그냥 두라." 이럴때 우리는 모르는 것에 붙잡혀 있을 게 아니라 다음 구절로 과감하게 넘어가야 한다(이런 경우 내가 하는 말이 있다. "Ich weiss nicht" - 독일어: 나는 모르겠다!)
53 그들이 예수를 대제사장에게로 끌고 가니, 모든 선임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그와 함께 모였더라.
54 베드로는 멀찍이서 주를 따라 대제사장의 관저 안까지 가서 종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55 그때에 선임 제사장들과 온 공회는 주를 사형에 처하려고 예수에 대하여 증거를 찾으려 하였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하더라.
56 이는 많은 사람이 주께 대하여 거짓 증거를 대나, 그들의 증거가 서로 일치하지 않음이더라.
57 어떤 사람들은 일어나서 주에 대하여 거짓 증거를 대며 말하기를
58 “우리는 그가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나는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헐고, 삼 일 만에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지으리라.’고 하더이다.”라고 하였으나,
59 그들의 증거 역시 일치하지 아니하더라.
60 그때 대제사장이 한가운데 일어서서 예수께 물어 말하기를 “너는 아무것도 대답할 것이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에 대하여 증거를 대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니
61 주께서 잠잠하시고, 아무 대꾸도 아니하시더라. 대제사장이 다시 주께 물어 말하기를 “네가 복되신 분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하니
62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그렇다. 너희는 인자가 권능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고 하시니라.
63 그때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말하기를 “우리에게 더 이상 무슨 증인들이 필요하리요?
64 너희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하니, 그들은 모두 그가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죄하더라.
65 그리고 몇 사람은 주께 침을 뱉기 시작하면서, 또 주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말하기를 “예언하라.”고 하며 종들도 그를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53절에 등장하는 이들은 2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죄인들"이다. 이것을 교훈적으로 보자면 우리 시대의 카톨릭 사제들, 캠벨주의자들, 그리고 몰몬교 "장로들"과 부패하고 배교한 현대 역본 번역자들과 개정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 그 적용 대상은 행위 구원 교리를 갖추어 놓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킴으로써(고후 2:17)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어떤 종교지도자들(마 23:15)도 해당될 수 있다.
54절에 대한 주석은 66-72절에 가서 할 것이다.
55절에 언급된 "공회"를 잘 보라.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서 그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의 확산을 막기 위해 결집한 인간들의 모임으로 나온다(마 12:14; 막 15:1; 눅 22:66; 요 11:47; 행 4:15, 5:21, 6:12, 22:30, 25:12).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하나님께 반역하며 신성모독을 하는 종교적이고 경건한 위선자들로서 세상에 진리가 선포되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자들이었다. 여러분은 모든 바티칸 공회들, 에큐메니칼 공회, NCC, 혹은 WCC를 경계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받으신 이 재판은 "캥거루 재판"(혹은 인민 재판)이라 불린다. 이 재판에는 편견에 사로잡힌 재판관과 배심원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율법을 무시하고 자기들이 사전에 모의한 대로 평결을 하기 위해 피고의 자기 방어를 위한 증거 제출을 가로막고 급히 재판을 진행시킨다. 이 모든 과정은 시작부터 끝까지 불법적이었다. 요 18:31을 보면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율법에 반하여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를 데리고 가서 너희의 율법에 따라 재판하라.”고 하니, 유대인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누구를 사형에 처하는 것은 적법지 못하나이다.”라고 하더라."
로마의 법 질서 하에 있던 당시의 유대 종교 법정은 죄인을 사형에 처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았다. 주께서는 기소없이 체포당하셨고 그것도 불법이었다. 그는 여전히 기소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받으셨다. 막 14장 55절을 보라. 그들은 "주를 사형에 처하려고 예수에 대하여 증거를 찾으려" 했다. 왜 그런 것인가? 그들은 여전히 주를 기소할 근거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증인이 나서서 "나는 그가 이 특정 죄를 짓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증언하기를 기대했지만 신빙성 있는 증인을 찾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거짓 증인을 동원해야 했는데(56절; 마 26:59) 그것은 제9 계명을 범한 행위였다("너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출 20:16). 모세 율법에 따르면 거짓 증인은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던 것에 대해 처벌받아야 한다(신 19:18-19). 그러나 본문에서는 판사들이 거짓 증인들과 공모 관계에 있다. 사실 그 판사들은 그리스도를 체포하러 온 폭도들 가운데 있었다(눅 22:52). 여러분을 체포한 경찰관에게 재판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았는가? 그런 재판에서 나올 평결은 당연히 불공정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여러분은 왜 그들이 많은 증인들을 계속 소환했는지 아는가? 모세 율법 하에서 그들은 한 증인의 증언만으로 사람을 정죄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믿어 왔기 때문이다. "두 증인의 입이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문제를 결정지을지니라"(신 19:15).
그 거짓 증인들 중 누구도 "일관된 증언"을 하지 못했다(56절). 그들이 가장 근접한 증언을 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요 2:19에서 하신 말씀(참고. 58절)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것조차 그들은 왜곡해서 말했다. 여기에 실제 주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이것을 다시 일으키리라.”고 하시니라"(요 2:19).
"이 성전"이라? 주께서 언급하신 성전이 헤롯 성전인가(요 2:20)? 물론 아니다.
요 2:21 - "그러나 주께서는 성전 된 자기 몸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라."
그렇다면 주께서는 이 말씀을 이루셨는가? 그렇다! 그들이 주를 죽였지만 주께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고 그래서 주께서 하신 말씀들에는 죄가 없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 선임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진리에 관심이 없었고 그 자들은 주를 제거할 방법을 찾는 데만 골몰하고 있었다.
물론 성경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 재판이 웃음거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또다른 역사적 근거가 있다. 이 재판은 심야에 열렸는데 이것은 불법이었다. 피고측 증인을 소환할 수 없는 늦은 시간에 재판이 열린 것이다. 재판은 안식일을 앞둔 유월절 기간에 열렸고 이것 또한 당시 유대 법에 어긋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로지 자신의 진술만으로 유죄가 되셨고(63-64절) 그 진술의 진실성을 확인해 보기 위한 절차도 없었다. 사형 판결은 공개 법정이 아닌 대제사장의 사저에서 내려졌다(눅 22:54).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을 끌어내기 위해 예수에 대해 우호적인 공회원들은 재판 과정에서 배제되었다(아리마대 요셉의 경우처럼 - 눅 23:50-51).
이것은 종교지도자들의 작품이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도덕적 성경적 지도권을 받은 책임자들이었다. 그리스도를 정죄하기 위해 그들은 모세 율법과 실정법까지 어겨야 했다. 이 자들이 참으로 마피아나 ISIS 지도자들만큼이나 "경건하고" 훌륭한 신사들이라는 것을 이제 알 것이다.
이제, 거짓 증인들이 나와서 주를 고발했지만 합치를 이루는 한 쌍의 증언이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예수께 말을 시키면서 12:13에서처럼 "그의 말씀에서 트집을 잡으려" 했다. "너는 아무것도 대답할 것이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에 대하여 증거를 대는 것이 어떠하냐?"(60절).
예수께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해야 할 의무가 없었다. 고소의 근거를 입증해야 할 책임은 저들 편에 있었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반박하실 필요가 없었다. 대제사장에서부터 거짓 증인들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는 일치하는 두 증언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대답하실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침묵에는 영적인 이유가 있었다(61절). 우선 주께서는 부정직한 회의론자에게 결코 대답하지 않으신다. 눅 23:7-9에 보면 빌라도가 이 사건의 재판관이 되지 않으려고 헤롯에게 예수님을 보내어 재판받도록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헤롯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신다. 여러분은 그 이유를 아는가? 헤롯은 이미 침례인 요한에게 진리를 들었으나 거부했던 자이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이미 진리를 거부한 자들에게 더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침묵은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다. 이 사건이 있기 783년 전에 있었던 예언이다.
"그가 억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여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어린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가며, 또 털 깎는 자들 앞의 양이 말없듯이, 그가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는도다"(사 53:7).
또 여기에 이 일이 있기 1천년 전에 나온 예언이 있다.
"내가 말하였나니, 나는 나의 길을 조심하여 내 혀로 죄짓지 아니하리라. 악인이 내 앞에 있는 동안 나는 내 입에 재갈을 물리리라. 내가 침묵하여 벙어리가 되었으며 심지어 선한 것에조차도 잠잠하였나니 나의 슬픔이 일었나이다"(시 39:1-2).
61절을 살펴보자. 예수를 처벌할 수 있는 두 명의 증인 확보에 실패하고, 또 예수께서 자신의 고소자들에게 대답하도록 만들지 못하자 대제사장은 "술수를 써서" 예수께서 입을 여실 수 밖에 없게 만들어 그 대답을 가지고 공회가 주를 정죄하게 하려 한다.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엄명하노니"(마 26:63). 이것은 예수님을 맹세의 저주나 벌칙 아래로 가둬놓기 위한 진술이다(민 5:19-21; 삼상 14:28). 주께서는 이 질문에 대답하셔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율법 하에서 유죄가 된다.
"네가 복되신 분의 아들 그리스도냐?"(마 26:63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되어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THE Christ)라는 지칭의 의미가 무엇인지 8:29의 베드로가 한 고백에서 배웠다(그곳 주석을 보라). 성경을 아는 어떤 유대인도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시 2:2)와 사탄의 기름부음 받은 자(겔 28:14)가 어떻게 다른지 알고 있다. 게다가 모든 경건한 유대인은 주의 기름부음 받은 이, 곧 그리스도, 메시아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시 2:6-7)도 안다. 또한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민족적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기 전까지 어떤 경건한 유대인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만군의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임도 알았다(미 5:2; 사 9:6; 렘 23:5-6 참고. 요 10:30-33). 그리스도를 거절한 후부터 랍비들은 메시아가 다윗이나 히스키야처럼 단지 인간이라고 가르쳐 왔는데 이를테면 메시아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추측에 부합하는 거짓 메시아를 얻게 될 것이다(요 5:43).
하나님을 "복되신 분"이라 일컫는 것에 대한 상호 관주가 창 9:26, 14:20, 24:27; 출 18:10; 룻 4:14; 삼상 25:32, 39; 삼하 18:28, 22:47; 왕상 1:48, 5:7, 8:15, 56, 10:9; 대상 16:36, 29:10; 대하 2:12, 6:4, 9:8 등에 있다. 나는 전체 관주의 절반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셨기에 그가 모든 찬양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지 보여주는 표현이다. 신약에서 이 지칭은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된다(딤전 1:11, 6:15 참고. 계 5:12).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에게 폭탄 선언과 같은 대답을 하신다: "그렇다"(I am). 쾅! 이 말씀은 동산에서 주를 잡으려 했던 유다와 사람들을 압도해서 무릎꿇렸던 그 말씀이다(요 18:5). 이것은 테트라그라마톤(출 3:14)이다. 이것은 단지 주께서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인정한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신성을 선언하신 말씀이다(요 8:58-59). 자유주의자들과 마호메트교도들이 이 사실을 거부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셨다.
이 고백에 뒤이어 예수께서는 자신이 "인자"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예수님 안의 두 본성 - 100% 하나님, 100% 인간 - 에 대한 증언이다. 예수께서는 신인(God-man)이셨다.
유대인들이 미래에 그리스도를 보게 될 두 가지 상황에 대한 언급이 나옴을 보라: 1) "권능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 2)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 이 두 가지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메시아 예언의 성취이다. 첫번째 사항에 대해서는 시 110:1에 언급되어 있다.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나의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나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12:36에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한방 먹이실 때 인용하신 구절이다. 이 말씀의 요지는 주께서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사실이 여기 있는데 이 구절은 지상 재림이 있기 얼마 전에 유대인 성도들이 받게 될 환란후 휴거에 대한 참조 구절이기도 하다(계 14:14-16). 그 사실이 막 14:61의 뒤따라오는 내용에 나온다 -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 이것은 단 7:13-14의 성취인데 여러분은 다니엘서 주석서의 해당 본문 주석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막 14:61의 마지막 단락은 재림에 대한 내용인데 계 1:7과 슼 12:10, 그리고 슾 1:15와 욜 2:1-2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백"을 듣고 난 후 그들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은 둘 중 하나 뿐이었다: 주께서 거짓말쟁이라고 보던지 아니면 진리를 말씀하고 계신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주 앞에서는 중립 지대가 없다(눅 11:23). 주께서는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대로 그런 분이던지(육신으로 오신 만군의 하나님 - 빌 2:6-7) 아니면 주께서는 거짓말쟁이나 미친 사람이어야 했다.
이 재판이 공정한 재판이 되려 했다면 예수님의 진술이 참인지 아닌지 조사하는 절차가 있어야 했다(신 13:14, 17:4, 19:18을 보라). 예수님의 진술이 참이라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증거들이 주께서 성취하신 구약 예언과 행하신 기적들과 관련하여 나타나 있었다. 공회에 소속된 그 바리새인들은 최소한 예수께서 하나님과 함께하신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요 3:2). 그러나 재판 과정 전체가 "조작"이었다. 재판의 결과는 오직 하나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
"너희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도다"(64절). 예수님의 말씀이 거짓이었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이 될 것이다. 여러분은 이 사실 앞에 솔직해져야 하는데,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대해 선언하신 말씀이 거짓이라면 예수께서는 신성모독을 하신 것이 맞다. 나는 주께서 참말을 하셨다는 쪽에 내 영원한 혼을 걸 수 있다.
65절에 나온 모욕 행위에 대해서는 그것이 일어나기 712년 전에 예언되었다(사 50:6). 이것은 인간적 견지에서 조작할 수 없는 일인데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그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성에 대해 하신 진술에 신빙성을 줄 수 있음에도 그들이 구약 성경을 성취하는 행동을 일부러 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들어보라, 여러분은 신성모독에 대한 처벌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단지 사형이 아니라 투석형이다(레 24:16).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신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 유대인들은 주를 돌로 쳐 죽이려고 두 번 시도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요 8:59, 10:31). 그들은 로마법에 의하면 유대인들 스스로 사형을 집행할 수 없음에도(요 18:31) 행 7:58에서 스테판을 돌로 쳐 죽였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십자가 처형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이성적인 설명은 한 가지로만 가능하다: 그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어떤 방식을 원했던지간에 만군의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죽음을 예언하신 방식대로 성취하신 것이다(요 19:31-36). 부처는 이런 일을 할 수 없었다. 조로아스터와 마호메트의 예언 실력은 조롱거리에 불과하다. 어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기 1,500-400년 전에 미리 그 사실을 알려줄 수 있고 그 예언을 정확히 성취되게 하는 책은 오로지 성경 뿐이다. 대장경이나 베다 혹은 샤스타, 푸라나와 논어, 젠드 아베스타는 성경과 같지 않으며 코란과 하디스도 마찬가지이다. 성경만이 "확실한 예언의 말씀"(벧후 1:19)이다.
65절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가린 것에 대해 눅 22:64에는 예수께서 눈이 가려지셨다고 나온다. 이것은 "장님 놀이"라 불리는 잔인한 게임이다. 주께서는 눈이 가려지신 후 대제사장의 종들로부터 구타당하셨다.
"예언하라"(65절). 주께서는 예언하셨지만(62절) 그들은 듣고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자의식 없이 예언을 성취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주께 요구한 것은 누가 주를 때리는지 말해보라는 것이었다(마 26:68; 눅 22:64). 만일 주께서 그렇게 하고자 하셨으면 그 방 안에 있던 모든 "대적들"의 이름, 소속, 직위를 말씀하실 수 있었다.
66 베드로가 관저 아래에 있을 때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쬐는 것을 보고 그를 주시하더니 말하기를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하더라.
68 그러나 그가 부인하여 말하기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며 이해하지도 못하겠노라.”고 하며 현관 쪽으로 나가는데 닭이 울더라.
69 또 한 여종이 그를 다시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말하기 시작하기를 “이 사람은 그들과 한패라.”고 하니
70 그가 다시 그 말을 부인하니라. 잠시 후에 다시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분명히 너는 그들과 한패라.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너의 말투가 그와 같으니라.”고 하더라.
71 그러나 그가 저주하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하니라.
72 그때 닭이 두 번째 울더라.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그것을 생각하며 울더라.
이제 장면이 "관저 아래에"(66절) 있는 베드로 시점으로 전환된다. 그리스도께서 동산에서 잡히시고 대제사장 앞으로 소환되신 후 "베드로는 멀찍이서 주를 따라"(54) 왔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날 저녁 일찍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30절). 멀찍이서 주를 따라오면서 그는 주의 수욕과 엮이지 않으려 했는데(딤전 4:10; 히 11:26, 13:13) 그것이 베드로가 주를 부인하게 된 첫 단계였다.
베드로가 실족한 두 번째 단계는 주의 대적들과 친교를 가진 것이다: "종들[대제사장의 종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54절). 크리스찬들이여,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사랑하거나(요일 2:15) 세상과 일치해서는 안된다(롬 12:2). 여러분은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관여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들을 책망하라"(엡 5:11)는 명령을 받았다. 베드로는 자신의 주에게 침을 뱉고, 구타하고 조롱한 그 무리들과 동석하고 있다(65절). 크리스찬들이여, 여러분은 여기서 교훈을 배우고, 신속히 배워서 이 잃어버린 세상이 여러분의 구주에 대해 어떤 선의도 사랑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여러분이 그 자들과 함께 하면 그들의 행동을 배울 것이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배우고 그들처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롬 3:14을 보라). 베드로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71절).
이제 베드로는 스스로 예수께서 당하고 계신 일을 보러 가지 않았지만 그것을 이야기해주는 친구가 옆에 있었다. 그는 요한이었다. 요한은 대제사장과 모종의 관련이 있었고 66-67절에서 그는 그 여종을 베드로에게 보내어 들어오도록 도와주게 했던 것이다(요 18:15-18). 요한이 동산에서는 도망쳤을지 몰라도(50절) 그는 다시 돌아와서 십자가 처형 때까지 주의 뒤를 따랐다(요 19:26-27). 열두 제자들 가운데 요한만이 그렇게 했다. 그래서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 지칭한 것이다. 그는 주를 매우 사랑했기에 주께서 재판받으시거나 처형당하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보는 특권을 받은 것이다(요 21:20-22).
요한은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기회를 주었는데 베드로는 그 기회를 비극적으로 놓쳐 버렸다. 베드로는 그 여종에게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 그리고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68절을 보라). 그 무렵 닭이 첫 번째로 울었다.
여러분은 그 첫 번쨰 닭울음 소리를 들은 베드로가 식은땀이 흘렀으리라 생각하지 않는가? 그는 관저의 현관으로부터 밖으로 나가기 위해 서둘렀다. 그 때 "또 다른 하녀가 그를 보고"(마 26:71)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도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마 26:71). "이 사람은 그들과 한패라[즉 그리스도의 제자다]"(69절).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학자들이 성경의 "모순"이라 제기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첨예한 모순 하나를 만나게 된다. 눅 22:58은 그 종이 "남자"라고 말한다. 물론 성경의 오류를 찾아내는 데만 열중하는 이 불신자들과 비평가들은 6학년 수준의 영어도 읽지 못하고 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요한은 "사람들이[복수 - 여종과 남자]그에게 말하기를 “너도 그 사람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냐?”고 하니"(요 18:25). 자신들이 "열린 마음"을 가졌다고 말하는, 대학교와 신학교에 포진한 얼간이 학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데는 성경만한 책이 없다.
또 한번 베드로는 주를 부인하는데(70절) 이번에 그는 "맹세하며"(마 26:72) 말한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으로 맹세컨데" 혹은 "주께서 살아계신 한" 같은 식으로 말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갖다 대며 자신이 예수를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저주의 말"을 시작하기 전에 주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아 현관에 있던 무리가 베드로를 가리켜 다시 말했다. "분명히 너는 그들과 한패라.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너의 말투가 그와 같으니라"(70절). 베드로는 미국 "남부 사람"에게 말을 거는 "북부 양키"처럼 그들 가운데 구별이 되었다. 유다 이스카리옷을 제외한 주의 제자들 전부는(3:19 주석을 보라) 북부 이스라엘 출신이었고 예루살렘은 남쪽에 있었다.
유대인들이 같은 언어를 썼을지라도 북쪽과 남쪽 방언은 억양에서 구별이 되었다. 스코틀랜드(북부)와 잉글랜드(남부), 독일(북부)과 오스트리아(남부), 그리고 멕시코(북부)와 남아메리카(남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여기서 "너희 한패지"라고 하는 그 무리에게 "신사 여러분"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에는 더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마 26:73에 보면 무리가 "네 말투가 이를 증명한다[bewrayeth - betrays: 누설하다]"고말했다고 되어 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사람인 척 하려 애썼지만 그는 여전히 "크리스찬"의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이 주의 제자들 중 하나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기 시작"(71절)했다. 베드로는 "속사포같이 욕설을 쏟아냈고" 모닥불 주위에 서 있던 병사들은 다음날을 위해 욕설 연습을 하는 그를 주목했다.
베드로는 "제기랄, 나는 그 빌어먹을 인간을 모른다구!"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원래 썼던 "험한 표현들"을 썼고 이제 불가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구도 베드로가 구원받은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닭이 "두 번째"(72절) 울었고, 그때 베드로는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그는 아이처럼 울면서 그곳에서 뛰쳐나갔다. 마태와 누가는 그가 "비통하게 울더라"(마 26:75; 눅 22:62)고 기록한다.
물론 우리는 베드로가 이때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데 이는 성경에 그것에 대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알 것 같다. 나는 그가 겟세마네 동산으로 돌아갔고, 불과 수 시간 전에 자신이 기도 중에 잠든 그 장소로 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해가 뜨고 한참 시간이 지날 때까지 그가 그 곳에서 울며 기도했으리라 확신한다.
이번 장을 마치면서 나는 여러분에게 베드로의 회개와 유다 이스카리옷의 회개의 차이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고후 7:10은 두 가지 타입의 회개가 있다고 말씀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이며 다른 하나는 "세상의 슬픔"이다. 베드로는 전자의 유형이고 유다는 후자에 해당한다. 그들 둘 다 자신의 죄를 슬퍼했고 둘다 죄에 대한 보상을 했지만 그 둘은 결과가 달랐다. 베드로가 회개한 동기는 주께서 그를 쳐다보셨기 때문이고(눅 22:61) 유다가 후회한 이유는 그가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마 27:3). 베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 한탄하고 슬퍼했고(참고. 눅 5:8) 유다는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 슬퍼했다(마 27:4).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고백했지만(요 21:15-17) 유다 - 여러분은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는 제사장들을 찾아가서 고백했다(마 27:3). 베드로의 회개는 사도권 회복과 주를 섬기는 삶, 수많은 구령의 열매라는 결과를 낳았지만(행 2:41, 4:4) 유다의 회개는 사도권의 완전한 상실과 자살로 끝맺었다(행 1:16-20).
회개에 대해 지겹게 반복하여 떠들어대는 어떤 형제들이 요즘 있다. 나는 회개의 필요성을 믿지만 여러분의 "회개"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의 의를 통해 구원받는 데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다. 여러분이 회개가 "죄들을 더 이상 짓지 않는 것"으로 그친다면 여러분은 10장에 나온 부자 청년 관원과 다를 바 없이 자기 의를 기반하여 하늘나라에 가려 하는 사람이다(10:17-22 주석을 보라).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행 20:21).
여러분이 이미 구원받은 크리스찬이라면 여러분의 죄에 대한 "회개"는 여러분이 죄의 행실을 끊고 그리스도 안의 속사람을 통한 의의 행실을 하는 것과 관련된다. 여러분은 이 부분에 대해 바울이 갈 5:16-26; 엡 4:17-32; 그리고 골 3:1-17에서 권면한 대로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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