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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 : 1사무 1,24-28
복 음 : 루카 1,46-56
그때에
46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렸을 때는 부모님께 모든 것을 청하기만 했습니다.
나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 정도로만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계속 청했습니다.
청한 것을 들어주기를 바라면서 때로는 부모님을 속이는 거짓된 말까지 하면서 청했었습니다.
성인이 되면서 부모님께 더는 청하지 않게 됩니다.
이제는 부모님을 이해하며 그분들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더 부모님과 가까운 관계가 됩니다.
우리의 영성 단계도 이렇지 않을까요?
어린이와 같은 영성의 단계에서는 계속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공갈, 협박, 거짓말까지 섞으면서 청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영성 단계가 되면 청하기보다는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실천하는 데 집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주님과 아주 가까운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지금 내 영성의 단계를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어떤 식으로도 주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바치는 찬양의 노래인 마리아의 노래를 묵상하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에,
자신의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믿었으며,
그래서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픈 마음이 강하게 일었을 것 같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그리고 태중의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
이 만남만으로도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굳게 믿었으며, 하느님의 일은 항상 옳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성모님의 모습은 단순히 청하기만 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이제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실천하는 단계,
그래서 아주 가까운 친밀한 관계임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했을까요?
우리는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늘 의심했으며,
너무나 이른 판단으로 불평불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청하는 것을 절대로 멈추지 않습니다.
찬미의 노래보다 슬픔의 노래를 더 많이 부르면서 주님께서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아갔습니다.
내 영성의 단계를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와 같은 영성 단계가 아닌,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성인과 같은 영성 단계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찬미의 노래를 큰 기쁨을 담아서 부를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당신 여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듣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은 자식에 대한 감사의 예배노래요,
<화답송>은 그때 드린 한나의 기도요, <복음>의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크게 드러내는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꾼다는 노래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찬미의 노래요,
또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서, 마리아는 당신 영혼이 주님 앞에서
용약하며 기뻐하는 이유를 참으로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내 마음이 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당신 여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
이는 마리아의 관상을 잘 드러내줍니다.
곧 마리아가 관상한 하느님은 작고 보잘 것 없고 비천하신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리로 즐겨 들어오십니다.
아니, 작고 비천한 자리에 들어오시기 위해,
더욱 더 작아지고 보잘 것 없고 비천해지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비천한 자신보다 더 작고 비천한 주님’을 만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작고 보잘것없는 자기 안에 들어오시기 위해,
자기보다 더 작아지신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 앞에서 기뻐 용약합니다.
이는 마리아가 자신의 작고 비천함을 부끄러워하거나 부인하기는커녕,
오히려 바로 그 작고 비천함이야말로
하느님을 만나게 해주는 복된 자리임을 알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바로 이것이 마리아의 기쁨의 진원지였던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낮고 어둡고 보잘것없는 자리, 곧 ‘변방(邊方)’이야말로
하느님과 그분 영광의 자리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반대로, 세상의 빛나고 높고 큰 자리, 곧 ‘중심(中心)’은
하느님의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이처럼, 이 노래는 “변방”의 하느님의 현존을 우리 앞에 열어줍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신 하느님의 현존, 곧 당신 자신의 ‘크심’을 아낌없이 내려놓으시고,
아주 작고 보잘것없고 허약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나보다 더 작은 모습으로 계신 하느님이요.
뿐만 아니라 있는지도 없는지도 그 존재를 잘 알아차릴 수도 없을 만큼,
마치 아무것도 아닌 모습으로 계시는 분으로서의 현존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느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어도 되는 충만한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그것은 뭔가가 되거나 뭔가를 이루어 내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있는 그대로의 사랑의 충만함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진정, ‘자신보다 작아진 주님’을 만나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루카 1,54)
주님!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제 안에 베푸신 측량할 수 없이 큰,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여 찬미하는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자비의 노래 외엔 아무 것도 아니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019년 8월 21일에 뉴욕으로 왔습니다.
반갑게도 신부님들이 신문사를 찾아 주었습니다.
시카고에서 사목하고 있는 후배신부님이 왔습니다. 달라스에서 사목하였던 동창신부님도 왔습니다.
서울에서 사목하였던 선배와 후배신부님이 안식년을 얻어서 왔습니다.
작년 10월부터 올해 2월까지 손님 신부님들이 있었습니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올해에도 많은 신부님들이 왔을 겁니다.
뉴욕이 가지는 도시로서의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좋아하는 저는 신부님들과 함께 있는 시간들이 좋았습니다.
멀리 타향에서 만나는 감회가 있습니다. 비록 누추하지만 형제들이 함께 지내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신학생 때의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고, 사목의 경험을 나누어도 좋고,
교회의 미래를 이야기해도 좋습니다. 성지순례 갔던 이야기, 문학이야기도 좋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삶의 커다란 기쁨입니다.
백신과 치료제가 곧 나온다니 내년에는 반가운 손님들이 오면 좋겠습니다.
1979년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처음으로 혼자서 고향을 찾아갔습니다.
강남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동양고속버스를 탔고,
버스 안에서는 ‘곡예사의 첫사랑’이라는 애잔한 노래를 들었습니다.
고모님은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고, 고종사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사촌형님과 함께 고향 선산을 찾아갔을 때입니다.
눈이 내리는 날이었고, 모악산을 지나서 제가 태어났던 고향으로 갔습니다.
기꺼이 함께 가준 사촌형님도 사제가 되어서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저는 친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소에, 사촌형은 외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소에 함께 절하였습니다.
아랫목에 이불을 펴놓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아직 열매 맺지 않았던 순수의 시간이었습니다.
41년의 시간이 지났고, 학생이었던 사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자리를 만들어서 지내고 있습니다.
41년 전 순수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2,000년 전에 마리아는 친척인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았음에도 아이를 가졌습니다.
마리아는 남자를 몰랐음에도 아이를 가졌습니다. 두 아이는 성령께서 함께 하신 아이였습니다.
성서는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대화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제들의 대화와는 다른 대화였습니다.
제가 학생 때 고향을 방문해서 사촌들과 나눈 대화와도 달랐습니다.
먼저 엘리사벳은 이렇게 마리아를 맞이했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에 아들 또한 복되시나이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축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이 가야할 길을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분은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바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두 아이가 가야할 길은 성공, 명예,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길입니다. 진실과 평화가 만나는 길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나고,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걷는 길입니다.
엘리사벳의 축복과 마리아의 응답 속에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태어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 49)
한상우 바오로 신부
큰일이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기쁨이다.
다시금
우리 영혼을 설레게 한다.
사랑이 설레게 한다.
대림의 빛깔은
이와 같이 사랑으로
맑고 기쁨으로 정갈하다.
춥고 어두운 마음을
비추어 준다.
본모습을 보게 한다.
가득하고도 따사로운
은총이며 축복이다.
우리보다
먼저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다.
하느님을 체험한 후
삶이 달라진다.
전능하신 분의
지극하고도 충만한
자비의 힘이다.
비참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잡아 일으켜 세우시는
하느님의 전능함이다.
자비하신 하느님 안에
우리가 있다.
사랑으로
큰일을 하시는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대림이다.
대림은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가슴이며
사랑으로 설레는 영혼의 기쁨이다.
나는 왜 기쁜가? 나의 완성됨으로 부르는 노래, 마니피캇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마티피캇’을 노래하시는 장면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이 노래는 성모님 생애에 가장 행복한 시간일 것입니다.
사람은 행복을 위해 삽니다.
그런데 오늘 성모 찬송은 인간이 어떤 때 궁극적 기쁨을 누리는지 잘 보여줍니다.
우리 각자가 행복하고 기쁘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궁극적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인생을 허비하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돈 많이 벌어 빨리 은퇴하여 슬슬 여행이나 다니고 싶다고 합니다.
그것이 궁극적 행복일까요? 돈이나 쾌락, 명예는 당연히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들입니다.
몸은 행복할 수 있으나 성령께서 함께하실 수 없기에 마음은 공허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 가장 행복하도록 창조되었을까요?
분명 제대로 뛰고 있다면 결승전을 통과하는 것처럼 인간의 창조 목적이 완성되는 때는
인간 창조가 완성되는 때일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미완성의 행복만을 누립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주님을 찬송할 때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인간의 완성 시점을 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지향하신 무언가가 성취되고 있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완성은 바로 이 창조된 우리 자신이 성취되는 때이고
이때 참 기쁨을 누리고 참 찬미가 솟아나게 됩니다.
그것이 언제일까요? 주님을 만나는 때? 그것보다 더 가야 합니다.
유튜브 채널 ‘ODG; 입양 가족의 과거 사진 같이 보기’에
입양된 아이와 엄마가 현재 사진부터 시작하여
입양할 당시의 과거 사진까지 함께 보며 이야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엄마랑 오늘 함께 동하(7세)와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 같이 볼 거야.
엄마는 집에서 주로 뭐 하는 거 같아?”
“밥하고 우리 씻기고 우리 재우고 영어 공부하고 ... ”
“그럼 이제 함께 사진 볼까? 이거 기억나?”
2020년 초밥 식당에서 엄마와 남동생 동주(4세)와 함께 먹는 사진이 나옵니다.
“어!”
바나나 인형을 입은 엄마와 동하와 동주.
“웃기지?”
조금 더 어린 동하가 아빠 자동차 세차하는 거 도와주는 사진.
“동하 세차 엄청나게 잘하는데. 엄마 이거 동영상 찍어놓은 것도 있어. 어땠어?”
“그때 아빠 도와주어서 기분이 좋았어!”
동하가 유치원에서 공연하는 모습.
“엄마는 저 때 동하밖에 안 보였어. 너무 예뻐서.”
아빠가 두 아이를 함께 업고 있는 사진.
“너희 둘이 합치면 거의 40kg이야. 아빠 무겁겠다.”
사진이 점점 뒤로 가면서 동하와 동주는 계속 어려짐.
“동하, 동주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서 엄청나게 싸웠지?
동주가 동하 장난감 다 가지고 싶어 했지. 그래서 동하가 진짜 양보 많이 했는데. 그치?”
2017년 둘째(동주) 입양 사진.
“동하, 혹시 동주 만났을 때 기억나니? 어떤 것들이 기억나?”
“동주 얼굴 봤을 때랑 동주가 나 안아주었을 때. 가장 기뻤어.”
“아, 진짜? 엄마는 그게 동주한테 좀 슬픈 순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동하 처음에, 동주 오고 나서, 동주가 너무 아기니까 동주만 막 안아야 하고 동주만 챙겼었잖아.
그래서 동하가 질투가 났을 것 같은데 어땠어?”
“마음이 조금 속상했어.”
“그런데 동하가 동주 안아준 이유가 뭘까?”
“동주 좋아서.”
“조금 속상하지만, 동주 좋아?”
“응!”
“동하는 왜 동주만 좋아해 주냐고 그랬잖아.
근데 동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동하가 있을 때는 동하한테만 잘해줬어.
동하만 데려 다니고 동하만 예뻐해 주고 동하만 재워주고.
왜냐하면, 동주가 없었을 때는 동하 혼자만 있었으니까.
할아버지, 할머니 모시고 해변에 밥 먹으러 가는 사진이야. 동주가 사랑 독차지할 때.
저거는 디즈니랜드 갔을 때야. 동하가 이거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
혹시 동하가 기억 못하더라도 이런 사진 보면서
엄마 아빠가 동하만 엄청나게 사랑했던 때가 있었다는 거 기억하라고 사진 찍어놓은 거야.”
2014년 동하 처음 만났을 때의 사진.
“동하 아빠, 엄마 처음 만났을 때 기억 안 나지?
엄마가 어떻게 만났는지 좀 설명을 해 줄게. 엄마가 제일 기억나는 거는.
동하 위탁 어머니가 동하를 건네주기에 엄마가 동하를 안았는데
동하가 엄청나게 울었었던 거 같아(엄마 약간 그때 기억하며 훌쩍임). ...
엄마는 그때 동하가 우는 것도 예쁘다고 했던 것 같아.
엄마가 갑자기 엄마가 되어서 아기를 볼 줄 몰라서 할머니 집에 아빠랑 같이 3개월 살았었는데,
할머니가 뭐라 그랬느냐면 ‘네가 아이를 낳아도 동하보다 예쁜 아이는 못 낳는다’라고 하셨어.
이거는 동하 돌 때 사진. 이거는 동하 오고 나서 첫눈 올 때 찍은 사진.
동하한테 첫눈 보여주고 싶어서 옷 둘둘 싸매서 밖으로 나갔던 거야.
끝났어. 뭐 하고 싶은 말 없어?”
“음…. 엄마가 나 이렇게 잘 키워줘서 고마워! 엄마 좋아!”
엄마 너무 행복해서 눈물을 흘림. 서로 안아 줌.
“엄마는 동하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동하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시간이 없어.”
“엄마랑 오래오래 함께 잘 살고 싶어.”
“엄마도. 엄마 건강해야겠네.”
엄마의 눈물은 동하의 행복과 감사에서 나왔습니다.
이는 마치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행복하게 해 주고
또 엘리사벳의 감사를 받았을 때와 같습니다.
행복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을 넘어서서 타인을 행복하게 해 줄 때 참으로 찾아옵니다.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창조하셨고, 하와는 아담의 도움이 되라고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때 창조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죄는 자신을 위해 살기 때문에 타인에게 오히려 해가 되는 존재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미하게 되는 이유는
원죄에서 회복되어 내 존재 자체가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주님을 찬미할 때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잉태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사벳을 행복하게 해 주고 그것에 감사를 받았을 때입니다.
인간의 충만한 완성의 순간이기에 행복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행복과 찬미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 때 저절로 나옵니다.
그때 성모님과 함께 참으로 마니피캇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의 선물이 가져다준
기쁨과 놀라운 믿음을 지닌 여인들의 찬미가를 들려줍니다.
우선 루카 복음서는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가 부른 ‘마리아의 노래’를 전합니다.
이 노래는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여인들 가운데에 가장 복되시며”(1,42) “주님의 어머니”(1,43)라고
기쁘게 칭한 데에 대한 마리아의 답이었습니다.
게다가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선물을
조건 없이 받아들인 마리아의 믿음을 선언하며 마리아의 찬미를 유도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
자신이 ‘주님의 어머니’가 됨을 기리는 마리아의 말은
엘리사벳에 대한 답례를 넘어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가였습니다.
사실 이 노래는 상황과 주제 그리고 작성법의 세 가지 측면에서
‘한나의 노래’(1사무 2,1-10 참조)와 비슷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 찬미가를 부르기 직전, 한나가 주님께 기도하여 얻은 아들 사무엘을
약속대로 주님께 바치려 엘리 사제를 찾아가 예배를 드린 장면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베푸신 수직적인 자비와,
비천한 이들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속에 이루어지는 주님의 수평적인 자비를 찬양하며,
마지막 구절에서 하느님의 구원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동정녀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의 아들을 잉태하게 하시지만
그것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보편적인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던 것입니다.
간절한 기다림 속 회개의 시간인 대림 시기의 막바지에 ‘마리아의 노래’를 다시 불러 봅니다.
우리가 더욱 겸손해지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