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과 추사, 그리고 초의선사가 남긴 이야기,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느 시기에 누군가를 만난다. 그 만남이 오래 지속되기도 하고, 짧은 시간 끝나기도 하는데, 그 중에 몇 사람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조선 후기를 살았던 다산 정약용(1762.6.16 ~ 1836.2.22.)과 추사 김정희(1786년, 정조 10년 1856년, 철종 7)) 그 두 사람은 살아생전 만나지를 못했으나 그 두 사람과 만나 각별하게 교유관계를 이어갔던 사람이 <동다송>을 지은 초의선사 의순(草衣, 1786~1866) 이었다.
담양 소쇄원, 완도 부용동과 함께 호남 3대 정원으로 알려져 있는 강진 백운동원림은 처사 이담로(李聃老, 1627∼1701)가 중년에 조성하였고, 만년에 데리고 들어와 살기 시작한 둘째 손자 이언길(李彦吉)에게 유언으로 ‘평천장(平泉莊)’의 경계를 남겨 후손들에게 전함으로써 지금까지 12대에 걸쳐 이어져 온 유서 깊은 생활공간이다.
원림의 뜰에 시냇물을 끌어 마당을 돌아나가는 ‘유상곡수’의 유구가 남아 있고, 민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선비의 덕목을 담은 소나무, 대나무, 연, 매화, 국화, 난초 등이 자라는 화계(花階)를 만들어 지형을 자연스럽게 보전하였다.
이 곳, 강진 백운동원림은 후손들과 명사들이 남긴 문학작품에 자주 등장하는데, 다산 정약용은 백운동에 묵으며 그 경치에 반해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백운첩(白雲帖)」에 12승경을 칭송하는 시를 남겼다.
다산과 함께 이곳을 찾았던 두 사람은 가고 없어도 그들이 흔적이 벡운첩으로 남아 있는데, 추사가 초의에게 남긴 편지가 그 당시의 풍경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추사가 살았던 시대와 달리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던 편지가 어느 사이 사라져버렸다. 이메일이나 문자, 그리고 카톡을 비롯한 인터넷이 대세인 세상에서 한 자 한 자 정성껏 백지를 메우는 편지. 더구나 보내고 받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편지를 어느 누가 선호하겠는가? 하지만 불과 200여 년의 세월 저편에서는 편지가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던 중요한 징검다리였다.
추사(秋史) 김정희는 조선의 사대부들 중 유독 편지를 많이 보낸 사람이다. 추사는 평소에도 불경을 읽고 선(禪)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가깝게 지내는 스님들이 많았다. 백파와 차로, 이름이 자자한 초의가 그들이다. 유배지인 제주도 대정에서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보냈지만 한 번도 답을 받지 못하니 아마도 산중에는 반드시 바쁜 일이 없을 줄 상상되는데 혹시나 세체(世諦)와는 어울리고 싶지 않아서, 나처럼 간절한 처지인데도 먼저 금강(金剛)을 내려주는 것인가.
다만 생각하면 늙어 머리가 하얀 연령에 갑자기 이와 같이 하니 우스운 일이요. 달갑게 둘로 갈라진 사람이 되겠다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선에 맞는 일이란 말인가.
나는 사(초의선사)를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사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茶)의 인연만은 끊어버리지도 못하고 쉽사리 부수어 버리지도 못하여 또 차를 재촉하니, 편지도 보낼 필요 없고 다만 두 해의 쌓인 빚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게요.”
외롭고 고적하기만 한 적소(謫所)에서 편지를 보내도 답장은 없고, 더더구나 차마저 한 해를 건너뛰어 보내니, 얼마나 서글프겠는가. 답장도 필요 없으니 밀린 빚이나 빨리 보내라는 추사 김정희의 고독이 엿보이는 편지다. 이 편지를 보면 앙탈을 부리는 열대여섯 살 소년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고독과 쓸쓸함으로 절어 있는 위대하지만 가냘픈 한 인간의 진면목을 보는 것 같아 가슴 아프기 이를 데 없다.
사람은 가고 없어도 그들이 남긴 글이 이 세상에 나아 후학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으니, 글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강진 백운동 원림에서 회고했다,
2024년 11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