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니실린이 없었다면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사망자는 얼마나 더 늘어났을까?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보면
의약품 하나가 인류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한 것이
극명하게 와 닿습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피 2005년 5월판에 실린
'존 스완(역사가 겸 미국 식품의약국 직원)'이 뽑은
세상을 바꾼 의약품 일곱 가지를 소개하고
그것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살펴보았습니다.
1. 아편
양귀비 열매에서 채취한 아편은 흔히 마약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초기의 치료학에서는 중요한 진정제이자 진통제로 쓰였습니다.
아편은 생아편, 아편말, 흡연용 아편으로 나뉘는데,
생아편은 덜익은 양귀비 열매에 상처를 내어 흘러아오는 액을 체취한 것입니다.
이것을 말린 후 가루로 낸 것을 아편말이라 하고,
생아편을 물에 녹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증발, 농축시킨 것을 흡연용 아편이라고 합니다.
아편 열매에 상처를 내어 생아편을 추출하는 모습
아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청나라가 쇄국정치를 펴던 1840년대입니다.
당시 유럽은 중국산 비단, 도자기, 홍차가 유행하고 있었고,
특히 홍차는 이미 일상 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기호품이 되어있었습니다.
따라서 홍차 등을 수입하기 위해서는 은을 제공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런 일방적인 무역을 타개하기 위해 영국은
인도에서 생산되던 목화와 아편을 대량으로 중국에 수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인해 중국 내는 아편 중독자가 증가,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또한 아편 수입으로 대량의 은이 중국 밖으로 흘러나갔고
은의 가치 상승으로 인해 경제마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중국은 그 타결책으로 아편 수입의 중심이었던 광저우에
아편금지론자 '임칙서'를 파견하여 아편 수입을 막으려 하였습니다.
'임칙서'는 무력을 동원하여 영국 상선에서 강제 아편 몰수하였고
이로 인해 아편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아편전쟁은 청나라의 패배로 끝나고,
결국 중국의 봉건사회가 흔들리게 되었으니
아편 하나가 세계를 뒤흔든 것입니다.
2. 천연두 백신
천연두는 '마마'라 불리며 과거 호환보다 더 무서운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신에 발진과 수포(물집), 농양(고름집)이 발생하고
고열로 인해 의식을 잃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전염성이 매우 높으며,
천연두 백신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많은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더욱 더 끔찍한 것은
병이 다 낫고 나서도 농양이 있었던 자리에
보기 흉한 흉터가 남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곰보'가 되는거지요.
아즈텍 벽화에도 그려져있는 천연두 환자 그림
천연두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치명적인 것으로는 감염자의 20~40%의 사망율을 보였다고 합니다.
천연두의 사망율이 불확실한 이유는
상대적으로 일찍 백신에 개발되어
천연두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WHO에서는 1980년에 천연두가 근절되었다고 발표하였는데,
이는 더 이상 천연두 균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며
더 이상 천연두 환자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더 이상 천연두 환자에 대한 연구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천연두 환자의 사망율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알 수 가 없게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1993년에 천연두가 근절되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1798년 '에드워드 제너'는 천연두 백신을 발견합니다.
인간에게 발생한 천연두와 비슷하게
소에게 발생하는 우두라는 전염성 농포 질환이 있는데,
간혹 목축업자들 중에는 이 우두에 걸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우두에 걸렸던 사람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게 되는데
제너는 이 사실에 착안하여 약해진 우두균을 사람에게 접종함으로서
천연두 백신을 개발하게됩니다.
한국에서는 지석영 선생님이 일본인에게서 종두법을 배워
자신의 처남에게 접종한 것을 계기로 천연두 예방접종이 시작된다.
사실 처음에는 백신이 우두에 감염된 소의 고름에서 채취했다는 이유로
백신 접종을 맞으면 얼굴이 소의 형태로 변한다든지
접종부위에 소 머리가 자라난다든지 하는 소문이 나돌아
예방접종을 맞지 않으려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제너가 천연두 백신을 최초에 시도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천연두 백신은 천연두 근절에 공헌을 했다는 점도 있지만
그 보다는 바이러스 예방 방법에 대해 눈을 뜨게 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습니다.
또한 천연두 백신이 만들어진 것을 계기로
더 많은 전염병에 대한 정복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미국이 천연두 테러에 대해 대비하는 이유는
이슬람 테러 세력이 탄저균 테러 다음으로 천연두 테러를 하게 될 것이라는
첩보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현재 천연두는 근절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천연두 예방접종을 하지 않았고
의료체계 또한 천연두가 창궐할 때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만약 천연두에 의한 테러가 일어나게 된다면
세계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3. 살바르산
'매독 스피로헤타'라는 특정 병원균을 공격하도록 만든 화학약품인 살바르산,
이것을 발견하기까지 무려 606번이나 실험했다고 하여
보통 606호라고 쓰입니다.
매독, 바일병, 회귀열 등의 특효약으로 쓰였으나
부작용이 심해 현재는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살바르산을 만든 과학자는 독일의 '파울 에를리히'로
여러 가지 화학물질이 인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1908년 면역학에 대한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고
1910년에는 앞서 얘기한 살바르산을 발견하였습니다.
화학요법의 아버지, '파울 에를리히'
그의 이런 혁명적인 치료법으로 오늘날 화학요법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4. 인슐린
인슐린은 이자(췌장, pancrease)에 있는
랑게르한스 섬이라는 조직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포도당을 글리코겐으로 합성하여 간에 저장시킴으로써
혈중 포도당의 농도를 감소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1921년 프레데릭 밴팅과 찰스 베스트 등은 인슐린 호르몬 분리에 성공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인슐린을 당뇨병 환자의 치료에 사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전까지 당뇨병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방법은
오로지 굶기는 것 뿐이었습다.
인슐린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신속한 효과를 준 약은 없다고 합니다.
인슐린 결정
5. 페니실린
세계 최초의 항생제로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의약품입니다.
페니실린은 X-레이, 수액제(링거)와 함께 20세기 3대 의료혁명으로 꼽힙니다.
페니실린의 발견은 사실 우연이라고 봐야합니다.
1928년 영국의 세포학자였던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이
세균을 배양하던 배양접시 하나에서
둥근 원 모양으로 세균이 자라지 않은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플레밍은 이를 무심히 넘어가지 않고
세균이 자라지 않은 부분을 현미경으로 관찰해 본 결과,
우연히 떨어진 푸른곰팡 포자가 발아하면서
주변의 세균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됩니다.
이에 푸른곰팡이에서 나온 어떤 물질이 세균을 죽일 수 있음을 확신하고
그 물질이 숙주에는 저독성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어
페니실린이라고 명명하게 됩니다.
사실 실험 도중 배양접시에 다양한 곰팡이 포자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 가운데 유독 항생제를 생산하는 곰팡이가 떨어져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어찌보면 인류에게 있어서 하나의 행운과도 같습니다.
푸른곰팡이류인 Penicillium notatum,
이 이름에서 페니실린이 나왔다.
또한 그것을 가볍게 여겨서 넘어가지 않고
(사실 그 이전에도 배양기에 곰팡이 포자가 떨어지는 경우는 많았습니다)
하나의 가설을 세워 끝까지 연구해 나간 플레밍의 업적 역시 대단한 것입니다.
푸른곰팡이 주위에는 세균이 자라지 못했다.
그러나 처음 발견 당시 페니실린은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습니다.
1940년에 영국의 H.W. 플로리 및 E.B. 체인 등이
페니실린을 분리 추출해 내는데 성공했고
1941년에는 임상적으로 유효함을 증명함으로써
페니실린이 치료에 쓰이게 되어 수많은 인명을 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페니실린의 재발견'이라고 부르는 의학계에 일대 혁명적인 사건이며
항생물질 시대의 개막을 알리게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한가지 더 재미있는 사실은
페니실린을 연구하던 학자들이 페니실린의 효과를 입증하기 위한 방법에 있습니다.
학자들은 쥐 50마리에게 치사량의 세균을 주입하여,
반은 페니실린을 주사하고, 반은 주사하지 않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페니실린을 주사한 쥐는 살아남았지만,
주사하지 않은 쥐는 모두 죽었다고 합니다.
결국 페니실린이 임상적으로 유용함을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실험에 쓰인 쥐가 흰쥐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이야기지만 흰쥐는 페니실린에 과민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흰쥐에게 페니실린은 독약이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실험에 흰쥐를 사용했다면 다 죽었을 것이고
페니실린의 약효는 신뢰할 수 없었을 것이며,
사람에게 사용되는 것 또한 장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6. 에노비드
1960년 미국에서 개발된 최초의 먹는 피임약인 에노비드는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의약품 설명서를 넣은 최초의 약으로
이 설명서에는 약 복용시 있을지도 모를 부작용에 대해 명시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부작용 고시에 대해 많은 보건 전문가들이 반발했지만
현재는 이런 식으로 부작용에 대해 알려 주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의보다 더 큰 사회적 영향은
여성을 원하지 않는 임신과 양육의 의무에서 해방시켜 주었다는 것이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먹기만 하면 99%에 가까운 피임율을 보이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복용하였습니다.
경구 피임약은 시간에 맞춰 복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로 인해
1960년대 후반부터 성해방과 여성해방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또한 인구억제에도 기여하여
미국의 경우 1900년대 평균 가구당 자녀수를 3.5명에서
1970년대 2명 수준으로 떨어뜨렸습니다.
이런 이유 등으로
먹는 피임약은 20세기 최고의 발명품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7. 탈리도마이드
진정제로 쓰이는 탈리도마이드는
1950년대 말 쥐에게 임상실험을 거치고 일반인에게 판매되었습니다.
하지만 동물 실험에서 아무런 이상이 없었던 이 약은
사실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바로 임신 중 복용시 기형아 출산이라는 부작용이었습니다.
1960년에서 1961년 사이 15,000명에게 탈리도마이드에 의한 피해가 나타났고
12,000명이 기형아를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첫해에 8,000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탈리도마이드 가장 큰 부작용으로 손발이 기형인 아이들이 태어났다.
당시 사회는 큰 쇼크에 빠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소설, 영화 등이 만들어졌습니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온 예언자들에 대한 출생도
임산부가 약을 잘못 복용하여 태어난 것으로 설정되어 있으니
이 사건이 미국 사회에 끼친 영향이 어떠한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재앙을 계기로
세계의 각국 정부의 의약품 규제방법에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