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횃불싸움과 같이 정월 대보름에 하는 풍속놀이이다. 보름달이 떠오르기 전에 나무로 틀을 엮고 짚을 씌운 달집을 마을 동산의 적당한 기슭에 만들어 둔다. 달집의 위치는 마을에서 달맞이하기에 가장 좋은 곳에 자리잡는다. 형태는 지방에 따라 약간씩 다르나 대개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다. 한 쪽 면만을 터놓고 다른 두 면은 이엉으로 감싼다. 터놓은 쪽을 달이 떠오르는 동쪽으로 향하게 하고, 가운데 새끼줄로 달 모양을 만들어 매단다. 달이 솟아오르는 것을 처음 본 사람이 불을 당기고 달을 향해 절을 한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대나무 매듭을 태워 폭죽소리같이 '툭툭' 소리가 나도록 했다. 이는 잡귀와 액을 쫓기 위함이며, 달집에 수숫대·볏짚을 넣는 것은 풍요로운 생산을 위함이었다. 남자들은 온종일 거두어들인 연을 걸기도 하고, 아낙들은 소원을 적은 종이나 입고 있는 새옷의 동정을 떼어 달집을 태우면서 자신의 액이 소멸되기를 기원한다. 불꽃이 환하게 피어오르면 풍물을 신나게 울리며 한바탕 어울려 춤과 환성을 울리며 뛰어 논다. 달집이 타는 불에 콩을 구워 먹기도 했다. 지방에 따라서는 달에 절을 하면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 하며, 또 1년간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고 믿기도 했다. 한꺼번에 불이 잘 타오르면 풍년이 들고, 타다가 꺼지면 흉년이 든다는 속설이 전해졌으며 달집이 타서 넘어질 때 그 넘어지는 방향에 따라 그 해의 풍·흉을 점쳤다. 대보름의 만월을 바라보며 풍농(豊農)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점풍(占豊)의 의미를 지녔다.(→ 대보름) 달집태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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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하던 점풍(占豊) 의례풍습으로 이날 초저녁에 동산에 올라가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절을 하는 풍속이다. 짚으로 만든 집에다 불을 붙이는 달집태우기도 하며, 쥐불놀이와 불놀이도 함께 행한다. 정월 대보름의 달은 1년 중 추석 한가위의 달과 더불어 양기(陽氣)가 가득찬 달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신성시해왔다. 특히 태음력에 기초하여 책력(冊曆)을 만들어 농사를 지어왔기에 달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했다. 농민들은 풍년을 기원하여 이날 달빛을 보고 그해의 풍흉을 점쳤다. 달을 보고 과거급제를 기원하거나 총각과 처녀들이 시집·장가 가기를 빌기도 했다.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달이 떠오르는 것을 먼저 보면 득남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에 달을 보며 절을 하는 풍습이 전해져왔다. 이것은 만월이 되면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속신에서 비롯되었다.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에는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맞이하는 것을 영월(迎月)이라 한다.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길하다. 그리고 달빛으로 점을 친다. 달빛이 붉으면 가물 징조이고, 희면 장마가 들 징조이다. 또 달이 뜰 때의 형체·대소·고저로 점을 치기도 한다. 또 달의 윤곽과 테두리의 엷고 진함으로 1년 동안의 농사일을 점친다. 달의 사방이 두터우면 풍년이 들 징조이고 엷으면 흉년이 들 징조이며, 조금도 차이가 없으면 평년작이 될 징조이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를 통해 달에 대한 우리 민족의 신성성(神聖性)을 엿볼 수 있다.(→ 대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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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더위를 팔아 한 해의 더위를 모면해보자는 속신으로 매서(賣暑)라고도 부른다. 될 수 있으면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이웃 친구를 찾아가 이름을 부르며, "내 더위 사가라" 또는 "내 더위, 내 더위, 먼디 더위" 하면 곱절로 두 사람 몫의 더위를 먹게 된다는 속신이다. 따라서 대보름날 아침에는 친구가 이름을 불러도 냉큼 대답하지 않으며, 때로는 미리 "내 더위 사가라" 하고 응수한다. 그러면 더위를 팔려고 했던 사람이 오히려 더위를 먹게 된다고 한다. 더위는 한 번 팔면 되지만 익살맞은 장난꾸러기들은 여러 사람에게 더위를 팔수록 좋다고 이집 저집 찾아다니며 아이들을 골려주기도 한다. 대보름날의 행사가 여름철 더위에 영향을 준다고 믿기 때문에, 사람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축들의 더위를 막을 예방책으로 소나 돼지의 목에 왼새끼를 걸어주거나 또는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의 가지를 꺾어 둥글게 목에 걸어준다. 왼새끼를 목에 걸어주는 것은 고대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며,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의 가지는 악귀를 쫓는 민속적 주술로 쓰이는 일이 많아 더위를 막는 효과가 있다고 믿는 데서 유래했다고 여겨진다. 옛날에는 입춘날 아침에 더위팔기를 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지금은 보편적으로 상원날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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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차전놀이, 중요무형문화재 제24호 |
동채싸움이라고도 한다. 차전은 정월 대보름 날에 강원도 춘천, 경기도 가평, 경상북도 안동지방에서 줄다리기와 함께 집단적으로 행한 큰 놀이였다. 〈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에 "춘천지방에는 차전을 하는 풍습이 있다. 외바퀴 수레를 만들어가지고 각 동네별로 편을 짜서 서로 앞으로 밀고나가면서 싸우는 것으로서 차전에 패하여 쫓겨가는 편에는 그해 흉년이 든다고 한다. 경기도 가평의 풍습도 이와 같다"라고 하여 놀이의 기원이 풍요를 점치는 것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문헌의 기록에는 없으나 경상북도 안동지방에서는 동채싸움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차전이 전승되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차전은 태백산 마루를 타고 춘천과 안동을 연결하는 영서 일대의 고유한 놀이로서 상당히 일찍부터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놀이는 마을단위로 진행되었는데, 온 마을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공동체 행사였다. 마을끼리 차전이 붙으면 기력이 왕성한 청장년들이 서로 힘껏 싸웠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대동단결하여 응원하면서 겨루었다. 강원도에서는 외바퀴수레를 만들어 이 동네 저 동네 편을 갈라 양편이 서로 밀어서 밀리는 쪽이 지는 것으로 했다. 곡식에 해로운 새를 쫓는 뜻으로 100가지 새 이름을 다투어 부르며 새몰이하는 시늉을 하면서 차전을 하는 곳도 있었다. 한편 춘천에는 '초헌(
軒) 태우기 놀이'가 있었는데, 음력 정월 보름이 되면 청년들이 초헌을 만들어놓고 동리로 지나가는 사람을 태워 한참 돌아다니다가 그 사람의 절을 받은 다음에야 돌려보냈다. 이는 옛날 적을 포로로 하여 항복을 받던 유풍으로 차전놀이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경상북도 안동지방의 동채싸움이라고 부르는 차전놀이에서 동채는 초헌 대신에 굵은 서까래 정도의 동채 2개를 십자(+)형으로 엇갈려놓고 중간의 교차점을 쇠줄로 묶은 다음, 그 위에 1명의 지휘자가 타고 힘센 사람들이 동채를 어깨에 메고 싸우는 싸움이다. 군(郡) 대항으로 많은 사람이 모여 편을 나눠 집단적인 놀이를 펼쳤다. 동부와 서부로 나눈 각 편의 대장이 영기(令旗)를 들고 지휘하는 가운데 일동이 함성을 지르면서 풍물에 맞추어 상대편을 제압한다. 각 편의 이름을 쓴 깃발과 전필승(戰必勝)이라고 쓴 깃발을 들고 기세를 올린다. 군중들은 풍물을 울리며 응원을 하고 안동 군내가 온통 신명나게 놀았다. 동채싸움에서 승리하면 "월사, 월사, 동부 이겼다"라고 하면서 전군중의 환호가 대단했다. 하루 종일 흥청거리던 군중들은 노래와 춤으로 즐기다가 풍물을 울리면서 〈 칭칭이소리〉를 부르며 자기 마을로 돌아갔다. 안동 차전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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윷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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윷놀이하는 장면 | 정초부터 정월 대보름 사이에 가정이나 마을에서 여럿이 함께 즐긴다. 한 뼘 남짓한 길이의 곧고 둥근 막대기를 둘로 갈라서 만든 4개의 윷으로 즐긴다. 등과 배의 경계선을 얼마간 깎아내서 배를 약간 불룩하게 하여 윷이 굴러서 엎어질 듯하다가 젖혀지며, 젖혀질 듯하다가 엎어지는 변화를 가져온다. 윷가락은 엎어지거나 젖혀지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가지므로 4가락을 종합하면 5가지의 경우가 생긴다. 셋이 엎어지고 하나가 젖혀질 때 '도', 둘이 엎어지고 둘이 젖혀질 때 '개', 하나가 엎어지고 셋이 젖혀질 때 '걸', 넷이 다 젖혀졌을 때 '윷', 넷이 다 엎어졌을 때 '모'이다. 도·개·걸·윷·모는 옛날 부여의 관직명에서 온 것으로 원래 후세의 종정도(從政圖)놀이와 같은 것이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도·개·걸·윷·모는 가축의 이름을 딴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즉 도는 돼지[亥], 개는 개[犬], 걸은 양(羊), 윷은 소[牛], 모는 말[馬]을 가리킨다고 한다.
윷의 종류로는 가장 많이 애용되는 보편적인 크기의 가락윷(채윷), 굵기가 새끼손가락 정도인 나무로 1~2㎝가 되게 만든 밤윷, 콩알이나 팥알에 금을 그어 사용하는 콩윷 등이 있다. 윷놀이판은 멍석이나 짚방석을 깐다. 윷가락 던지기는 4개를 나란히 세워서 오른손의 엄지손가락과 손바닥 사이에 끼고 앉은 키보다 약간 높게 올라갈 정도로 던진다. 말판은 말밭 또는 윷판이라고도 부르며 종이나 판자에 선과 점을 찍어서 만든다. 승부는 윷가락을 던져 말판의 말을 전진시켜 승부를 결정짓는다. 말판에 놓는 말은 상대 편과 자기 편을 구별할 수 있는 나뭇조각이나 돌 같은 것으로 놓는다. 말을 놓는 방식도 매우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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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밟기] 음력 정월 보름에 행하는 세시풍습의 하나. |
다리를 왔다갔다 건너면서 노는 세시풍습으로 답교놀이[踏僑戱]라고도 한다.
사람의 다리[脚]와 물 위의 다리[橋]가 같은 음을 지닌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다리를 밟으면 한 해 동안 다리의 병을 피할 수 있다는 속설 때문에 크게 성행했다. 남녀노소 모두 나와 보름달을 즐기면서 어우러졌다. 풍물패도 동원되어 신명을 돋구었고, 행사가 매우 풍성했다. 한창 때는 밤이 지새도록 다리를 밟았다. 서울의 수표교나 광교의 다리밟기, 송파다리밟기, 함흥 만세교 답교놀이 등이 유명했고, 거의 전국적으로 중요한 다리 위 어디에서나 행해졌다. 이수광(李
光)은 〈지봉유설 芝峰類說〉에서 "정월 보름에 달이 뜨면 그해에 풍년이 들 것인가를 점치며 다리밟기놀이를 하는데, 이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것으로서 평상시에는 대단히 성행했다. 남녀가 모여서 다리 위에 들어차서 밤새도록 그치지 않으므로 법관이 심지어는 그것을 금지하고 체포하기까지 했다"고 묘사했다. 〈정종실록 正宗實錄〉에도 "정월 보름경 13일부터 3일 동안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해 숭례문과 흥인문을 잠그지 않고 시민들이 성 밖으로 나가 다리밟기하는 것을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까지도 전국에서 널리 행해지다가 8·15해방 이후 거의 소멸되었다.
*[놋다리밟기] 안동지방에 전승되어오는 여성놀이. |
경상북도 여러 지방에서는 예로부터 정월 작은보름(14일)에 부녀자들의 놋다리놀이가 성행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안동지방에서 성행했다. 대보름이나 작은보름날 밤에 명절 옷을 차려 입은 부녀자들이 일렬종대로 허리를 굽히고 앞사람의 허리를 두 팔로 껴안아 긴 다리를 만드는데 이것을 놋다리라고 한다. 그 위에 처녀아이를 올려 걸어가게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밤새도록 즐긴다.
노는 방법은 지방에 따라 약간씩 달랐다. 어떤 곳에서는 놋다리를 만든 다음 뒤꼬리에 있는 사람부터 1명씩 순서로 놋다리 위를 건너게 하여, 다 건너 앞에 이르면 내려서 그 자리에 허리를 굽히고 한 사람이 서서 다시 놋다리를 이룬다. 건너는 사람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은 어느 곳에서나 같다. 놀이방법은 둥둥데미·실감기·놋다리 등으로 이루어진다. 의성을 비롯한 일부지방에서는 놋다리놀이(허리를 굽힌 모양이 휘어진 골기와 같다는 비유에서 온 말)를 기와밟기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부녀자들이 남북 양편으로 갈라져서 위와 같은 방법으로 다리를 빨리 건너기 내기를 한다. 다리를 건너는 것은 처녀아이를 시킨다. 이 경기가 끝나면 처녀아이를 목마에 태워서 밀고 넘기기 내기를 하면서 밤이 깊도록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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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싸움놀이] 광주직할시 광산구 대촌면 옻돌마을에 전승되어 오는 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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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싸움놀이, 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 | 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 해마다 음력 정월 초순경부터 2월 초하루에 걸쳐 행해지는 경기놀이의 일종이다. 장흥·강진·영암 등지에서 줄다리기의 앞놀이로 고싸움이 널리 행해졌다. 이를 미루어볼 때, 이 놀이는 전라남도지방의 보편적인 놀이로 보인다. 고싸움의 '고'는 옷고름이나 노끈의 한 가닥을 길게 늘여서 둥그런 모양을 맺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고싸움이란 2개의 고가 서로 맞붙어 싸운다고 해서 고싸움이라 부른다. 노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집집마다 볏짚을 추렴해서 준비해두고, 곳대가리를 만드는 통대나무, 성주고의 몸체인 지렛대, 성주고를 바치는 가랫장, 성주굉갯대 등도 준비한다. 줄을 만드는 줄드리기, 드린 줄을 다시 세 겹으로 꼬는 줄도시기, 곳대가리만들기, 고몸뚱이만들기, 조리만들기, 곳대가리세우기, 가랫장달기, 손잡이줄달기 등의 과정을 거쳐 고가 완성된다. 만들어진 고는 아래 윗마을 합동으로 간단히 동제(洞祭)를 올리고 마당밟이를 하면서 고싸움을 지휘할 줄패장이도 선출한다. 줄패장이는 고 위에 올라가 멜꾼을 지휘하여 고싸움을 벌이는데, 모두 투지가 강하고 힘이 센 청장년으로 이루어진다. 그외에도 고리줄잡기라 해서 고의 꼬리를 잡아주는 싸움꾼이 별도로 붙는다. 풍물쟁이가 동원되어 신명을 돋우며, 농기 및 여러 가지 색깔의 깃발이 떠서 마을의 위신과 승리를 기원한다. 상대편 고를 위에서 눌러 바닥에 앉히면 이기게 되는데, 결판이 쉽게 나지 않으면 며칠씩 판을 벌인다. 그래도 승리가 결정되지 않으면 그해 2월 1일에 줄다리기로 결판을 낸다.
*[지신밟기] 음력 정초에 지신을 진압하여 잡귀를 물리치고 마을과 가정의 안녕을 빌던 마을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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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정초에 행해지는 장독 지신밟기, 전남 화순군 한천면 | 지방에 따라 마당밟기·매귀라고도 한다. 해마다 음력 정월 3~14일에 행하며 지금은 영남지방에 많이 남아 있다. 꽹과리·북·장구·징 등을 갖춘 풍물패가 앞서고 양반·하동(河童)·포수·머슴·각시 등이 뒤따르며 길놀이를 한다. 놀이의 맨 처음은 주산(主山) 지신풀이로, 마을의 주산을 찾아가서 서낭목신이 있는 서낭당 앞에서 제사를 올린 후 지신풀이를 한다. 다음은 당산신을 위한 제사를 올린 후 지신풀이를 하며, 이후부터 각 집을 돈다. 지신밟기패가 집에 오면 주인은 정화수를 떠놓고 지신밟기패는 각각 연희와 소리를 하며 지신풀이를 한다. 지신풀이가 끝나면 주인은 음식을 베풀고 성금을 낸다. 지신밟기패는 여기서 모인 성금으로 마을 공동사업비용에 쓴다.
*[쥐불놀이] 정월 첫 쥐날(上子日)에 쥐를 쫓는 뜻으로 논밭둑에 불을 놓는 풍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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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불놀이, 정월 첫 쥐날(上子日)에 쥐를 쫓는 뜻으로 논·밭둑에 .. | 쑥방망이에 불을 붙여 들고 논밭둑의 마른 풀에 불을 놓아 모두 태운다. 마을에 따라서는 아이들이 두 패로 갈라 불을 놓고 불의 세기를 겨루기도 한다. 불을 놓는 이유는 쥐를 쫓아내고 마른 풀에 붙어 있는 해충의 알 등 모든 잡균들을 태워 없애며 새싹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함이다. 또 쥐불로 한 해의 운수를 점치기도 하는데 이 풍습은 지금도 흔하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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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밝이술] 음력 정월 보름날 이른 아침에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해서 마시는 술. |
귀밝이술은 데우지 않고 차게 마시는데, 이를 마시면 귀가 밝아질 뿐만 아니라 1년 동안 좋은 소식을 듣는다고 한다. 귀밝이술은 부녀자도 마신다. 지역별로 행해지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경기도는 정월 대보름날 이른 새벽에 술을 조금씩 마시는데 이때 술을 데우지 않고 어른·아이·부녀자들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마신다. 이렇게 하면 귓병에 걸리지 않고 귀가 밝아지며 좋은 소식을 듣게 된다고 한다. 전라남도에서도 역시 보름날 아침에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져 잘 듣게 된다고 하여 남녀노소가 모두 조금씩 마신다. '귀밝게'라고도 한다. 맑은 술인 청주여야 귀가 더 밝아진다고 한다. 강원도에서는 보름날 아침에 귀밝이술을 남녀 구별없이 1잔씩 마시는데, 귀가 어두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해에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찬 술을 마시며 그 양은 1잔으로 한정된다.
옛 문헌인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에서는, "보름날 이른 아침에 청주(淸酒) 1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한다. 이 술을 이명주(耳明酒:귀밝이술)라 한다"고 했다. 〈열양세시기 冽陽歲時記〉에서는 "상원날 이른 새벽에 술 1잔을 마시는 것을 명이주(明耳酒)라 한다"고 했으며, 〈경도잡지 京都雜誌〉에는 "소주 1잔을 마셔 사람의 귀를 밝게 한다"고 전한다. 또한 황정규의 〈해록쇄사 海錄碎事〉에는 "사일(社日:입춘 후 5번째의 무일[戊日]과 입추 후 5번째의 무일)에 치롱주(治聾酒:귀밝이술)를 마신다. 그러나 지금 풍속에는 정월 보름날로 옮겨졌다"는 문구가 전해지고 있다.
*[부럼] 음력 정월 대보름날 이른 아침에 깨무는 밤·호두·잣·은행 등 껍질이 단단한 과실. |
여러 번 깨무는 것보다 단번에 큰 소리가 나게 깨무는 것이 좋다고 하며 첫번째 깨문 것은 마당에 버린다. 깨물 때 "1년 동안 무사태평하고 만사가 뜻대로 되며 부스럼이 나지 말라"고 기원한다. 이렇게 하면 1년 동안 부스럼이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이가 단단해진다는 속신이 있다.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에는 "보름날 새벽 날밤·은행·호두·무를 깨물며 '일년 열두 달 동안 무사태평하고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주시오' 하고 축수한다. 이를 부럼이라 하기도 하고 고치지방(固齒之方)이라고도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경도잡지 京都雜誌〉에는 "새벽에 밤이나 무를 깨물면서 축원하기를 '일년 열두 달 동안 무사하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날의 부럼깨기를 위해서 14일 밤에 미리 과실을 준비해둔다. 지금도 각 가정에서는 온 식구가 모여 부럼을 깨면서 1년 동안의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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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가지 곡식을 넣어 지은 밥으로, 농가에서는 그해에 농사지을 곡식의 종류를 모두 넣어 지었다. 대개 쌀·보리·콩·조·기장 등을 쓴다. 찰곡식만으로 지으려면 찹쌀·차수수·차좁쌀·붉은팥·검정콩 등을 시루에 찌고, 멥쌀을 섞으려면 찹쌀·차수수·차좁쌀을 합한 양만큼 멥쌀을 넣어 솥에 안친다. 5가지 곡식은 각각 따로 씻어 쌀을 물에 불린 뒤 일어서 쓴다. 이때 팥은 물을 부어 삶다가 물이 끓으면 따라 버리고 다시 찬물을 부어 삶아야 빨리 물러지고 떫은 맛도 없어진다. 정월대보름...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