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궂은비~ 하염없~~이 쏟아지는 영등포의 밤~~~.
내 가슴에 안겨든 사~랑의 불꽃.
고요한 적막 속에 빛나던 그대 눈동자~~.
아 ~ 영~원히 잊지 못할 영등포의 밤이여~~"
중장년층이 즐겨불렀던 오기택의 노래, ‘영등포의 밤’이다.
영등포는 어쩐지 서민들의 애환이 담겨져 있을 듯만 한 곳이다.
영등포는 예전부터 한강가의 유명한, 신비한 사연을 안고 있는 포구였다.
영등포는 왕성하게 번성하고 있던 이웃의 노량나루(鷺梁津)에 치여 내내 밀렸다.
영등포란 나루터는 지금의 한강성심병원 건너편 여의도샛강변에서 여의도의 사라진
옛 양말산(羊馬山)을 오가며 한강 밤섬(栗島)과 마포를 연결하는 소규모 나루터이었다.

경조오부도 왼쪽 하단에 영등포 여의도 율도(栗島)가 보인다.
英登浦로 표기한 점이 눈이 띤다.그 아래쪽에는 방학곶(放鶴串) 지명이 보인다.
오늘날 영등포와 관련이 깊은 지명이다.
영등포란 명칭의 유래는 이렇다.
음력 2월 초하루를 영등일(靈登日)로 하여 보름까지 여의도샛강변에서 영등굿이 성행하였다.
늘 소원하는 것을 이곳 한강에서 빌면 다 들어주는 명당으로 알려져 '靈登'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이 영등(靈登)이 永登(영등)"으로 변형표기된 것이라고 한다.
이 '영등(永登)'과 물가에 있는 마을을 뜻하는 '포(浦)'를 합친 영등포가 된다.
지금의 영등포역 주변을 소머리제(牛頭峴)가 있었다.
"멀리 동쪽으로 왕성(王城)을 바라볼 수 있어 궁궐을 사모하는 사람이 의례히 이 재에 오른다"
영등포(永登浦)가 연유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방학호진이 있는데 그 방학호(放鶴湖)나루터는 곧 서울 마포로 가는 길이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김正浩) <대동지지(大東地志)>진도조(津渡條)는 이렇게 이같이 기록한다.
바위곶이-방아곶이-방학곶이-방학나루로 변하여 오늘날 영등포(永登浦) 지명의 유래로 된다.
영등포의 포(浦)는 바로 포구이다.
그 영등포는 신길동에 있던 암곶 또는 대곶(確串) 방학호에서 찾는다.
영등포여자중학교 정문 옆 고개는 밤고지고개라고 한다.
이는 방학고지 부근에 있다고 해서 방학고지 고개로 불리다 음이 변하여 밤고지 고개로 되었다고 한다.
방학고지의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야기로 전한다.
그 옛날 한강가 귀신바위 근처에 방학정(放鶴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데서 첫 유래로 꼽는다.
조선시대 영조 때 실학자이며 문장가로 유명하던 서명응이
샛강 건너편인 서강에서 바라다 보이는 10곳의 풍경을 읊은 시 가운데
샛강 일대의 아름답고 깨끗한 풍경을 찬미한 「학정명사」라는 시가 있다.
에어돌아 오가는 물 잔잔한 강가를 두르니
빛도 기운도 한 끝 밝아 해와 별이 반짝인다.
밤마다 조수 밀려 와서 깨끗이 씻어 나가니
희고 맑은 모래벌 바다 신이 만드누나
이곳 옛 지명인 상방하곶(上方下串)이 줄어서 방학고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신길동은 1914년 일제에 의해 경기도 관할구역으로 편입되어 상방하곤리라고 하였다.
한강 어귀에 있던 이 마을에 흰모레사장이 펼처져 있었다.
그 모레사장 언덕에는 소나무가 빼꼭하게 들어서 졀경을 이루었다.
천하의 경승지는 '학이 놀다 가는 곳'이라고 해서 방학동(放鶴洞)이라고 불렀다.
그 방학동이 방학고지로 변하였다고도 전한다.
예전에 도성으로 실어나르는 곡식을 빻는 방아간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방아고지가 되었다는 말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