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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과 소백산을 치달아 온 백두대간은 단양 땅을 지나 월악산국립공원의 황장산에 이르고, 다시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이룬 대미산(해발 1115m)에서 한차례 솟구친 후에 조령산을 향하게 된다. 또한 대미산에선 남녘으로 한 줄기 곁가지를 뻗치게 된다. 5만분의 1 축척 지도에 ‘대미산(大美山)’으로 표기된 이 산의 남쪽 자락에는 영남에서 한양으로 넘나들던 옛길인 여우목이 있으며 계립령(하늘재)으로 이어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대미산은 원래 ‘먹으로 그린 눈썹’이란 뜻의 ‘대미산(黛眉山)’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 대미산의 남녘줄기는 여우목고개를 넘고 마전령, 장구령을 지나 운달산을 일으키고, 다시 남녘의 조항령을 거쳐 단산(檀山·956m)을 일으켜 세운다. 단산은 다시 서쪽과 남쪽으로 두 줄기를 뻗어내려 봉명탄광으로 유명한 봉명산과 경북팔경 중 으뜸을 자랑하는 진남교반의 오정산을 솟구치게 한 뒤 영강(潁江)에 스르르 잠기게 된다. 필자는 월악산 남녘에 있는 주흘산, 조령산, 황학산, 백화산, 대미산, 운달산, 공덕산, 천주산, 국사봉, 오정산, 어룡산 등 주변의 산들을 두루 올랐으나 아직까지 단산은 오르지 못했었다. 그러다 잡지에 소개하고자 오정산의 모산인 단산을 찾아 1월과 2월 두차례 오르게 되었다. 단산의 들머리는 문경시 호계면 부곡리의 노인회관 앞 버스종점이다. 버스종점에서 내리면 배나무산(일명 선암산·812미터)의 남쪽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마치 수호하는 것처럼 지키고 있는 삼실마을에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인기척이 없다. 노인 한 분이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자 우리에게 걸어오신다. 평생을 이 곳에 사셨다는 권오주씨(78세)였다. 공손히 인사를 드리니 이곳에서 생산되는 문경사과가 무척 맛이 있다며 마을에는 모두 17가구가 살고 있고 점촌에서 하루 일곱 번 시내버스가 운행된다고 친절히 설명하는 것이었다. 배나무산과 오정산을 잇는 높은 능선이 북녘의 찬바람을 막아주는 남향산자락의 마을은 어느덧 입춘이 지나 과수원에는 금방이라도 꽃망울을 터트리는 봄이 성큼성큼 다가와 따스한 봄볕이 눈부시다.
길은 순현농원을 왼쪽에 끼고 비포장도로(부운령을 넘어 마성면과 연결되는 4번 지방도로)를 느긋하게 오르다 삼거리에서 오른쪽의 과수원 길을 거쳐 다시 4번 도로와 만나게 되고 부운령고개마루에서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서면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굵은 노송과 바위가 어우러진 멋진 능선 길을 걸어가다 보니 아무래도 812봉은 배나무산이 아닌 이 지방 사람들이 부른다는 선암산(仙岩山)이란 이름이 옳은 것 같다. 마성면이 고향인 박홍순씨의 말에 의하면 예전 큰 홍수때 이 고개로 배가 지나다녀 ‘배너미산’이란 전설이 전해 온다고 했다. 하지만 선암리, 부곡리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이 산의 남녘 자락 지명이 선암리며 노송이 우거진 멋진 바위들이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신선바위을 연상시킨다. 이 능선을 지나는 많은 등산객들이 이구동성으로 선암산이 타당하다는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하니 앞으로는 선암산으로 표시되리라 생각된다. 능선 길 왼쪽으로는 웅장한 단산의 모습이 눈부시다. 단산의 모습을 자세히 바라보니 800미터에 달하는 정상부위의 평평한 산세가 푸른 하늘에 제단을 펼쳐놓은 것만 같은 형상이라 어쩌면 이 곳 선암산에 살던 신선들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하여 쌓은 거대한 하늘제단 같다. 때문에 ‘제단’이란 뜻의 ‘단산(檀山)’이 누군가에 의해 ‘박달나무’란 뜻의 ‘단산(檀山)’으로 슬그머니 이름이 변한 것 같은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선암산 정상을 조금 못 가니 산불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죽은 소나무가 그리 많진 않았지만 시커멓게 그을린 나무를 보니 무척이나 가슴이 쓰리다. 지각없는 사람들의 사소한 실수가 몇 백년을 한자리에 서서 열매를 맺고 사람과 짐승에게 지대한 도움을 준 고마운 나무에게 치명상을 입히게 되니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산불예방에 각별히 노력하여야 한다.
부운령 마루에서 한 시간이면 배나무산 정수리에 올라선다. 멀리서 보면 소나무 모자를 쓴 아름다운 산세의 배나무산 정수리에는 표지석도 삼각점도 보이지 않는다. 신선이 내려와 노닐 만큼 아름다운 청산에 아무런 표식이 없다니 무척이나 아쉬운 생각이 들고 멀지 않은 장래에 산세에 걸맞은 멋진 정상석이 놓여지길 기원한다. 서쪽에 우뚝 솟은 단산을 향하여 능선 길을 좇는다.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은 주능선에는 크고 작은 짐승의 발자국이 수두룩하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연유이리라. 이 산이 소개되고 나면 평화롭게 살던 길짐승들에게 큰 죄를 짓게 되는 것 같아 두 손을 모아 합장해 본다. 부디 사람과 짐승들이 서로 해치지 않고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잘못으로 잃어버린 태초의 그 낙원을 다시 찾는 복락원의 그 날이 하루속히 이 땅에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배나무산에서 50분이면 단산의 정수리에 닿는다. 제단에 오르는 제관처럼 조심스럽게 옆길을 돌아 오른 단산의 정수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작은 소나무 한 그루에 우리가 달아놓은 표시기가 봄바람에 나풀거릴 뿐, 흔히 보아오던 정상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어쩌면 이 제단은 산을 사랑하고 조국의 산하를 사랑하는, 우리 산행객들의 뜨거운 열정을 모아 겨레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며 천지신명께 하늘의 가호를 비는 엄숙한 제사를 올리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아 나도 몰래 옷깃을 여민다.
이 단산의 아들, 딸이 되는 것이 오정산과 봉명산이며 멀리 백화산, 조령산, 주흘산의 서쪽 조망이 눈부시고 북동쪽의 조망 또한 빼어나다. 단산의 어머니산인 운달산과 단아한 모습으로 하늘을 받치고 있는 천주산의 빼어난 산세, 또한 그 너머로 눈덮힌 소백산의 웅장한 산세가 우리를 산정무한으로 빠져들게 한다. 이번 취재산행에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주중산행을 실시하는 산사랑 산악회가 동행했다. 새로운 산을 끊임없이 발굴해 가며 멋진 안내팜플렛을 만들어내는 손병욱 산행대장은 너무도 산을 좋아하는, 진정한 산악인이라고 생각되어 동생뻘인 그에게 슬그머니 존경심이 솟아난다. 긴 하산 길을 고려해 서북쪽 능선으로 산길을 이어간다. 운달산을 잇는 능선 삼거리에는 패러글라이딩 이륙 장이 손에 닿을 듯 다가온다. 취재팀은 서쪽의 봉명산을 향하여 산을 내려간다. 길은 약 10분 후 참호지대에서 왼쪽으로 꺾여 봉명산을 바라보며 억새가 키를 넘는 임도를 지그재그로 내려간다. 이 산길은 봉명산의 멋진 산세를 만끽하게 한다. 봉명산 아래의 큰길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포장길을 따라 문경온천이 자리한 문경읍으로 내려가게 된다. 솔 향기 그득한 남쪽의 솔 밭길을 하염없이 내려가며 ‘청산에 살리라’를 흥얼거리노라면 어느새 외어리, 마성중학교를 지나 오늘 산행의 종점인 마성에 도착하게 된다. <글·김은남 사진·장병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