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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식은 얼마 전 <대산대학문학상> 평론분야 심사평에서 당선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물론 가라타니 고진의 한국당대문학에 대한 진단으로부터 말머리를 풀어나가는 것은 진부하지만 그 뇌사선언에 박민규의 작업들을 마주 세워 검증하려는 태도는 신인답게 도전적이다.”1) 사실 그렇다. 우리가 맞닥뜨린 문제들은 대부분 ‘해결에의 의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진부화(상투화)에의 저항’에 의해 사라진다. 더구나 그것이 매우 급박한 사회적 생존과 무관할 때는 더욱 그렇다. 제도화된 여러 가지 현실적 조건들은 눈앞에서 전개되는 위기를 무시할 수 있다. 따라서 언제나 그렇듯이 ‘위기적 상황’은 현실원리에 무릎을 꿇기 마련이다. 위기란 궁극적으로 다가올 것을 표상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한국문학의 종언’(가라타니) 대신 ‘한국문학의 보람’(백낙청)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문학의 보람’을 다른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꼭 ‘진보상업주의’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종언’과 ‘보람’은 비슷한 것처럼도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종언’이 어떤 사태가 종결되었을 때 언명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때, ‘보람’ 역시 어느 지점에서 더 나아가길 그만 두고 뒤돌아보았을 때만 가능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문학을 들어 ‘한국문학의 보람’을 운운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아직 종결되는 않은 당대의 문학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김애란, 박민규, 김연수에 대한 과대평가를 행했다는 것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이런 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비교적 용이하다), 왜 그들의 이름을 ‘보람’이라는 개인적 소회 속으로 호명했는가 하는데 있을 것이다.
‘보람’은 한국문학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단어다. 이는 한국근대문학사의 불행이기도 한데(얼마나 많은 이들은 젊은 모습 그대로 기억되고 있는가), 그것은 다른 말로 한국근대문학이 제대로 ‘늙음’을 체험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다. 물론 천수를 누린 이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 대부분은 다음 세대들에 의해 가차없이 부정되었기 때문에, 바른 의미에서 ‘원로문인’(문학적 역량으로나 문단적 영향력으로나)이라고 부를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비로소 ‘늙은 문학’과 만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대가’라는 타이틀을 달아도 이상하지 않은,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는 노인들이 문학판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사실 ‘종언’이든 ‘보람’이든 모두 ‘노년의 위치’에 섰을 때만 가능한 인식들이다. 그럼, ‘노년의 위치’에 선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노인의 감각은 일반적인 사례와 자신이 일반적인 인식을 얻어온 과거를 향할 뿐이다. 그러나 과거와 실체적인 것에 대한 추억으로 살아가게 되면, 현재의 개별적인 것이나 자의적인 것, 예를 들어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이 기억에서 사라지고, 그와 더불어 자신의 정신 속에 있는 현명한 경험을 견지하고 그것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지혜는 주관적 활동과 세계의 보조가 완전히 일치하는 생명력없는 것이어서, 대립없는 유년시절로의 회귀라고 말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과정없는 습관이 되어버린 육체조직의 활동은 살아있는 개별성의 추상적인 부정(죽음)으로 나아간다.2)
절대지의 인간학적 표현인 ‘노인’은 앞으로 마주치게 될 것들의 일반적 본질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개별적인 경험을 초월하는(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잃게 되는) 어떤 보편성(지혜)을 획득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노인에게는 ‘미경험(도래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거의 없다. 따라서 당연 모든 대상에 대해 관대하며, 젊은이들에게 그런 자신의 지혜를 가르치는 것을 의무로 여기게 된다. 사실 ‘보람’은 이 부근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헤겔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지혜는 다른 한편으로 ‘대상에 대한 명확한 관심의 결여’에서 나온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과거’와 관련하여 이야기되는 ‘종언’이나 ‘보람’이라는 표현은 그러나 ‘오게 될’ 미래와도 관계가 있다. 사실 가라타니 고진의 ‘종언’과 백낙청의 ‘보람’이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그런 언명들이 미래를 현재로 살아갈 이들에게 미경험의 시간을 무사히 건널 수 있는 방향타 역할을 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노년의 눈’이란 미래를 포기할(괄호에 넣을) 때만 획득될 수 있는 것이라는 데 있다. 최근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민족’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논전이 있었고, 그때 백낙청은 명칭변경(‘민족’이라는 단어의 삭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보도되었다.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 아무튼 분명한 것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이제 고단한 여행을 모두 마치고(다 성장을 한 뒤) 말하자면 해소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즉 ‘한국문학의 보람’은 ‘민족문학’의 해소와 궤를 같이 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보람’이란 사실상 ‘종언’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백낙청이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를 수긍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는 그것을 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는 그는 자연스런 논리적 결론인 ‘종언’을 거부하는 것일까? 아니 질문이 잘못되었다. 어떻게 그는 ‘종언’을 ‘보람’을 바꾸는 마술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일까? 이 마술의 트릭은 바로 노년의 ‘지혜’에 있다. 먼저 월러스틴과의 대담에서 그가 행한 발언을 잠시 살펴보자.
백낙청: 저의 세 번째 논점, 즉 좀더 균등한 세상을 이룬다는 기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도 일종의 ‘지혜의 위계질서’(hierarchy of wisdom)랄까 어떤 지우(智愚)의 등급이 필요할지 모른다는 제안은 실제로 이 ‘도’ 개념의 논리적 연장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길’을 상정할 때 이 길에 다가갔거나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에 정도 또는 등급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그 길로 얼마나 나아갔느냐는 거지요. 그리고 이런 차이를 개인들이 자유롭게 인정하고 그 길에서 후진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앞선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지 않는다면, 완전한 혼란이 일어나고 도가 시행되지 못하거나 비민주적인 통제와 강압이 여전히 필요하게 됩니다.3)
월러스틴을 당황하게 만든 이 흥미로운 발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이것을 창비라는 집단이 가진 강한 위계질서를 비판하는 근거로 이용할 수도 있다.4)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보다는 이와 같은 발언이 나온 배경이다. 그는 아침 회의장에서 자신이 제기한 세 가지 논점에 대해 월러스틴의 고견을 듣길 원한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그가 제기한 세 가지 논점이란 1) 민족적 국민적 차원의 과제를 갖는 것의 중요성, 2) ‘도(道)’ 개념과 관련하여, 그리고 3) 우리가 방금 살펴본 ‘지혜의 위계질서’이다. 1)의 경우 전지구적인(global) 것과 국지적(local)한 것을 중재하는 민족적/국민적 기획(national project)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새롭고 창의적인 국가구조(국가권력)의 창출과 바로 연결된다. 2)의 경우는 ‘진리’이면서 ‘실천’이자 ‘훈련’인 ‘도’의 개념을 유럽의 합리적 진리(Ture) 개념과의 연관 하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1)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국가조직(국가권력)’ 자체를 문제삼기보다는 그것의 ‘운영’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고, 2)를 통해 강조되고 있는 것은 그런 (진리)실천은 ‘훈련’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3)은 독립적인 논점이라기보다 2)의 보충적 성격이 짙은데, 왜냐하면 그와 같은 훈련이 필연적으로 ‘지혜의 위계질서’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개인차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면 (국가)조직 운영에는 극심한 혼란이 초래될 것이고, 이는 결국 비민주적인 통제와 강압을 불러올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따라서 그것을 피하기 위해 훈련수준에 따른 위계질서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위계질서’라기는 개념보다는 ‘지혜’라는 개념이고, 사실 월러스틴이 반신반의하는 것도 그와 관련해서다.
월러스틴: 그건 주관적이며 질적인 것이지 객관적이며 정량적인 게 아니지요. ‘현자들의 지혜’예요. 종교적인 인사들의 지혜고요. 과학자를 두고 지혜롭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
백낙청: 그런데 제가 말하고자 한 건 ‘길(道)’에서 앞서나간 사람……
월러스틴: 물론이지요. 그 점은 전적으로 이해합니다. 그 점에 반대할 생각은 없어요. 한데 우리 모두가 이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이건 매우 동아시아적인 개념이지요. 우리 중에 누군가는 더 앞서가고 있다는…… 윤회라든가, 열반이나 온전한 진리나 도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라든가, 그런 생각과 결부된 것이 아니겠어요? 인류의 삶은 하나의 과정이라는 거겠지요. 진리와 선을 향해 나아가는데 그 둘은 하나로 융합이 되지요. 물론 원래 하나니까.5)
월러스틴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위계질서를 낳게 하는 ‘지혜’, 아니 그보다는 그런 지혜를 가능케 하는 ‘길’로, 그가 보기에 그것은 결코 객관화(수량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종교적(동아시아적인 의미에서)인 의미에서 그러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백낙청 비평의 근원에 존재하는 선불교적 특징들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런 특징들은 종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길을 앞선 간 자의 뒤돌아봄으로 이해해야 한다. 바꿔 말해, 그는 늙음을 통해 어떤 ‘지혜’에 다다랐으며, 그것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야한다(또는 지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위계질서’와 ‘복종’이라는 단어 떠올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인 김형수는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수는 1,300명 정도이고(한국문단의 규모로 보았을 엄청난 숫자다),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 가운데 90% 이상이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이런 구체적인 숫자까지 굳이 언급한 이유는,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바깥에서 보기에는 소수의 정치지향형 작가들이 모인 집단같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으며, 매우 다양한 성향의 개인들이 모인 단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그런 ‘바깥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명칭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6)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은 압도적으로 많은 회원을 확보한 작가회의의 정체성을 오해하는 ‘바깥’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딘가 하는 것이다. 설마 나머지 10%가? 또는 문단사정을 잘 모르는 일반독자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바깥’이란 따지고 보면 내부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조직이 비대화되면서 이미 ‘민족문학’이라는 옷이 어색하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만약 그런 추측에 일말의 진실이 존재한다면, 이는 분명 ‘명칭개정’으로만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뛰어난 작가일수록 대체로 이런 집단과는 거리를 유지하기 마련이며(보험 형태로 이름 정도는 걸어놓을 수 있다), 조직은 문학발전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것은 문학이라는 예술이 가진 ‘개인주의적 성격’7)만 생각해도 쉽게 알 수 있다. 군사독재 하에서 문학운동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조직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억압적 상황이 사라진 오늘날 포화상태에 도달한 민족문학작가회의에 ‘사라진 것은 문학이요 남은 것은 조직이다’. 오늘날 창비쪽에서 내세우는 간판작가들이 대부분 민족문학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작가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물론, 그들이 형식상 회원으로 가입해 있을 수는 있다). 김형수의 말처럼 오늘날 한국문학사를 이끌어가는 문인들 가운데 90%가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이라면, 오늘날 한국문학이 맞닥뜨리고 있는 위기의 가장 큰 책임은 민족문학작가회의에게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한 문학단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백낙청이 말하는 ‘지혜의 위계질서’라는 것의 유래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민족문학작가회의’라는 조직이 더 이상 새로운 공간을 확보할 수 없을 만큼 포화상태에 도달했다는 것은, 조직 자체가 노년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노화된 조직이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보편성에 기대어 모든 것에 관대함을 표하거나 젊은이들을 ‘훈련’시키는 것뿐이다. 절실한 공통된 이념을 상실한 조직이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길은 오로지 내부적 위계질서에 의해서라고 할 때, 백낙청의 ‘국가조직(권력) 운영’과 ‘지혜의 위계질서’를 둘러싼 발언이 뜬금없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문학의 보람’이란 ‘국가조직(권력)’이나 ‘문학조직(권력)에 대한 질문 대신에 그것들의 ‘운영’이, 수많이 차이들의 분산 대신에 ‘지혜의 위계질서’가 강조되는 위치에서 바라본 ‘노인의 감회’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텐데, 사실 이것이야말로 가라타니가 말하는 ‘문학의 종언’이라는 점에서 백낙청의 ‘문학의 보람’은 가라타니의 ‘문학의 종언’이 거꾸로 선 모습, 바꿔 말해 ‘문학의 종언’의 가장 강력한 증거라 하겠다. 이제 문학단체(조직)는 문학운동을 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서민(민중?)의 주머니에서 나온 로또판매기금을 더 많이 분배받기 위해 움직인다.
1) 최원식 <대산문학상 평론부문 심사평>, <<창작과 비평>>, 2007년 봄호. 519쪽.
2) Hegel, Die Philosophie des Geistes(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Ⅲ), 長谷川宏訳, 作品社, 2006, 95頁.
3) 이매뉴얼 월러스틴 & 백낙청 대담, <21세기의 시련과 역사적 선택>, <<유토피스틱스>>, 1999, 창비, 186-187쪽, 강조는 인용자.
4) 이명원, <<파문>>, 새움, 2003, 308-310쪽.
5) 이매뉴얼 월러스틴 & 백낙청 대담, 위의 책, 189-190쪽.
6) 김형수 인터뷰, 「민족을 넘어 세계와 연대한다」, <<한겨례21>>, 2월 22일자.
7) 최근 문학예술위원회의 (작가 개인에 대한 지원은 가급적 줄인다는 방침 하에서 이루어진) 문학관련 예산 삭감에 대해 문학예술위원회 문학위원장 이시영은 이는 ‘혼자서 작업하는 문학 장르의 특성’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섭섭함을 드러냈다고 한다.
첫댓글 재밌네요(여전히 창비가 화두시군요^^). 제가 과문해서 그런데, 작가회의와 로또의 관계에 대해서는 주라도 달아주시면 좋겠습니다(아님 귓속말로 해주시든가)...
스크랩방에 해당 기사들을 올려놓았습니다. 참조하시길...
글을 클릭하기전 제목을 읽을 때의 차이나는 '종언과 보람'이 소조님의 글을 따라가다보니, 어찌된 게 같아져 보입니다. 어찌 된 게....//질문과 궁금증을 말하게 됩니다. 1)이 글 어디에 혹 투고하신 글인가요?(독자가 누구인지 궁금하여서요?) 2) 민족문학작가회의 활동하는 작가 90%이상이 누구누구일까 궁금해집니다. 전 문단 사정을 잘 모르는 일반독자인지라, 궁금증이 갑자기 생기네요.... 3) 로또지원금(?)이라고 하셨나요? 그 로또지원금이 개인이 아닌 단체로 지원되는 건가요?...4)숫자상으로 보면 분명 비대해진 조직으로 보이는데, 그 숫자만큼 '위계질서의 지혜'를 따라 활동하는 작가들도 많은가요?
꼭 답을 듣자는 질문을 드리는 건 아니고요, 글을 읽다보니 무엇을 비판하는지는 알겠는데, 머리속이 좀 복잡해져 질문을 드려봤습니다...
그리고 이건 화요논평 순서에 관한 질문인데요, 어째 순서가 과거 예정된 순서(K 님-아자비 님-폭주기관차)와 달라졌습니다. 논평자들이 개인적으로 부탁하여 그런 것인가요? 아니시면 원래 순서대로 해주시면 어떨지...그래야 다음회 순서도 예정대로 생각할 수 있을 듯하여, 묻습니다. 몇사람 되지 않지만,뭐 거창하게 하는 건 없어도, 일정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인지라, 조정 혹은 설명 부탁드립니다...
순서는 제가 약간 착각을 한 것 같습니다. 조정했습니다. 엄밀히 말해 투고한 글의 일부입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활동하는 작가가 누구인가? 우리가 아는 작가 대부분이 그곳 소속입니다. 물론, 이름만 걸어놓고 있지만요. 단체지원도 있고 개인지원도 있는데, 개인지원이라고 하더라도 단체의 힘(인맥)이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받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분명한 것 중 하나는 잘 나가는 작가(예컨대, 황석영이나 김영하) 정도 되면, 이런 단체 자체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작가가 몇 명이나 될까요? 나머지는 이런저런 단체에 소속되고나서야 문학인으로 행동할 수 있는 거죠.
Insightful. Period.
"동아시아적 道"라니, 저건 대체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군요. 백낙청과 월러스타인은 무슨 뜻인지 공유하고(?) 서로 얘길 주고 받았을지...암튼 재밌습니다.
백낙청은 열심히 설명하는데, 월러스틴은 '도대체 무슨 말이지?'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습니다. n-69 님과 비슷한 표정으로요. ^^
위에 인용하신 철학자는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 (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aemmerung ihren Flug) (<<헤겔 법철학 >> 서언 마지막 구절에서;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28쪽)라 이르기도 하였지요. 왜 하필 해질녘인가? 해가 뉘엿거릴 때까지 기나긴 하루의 여정 동안 우리 인간의 행위 영역 내에서 그리고 고통이 오가는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니라 그리 늦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침부터 저녁녘까지 쉬지 않고 지켜본 그 순간들이 올빼미가 비상할 수 있는 어두움을 몰고 온 것이지요.
그러나 누군가가 사태로부터 자신의 눈을 거두는 순간 그(녀)는 분명 지혜롭기를 포기하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균열의 고통과 소외 그리고 타자성을 겪지 않은 지혜는 자칫 건혜 - 헤겔이 위 인용문에서 언급하고 “생명력 없는” 지혜의 의미로다 - 로 빠지기 쉬울 것 같습니다. 종언과 그에 따르는 시작은 사실 동일한 사태에 대한 양면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학문의 ‘패러다임’이 그리고 한 개인의 ‘단독화의 과정’도 하나의 원리 내지는 주류가 수립되고 또 언젠가는 허물어지는 그 과정에 가라타니의 “종언”이 있다면 우리는 굳이 황종연의 경우처럼 너무 심각하게 비관적일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선불가에서 종종 도의 경지의 높낮이가 있다는 말은 듣습니다만, 일상 현장의 지혜에도 "위계(hierarchy)"가 있다니 그는 분명 범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긴 하였나 봅니다. 지혜는 물론 원로들의 영역에 속하는 무엇일 것입니다. 그러나 산 정상에서 천하를 굽어보는 원로보다는 도정에 있는 원로의 지혜가 갖는 위계가 더욱 빛날 텐데 말이지요.
지혜의 위계질서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니 공자의 말이 생각나는군요. "싹은 돋았으나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도 있으며, 꽃은 피웠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다." 다만 道를 문(門)으로 치환시킨다면 그것은 수직으로 통하는 문이 아니라 수평으로 통하는 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들이 열었다고 생각하는 문은 '위'의 문이 아니라, '옆'의 문이 아닐까요. "부러지지 않고 말라 죽은 나무는 혐오스럽다"
좀 섬뜩한 말이네요. 노령화시대에 모두 다 말라죽기만을 바라고 있는데...
한국문학의 종언에 관한 담론을 소개하는 소조님 글의 서론 문단은 그 자체로 매우 도발적이면서도 단정적이라 생각됩니다. 제가 "단정적"이라 말씀드리는 이유는 "위기"는 한낱 "궁극적으로 다가올 것에 대한 표상"에 불과하다는 지적과 님께서 말씀하시는 "현실원리"와 "위기적 상황"이 서로 종속적인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자조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토록 말썽 많았던 20세기의 위기들, 예컨대, 나치 독일에서 보스니아 인종말살에 이르는 시대의 위기적 상황은 미래에 다가올 표상에 지나지 않을까요? 아니면 원래 문학에서 얘기되는 "위기"는 늘 현실원리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그러한 성격의 것이었나요?
위기란 모름지기 우리 목구멍까지 차오른 어떤 특정한 질식상태에도 불구하고 시대 전체가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는 안이함과 같은 그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맥락에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부화 또는 상투화되기 이전 그야말론 우리가 맞닥뜨린 한국 문학의 문제 내지는 위기 상황이 정말로 심각하긴 심각한겁니까? 저는 한 사회가 복잡화할수록 거기에 상응하는 복잡다단한 글쓰기가 병행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 글쓰기의 역량과 열정이 순순 문단의 영역에 국한되어 나타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상황이 그렇다면 이에 따르는 문학과 비평의 외연도 당연히 확장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아이온 님/ 답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제야 확인했습니다.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결국 문제는 '확장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지요. 확장되지 않으면서 그냥 말로서만 외쳐지는 '위기'는 분명 안이함을 그 근원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진이 말하는 종언은 이와 분명히 선을 긋고 있습니다. 예컨대,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학이나 비평이 그 자신을 넘어서 확장될 수 없다면, 차리리 죽어버려라!'
"차리리 죽어버려라!'"라는 위기의식, 충분히 과격하군요.^^ 이제야 저는 소조님이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서서히 잡히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고원에서 보낸 시간이 얼만데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