之次(지차)에서 지차로, 지차에서 지차로
유산이래야 숟가락 둘,
소작 논 두어 마지기로 신접살이 움막 집
경남 밀양군 초동면 오방리 280번지.
흰 쌀가루 같은 눈이 수북이 쌓이는 깊은 밤이다.
구들목 이불 속엔 조무래기 너댓이 살을 맞대고,
꿈나라에선 배가 부른지 웃고들 한다.
윗목에선 추위도, 배고픔도, 고된 물레질도
자고 있는 새끼들이 마냥 살가와
날새는 줄 모르고 물레를 잣고 있다.
큰 것이 깨어나
“오 매 ! 그~만~자~야~지.”
“아이다. 이 명고치 밤새 못 잣으면 내 눈 뺀다고 느거들 하고 약속 안 했나.”
“빼까?(빼어 버릴가?)”
“빼지 마라.”
그 사이 작은 것도 깨었다.
“엄마 눈 빼까?”
“빼라 약속은 지켜야 하는 거 아이가.”
“.......”
“.......”
빛 바랜 호롱불빛 옆에
세 모자(母子)가 부둥켜안고
얼음 시린 가난이 울고 있었다.
“작년에는 종손집 아들이 대학을 갔고,
올해는 구장(이장)집 아들이 대학을 간다는데,
이미(어미) 에비 잘 못 만난 느거들은......?”
“오메! 걱정하-지-마-아! 우리들이 벌-어-서......”
엄마는 뒷동산을 향해 눈물을! 형제는 하늘을 쳐다보며 두 주먹을!
마차가 이따끔씩 오르내리던 신작로엔 우람한 쇳덩어리들이 뽀얀 먼지를 달고 굉음을 질렀고, 큰 잠자리들이 높은 하늘에 오열을 지어 북쪽으로 연일 날고 있었다. 익어가는 가을 밭에는 밤새 푸른 텐트가 세워지고 주둔한 코쟁이들로 인해 밭 두덩마다 모두 으깨져 버렸고, 동네는 피란민으로 뒤엉켜 내네 것이 없었다. 낙동강을 저지선으로 반격에 나서자 마을은 가까스로 싸 놓은 피란 보따리를 풀 수 있었지만 매서운 삶은 따스해질 줄 몰랐다.
이삿짐 차라기보다 사람 실은 트럭이다. 쌀 두 가마니에, 장독 서너 개, 장작 다발 너덧 위에 우리 식구 다섯에 마을 집안 어른 일곱 명이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함께 부산 나들이로 허연 두루마기들이 1톤 트럭을 덮었다. 새벽에 출발 수산을 거쳐 밀양 읍에 이르자,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삼랑진 낙동 철교를 넘어 김해에 도착하니 통금시간 밤 10시를 넘었다. (비포장도로, 목탄차, 수산 다리 없었음) 꽃 시샘 바람이 살을 에었다. 일행 13명이 여관에 입실하고, 저녁 식사를 했다. 이튿날 전 재산 두 가마니 중 쌀 한 가마니를 숙박비로 지불하신 아버지는 혼절하셨다.
부산 서대신동 3가 다비다 모자원 앞에 마련한 집. 방문 열면 길이요, 말이 부엌이지 비좁기 그지없는 판잣집이었다. 집이 좁아 헐고 2층을 올렸다가 무허가로 뜯기어 옮긴 곳이 산기슭 서대신동 3가 33번지이었다. 그 해 장마 비는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버거운 삶을 지게에 얹고, 아들 형제는 晝耕夜讀(주경야독)으로 3부자(父子)가 함께 부산 동서 대신동 골짜기를 누볐었다.
“운신은 불편터라도 통증이나 없다면....” 저를 낳으시고 몸조리 할 여유가 없었다. 그로 인해 어머니의 허리는 물론 한 쪽 다리를 펼 수가 없는 고통에 무시로 하신 어머님 말씀이다.
아들 둘이 번갈아 줄을 선지 두 달여 만에 독일 병원에서 무료 수술을 받을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수술 후 오랜 시간 통원 치료를 요했기에 널빤지로 얽어 만든 들것 위에 하반신을 깁스한 어머님을 아버지는 앞에서 양손으로, 조무래기 형제는 뒤에서 한 쪽씩 힘들게 잡고 일주일에 한 번씩 뭇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병원과 집을 오르내리기엔 열 세살 어린 나에게는 더 없는 고통이었다.
모세가 광야에서 지팡이 들고 바라 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부모님께서 보셨다.
형님은 56년 경북사범대학에 진학하므로 인해 대구로 올라 가시고, 나는 59년 밀양 수산으로 올라와 미싱업을 열었기에 가족이 세곳으로 흩어졌다. 62년 가을 수산에서 집을 하나 사서 식구 모두를 부산에서 수산으로 옮겼다. 형님은 60년 초계농고 첫발령을 시작으로 의령농고, 밀양실고, 부산여고, 한성여대, 부산여대, 동아대, 경기대 근무, 문학 박사, 2002년 황조근정훈장을 수상하셨다.
나는 68년 진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3월 수산초등학교 부임을 시작으로 합천 쌍책중, 울산여고, 창원중앙고, 진해여고, 마산구암고를 근무하면서 2000년 2월 국민포장수상으로 32년간 정들었던 교직을 마감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애굽에서 400년 간 노예 생활한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내고 가나안을 지척에 두고도 다시 43년 간을 광야에서 단련시켜 그들의 2세만이 그 가나안땅을 밟게 한 뜻과 같이 성령께서 친히 부모님을 모세로 삼아 저희들을 홍해로 건너게 하시고는 “너희는 애굽생활을 기억하고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하는 성경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을 통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들을 나에게 주셨다. 이것은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알게 함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환경에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베후 1:2~7)” 는 말씀
예. 아버지!
형제는 내가 사는 주변의 이웃이요, 사랑은 관심이요, 주는 것이나이다. “꼴머슴에서 장골머슴으로, 가난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다시 에발산으로 인도치 않으시고 영원한 생명의 산 그리심 산에 서게 해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물이 증기가 되고, 구름이 얼음이 되기도 하고, 다시 비가, 시냇물로, 강물이 바다가 되듯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20)” 는 말씀 같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는 지금 부모님이 저 세상에 계시지만 곱게 물든 노을, 물안개 속이 아니면, 오방동 어느 들녘에서 구멍 숭숭 뚫린 삼베 적삼에 콩밭 매시던, 아니면 베틀에 올라앉아 실꾸리 든 북을 양손으로 잽싸게 번갈아 옮기시며 힘있게 바디를 두 번씩 칠 때마다 끄신게에 이어진 짚신발을 당기시며 땀에 젖은 당시 어머님의 모습은 나의 영원한 모나리자 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머님 당신의 부지런한 모습에서 돈이나 명예보다 이웃과 함께 하며 느끼는 소박한 기쁨과 즐거움이 삶의 진정한 축복임을!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지혜를 얻으려면 가만히 있지 말고 움직이라는 말씀으로, 어떤 일을 시도했다가 실패를 통해서라도 새것을 배우게 되며, 개미는 시키거나 간섭하는 이가 없어도 스스로 일하고 협력하며 있을 때에 없을 때를, 일할 수 있을 때에 일 할 수 없을 때를, 현재만 생각지 말고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할 줄 아는 개미(잠언6:6~11) 말씀을 나의 이웃과 나의 후손들이 깨닫게 하시고 오직 여호와와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섬기는 복의 근원으로 축복하소서!
2001년 12월을 마감하면서
少岩 曺錫鍾敎授 停年記念文集 敎學片影 2002년 印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