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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해리중학교 총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송파나루(26회 성태기)
1.해리면의 유래
1)유래
고려시대에는 장사현에 조선시대에는 무장현에 속해있다가 1914년 일제시 청해면과 오리동면이 통합되어 해리면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12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는 해리면은 전라북도의 남단에 위치하며 서해의 연안을 끼고 있는 해안지대로 안산, 무장, 상하, 심원면과 각각 인접되어 있다.
해리면은 청해면에서 해자와 오리동면에서 리자를 따 붙여진 지명이다.
고창군의 서부 황해안에 위치한 해리면은 동쪽은 청룡산(314m), 한제한(210m) 등을 경계로 아산면과 접하고, 남동쪽으로 무장면, 남쪽은 장군산(171m) 등을 경계로 상하면과 북쪽은 심원면에 접하며, 서쪽은 황해에 면한다.
2)기본현황
▶소재지:전북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222번지
▶인구수: 총3,654명(2006년기준)
▶인구밀도: 93명/㎢(2006년기준)
▶면적: 39.47㎢(고창군 전체의 6.5%)
▶행정구역: 12법정리, 46마을, 102반
3)특색
남부는 호상편마암, 북부는 대보화강암이 분포하여 북서부에 낮은 구릉이 발달하였고, 해안에 사구가 발달하여 상하면까지 연속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보리, 고구마 등이 생산되고, 담배, 고추의 재배도 활발하다.또한 어로업, 수산양식업, 제염업 등이 이루어지는데 제염업은 동호리에 삼양염전 등을 비롯한 대규모 염전들이 있으나 현재는 삼양염전을 매립하여 염분기를 바닥에 비닐로 차단하고 레져문화의 중추역할을 담당할 고창컨추리클럽 골프장(21홀)으로 탈바꿈하여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다. 공음~해리, 무장~해리 간에 지방도가 교차하여 교통은 편리하며, 동호리에는 해수욕장이 있어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다. 문화재로는 송양사, 왕촌리 성지, 영신당 등이 있다.
4)주요기관
▶ 해리면사무소:하련리222 (☎563-6357)
▶파출소:하련리 93-1 (☎563-6112)
▶우체국:하련리 261 (☎563-6002)
▶해리초등학교:안산리 504 (☎563-6054)
▶동호초등학교:동호리 산8 (☎563-6298)
▶해리중학교:하련리 245 (☎563-6072)
▶해리고등학교:하련리 570 (☎563-6044)
▶해리농협:하련리 169-3 (☎563-6014)
▶새마을금고:하련리108-1 (☎562-1183)
▶해리지구대:하련리 93-1 (☎563-6112)
▶해리통합보건지소:안산리 512-1 (☎560-2626)
▶해리농촌지도소:하련리 (☎563-5959)
▶고창신협 해리지소:하련리 227-9 (☎564-0656)
2.각 마을 유래
◇하련마을
1790년경 「안짐머리」라는 터에 안좌시장이 있었는데 현 「안산리」전주이씨들의 힘으로 지금의 시장자리로 옮겨 오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의 이름 유래는 연꽃이 만발한 연못아래 터가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하련」으로 부르게 되었다.
◇신대마을
1894년 김해김씨가 터를 잡고 살았었는데 그 당시에는 이삼청이란 사람이 갑부였었다. 갑오동란이 일어나자 주인은 피난을 가고 가족만이 남아 있었는데 동학혁명군이 금품을 요구하며 가택수색을 하여 보았으나 가족들은 온데 간데 없었다고 하는데 도깨비가 마을 위 대나무 밭에 숨겨 놓았었다고 전하여 오고 있으며 혁명군은 참다 못하여 그 집에 방화를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터에서는 이따금 기와조각이 나오는 때가 있다.
◇평장마을
1800년도에 안주장씨가 들어와 살았으며 그 후에 장수황씨, 청도김씨, 신아주씨가 들어오면서 마을 이름을 「평장」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1975년도부터 새마을 지도자를 중심으로 새마을 사업을 전개하여 농로 850m 마을안길 400m를 완공하였고 1978년도에는 마을회관(20평)을 완공하여 마을주민들의 편의를 도모하고있다.
◇평지마을
약2백60년전 원양김씨가 터를 잡고 그후 연안김씨가 들어와 살다가 100년전에는 무송유씨가 뒤이어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의 주변이 병풍처럼 임야로 둘러 싸여있고 지대가 평평하여 「평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흥마을
소재지에서 동남쪽 약2㎞지점으로 약200년전 광산김씨가 터를 잡고 그뒤에 김해김씨, 홍성강씨, 청도김씨들이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의 역사가 짧고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다는 뜻으로 「신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락마을
약540년전 김해김씨가 처음에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는데 뒤이어 은진송씨가 들어왔다. 마을이 형성된뒤 식수난으로 고생을 하였는데 그때 마을 이름이 「수락」이었었다. 그뒤 은진송씨가 들어와서 「수락」으로 개칭하면서 식수난이 해소되어 지금도 그대로 부르고 있다.
◇칠곡마을
1600년(이조 선조) 이름의 현자는 대현, 호는 운석이라는 분이 임진왜란때 자손을 거느리고 경상도 지방에서 난을 피하기 위하여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다. 경상도 「칠곡군」에서 피난왔다하여 고향의 향수를 간직하기 위하여 「칠곡」으로 부르게 되었다.
◇고성마을
칠곡마을과 마찬가지로 왜란때 피난민이 터를 잡은 마을이며, 이 마을은 첫째 물이 좋고 둘째 바위 셋째 소나무 넷째 대나무 등이 좋아서 처음에는 사미라고 부르다가 많은 선비들이 사미의 아름다움을 시로 짓고 노래로도 불렀다하여 「사미」로 하였다가 경상도 고성군의 이름을 따서 「고성」으로 개칭하였다.
◇칠성마을
이조 효종시대 병자호란의 난을 피해 유생들이 모여들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 산세가 좋고 칠성님들이 바둑을 두고있는 형태라 하여 「칠성」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하루는 7개의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길조하고 그곳에 칠성당을 짓고 많은 선비들이 노래와 시를 읊었다. 「칠성」마을은 바둑을 두는 형태라 시비가 있기 마련으로 2대이상 살지 못하고 떠난다고 한다.
◇상송마을
1681년 성삼문의 후손들이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청산리」로 부르다가 그후 동학란때 소나무들이 마을을 보호하였다 하여 「상송」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하송마을
상송마을처럼 「청산리」로 부르다가 이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을 시로 읊기도 하였는데 동학란때 마을아래 숲속으로 피신하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렇게 마을사람들을 보호하였다 하여 그 뒤 「하송」으로 개칭하였다.
◇행산마을
1530년경 밀양박씨들이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는데 그 뒤에 소씨,홍씨,김씨,배씨들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행선으로 부르다가 「행산」으로 개칭하였다. 이 마을에는 「원독골」이 있는데 그 주변에 상성뫼가 있다. 그 곳에는 지금도 성의 줄기가 있으며 그 당시 군량과 군장비를 보관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고 봉화대 자리가 있다.
◇임해마을
1580년경 김해김씨가 터를 잡고 그위에 김해김씨의 사위인 청도김씨가 주가되어 마을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수풀림자 임해로 부르다가 청도김씨들이 마을 뒤 숲을 벌채한 뒤로 다다를 임자 「임해」마을 뒤 골짜기에 불당동이란 곳이 있는데 여기에 사찰이 있었다. 김해김씨 제실인 남산사에서 승려들이 구박하니까 김해김씨 묘소인 꿩밭을 파묘하였는데 그 후 김해김씨는 망하고 청도김씨들이 휴하였다고 한다.
◇안산마을
1450년경에 울산김씨가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뒷산의 형세가 갈마음수 형인데 말의 안장이 옆에 있다하여 안산으로 부르다가 1910년대경에 말안장이 말몸에서 떨어졌다하여 안장안의 안자에서 가죽혁을 떼어 버리고 안산으로 개칭하였다.
◇우산마을
마을의 조성년대는 자세히 알수 없으나 약200년전에 이루어 진 것 같으며 마을 뒷산이 소의 형체라 하여 처음에는 소뫼라고 부르다가 우산으로 개칭하였다.
◇왕거마을
1590년에 나씨가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3가구가 살았었는데 그위에 19가구로 늘어나서 대흥마을로 부르다가 또 100가구로 늘어남에 왕거로 개칭하였다.
◇화산마을
고려말 이조 초기에 마을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아산으로 부르다가 이조 말기에는 동서로 바꾸어 불렀는데 아산마을이 폐하자 나비는 꽃이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화산으로 개칭하였다.
◇지로마을
고려 말기에는 안동김씨가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다. 노지함로라 해서 늙은 지초가 이슬을 머금고 있는 혈맥이 있다는 뜻으로 지로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용반마을
임진왜란때 함평이씨의 14대조(이광수)가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 앞산에서 용이 앉아서 쉬었다가 승천하였다고 하는데 그 뒤 산이 앉아있는 용의 형체로 변하여 용반으로 부르게 되었다.
◇안복마을
1651년경에 김해김씨가 터를 닦고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 뒷산이 기러기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하여 안복으로 부르게 되었다.
◇사반마을
약600여년전 고려 28대 충혜왕(1344년) 무렵 청주한씨가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다. 1500년대에 나주나씨가 들어와 나씨촌이 되었다. 원래 사반은 사촌,사동,대한 3촌으로 구분되어 오다가 이조시대 무장현 오리동면에 속하여 3마을을 통합 사반으로 부르게 되었다. 사반마을의 지형이 뱀이 앉아 있고 앞에는 개구리 섬이 2개가 있는데 1개는 천연섬이고 1개는 사람이 만든것이라고 한다.
◇미산마을
약200년전에 수원최씨 형체가 터를 닦아 마을을 이루었다. 지형적으로 앞에는 서해바다가 보이고 산세가 사람의 눈썹과 같아서 미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후에 쌀미자 미산으로 개칭하였다.
◇각동마을
각동과 미산마을 중간에서 씨름을 했다고 해서 씨름잔등으로 부르다가 각동으로 개칭하였다. 이조 후기에 약100여호의 촌락을 이루고 살았으나 괴질병(장티프스)으로 인하여 거의가 뿔뿔이 헤어졌다.
◇방축마을
해리면 중앙에 웅대한 274m의 조지산의 산맥이 서쪽으로 나와있고 마을의 형체가 기러기 형으로 마을 앞 소류지를 설비하여 기러기의 안식처를 도모하면서 한편으로는 농업용수로 활용했다. 처음에는 방죽안으로 부르다가 방축으로 개칭하였다. 마을 안에 성동,죽림,농산,지석,지암,목면,만화,관덕 등 여러 마을 이름이 있었는데 점점 사라지고 지금은 단일 이름을 부르고 있다.
◇월산마을
1568년 이조선조에 김해김씨는 정읍에서, 밀양박씨는 장성에서 각기 들어와 터를 닦고 마을을 이루었다. 1567년경에는 숲이 우거진 임야로서 오리목 나무가 많았었다. 마을의 지형이 달형으로 숲이 우거진 산이라고 해서 월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목동마을
1568년 이조선조에 진주강씨가 또 그뒤를 이어 진주정씨와 김해김씨가 터를 닦아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 주변에는 오리목 나무가 많음으로 목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금평마을
1546년 이조명종 한양조씨와 흥성장씨가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 앞 들이 바다였는데 바다에서 북소리가 울려야 주민의 생활이 해결되었음에 근거하여 명고로 부르게 되었으며 1936년 삼양사의 간척공사 착공 이후부터 마을이 크게 번창하였다. 2002년 금평으로 개칭하였다.
◇용호동마을
1565년 이조선조에 김해김씨가 이곳에 터를잡고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의 지형이 좌청룡 우백호 형국이라고 해서 용호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상부마을
1449년 세종31년 인동장씨가 포구를 따라들어와 터를 닦고 마을을 이루었다. 언덕바지에 마을을 이루고 언덕위 마을을 상부로 언덕아래 마을을 하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외경마을
1481년경 자그마한포구였던 이곳에 여러성씨들이 모여들어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경포라고 부르다가 그후 촌장인 배호성이 선몽하기를 하얀 닭을 배에 싣고 이 마을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백계로 고쳐 부르다가 다시 외경으로 개칭하였다. 이 마을은 해안을 끼고 있는 포구로 각 지역의 상인들이 드나들며 여러 성씨가 모여서 살고 있다.
◇광승마을
1510년 이조초기에 청도김씨가 하향도중에 일명 뱀산과 망구제로 불리우는 두산계곡을 지나 포구쪽으로 가던중 갑자기 하늘에서 길다란 유성들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신의 은총으로 믿고 터를 닦아 마을을 이루었다. 유성이 하늘에서 무더기로 떨어졌다는 뜻으로 광승으로 부르게 되었다.
◇구동호마을
1940년 이전에는 서해안에서 일본 및 기타 대국의 무역항으로 각광을 받았었다. 그때 무역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었다. 300호 이상의 주민들로 마을을 이루어 상촌, 북촌, 남촌으로 나누어 촌장이 있었으며 처음에는 수월정이라고 부르다가 동백정으로 고친 얼마후 구동호로 개칭하였다. 변산반도와 죽도를 배경으로 호수처럼 형성되어 있어 동호라고 하였으나 신동호와 구별하기 위하여 구동호로 부르고있다.
◇신동호마을
1936년경 삼양사 간척공사 착공 전에는 작은 마을이었으나 간척지 공사를 착공한 실향민들이 많이 모여들어 공사장에서 품팔이를 하다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그 이전에는 부로지라고 불렀으나 마을이 커지면서 신동호로 부르게 되었다. 신동호에는 국내 유일의 천일염이 생산되는 염전이 있는데 삼양염업사 해리출장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가재지마을
1940년도 유랑민들이 삼양사 간척지를 경작하기 위하여 모여든 사람들로 마을을 이루었다. 니형이 가재형국이라고 해서 가재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월봉마을
조선 명종 초에 경주이씨 번이 설립한 마을이다. 뒷산에 반달과 같은 큰 암반이 있어 가정의 평온과 무병장수를 기도하던 곳으로 마을 이름을 반월로 부르다가 월봉으로 불러야 상서롭다는 풍속상의 속설 때문에 현재는 월봉으로 부르고 있다. 경주이씨의 집성촌이다. 성산마을은 월봉 위쪽방향 마을로 함평이씨가 설기한 마을이나 현재는 전주이씨, 김해김씨가 입거하고 있다. 대정동은 성산의 동남방향에 위치하였고, 함평노씨의 집성촌으로 마을 앞에 있는 식수천은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대정동이라 불
첫댓글 우리가 태어난 마을유래는 알아야 하겠지.........
흥미로운 자료인걸...재미있게 잘 읽었어... 좋은 자료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