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악기
필자가 영국에서 무엇을 공부하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다. 이런저런 기회에 이야기한 적도 있지만, 많은 분들의 예상과는 달리 인문학 쪽 공부가 아니라 기타 (guitar) 를 공부 하고 있고 올 여름이면 대학과정 졸업이다. 본 코너의 세번째로 뭘 선정할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내 전공인 이 분야를 이야기해야지 싶었다. 전공이라서 오히려 빼버릴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나에게 있어서 기타는 애증의 대상이다. 이십 년 가까이 쳐왔지만 여전히 너무나 어렵고, 사실 이 나이에 이걸로 무슨 대단한 성공을 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이미 버린 지 오래다. 단지 너무 긴 세월 동안 삶의 일부가 된 만큼 이제는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함 보고 싶은 욕심인 거다. 암튼 그걸 위해서 머나먼 런던까지 와서 스무 살 짜리들 틈에 끼어 4년간 딩굴었다.
머 여기에 대한 소회를 쓰기 시작하면 끝도 없으니 넘어가고, 오늘은 왜 기타라는 악기가 살아생전 접해볼 가치가 충분한 넘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할란다. 그 속에서 필자가 왜 기타를 계속 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어렴풋이나마 같이 나오게 될 테니 말이다.
...기타는 언제나 우리 주변에서 굴러다니는 가장 접하기 쉬운 악기 중 하나다. 나이 한 서른쯤 먹은 사람들이라면 어려서 아랫방 '삼촌'이 좁은 방구석에 런닝 바람으로 앉아서 치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같은 곡들을 아직 기억할 거다. 통기타와 청바지로 상징되는 70년대 포크 음악의 전성기에는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기타 한대씩은 갖고 있었고, 합판으로 만든 싸구려 통기타를 단돈 오천 원에 리어카에서 팔던 전설적인 시절마저도 있었다.
필자가 기타를 시작하던 80년대 중반은 세계적으로 헤비메탈의 전성기였고, 그래서 필자 역시 자연스럽게 전기기타를 먼저 잡았다. 레코드와 기타 등등을 같이 팔던 동네 삼류 극장 옆 가게 유리창 앞에서 침을 흘리며 기타를 바라보던 중딩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몇 달이나 그 짓을 반복한 끝에 당시 돈으로 5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그 넘을 들고 올 때의 기쁨이란, 아마 종류는 다르지만 다들 비슷한 경험들이 있으실 거고 미루어 상상하실 수 있을 것이다.(여담이지만 그랬던 것을 죽마고우 깐따멘이 며칠 후 놀러 와서 침대 옆에 떨어뜨려 구석이 깨지고 말았다. 별로 구박은 안 했지만 아직도 잊을 수는 없다...)
암튼, 요즘은 전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어디 친구나 선후배 자취방이라도 놀러 가면 흔히 싸구려 기타 한대는 굴러다니고, 학교 때 장난 삼아서라도 코드 한두 번 안 잡아본 사람은 없는 걸로 안다. 방 구석 가구 더미들 사이에서 허연 먼지를 몇 년씩 뒤집어 쓰고 서너개 밖에 안 남은 줄도 몇 센티 씩 떠서 거의 연주가 불가능하다 한들, 그래도 기타는 여하튼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좀 과장을 보태자면 공기처럼 늘 주변을 떠돌고 있지만 직접 손대기에는 부담스러운 게 기타인지도 모른다. 사실 악기 연주를 배운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만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제로 하는 음악 활동의 대부분은 그저 노래방에 가서 자동 반주에 맞춰 맘 편하게 소리지르는 것 뿐이다. 물론 그것도 나름대로 좋지만 (사실 5년 가까이 외국에 있는 필자로서는 정말로 우리나라 노래방이 그립다) 그래도 그보다 좀 더 내밀하고 개인적이며 창조적인 음악 활동에는 또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게 마련인데, 기타는 바로 그런 것을 가능케 해 주는 간단한 수단인 것이다.
열거해 보자. 일단 기타는 구하기가 쉽다. 가격이 쌀 뿐더러 싸구려 물건을 사도 좀 비싼 것과 아주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통기타던 일렉트릭 기타던 요즘은 제품의 질이 많이 좋아졌기 때문에 초보자는 그냥 싼 거 아무거나 사도 된다. 전문가의 조언도 별로 필요 없고, 그냥 자기 용도에 맞는 게 뭔지 인터넷에서 사전 정보만 좀 얻고 나면 - 헤비메탈 기타를 치고 싶은 사람이 나일론 줄의 클래식 기타를 산다던가 심지어 베이스 기타를 사서는 곤란하니까 - 동네에서나 인터넷, 낙원상가 등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참고로 국산 기타의 질은 이제 국제적으로 인정 받고 있고, 실은 전세계에 유통되는 기타의 거의 절반이 한국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
말 나온 김에 필자의 기타 콜렉션 일부를 소개한다. 위의 두 기타는 외국에서 구입했지만 국산으로, 왼쪽은 록 음악 용, 오른쪽은 퓨전이나 재즈용이다. 메탈이나 하드 록 등 강한 음악을 하려면 오른쪽의 몸통이 빈 기타는 피하는 게 좋다. 피드백(하울링)이 쉽게 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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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쪽 좌측은 클래식 기타라고들 하는 나일론 줄 통기타다. 일반적인 노래 반주 용도로는 이것보다는 쇠줄 기타를 쓰는 게 낫다. 우측은 '헤드레스' 기타인데 여행용이나 연습용으로 유용하다. 크기는 작지만 상당히 강하고 헤비한 사운드가 난다.
또 기타는 들고 다니기가 쉽다는 잇점이 있다. 물론 기타 자체가 그렇게 작은 물건은 아니지만 피아노 등 다른 악기들에 비한다면 크기나 무게 면에서 비교도 되지 않는다. 특히 통기타라면 일렉트릭 기타나 키보드 등과는 달리 앰프나 전원도 필요 없이 실내나 실외에서 웬만한 볼륨은 내 준다는 점에서 사용이 아주 간단하니 말이다.
그러나 흔히 간과들 하는 부분은, 기타는 반주와 멜로디를 동시에 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악기 중 하나라는 큰 장점이 있다는 점이다. 하모니카, 색스폰, 플룻, 바이올린 등등은 들고 다니기도 편하고 좋은 악기지만 기본적으로 화음을 연주할 수 없기 때문에 노래 반주에 쓰기는 무리다. 결국 다른 악기와 합주를 하지 않는 한 혼자 멜로디만 연주해야 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 사용이 한정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면 기타는 건반과 마찬가지로 화음과 멜로디의 양면을 소화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용도는 훨씬 넓다. 또 트럼펫이나 섹스폰, 드럼 같은 악기들은 그 나름의 매력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너무 커서 연습할 시간과 공간이 마땅찮다는 점에서 아파트나 주택가에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에게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는 점, 조금이라도 시도해 본 분은 다들 알 것이다.
또 기타는 금방 배우고 연주에 써먹기 쉬운 악기다. 코드 몇 개 잡고 간단한 노래 반주 하는 정도는 맘먹고 며칠만 연습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기타니 말이다. 사람에 따라 손가락이 많이 아픈 경우도 있지만, 그것 역시 며칠만 참으면 대게 극복된다(이 지점을 넘기지 못해 기타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은데 안타까운 일이다). 일렉트릭 기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일렉트릭 연주가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하고 통기타로 몇 년 기초를 쌓은 후에 해야 된다고 믿는데 이것처럼 사실이 아닌 것도 없다. 소위 파워 코드라고 불리는 일렉트릭 록 기타 특유의 코드 잡는 방법은 통기타 코드보다 쉽고, 줄도 가늘고 지판에 가깝게 붙어 있기 때문에 치는 것 자체도 일렉이 훨씬 쉽다. 공포의 '기타 솔로'도 사실은 한 두개의 핑거링 패턴만 외우고 연습하면 불과 몇 달 안에 그럴듯하게 칠 수 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기타는 우리가 가장 다루기 쉽고 현실적인 악기이고 따라서 누구나 소중한 생활의 취미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방면에서는 전문가인 만큼 초보자가 접하기 좋은 기타의 장점들 이상의 이야기도 해야 마땅할 것이고, 또 그래야만 이 글의 취지와도 맞지 싶다. 죽기 전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으로 '포크송 반주'는 아무래도 좀 약하니까...
기타를 연주하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초보자를 넘어 어느 정도 몸에 붙이고 나면 일종의 삶의 반려자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이건 물론 기타 뿐 아니라 모든 악기에 해당될 수 있는데, 앞서 말한 여러 가지 특성들 때문에 기타의 경우 큰 부담 없이 그렇게 만들어 가기에 상당히 유리하다는 점에 그 메리트가 있다.
기타는 '오픈 코드'라고 불리는 코드의 기본형 십여 개와 기초적인 리듬 패턴 몇 개를 익히고 나면 앞서 말한 포크송 반주 정도는 대략 가능해진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흔히 '하이 코드' 라고 하는 바레 코드로 나가게 되는데, 어떤 코드는 오픈 상태에서 잡기 힘들기 때문에 이 정도까지는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기타에 접근하는 입장에서는 필수적 코스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노래 반주나 단순 취미 정도를 원한다면 여기서 끝나도 되고, 그래서인지 기타를 연주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 여기가 기타 연주의 종착역처럼 믿는 경우도 은근히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다른 악기들과 마찬가지로 기타 역시 어렵게 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다. 반주나 독주라면 멜로디와 코드를 섞어 치는 소위 '코드 멜로디' 라는 접근법이 있고(클래식 기타 연주가 대게 이런 범주다), 기타 솔로 테크닉이라는 측면에서는 각종 손가락 기법과 속도 내는 기술 (밴딩, 해머링 풀링, 슬라이드에서 오른손 태핑과 스윕 피킹에 이르기까지) 이 있고, 단순 코드만 친다 하더라도 처음에 배우는 기본 코드를 넘어서면 수많은 다양한 접근법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C 코드라면 각기 소리 조합 순서가 다른 '최소한' 다섯 가지의 운지가 존재하고, 또 그 방계로서 가능한 온갖 코드들이 있다. 재즈적인 관점에서는 Cmaj7, Cmaj9, C6, C69, Cmaj11, Cmaj13, Cadd2 등등 수많은 코드가 그 자리에 대신 들어가서 연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각각의 코드들 역시 대여섯 개 이상의 운지법이 있음은 물론이다.
이야기가 좀 복잡하게 나갔지만,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거다. 기타 연주는 본인이 원하기에 따라서 한없이 쉽게 또는 한없이 어렵게도 가능하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기타가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차원에서 여러분 인생의 반려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타는 특성과 쓰임새가 넓기 때문에 극히 단순한 수준에서 아주 고급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인생의 반려자라는 게 뭐 대단한 게 아니다. 평생 주변에 두고 사용하고 익히고 발전시켜 가면 그게 인생의 반려자인 거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그런 비슷한 것들은 우리 삶의 주변에 많은데, 예를 들어 자동차 같은 것도 그런 면이 있다. 운전을 처음 시작하면 운전 기술 자체도 서툴고 차를 보는 눈도 없기 때문에 그냥 싸구려 중고차 사서 대충 몰고 다니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고 나면 이 차가 유달리 소음도 심하고 승차감도 안 좋다는 등등을 알게 되고, 그런 부분들 수리하고 이어 오디오도 바꾸고 GPS 도 달고 여기저기 손을 대면서 차는 점점 업그레이드 되어 결국 자기의 용도와 취향에 맞는 차로 바뀌어 가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나 이때 문제는 차의 경우 돈도 많이 들고, 그렇게 기껏 업그레이드 한 것도 세월이 지나면 다시 고물로 변하고 결국은 다른 차로 바꿔야 한다는 점이다. 이래서 차를 상대로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자칫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낭비와 돈지랄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고, 또 내적인 발전보다 하드웨어의 교체가 주가 된다는 점에서 '반려자'라는 말을 붙여 주기에는 한계가 있다. 물론 기타도 치다 보면 더 좋은 기타, 다른 기타를 바라게 되지만 기타를 제 아무리 사 모은들 차 한대 값을 넘을 일은 좀체 없고. 따라서 나머지는 결국 기타를 연주하는 능력 자체의 업그레이드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 외면보다는 내면이 강조되는 것이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이 기타는 코드 세 개 치는 수준에서 시작해서 이미 쓰임새가 있고,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평생에 걸쳐 조금씩 진보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옆에 놔두고 같이 늙어가기에 참으로 좋다. 굳이 프로로 기타를 쳐야 할 이유도, 당장에 아주 잘 쳐야 할 이유도 없이, 그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조금씩 실력을 키워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기회가 닿는다면 밴드도 하게 되고, 이래저래 써먹을 기회가 생기는 법이다.
...기타는 바둑과 비슷하다. 금방 실력이 늘지 않고, 첨에는 대체 뭐가 뭔지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바둑과 마찬가지로 익히면 익힐수록 그 세계는 참으로 넓고도 깊어진다. 실은 기타 지판도 씨줄과 날줄이라는 측면에서 바둑판하고 비슷하게 생겼다. 손가락이 갈 수 있는 위치는 무수히 많고, 거기에 접근하는 방법도 무수히 많다.
기본 C 코드 하나만 짚을 수 있다면 그때는 한 개의 수를 아는 셈이다. 거기서 시작해서 조금씩 수를 늘려 나가고, 그러다 보면 점점 처음에는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지판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세월이 가면서 묘수의 맛도 이해하게 되고, 상대가 (듣는 사람이) 예상하지 못하는 기막힌 수를 둠으로써 깜짝 놀라게 만들 수도 있다. 꼭 그런 식이 아니더라도 기타를 손에서 놔 버리지만 않으면 실력은 세월에 따라 점점 익어가게 마련이다. 같은 오픈 C 코드를 쳐도 그 맛과 무게가 다르다.
기타가 영 취향에 안 맞는다면 꼭 아니어도 좋다. 무슨 악기던 간에, 자기가 오랫동안 손에 붙이고 죽을 때까지 친구로 삼을 수만 있다면 그 종류는 사실 상관없다. 다만 기타라면 볼륨 걱정을 많이 할 필요도 없고, 나이가 들어 이사를 나가거나 심지어 재산을 처분해야 할 때라도 없애야 될(피아노 같은 악기는 흔히 이럴 때 제물이 된다) 상황이 닥칠 가능성이 없이 평생을 주변에 두고 살 수 있다.
뭘 하던 매일매일 조금씩 발전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인생이 짧다지만 사실은 꽤 길고, 그 과정에서 굳이 돈 되는 일 아니더라도 스스로 키워 나갈 수 있는 것은 많다. 나이 들어서 회사 퇴직하고 '내가 지금까지 뭘 하고 살았나...' 싶을 때, 혹은 남들은 방 구석에 앉아서 손주나 볼 나이에 수십년 간 조금씩 갈고 닦은 기타 연주가 남아 있다면 어떨까.
그 사람의 모습은 아마도 일반 노인들과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