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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악회 2차 백두대간 22구간 종주기(죽령-고치령)
일시:2002년 11월 12일(화요일)
날씨:영하 5도 ~ 영상 10도(구름)
구간:22구간(죽령-제2,1연화봉-비로봉-국망봉-고치령)
도상거리 및 시간:22.3km.9시간5분
누계도상거리및시간:405.9km,190시간35분
총 670.7km중 405.9km완주, 60.5%완주
차 례
1.22구간 산행 지도
2.22구간에 대한 소개
3.22구간 주변의 인문 및 역사 소개
4.영주 봉화의 인문 및 역사 소개
5.22구간 산행기
6.22구간 산행 소감
7. 22구간 참여 대원
8.22구간 후기
소백산이 나를 보고
소백산이 나를보고
새벽이면 명상를 하래
꽃 피고 꽃 지는 사이
바람 이는 그 이치를
하늘을 우러러보며
보법 또한 닦으래.
소백산이 나를 보고
참으면서 지내란다
조이는 매듭일수록
부드럽게 풀어내고
평상시 시간을 아껴
안목을 넓혀가래.
소백산이 나를 보고
적막을 입고 살아도
설 자리 누울 자리
반드시 두드려보고
수시로 세상밖에 앉아서
침묵을 익혀보래.
소백산이 나를 보고
가슴도 나눠야 한대
정 받을 생각은 말고
베풀때도 감사하며
믿음을 뿌리로 삼아
인과 덕은 깊이 심으래.
소백산이 나를 보고
자신을 버릴 줄도 알래
말로만 비우질 말고
행동으로 보일 줄 알려
쉽사리 범접 못하게
기품도 가꾸며 살래.
1.22구간 지도
2. 22구간에 대한 소개
죽령을 출발하면서 좌측으로는 단양군 단양읍과 가곡면,영춘면이 자리잡고 있으며 우측으로는 영주시 풍기읍,순흥면,단산면이 자리잡고 있다. 죽령에서 시작된 대간 능선이 충북과 경북을 경계하는 도경계선으로 이어지다 마당치 조금 지나면 형제봉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충북쪽으로 도경계선은 들어가고 대간 능선은 영주시 단산면에 속한다. 고개로는 시작하는 죽령,민맥이재,늦은맥이재,마당치,고치령이 있고, 봉으로는 제2연화봉,제1연화봉,비로봉,국망봉,상월봉이 있다. 국립공원답게 주위에는 이름난 사찰들이 있고,천연의 동굴들이 있어 사시사철 관광객 발길이 끓이질 않는다.영주시 순흥면은 조선시대때 순흥도호부가 설치되어 있던 곳으로 웬만한 도가 가지고 있는 만큼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이번 구간은 소백산 지역으로 소백산에 대한 내력을 알고 가는 것이 대간의 이치에 맞는 것 같아 소백산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경상북도 영주시, 충청북도 단양군에 위치한 소백산(1440m,국립공원)은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소백산은 우리나라 12대 명산 중의 하나로 '한국의 알프스' 라 불린다. 이 산은 총 면적이 320.5km에 달하는 거대한 산줄기로 정상인 비로봉을 비롯하여 연화봉(1,394).제2연화봉(1,357). 국망봉(1,421) 등 1천m 고봉이 줄지어 있어 웅장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봄이 되면 철쭉꽃이 온 산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겨울철에는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쌓여 은백색 능선을 만드는데 눈을 머리에 인 나무들의 행렬을 보노라면 누구나 동심의 세계로 빠져든다. 소백산은 거대한 산맥을 이루고 있는 만큼 볼거리도 많은 산이다. 주능선을 중심으로 동쪽인 영주시 방면에는 부석사를 비롯하여 소수서원, 비로사, 희방사 등이 있고, 서쪽과 북쪽에는 고수동굴, 노동굴, 천동굴, 구인사와 온달성 등이 자리잡고 있다.정상인 비로봉에서 서북쪽 산기슭에는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천연기념물 제244호로 지정된 주목군락이 눈길을 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방사 남사고(南師古 ,조선 명종 때 학자. 호: 격암)가 소백산을 보고 말에서 내려서 절하며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 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소백산을 오른 기록인 〈유소백산록〉에 상세하게 산행 일정을 전하고 있다. 퇴계의 전임 풍기군수인 신재 주세붕(周世鵬)도 소백산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퇴계 이황은 순흥의 백운동 서원(신재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 우리 나라 최초로 세운 서원으로 뒤에 퇴계가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 이란 액자를 받았다)을 출발하여 지금의 배점리를 거쳐 죽계계곡을 따라 석륜사, 중백운암을 경유, 국망봉에 올랐다. 국망봉 위에서 술 석잔을 마시고 시 일곱 장을 쓰고 나서 해가 기울어 중백운암에서 묵고 다음날 하산 하였다고 한다.
소백산 북릉인 신선봉(1,272)에서 서북쪽으로 뻗어 내리던 능선이 부챗살처럼 펼쳐지며, 아홉 개의 능선에 8골짜기를 만들어 낸 곳을 '구봉팔문'이라 부른다. 제3문봉과 제4문봉 사이 골짜기인 여생이문안 아래쪽에 천태종의 본산인 구인사가 자리잡고 있다. 소백산의 산행 들머리는 일곱 군데로, 단양 방면에는 구인사 코스와 어의곡리, 천동리 코스가 있으며, 영주시 방면에는 죽령 코스와 희방사 코스, 비로사 코스, 배점리 코스가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 18호)는 봉황사에 의상조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절로 사찰안에는 고건축 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무량수전(국보 제 18호), 소조여래좌상(국보제 45호), 조사당(국보 제 19호)과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를 비롯, 많은 보물이 보존돼 있다. 이 중 부석사의 본전인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우수한 건축물로 꼽히고 있는데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
소백산 산자락에는 볼거리가 다양하게 많이 있다. 천동리 주차장 옆에 있는 길이 470m, 높이와 폭이 각각 5m인 천동동굴은 종유석, 석순, 석탑이 아름답고, 천동리에서 약 5km 거리인 고수동굴은 천연기념물 제256호로 동굴 길이가 1.4km, 높이 5m로 장대한 석회동굴이며 이밖에도 노동굴(천연기념물 202호)이 있다. 소백산 동북쪽 산자락에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창건한 부석사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목조 건물로는 최고 오래된 무량수전(국보 18호) 등 국보 5점과 보물 4점, 지방 유형문화재 2점이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이 외에도 천태종의 본산인 구인사가 북쪽 산기슭에, 남쪽과 남동쪽으로는 희방사,비로사,초암사가 산행 들머리를 지키고 있다.
3. 22구간 주변의 인문 및 역사 소개
단양군 단양읍
1914년 단양읍 개칭
1979년 단양읍 승격
1985년 소재지 이전, 군단양 출장소 설치
1989년 대강면 9개리 편입
1992년 구단양 출장소 15개리 단성면 승격으로 읍 행정구역에서 제외되고,
상진리와 별곡리 행정리 분구로 현재 22개리.
면적 75.59km2. 인구 13,865명(2000 12월). 22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
으로 경북 영주시, 남쪽으로 대강면(大崗面)과 경북 문경시, 북쪽으로 가
곡면(佳谷面)·매포읍.적성면(赤城面), 서쪽으로 단성면(丹城面)에 접한다. 면 서부에 소백산의 제1연화봉(第一蓮花峰),제2연화봉이 솟아 있고,남한강이 읍의 서부를 곡류하며 그 지류인 노동천과 금곡천이 면내를 흐른다.주요농산물은 고추 잎담배 마늘 등 특용작물의 생산이 많다. 또한 석회석 무연탄 흑연등 광물이 풍부하며, 각종 비료 화학 공장이 입지한다. 관광지로는 도담리(嶋潭里)에 단양팔경의 하나인 도담삼봉이 있으며, 면 남동부가 소백산국립공원의 일부를 이룬다. 도로는 충주 ·제천 ·영주 등지로 연결되고, 중앙선 철도가 통과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특히 충주댐 건설로 새롭게 조성된 신단양은 군청소재지로서 발전의 중심이 되고 있다.3대 자연동굴과(고수동굴,노동동굴,천동동굴) 다리안. 천동 관광지를 중심으로 한 자연 학습 탐방지 선사시대 인류거주 문명의 발상지다.
단양군 가곡면
고구려 시대 : 을아조현, 신라 신문왕 : 자춘현
고려태조 33년 : 강원도 완주군, 조선태종 13년 : 을아 자춘현
1910 년 : 영춘군 가야면, 대곡면
1946 년 : 영춘면 향산리를 본 면에 편입(현 행정구역으로 개편)
면적 105.07km2. 인구 2,514(2000.12). 15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으로 경 북 영주시, 서쪽으로 매포읍 ·어상천면(魚上川面), 남쪽으로 단양읍, 북쪽으로 영춘면(永春面)에 접한다. 대부분 험준한 산악지대로 오대산(五臺山) 지맥이 남동으로 뻗어 조령(鳥嶺)을 이루고, 하천은 오대산에서 발원하는 남한강이 북쪽에서 남류하여 단양읍으로 흐르며, 그 유역에 협소한 농경지를 형성한다. 영주시 순흥면(順興面)과의 경계에는 국망봉(國望峰:1,421m) ·소백산(小白山:1,440m)이 솟아 있고, 부근에서 발원하는 국망천(國望川)과 기타 소하천이 서류하여 남한강에서 합류한다. 주요 농산물은 잎담배 ·콩류 및 누에고치이다. 문화재】 가대리 고분(佳大里古墳), 보발문(寶發門), 향산리 3층석탑(香山里三層石塔:보물 405), 향산사지(香山寺址), 덕천리 사지(德泉里寺址), 국망봉 등이 있고, 어의곡리(於衣谷里)에는 소백산의 주목군락(朱木群落:천연기념물 244)이 있다. 이농현상으로 인구가 감소 추세에 있으나 금년에는 주춤한 상태이고 향토 전원공간의 확보와 사회복지 분야의 향상을 통한 비?냅? 개발 잠재력이 있는 편임. 남한강 상류가 본 면 중심부를 관류하고 소백산 자락에 위치하며 자연경관이 수려한 산간 농촌지역 임
단양군 영춘면
단양군 7면의 하나. 본래 영춘군의 소재지이므로 군내면이라 하여 상리, 하리, 백자, 남천, 보발, 향산의 6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향산리는 차의곡면에 보발리는 가곡면에 각각 넘겨주고 동면의 오사, 용진, 동대, 의풍의 4개리를 병합하여 영춘군의 이름을 따서 영춘면이라 하여 오사, 용진, 동대, 의풍, 상리, 하리, 백자, 남천의 8개리로 개편 관할 하였는데 1931년 차의곡면의 유암, 사이곡, 만종, 별방, 장발, 사지원의 6개리를 병합하여 현재 14개리가 됨. 동쪽은 경상북도 영주군 부석면과 단산면, 남쪽은 가곡면, 서쪽은 어상천면, 북쪽은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과 남면에 닿음.
본 면의 사적은 상세치 않으나 고구려 시대에는 을아 현이라 칭하여 오다가 고구려 멸망 후 신라에 속하게 되어 신문왕대에 자춘이라 개칭하고 고려에 예속되어 태조23년에는 강원도 원주에 속하였다
이조 초기에는 영춘을 충청도에 예속케 하여 감무를 두었고 태종 13년 현감으로 개칭하여 을아 자춘이라 칭하였다. 그후 세조 3년에 이르러 영춘이라 칭하였다 1913년 군 통.폐합에 의하여 영춘군 전부를 단양군에 합병하였고 1976년 10월 1일 별방 출장소를 개설 오늘에 이르렀다.
군의 최 동북단 3도 접경에 위치하고 있어 동은 경북 영주시, 서는 어상천면, 남은 가곡면, 북은 강원도 영월군을 경계로 하였고 전면에 평야는 적고 산악이 중첩하여 소백산맥으로서 경상북도와 도계를 이루고 있으며, 온달산성, 온달동굴, 남천계곡, 북벽, 구인사, 최근에 발견된 오사리 동굴 등 역사적 유물과 천혜의 자연경관이 수려한 지역임.
면적 182.46km2. 인구 4,442명(2000.12). 14(법정,23행정리)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은 경북 영주시 단산면(丹山面), 서쪽은 어상천면(魚上川面), 남쪽은 가곡면(佳谷面), 북쪽은 강원 영월군 남면(南面) ·하동면(下東面)과 접한다. 단산면과의 경계에 형제봉(兄弟峰:1,178m), 강원 및 경북과의 접경에는 어래산(御來山:1,064m), 가곡면과의 경계에 신선봉(神仙峰:1,389m)이 솟아 있다. 남한강이 중앙부를 북쪽으로부터 남서류하면서 동대천(東大川) 등 지류를 합친다. 비교적 넓은 하안단구가 발달되어 있고, 곳곳에 카르스트 지형이 나타난다.주요 농산물로는 쌀을 비롯하여 특산물로 잎담배와 고추 ·마늘 ·참깨 ·콩류를 생산한다. 하리(下里)에 사적으로 지정된 단양 온달산성(溫達山城),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온달동굴이 있고, 그 밖에 북벽각암(北壁刻岩) 같은 명승지도 있다. 또 백자리(栢子里)에는 대각불교(大覺佛敎)의 총본산인 구인사(救仁寺)가 있다. 면의 중심지인 상리(上里)와 하리는 남한강의 곡류부에 발달한 취락이다.【문화재】 단양 북벽각암, 영춘향교(지방유형문화재 106), 온달동굴(천연기념물 261), 단양 온달산성(사적 264), 남천리 성지(南川里城址), 왕길암(旺吉庵) 등이 있다. 〈영춘향교〉 1705년(숙종 31) 영춘면 상리에 건립하였다가 그 후 현위치에 이건하였다 한다. 공자 등 5현(賢)과 송시열 등 10철(哲)을 배향(配享)하고 유림에서 봄 ·가을로 제사지내고 있다. 목조와가 7동이 있는데, 그 중 대성전(大成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고, 내삼문(內三門)이 있으며, 곡원(曲垣)시설이 되어 있다.
영주시 풍기군
신라 기목진(基木鎭). 고려초 기주基州
현종 9년 길주吉州(安東)에 속함.1018년
명종 2년 안동부安東府에 속함.1172년
공양왕2년은풍현殷豊縣에 속함<은풍殷豊이 편입>1390년
조선 태종13년 기천현(基川縣)으로 개칭
문종 임금의 胎를 은풍殷豊에 간직하고 은풍殷豊과 기천基川 두 고을의 이름을 따서 풍기군豊基郡으로 개칭<영정永定, 안정安定이라고도 함>1413년
세조 3년 순흥부順興府가 폐지되면서 대부분 지역이 풍기군豊基郡에 속함.1458년.숙종 9년 순흥부順興府가 회복되면서 豊基郡에 속했던 지역이 순흥부에 귀속됨.1683년. 고종32년 팔도八道를 23관찰부로 개편하면서 안동관찰부安東觀察府에 속함1895년. 고종33년 23관찰부를 13도로 개편하면서 경상도 풍기군으로됨.1896년. 1914년 행정구역 개편(府·郡 통폐합)으로 풍기군이 영천군에 합쳐져 영주군榮州郡으로 됨.관할면:풍기읍,안정면,봉현면
순흥땅의 역사 이야기
소수서원이 있는 영주시 순흥땅. 이곳에 이르려면, 슬픈 역사에 젖어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땅을 찾아가면 땅에 스민 역사의 내음을 맡고 고개를 들어 북녘을 병풍으로 둘러친 소백산을 바라보아야 한다. 쓸쓸하게 사라져간 역사의 아픔이 배어 있다. “옛 순흥도호부는 관할지역만도 현재의 충북 단양군 영춘, 강원도 영월군 상.하 동면과 태백시의 황지.철암.장성.경북 예천과 울진군의 일부를 포함할 만큼 광대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가 세조 3년(1457)에 발각 되면서 순흥 고을은 불바다와 피바다가 되었습니다. 도호부는 폐부가 되었고…” 옛날 순흥은 경북의 행정.문화 중심지 가운데 한 곳이었던 순흥도호부 있었다. 죽령 아래 풍기는 알아도 그 순흥은 모른다. 단종복위운동이 발각나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음에랴. 풍기읍에서 915번 지방도를 타고 7km를 가면 순흥이다. 순흥면사무소 마당에는 고려시대에 지었다는 봉서루라는 누각이 서 있다. 옛날 순흥고을을 오가던 손님들을 맞던 곳이라고 한다. 또 척화비가 남아 있어 선비들의 기개를 느끼게 한다. 금성대군이 순흥으로 귀양만 오지 않았어도, 아니 세조가 어린 조카를 내쫓고 왕위를 빼았지만 않았어도 순흥은 지금껏 경북 북부에서 이름께나 떨치는 도시였을 것이다. 땅만 넓었다고 옛 순흥을 꼽는 것은 아니다. 순흥도호부는 한강 이남 제일의 도시로 임금의 태를 가장 많이 묻었던 땅으로 도호부 중의 도호부로 꼽혔던 도시였다. 고려 말까지만 해도 한강 이남은 순흥이요. 한강 이북은 송도(개성)라 해서, 남순북송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방 십리를 가도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녔다는 아흔아홉칸짜리 기와집들이 즐비했고, 집집마다는 쌀밥을 짓고 참나무 숯불에 고등어를 굽던 마을이었다는 것이다. 1km쯤 부석사 쪽으로 더 가면 소수서원이 있다. 서원 동북쪽 200m 쯤에는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금성대군과 뜻을 같이 했다가 한꺼번에 죽임을 당해 소수서원 앞을 흐르는 죽계천에 수장되었다는 수많은 선비들의 넋을 기리는 금성단이 있다. 200여 년이 흐른 뒤인 숙종 45년(1719)에야 역사를 들추어 단을 설치했다. 문을 들어서면 양쪽에 이보흠과 선비들의 단이 있고, 조금 뒤 가운데로 금성대군의 비가 있다. 그저 키 낮은 단과 비만이 쓸쓸한 비바람을 맞고 서 있다. 다만 울타리 너머 압각수라 불리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한 그루가 말없이 금성단을 지키고 서 있다. 압각수라는 이름은 순흥도호부가 풍비박산날 때 불타 죽은 고목이 되었다가, 228년 뒤 숙종 9년에 이르러 역모의 땅 순흥이 복원되면서 다시 살아나 나랏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 한다. 은행잎이 오리발처럼 갈라져 있는 모양을 본떠 지은 압각수라는 세상에 하나뿐인 제 이름을 가지 이 나무는 오늘날까지 1200년을 살아오면서 모진 세월을 다 기록하고 있다. 소수서원은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 선생이 어릴 때 수학하던 곳에 세운 백운동서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명종 대에 이르러 직접 소수서원이라는 서원 이름을 짓고 편액을 하사하니 임금이 이름과 편액을 내리는 최초의 서원이 되었다. 소수서원은 동쪽에 학교, 으뜸인 서쪽에 사당을 모시는 동학서묘의 배치방식에 따라 지어졌다. 담장 안에서는 가르침과 배움의 공간인 강학당과 사당을 비롯해 선생들의 숙소였던 일신.직방과 학생들의 기숙사가 있었다. 호연지기를 기르는 담장 밖에는 맑은 계곡에 경렴정.취한대 등의 정자를 들였다. 소수서원에서 931번 지방도를 따라 부석사 방향으로 4km쯤 가면 소백산 고치령의 옛 들머리인 두렛골이 있다. 큰길에서 인적 드문 산길을 5km쯤 들어가면 둔덕의 나무 사이로 비치는 가을빛이 아름다운 서낭당이 나타난다.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참절당한 이들의 넋을 기리는 서낭당이 모셔져 있다. 500년이 넘도록 한 해도 빠뜨리지 않고 대를 이어온 두렛골 서낭제는 매년 정월 열나흔날 자정에 지낸다. 여느 서낭당과 달리 이곳의 제물은 하늘에 제사를 올릴 때나 하거나 값을 깎지 않는 것이 불문률이다. 특이한 것은 송아지에게 깍듯한 예우는 물론이고 호칭도 어른님.대군님.양반님 등으로 부른다. 두렛골 서낭제는 복위운동의 실패로 스러져간 모든 넋들에 대한 기림이자, 그들을 제물로 바쳐 다시 영혼을 위무하는 애절한 살풀이춤에 다름 아니다. 이 애절한 서낭제는 소백산에서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소백산은 경북 영주 순흥과 충북 단양 영춘을 품에 안고, 멀리 강원도 영월을 굽어본다. 이 3도를 잇는 소백산 고치재 인적 드문 잿마루에 낡은 서낭당하나 서 있다. 고치재를 오르는 길은 단산면 옥대리에서 시작된다. 길 옆엔 인삼밭이 있고,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드문드문 지나간다. 3km를 더 들어간 좌석리에서 부터 덜컹대는 황톳길이 시작된다.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개울가엔 하얀 찔레꽃이 뒤덮고 있다. 계곡에는 너럭바위가 종종 나타나 쉬었다 가기에 좋다. 가는비가 뿌리는 산줄기는 뿌옇게 흐리다. 어느새 길은 산자락을 타고 올라 길 저 아래로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산에 깊숙이 들어와 잇는 느낌이다. 소나무와 일본이깔나무와 참나무들이 빼곡이 들어찼다. 차를 세우고, 귀를 기울이면 나뭇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청량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뚜루루루루룩 뚜루루루루룩’ 하며 온 산을 두드리는 딱따구리 소리와 “개개개개개”하는 개개비 소리가 적막의 산을 깨운다. 비포장길에 들어서 6km쯤이면 해발 800m의 고치재다. 고치재는 건의령이라고도 부른다. 이 재를 넘어 영월 청령포에 계신 단종을 찾아 뵙고 돌아오는 길이면 금성대군은 이 잿마루에서 땀을 식혔을 터이다.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순흥부사 이보흠과 기필코 복위를 성사 시키겠다는 다짐을 하며 뜻을 세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길 오른쪽에 단종과 금성대군을 함께 모시는 산령각이 있다. 무시로 불어대는 바람이 재를 넘는다. 때로는 충청도에서 경상도로, 때로는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바람이 재를 넘을 때마다 성황당 주변에 피어난 붓꽃이 ‘후르르 후르르’ 대궁을 떨어댄다. 성황당 뜨락에는 놀러 왔다가 가는 다람쥐의 발걸음이 바쁘다. 정녕 산 아래 마을에 떠도는 전설처럼 단종은 이 산줄기 동쪽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고, 금성대군은 소백산의 산신령이 되었을까? 금줄을 치고 적막 속에 묻힌 성황당에는 그 전설이 떠도는 것만 같다.
영주 소개
태백산에서 뻗어나온 산줄기들이 버텨선 아래, 그 산골짜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죽계천.금계천 물줄기가 남동쪽으로 모이는 곳에 잇는 영주는 경상북도 북부에서도 서북쪽에 있다. 북쪽은 충북 단양, 동쪽은 경북 봉화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경북 문경.예천과 나란히 있다. 서북으로는 산지가 발달해서 산이 높은 만큼 골도 깊지만, 동남으로 내려올수록 평야를 이룬다.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소국이 발달해서 풍기에 진한 12국의 하나인 기저국이 있었다고 한다. 1세기 말에서 2세기 사이에 이미 신라는 이곳을 공략 하였으며, 죽령이 군사 요충지 였으므로 인근의 비봉산과 소백산 등지에 고구려의 세력을 막으려고 쌓은 산성의 흔적들이 있다. 5세기에 들어서 한??는 죽령을 넘어온 고구려 군사의 수중에 들기도 하였으나 6세기 말부터는 완전히 신라땅이 되었다. 그런 탓으로 이 지역의 무덤 두기에는 고구려 벽화고분의 영향이 보이는데, 그 중 한 기인 읍내리 벽화고분은 모형관에서 실물크기로 관람할 수 있다.영주에는 신라시대부터 절이 많이 들어섰다. 태백산 줄기를 이어받은 봉황산 자락에 화엄세계를 펼치려고 의상대사가 세운 부석사가 있어 깊은 산속으로 한껏 발길을 잡아 끈다. 거기에는 1300년을 이어 내려온 의상의 뜻과 그 뜻을 조형적으로 펼쳐보인 장엄한 가람 배치, 우리나라 건축사의 고전 중의 고전인 고려시대의 건물 무량수전이 있다. 또 비로사.성혈사.흑석사처럼 아직 형세를 유지하는 절집뿐 아니라 가흥동이나 영주리, 이산면 신암리와 순흥 석교리에는 절을 잃어버린 석불상들도 많다. 시대가 변하면 문화의 양상도 변하게 마련이다. 죽계천가 풍광 수려한 곳에 자리한 소수서원은, 고려시대에는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에 세워졌다. 조선 중기에 세워진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첫 사립교육기관으로 인재를 수없이 길러냈다. 이처럼 영주에는 태백산 정기가 품어낸 수많은 유형 무형의 문화유산이 어디를 가나 흐드러진 사과꽃 향기 속에서 단단한 열매로 맺혀 있다.
4.영주 봉화의 인문 및 역사 소개
이번 구간부터는 영주와 봉화군에 들어 선다.경북 북부 지방의 역사 및 인문을 살펴 봄으로서 대간이 주는 사람살이가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구비구비 고개를 넘는 길은 힘겹지만 고갯마루에 섰을 때 시원하게 불어와 이마의 땀을 식혀주는 바람을 맞으며 멀리 내려다보는 산하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를 경계 짓는 백두대간 줄기를 그렇게 타넘어 이르게 되는 땅이 영주와 봉화이다. 영주와 봉화는 경상북도의 가장 북쪽, 태백산에서 남으로 계속 뻗은 줄기와 남서 방향으로 한번 크게 굽이를 틀어 지리산으로 이어진 줄기의 사이에 펼쳐진 고장이다.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봉화를 거쳐가며 골골의 물을 모아 안동으로 넘겨주며, 영주를 흐르는 주산천도 예천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산지가 주를 이루므로 들은 많지 않다.
기찻길이 놓인 영주는 이 지역 교통의 요지이기는 하지만 원주에서 대구를 잇는 중앙고속도로를 내기 전까지만 해도 다른 곳에서 오가기에는 쉽지 않은 고장이었다. 드나드는 발길이 많지 않다는 것은 도시화가 덜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전통적인 농촌정서가 아직은 지배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순수한 사람살이의 환경 덕에 우리나라 소나무의 대명사로 유명한 ‘춘양목’ 곧 태백산 소나무가 이 고장의 산야를 덮고 있으며, 천연기념물인 열목어가 살 만큼 물도 ?틀暉求?. 환경문제가 사람살이의 중요 항목으로 꼽히는 요즈음 같은 시절에 이런 깨끗함은 미덕이기는 하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문명의 혜택이 덜 미친다는 뜻이기도 하니 당연히 불편함도 따른다. 그러나 영주.봉화 땅 답사는, 길이 시원시원하게 뚫린 뜻 일반적인 경상도와는 달리 터덜터덜하고 좁은 길이 많아 오히려 그 맛이 제법 난다.요즈음으로 보면 상대적으로 첨단시설이 좀 뒤쳐 졌다 하지만 옛날에도 그랬던 것은 아니다. 산맥과 같은 거대한 자연은 자연의 지배를 많이 받는 시절에는 하나의 장애이기도 하겠지만, 뒤집으면 극복의 대상이며 모든 것의 첫 관문이 되기도 한다. 삼국시대에 고구려에서 신라로 불교를 처음 들여온 지역은 지금의 경상북도 선산지방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곳 영주와 봉화에도 신라에 전파된 초기 불교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삼국시대 신라 불교의 유물과 유적이 주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 점을 생각하면 봉화 북지리, 영주 가흥리의 마애불은 문화의 전파로에 심어진 유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또 순흥에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떠올리게 하는 벽화고분이 있다. 길목과 문화 접변지역으로서의 특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은 봉황산 자락에 있는 부석사일 것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으로 호쾌하게 펼쳐진 시야는 우리나라 어느 절에서도 맛볼 수 없는 광경이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에는 신이한 전설과 함께 고려 건축의 정수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천삼백 년을 내려온 내력의 갈피갈피를 이어주는 역사적인 유물도 많다. 또한 영주와 봉화의 산자락에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비로사.성혈사를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오면서 창건되었거나 융성했던 유서깊은 절집과 마애불, 석불등도 많다. 절들을 찾아 골짜기 사이를 누비다보면 산등성이 아래께에 즐비한 기와집마을도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사대부들이 살 만한 고장으로 흔히 안동의 하회와 예안을 꼽았지만 이곳 영주와 봉화 역시 그 못지 않은 지역이었다. 봉화읍 유곡리의 권충재 유적이 있는 닭실 마을을 비롯하여 오록.거촌리 등은 같은 성씨를 지닌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몇백 년을 이어내려온 동족마을이다. 오래된 종가에서는 해묵은 손??와 함께 모듬살이가 일구어냈던 사람살이의 예와 규범을 엿볼 수 있다. 유교의 향촌사회 질서 바로잡기는 조선 중기부터 설립된 서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풍기에는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있다. 주세붕이 설립하고 퇴계이황이 크게 일으켰던 소수서원에서는 선비가 되려면 어떤 수련을 거쳤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 서원에서 일정한 수련을 거친 선비들은 깊은 산에 거처하면서 스스로를 단련시키며 공부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곳으로 퇴계 이황이 공부했던 청량정사가 봉화의 청량산에 있다. 청량산은 부드러운 아름다움이 특히 마음을 끄는데, 신록이 눈부신 초여름이나 단풍이 아늑한 가을철이나 할 것 없이 가벼운 산행길에 아주 제격이다.
4.22구간 산행기
미지의 세계를 간다는 것은 설레임으로 가득찬다.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하고 말로만 많이 들어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산 소백산이다. 드디어 오늘 그 소백산을 가게 되었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바람과 눈으로 점철되어 있다. 또한 몇일전 인터넷에서 본 소백산의 설화는 멋진 장관을 연출하고 있어 오늘 산행의 기대감을 자아내고 있다. 집을 나서는데 왠 바람이 그렇게 강하게 부는지 산행의 불안감을 주기도 한다. 백운 아트홀에 도착하니 아직 대원들은 도착하지 않아 썰렁함을 느끼게 하고 있고 지정된 시간이 되자 차량과 대원들 모두 모여 차량에 탑승하고 22차 죽령에서 고치령구간의 산행을 하기 위하여 버스는 출발한다.
백운 아트홀 출발 : 00시 04분
오늘 산행은 국립 공원 구역 산행이라 많은 분들이 참여한 가운데 출발한다.
광영을 경유하여 옥곡 인터체인지에 진입후 남해고속 도로에 들어선후 진주 방향으로 달린다.총무의 인사말과 등반대장의 산행에 대한 소개가 있고 난후 모두들 잠을 청하여 잠을 이룬다. 잠을 청하여 자고 있는데 휴게소라고 하여 깨운다. 일어나 보니 안동 휴게소에 정차하여 있다.
안동 휴게소 도착 : 02시 40분
휴게소에서 잠시 볼일을 보고 차량에 오른다. 차량에 대원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다시 죽령을 출발하니 그 시간이 02시 48분 이다.
안동 휴게소에서 출발하여 잠을 다시 청하려고 하니 죽령에 도착하였다고 하차하라고 한다. 시계를 보니 03시 36분이다. 그러니까 광양에서 죽령까지 3시간 30분이 걸린 것이다. 그 옛날 같으면 7~8시간 걸릴 것을 고속도로 덕분에 시간이 많이 단축 되고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만들어 놓았다.
죽령 도착 : 03시 36분
버스에서 내리니 바람이 강하게 몰아친다. 춥지는 않지만 강한 바람의 소리는 오늘 산행을 불안하게 만든다. 죽령은 해발 689m로 춥지는 않지만 고도가 올라갈수록 더욱 추우리라 생각 된다. 지난번의 하산시는 그래도 많은 상점들이 문전 성시를 이루고 있었으나 새백녘이라 죽령은 온통 바람 소리로 일색이다. 죽령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이 곳 죽령에는 근년까지 산적들이 많았다고 한다. 한 할머니의 지혜로운 협조로 그들을 소탕했다고 한다. 관군과의 유명한 암호 신호가 있었는데...
'들자구야! 다자구야!'가 바로 그 것이다. 할머니는 산적들에게는 자기의 두 아들들의 이름이 '들자구'와 '다자구'라고 했다. 산적들의 경계가 철통같을 때는 할머니가 "들자구야! 들자구야~~~~!"를 산이 떠나갈 듯이 불렀고, 산적들이 회식이라도 있어 술에 위해 골아 떨어지는 날이면 "다자구야~~~! 다자구야~~~!"하고 외쳐서 관군에게 암호를 보내 소탕했다고 한다. 이러한 죽령의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를 생각하며 죽령을 출발한다.
죽령 출발 : 03시 47분
시멘트 포장 도로를 따라 가다 보니 매표소가 나온다. 매표소 간판을 보니 성인 인당 1,300원이라고 적혀 있으니 오늘 입장료는 공짜로 소백산을 구경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매표소를 통과하여 계속 시멘트 포장 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우측으로 전망대를 나무로 해놓았다. 풍기읍이 불빛이 반짝 반짝 거리며 도심임을 나타나고 중앙 고속 도로 가로등 불빛이 어울려 생동하는 풍기를 연출한다. 이러한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 출발한다. 바람은 세차게 불지만 나무의 영향으로 아직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소리로만 바람의 강함을 느낄 수 있다. 계속 되는 시멘트 포장 도로를따라 가니 도로에는 곳곳이 낙엽이 수북히 쌓여 바람의 강함을 알 수 있다. 중계소 가까이 가니 삼거리가 나온다. 잠시 여기서 멈칫 거리며 길의 방향을 가늠하며 이정표대로 방향을 잡아 발길을 재촉한다. 여기서는 중계소로 가면 안되고 천문대 이정표 방향대로 가야 한다. 이정표 방향을 따라 가니 평지길이 펼쳐진다. 중계소가 제 2연화봉인데 중계소로 인하여 봉을 우회길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우회길을 돌아가니 헬기장이 나오고 단양읍 불빛이 펼쳐진다.
헬기장을 지나 잠시 약간의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다 다시 오르막길을 올라서니 천문대가 나온다.
천문대 도착 : 05시 30분
바람과 함께 추위가 엄습해온다. 잠시 천문대 건물 모퉁이에서 바람을 피해 휴식을 취하며 후미 그룹이 오기를 기다린다. 천문대는 불빛 하나 없고 모든 직원들이 잠들어 있어 적막감이 돈다.천문대의 내력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소백산국립공원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현대 천문학의 서막을 연 천문대이다. 소백산 천문대에서는 순수한 연구관측의 목적이외에도 일반인들에게 과학에 대한 이해를 위해 폭넓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소백산천문대는 소백산 국립공원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만약 행운이 따른다면) 총총한 별밤과 더불어 주변의 유명한 단양팔경,부석사 등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소백산천문대는 13:00 부터 오후 16:00까지 미리 예약한 개인 및 단체에 한하여 개방한다. 미리 예약된 경우에는 직원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평상시에는 단체에 한하여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1일 1회의 견학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예약전화는 043-422-1108로 하면 된다.
1972년 5월 국립천문대 설립위원회에서 24인치 Boller & Chivens 반사망 원경을 소백산연화봉에 건설하기로 결정
1974년 1월 Boller & Chivens 24 인치 반사 망원경 도입
1974년 11월 국립천문대 설립(1974. 9,대통령령)및 망원경 설치작업 시작
1978년 9월 소백산천체 관측소 준공 (국립천문대 단위부서)
1980년 10월 광전증배관 및 Dry Ice 냉각장비를 이용한 측광관측연구 시작, 상시관측체체 구축
1986년 5월 국립천문대가 천문우주과학연구소 (정부출연연구기관)로 변경됨에 따라 소백산 천문대로 개칭
1992년 1월 CCD 영상관측 장비 (액체질소 냉각장치 부착)를 이용한 정밀측광 관측연구 시작
1993년 1월 DIPHO (DIffrential PHOtometry) 개발로 자동 차등측광 관측연구 시작
1997년 6월 연구관리동 신축공사 시작
1999년 6월 연구관리동 완공 및 이전
2001년 1월 광시야 2K CCD 카메라 도입
천문대 출발 : 05시 41분
천문대를 출발하여 조금 가니 연화봉 갈림길이 나온다. “비로봉4.2km/희방사2.4km/죽령휴게소7.0km". 선두는 희방사쪽으로 가고 있다. 후미 그룹이 보니 길을 잘못든 것 같아 선두 그룹에 무전을 친다.
선두 그룹은 무전에도 불구하고 계속 강행하니 조팀장 앞으로 달려가 길을 확인 결과 비로봉 가는 길과 앞에서 만난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내려 온다.
후미 그룹은 비로봉 이정표 방향에 따라 자연 학습 탐방로를 따라 간다. 자연 학습 탐방로는 나무로 길을 잘 만들어 놓아 탐방객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고 주위는 어둠으로 인하여 관찰할 수 없으며 철쭉이 필때쯤 되면 장관이 연출되리라 생각된다.
이 삼거리에서 희방사로 가는 길이 있다. 즉 선두 그룹이 가는 길로 가서 하부로 내려서면 수철리로 가는 길이 나오는데 이 길로 가면 희방사가 나온다.
희방사에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두운조사가 산길을 가다가 신음하는 호랑이를 발견했다. 그 호랑이는 사람을 먹고 목에 비녀가 걸렸는데, 두운조사가 비녀를 빼주고 호랑이를 살려 줬다. 그후 호랑이는 두운조사의 은혜를 갚고자 어느 양가집 규수를 물어다 주었다. 그 규수는 바로 경주호장(慶州戶長)의 무남독녀였고 딸을 살려준 두운조사의 은혜에 보답코자 경주호장이 이 절을 지어주었고 절 이름도 은혜를 갚게 되어 기쁘다는 뜻의 희(喜), 두운조사의 참선방이란 것을 상징하는 방(方)을 써서 희방사(喜方寺)라 이름 지었다. 당시, 경주호장은 이것으로도 은혜에 대한 보답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죽령고개 아래 마을 계곡에 무쇠다리를 놓아주었는데, 지금도 고개 밑의 마을을 수철(水鐵)이라 부른다. 희방폭포를 왼쪽으로 끼고 층계를 오른 뒤, 계곡옆 오솔길을 잠시 걸으면 고요한 정적속에 희방사에 닿는다. 희방사는 643년 (신라 선덕여왕 12) 두운조사(杜雲大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희방사는 6.25전란으로 법당과 훈민정음의 원판과 월인석보 등 귀중한 문화유산이 소실되었다. 그후, 1953년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은은한 종소리로 소백산 연화봉 밑 기슭의 깊은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몇천 구비를 돌아 돌아 흐르다 이곳에 멈춰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한 소리와 함께 웅장한 폭포를 이룬다. 폭포로서는 보기 드물게 해발 850m고지의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거대한 암벽을 뚫고 쏟아지는 28m 높이의 웅장한 물줄기가 시원스럽고 폭포를 중심으로 위 아래에 펼쳐진 희방계곡도 아름답다. 무더운 여름철 우거진 잡목과 시원한 폭포가 어우러진 희방폭포는 일등 피서지가 되고 있다.유명한 『희방사 동종(喜方寺 銅鐘: 도유형문화재 226호)』이 보관되어 있다.
희방사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생각하며 자연 탐방로에 펼쳐지는 철쭉꽃을 보며 산책을 하면 한편의 드라마를 연출할 것 같다. 자연 탐방로를 따라 가니 선두 그룹이 내려 오고 있다. 선두 그룹과 다시 합쳐져 내리막길을 걸어 안부에 다 달아 인원점검을 하니 점검 결과 이상이 없어 다시 출발한다. 다시 약간의 오르막을 올라 다시 내려가니 헬기장이 나온다.여기서부터는 나무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세찬 바람이 계단에서 대원들을 그냥 두지 않는다.계단의 핸드레일 밧줄을 잡고 한계단 한계단을 오른다. 바로 제1 연화봉에 도착한다.
제1연화봉 도착 : 06시 31분
제1연화봉 이정표에 도착하여 세찬 바람을 피해 잠시 휴식을 취한다. 김명순 대원 지금의 바람은 맛배기 바람이고 비로봉가면 그 맛을 안다고 한다. 원래 여기서 아침 식사를 해야 하나 날씨도 좋지 않고 그러니 주목 관리소에서 아침을 먹을테니 간식을 먹으라고 정대장 말한다. 연화봉 이정표에는 “천문대2.0km/비로봉2.5km/국망봉5.6km “연화봉은 철쭉군락이 뒤덮여 있어 매년「소백산 철쭉제」가 열리고 있으며 철쭉여왕 선발과 산신제등 다채로운 행사가 거행 되며 연분홍 철쭉과 울긋불긋한 등산객 들로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곤 한다 이곳에는 한국전자통신연구소의 국립천문대와 공군 통신대가 자리잡고 있어 우리나라 천문공학의 요람이며 소백산의 여러 줄기에서 오르는 등산로의 합류지점이다.
흰구름 무리에 들게 되면 신선이 되어 구름을 타고 날아 다니는 환상에 빠져 들곤 한다. 바람의 영향으로 정상에는 가지 않고 잠시 휴식후 출발한다.
제1연화봉 출발 : 06시 40분
제1연화봉을 출발하여 높낮이가 별로 없는 길을 가다보니 앞에는 산장 같은 건물이 보이고 그 앞에는 비로봉이 보인다. 길은 나무 판자로 만들어 놓아 겨울철에는 미끄럽다. 판자길 앞에는 이정표가 보인다"비로봉0.6km/죽령휴게소10.9km/천동6.2km". 여기를 두고 민백이재라 말한 것 같다. 여기서 단양읍 천동리로 가는 길이 바로 이 길이다. 이 길로 들어서면 소백산 북부관리 사무소가 있으며 천동동굴 고수동굴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단양의 볼거리를 생각하며 주목 관리 사무소에 도착 한다.
주목 관리 사무소 도착 : 07시 18분
엄청난 바람을 피해 주목 관리 사무소에서 아침을 먹기 위해 들어선다. 왠 남자 한분이 라면을 끓여 먹고 있다. 백두대간을 일주일 단위로 한다고 한다. 이화령에서 출발하여 여기까지 왔는데 식량이 다 떨어졌다고 한다. 그분을 옆에 두고 온기가 있는 가운데 아침을 먹는다. 강승무대원이 버너와 코펠을 가져와 라면을 끓여 추운 한기를 없앤다. 주목 관리 사무소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후 비로봉을 향해 출발한다.
주목 관리소 출발 : 07시 45분
주목 관리소를 출발하니 엄청난 바람이 몰아친다. 몸을 겨우 가늘하며 비로봉을 향해 걸어간다. 비로봉 정상까지는 나무 계단으로 만들어 놓아 주위의 환경 피해를 최소화 했다. 바람을 등에 지고 바람을 이용하여 비로봉에 도착했다.
비로봉 도착 : 07시 58분
아무리 바람이 강하지만 그래도 여기 통과 추억의 사진을 남긴다.
바람과 추위로 인하여 일반 카메라는 허탕을 치고 그래도 보온을 한 디카는 성능을 발휘한다.
그런데 바람이 어찌 강한지 카메라의 초점을 방해한다. 비로봉은 소백산의 주봉으로서 희귀식물인 에델 바이스와 예로부터 왕실 가구제로 쓰여 졌던 주목(정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바람이 거세어 나무들이 자라지 못하는 정상부의 넓은 초원은 봄.여름에는 미국 서부영화의 한장면을 연상케 하며 겨울철 아침햇살에 비치는 무지개빛 눈보라와 눈꽃 그리고 백색평원은 겨울 산행의 극치를 이룬다.
조선의 유명한 실학자 남사고는 죽령을 지나다가 이산을 바라보고 「사람 살리는 산」이라며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하고 지나갔다 한다. 국망봉이 코앞에 보이고 뒤로는 연화봉으로 이어지는 소백 주능이 펼쳐진다.
바로 아래로는 비로사로 가는 길이 있고 저 멀리 비로사와 금계호가 보인다.
비로사는 창건 유래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소백산 일경에서 가장 유서 깊은 큰절임이 당간지주, 부도, 탑비, 주춧돌 등 온갖 조식으로 아로 새겨진 많은 돌부처 등으로 짐작할 수 있다.소백산의 정상인 비로봉과 3.5km 거리의 소백산 기슭에 있는 조용한 절로서 신라 문무왕 20년(680년) 3월 의상대사가 세웠고, 경내에는 나말여초 진공대사의 위엄을 기리기 위해 왕명으로 세워진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비(도 유형문화재 제 4호)가 있다. 강한 바람으로 주위를 제대로 관망도 못하고 서둘러 출발한다. 바로 앞으로 보이는 봉이 국망봉이다. 다시 내려가는데 바람이 어찌 강한지 떠밀리다 싶이하며 겨우 겨우 내려 서며 주능 길을 걸으며 바람과 싸우며 모든 대원들이 걷는다. 우측으로는 순흥면 초암지 저수지가 선명하며 경기체가의 대표곡으로 알려진 죽계별곡의 배경인 죽계구곡이 보인다.죽계별곡은 고려때 안축이 지었다. 경기체가는 고려 중엽 이후에 발생한 장가(長歌). 또 ‘경기하여가(景幾何如歌)’라고도 한다. 노래 말미에 반드시 “경(景) 긔 엇더니잇고” 또는 “景幾何如”라는 구(句)를 붙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고려 중엽 이후로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주로 한학자들에 의하여 읊어졌는데, 고려시대의 것으로는 고종 때의 제유(諸儒)의 작으로 알려진 《한림별곡(翰林別曲)》과 고려 말의 안축(安軸)이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 등이 있으며, 조선시대의 것으로는 권근(權近)의 《상대별곡(霜臺別曲)》, 변계량(卞季良)의 《화산별곡(華山別曲)》, 정극인(丁克仁)의 《불우헌곡(不憂軒曲)》과 작자 미상의 《오륜가(五倫歌)》 《유림가(儒林歌)》 《연형제곡(宴兄弟曲)》, 이 밖에도 김구(金絿)의 《화전별곡(花田別曲)》, 권호문(權好文)의 《독락곡(獨樂曲)》 등이 있다. 처음 발생시에는 무신들에 의하여 초야로 쫓겨난 문신들이 향락적·유흥적인 생활과 그들 심상(心像)을 읊었는데,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 형식을 본떠 조선 건국을 칭송하는 내용을 담기도 하였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에는 한글을 약간 섞어 짓기도 하였으나, 그 이전에는 한학자들이 순전히 한문으로 지었다. 따라서 일반대중과는 유리된 일종의 기형적인 문학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와 같은 점에서 《청산별곡(靑山別曲)》 《가시리》 등 고려의 속요와 대조를 이룬다. 이들 속요는 일반대중 가운데에서 발달하여 구전되었기 때문에 보통 그 작자를 알 수 없으나 경기체가는 한학자라는 특수층이 한자만으로 지었기 때문에 대개 작자가 알려져 있다. 내용에 있어서도 경기체가는 사물이나 경치를 나열·서술하는 것이 특징인 데 대하여, 속요는 사랑의 노래가 흔하며 사랑도 육감적이고 노골적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다. 경기체가와 속요가 그 형태상 특질이 일치한다 하여 이를 통틀어 ‘고려별곡(高麗別曲)’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형태상으로 본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첫째, 음수율(音數律)은 주로 3음절이 우세하다. 둘째, 음보율(音步律)은 일반적으로 3음보이다. 셋째, 구수율(句數律)은 6구를 기준으로 하여 다소의 가감을 보인다. 넷째, 대체로 전후 양절(兩節)로 구분된다. 다섯째, 일률적으로 수련(數聯)이 중첩되어 하나의 가요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 별곡은 신라의 향가가 발원적(發願的)인 기능을 잃고, 나례(儺禮)·잡희(雜戱)·백희(百戱) 등 무대 위에서 불리는 무악곡(舞樂曲)이 요청됨에 따라서 생겨난 형식으로 추정되고 있다.지금까지 발견된 <경기체가> 작품- <한림별곡>(13세기 고려 고종) ~ 16세기 정효문의 <독락팔곡> 약 20여 편이 있다.
높지 않은 두어개의 봉을 넘다 보니 다시 오르막이 나온다. 오르막을 오르니 국망봉이란 정상 표지석이 기다리고 있다.
국망봉 도착 : 08시 50분
국망봉 통과 기념 사진을 남기고 주위 경관을 보니 옛 선인들의 구구 애절한 사연을 느낄 수 있다. 국망봉과 신선봉의 북쪽 산록에는 구봉팔문이라는 희귀 지형을 형성한 흥미있는 암봉지대가 있다.
9개의 봉우리가 거의 동일한 높이로 솟아 있는데 이들 암봉이 한 능선에 있는 연봉이 아니라 각각 다른 능선의 봉우리라는 것이 흥미의 포인트다.봉우리사이에는 역시 해발 높이가 비슷한 협곡이 형성되어 있고 그 중에는 마치 산문처럼 그 사이로 길이 나 있기도 하다.
8문중 하나인 여생이 문안은 국망봉, 신선봉을 거쳐 구인사로 내려가는 길인데 암봉사이의 험준한 바윗길과 암봉의 장엄한 풍모는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강열한 인상을 준다. 북으로는 신선봉과 형제봉, 동으로는 선달산.문수산 능선이 멀리서 아련히 밀려오고 남으로는 연화봉.도솔봉.묘적봉이 먼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파도처럼 시야를 파고들고 가까이 비로봉으로부터 산능들이 성난파도가 해일을 동반하고 밀려오는 듯하다.
신라 마지막 왕이었던 제56대 경순왕이 나라를 왕건에게 물려주고 명산대 찰을 찾아 다니다가 제천의 백운면 방학리 궁뜰에 동경부를 짓고 머무를때 덕주공주는 월악산의 덕주사에 머무르고 신라회복에 실패한 마의태자는 엄동 설한에 베옷 한벌만 입고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 도달하여 신라의 도읍 경주를 바라보며 망국의 눈물을 흘리다가 월악산의 덕주공주를 찾은후 개골산으로 향했으며 이후부터 국망봉이라 불렀다는 유래가 전한다.이러한 전설을 생각하며 국망봉을 출발한다.
국망봉 출발 : 09시 00분
국망봉을 출발하여 바로 앞에 보이는 상월봉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상월봉까지 가는 길은 약간의 내리막길로 금새 도착한다. 대간길은 상월봉 사면으로 있어 봉 정상에는 가지 않는다.
상월봉 통과 : 09시 15분
상월봉을 통과하니 다시 내리막길이 나타나며 안부에 도착하면 늦은맥이재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단양군 가곡면과 영주시 단산면으로 이어지는 대간의 갈림길이다.여기서 오르막을 올라서면 신선봉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신선봉 삼거리 통과 09시 31분
해발1260m/국망봉1.8km/신선봉1.2km/마당치6.5km" 물론 여기서도 우측으로 난 길이 대간 길이다.
좌측으로 난 길을 가면 신선봉, 민봉으로이 나오고 계속 가면 태고종의 총 본산인 구인사가 나온다.
신선봉은 강원도 영월과 경계를 이루는 남한 강 상류를 북으로 바라보며 동에서 부터 시작한 삼봉과 수리봉이 우뚝섰고 형제봉과 마당고개를 지나 신선봉에 이르면 신선들의 바둑판이 있고 넘기 힘들며 오르기 힘들어 신선들이나 다니는곳 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신선봉(1389m) 정상은 구름위에 떠있어 신선이 된듯한 기분을 주며 풍수지리학상 옥녀직금 형극(선녀가 내려와 비단을 짜는 형극)의 형제봉(1177m)은 예로부터 많은 풍수가들이 운집했다고 한다.
이러한 신선봉을 옆에 두고 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마당치를 향해 계속 걷는다.
첫번째 헬기장 통과 : 10시 09분
대간이 천혜의 요새인양 곳곳에는 헬기장이 많이 만들어져 있다. 평탄한 능선길이 계속 이어진다.
두번째 헬기장 통과 : 10시 13분
첫번째 헬기장은 만들어 놓고 관리가 잘안되어 잡목이 식재되어 헬기장으로서의 구실은 못할 것 같다.
세번째 헬기장 통과 : 10시 17분
최근에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주위의 나무들은 잘려 나가고 있고 정리 정돈이 잘되어 있다. 지루한 능선길을 걷다보니 연화동 갈림길 이정표가 나온다.
연화동 갈림길 이정표 통과 : 10시 28분
이정표에는 "연화동 갈림길/해발1015m/상월봉4.3km,마당치2.5km,연화동 3km"라고 적혀 있다. 연화동은 고치령에서 내려가면 좌석리 삼거리에서 갈라지는 곳이 나온다. 다리 바로 위 삼거리에서 연화동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즉 연화동 갈림길에서 내려서면 좌석리로 가는 길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연화동 갈림길을 벗어 나자 헬기장을 만나는데 계속되는 오르막이다.
헬기장 통과 : 10시 30분
마당치가 나올 것을 기대하고 계속 가는데 마당치는 보이지 않는다. 두어번 넘어치니 또하나의 능선이 나타나는데 "해발 1031m/연화동 등산로 1.5km/형제봉5.2km"라는 이정표가 있고 다시 오르막이 시작된다.
많이 걸었으니 이젠 휴식과 점심을 먹어야 겠다.바람이 불지 않은 양지 바른 곳을 택하여 점심식사지로 정한다.
점심 식사지 도착 : 11시 30분
바람이 없는 곳에서 도시락을 꺼내어 점심을 먹는다. 점심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후 출발한다.
점심 식사지 출발 : 11시 56분
점심 식사를 마치고 출발하여 봉의 능선을 지나?〈? 내리막길이 나온다.
바로 마당치가 나온 것이다.
마당치 통과 : 12시 03분
"마당치/해발910m/형제봉3.5km/국망봉8.5km/새목7.5km"의 이정표와 표언복 교수가 쓴 코팅의 이정표는 고치령 1시간 25분이라고 적혀 있고 코팅지가 이정표에 걸려 있다. 여기서 조금 가면 형제봉 갈림길이 나오리라 생각하며 있는 힘을 다해 앞의 봉우리를 올라 선다.
형제봉 갈림길 통과 : 12시 21분
여기서도 우측으로 난 길을 택해야 대간길이다. 좌측으로 난길을 가면 형제봉이다.
경사면을 가기 때문에 형제봉으로 가는 길이 두 군데 있다. 마당치에서 고치령으로 가는 길에는 코팅지가 붙어 있고 고치령에서 마당치로 가는 길은 이정표가 서 있는데 필자가 통과한 시간은 우리 일행이 마당치에서 고치령으로 가기 때문에 코팅지 통과 시간을 체크 했다.
형제봉은 산의 정상 봉우리가 마주보고 있다 하여 형제봉이라 불리고 있으며 풍수지리학상 옥녀직금 형극(선녀가 내려와 비단을 짜는 형극)이라 하여 조선시대에 많은 풍수가들이 운집했다 한다. 일제시대에 변장술에 능하고 축지를 하며 백발백중의 명사수로서 독립군의 군 자금을 만주로 보내던 김용제 선생과 김수배 선생이 매복중이던 악명높은 일본경찰 평석에 의하여 1923년 9월9일 오전 9시9분에 29세의 나이로 돌아가시니 모두 9자와 일치되는 기이한 일이 있었다는 유래가 전한다.형제봉 갈림길을 통과하면 이제는 순탄한 내리막길이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간간히 헬기장이 나오며 마지막 헬기장 근처에는 산불의 흔적이 남이 있으며 여기를 통과하면 능선을 깍아 만든 시멘트 포장도로가 보인다. 바로 여기에 내려 서면 고치령이다.
고치령 도착 : 12시 52분
고치령에 도착하니 승용차 한대가 주차 되어 있고 고치령의 산신각은 화재로 인하여 볼 수 없고 그 자리에는 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다음 산행지 입구 편에 "고치령/해발760m/마구령8.0km/늦은목이13.9km/비로봉14.1km"라는 안내판이 자리 하고 있고 대간길의 짤림이 이곳에서도 확인할수 있어 아쉬움을 더하고 있고 또 그 자리를 "송이버섯을 채취하지 맙시다"라는 문구의 플랜카드가 자리를 하니 아~ 이곳이 송이가 나는 지역 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해준다.
오늘의 산행을 마감하는 순간이다.
가을이 깊다. 만산의 나뭇잎들 저절로 물들어 떨어져 내린다. 아니, 참혹한 겨울을 견디기 위해 나무들은 제 이파리 뚝, 뚝, 분질러댄다. 그 누가 이르지 않아도 세상의 생명들은 모든 것 버리고, 가난한 마음 꽁꽁 묶어두며 겨울을 살아남기 위하여 움추러들 것이리라. 얼음이 풀리는 봄이 오면 기지개 활짝 켜며 소리쳐 일어 날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세상은,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힘을 가졌을 때라야 올곧게 맞이할 수 있으리라.
금성대군은 천천히 말을 달려 늦가을로 물들어가는 소백산자락으로 스며든다. 소백산 고치재를 넘어 영월 땅에 갇힌 상왕(단종)을 뵈오리라. 이제 이 가을산만큼이나 무르익어 가는 뜻을 밝혀, 슬픔의 먹구름을 걷히게 하리라. 불의에 항거해 일어서는 불빛은 저 나약한 반딧불 하나로부터라도 활시위를 당겨야 하지 않겠는가. 고개를 들어 멀리 가물거리는 고치재를 바라보던 금성대군은 말의 엉덩짝을 두드려 두렛골의 둔덕을 쏜살같이 오른다. 뒤따르던 순흥도호부 부사 이보흠과 그의 군사들이 함께 말을 달려온다. 불의로 뒤덮인 세상을 엎어 버리고 새로운 세상으로 치달아가는 말발굽소리가 온 산을 뒤흔든다. 금성대군은 말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넣어 본다. 금성대군은 울분으로 가득 찬 가슴의 말을 꺼내어 스치는 바람결에 뱉어낸다.
세상의 뜻 있는 자들이여. 여기 어린 조카를 물리쳐 머나먼 땅으로 유배시키고, 권자에 앉은 어리석고 치졸한 숙부가 있음을 그대들은 아는가. 이제, 세상은 바뀌었다 말하지 말라. 불의가 득세해 얻은 세상은 바른 세상이 아닐진저. 이 나라 조선 선비의 올곧은 기개는 화살이 되어 어디로 내달려야 하는지 그대들은 모르지 않을 것이리라.
가슴의 상처 소금으로 문지르며 실로 급박하게 달려온 세월이었다. 1452년 단종께서 즉위하사, 수양대군은 나와 함께 사정전으로 나아가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다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세상은 하룻밤을 지새면 하늘과 땅이 뒤바뀌듯, 허망하게 변했다. 1456년 6월, 사육신의 단종복위 거사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유배지 삭녕과 광주를 떠돌며 그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통곡하지 않았던가. 세조 3년(1457) 6월 단종께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 땅 절해고도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이 몸의 유배지도 옮겨져 경상도 순흥땅으로 처량한 발길을 돌렸다. 순흥땅에 들어서며 마음속에서 저절로 일어서는 복위운동의 깃발을 보았다. 비록 험준한 소백산을 지나는 큰 산줄기가 가로막고 있다한들 천리 길도 한 걸음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9월의 싱싱한 가을바람이 분다. 단종께서 청령포에 유배되신 지 벌써 세 달이 흘렀다. 두레골에 다다른 금성대군 일행은 맑은 계곡물에 땀을 식히며 말에게 물을 먹인다. 이제 두렛골을 넘으면 좌석이고, 그곳에서 산을 치달아 오르면 고치재에 설 것이다. 금성대군은 두렛골 서낭당의 돌탑 앞에 발걸음을 멈춘다. 돌 하나를 집어 탑 위에 얹으며 그는 간절히 소망을 빌어 본다. 거꾸러진 세상의 이치를 되돌려 놓으리라. 차근차근 준비하며 백성의 뜻을 모은다면 그 누가 무모하다 말하리요. 소백산을 넘나들던 순흥의 백성들이 저마다의 염원을 빌며 쌓아올렸을 돌탑을 새삼 우러른다. 불의를 무너뜨리고, 큰뜻을 세우기 위해 순흥도호부는 모자람이 없는 땅이었다. 고려 때에는 한강을 중심으로 남쪽은 순흥이요, 북쪽은 송도라, ‘남순북송’ 이라 하지 않았던가, 또한 소백산 북쪽에서 발원하는 남대천은 경상도 남대리와 충청도 무풍과 강원도 와석 삼도 접경지대를 적시며 흐르지 않던가, 이렇게 여러 도를 흘러온 물은 한양의 한강으로 흘러드나니, 왕이 조선 팔도의 물을 고루 마셔 나라가 평안하다고 믿어왔다. 그 땅에 한강의 ‘북대궐’ 이 아닌 남대천에 ‘남대궐’ 을 지어 불의를 뒤엎으리라. 금성대군은 순흥 부사 이보흠과의 첫 만남에서 듯을 함께 할 동지라는 것을 알았다. 부사의 수중에 있는 순흥도호부의 군사들은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금성대군은 인근에 무예가 뛰어난 자가 있으면 자신의 절절한 뜻이 담긴 글을 보냈다. 순흥도호부의 관할 고을에는 격문을 띄워 뜻을 함께 할 선비들을 모았다. 새벽녘까지 이어진 의기투합 끝에 이루어낸 다짐들을 부사 이보흠이 강직한 목소리로 읽어내려 갔다.
첫째, 순흥을 근거지로, 도호부의 군사700여명을 움직여 이웃 고을을 점령한다. 둘째, 죽령과 조령을 장악해 한양과의 연락을 두절시켜 영남을 아우르고, 온 나라에 격문을 띄워 동지들을 모은다. 셋째, 남대궐을 짓고 상왕을 모셔 복위에 대비하며, 힘을 길러 한양으로 진격한다.
뜻을 모으고 병사들을 모아 깃발을 펄럭일 날은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았다. 금성대군은 숱한 날들을 뜬눈으로 칠흑의 밤을 새우며 부릅뜬 눈으로 새벽을 맞았다. 그즘 영월땅에서는 단종의 애절한 시 한 편이 소백산 산넘이바람을 타고 넘어와 순흥을 적시곤 했다.
달 밝은 밤에 자규새 울면
시름 못잊어 다락에 기대었네
네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없을 것을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보내 전하노니
춘삼월 자규루에는 부디 오르지 마소.
애처로운 몸짓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어린 조카 상왕을 생각하며 울다 지치면 금성대군은 이보흠 부사를 데리고 고치재에 올라 산 아래 영월땅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영월땅의 상왕을 뵙기 위해 고치재에 오른 금성대군은 짙은 안개에 휩싸인 북쪽 영월땅을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내 부사 이보흠을 돌아본다. 이보흠은 지나온 산 아래에서 급박하게 들려오는 말발굽소리를 듣고 있었다. 흔들릴 것 같지 않은 그의 눈빛도 저녁 노을에 물들며 잔잔히 일렁인다. 그의 표정에 언뜻 불안한 빛이 스쳐간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소백산이 움찔움찔 놀랄 만큼 쩌렁쩌렁 산자락을 울린다.
대군! 어찌 이 잿마루에 올라 영월땅을 바라보시며, 그 슬픈 상왕의 시를 하염없이 읊조리던 대군의 눈물을 잊으오리까. 이 잿마루에서 큰 뜻을 세운다는 의미로 고치령을 건의령(建義嶺)으로 부르자고 했던 그 기개를 어찌…
부사 이보흠의 말이 끊어진다. 전령이 숨이 턱에 닿을 듯이 말을 달려온다. ‘밀고’라는 말에 이보흠의 온몸이 부르르 떤다. 금성대군의 그의 검게 변하는 얼굴빛에서 모든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한다. 뒤쫓아오는 관군의 말발굽소리, 고치재 잿마루로 가을의 이른 저녘 어둠을 성큼 몰아온다. 금성대군은 말 잔등에 채찍을 내리쳐 하염없이 바라보던 북녘의 영월땅으로 급하게 내달렸다. 눈물 뚝, 뚝, 떨어지는 가슴에선 참았던 속엣말이 쏟아졌다.
내 마음이 올곧다 이르는대로 내 홀로 말을 내달려 왔다. 세상의 세월은 가고 또한 온다. 무에 그리 두렵다 몸을 움추려 고개를 조아려야 하겠는가. 내 한 몸 이렇게 스러진다 한들 불의를 불태우려던 깃발은 더 높이 솟으리라. 역사는 그 무엇을 기록하려는가. 권좌에 빌붙었던 이들의 불의를 올곧은 역사라 쓰겠는가. 후세손손 물으리라. 그 역사의 불의를.
고치령 도착 기념 사진을 남기고 좌석리로 출발한다. 여기서 좌석리까지는 4.2km로 약 1시간 가량 소요된다.우리 일행은 14시 이후에 도착하면 실어 나르는 트럭을 부르기로 하였기 때문에 걸어서 좌석리까지 가기로 하였다.
걸어서 계곡과 어우러져 있는 소나무이며 나무들은 깊어가는 가을의 쓸쓸함을 느낀다. 여름 같으면 벌써 물로 들어가 알탕을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한다. 길옆으로는 사과 나무 과수원이 바람의 영향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낙과되어 나목이 되어 쓸쓸하게 지키고 서 있다. 걸어서 깊아가는 가을을 느끼며 내려 오니 연화동으로 가는 갈림길에 이정표가 서 있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버스가 보이고 선두 그룹이 하산주를 들고 있다.
좌석리 도착 : 14시 00분
아! 잊지 못할 소백산의 바람이여. 불러 보며 하산주로 오늘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본다.특히 이번 하산주는 새로이 선보이는 칡 말걸리, 더덕 막걸리로 준비하여 그동안 이용하였던 전도 쌀 말걸리로 익숙한 우리에게 새로운 맛을 선사 하였다. 어느 정도 막걸리로 피로를 풀고 광양을 향해 승차를 한다.
좌석리 출발 : 14시 47분
좌석리를 출발하여 영주를 거쳐 중앙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달리다가 군위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달리다가 구마 고속 도로를 경유하여 마산에서 다시 남해 고속도로에 접어든다. 잠에서 깨어보니 광영을 지나 김총무 마지막 인사말을 하고 있다.
백운 아트홀 도착 : 18시 42분
오늘 하루도 수고 했다는 인사말로 악수를 하며 헤어진다.
5.22구간 산행 소감
김종우 총무의 산행 소감 입니다.
6.22구간 참여 대원(38명)
조정출,정점덕,김종우,전영선,서승만,민태왕,심우섭,최영출,김영창,유인찬,주영환,황인영,박석용,김득휴,윤윤복,김명순,양동하,백승구,성관제,장일태,권정순,전숙자,박흥순,김정석,문창식,이용정,염복균,강승무,김병주,김상욱,김종열,송영철,송택섭,연성주,이덕규,장세윤,주명춘,최규언.
7.22구간 후기
이번 산행은 소백산 국립공원 지역으로 많은 볼거리가 있는 그런 산행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처음으로 참가하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이 글을 통하여 처음 참가하시는 분에게 미안함을 전한다. 그놈의 바람으로 인하여 그러한 조망은 볼 수가 없으며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시종일관 바람은 맹추였으며 오늘 그 바람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주제를 아! 소백산 바람 바람이여로 잡아 보았다.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온갖 고난이 있으리라. 그 역경을 이겨내는 자만이 그 목표를 이루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