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한 대통령 기록물, 건국 68년만에 최초 전시회
정치공세로 파묻힌 현대사 핵심자료 18만쪽, 이제서야 햇빛
정갑용 총장 "한국인의 역사 개척사, 학계서 연구 활성화를"
연세대 [우남 이승만 문서 특별전] 개막! 10월31일까지
이승만이 돌아왔다,
좌편향 역사 고치러!
대한민국 건국 대령 이승만이 돌아왔다.
하와이에서 1965년 눈감은 그가
38년만에 연세대 캠퍼스에 나타났다.
[우남 이승만 문서 특별전] 개막!
미국-소련과 싸우며
천신만고를 뚫고 대한민국을 세운
이승만의 파란만장한 90평생 역사기록물 전시회가
대한민국 건국 68년만에 최초로 열린 것이다.
[보안 필터 작동]
북한 김정일과 [NLL 흥정] 대화를 담은 [노무현 기록물]이
[수정-삭제-폐기-반역] 논란을 달구는 요즘,
국가기록원의 [국가기록물 3호] 이승만 대통령 문서 공개는
큰 화제를 불러 모으기에 충분하다.
<연세대 이승만 연구원>(원장 류석춘 교수)이
지난 8일 연세대 학술정보원 전시실에서 개막한
[우남 이승만 문서 특별전:10.8~31]은
지난 1995년 조선일보사가 해방50주년을 맞아
사진중심으로 열었던 [이승만 나라 세우기] 특별전] 이후
두 번째 이승만 전시회가 된다.
이번 [문서 특별전]은
구한말(1875)에 태어나 5.16후 호놀루루에서 숨진
[이승만 생애 90년]을 아우르는 방대한 기록물 18만여쪽 중에서
문서-사진등 50여점을 추려 내놓았다.
이승만 기록물은
조선 멸망사, 독립운동사, 대한민국 건국사, 북한 침략사, 한미-한일 외교사는 물론,
언어, 문학, 정치 경제 사회 사상사등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망라한 역사 연구의 핵심적 자료다.
이런 핵심자료가
연구는커녕 정치적 희생물로 매장되어 멸실-훼손되다가
이인수 박사의 노력과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겨우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정갑용 연세대 총장은
“이 문서를 학계는 물론 일반인과 학생들에게도 널리 소개함으로써
우남 연구를 더욱 활성화하기 위하여 오늘의 전시회를 기획하였다”고 말하고
다음과 같이 역사적 의미를 설명했다.
“이승만 박사는
조국이 국권을 상실한 후
국내는 물론, 상하이, 워싱턴, 하와이 등 망명 생활 속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매진하였고,
그 혼란 속에서도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주요한 공적 기록과 개인적 기록들을 충실히 보존하였다.3.1운동과 임시정부 관련 문서들 중에는
공적(公的)인 문서와 함께,
각종 선언서, 선포문, 청원서, 전단(傳單), 전문(電文), 신문 스크랩 자료들까지
정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미국 유학생활 관련 문서철에도
선교사들의 추천서, 성적표, 사진과 기차표까지
세심하게 정리보관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자료들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건국 초기까지
한국인이 스스로 근현대사를 어떻게 개척해 왔는지를 잘 보여 주는 구체적인 사료들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이처럼 방대하고도 중요한 <이승만문서 컬렉션>을 통해서
우리는 독립운동가이자 건국대통령으로서
이승만 박사의 업적뿐만 아니라,
기록 보존가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된다.“
이승만 박사의 양자 이인수 박사는
“우남 어른을 다시 만난 듯 기쁘다”면서.
[이승만 문서]의 기구한 행로를 밝혀 주목을 끌었다.
“4.19직후 윤보선 정권은
이화장의 가재와 모든 자료를 몽땅 경무대로 실어갔다.
다행히 서류캐비닛 하나만 남았는데
5.16후 1962년 폭염이 내리쪼이던 여름날,
왕십리 김종완씨 민가에서 인수하여
리어카에 싣고 이화장까지 걸어서 운반해왔다.
그후 정부측에서 돌려 받은 의류등 유물과 문서들은
좀 먹고 곰팡이에 썩어서 복원이 불가능한 것도 많았다.
트렁크에 들어있던 독립운동 자료가 썩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1994년 삼성 이건희 회장의 후원으로
이화장에 우남사료연구소를 설치,
유영익 교수(현 국사편찬위원장)와 이승만연구원의 오영섭 교수가
사료정리를 시작했다.
시설 미비로 고심 중에
최송옥 여사가
부암동 집과 부속 임야등 2,400평을 연세대에 기증함으로써
현대한국학연구소를 개설했고,
이화장의 사료도 연세대에 기증하여
현재의 이승만 연구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승만 연구를 위해 재산을 기증한
최송옥 여사는
“이제서야 이런 전시회를 열게 되다니
건국대통령에게 면목이 없다” 면서
“정부와 언론이
하루 빨리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역사를 바로 세워주기 바란다”고
거듭 당부했다.
최여사가
막대한 재산을 연세대에 기증한 것은
백낙준 전총장의 친구 아버지 최기식씨가
이승만박사를 도와 독립운동을 했던 뜻을 기리자는 목적에서였다.
전시회를 준비한 류석춘 원장은
“구한말 옥중기록부터
독립투쟁, 건국과정과 6.25, 외교전문가로서의 자료들은
우리 현대사의 중심사료”라고 강조하고,
“좌편향으로 왜곡된 현대사교과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바로 그 기록물이므로
관련학계에서
전면적인 연구가 조속히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안타까워 했다.
20년간 [이승만 문서] 정리와 연구에 헌신해온 오영섭 박사는
“너무 늦게 소규모 전시회를 연 것이
이승만 박사와 대한민국 역사에 부끄럽다.
본격적인 전시회를 반드시 개최하고 싶다”는
희망을 펼쳐보였다.
전시장을 돌아 본
인보길 <뉴데일리> 사장(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 포럼 대표)이
목소리를 높였다.
“국사학계를 광복시켜야 합니다.
북한식 민족사관에 함몰된 학자들과 그들이 길러낸 전교조 교사들이
대한민국 역사교과서를 집필하다니요.
우리 현대사의 주인공이
공산독재 김일성집단이고
대한민국은
저주와 타도의 대상으로 쳐박혀있는 꼴입니다.
이게 나라입니까?
역사를 빼앗긴 나라는 망합니다.
대한민국 정통성을 나몰라라 하는 정부와 집권당이야말로
[망국의 공범] 아닌가요?
[NLL 포기]만 반역이고
[국가역사 포기]는 반역 아니란 말입니까?"
위대한 국가 컨텐츠 [이승만 문서]의 이력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과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을 지낸 우남 이승만 박사가 남긴
방대한 분량의 문서와 사진이다.
양자 이인수 박사가 이화장에서 보관하다가
1997년 11월 연세대학교에 기증,
2008년 10월 ‘국가지정기록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 건국운동, 통치활동 및 독립건국사상에 대한 연구 평가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자료로서 역사적 서지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를 정리, 연구, 한국인의 독립사관과 건국사관을 수립하는데
필수적인 역사기록물이다.
1. 옥중 활동
1899년 1월부터 1904년 8월까지 5년7개월간 한성감옥에 투옥됨.
자신이 창간한 최초의 일간신문 ’매일신문‘ ’제국신문‘등에 논설 수백편 비밀 게재.
기독교잡지에 기고. 기독교 전도, 감옥학교 개설, 감옥도서관 운영,
시등 문필활동, 콜레라 환자 구원. [옥중잡기]로 분류되는 희귀자료 다수.[청일전기] [독립정신] 등 저서 다수, 영한사전 편찬, 영문자료 번역.
2. 미국 유학생활
1904년 11월 고종황제의 밀사로 미국에 건너감.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 면담, 한국의 국권회복 지원 요청.1905년 조지워싱턴 대학 입학, 1907년 6월 학사학위.1907년 7월부터 1910년 7월까지 하버드대학 석사학위, 프린스턴대학 박사학위.국제법 논문 [미국 영향하에 성립된 ‘전시 중립론’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r States )]으로 한국 최초 서양국가 박사가 됨.
논문은 프린스턴대학서 출판.유학중 미국 각지의 교회들과 YMCA를 순회강연, 한국의 독립 지원과 선교 활동.
3. 하와이에서 독립운동
1913년 2월부터 1939년 11월까지 27년간 하와이에서 독립운동 전개.*태평양 잡지, 태평양 주보, 하와이한인교회보 등을 통한 언론 선전활동.*한인 기숙학교, 한인 여자학원등을 설립하여 한국인 교육 활동.*대한인국민회, 대한인교민단, 대한인동지회 등을 통한 단체 활동.
*동지식산회사를 설립, 독립자금과 교육자금 조성을 위한 산업활동.*한인 감리교회, 신립교회 등을 통한 종교활동.*[한국교회 핍박] [독립정신] [대한독립혈전기]등 저술 출판활동.
무력투쟁을 앞세운 급진노선의 박용만세력과 갈등. 1930년대 합동운동으로 해소.
4.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1919년 3.1운동후 여러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선출됨.
연해주 대한민국의회 국무총리,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한성임시정부 집정관총재,1919년 9월 상해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 대통령 선출.이승만은 상해정부는 국무총리체제로, 자신은 워싱턴에 [구미위원부] 설치,
각종 국제회의에 한국독립 지원 호소, 임시정부 승인요청 외교홍보전 주력.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무장투쟁과 외교활동 병행] 전략. 미국에 군사원조 요구.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는 해방후까지 대한민국 건국외교운동의 중심기지.
1923년 3월 임정의 이념노선과 지역갈등 결과 임시의정원의 탄핵으로 사임.
5. 해방후 건국운동
1945년 10월16일 독립운동 33년만에 귀국.
200여개 정당-사회단체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로 추대.김구등과 더불어 신탁통치 반대투쟁 지휘. 대한민국 대표민주의원 의장에 선출.미소 공동위원회 협상무산되자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 결의안 얻어내다.1948년 사상최초 민주선거 5.10선거 성공, 제헌국회 의장에 선출. 7월17일 제헌헌법 공포. 7월24일 국회간접선거로 초대대통령 취임.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정부수립 기념식. 유엔에서 47개국의 승인 받음.
6. 제1공화국 통치문서
1948년 8월이후 생산된 대통령문서. 총12만쪽.
*정부 각부처 보고서 *재외공관 보고서 *주한미국대사관 문서
*한미방위조약등 국제관계
*이승만 대령의 각종 연설문과 각종기관 홍보관련문서
*이승만 대통령의 서한, 초청장, 감사장등
*이승만대통령 부부의 신상관련 기록, 일기, 비망록등 경무대 문서
*전보문 *비자신청서류 *기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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