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산 주능선은 북동쪽 약사령에서 서쪽 정상 부근에 이른 다음, 남으로 이어지다가 삼각봉을 지나 거의 남동으로 이어지는 ㄷ자형 산세를 이룬다. 이 형국에서 ㄷ자 안쪽(도평리 약사계곡)은 대부분이 군사훈련지역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민간인 출입도 어렵고, 등산코스도 전무하다.
등산로는 ㄷ자형 산세에서 바깥쪽으로만 나있다. 북쪽은 용화동계곡, 느치능선과 느치계곡, 북서쪽은 약물계곡과 궁예능선, 서쪽은 숨은폭포계곡과 자인사협곡, 남으로는 책바위암릉과 등룡폭포~억새밭 코스가 대표적이다.
용화동계곡~약사령능선~정상 용화저수지 남단 명성산 종합안내판에서 동쪽 용화동 4반 마을비석과 이동식화장실 사이로 난 길이 용화동계곡으로 가는 길이다. 화장실을 지나 15분 가면 출입경고판이 나오고, 15분 더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계류를 건너간다.
계류 건너 10분 더 오르면 합수점에 닿고, 왼쪽 길을 따라 25분 올라가면 용화저수지가 시야에 들어오는 전망장소를 지난다. 남쪽으로 휘돌아 이어지는 길로 약 100m 더 오르면 도계능선인 약사령이다. 약사령을 넘어가면 왼쪽으로 공터가 있다. 공터 남쪽 협곡은 도평리 약사동계곡이다.
공터에서 서쪽 급경사 사면이 정상 방면이다. 오르막을 약 60m 오르면 능선 위로 올라간다. 이어 능선길을 따라 약 80m 거리인 헬기장에 이르면 정면으로 M자형으로 하늘금을 이루는 험준한 암봉이 마주보인다. 15분 가면 길은 암봉을 두고 북사면으로 우회한다. 급경사 절벽을 10분 가량 횡단하면 암봉 꼭대기로 올라선다.
남쪽 아래가 수십 길 절벽인 암봉 위에서는 용화동계곡과 약사동계곡이 거대한 분지처럼 조망된다. 이어 억새군락이 시작된다. 약 100m 더 나아가 언덕 위로 올라서면 정면으로 환상적인 풍광이 펼쳐진다. 약사령 능선을 뒤덮은 수십만 평 억새군락이 온통 노란색 비단을 깔아놓은 듯 펼쳐진다.
능선을 따라 10분 가면 느치고개 방면 능선길과 만나는 730m봉에 닿는다(제4지점 안내푯말). 안내푯말을 뒤로하고 5~6분 거리에 이르면 느치계곡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안부에 닿는다(제5지점 안내푯말). 이어 오르막으로 쉬지 않고 30분 오르면 910m봉 아래 삼거리에 닿는다.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8~9분 거리 안부를 지나 6~7분 더 오르면 명성산 정상이다.
명성산 종합안내판 앞 출발, 용화동계곡~약사령~약사령능선~제4지점~제5지점~910m봉 아래 삼거리~남릉을 경유해 정상에 오르는 산행거리는 약 6km로, 3시간30분 안팎이 소요된다.
*삼부연폭포
겸재도 금강산 길에 들러 그림 그린 곳
갈말읍에서 2km 거리에 있는 이 폭포는 철원팔경 가운데 첫손에 꼽는 경승지다. 그래서 옛날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유람을 오고가는 이들이 꼭 들렀다는 폭포다. 이들 중에는 조선 후기의 화가 겸재 정선도 금강산을 그리러 가는 길에 이곳에서 폭포를 화폭에 담았다 한다.
높이 20m인 폭포 물살이 한 굽이 쏟아져 내릴 때마다 그 아래에 가마솥 같은 세 개의 물웅덩이를 이룬 데서 삼부연(三釜淵)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노귀탕, 솥탕, 가마탕으로 불리는 세 물웅덩이로 뒤틀려 쏟아지는 폭포는 보는 이의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삼부연폭포에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일으켜 철원으로 왔을 때 4마리의 이무기가 살았는데, 그 중 도통한 3마리는 용이 되어 바위를 뚫고 하늘로 승천했고, 용이 뚫고 지나간 자리가 지금의 가마 모양으로 뚫렸다는 전설이 있다. 이 때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해마다 심술을 부려 비가 오는 것을 막았다. 그런 연유로 철원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삼부연폭포에서 기우제를 지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달랬다고 한다.
삼부연폭포가 극심한 갈수기에도 물이 항상 세차게 흘러내리는 이유는 폭포 상류에 있는 용화저수지에 담긴 물이 항상 흘러내려오기 때문이다. 폭포의 물은 철원 일대의 상수원으로 철저히 보호된다. 빙폭을 이루는 겨울철에는 빙벽등반을 즐기는 클라이머들이 찾기도 한다. 폭포 오른쪽 거대한 바위벽을 뚫은 오룡굴은 70년대 군인들이 뚫었다. 이 굴을 빠져나가면 용화저수지에 이른다.
*궁예와 명성산
궁예와 관련된 전설들 산재
궁예(弓裔·?-918년)는 896~898년간에 철원(구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후 궁예는 901년 당나라에게 괴멸당한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 보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 일환으로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연호를 무태(武泰)로 바꾼다. 그 후 1년 뒤(905년) 구철원 북쪽 30리 거리인 풍천원 들판(지금의 철원과 평강 사이 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 911년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泰封)이라 칭한다.
그러나 궁예는 풍천원 들판에다 거대한 도성을 축조하면서 강제로 노역에 끌려온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지지세력들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청주 지역을 너무 편애하게 된다. 그러자 경기 북부 호족들이 반기를 들고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을 앞세워(877-943) 918년 궁예를 몰아낸다.
훗날 궁예가 왕건의 군사에게 쫓겨 진을 친 곳이 명성산이다. 이 때 궁예가 이 산에서 철원쪽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겨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하여 '울음산'으로 불리었고, 궁예가 강변에서 한탄했다 하여 ‘한탄강’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궁예와 명성산이 관련된 전설은 매우 많다. 산정호수 옆 두 개의 봉우리는 궁예가 올라가 망을 보았다는 곳이고, 등룡폭포 위 샘터 이름이 궁예약수, 자인사에서 궁예가 기도를 올렸다는 전설, 정상에서 강포리쪽으로 이어지는 궁예능선은 왕건의 공격을 피해 항거하며 쌓았다는 성터와 궁예왕이 숨었었다는 궁예왕굴 등 이 남아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고려사에는 '궁예가 평강과 안변 사이 험준한 지형인 삼방협으로 도망을 갔을 때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끓여 먹다가 평강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이 지방 주민들로부터 전해지는 전설은 궁예가 삼방협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중이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 이런 협곡에 들어와 살아남겠다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자 궁예는 "드디어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 높은 곳에서 의연하게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조선 말기에 제작된 지도인 청구도에는 삼방협 위치에 궁왕묘(弓王墓)가 그려져 있다. 또 1924년 최남선이 쓴 풍악기유(楓嶽記遊)에는 궁예왕 무덤흔적을 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산정호수
명성산과 부부처럼 짝을 이룬 호수
산정호수는 명성산 그림자를 끌어들여 비경을 이루면서 사시사철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명소다. 이 호수는 1925년 포천군 영북농지개량조합이 관개용 저수지로 축조한 인공호수다. 수심 20여m에 넓이는 7만8천 평. 이 호수는 영북면 농토를 살찌우는 젖줄로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저수지 이름은 사방이 산으로 에워싸인 가운데에 자리 잡아 산중 우물 같다는 뜻을 지닌 산정리(山井里) 마을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호수 주변은 1977년 국민관광지로 개발되면서 더욱 화려하게 변신했다. 96년 한화콘도가 호수 입구에 개장되어 수영장, 볼링장, 사우나시설을 갖췄다. 그밖에 눈썰매장, 스케이트장, 놀이시설 등이 있고, 사계절 관광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보트와 수상스키를 즐길 수 있고, 겨울에는 호수 자체가 천연 스케이트장으로 변한다. 40여 년 전 국내에 실내 스케이트장이 없을 시절에는 이 호수 빙판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이 훈련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호수 서쪽 망무봉(446m)의 간단한 등산로와 호안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는 연인들 데이트 코스로 인기 있다. 망무봉과 함께 호수 남동쪽 주차장 옆 암봉인 망봉산(363.1m)은 궁예가 망을 보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90년대 중반에는 대규모 온천단지가 개발되어 이와 연계된 겨울관광휴양지로도 인기 있다.
*자인사
궁예와 왕건의 악연 풀리려나
자인사(慈仁寺) 자리에 대한 기록으로는 향토연구가 이우형(李宇衡) 선생이 기록한 전통사찰중수기에 '왕건(877-943)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태조로 즉위하면서 이 자리에 신성암(神聖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그 후 300여 년이 지난 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충열왕 3년(1227년)에 중건하고 절 이름을 왕건의 자호를 따서 약천암(若天庵)이라 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신성암 또는 약천암에 대한 더 정확한 기록들은 거란침입과 몽고침략, 6.25동란 등 수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모두 소실되어 이 기록도 본래 옛 원주민들이 구전으로 전해온 전설들을 취합한 내용이라고 한다.
자인사 자리는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하기 전 이곳에서 산제를 지내고 현몽을 받아 승전했고, 그 후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 명성산으로 피신했을 때도 자인사 뒤 커다란 바위 아래에다 제사상을 차리고 자주 기도를 드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전설에서 ‘커다란 바위’는 지금의 극락보전 지붕 위 오른쪽으로 가장 크고 넓게 보이는 책바위가 아닌가 추측된다.
원래 자인사는 1949년 서울 명륜동에서 창건된 절이었다. 이 자인사가 1964년 허물어진 축대와 주춧돌 몇 개만 남아 있던 현재의 자리로 김해공(金海公) 스님이 13평 크기 법당을 신축하고 옮긴 것이라 전해진다.
경내에 있는 자인사 안내판에는 '자(慈)는 미륵의 뜻으로 불가에서 자비를 말하며, 궁예왕이 미륵세계를 구현코자 함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고자 함이다. 인(仁) 자는 용서와 화해의 의미를 담고 있는 글자라 하여 영계(靈界)에서 궁예와 왕건의 악연(惡緣)을 풀고자 하는 기원의 의미에서 붙인 것'이라 쓰여 있다.
1993년 정영도(鄭暎道) 스님이 극락보전을 신축했고, 1964년에 지은 법당 옆에 1998년 미륵좌불을 조성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첫댓글 자세하게 글을 써서 더이상 다른 인테넷 검색할 필요가 없네..수고했다
초보자 도움산행 부탁합니다. 북문탑승
죄송 집안일로 어려울듯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