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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
(1) 1945년 - 1950년
해방이 된 1945년 좌익의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 협동조합전국연합회 발기회를 구성하였고 1946년 2월에는 금융조합연합회가 금융조합을 협동조합으로 개편하자는 주장을 내걸고 협동조합추진위원회를 전국에 설치하였다. 한편 한국노총의 전신인 대한노총도 소비조합 건설을 위해 움직였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2) 1950년 이후
우익의 농민단체인 대한독립농민총연맹에서는 1950년의 6.25 동란 이전까지는 지역단위에서 농민후생조합을 조직해 오다가 전시인 1951년에 이르러 농업협동조합조직추진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읍면단위 농업협동조합 발기대회와 동시에 각 시도연합회 및 농업협동조합중앙연합회의 결성에까지 이르렀다. 같은 해에 금융조합연합회도 다시 농협추진위원회를 두고 1천여 개의 읍면조합과 도연합회 및 농업협동조합중앙회까지 결성하여 서로 대립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조직과 사업이 활성화되지 못하였고, 1952년 당시의 농림부장관이 주도하여 조직한 사단법인 농촌실행협동조합에 이르러 비교적 뚜렷한 실체가 이루어졌다. 이후 정부 주도하의 농협설립이 진행되었다.
(3) 1950년대 : 일제 침략기부터 시작하여 해방 후에도 이어지는 이찬갑 선생과 풀무
해방 이후 남과 북에서 협동조합운동이 독자적으로 진행되었는데 남한에서는 정부 주도 아래 농업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이어 수협, 축협 등이 창립되었다. 남한에서 민간이 자발적으로 협동조합 운동을 다시 시작한 곳은 1958년 충남 홍성 풀무학교다. 일제하 1930년부터 평북 정주에서 오산학교와 오산소비조합을 경험했던 이찬갑 선생은 홍성의 주옥로 선생과 함께 홍성에 풀무학교를 세우면서 학교 내에 구판대를 설치하여 학생들이 학용품과 책 등을 공동으로 구매하게 하고 협동조합을 교육하였다. 이후 1960년대 후반에는 농민들이 학교 조합의 물품을 이용하게 하고 1969년에는 신협을 세웠으며 1970년대에는 농기계 이용조합, 제빵 생산조합 등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이 학교의 교사로 있던 채규철 선생과 졸업생 황학석이 1968년 부산의 장기려 박사, 함석헌 선생과 함께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세우게 되는 것은 협동조합 운동의 또 다른 결실이었다.
(4) 1960, 70년대 : 소비자협동조합에 중요한 자양분을 제공한 협동교육연구원
해방 이후 소비자협동조합운동을 위해 가장 크게 기여한 조직 가운데 하나는 협동교육연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협동교육연구원은 신협운동의 중요한 성과였다. 일제 침략기 때부터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캐나다에서 협동조합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1960년 5월 1일 부산 성가병원을 중심으로 성가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이후 1962년 협동교도봉사대를 조직하여 협동조합을 교육하기 시작하였는데 1963년 서울로 옮겨와 “협동교육연구원”이라고 명칭을 변경하고 2000년대 초 문을 닫을 때까지 신협 관계자만이 아니라 소비자협동조합, 농업협동조합 등의 협동조합 운동, 농민운동, 지역운동에 참여하는 지도자 약 2만여 명을 길러 냈다.
(5) 1960년대 이후 노동조합, 노동 운동과 소비자협동조합의 관계
한국노총은 일제 침략기 때 조선노동공제회가 소비조합을 건설한 것을 이어 받아 노동조합 조합원들의 복지 차원에서 소비자조합운동을 하였다. 1959년 인천의 대성목재에 처음 소비자조합을 만들지만 이것은 조합원의 자발적 출자가 아닌 노동조합이 조합을 만든 성격이었다. 조합원들의 자발적 출자를 통해서 만든 것은 1961년 상업은행 노동조합이 만든 소비조합이다. 이후 한국노총 소속의 단위 노동조합에서는 소비자조합을 많이 만들었으나 활발하지 못하고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한편 선교와 노동운동을 활발하게 진행했던 영등포산업선교회는 1965년부터 논의를 시작하여 68년에는 타이어 재생공장, 1969년에는 신협, 1967년, 74년에는 두 차례의 주택조합사업 등을 하다가 1978년에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신협이 강제 해산 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후 신협을 ‘다람쥐회’로 변경하여 활동하면서 군사정권에 계속 탄압을 받았고 2002년에는 서울의료생협을 설립하고 2004년에는 서로살림생활협동조합을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1970년대 민주노조로 유명한 원풍모방에서도 소비자조합운동이 이루어졌다.
(6) 1966년부터 가톨릭 원주 교구가 뿌린 협동조합 운동의 씨앗들과 한살림의 출범
2차 세계대전과 일제 침략기에 침묵한 것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로마 교황청과 한국가톨릭은 1960년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1965년 춘천교구에서 독립한 원주교구에 지학순 주교가 부임하면서 일대 전환기를 맞이한다. 그 다음 해인 1966년에 가톨릭농민회가 출범을 하고 원주신협이 세워지지만 원주신협은 내부 문제로 오래 못가고 문을 닫는다. 이후 원주교구는 같은 가톨릭 계통 소속인 협동교육연구원의 지원을 받으면서 원주의 장상순, 박재일, 이경국 등 많은 활동가들이 교육, 훈련을 받고 탄광촌에 신협을 건설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1971년에는 가톨릭계통의 원주 진광학교 내에 협동교육연구소가 세워지고 장상순이 소장을 맡고 이후 진광학교 교사로 있던 박재일이 결합하였다. 원주신협 실패 이후 다시 밝음신협이 만들어지고 1972년 여름에는 남한강재해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지학순 주교, 장일순 선생 등을 중심으로 농촌에서 협동조합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할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남한강재해대책위원회의 활동은 강원도, 충청북도 등에서 진행되었으며 각 농촌 지역에 협동조합 운동의 씨를 뿌리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이러한 노력으로 1979년 평창군 신리에는 소비자협동조합(지금은 존재하지 않음)이 세워지는 등 많은 농촌 지역에 소비조합이 만들어지고 1985년 6월에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이 만들어진다. 이어 1986년 12월 서울에는 한살림농산이 출범하고 1988년에는 한살림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협동 조직이 탄생하였다.
(7) 협동조합 운동의 소중한 자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과 의료협동조합 운동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고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장기려 박사가 1968년 5월 13일 부산시 초량의 도시빈민들과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청십자의료협동조합(초기에는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나 이후 ‘청십자의료협동조합’으로 변경됨.)’을 창립하였다. 이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은 홍성풀무학교 교사로 있다가 덴마크에서 농업과 협동조합을 공부하고 돌아온 채규철의 제안으로 이루어졌고 홍성풀무학교 졸업생 황학석이 직원으로 참여하며 민주화 운동의 어른인 사상가 함석헌 선생이 조합원 1호로는 가입한다. 이후 조합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하여 1988년에는 23만여 명이 가입하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정부가 추진하는 도시지역의료보험이 1989년 7월부터 실시됨으로써 1989년 6월 30일자로 해산하였다. 만 20년 동안 서민을 위한 협동조합운동이 그 사명을 다하고 자진 해산 한 것이다. 한편 1972년에는 성남 주민교회가 주축이 되어 ‘주민교회의료협동조합’을 시도하였으나 유신 정권의 시작으로 중단되었다. 그리고 1976년에는 난곡희망의료협동조합이 서울의 도시빈민촌 지역인 난곡에 세워져 10년 넘게 유지되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1994년 안성의료생활협동조합 등에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1960, 70년대의 소비자협동조합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 이후 소비자협동조합 운동
(1) 1970, 80년대(Ⅰ) : 신협운동과 소비자협동조합운동의 연대
해방 이후 도시에서 소비자협동조합이 처음으로 시작한 것은 1985년 5월 안양신협의 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안양소비자협동조합(이후 ‘바른생협’으로 변경)이다. 우리나라 협동조합 운동에서 신용협동조합과 소비자협동조합은 깊은 관계가 있다. 그것은 신협에서 만든 협동교육연구원이 신협운동의 지도자만이 아니라 소비자협동조합 운동의 지도자들을 교육하고 훈련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초기 소비자협동조합의 지도자들 중에는 신협운동 출신이 꽤 많았다. 소비자협동조합중앙회 초대 회장 정홍권, 사무총장인 곽창렬 모두 신협 출신이었다. 이렇게 인적 자원이 겹치는 것은 1974년 구로신협(이사장 정홍권)이 시작한 구판장 사업이 성공을 거둠으로 전국의 많은 신협들이 구판장 사업을 하게 되고 이러한 경험이 바탕이 되어 1980년대에 들어서 지역 신협이 소비자협동조합을 만드는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이후 1983년에는 신협운동 출신의 지역 소비자협동조합들이 중심이 되어 소비자협동조합중앙회(약칭 ‘소협중앙회’ 이후 ‘생협전국연합회’로 변경)를 출범시킨다.
(2) 1970, 80년대(Ⅱ) : 지역 자생적인 소비자협동조합과 여성운동으로써 한국여성민우회생협
이와는 별도로 1970년 초에 마포시영아파트와 화곡동에서는 동네 주부들이 주부구매클럽을 만들어서 소비자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 두 지역은 이화여대 이효재 교수가 지역 여성을 대상으로 소비자협동조합을 만들기 위해서 진행하였는데 오래가지는 못했다. 1980년대 후반 한살림이 출범한 이후 여러 종류의 생협이 만들어진다. 대표적인 단체 생협으로는 한국여성민우회생협이 있다. 한국여성민우회생협은 생협의 조합원 대부분이 주부라는 점을 살려서 여성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을 접목하여 1989년 12월 출범을 하였다.
(3) 1970, 80년대(Ⅲ) : 일제 침략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YMCA의 협동조합 운동
또 하나의 단체 생협으로 YMCA생협이 있는데 YMCA는 일제 침략기 때부터 하던 협동조합 운동을 이어서 한다는 의미가 있다. YMCA는 일제 침략기부터 현재까지 협동조합운동을 꾸준히 해온 유일한 조직이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한국 협동조합운동은 단절되었으나 홍성 풀무는 이찬갑 선생 개인에 의해 이어져 왔고 YMCA는 조직으로 계승된 것이다. YMCA에서는 양곡조합운동이 1973년에 서울YMCA의 ‘사회개발단’사업의 하나로 결의되고 74년 3월부터 독립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한 경기도 화성 수촌리를 비롯한 13개 마을로부터 시작되었다. 한국YMCA연맹은 이 사업을 모델로 삼아 76년도에 312가마를 모금해 18개의 양곡조합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같은 해 양곡조합 27곳, 신용협동조합 66곳을 만드는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90년에는 소비자협동조합운동을 다시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1970, 80년대(Ⅳ) : 지금은 사라진 양서협동조합의 출발과 강제 해산
양서협동조합이란 좋은 책이 귀하던 1970년대에 책을 공동으로 구입하고 서로 빌려 보기 위해 만들어진 소비자협동조합이다. 70년대 중반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 갔다 온 김형기는 존경하는 고등학교 선배 채규철로부터 협동조합 운동을 소개받고 1977년 9월 협동교육연구원에서 4주간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이후 부산에 내려가서 1978년 4월 중부교회에 다니는 대학생, 청년 그리고 민주주의에 관심 있는 인사들과 함께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이후 부산양서협동조합으로 변경)”이라는 소비자협동조합을 만든다. 당시 책에 대한 갈증이 크던 청년, 학생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여서 서울, 광주, 대구, 마산, 수원, 청주 등 많은 지역에 양서협동조합이 창립된다. 그러던 중에 1979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부마항쟁의 배후로 부산양서협동조합을 지목하고 김형기 등 지도부를 구속하고 강제 해산하게 된다. 그러나 양서협동조합의 불씨는 사라지지 않고 1980년 5월 서울에 “어린이도서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살아나서 이후 독서운동을 계속하게 된다. 한편 서울YMCA의 청년 독서모임 등에서는 이후에 양서협동조합을 다시 재건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협동조합 방식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북카페, 독서회 등으로 이어졌다.
(5) 현재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생협 홍성 풀무생협
홍성 풀무학교와 졸업생 그리고 지역 주민들은 1980년 풀무생협을 창립하였고 이후 경영의 어려움 속에서 1983년 발전적인 해산을 했다가 그해 12월 재건을 하였고 현재에는 생산자 중심의 튼튼한 협동조합을 운영하고 있다. 농촌에 협동조합을 만들면서 소비자협동조합으로 만든 것은 이찬갑 선생이 이후 협동조합은 ‘소비자협동조합’과 ‘신용협동조합’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홍순명 선생 인터뷰) 한편 풀무생협에서는 소식지를 발행했는데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계속 실으므로 해서 1986년 12월 전두환 정권에 의해 폐간되었다. 풀무생협은 이에 굴하지 않고 홍성군에 있는 홍성YMCA와 홍성농민회 등과 함께 1987년 ‘주간 홍성’을 발간한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간 지역신문이다. 이를 계기로 다른 지역에도 지역 신문이 만들어진다.
(6)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 각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세워지는 소비자생활협동조합
1986년부터 시작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한국에 농업 분야 개방을 요구하기 시작하자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우리 농업을 지키기 위해 여러 방법을 모색하던 중에 생협을 하나의 방법으로 선택한다. 아울러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을 시도하던 활동가들은 1988년, 1992년 선거에서 실패하면서 운동의 대중적 기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생협운동을 통한 대중 조직의 건설을 꿈꾸게 된다. 지역의 중소도시에서 만들어진 생협들에게는 전자가 이유였다면 서울과 인천 등 대도시와 울산, 창원 등의 공단 지역에 만들어진 생협들에게는 후자가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열기로 1990년대 중반 한 때에는 전국에 200개가 넘는 지역 생협이 만들어진다. iCOOP생협의 창립 주역인 6개의 지역생협(한밭생협, 부평생협(현 인천생협), 부천생협, 수원생협, 안산생협, 볕내생협(현 양천생협) 등)도 이 시기에 세워진다.
(7) 1990년대 말 :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의 위기와 파산 그리고 극복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전국 곳곳에 만들어진 생협들은 9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경영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소비자협동조합으로써 사업에 대한 이해와 경영을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무리한 운영을 하였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소협중앙회가 물류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실패했다. 이후 1997년 IMF를 전후로 231개 생협(대부분이 지역 생협이고 일부가 직장, 대학, 의료생협) 가운데 66.7%인 154개가 소멸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97년 경인지역의 비교적 규모가 큰 생협들이 모여 수도권사업연합(현 ‘두레생협연합회’)을 만들었고 여기에 합류하지 못한 작은 생협들이 다시 모여 경인지역생협연대(현 ‘아이쿱(iCOOP)생협’)를 시작했다. 1997년은 우리나라 전체에는 ‘외환위기’라는 시련이 찾아온 해이고 생협에는 시련과 함께 극복의 터전을 다진 해이다.
(8) 2000년대 이후 : 다양한 방법으로 연대와 협력을 향해...
현재 우리나라 생협들의 연합조직으로는 크게 iCOOP생협, 한국여성민우회생협, 생협전국연합회, 한살림 등이 있다. 이들 단체들은 활동목적이 약간씩의 차이는 있다. 소비자, 생산자 함께 참여하는 새로운 소비자 운동의 가치를 들기도 하고(iCOOP생협연합회), 여성운동의 맥락에서 접근하기도하고(여성민우회생협), 유기농 생산자가 중심으로 출발하여 소비자가 결합하는 생명운동을 목적으로 하기도(한살림)한다. 그러나 크게는 이웃끼리 서로 협동하며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