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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고요했다. 내가 한참 모닥불을 지피고 있을 때쯤, 그가 다가와 마주앉으면서 말을 건넸다.
“우리의 만남도 오늘밤이 마지막이 될 것 같은데, 김형의 최대 고민거리를 말해줘야 되지 않겠소? 내기는 분명 내기니까...”
“다음 행선지는 어느 별입니까?”
내가 농담조로 말하면서 시선을 밤하늘의 아무 별에게 던졌다가 얼른 그에게로 고정시켰다. 여전히 그는 환한 웃음을 짓고만 있었다.
“글쎄, 이름 따윈 잘 생각나지 않소.”
그 역시 농으로 말을 받으면서도 아까 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재촉했다.
“처음에 김형은 내가 마술사인 줄 알았지요? 사실 그 마술이란 것도 그 비법을 모두 배우고 나면, 더 이상 마술의 매력을 잃게 되지 않겠어요? 내가 가진 능력을 다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부담 갖지 말고 고민거리를 말해 봐요.”
“그런 시시콜콜한 수준정도는 당신이 더 잘 알아야하는 거 아니오? 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지리 도무지 모르는 것이 없는 그 잘난 통찰력으로 말이오.”
나는 심술궂게 끝까지 비아냥거려 보았다. 하지만 그는 잠시 동안 뭔가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가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단계를 건너뛰어도 되겠소?”
“무얼 말입니까?”
“김 형의, 그 풀지 못한 최대과제를 들은 셈 쳐도 되겠냔 뜻이오.”
내가 어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표시로 어깨를 한 번 들썩여주었다. 그러자 그는 수첩을 꺼내려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는다든지 하는 어떠한 작은 동작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한 손에는 수첩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펜을 쥐고 있었다. 그리곤 부지런히 무언가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고도의 정신집중상태에서 벗어나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내게 수첩을 건네줄 때까지, 나는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역시 환한 호의의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수첩을 펼쳐보았다.
아래 화학식은 지금까지 당신을 고찰 하였던 바, 착염(당신의 소망) 및 복착염화(당신의 욕구 + 투자자의 욕망) 반응에 대한 결과(원래의 맑은 물)를 바라는 것이 가장 올바를 듯하다.
※ 아미노산(회사구성원들의 욕망)과의 반응의 예 - Fe는 당신의 욕구
(NH₄-CHR-COO―) + Fe2(SO4)3 + 12H2O
→ 3(NH4)2SO4 + 12CH₂+ 2Fe(OH)₃+ 9O₂↑
※ 지방산(투자자들의 욕망)과의 반응의 예 - Fe는 당신의 욕구
3(CH3CH2COOH) + Fe2(SO4)3 + nCH₂
→ 3[CH3(CH2)nOSO3 -Fe+3]+ Fe(OH)₃+ 1.5CO2↑ + 1.5C
※ 기타 이온(여타 소액 투자자들의 욕망)들과의 분해 및 착염화에 따른 반응 - M은 당신의 소망
* <산화제의 금속염(당신의 소망 M)과 탄산수소(소액투자자 A의 욕망)의 분해 및 착염>
M+3 + 3HCO-3 ⇒ M(OH)3 + 3CO2
* <금속염(Fe는 당신의 욕구)과 인산(소액투자자 B의 욕망)의 분해 결합>
M+3 + PO4-3 ⇒ MPO4
* <이온화경향이 높은 각종 금속염(여타 소액투자자의 욕망 C - 여기서의 M은 당신의 잔여 소망 부스러기)과의 전자교환 및 착염>
3Mg+2 + M(SO4)3 ⇒ 3MgSO4 + M+2
3Zn+2 + M(SO4)3 ⇒ 3ZnSO4 + M+2
3Ca+2 + M(SO4)3 ⇒ 3CaSO4 + M+2
6Na+ + M(SO4)3 ⇒ 3Na2SO4 + M+
*<복착염화 현상(당신의 욕구 Fe + 투자자의 욕망 Mg, Zn, Ca...)의 화학구조의 예>
Fe[Na(Mg)SO4]
Fe2[Na2(Mg)SO4]3
(Zn),(Ca),...
*<고염기화 상태에서의 폭기 충돌(투자자의 손익분기점 + 당신의 자유의지)에 의한 탈기현상>
NH4 - N(투자자의 욕망 손익분기점) - NH3(자유암모니아 탈기 - 당신의 자유의지 A) NH4CL(탈기 - 당신의 자유의지B)
= 이로서 여액은 본디의 물로 환원 될 것이로다.
“다른 탁월한 방법도 많이 있지만, 지금 김형은 시간이 없잖소. 김형은 명석하니, 내가 써준 그 방법의 한계는 모두 당신의 것이 될 것이오. 핫핫핫...”
나는 수첩에 나열된 화학식을 본 순간 너무 놀라서 오히려 입을 콱 다물 지경이 되었다. 나는 마치 어둔 동굴 속에서만 살다가 환한 도시의 불빛으로 인도된 원시인 마냥 너무도 놀라고 환희에 겨워 얼마 동안 부르르 떨고만 있었다. 그가 내게 준 화학식은 명쾌하고도 완벽한 절대 절명의 과제에 대한 정답,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바로 그것이었다.
“당신이!.. 아, 예언자... 당신이 날 구해냈어!... 날 구했어!.?..?...!”
나는 미친 듯 외치며 부둥켜안고서 키스세례라도 퍼부을 기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미 사라지고 그 자리에 없었다. 나는 그를 찾기 위해 모닥불을 중심으로 한 사방팔방의 어두운 백사장을 지칠 때까지 달리고 달렸다. 결국 그의 부재를 인정하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에 박힌 무수한 별들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서있는 그 세상은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소. 그것이 그대가 속한 환상세계 속의 유일한 자유인 것이오.”
천공에서 내질러진 그의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실려 내 귓가에서 맴맴 돌았다. 나는 그때서야 그가 저 멀리 하늘의 무수한 별 중의 하나, 이름은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환상세계를 향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필로그
꿈결 같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들 무렵, 사업설명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덕분에 나는 유명인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회사의 자금사정은 넉넉해졌고, 세미나다 인터뷰다,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매일같이 빡빡한 일정 때문에 잠시 그 예언자를 잊어버리고 지냈던 것이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그가 가져야 할 영광을 독차지 하면서....)
한숨 돌릴 틈이 생기자 새삼 인간의 간사함을 정작 나 자신을 통해보고서는 소스라쳤다. 나는 나의 기묘한 행동에 혀를 차다가 억지로 시간을 냈고, 드디어 그 해안가를 찾아 나섰다.
철지난 바닷가는 쓸쓸한 파도와 노닐고 있었다. 나는 할 일 없이 해안가를 거닐다가 퍼뜩 예전 생각이 떠올라 마을의 슈퍼를 향했다. 그리고 플라스틱 됫병 소주와 대충의 안주거리를 샀다. 그 다음 검은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는 해변의 남쪽 곡각지점의 낮은 언덕으로 올라가 만만한 나뭇가지를 꺾어 모아 밤에 땔 장작으로 삼았다.
늦여름의 밤은 깊어만 갔다. 밤이 깊은 만큼 장작도 활활 잘도 타올랐다. 땔감도 충분한 탓이었을까, 소주의 싸한 진통이 가슴의 쾌감으로 변해 잘도 번져나갔다. 일단 예감이 좋았다. 조금 지나면 그가 손을 흔들면서 환한 예의 미소와 함께 나타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빗나갔고, 술 취한 고개를 들었을 때, 동해의 여명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밤새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침부터 핸드폰이 지루하게 울렸지만 나는 일부러 받지 않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비록 약간의 허탈감과 망설임이 교차하기는 했어도, 나는 빛나는 영광의 도시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떻게든 숨이 꼴까닥 넘어가는 사람을 되살려보려는 심정으로 나 자신을 달래며, 무료한 해안을 거닐고 거닐었다. 그러면서도 그때처럼 예언자가 나타나 줄 것이라 믿고선 또다시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나의 소재가 궁금해진 핸드폰이 하루 종일 울어 젖혔다. 나는 그렇게 되고파 했던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 만큼 ‘돈줄 따위라니’하고 무시하는 자신을 보니 절로 혐오의 비웃음이 나왔다. 그 따위 무지막지한 놈은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나는 여전히 전화를 무시했으며, 탄알 장전하려는 군인처럼 다시 마을의 가게로 가서 역시 소주 됫병과 안주거리를 한 아름 사가지고서는 해안가로 돌아왔다. 땔감도 어제 마련된 것만으로 충분했다.
다행히 핸드폰이 귀찮게 하지는 않을 정도로 밤은 다시 깊었고 장작불이 타올랐다. 이른 시각부터 술을 마신 탓에 숙취가 가시지 않아 컨디션이 별로였으므로 몇 잔 남지 않은 술병을 팽개치고는 게슴츠레해진 비몽사몽간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검은 바다만 보고 있을 때였다.
“미안하오. 늦게 와서.. 오래 기다렸군요. 어쨌든 나도 한 잔 주시오.”
어느새 그가 내 어깨를 툭 치는 것과 동시에 내 옆으로 앉으며 빈 잔을 내미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왜 이제 나타났느냐는 식의 눈초리로 쏘아보면서도 그렇게 기다리던 그의 등장에 별반 놀라지 않는 자신에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시침 떼고서 그의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주고서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번에 간 별나라 여행이 아주 재미있었나 보군요. 얼마나 재미있었으면 연락 한 번 주지 않았을까!”
“말도 말아요. 그곳에서는 우리 둘이 나누었던 것처럼 이야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소.”
단숨에 술을 털어 마신 예언자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그의 술잔을 채우는 나를 보고서 결국 멋진 기술자로 만들어 주었다는 자부심이 흐르는 미소를 보여주며 말했다.
“잘되어보니 어떻소? 역시 별 거 아니지요?”
그는 그렇게 당연하다는 눈빛을 반짝였다. 그리고 내가 무슨 심통이라도 부려볼 찰나에 가로막듯이 그의 말을 이었다.
“김형, 드디어.. 나의 마지막 여행지에 도달한 것 같소.”
“마지막 여행지라뇨?...”
나는 그의 말을 되뇌어주면서 언뜻 죽음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어허, 죽음이란 없소. 그것은 다른 시공에 불과하오.”
그는 내 속을 훤히 꿰뚫어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며 그리고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은 채 계속 말했다.
“어찌 보면 멍청이들 같기도 하지만, 그들만이 실상의 바다를 헤엄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소. 한동안은 그들의 사악한 본능에 치를 떨며 괴로워한 적도 있었소만 그들의 정신 한 구석에는 맑은 거울처럼 순진한 신성이 빛나고 있었소. 나는 그것을 자극하리라 마음먹었단 말이오.”
“자극하다니 어떻게 말입니까?”
나는 곧 눈치 챌 내심의 불안감을 알고서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 알고 있지 않느냐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마음과 영혼에 대해 할 이야기가 더 많다던, 일전의 그의 말이 단박에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괜히 섣부른 비유를 들어 말하다간 다들 당신을 미쳤다고 말하겠지요?”
내가 예전에 그가 한 말을 확인시켜주듯 물었지만 그는 흔들림 없이 말했다.
“미쳤다고 할 뿐이겠소? 나를 죽이겠지요.”
나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에 기가 막혔지만 그는 마치 남의 일처럼 말했다.
“그곳에서 죽겠지만 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는 거요. 죽음을 극복한 완전한 자유의 몸... 이 우주에서 그곳이야말로 과감히 예언자의 사명을 완수해도 될 만큼 가능성이 큰 세계란 걸 알았지요. 진리의 심지에 불을 붙일 만한 곳, 폭발하는 진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나는 그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것을 보았다. 아니, 어쩌면 그의 얼굴에 순식간에 표현된 감정은 결코 설명할 수 없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그를 고쳐보았을 때,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 박힌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저 멀리 하늘의 무수한 별 중의 하나, 이름은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환상세계가 궁금해져 물었다.
“그곳이 저 많은 별들 중에 어느 별입니까?”
그의 손가락이 찬찬히 동쪽 하늘의 끝을 가리켰다. 유난히 반짝거리는 초록별 하나가 시야로 빨려 들어왔다.
“저기... 지구라는 별이오.”
그날 밤, 예언자는 그 지구라는 곳에서 지냈던 많은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끝.
첫댓글 '환상' 상, 하, 잘 읽었습니다. 당신이 서 있는 세상은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글을 읽고 있노라니 지금까지 읽어 오던 소설들과는 독특한 점이 있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강촌님, 아무래도 제가 펜 한 명은 확실히 확보한 것 같습니다, 그려... ㅎㅎ 건필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