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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14년 가을호
【백무산 시인 시작 활동 30년 특별 대담】
일시 : 2014년 7월 18일(금요일)
장소 : 푸른사상사 회의실
대담자 : 백무산(시인), 맹문재(시인, 사회)
맹문재 : 선배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건강하게 뵙게 되어 반갑고 고맙습니다. 지난주에 선배님께서 간행한 첫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실천문학사)가 재출간된 것을 서점에서 보았는데, 감회가 새로웠어요. 선배님께서 1984년 『민중시』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30년이 됩니다. 앞으로 더 많은 작품 활동을 하시겠지만 30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한 번 뵙고 이러저러한 말씀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선배님의 시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에게 궁금한 면들을 들려주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우선 첫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청사, 1988)가 출간된 상황에 대해 들어볼까요?
백무산 : 1987년 겨울에 정리해서 다음해에 출간했습니다. 1987년 1월 14일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고, 4월에 전두환의 호헌조치가 이어지면서 전국적으로 연일 시위가 발발했죠. 그것이 6월항쟁으로 이어지고, 7~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집니다. 11월이 되어서야 조금씩 상황 정리가 되어 여유를 낼 수 있었습니다. 박영근 시인으로부터 원고를 정리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연락을 받았던 터라 그동안 메모해 두었던 것과 집회 유인물이나 자료집에 사용한 시들을 모아 ‘청사’출판사로 부쳤어요. 1987년 대중 투쟁이 전개되기 이전 군사 독재의 엄혹한 상황과 1987년의 대중적 열망 사이에 그 시집이 놓여있죠. 김형수 시인이 받아서 박영근 시인과 이산하 시인이 함께 의논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문학 모임 같은 곳에 참여해본 적이 없어요. 문학 강연이나 강좌에 한 번도 참여해보지 못했구요. 등단 전에 시인 얼굴을 본 적도 없습니다. 제가 사는 지역이 그랬습니다. 늦게까지 일하느라 시간도 낼 수 없었지요. 모든 건 혼자 할 수밖에 없었어요. 열정을 어떻게 써야할지 몰랐어요. 너무 많은 열정을 낭비했죠. 괜찮은 서점도 하나 없고, 도서관은 우리가 출근하고도 한참 뒤에 문을 열고 우리가 퇴근하기 훨씬 전에 문을 닫으니 구경도 할 수 없었죠.
맹문재 : 말씀을 들어보니 『만국의 노동자여』가 긴박한 시대 상황에서 간행되었네요. 이 시집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과 더불어 1980년대의 시문학사에서 큰 획을 긋는 성과물이지요. 특히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중소기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 환경을 고발하면서 노동조합의 결성을 추구했다면, 『만국의 노동자여』는 대기업 노동자들의 민주노조 투쟁과 정치 민주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주목되지요. 이왕에 그 시대의 얘기를 들었으니 좀 더 거슬러 올라가보지요. 선배님께서는 1984년에 간행된 『민중시』 제1집에 「지옥선」 연작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어떤 상황이었는지요. 직접 투고를 한 것인지요?
백무산 : 시를 써야겠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시에 대한 자연스런 끌림은 제가 마음에 두고 있는 대상이 어디에도 없어서였을 겁니다. 상황의 답답함에 출구를 찾았을 테고, 그보다는 아마 제가 매우 불균형한 사람이어서 그랬을 겁니다. 제 삶의 진로 선택과는 전혀 무관했죠.
그 당시 지역에서 사회 단체 하나 만들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몇몇 지인들과 민중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민중신학, 해방신학을 공부했죠. 우리가 초빙한 전도사가 구로 지역에서 산업선교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박영근 시인의 선배였습니다. 그 인연으로 박영근 시인을 알게 되었죠. 그가 선배를 찾아 내려왔다가 저와 만나 저의 관심사를 알고 시를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죠. 「지옥선」 연작이 처음 발표한 시들이었는데, 그땐 조선소를 나와 다른 데서 일할 때였습니다. 앞에 말씀드렸듯이 『만국의 노동자여』는 침묵을 강요당하던 억압의 시대와 이제 막 사회 민주화의 바람이 불던 시기에 걸쳐져 있습니다. 「지옥선」 연작을 쓴 시기는 지역에 노동운동 분위기가 전혀 없었던 때였습니다.
맹문재 : 선배님께서는 1974년부터 1983년까지 현대중공업에서 근무했지요. 그곳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요?
백무산 : 그땐 현대조선소라는 이름을 가진 회사였는데, 우리나라 최대의 공장이었죠. 공고를 졸업하던 해에 입사했습니다. 들어가 보니 기술력을 갖추지 못하고 질서도 개판이었어요. 조선 사업은 당시엔 최첨단 산업이었고 종합 기술을 요구했는데 전부 노가다식으로 운영되었죠. 경영인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하다 온 토목공사 관리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일은 되지 않고 사고는 빈발했죠. 당시 그들의 용기와 배짱을 무슨 신화처럼 미화하고 떠들어대지만 그 무모함이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미필적이 아니라 직접적인 살인자들입니다. 제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박정희 시대를 말하면서, “그래도 지금 이만큼 잘살게 된 건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희생의 당사자는 입이 없어 말할 수 없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불평등과 무고한 희생을 정당화하는 사회 체제가 지금도 작동되고 있는 걸 보면서도 진보적이라는 사람들도 그렇게 말합니다.
자전거 만드는 기술이 고작이던 나라에서 대책 없이 밀어붙인다고 일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밤낮도 쉬는 날도 없이 일을 했죠.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그렇게 못했을 겁니다. 쇠가 들어가 있는 가죽 안전화가 5개월 만에 걸레처럼 해어졌죠. 해결하지 못하면 스스로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죠. 거대한 성공 신화가 우리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이 아니요. 우리 역시 돈이 아니라 자존 위해서 일했어요. 우리는 어쨌건 그 상황을 이겨내야 했어요.
저는 무선통신사 일도 겸했기에 보고 관계로 최고경영자실에 자주 들락거렸습니다. 그 인간들 정말 인격적으로도 덜돼먹은 인간들이었어요. 정말 야비한 놈들이었죠. 사고가 발생했는데 사람이 아니라 장비부터 건지라고 지시하는 인간들이었어요. 인생과 열정을 착취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죠.
저는 사회운동에도 선배가 없었어요. 어떤 계기가 나를 이끌었는가를 사람들이 묻는데 저는 자생적인 사람이요.
배를 완성한 후에 배를 끌고 나가 항해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바다 위에서 꾀 오래 생활을 했죠. 외항선을 타려고 계약을 한 적도 있어요. 배를 탔더라면 틀림없이 밀항을 했을 겁니다.
맹문재 : 그러면 노동시를 쓰고 노동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백무산 : 그 지점을 명확하게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선배의 가르침을 받았다거나 어떤 사건이나 계기가 뚜렷하지도 않아요. 저는 자생적인 면이 많아요. 제 인식의 변화에 영향을 준 사람도 거의 없어요. 그래서 노동운동의 질서나 사회운동의 권위도 자주 무시하죠. 문학 쪽은 더하죠. 속된 표현을 빌리면 저는 누구에게 빚진 게 없죠.
맹문재 : 이번에 첫 시집을 재출간하면서 손본 부분이 많은지요?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옥선 5」를 살펴보니 손을 보았네요.
백무산 : 손을 대지 않겠다고 작정을 하고 시작했는데 어쩔 수 없이 네댓 편은 손을 보았고, 나머지는 교정을 보는 정도로 했어요. 변화된 현재의 의식이 아니라 그때 생각을 되살려서 거친 부분만 손본다고 생각했는데 좀 더 나간 부분도 있겠죠. 그 당시 출판사도 나도 교정을 보지 못했어요. 재출간하고 나서 괜한 짓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출판사 사정 때문에 너무 일찍 절판이 되어서 아쉬움도 많았습니다.
맹문재 : 그럼 다음으로 두 번째 시집인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노동문학사, 1990) 대한 얘기를 듣지요. 이 시집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현대중공업 투쟁을 전면적으로 다룬 연작시로서 큰 주목을 받았지요. “야근을 마치고 공장문을 나서다가/무심코 올려다본 어두운 하늘에/맑은 별들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면/문득 깨닫는 것이 있다”(「서시」)로 시작해 “미포만의 새벽이 열린다/동이 튼다/동이 튼다”(「동트는 새벽」)로 끝나는 장엄한 연작시이지요.
백무산 : 1983년에 조선소를 나와 몇 곳 더 일을 했습니다. 1988년에 노동운동에 투신한 활동가들과 노동 상담, 교육 단체를 만들고 ‘노동자의 집’이라는 이름의 공간을 만들었죠. 제가 소장을 맡았지만 수배를 받고 있었어요. 첫 인세로 전화를 놓았던 생각이 납니다. 당시 대학생들이 울산에 많이 내려왔죠. 현장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 저를 많이 찾아 왔습니다. 그러다가 노동운동이 어느 정도 합법화되고 공개적 활동이 허용되는 분위기여서 골방에서 공개적인 공간으로 끌고 나올 필요가 있었죠. 탄압이야 당연히 각오하고 시작했죠. 그 당시에는 현장 노동자들이 유인물을 직접 만들기 어려웠어요. 경험이 없고, 교육도 안 되었고요. 그래서 공개적으로 그 일을 맡았죠.
그 시기에 우리가 지원한 현대중공업에서 128일이라는 장기 투쟁을 전개하게 되는데 이 투쟁은 노동운동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남깁니다. 하지만 투쟁의 성과는 크지 않았고 마무리가 좋지는 않았어요. 제대로 평가가 되지 않아 보고문학 형식으로 형상화하려고 했죠.
또 ‘노동자료원’을 만들었어요. 유인물이 유일한 현장 언론인데 급조해서 만들다 보니 조악한 전단지 역할만 할 뿐이었죠. 노동 교육과 노동 언론이 당시에 가장 절실했어요. 대학 출신 활동가들도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이 글쓰기였어요. 말은 잘하지만 유인물 하나 완성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물었죠. 여러 출판사에 편지를 써서 책을 지원해 달라고 했더니 한 달 사이에 2천권이 넘는 책이 모여서 자료실을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후원해준 사람들을 모아 공해추방운동연합도 만들고 해서 백화점식 운동이 되어버렸죠. 능력껏 해야 하는데 상황에 쫓겨서 대책 없이 일을 해야 했지요. 제 자신이 과거에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에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과거에 제게 이런 기회가 있었다면 그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 절실했어요.
하지만 활동가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기 세력화에 충실할 뿐이었죠. 자기 정파의 영향력과 세력 확장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게 자꾸 부닥쳤어요. 운동이 결국 권력 획득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기 시작했죠. 정파 역시 혁명론의 정립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권력 획득을 위한 권위적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일었습니다. 점차 운동에서 문학으로 관심이 옮겨갔지만 막막했죠.
맹문재 : 그 무렵 박노해 시인을 만났는지요? 만나서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요?
백무산 : 1989년 후반이었을 겁니다. 그는 운동에 많이 단련된 사람으로 보였죠. 그 당시에는 노동운동에 여러 정파가 예민하게 대치되는 시기여서 그와 만남도 결국 그 구도 안에서의 만남이었고 그게 전부였어요.
맹문재 : 세 번째, 네 번째 시집으로 넘어가보지요. 모두 1990년대에 간행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되어요. 주지하다시피 이 시대에는 1989년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1997년 아이엠에프(IMF) 구제 금융 요청으로 인해 사람들의 인식이 아주 혼란스러웠지요. 『인간의 시간』(창작과비평사, 1996), 『길은 광야의 것이다』(창작과비평사, 1999)가 이 시기에 간행되었는데 상황을 들어볼까요.
백무산 : 1989년부터 다시 노동쟁의조정법, 국가보안법 등으로 장시간 수배를 받다가 잠시 구속이 되었어요. 다시 울산에 돌아가 보니 아주 많이 변해 있었어요. 노동운동을 하던 활동가들도 지역을 떠나 복학을 하거나 대학원에 진학을 하거나 유학을 떠났고, 운동들은 대체로 합법화되어 있었어요. 저는 개별 노동자로 돌아왔어요. 저는 어떤 위치로 소환될 수 있지만 자기 자리로 돌아와야 하고, 어떤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저를 바꾸지는 못한다고 생각했죠. 노동조합이 대중적 자생력은 가지고 있었으니 제 역할도 달라야죠. 저는 어떤 면에서 근본주의자입니다.
저는 시인으로 불리는 것도 많이 불편했어요. 그걸 감추고 다녔죠. 제 스스로도 시인이라는 자의식도 별로 없었어요. 더욱이 건강이 나빠져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웠어요. 간경화가 심했어요. 그래서 작은 암자에서 요양을 했습니다. 거기에서 살아난 거예요. 세 번째, 네 번째 시집은 그 시기의 변화들을 담은 것들입니다. 생명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들이 깔려 있습니다.
맹문재 : 『길은 광야의 것이다』에는 「겨울 조정환」이란 작품도 들어 있네요. “맑은 눈과 투명한 정신과 담백한 심장을 가진 사람, 안과 밖의 경계가 없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는데, 조정환 선배와의 만남에 대해 들을 수 있을까요. 『노동해방문학』을 하면서 만난 것인가요.
백무산 : 그렇지요. 울산에 내려와 회의도 하고 그랬지만 자주 본 것은 아니었어요. 제가 만난 첫 번째 지식인이었죠. 저는 그를 굉장히 신기한 눈으로 지켜봤던 것 같습니다. 엄격한 자기 절제력을 지닌 학자이면서도 인간적 자질이 뛰어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맹문재 : 다섯 번째 시집이 『초심』(실천문학사, 2003)이네요. 저는 이 시집의 제목 자체에 친밀감을 가졌어요. 시는 상당히 불교적인데, 제목에서 일종의 같은 뿌리 인식을 가졌던 것이지요.
백무산 : 사회운동도 많이 사유화되고 정계에 진출하면서 변질되어갔습니다. 정치운동도 노동운동도 아주 빠르게 패권적이고 권위주의적으로 변해갔습니다. 그 혐오감이 존재에 대한 자각의 문제로 이끌었죠. 그때 생각에 국가와 권력과 개인적 실존이 동일한 양상을 가진 허상으로 보였죠. 자신의 전 존재를 내려놓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는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 본질을 파악하려고 애쓰죠. 그러나 불교는 우리가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회의하고 성찰하는 방법을 제시하죠. 땅에서 쓰러진 자가 땅을 딛고 일어나야 한다는 거죠. 이것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문학이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했기에 고민은 이동했죠.
맹문재 : 여섯 번 째 시집이 『길 밖의 길』(갈무리, 2004)인데 특별히 추구한 바가 있는지요?
백무산 : 머리에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초심』에서 많이 멀어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맹문재 : 일곱 번째 시집이 『거대한 일상』(2008, 창비)이고, 여덟 번째 시집이 『그 모든 가장자리』(2012, 창비)네요. 저는 이 시집들에서 선배님께서 어떤 거대한 관념이나 이데올로기보다 가장자리 같은 일상에 보다 관심을 두는 것을 보았는데, 시집들에서 추구한 면을 들을 수 있을까요.
백무산 : 문학은 자신을 통해 세계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정치적 입장에서는 달리 보겠지만 노동의 시각에서는 아이엠에프 구제 금융 체제가 우리 시대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가치화가 사소한 일상의 영역에까지 구체적으로 침투하게 했고 노동자들은 그걸 곧바로 실감하는 위치에 있죠. 그 변화를 직접적이고 맨몸으로 받아 안아야 했던 사람들이 노동자였죠. 그래서 노동자는 공장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결코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노동의 현실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전문 용어도 추상적인 용어도 아닙니다. 일상의 내면 깊숙이 구체적으로 들어와 있음을 실감해왔죠. 두 시집에서는 그러한 현실적 고뇌가 담겼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 번에 걸쳐 소위 민주화 정권을 경험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변화를 가져온 것이 거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진보정당 실험도 실패로 끝이 났고요. 사람들은 이제 일상 자체가, 삶 자체가 전쟁터가 되었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진영 논리도 별로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 중심부, 주변부 어디에도 제가 있을 곳이 없었습니다. 제가 밀려나기도 했고, 선택하기도 한 곳이 바로 가장자리입니다. 하지만 일상에서도 밀려난 것이 가장자리지요.
맹문재 : 그동안 선배님께서 간행한 시집들에 대한 설명을 잘 들었습니다. 선배님의 시세계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되었네요. 요즘 울산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백무산 : 노동운동이 소수의 전위활동이었다가 대중운동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지역 언론의 필요성이 절실했습니다. 일간지를 만들려는 계획을 십여 년 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잘 안 되었어요. 그런데 3년 전에 후배들이 신문을 만들자고 제안이 왔습니다. 이미 열정이 많이 사라진 다음이었지요. 종이신문이 빠르게 퇴출되고 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울산저널』이라는 제호로 시민 주주 모집 방식으로 주간지에서 시작한 거죠. 주주가 500명 가까이 됩니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일간지로 전환해야 하는데 더 늦춰지고 있네요. 기업 광고 안 받고, 행정 정책 광고도 안 받고 유지되는 신문사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다 받으면 신문은 쓰레기가 돼요. 그러니까 지역 신문들은 전국에 몇 신문을 빼면 거의가 쓰레기지요. ‘찌라시’만 되어도 다행이어요. 거의가 권력과 자본 집단의 기관지지요. 전적으로 구독료와 자체 사업에 의지해서 운영되고 있어요. 완전한 독립신문이지요. 어렵지만 주주들과의 약속을 지켜야죠. 생태, 환경, 공동체, 탈핵 지향과 공공 저널리즘을 염두에 두고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노동 문제의 비중이 절반 이상이 되어요. 울산이라는 지역의 특수성 때문이지요.
맹문재 :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백무산 : 계획 없이 살려고 합니다. 욕구가 많은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먼데 가 있기 때문에 현실을 놓치고 살게 되지요.
맹문재 : 오랜 시간 동안 말씀하시느라 애쓰셨어요. 선배님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든든해요. 우리 시단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서배님께서 개포동에 있는 저의 집에 와서 자기도 하고, 제가 울산에 가서 자기도 한 시간들이 문득 떠오르네요. 일전에 농담처럼 나누었는데, 정말 50년이 지나서 이러저러한 얘기들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내 건강하세요.
【대표작 읽기】
지옥선 5
― 조선소
남은 햇살 잘라먹고 비 뿌리던 저녁답
시든 몇 포기 잡초만 공장 담벼락에 웅크리고
뒷산 들국화는 산마을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마른 씨앗 실려 쇳덩이 위에 앉고
기계소리에 시든 가지들은 가을바람에 고개를 숙인다
부속 병원 정원에 갈꽃도 지고
떨어져 죽은 인부들의 빛바랜 초상화가 빗속에 흐느꼈다
간밤에 나와 함께 짜장면을 나눠먹었는데
짜장면처럼 까맣게 타서 거적에 덮여 실려 갔다
밤 기차로 달려온 어린 누이
밤새 숨 막힌 울음에 물결처럼 흔들리다
빗속 강물이 되어 있었지
처마 밑 짜장면 그릇에 빗물 넘치는 새벽
살아남은 사람들의 망치소리가
싸늘한 새벽 공기를 가르고
돌아오지 않는 배를 끊임없이 만들지만
우리가 이제 찾아 나서리라
밤새 흘린 눈물을 태우고
떨리는 분노는 이제 길을 찾아 나서리라
노동의 밥
피가 도는 밥을 먹으리라
펄펄 살아 튀는 밥을 먹으리라
먹은 대로 깨끗이 목숨 위해 쓰이고
먹은 대로 깨끗이 힘이 되는 밥
쓰일 대로 쓰인 힘은 다시 밥이 되리라
살아 있는 노동의 밥이
목숨보다 앞선 밥은 먹지 않으리
펄펄 살아 오지 않는 밥도 먹지 않으리
생명이 없는 밥은 개나 주어라
밥을 분명히 보지 못하면
목숨도 분명히 보지 못한다
살아 있는 밥을 먹으리라
목숨이 분명하면 밥도 분명하리라
밥이 분명하면 목숨도 분명하리라
피가 도는 밥을 먹으리라
살아 있는 노동의 밥을
노동의 추억
군대 삼 년을 마치면
십 년은 군대시절 얘기를 한다
몇 달 외국 여행이라도 다녀왔다면
허구한 날 입만 열었다 하면 그놈의 얘기다
생각해보라 그런데
우리에게 노동의 추억이 있는가
십 년 아니 삼십 년 노동을 해도
누가 그것을 그리운 추억이라 하는가
밥과 희망이며 목숨의 진한 흔적들이
어째서 아련히 돌아 보이는 추억의 누더기도 못 되는가
어째서 그 시절 비굴한 치부가 되고
어째서 그 세월 묻어버리고 싶은 아픔이 되고
치욕이 되고 상처가 되고 후회만 남는가
추잡한 싸움의 기억만 되살려지고
비굴한 패배의 아픔만 만져지고
잃어버린 젊음의 울분만 남는가
성숙 뒤에 되새겨지는 것이 추억이라면
우리 생명은 분명 노동이 갉아먹고 있었다
우리의 빼앗긴 노동을 위해
우리는 골백번 뉘우쳐야 한다
그러나 이제 보아라
우리에게도 이런 추억이 남으리라
더없이 값진 추억이 남으리라
아무것도 팔려가지 않는 노동
성숙한 인간을 만들어가는 노동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노동
죽은 노동을 쓸어내는 노동
꽃을 피우는 노동
이제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리라
이제 우리의 몸에서 꽃이 피는 소리를 들으리라
종이 집
여보게 자네 그림 하나는 잘 그렸더구나
청사진 구워 온 설계도를 보았네
적당하게 창문도 내고 베란다도 내고
신식 부엌에 양변기 보일라 온돌에
적당한 정원까지
블록 몇 장까지 시멘트 몇 포까지
모래자갈 몇 트럭 계산도 했더구나
자네 참 기대가 컸겠네 인부들이
모든 걸 설계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멋진 집이 탄생하리라 기대가 컸겠네
그런데 어느 날 업자가 오고
웃통 벗은 인부들이 몰려와
자네가 애써 그린 청사진에
침이 고이도록 욕설과 악담을 해대더니
팽개치면서 이렇게 말했네
돌대가리 새끼들 종이 집이나 지었군
그러고 나서 그들은 설계도 없는 집을
멋지게 지어놓더군
놀란 내게 그들이 말하더군
세상엔 자네 같은 꾼들이 참 많다더군
배후 인물이 못 되어 안달하는 친구들
참 많다고 말일세
모든 것이 전부인 이유
나무는 굵은 가지가 작은 가지를 낳을 때
굵은 가지를 그대로 낳는다
작은 가지가 잔가지를 낳을 때도
굵은 가지를 그대로 낳는다
잔가지가 앞을 낳을 때는 나무 전체를 고스란히 낳는다
나뭇잎 하나에 나무 전체가 고스란히 펼쳐진다
소우주라는 인체에도
잔가지가 나무 전체를 낳듯이
손바닥 하나에도 전체를 낳는다
발바닥에도 귀에도 코에도 눈동자에도
전체의 바다와 구렁과 산과 산맥이
펼쳐져 있다
너와 나의 관계에도
아침에 먹은 밥상 위에도
국가의 질서가 고스란히 박혀 있다
지배와 착취의 질서가 고스란히 박혀 있다
부분이라고 전체보다 작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온몸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온몸으로 거부해야 할 것은
내 안에도 있다 항시 있다
더 이상 밖으로 책임을 떠넘기지 마라
이 손바닥 위에도 있다
뿌리와 잔가지를 먹고 자랐으나
그들과 단절한 꽃을 보아라
우리의 경계는 그곳에서도 시작된다
노동자는 나이가 없다
그리고 어찌 되는 거지
이제 어찌 되는 거지
소줏잔이나마 사흘 동안 집들이하고
남은 술 따라 마시며 생각커니
그리고 어찌 되는 거지
이십년 가까이 일해서 마흔에 가진 내 집
그것도 순전히 몇 년 동안의 피터지는
파업투쟁이 가져다준 것이라
17평 아파트 밤 경치도 보기 좋네
얼큰 취해보니,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정신없이 마셨나보네
처음 집 가지는 기분이 이런가보네
친구들 불러 동료들 불러 동지들 불러
온수 욕탕에 집어넣어 목욕도 시키고
기름보일러 따끈하게 틀고 앉으니 내 세상 아닌가
하루 월차까지 내고 한번 오지게 마시긴 했는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구년 부금 물고 나면 나이 오십
나이 오십에 온전한 17평 하나
그동안 좀 모을 수 있을테지
그러면 더 큰 그곳으로 갈 수 있을까, 아니지
이제 4학년 하나 2학년 하나 물가는 또 어쩌고
누가 아파버리면 어쩌지?
그때까지 내 건강은 버틸까?
늙으신 어머니와는 언제까지 떨어져 살아야 하지?
그리고 십년이면 육십, 그리고 어쩌지?
남은 술잔 비우느니, 기쁨도 잠깐
허허, 또 제자리
이제 좀 물러나도 되겠다 싶어
그동안 노조싸움 치를 만큼 치렀고
이 나이에 머리통 터지고 질질 끌려가도
새파란 형사놈 앞에서 반말 들으며
앞장설 만큼 섰다 싶어
이제 좀 뭘 해도 되겠다 싶었는데
허허, 또 제자리 아닌가
희뿌연 새벽은 얼큰하게 밀려오는데
허허, 잠시 헛꿈에 젖었나보네
자본에 팔린 노동자의 꿈은 다 헛꿈인가보네
오지게 마신 술은 다 뭐였나?
마누라와 애들은 단꿈에 젖어 자고 있는데
그래 그래, 노동자의 운명을 어쩌겠어
너저분한 술상을 치우고 또 가야지
자전거 꺼내 기름도 쳐두고 찬바람도 쐬고
자본에 팔린 노동자의 헛꿈도 깨어버리고
그래 또 새벽일 나서야지
길은 광야의 것이다
얼마를 헤쳐왔나 지나온
길들은 멀고 아득하다
그러나 저 아스라한 모든 길들은 무심하고
나는 한 자리에서 움직였던 것 같지가 않다
가야 할 길은 얼마나 새로우며
남은 길은 또 얼마나 설레게 할 건가
하지만 길은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었고
동시에 나락으로 내몰았다
나에게 확신을 주었고 또 혼란의 늪으로 내던졌다
길을 안다고 나는 감히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되돌아서서
길의 끝이 아니라 시작된 곳을 찾았을 때
길이 아니라 길을 내려 길을 보았을 때
길은 저 거친 대지의 것이었다
나는 대지에서 달아나지 않았으므로
모든 것은 희생되었다 그러자,
한순간에 펼쳐진 바다와 같은 아, 하늘에 맞닿아
일렁이는 끝없는 광야의 그늘을 나는 보았다
우리들 삶은 그곳에서 더 이상 측량되지 않는다
우리들 꿈은 더 이상 산술이 아니다
길은 어디에나 있고 또 없다
길은 대지 위에 있으나
길은 자주 대지를 단순화한다
때로는 대지에서 자란 우리들
대지에서 추방하기도 한다
우리가 헤쳐온 길이 우릴 버리기도 한다
길은 자주 대지의 평등을
욕망의 평등으로 변질시키고
대지의 선한 의지를
권력의 사욕으로 타락시킨다
삶이란 오고 가는 것일까
인생이란 흐르는 길 위의 흔적일까
저기 출렁이는 물결을 보아라
허공에 맞닿아 끝없이 일렁이는 물결을 보아라
길이란 길은 광야 위에 있다
길 위에 머물지도 말고 길 밖에 서지도 말라
길이란 길은 광야의 것이다
삶이란 흐르는 길 위의 흔적이 아니다
일렁이어라 허공 가운데
끝없이 일렁이어라 다시 저 광야의
끝자락에서 푸른 파도처럼 일어서는
길을 보리라
봄이 밖에서 오면
봄을 기다리지 않은 겨울이 있었을까
그러나 지금 오는 저 봄을
피하고 싶어라 두려워라
봄이 봄이 밖에서 오면
병균이 먼저 풀리지
삿된 꿈만 앞다투어 깨어나지
아직은 아니야
꿈이 아직 익지 않은데
그대 아직 온단 말없는데
아직은 아니야
봄이 밖에서 오면
욕망만 우북이 자라버리지
헛된 꿈만 앞다투어 피어나지
아직은 멀었어
더 쓰러져야 돼
안에서 부리로 쪼을 때까지
어둠에서 손짓해 부를 때까지
아직은 더 무너져야 돼
저기 저 무너지고 있는 것 좀 보아
그런데 저기 저건 무어냐
저기 저 나부끼고 있는 것은 무어냐
아뿔싸, 저 무성하게 피어난 것들은 안이냐 밖이냐
푸르게 흔들고 있는 나무야
지천으로 피어 있는 들꽃들아
초심
눈 오는 아침은
설날만 같아라
새 신 신고 새 옷 입고
따라나서던 눈길
어둠 속 앞서가던 아버지 흰
두루막 자락 놓칠세라
종종걸음치던 다섯 살
첫길 가던 새벽처럼
눈 오는 아침은
첫날만 같아라
눈에 젖은 대청마루
맨발로 나와
찬바람 깔고 앉으니
가부좌가 아니라도
살아온 흔적도 세월도
흰 눈송이 위에 내리는
흰 눈송이 같은데
투둑, 이마를 치는
눈송이 몇
몸을 깨우는 천둥소리
아, 마음이 없는데
몸 홀로 일어나네
몸도 없는데
마음 홀로 일어나네
천지사방 내리는 저 눈송이들은
누가 설하는 무량법문인가
눈 오는 아침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첫날만 같아라
그 모든 가장자리를
우리 사는 곳에 태풍이 몰아치고 해일이 뒤집고
불덩이 화산이 솟고 사막과 빙하가 있어 나는 고맙다
나는 종종 이런 것들이 없다면 인간은 얼마나 끔찍할까
지구는 얼마나 형편없는 별일까 생각한다네
내가 사는 곳이 별이란 사실을 언제나 잊지 않게
지구의 가장자리가 얼어붙고 들끓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네
도심에 광야를 펼쳐놓은 비바람 천둥에도 두근거리네
그래도 인간들 곁에서 무엇보다 그리운 건 인간이지
한두 세기 만에 허접한 재료로 발명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걸어온 모든 길을 다 걸어온 인간은 어떤 인간일까
계통발생의 길을 다 걸어 이제 막 당도한 인간은 어떤 인간일까
그 오랜 인간의 몸에 내장된 디스크 메모리를
법륜처럼 굴려보았으면 싶은 건데
그래서 나는 버릇처럼 먼 외곽으로 자꾸만 발길이 간다네
아직 별똥별이 떨어지고 아무 것도 길들어지지 않은 땅에
먼 길 걸어 이제 막 당도한 인간이 더러 살고 있을 그런 곳에
잠에서 깨어나 창을 열면 이곳이 별이라는 생각
벌거벗은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눈을 뜨기를
그래서 나는 습관처럼 인간의 가장자리 사회의 가장자리
그 모든 가장자리를 그리워한다네
한 십만 년을 소급해서 살고 싶다네
■ 백무산
1955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1973년부터 노동자로 일했다. 1984년 『민중시』 제1집에 「지옥선」 연작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만국의 노동자여』『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인간의 시간』『길은 광야의 것이다』『초심』『길 밖의 길』『거대한 일상』『그 모든 가장자리』 등이 있다. 2014년 『만국의 노동자여』가 재출간되었다. 이산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 오장환문학상, 임화문학예술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1991년 『문학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물고기에게 배우다』『책이 무거운 이유』『사과를 내밀다』『기룬 어린 양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