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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제 25강 (이 근호목사, 2008년 12월 12-a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 4장 17절입니다.
에베소서 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에베소서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오늘 내용도 매우 어렵습니다. 먼저 쉽게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창세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여기서는 처음 창조한 것이 사라집니다. 창세기에는 분명히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코끼리, 말, 사람, 코스모스, 해바라기, 별, 달, 해 이런 것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가면 이것들이 다 없어진다는 겁니다. 천지 모든 만물이 다 사라진다고 했으니까 사라지는 것부터 없애보겠습니다. 여기가 예수님 십자가지신 때고 지금이 2008년도 12월이고 여기가 2011년도라면,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만 2011년에 오신다고 가정해보면 여기서부터 죽 지워가면서 사라진다, 사라진다, 사라진다…, 결국 전체가 다 사라지는 것이 맞잖아요.
창세기에 있는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사라진다, 이러면 사라진 게 아니죠.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된 이 모든 것이 사라지니까, 앞서 있던 이 모든 것이 다 사라지는 겁니다.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다 있어도 주께서 강림하실 때 지구가 통째로 불에 타듯이 다 없어진다고 했기에 다 사라집니다. 사라질 때는 창세기에 있었던 것도 다 없어지고 물론 에덴동산도 다 없어집니다.
결국에 모든 것이 없어진다면 ‘나’도 없어집니다. ‘나도 없어진다.’부터 시작하는 것이 에베소서 4장입니다. ‘영구 없다!’ 하는 식으로 ‘나는 없어졌다.’ 라는 데서 에베소서 4장을 해석하고 이해하면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4장을 풀이할 때 ‘내가 있다’고 여겨버리면 이것은 해석이 불가합니다.
저도 그 누구도 다 죽어질 거예요. 죽어지면 저도 없고 여러분도 없어집니다. 없어진다면 ‘첫 번째, 누가 없애는가?’에 대한 정답은 에베소서 4장 17절에 있습니다.
에베소서 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누가 없애는가? 정답은 주님이 없앤다. 어떻게 없애는가? 주의 말씀으로 없앤다. 남는 것은 무엇인가? 남는 것은 말씀뿐이다. 이것이 성경에 나오지요? 세상 모든 것은 다 사라져도 무엇은 영원하다? 이 ‘성경말씀만은 남는다’(벧전 1:24,25 ; 히 1:10-13, 사 40:6-8)고 합니다. 이제 성경해석 다 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은 ‘말씀만 남고 너는 사라져라’는 겁니다.
누가 없앤다? 주님이 없앤다. 어떻게 없앤다? 주의 말씀대로 없앤다. 남는 것은 무엇인가? 주의 말씀만 남는다. 이 세 가지 전체가 어디서 일어나는가? ‘주 안에서’ 일어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따지고 싶은 것이 많을 거예요.
(궁굼이)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목사) “뭡니까?”
(궁금이) “주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주님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주님은 키가 몇 센티이며 몸무게가 몇 킬로그램인지를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목사)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의 코, 눈, 귀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코도 없고 눈도 없고 귀도 없는데 ‘주님을 어떻게 봅니까?’ 라는 말은 성사되지 않지요. 여기 비타 500이 있는데 ‘비타 500아, 나는 여기 있는 이 컵이 있는데 너도 이 컵이 보이느냐?’라고 하면 ‘나는 눈이 없기 때문에 안보입니다’라고 하겠지요. ‘주 안에서’는 주님을 어떻게 봅니까, 라는 소리를 할 필요조차 없어요.
‘주 안에서’는 ‘내가 여기 있고 주님이 여기 계신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주님을 본다.’고 하는 이것을 없애버립니다. 없애버리면 남는 것은 ‘주안에서’ 말씀만 남고 그 말씀에 의해서 생겨난 사람만 남는데 이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말씀에 의해서 생겨난 사람은 주 안에서 생겨나고 주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겁니다.
‘너는 주안에 있어, 없어?’ ‘주안에 있어.’ ‘주님이 어떻게 생겼는데?’ ‘난 그런 것 안 봐.’ ‘왜 안 보는데?’ ‘주안에 있을 경우에는 뭔가를 보고 믿는 게 아니거든.’ ‘보고 믿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앞에 있는 학생은 교회 몇 년 다녔습니까? 한 15년 다녔지요? 그런데 교회 15년 다니는 동안 예수님 본적 있습니까? 안 봤잖아요.
그러면 ‘내가 교회 15년 다니는 동안 예수님을 본 적 없기 때문에 난 이제부터 교회 안다닌다. 왜 아무리 교회를 오랫동안 다녀도 예수님을 본 적도 없고 아무리 찾을래야 찾을수 없기 때문에 예수는 엉터리고 조작이고 없다.’ 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15년이 아니라 교회 30년 다니고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고 목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실컷 30년 이상 교회 다니고 목사도 했는데 나이 한 60도 더 되어서 ‘예수는 없다. 왜? 예수는 허구적 개념이고 성경에 나오는 예수는 다 구라(거짓말)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주안에서 능력으로 그런 인간을 사라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에베소서 4:17에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가 그런 뜻입니다.
‘…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여러분은 이방인이 허망하다고 생각합니까? 그 사람들은 느낀 것, 눈에 띈 것, 귀에 들린 것만 믿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계산적, 합리적, 논리적인지 몰라요.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고 보이는 것은 믿는 것이고, 그들은 그렇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래요. ‘예수? 예수의 창자국을 내놔보아라. 그가 찔린 못자국을 내놔 보아라. 그 창자국과 못자국을 봐야 나는 믿겠어. 하나님은 없는거야.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람들 뿐이야. 사람들이 종교를 만들고 사람들이 신을 만들었기에 내가 확실하게 믿는 것은 내가 여기 육체로 있다는 사실, 째면 피가 나의 육신을 가지고 있는 그 ’나‘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난 안 믿어.’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 내용에 반드시 보이는 것이 들어가면 안돼요. 보이는 것을 믿으면 그것은 이방인들의 허망한 것이 들어오는 거예요.
사람들이 교회 가면 목사들이 자꾸 ‘보이는 것을 내 놓아라. 헌금내고 교인들 불어나고 실적 늘어나고 술 끊고 담배 끊으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겠다.’는 식으로 자꾸 보이는 것을 내 놓으라고 하는데 그것은 그 보이는 것을 통해서 마귀가 허망한 것을 집어넣어서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도바울이 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전 인류를 정신적으로 아주 피폐케 하고 전 인류의 영혼을 잡아먹는 큰 사기꾼이다.’ 하고 결론을 내릴 거예요. 사도바울은 마치 연극을 한 것과 같다. 예수를 보고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한 것은 혼자 혼절하고 혼자 놀라고 혼자 연기한 것이지 진짜 주님이 살아계셔서 한 것은 아니다, 이런 결론을 여러분이 한 번 내려 봐야 됩니다.
그냥 남들이 믿으니까 믿는다고 하지 말고 모든 것이 거짓이고 성경도 거짓이고 다 엉터리라는 결론을 내려 보라는 겁니다. 그때에 사도행전 19장에 귀신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하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나오니까 사도바울은 진짜 그리스도의 종인 것을 귀신도 인정해 줬지요?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귀신도 인정하는 진짜 주의 종인 것을 인정한다면 사도바울이 쓴 오늘 에베소서 본문도 진짜 진리 맞지요. 제가 가정으로 편지를 써 볼게요. ‘철이야, 오늘 서울에 눈이 오는구나. 날씨 많이 춥지? 교회는 잘 다니지? 다음 토요일 내려갈 때 만나자.’ 이 편지는 전혀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편지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이 편지는 어려워요. 왜 어려운가? 여기는 예수라는 분이 안보이잖아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안 보이는 자는 없는 자입니다.
아까 제가 한 편지 같은 경우는 피차 보이는 사람끼리 하는 이야기니까 이해가 다 되는데, 사도바울의 편지에서 ‘주안에서’가 나오니까 예수는 오늘날의 인물이 아니고 2000년전의 인물인데 여기 왜 등장하느냐 하는 그것이 어렵습니다. 이 편지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이 편지가 하늘나라에서 온 편지라고 인정하고 심각하게 볼 때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이 대목이 어렵습니다. ‘주 안에서.’
지금 제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이 겁니다. 1번, ‘주안에서 진리대로 살아라.’ 하고 2번은 ‘주 안에서’를 떼버리고 ‘진리대로 살아라.’ 입니다. 1번, 2번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이해하기 쉽습니까? 2번이 쉽습니다. 왜? 진리라는 것은 참된 것, 참되다, 하는 것은 초등학교 때 교훈입니다. ‘참되고 착하고 훌륭하고 아름답게 바르게’ 이런 것은 학교 교훈이나 급훈에 많이 등장했던 것들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무엇이냐? ‘참되고 바른 소리 하고 남에게 해코지 않고 바르게 사는 것’, 그것이 진리라고 알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안에서’ 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주 안에서’ 없어져야 되지요. 왜? 주님은 안보이니까. 어려워서 잘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훌륭하게 살고, 그런 것은 ‘주 안에서’와 상관없이 우리의 상식이고 도적이죠.
훌륭하게 살면 지옥 간다고 제가 언젠가 했지요? ‘주 안에서’ 말고 그냥 진리대로 살았다고 할 것 같으면 이해가 됩니다. 그 ‘진리대로’가 근거가 뭐냐 하면 주 안이 안 보일 때 사람들만 있을 때, 사람과 사람만 있을 때 통용되는 진리이기 때문에 ‘주 안에서’가 되어버리면 그 진리는 사라져야 됩니다. 왜? 사람들의 타고난 지혜와 지식이 결국 누구를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살해 했잖아요. 사두개인, 바리새인들, 도덕적으로 진리대로 바르게 살겠다는 사람이 예수님을 죽였으니까 그 죽인 예수님 안에서의 진리하고 그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진리하고 충돌되겠지요. 내용 자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반대되는 내용이 나온다 이 말이죠. 종교를 떠나서 일반 학교의 교장선생님이 ‘학생여러분, 여러분은 진리대로 살아야 됩니다.’ 할 때 그 주위에 있는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다 ‘맞아. 맞아.’ 하고 다 동의할 겁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학생여러분! 예수님은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아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라고 할 때는 ‘엉? 지금 교장선생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내가 알고 있기는 예수님은 좋은 분이고 그렇게 좋은 분이라면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아야 마땅한데, 예수님이 사람들한테 죽으신 이유가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고 외면당하고 배척당하고 쓸데없는 존재라고 싫어 버린바 되어서 돌아갔다’ 한다는 거죠.
그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자기가 사람들에게 당한 그것을 그대로 정면으로 앞장세워서 쳐들어올 때 그것이 예수님이 ‘주 안에서’ 말하는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리와 ‘주안에서’의 진리하고는 항상 서로 상충되고 티격태격하고 한쪽이 한쪽을 미워하고 배척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제 말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제는 좀 감이 오십니까? ‘아, 사도바울이 전하는 진리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선의 진리가 아니구나.’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1번, 주 안에서 진리라는 것은 뭐냐? ‘주님만 계시고 주님만 살아 있다.’ 2번, 사람들이 말하는 진리란 ‘내가 (그냥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고) 엄연히 살아 있다. 진리도 진리인가, 아닌가를 내가 판단한다. 내 행동 내가 판단한다.’
『피』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이 착하게 산다고 뭔가 열심히 하는데 행동하는 사람과 행동을 잘했나, 못했나를 판단하는 사람과 어떤 인물이다? 동일인물이다. 그것은 반칙이잖아요. 권투시합 할 때 자기가 권투하고 자기가 심판 보면 그게 권투입니까, 장난입니까? 그것은 장난치는 거잖아요.
자기가 실컷 두들겨 패놓고, 거기서 시합 일방적으로 끝내면서 ‘상대방이 졌답니다. 게임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해버리면 이게 무슨 권투시합입니까? 반드시 심판하는 사람은 자기 말고 다른 분이 되어야 하는데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최종심판자가 누가 됩니까? 어떤 인간도 자기 자신입니다. 강도가 강도질을 해 놓고도 할 말이 있습니다.
판사가 ‘왜 피고는 강도질을 했습니까?’ 할 때 가만 있는 강도는 거의 없습니다. ‘제가 무조건 죄인입니다.’ 그런 사람 잘 없습니다. ‘사회가 날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부모가 날 어릴때 버려서 내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소리 합니다. 또 ‘나보다 더 심하게 강도질을 한 사람도 있는데 저 사람에 비해서 나만 왜 이렇게 형량이 무겁습니까?’ 이렇게 남 핑계대면서 억울해 합니다.
최종판단을 누가 내리는가? 행동도 내가, 판단도 내가.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교회 나오면 구원받는 것도 어떻게 됩니까? 믿을지 안 믿을지 그 결정도 누가 내리고? 내가 내리고. 나중에 구원받을지 안 받을지 그 결정도 누가 내리고? 내가 내리고. 혼자 노는 게임입니다. 사도바울이 ‘주 안에서 진리대로 행하라.’고 하면 ‘주 안에서’는 빼버리고 ‘진리대로 행하라’만 붙들어서 ‘역시 나는 착하고 진리대로 행해’라고 자기혼자 일방적으로 주장하는데 그것은 전혀 ‘주안에서’는 안 받아 주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말을 무시하지 맙시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이야기, 이것은 귀신도 알아주는 진짜배기 진리 그 자체인데 사람들은 그 말을 어떻게 고백하느냐 하면 ‘열심히 살면 되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 멋대로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정말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삽니다.’ 라는 고백을 왜 못 내놓느냐 그 말이죠. 뭐가 진리냐?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거부해야 되며 진짜 진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하여 너희가 살아간다.’ 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보이지 않는 네가 아직도 살아가고 있다.’ 라는 그 관계가 진리입니다.
이것을 어려운 용어를 써서 표현해 보면 ‘원인없는 결과의 투입’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당신이 방금 차를 마셨는데 누구의 힘으로 마셨습니까?’ 할 때에 만일, 사람 대 사람의 관계일 것 같으면 ‘내가 내 찻잔을 내 입술에 대서 홀짝, 마셨다.’ 라고 답변을 할 수 있겠지만, 원인없는 결과가 주어지면 ‘주님께서 내게 힘을 주셔서 마셨습니다.’ 라는 그 말외에 다른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대답을 들은 사람이 ‘어허, 이 사람아, 여기에 당신 말고 아무도 없는데 또 누가 있다는 말인가?’ 라고 할 때 ‘나는 지금 주 안에 있습니다.’ 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이게 어딜 사기치고 있어! 네가 지금 버젓이 살아 있잖아.’ 그러면 한 술 더 뜹니다. ‘저는 지금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대로 죽었습니다.’ ‘엉? 죽은자가 어떻게 말을 하지?’ ‘저는 죽고 제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그걸 어디서 배웠는데?’ ‘사도바울에게 배웠습니다.’ ‘그걸 믿나?’ ‘나는 믿습니다.’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사나이답게 ‘보이는 내가…, 보이는 내가…,’ 그렇게 말하지 하지 않고 왜 여자처럼 비겁하게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지 않는 분이…,’ 왜 만날 그런 식으로 하느냐는 거죠.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오지요? ‘누구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누가 준 힘으로 하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라.’ 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그것이 베드로사도가 우리에게 증거 한 겁니다. 제발 ‘원인 없는 결과에 의해서 네가 존재한다고 남에게 증거 하라.’ 는 뜻입니다. 이것을 소급해서 해석을 해 버립니다.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가운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고 그 오른쪽 왼쪽에도 강도가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 가운데 계신 예수님은 구원자이고 양편에 달린 두 사람만 강도입니다.
예수님의 한쪽편의 강도가 말하기를 ‘예수님, 당신 나라가 임하실 때에 저를 생각해 주십시오.’ 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천국에 있으리라.’ 고 했습니다. 그러면 만일에 그 강도가 전과 14범이라고 합시다. 그 동안 강도 전과 14범이 된 것이 어떻게 해석됩니까? 원인 없는 결과가 주어지게 되면 그 동안 강도질 한 것이 누구의 뜻이었다는 말입니까?
원인 없는 결과니까 누구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천국에 가는 코스로 가게 했는데, 그 사람은 14번 강도질을 하면서 천국에 가는 코스로 가야 되는 사람으로 소급해서 해석이 주어집니다. 그 강도는 자기 해석을 포기하고 옆에 계신 주님의 해석으로 자기해석을 엎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 주님 나라 임할 때 저도 좀 생각해 주세요.’ 이것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생각입니까?
손가락을 마구 후비면서도 ‘주님, 제 손가락 깨끗하다고 해석해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 하고 똑같아요. 주님이 말씀하기를 ‘네가 손가락으로 더럽게 콧구멍을 후비는 짓은 내 사랑이 얼마나 깨끗한가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네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을 것이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미친것 같은 해석이 아닙니까?
강도는 ‘원인 없는 결과’의 해석을 했는데 왜 저와 여러분은 그처럼 원인없는 결과로서 해석을 못합니까? 왜 자꾸 자기가 자기행동의 주체자가 되어야 합니까? ‘내가 행동을 이렇게 잘못해서 이런 나쁜짓을 했구나.’ 왜 자꾸 처음의 시작을 자기로부터 합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자아를 사라지게 하지요. 사라지게 하고 난 뒤에 그 빈자리에 무엇이 남아 있다고 했습니까? ‘말씀’이 남습니다.
그러면 평생 강도짓을 한 그 사람이 낙원에 갔다면 처음부터 무슨 코스였습니까? 말씀이 말씀되게 해서 구원받았잖아요. 그것을 가지고 창세전에 예정된 자는 반드시 구원되도록 되어 있다는 그 모델이 되는 겁니다.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롬 9:13)는 말씀이 그대로 되었다는 모델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왜 사라져야 되는지를 알겠지요? 우리가 안 사라지면 우리는 훼방 죄, 하늘나라 공무집행 훼방죄에 걸립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평생 동안 사라질까요? 안 사라질까요? 평생토록 안 사라집니다. 그럴 때마다 감사하게도 ‘주안’에 들어가면 성령이 오시게 되고, 성령께서 내가 내리는 해석을 성령께서 지워버리는 역할을 하시게 됩니다. ‘주여, 제가 공부 잘해서 상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죄인이다. 너는 죄인이기에 구원받은 거나 자랑해.’
‘주여, 제가 너무나 나쁜 짓을 해서 교도소에 가게 되었습니다.’ ‘너는 원래부터 죄인이야. 그런 것 신경 쓰지 마.’ 주님께서 필요한 것은 뭐냐? ‘주 안’에 있는 주님의 해석이 필요하지, 인간의 해석은 자기핑계를 대서 자기를 좀 잘나 보이게 하는 해석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내가 진리대로 살았다.’가 왜 하나님 앞에서 진리가 아니냐 하면, 그 앞에 뭐가 들어가기 때문입니까?
‘내가 열심히 해서 내가 성경대로 살았다.’ 에서 사라져야 할 ‘나’가 들어가니까 그것이 ‘주 안’에서 오히려 주님을 더욱 욕되게 하는 거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는 그 말을 귀신도 알아준다는 사도바울도 했는데 왜 그 말을 못하느냐. 하는 거죠. 전교 일등 했다고 누군가 칭찬하면 ‘내가 나 된 것은 그냥 하나님의 은혜 일 뿐입니다.’
성적이 좀 떨어졌을 경우에, 누가 ‘너 공부 무지 못했잖아.’ 할 때, ‘이만큼 성적 나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니까 네가 공부를 안 하지.’ ‘그러니까 네가 자꾸 얻어 맞는거야.’ ‘저는 맞아도 쌉니다. 그것도 은혜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 자꾸 원인을 내 쪽에서 찾지 마세요. 원인을 찾아서 행동을 바꾸려고 하지 마세요. 바꿔봐야 ‘주 안’에서는 사라지고 없어질 겁니다.
지금부터는 왜 사도바울이 ‘주 안’의 해석과 ‘주 안’이 아닌 상태에서의 해석을 왜 이렇게 상충시키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마지막 때라고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고, 십자가로서 마지막 때입니다. 그것이 히브리서 1장부터 나옵니다. 마지막때란 선지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면 그것이 마지막때입니다.
히브리서 1:1-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이미 마지막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서 이 세상이 사라져야 될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아들을 배척하고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공경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아들을 공경치 않는다는 이유로 저주를 퍼부어서 이 세상을 끝장내는 거예요.
그러면 문제는 뭐냐? ‘구약에 가득 들어 있던 구원의 약속들이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아들을 공경치 않아서 다 사라져버린다면 그 구원의 약속대로 구원을 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구약에 있는 구원의 약속은, 이 지상의 사람들이 자기가 알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 지상에서 배척받고 거부당한 아들이 자신의 공로, 자기용서, 자기사랑을 분배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만큼은 성령을 받게 됩니다.
이번 동은 교회 장로, 집사 임직식 할 때 제가 안수하면서 기도를 했는데 이렇게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유대인들이 보기에 개 같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니까 졸지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말았어요. 유대인들은 십계명, 안식일 지켜가면서 온갖 구약의 말씀을 지켜서 구원되려고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이스라엘하고 우리가 무슨 관계인데? 하나님이 뭐야? 나는 나 밖에 모른다.’ 이런 식으로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성령이 와 버리니까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졸지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되고 말았어요. 그렇게 되니 이 사람들이 구원 받을 때 누구의 공로입니까? 자기의 공로가 아니고 아들의 공로지요?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가지고 종말이라고 합니다.
종말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 때 종말이냐? 하나님께서 구약에 약속한 구원이 자기 힘으로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자기 영을 부어 주사 아무 행한 것도 없이 주님의 능력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혜택을 베풀어주는 것이 종말에나 일어날 일입니다. 목사님 어릴 때 본 것 중에 경비행기가 전단지를 뿌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작은 비행기가 날아가면서 하늘에 전단지를 뿌리면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요.
주워보면 내용이 ‘나 훈아 대구에 오다.’ 그런 겁니다. 그것은 그냥 하늘에서 뿌려진 겁니다. 하늘에서 비가 와요. 그렇게 예상도 안했는데 난데없이 주어진 것이 구원입니다. 교회 와서 성경공부 한다고 구원되거나 철야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난데없이 하늘에서 삐라가 떨어지는 것처럼 그냥 구원받는 거예요.
그냥 구원받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느냐 하면, 워낙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께서 나의 죄를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구원해주기에 다른 누군가가 ‘당신이 어떻게 구원되었습니까?’ 라고 물으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분을 그냥 댈 수밖에 없습니다. 왜? 원인으로서의 ‘나’라는 것은 없어졌기 때문에 원인 없는 결과로서 주어진 ‘나’이기에, 원인 없는 결과로서 ‘나’라는 인생을 다시 해석하는 겁니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그 때 사도바울의 해석, ‘네가 태어난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되기 위하여’라는 에베소서의 이야기가 우리이야기하고 딱딱 맞아 떨어져 가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죄인이매 예수님의 거룩한 피로 말미암아 죄씻음을 받았으니….’ 이것이 나의 이야기인 거예요. ‘나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은 선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은 다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나온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다.’
전부 다 종말에는 행함이 없이 ‘거저 주었다.’ 의 되풀이입니다. ‘공짜 받았지?’ 의 되풀이입니다. 선거 때 공짜를 받으면 50배를 되갚아 줘야 합니다. 그러나 선거 때는 종말이 아니잖아요. 종말에는 거저 주시니까 거저 받아놓으세요. 거저 받아 놓으시고 거저 받은 것을 뜯어보면 해석을 자기에게서 출발하지 말고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해석하라는 해석책이 나와 있습니다. 그 해석책이 뭐냐? 그것이 바로 성경책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내가 이렇게 죄인이니까 거저 얻을 수밖에 없지.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기에 내가 이렇게 거저 얻었구나.’ 이런 것을 보여주는 책이 성경책입니다. 저는 교인들이 교회 올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세상에 안 보이는 것, 그리고 돈 안 되는 것, 안보이고 돈 안 되는 것을 위해서 모인다니, ‘안 보이는 것을 위해서 왜 모이십니까?’ 하고 되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교회 오면 기름 값 들어가서 손해, 헌금 몇 푼이라도 들어가니 그것도 손해 아닙니까? 교회 와 있는 동안에는 가게 문 못 여는데 그 시간에 단골 놓치면 이 경쟁시대에 손해가 막심하죠. 교회에서 김장이라도 할라치면 함께 김장해야지 어쩝니까? 그래서 <세례식을 앞두고>라는 제 글에 보면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당신은 세례를 받기 위해서 어떤 손해를 봤습니까? 당신은 예수 믿고 나서 어떤 손해를 봤습니까? 손해 본 것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자기 이익을 보겠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예수님 때문에 이런 손해를 봤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이 이렇게 즐겁다니, 이런 감격스러운 신분을 ….’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 줘야 세례를 줄 맛이 난다고 글을 썼어요.
세례 받은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세례주는 중에 좀 미안스러운 것은 있었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세례를 주다 보니 물을 너무 많이 뿌려서 그것이 죄송스러웠습니다. 세례라는 것은 ‘거저 받았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거저 받았습니까? 돈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거저 받았습니까?’ ‘신앙입니다.’ 그것은 눈에 안보이잖아요.
교회에서 목사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고 교인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고 자칫하면 둘 다 서로가 서로에게 속아 넘어가는 수가 있어요. 그게 ‘벌거벗은 임금님’이잖아요. 사실은 임금이 벌거벗었는데 간신배 신하가 ‘임금님, 옷 쫙 빠졌습니다. 정말 멋집니다.’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서 ‘와, 임금님, 진짜 끝내줍니다.’
그러고 있는데 정직한 어린아이 하나가 ‘임금님이 빨개 벗었네!’ 20년을 목회하고, 20년을 한 교회 다녀도 ‘당신들 돈보고 교회 오고 나도 돈보고 목회한다. 그러니 너나 나나 다 빨개 벗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용감한 사람,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교회 다음 주 설교 본문이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막 10:15)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 본문을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이야기해야 되겠습니다. 보이는 돈을 위하여, 눈에 보이는 출세를 위하여 오신다면 그것은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복음과는 전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믿는 겁니다. 설교하는 목사도 ‘여러분, 보이지 않는 것이 멋있지요?’ 그러면 교인들도 ‘야, 보이지 않는 것이 멋있습니다.’ 이런 주고받음이 있어야 합니다.
왜? 마지막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가 아니면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까? 마지막 때가 아닐 때는 여기 뭐가 있었습니다. 성전이 있었습니다. 이번 겨울수련회 때 역대기를 하는데 성전을 이야기할 겁니다. 그들은 성전이 파괴되면 하나님이 물러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요나도 성전을 향해서 기도했습니다. 시편에 보면 다른 것은 다 부셔서도 성전은 안 부서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것 박살냈습니다. ‘이 성전 46년동안 지었는가? 헐어버려라. 내가 삼 일만에 다시 짓겠다.’(요 2:19) 유대인들이 ‘당신이 무슨 재주로 삼 일만에 성전을 짓겠는가?’ 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삼 일만에 짓는 성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입니다. 우리가 지금 잠언, 역대기등의 구약이 아니라 에베소서를 보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를 보려면 ‘보이지 않는 것을 믿습니다.’ 라는 그 토대위에 ‘원인 없는 결과’ 속에서 에베소서를 해석해 줘야 비로소 보인다는 말입니다. ‘은혜를 받았는데 이것이 웬 은혜입니까?’라는 식으로 이야기될 때 비로소 에베소서가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모든 생각은 뭐라고 했습니까? ‘그 마음의 허망한 것’(엡 4:17)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사라질 것을 믿느냐, 사라지지 않을 말씀을 믿느냐? 간단하죠. ‘당신은 말씀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는 것은 없어져야 되지요?’ 이렇게 착착 맞아 들어가야 됩니다. ‘당신은 뭘 믿습니까?’ ‘나는 눈에 보이는 실적을 믿습니다.’ ‘그러면 말씀은요?’ ‘말씀도 믿어야죠. 다만 내 실적이 실적답게 늘어나도록 할 경우에만 말씀이 효과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고 뭘 믿는 겁니까? 자기가 기대한 실적을 믿는 겁니다. ‘교인수가 얼마나 늘어났는지, 헌금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성경지식이 얼마나 늘어났는지, 교회 나오고 난 뒤에 술 담배를 끊었는지….’ 이런 실적이 있다는 것은 종교자체가 원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신앙이 원인이 되어서 내가 원하는 포부가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것은 원인 있는 결과가 되어 버립니다.
원인 있는 결과, 이것은 해석의 잘못입니다. 강도가 구원받는 것은 강도질을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잖아요. 강도질을 한 것도 원인 없는 결과가 아닙니까? 강도질을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듯이 항상 내 몸의 어떤 구석도 내 몸에 원인을 남겨두면 안돼요. 왜? 마지막때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아요.
원인이 없어요. 그냥 결과만 주어질 뿐입니다. 원인을 따지는 것은 구약입니다. ‘십계명을 지켜라. 십일조를 제대로 내라. 하나님을 잘 섬겨라. 그러면 네가 들어가도 복을 얻고 나가도 복을 얻는다.’ 이것은 전부 원인을 개인에게 줬습니다. 예례미야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외부, 바깥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아예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말씀이 아예 안쪽에 장착이 되어 있어서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이 나의 원인도 되고 결과도 되는 식으로 다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의 은혜, 원인 없는 결과로서 은혜가 거저 주어지는데 왜 거저 주어지는 겁니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출애굽기 4장을 보게 되면 모세가 자기 가족과 함께 애굽으로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모세 아내가 남편인 모세를 보고 ‘당신은 피 남편이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만약에 사모님께서 목사님보고 ‘당신은 피 남편이군요.’ 한다면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나하고 살지 말고 피하고 사세요.’ 그런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기 위해서 내려가는 도중인데 히니님께서 어떻게 아들을 만드는지 그 방법은 모르고 그냥 내려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을 만드는 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모세를 죽이려고 할 때에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가 갑작스럽게 뭔가 깨달은 것이 있어서 얼른 차돌을 취해서 모세 아들의 양피를 베어버립니다. 거기서 피가 나오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살려주셨잖아요.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들이 아니냐의 관계는 피가 묻혀 있으면 아들이고 피가 없으면 아들이 아닌 거예요. 옛날 유월절 때 애굽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다 죽였습니다.
안산강의하면서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해가지면 아파트 집집마다 환하게 불이 들어오게 되면서 그 안에는 학교에서 돌아온 자식들, 직장에서 돌아온 아빠, 엄마와 함께 단란한 행복의 웃음소리가 넘쳐납니다. 그때 정처없는 떠도는 집없는 나그네가 볼때 그런 모습이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저는 어릴 때 성냥팔이 소녀, 그 동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했습니다.
특히 어떤 대목에서 눈물이 나느냐 하면, 성냥팔이 소녀는 성냥 한 갑 못 팔고 추워서 밖에서 떨고 있는데 집안에서는 환하게 크리스마스트리 장식해 놓고 선물주고 받으면서 맛난 음식 차려놓고 성탄노래 부르면서 즐거워하는 그 장면 , 그 극한 대조를 보면서 너무 슬펐어요. 지금도 마찬가지로 아파트마다 환하게 불 켜 놓고 단란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데 그 집집마다 맏이를 다 죽인다면 그 전체가 눈물바다가 되겠지요.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단란한 가정의 행복? 함박웃음이 피어나는 곳? 그것은 아들이 죽어버리면 다 슬픔으로 전환됩니다. 그 슬픔의 상황이 바로 하나님께서 찾아오는 유일한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죽이는데 그 때 살아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뭘 보고 넘어갔습니까? 피를 보고 넘어가지요. 피가 나타나는 곳에 하나님이 나타나고 피 없는 곳에는 하나님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행복에 도취되어서 웃는 일만 남아 있지 하나님은 근처도 안 갔습니다. 피가 묻혀 있으면 죽음의 천사가 그냥 건너뛰고 피가 없으면 그냥 죽여 버립니다. 이미 구약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 됨이라는 것은 ‘할 수 없이 너는 피 남편이다’에서 그 거룩한 피, 할례의 피, 거룩한 약속의, 그 약속의 피가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 되고, 아니 되고’를 결정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유일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지상과 만날 때 유일하게 눈에 보이는 것이 있다면 바로 피,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십자가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꼬시더냐.’
사도바울은 완전히 돌았고 미친자 맞지요? 그런데 우리보기에 완전히 미치고 돌아버린 그 인간, 현실도 모르고 돈도 모르고 경제발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십자가밖에 모르는 진짜 미친놈이고 그런 사도바울은 내가 미쳐도 주를 위해서 미쳤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 미친 인간을 보고 마귀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고 무시하고 싶은 그 바울을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피로 말미암아 살고 피 없으면 죽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 어디서 나왔는가? 강도질만 평생 한 강도, 왜 천당 갑니까? 그 강도질로 그가 천당 갑니까? 그것은 그 강도 옆에서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목회 30년 가까이 하고 있는데 지금도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오직 피로만 구원받고 주님께서 부활했기에 우리도 그 주님의 부활의 세계에 간다는 말이죠. 이것을 제가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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