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3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 4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5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6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지난주 말씀에서 다윗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주신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서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요엘 선지자도 예언하였습니다. 그 예언대로 오순절 성령이 임하게 되자 그들이 찌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애통하며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애통이 어떤 애통이었습니까? 독자 외아들을 잃은 자의 애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자식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리라고 하였을 때에 아브라함은 약속의 자녀를 자기 손으로 죽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찌른바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애통하기를 독자를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으로 애통합니다. 그 애통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버리시는 그 애통의 마음을 성령을 통하여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애통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책과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들이 가족을 잃고서 애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오히려 주님을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놀랍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를 잃었는데도 그 애통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를 죽인 자들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마음들은 주님께서 부어주셔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이 임한 자들의 모습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원통하다고 여기면서 억울해 하는 모습과 전혀 다른 차원의 애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의 모습을 비추어보면 도대체 나는 무엇으로 애통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면 한심스러운 모습입니다. 부디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시기를 구할 뿐입니다. 또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으로 씻겨달라고 할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13:1절입니다. ‘그 날’입니다. 선지들이 계속하여 예언한 그 날입니다. 그 날에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다는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이 임하심을 통하여 주어진 것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오늘은 동일한 그 날의 약속이 어떻게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게 되는 가를 보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씻는다는 것은 더러움을 씻는 것을 말합니다. 서울대 의대의 어느 학생이 우리나라의 통치자들의 건강에 대하여 박사논문을 썼습니다. 조선시대의 임금들부터 그들의 건강을 조사하였는데 조선시대에 의학의 한계만이 아니라 불결한 생활환경으로 질병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신과 같은 대접을 받던 임금이 각양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서도 잘 씻지 않아서 각종 종기나 부스럼이 낫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너무 많이 씻어서 탈이 날 정도입니다만 씻는다는 것은 몸의 청결문제만이 아니라 신들에게 정성을 바칠 때에 제의적인 면에서도 중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도 신에게 정성을 빌 때에 목욕재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에서는 씻는 것에 대하여 어떤 규례가 주어져 있습니까?
민수기 8:5-8절입니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6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정결케 하라 7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케 하되 곧 속죄의 물로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로 그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8 또 그들로 수송아지 하나를 번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그 소제물로 취하게 하고 그 외에 너는 또 수송아지 하나를 속죄 제물로 취하고”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지파가 하나님께 대신 드려집니다. 그래서 레위인을 정결하게 하는데 속죄의 물을 뿌려서 정결하게 하고 또 수송아지의 번제물을 취하여 속죄 제물로 취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려지는 사람을 속죄의 물을 뿌림과 짐승의 피 뿌림이 함께 동반이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19장에서도 각종 부정하게 된 자들이 정결하게 하는 물을 뿌려서 정함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들이 목욕재계한다고 하여도 죄를 씻을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유출 병이 있는 것처럼 계속하여 죄가 줄줄 새 나오는 사람인데 무엇으로 씻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장차 자신들의 죄와 더러움과 부정함을 씻어줄 그 날을 고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샘물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심으로 그 찌른 자를 보면서 애통하여 회개하게 됨으로 죄가 사함을 받아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36:16-31절을 봅니다. “봉독” 이스라엘 족속에 그 땅을 더럽혔는데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같이 더럽혔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정이란 우상숭배로 가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러나 잡혀간 그곳에서 다시 구원하여 내시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더럽힌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시는데 맑은 물을 뿌려서 정결하게 하고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우상 섬김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로 씻는 것이 아니라 새 영을 그 마음속에 넣어주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물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47장에서는 성전 동문에서 물이 스미어 나오는데 그 물이 발목, 무릎, 허리,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되어서 흐릅니다. 그 강물이 가는 곳마다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물이 물이 아니라 성령임을 우리는 성령이 임하게 된 자들이기에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13-14절입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한 여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판 우물을 마셔도 다시 목마르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물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7:37-39절입니다.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생수의 강이 흘러 나는 것은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에서 각종 죄와 더러움과 부정함을 씻어야 한다고 하니 율법적 규례를 따라 씻는 것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방법으로 지키기 위하여 장로들의 유전까지 보태어서 음식을 먹을 때에 반드시 손을 씻고 먹게 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부정함과 더러움을 씻는 그 행위를 가지고 또 다란 자기 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씻지 않고 먹는 자들을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시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아니하고 음식을 먹는 것은 장로들의 유전을 어긴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는 어찌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되물으십니다. 그러면서 고르반 사상을 책망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멀다고 합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하였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고 예언한 대로 예수님이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자기들이 평소에 지켜오던 씻는 것을 포기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로 눈앞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터져 나오는데도 그것을 모르고서 그 생수를 버리고 자기들이 물을 보관할 웅덩이를 만든 것입니다. 예레미야 2: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죄란 생수의 근원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죄악인 것입니다. 스스로 웅덩이를 만들어 그곳에 자기들이 마실 물을 길어 놓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각종 율법지킴의 자기 의들을 채워 넣은 것입니다. 모세로부터 받은 것이니 그 웅덩이에 얼마나 오랫동안 모아둔 것이었겠습니까? 인도의 시골마을을 가보니 마을마다 웅덩이 들이 많았습니다. 우기 철에 비를 가두어 두고서는 일 년 동안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 웅덩이에서 목욕 설거지 빨래를 다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이 걸쭉해질 정도입니다.
페인티드 베일이라는 영화를 보면 영국인 병리학자가 중국에 콜레라가 번지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아내의 불륜을 견디지 못하여 선택한 일이기도 합니다만 그곳에서 우물과 강물을 현미경으로 조사하여 오염되었다고 먹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물을 먹으려고 고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눈에는 오염된 물임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과연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생수를 제공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시고 마셔도 갈증만 더하는 세상의 욕망이라는 물을 공급하고 있는 것입니까? 온 세상을 둘러보아도 생수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양식이 없어서 주림이 아니고 마실 물이 없어서 갈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아모스 선지자가 외친 것처럼 지금도 그러합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오늘 이 말씀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와 더러움에서 씻어주실 영원한 샘물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만든 웅덩이를 의지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공로를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씻음을 받아야 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죄와 더러움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씻어짐을 성령이 임하여 믿게 된 자들은 영원한 생명의 샘을 마시는 사람들입니다.
2-6절입니다. 그 날에, 즉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는 그 날에 우상의 이름을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예언자들도 정체가 다 드러나서 부끄러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황홀경 상태에서 몸에 상처를 내면서 주술적인 짓을 한 것을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인 것처럼 털옷을 입은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세상은 거짓 선지자들이 수도 없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이란 진행 중입니다. 이미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렸지만 거짓 선지자들이 다 사라지기까지는 예수님의 재림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영적인 분별력을 갖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죄와 더러움을 영원히 씻는 샘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임을 성령을 통하여 날마다 넘쳐 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