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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사기
五峰 추천 0 조회 25 16.02.27 16: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기

                                 사마천 의 史記

    

요약 테이블
저작자 사마천(司馬遷)

요약 BC 90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고대 중국을 무대로 ‘역사와 인간’을 탐구한 사마천의 명저이다. 『사기』 130권은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의 5부로 나누어져 있다. 연대를 따라 평면적으로 기록하는 편년체가 아니라, 역사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부각하는 기전체(紀傳體)로 썼다.

1) 「본기(本紀)」

전설시대에서 한나라 때까지의 왕조 흥망사를 다루고 있는 본기는 「오제(五帝)본기」, 「하(夏)본기」, 「은(殷)본기」, 「주(周)본기」, 「진(秦)본기」, 「진시황(秦始皇)본기」, 「항우(項羽)본기」, 한나라의 「고조(高祖)본기」, 「여후(呂后)본기」, 「효문(孝文)본기」, 「효경(孝景)본기」, 「효무(孝武)본기」의 12권으로 되어 있다.

각 권말에는 사마천의 촌평이 붙어 있는데, 여기에는 진나라 왕조를 무너뜨렸지만 BC 202년에 한나라의 고조 유방에게 패한 항우의 최후도 묘사되어 있다. 항우는 왕조를 수립하지는 못했으나 「본기」에 편입되어 있다.

사면초가(四面楚歌)

BC 206년, 시황제가 죽고 4년이 흘러 진나라는 멸망했지만, 진나라를 토벌할 때 선봉에 섰던 초나라의 항우(項羽)각주[1] 와 한나라의 유방(劉邦)각주[2] 은 중원의 패권을 두고 4년간 싸웠다. 그 즈음 형세는 점점 항우에게 불리해져 갔다.

항우의 군대는 해하(垓下)에서 농성전을 벌였는데, 병력은 줄어들었고 식량도 턱없이 부족했다. 주위에는 한나라 군대와 제후의 연합군이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밤이 되었을 때 항우는 사방의 적진에서 들려오는 고향 초나라의 노랫소리에 깜짝 놀랐다.

“우리 초나라도 벌써 한군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는가. 이렇게 많은 초나라 사람이 적에게 동조할 줄이야!”

항우는 눈을 부릅뜨고 술을 들이켰다. 그런 항우의 곁을 애첩인 우미인(虞美人)이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항우는 추(?)라는 명마를 사랑했다.

취기가 돌아 흥분 상태에 빠진 항우는 슬픔과 분노를 못 이겨 우와 추를 곁에 두고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이라도 뽑고 그 기세는 천하를 덮을 만한데
時不利兮?不逝
때를 못 만나 추여, 너마저 달리지 않는구나
?不逝兮可奈何
추여, 네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하리 어찌하리
虞兮虞兮奈若何
우여, 우여, 너를 어찌하리 어찌하리

그 가락에 맞추어 우미인도 따라 노래를 불렀다. 이윽고 항우의 볼에 눈물이 흐르고, 부하들도 따라 울었다.

항우는 말에 올라탔다. 그는 800기의 정예 기마대와 함께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날이 새기 전에서야 한군은 항우가 도주한 사실을 알고, 기마대장 관영(灌?)이 이끄는 5,000기의 기마대로 하여금 그 뒤를 쫓게 했다.

항우가 회수(淮水)를 건널 때 그 뒤를 따르는 부하는 100여 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윽고 항우는 음릉(陰陵) 부근에 이르러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마침 지나가는 농부에게 길을 물었는데, 농부가 거짓말을 했다.

“왼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일행은 농부의 거짓말에 속아 늪지대로 들어가는 바람에 한군에게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 그를 따르는 병사는 고작 28기에 불과했다. 항우는 굳은 각오를 하고 부하들에게 말했다.

“진나라를 타도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킨 지 8년, 손수 실전에 참가한 것이 70여 회. 내 앞에 선 적은 모두 쳐부쉈고, 내가 공격하면 모두 항복했다. 한 번도 패배란 걸 모르고 살아왔다. 그리하여 나는 천하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이것은 나의 전술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다. 하늘이 나를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너희들을 위해 시원하게 한판 싸워 주마. 나의 전술 탓이 아니라 천명으로 패배한 것임을 지금 여기서 보여 주겠다.”

항우는 이렇게 하여 최후의 결전에 임했는데, 2기의 기마병만 잃었을 뿐 100기에 가까운 적병을 죽이고 장강을 향해 달렸다. 장강에 이르렀을 때 그 지역의 유력자가 배를 마련해 고향 강남으로 건너가라고 권했다. 그러나 항우는 함께 싸웠던 8,000여 명의 부하를 잃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무슨 얼굴로 그 부모들을 대하겠느냐고 하며 추격하는 적과 싸우다 자결했다. 사마천은 한나라의 장수들이 그 시체를 난도질해 서로 빼앗으려 하는 장면을 기술한 다음 항우의 인물됨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항우만 한 인물은 앞으로 나오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고향 초나라만을 생각하고 중원의 경영을 돌보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또한 초나라의 군주였던 의제(義帝)를 쫓아내고 스스로 제위에 오른 것은 고려하지 않고, 제후의 반란을 원망한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신과 자신이 세운 공에 도취해 독선에 빠져들어 무력에만 의존한 결과, 나라를 잃고 자신도 동성(東城)에서 죽고 말았다. 또한 자신의 실패를 깨닫지 못하고, 하늘이 자신을 버렸기 때문이지 자신의 전술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참으로 큰 착각이다.” 「항우본기(項羽本紀)」

2) 「표(表)」

연표(年表) 부분이다. 이것도 평면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왕조와 춘추시대 이전의 제후, 전국시대의 7국, 한나라 때의 제후, 왕족, 중신 등 10권으로 분류해 복잡한 관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특히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일어나기까지(BC 209~BC 202) 격동의 8년간을 한 권에 정리하는 세심한 배려도 돋보인다.

1972년 봄 장사(長沙) 교외에서 발견된 마왕퇴 고분의 유해에 관한 신원이 판명된 것도 이 표의 기록 덕분이다.

3) 「서(書)」

예제(禮制)와 역법, 천문, 법제, 치수공사(治水工事), 경제 등의 제도 연혁을 8권으로 나누어 기술했다.

4) 「세가(世家)」

고대 중국은 왕조 아래 제후를 두고 그들이 각지의 영지를 다스리는 통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BC 8세기 이후에 이르면 주왕조의 통제력은 점차로 약해지고, 제후의 영지는 사실상 독립국의 형태를 띠고 서로 대립하며 패권을 다투게 된다. 이 제후의 계보와 역사를 개별적으로 기술한 것이 세가 30권이다. 또한 공자는 제후가 아니지만, 특별히 세가로 다루었다.

여기서는 「제나라의 태공망(太公望)」과 「송(宋)나라의 양공(襄公)」 부분만을 발췌해 번역했다.

낚시를 인연으로 만난 태공망과 주나라 문왕

산동성(山東省) 일대에서 800년 가까이 번성했던 제나라는 BC 11세기에 주왕조 창건의 공신 여상(呂尙)각주[3] 이 그 공적으로 봉토를 받은 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여상이 바로 태공망이라고 하는데, 후세에 강태공(낚시꾼)의 시조로 불리게 된 사연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여상은 동방의 바닷가 사람이다. 그는 늙어서까지 가난하게 살았는데, 바다낚시를 인연으로 주나라 문왕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문왕이 사냥을 나가려고 점을 쳤는데, ‘이번 노획물은 호랑이나 곰이 아니라 왕의 패업을 도울 인물이다’라는 점괘가 나왔다. 과연 문왕은 위수(渭水) 북쪽의 강변에서 한 낚시꾼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여상이었다. 문왕은 여상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그의 높은 식견과 인격에 감동하고 말았다.

“우리 선군(先君)인 태공(太公) 시절부터 언젠가 성인이 나타나 주나라를 강성하게 할 것이라는 말이 전해 왔는데, 태공이 기다리던 인물이 바로 당신이었구려.”

그리하여 그는 태공이 바라던(望) 인물이라는 뜻에서 태공망이라 불리게 되었다. 문왕은 그를 마차에 태우고 군사(軍師)로 삼았다.

문왕은 태공망과 은밀히 정책을 입안해 선정을 베풀면서 은(殷)나라를 타도하려고 애썼다. 태공망의 헌책은 군사적인 전략이 주를 이룬 것으로, 후세에 병법이나 권모술수를 논하는 사람들이 태공망을 시조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태공망은 문왕이 세상을 떠난 뒤 그 아들 무왕(武王)을 모셨고,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의 천하 평정을 달성한 뒤, 제나라 땅을 봉토로 받았다. 그리고 그의 자손이 대대로 제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제태공망세가(齊太公望世家)」 말미에 사마천은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제나라에 가 본 적이 있는데, 옥토가 2,000리나 되고 그 백성들은 모두 지혜로웠다. 태공망이 그 인덕으로 나라의 기초를 만들고, 뒤에 환공의 전성기를 맞아 선정을 베풀어 제후의 맹주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쓸데없이 베푸는 인정을 뜻하는 ‘송양의 인’

송나라는 하남(河南)의 작은 나라였지만, 양공(BC 650~BC 637 재위)은 제후의 맹주가 되려는 야심을 가슴에 품고 초나라와 싸웠다.

어느 날 양공이 이끄는 송나라 군대와 초나라 군대가 홍수(泓水) 강변에서 맞닥뜨렸다. 적이 강을 건너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재상 목이(目夷, 양공의 이복형)가 양공에게 말했다.

“적은 다수이고 아군은 소수입니다. 초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기 전에 쳐야 합니다.”

그러나 양공은 그 헌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적은 강을 다 건넌 뒤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목이가 “지금이라도 공격을 감행해야 합니다”고 말했지만 양공은 “아니다, 적이 진형을 다 갖춘 다음에 하도록 하자”라고 말하고, 적이 전열을 다 갖춘 뒤에야 비로소 공격을 시작했다.

그 때문에 송나라 군대는 대패하고, 양공은 부상을 입었다. 사람들이 그 작전은 정말 어리석었다고 비난하자, 양공은 이렇게 말했다.

“적이 곤란한 틈을 타서 공격하는 것은 군자가 할 바가 아니다. 상대가 준비를 다 갖추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공격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후세 사람들이 적에게 쓸데없는 인정을 베풀어 실패하고 마는 경우를 두고 ‘송양의 인(宋襄之仁)’이라 조소하게 된 것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사마천은 양공의 행위를 노골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양공은 홍수의 전투에서 패했지만, 군자 가운데서는 이 행위를 높이 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그들은 중국에 예의가 없음을 한탄하면서 양공의 예의와 양보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5) 「열전(列傳)」

역사가 딱히 제왕이나 제후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마천은 사상가와 정치가, 장군, 관리, 협객, 상인, 시정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의 전기를 열전 70권으로 묶었다. 제1권 「백이열전(伯夷列傳)」은 역사의 파도에 흔들리며 살아야 했던 인간의 마음을 주제로 했고, 제69권 「화식열전(貨殖列傳)」은 경제와 경제인의 업적을 들었는데(제70권은 사마천 자신의 전기), 전체적으로 치밀하게 구성된 하나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 천도는 있는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각주[4] 는 무력 정치에 반대하며 산에 들어가 굶어 죽은 의인으로, 공자를 비롯한 유가에서는 그들을 칭송했으나, 사마천은 그 운명에 가탁(假託)해 역사의 비정함을 통탄했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 군주의 두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아우 숙제를 다음 왕으로 삼으려 했으나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왕위를 형 백이에게 양보했다. 그러나 백이는 아버지의 뜻을 어길 수 없다 하며 피했고, 아우 숙제도 왕위에 오르지 않고 피해 버렸다. 그러자 백성들은 다른 형제를 왕으로 옹립했다. 훗날 백이와 숙제는 서백창(西伯昌)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의지하고자 했지만 서백창은 벌써 죽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아버지의 시호인 문왕(文王)의 위패를 수레에다 모시고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기 위해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에 백이와 숙제는 말고삐를 잡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또한 신하 된 도리로 군주를 치려 하는 것은 인(仁)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무왕은 그 둘의 목을 치라고 명령했다. 이때 태공망이 “이 사람들은 의인이다”라고 하며 살려 주었다. 이후 무왕이 은나라를 평정한 뒤 천하가 주나라 왕실을 섬겼으나,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지조를 지켜 수양산(首陽山)에 은거하면서 주나라의 곡식을 먹으려 하지 않고 고사리로 배를 채우다가 결국 굶어 죽었다.

“천도(天道)는 공평무사해 항상 착한 사람을 돕는다”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인덕을 쌓고 행실이 깨끗했지만 불행하게 죽고 말았다.

백이와 숙제의 예만이 아니라 공자의 많은 제자 가운데 공자가 가장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로 인정했던 안회도 너무 가난하여 술지게미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결국 고생만 하다 죽고 말았다. 그에 비해 도척(盜?, 춘추시대 말기의 유명한 도적)은 매일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천하를 어지럽혔지만 천수를 누렸다. 도척은 대체 어떤 덕행을 쌓았단 말인가.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만 하면서도 평생 향락과 부귀를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갈 만한 곳을 골라 가고, 때에 맞게 말을 하며, 공명정대한 일이 아니면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화를 당하는 일이 너무 많으니 이건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이런 것을 천도라고 한다면, 과연 그 천도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백이열전」

쓸모없는 두 식객이 맹상군을 구하다

열전에는 위에서 든 백이와 숙제를 비롯해 약 250명, 조연까지 넣으면 약 2,000명이 넘는 개성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전국시대에 제(齊)나라의 뛰어난 재상이었던 맹상군(孟嘗君)각주[5] 의 일화를 들어 보자.

맹상군은 천하의 인재를 모아 식객으로 대접했다. 그 소문을 듣고 수배 중인 죄인까지 찾아오는 지경이라 그 식객만 해도 ‘수천 명’이나 되었다.

맹상군은 새로 온 식객을 면접할 때, 병풍 뒤에 서기를 두고 그의 부모 형제에 대해 기록하게 한 뒤 나중에 사자를 보내 부모 형제에게 선물을 전했다. 그 소식을 들은 식객이 감격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어느 날 밤, 식객을 맞이해 식사를 할 때였다. 우연히 불빛에 가려 맹상군의 밥상이 안 보였다. 식객은 주인과 자신의 밥상에 차별을 둔다고 오해해 수저를 놓고 물러가려 했다. 맹상군은 자신의 밥상을 식객 앞으로 들고 가서 자세히 보게 했다. 식객은 자신의 행실을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그 때문에 맹상군의 평판은 점점 더 높아졌다.

맹상군이 제나라 왕의 사자가 되어 진(秦)나라로 가게 되었을 때 식객 몇 사람이 수행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도무지 쓸모없는 두 사람이 끼어 있었다. 한 사람은 개의 흉내를 내며 도적질을 잘하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닭울음을 그럴듯하게 흉내 내는 사람이었다.

맹상군 일행을 맞이한 진나라의 소왕(昭王)은 맹상군의 힘으로 제나라가 강해질 것을 두려워해 일행을 연금하고는 죽이려 했다.

이에 맹상군은 소왕의 애첩에게 손을 써서 그 도움으로 풀려나려 했으나, 애첩이 그 대가로 여우의 겨드랑이 털로 만든 옷을 달라고 요구해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똑같은 옷은 이미 맹상군이 소왕에게 바쳤고, 그것은 천하에 둘도 없는 진품이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맹상군은 식객들과 의논을 해 보았지만, 아무도 별다른 묘안을 내지 못했다. 그때 구석 자리에서 한 남자가 나섰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밤이 되자 그 남자는 왕궁으로 숨어들어 소왕에게 헌상했던 그 옷을 훔쳐 냈다. 맹상군은 그것을 애첩에게 바치고 풀려날 수 있었다.

일행은 서둘러 도성을 탈출해 위조한 통행증을 들고 캄캄한 밤에 함곡관(函谷關)에 도착했다. 그러나 규칙에 따라 아침에 닭이 울어야 문을 열어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소왕은 벌써 맹상군 일행이 도망친 것을 알고 추격병을 파견한 상태였다. 맹상군은 초조했다. 그때 일행의 말석에 앉아 있던 식객이 손을 들고 앞으로 나오더니, 닭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닌가. 그 울음소리를 듣고 주변의 닭들이 덩달아 울기 시작하자 병사들이 관문을 열었다.

이어서 추격병들이 뒤쫓아왔지만 맹상군 일행은 이미 함곡관을 떠난 뒤였다. 식객들은 그 두 사람에게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부귀하면 인재가 모여들고, 비천하면 친구도 다 떠난다

맹상군은 한때 실각한 적이 있다. 그러자 식객들은 모두 떠나 버리고 풍환(馮驩)이라는 자만 남았는데, 그는 기묘한 책략으로 맹상군의 명성을 되찾게 해 주었다. 맹상군이 실각했을 때 떠났던 식객들은 맹상군이 힘을 되찾자 다시 돌아오려 했다. 이에 맹상군은 풍환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다행히도 그대 덕분에 자리를 되찾았으나, 그 사람들은 무슨 면목으로 나를 만나려 하는지 모르겠소이다.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다오.”

풍환은 말고삐를 매어 놓고 수레에서 내려와 절을 올렸다. 맹상군도 수레에서 내려와 예를 표하며 말했다.

“선생이 식객들을 대신해 사과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선생께서 말실수를 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물에는 필연적인 도리가 있다는 걸 아시겠지요?”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겠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은 사물의 필연적인 결과이며, 부귀하면 선비가 모여들고 비천하면 친구가 적은 것 또한 당연한 도리입니다. 선생께서는 아침에 사람들이 시장에 모여드는 것을 보지 못했는지요? 날이 밝으면 다투어 문으로 들어가는데, 날이 저물면 어깨를 늘어뜨린 채 시장 쪽은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딱히 아침을 좋아하고 저녁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바라는 물건이 그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선생께서 지위를 잃었을 때 사람들이 다 떠났던 일을 두고 그들을 원망하며 일부러 식객이 오는 길을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전처럼 오는 손님을 잘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맹상군은 절을 하며 그 말에 따랐다. 「맹상군열전」

책 속의 명문장

燕雀安知鴻鵠之志哉 / 연작안지홍곡지지재
‘작은 새가 어찌 큰 새의 뜻을 알리오.’ 소인은 큰 뜻을 품은 대인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시황제가 다스리는 진제국에 대항하여 최초로 반란군을 일으킨 진승이 젊은 시절 머슴살이를 할 때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말을 했다가 동료들의 비웃음을 샀다. 그때 그가 한 말이다.
王侯將相寧有種乎 / 왕후장상녕유종호
‘왕후장상의 씨앗이 어디 따로 있다더냐!’ 진승(陣勝)이 반란을 일으키고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 말이다.
大行不顧細謹 / 대행불고세근
큰일을 할 때는 사소한 것은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다툴 때, 진의 수도 함양 교외의 홍문에서 양웅이 술자리를 가졌는데, 유방은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탈출했다. 그때 항우에게 인사도 못 하고 가게 되었다고 말하자, 부하 번쾌가 그 말을 받아 한 말이다.
桃李不言 下自成蹊 / 도이불언 하자성혜
복숭아와 자두는 말이 없지만, 꽃을 보고 열매를 따려는 사람들 때문에 그 나무 아래에는 저절로 길이 생기듯, 인격자에게는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여든다.
酒極則亂 樂極則悲 / 주극즉란 락극즉비
‘술이 과하면 흐트러지고 즐거움이 과하면 슬퍼진다.’ 제나라의 위왕(威王)을 모시던 학자 순우곤(淳于?)이 왕에게 얼마나 마시면 취하느냐는 물음에 위왕이 답한 말이다.
夜郞自大 / 야랑자대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뜻이다. ‘야랑(夜郞)’은 한나라 때 중국의 서남쪽에 있던 소수민족의 나라인데, 한나라의 사자를 맞이한 야랑국의 왕이 자기 나라가 한나라보다 더 크다고 자만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사마천

『사기』는 한(漢)나라의 사상가 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서로, 중국의 전설시대부터 하(夏) · 은(殷) · 주(周), 춘추전국시대, 진제국의 통일과 와해를 거쳐, BC 2세기 한제국 초기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 시대는 사상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나 인류사의 대변혁기라 할 수 있는데, 『사기』는 그 시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단순한 사료로서가 아니라 사상서, 문학서로서도 널리 읽히는 것은 사마천의 냉철한 시선으로 관찰된 인간의 모습이 살아 움직이듯이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전체각주[6] ’로 쓴 『사기』의 스타일은 『한서(漢書)』 이후의 중국 역사서로 이어진다. 그러나 사마천의 다양한 시각과 가치관으로 묘사된 『사기』에 버금가는 저술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사마천이 태어나고 죽은 해는 명확하지 않지만, BC 2세기에서 BC 1세기에 걸쳐 한무제(漢武帝)의 치세에 살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 사관의 우두머리)이 되어 역사 편찬에 종사했다. 그러나 한때 비운의 패장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궁형(宮刑, 남근을 절단하는 형벌)을 당했다.

그는 감옥살이를 하다가 출옥한 뒤 그 굴욕을 역사서 편찬 사업으로 이겨내려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궁형을 당한 다음 깊이 생각해 보았다. 생각건대 공자는 어려운 여행 중에도 『춘추』를 지었고, 굴원(屈原각주[7] , 전국시대 말기 초나라 왕족)은 추방된 뒤에 걸작인 장시 「이소(離騷)」를 지었다. 또 좌구명(左丘明, 춘추시대 노나라의 대부)은 실명한 뒤에 역사서 『국어(國語)』를 편찬했다. 이처럼 인간이란 마음속에 깊은 불만이 쌓이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을 때 과거를 이야기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존재이다.” 『사기』의 음울한 표현과 날카로운 통찰, 부조리에 대한 분노에는 그런 사연이 배경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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