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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시간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말씀은 아가서에 있는 말씀입니다. 아가서는 사랑을 노래한 책입니다. 성경 중에서 특별하게 사랑을 노래한 책입니다. ‘아가(雅歌)’는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Song of Songs”라고 하는데, ‘노래 중의 노래’,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아가서는 사랑을 노래한 것인데, 어떤 사랑이냐? 이게 중요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아가서를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봅니다. 연애시이지 무슨 신령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냥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한 것인데, 이것도 의미 있고 귀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왜 그것이 성경에 포함되었느냐?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냐?’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요즘 유행가나 연애시는 왜 성경에 포함되지 않느냐?’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합당한 해석은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사랑을 신랑과 신부의 사랑을 통해 표현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박윤선 박사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결혼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 연합(靈的聯合)의 모형”이라고 말합니다(아가서 주석 서론). 신랑과 신부의 사랑,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노래한 것입니다.
아가서의 저자는 솔로몬입니다. 아가 1:1에 “솔로몬의 아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가서의 저자는 솔로몬 왕입니다. 그는 잠언 3천을 말하였고 노래 1,005편을 지었다고 합니다(왕상 4:32). 솔로몬이 지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이 그를 감동하여 이 책을 기록하게 하셨는데, 그래서 사람의 지혜와 능력을 뛰어넘는 신령한 차원의 말씀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신기하고 오묘하고 재미있습니다.
아가 2:1에 보면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랑의 말로 볼 수 있습니다(박윤선). 곧, 예수 그리스도는 ‘사론의 수선화’라는 것입니다. ‘수선화(水仙花)’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원어는 ‘하밧첼레트’로 옛날 고대에 ‘백합화’(lily), ‘수선화’(narcissus), ‘장미’(rose), ‘크로쿠스’(crocus)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수선화’가 제일 무난해 보입니다(Aalders 참조).
그러면 아가서에 나오는 신부는 누구입니까? 솔로몬이 사랑한 여자는 누구일까요? 아가 6:13에 보면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라고 말합니다. 이 ‘술람미 여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논란이 많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수넴 여자’라고 보는데, ‘술람미’와 ‘수넴’은 스펠링이 다릅니다. 그리고 수넴 여자 아비삭은 다윗의 후궁 중 하나로서 솔로몬이 사랑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이스라엘에서 그런 것은 골육상간의 가증한 죄가 됨). 아가 1:5에 보면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술람미 여자는 흑인 여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솔로몬이 이집트 바로의 딸을 사랑했다고 봅니다. 또는 에티오피아 북부 지역에 있는 ‘스바의 여왕’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왕상 10:1-13; 대하 9:1-12). 그러나 여기서 ‘검다’는 것은 상징입니다. 죄가 많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모두 본성상 죄로 말미암아 검습니다. 그러나 ‘아름답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칭함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검은 사람인데 하얀 가운을 입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사랑한 ‘술람미 여자’는 교회 성도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솔로몬’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검은 ‘술람미 여자’를 사랑합니다. 우리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랑입니다.
‘술람미 여자’는 ‘솔로몬’의 여성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히브리어로 ‘셜로모’(‘평강’이란 뜻)인데, ‘슐람미트’는 그 여성형(솔로몬의 여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라틴어 번역인 벌게이트(Vulgate)가 ‘평화의 여자’(pacifica)로 번역했습니다. 1637년에 나온 화란 국역(Statenvertaling) 성경은 ‘평화의 여자’로 설명하였습니다. ‘솔로몬’은 평화의 왕이고, ‘술람미 여자’는 평화의 왕비(여주)입니다. 신약 성경의 요한이서 1절에 ‘장로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부녀’는 원어상 ‘퀴리아’(Kyria)로서 ‘퀴리오스’(Kyrios)의 여성형입니다. 따라서 ‘퀴리아’(주)는 ‘주님의 여자’(여주)로서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솔로몬은 ‘평화의 왕’(그리스도)이고 슐람미트는 ‘평화의 여자’(교회)입니다.
아가 1:5은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라고 합니다. 게달은 이스마엘의 아들 중 하나입니다.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게달의 장막’은 아라비아 사막의 텐트를 의미합니다. 모래바람이 불고 거칠고 험합니다. 이에 반해 ‘솔로몬의 휘장’은 고급스럽고 아름답습니다. 예루살렘의 문화적 생활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본성적으로 검은 사람입니다. 거칠고 야만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솔로몬의 휘장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정확하게는, 그렇게 봐주시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거칠고 험한데 아름답게 봐주십니다.
아가 2:2에 보면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고 합니다. ‘가시나무’는 사람을 찌르는 악한 나무입니다. 그 가운데 ‘백합화’는 아름다운 꽃입니다. 누가 그렇습니까? ‘내 사랑’ 곧 솔로몬이 사랑한 여자, 술람미 여자입니다. 곧 우리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우리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와 같습니다. ‘가시나무’는 세상의 일반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백합화’와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백합화다”가 아니라 “백합화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봐주신 거지, 진짜로 백합화는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은 여전히 가시나무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본성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아 의롭다고, 착하다고 봐주신 것입니다.
아가서에 보면, 신랑된 솔로몬이 신부에게 계속 노래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1:15; 4:1)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여 ...”라고 말합니다(1:8; 2:10, 13). 계속해서 어여쁘다고 노래하는데 ... 정말 예쁜가요? 아닙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 술람미 여자는 ‘검다’고 했습니다. “게달의 장막 같다.”고 했습니다. 1:6에 보면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하다.”고 합니다. 또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고 합니다. 신분이 미천합니다. 또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고 합니다. 자기 직무를 잘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을 암시합니다. 범죄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가 5장에 보면, 밤중에 사랑하는 자 신랑이 와서 문을 두드리는데, 아내 된 자는 안에서 게으름을 부립니다.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3절). 귀찮다,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게으름을 부리다가 늦게 일어나서 나가보니 신랑은 벌써 떠나고 없습니다. 오늘날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 우리 성도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찾아오셔서 “나와 함께 가자. 은혜의 자리에 함께 가서 기도하고 은혜 받자.”고 하시는데, 우리는 “내가 누웠으니 어찌 다시 일어나랴? 잠이 오는데 어찌 눈을 뜨랴?” 하면서 이불 속에서 게으름을 부리다가 주님은 떠나가고 새벽기도 시간은 끝나버리고 ... 이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고 게으르고 못나고 부족한 모습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검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가 5:2에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사랑하는 자, 신랑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뭐라고 부릅니까?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 참 놀라운 말입니다. 게을러서 문도 안 열어 주는 못난 신부, 못난 아내, 못난 우리를 향하여 여전히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게으르고 부족하고 못난 우리를 향하여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라고 부르십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송구스럽고 미안합니다.
여기서 ‘나의 완전한 자’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완전한 자’는 히브리어로 ‘탐’인데 여성형은 ‘탐마’입니다. ‘나의 완전한 자’는 ‘탐마티’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완전한 자’로 불러 주시다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자’가 되는 것은 엄청 어려운 일,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자’가 되는 것은 옛날에 수도사들이 추구하는 목표였습니다.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 하는 사람들을 ‘수도사’라 부릅니다. ‘수도승’이라고도 하고, 여자 수도사를 ‘수녀’라고 부릅니다. 수도사가 되려면 일단 집을 떠나야 합니다. 집을 떠나 수도원으로 가야 합니다. 부모 형제도 떠나고, 결혼했으면 아내도 떠나고 자식도 떠나야 합니다. 옛날 이집트에서는 주위의 사막으로 갔습니다. 수도 생활은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3세기 중반에 시작되어 4세기에 아주 왕성하였습니다. 수도 생활을 하려면 집을 떠나 사막으로 갔는데, 처음에는 혼자서 외딴곳에 가서 수도 생활을 하였습니다. 무덤에 가서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수도사들이 모여서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도 생활을 할 때 제일 기본, 출발점이 뭐냐 하면 적게 먹는 것입니다. 즉, 탐식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한 끼 또는 두 끼를 먹었습니다. 빵 두 조각을 하루에 340g 정도 먹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틀에 한 번 먹고, 어떤 사람은 5일에 한 번 먹고, 어떤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 먹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금과 올리브 열매 몇 알, 그리고 경우에 따라 채소를 먹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소식하고 금식하는 이유는 음욕을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 수도사들은 정욕은 음식에서 생긴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육식을 금지하고 빵을 아주 조금 먹었습니다.
두 번째로 정복해야 하는 죄는 ‘음란’입니다. 육체로 이런 죄를 지으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으로도 이런 죄를 지으면 안 됩니다. 이게 어려운 것입니다. 마음속에 나쁜 생각이 일어나면 아직 멀었습니다. 꿈속에서도 음욕을 품으면 안 되었습니다. 갑바도기아의 바실은 “헛된 꿈을 꾸는 것도 죄다.”고 했습니다. 낮 동안에 항상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두려움으로 살면 밤에 헛된 꿈을 꾸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글쎄요 ... 과연 그게 가능할까요? 수도사들은 이를 위해 소식하고 금식하고 밤에 잠을 자지 않고 항상 기도하고 노동을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였습니다.
극복해야 할 세 번째 죄는 탐욕입니다. 이것은 물질에 대한 욕심을 말합니다. 수도사는 돈이나 재산을 소유하면 안 됩니다. 다 나누어 주거나 수도원에 기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수도원에서 주는 대로 먹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분노와 슬픔과 권태를 극복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허영과 교만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 여덟 가지 죄를 ‘8 정념(악한 생각)’이라고 부릅니다. 이 ‘8 정념’을 극복한 사람을 가리켜 ‘완전’에 도달했다고 말합니다. 또는 마음이 ‘깨끗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완전한 자’가 되려면 엄청 어렵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어떤 수도원장은 나이 들어 죽기 몇 년 전에 비로소 완전에 도달했다고 말합니다. 정확하게는 이렇습니다. “금년은 내가 음욕에 시달리지 않은 세 번째 해입니다.” 그리고는 그 해에 54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고린도전서 1:2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졌다’고 말합니다. 원어로는 완료 수동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졌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거룩하여졌습니다. 그리고 “성도라 불림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자’라고 불러졌습니다. 고린도전서 6:11에는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 합니다. 좀 더 직역하면 “... 씻어졌고 거룩하여졌고 의롭다 함 받았다.”가 됩니다. 과거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거룩하여졌습니다. 깨끗하여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2:6에 보면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라고 합니다. ‘온전한 자들’은 다르게는 완전한 자들입니다. 빌립보서 3:15에서는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라고 말합니다. ‘온전히 이룬 자들’은 마찬가지로 완전한 자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자들, 온전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우리 부족한 자들이 어떻게 완전한 자들이 되었습니까? 밥도 많이 먹고, 하루 세 끼 먹고, 고기도 먹고, 잠도 많이 자고, 나쁜 생각도 하고, 꿈도 꾸는데 어떻게 완전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30에 “...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합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거룩함이 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거룩함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이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자’, ‘성도’라 불립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할 일입니다.
아가 5:2에 보면 뭐라고 말합니까?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 신랑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가리켜 ‘나의 완전한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실은 검고 거칠고 게으르고 흠이 많고 부족한 우리를 ‘완전한 자’라고 불러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아가 6:9에는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고 합니다. 9절 끝에서는 ‘복된 자’라고 합니다. 우리는 ‘복된 자’라고 불립니다. 우리의 허물을 용서받고 우리의 죄를 가리움 받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고 거룩하다고 하시니 우리는 ‘복된 자’입니다.
아가 8:10에서는 “나는 성벽이요 내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가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라고 합니다. ‘화평’은 샬롬입니다. ‘화평을 얻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말합니다. 로마서 5:1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합니다. 여기서 ‘누리자’는 사본적으로 그리고 문맥적으로 ‘누린다’, ‘가지고 있다’가 맞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화평’을 가지고 있습니다. 샬롬, 평강, 평화, 화평, 평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평강을 얻은 자, 화평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자’가 되기 위해 금식하고 철야하고 수행하고 엄청 고생해야만 하는 수도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전한 자’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녕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창녕에는 ‘거룩한 자들’이 사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성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완전한 자’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나의 완전한 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에 있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창녕제일교회에 많습니다. 더 쉽게 말하면, 교회에는 “나의 어여쁜 자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미인(美人)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오해해서 진짜로 자기가 예쁜 자라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오해입니다. 여기에는 진짜로, 실제로 어여쁜 자들이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나의 어여쁜 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사랑받는 자가 되었고, 어여쁜 자가 되었고, 완전한 자가 되었습니다. 나와 같이 검은 자를 주님께서 ‘어여쁜 자’라고 불러 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창녕(昌寧)이란 지명을 살펴보면, ‘창(昌)’은 창성하다, 번성하다, 아름답다는 뜻이고, ‘녕(寧)’은 편안하다, 평안하다, 샬롬이란 뜻입니다. 화왕산 아래 넓은 땅, 낙동강에 이르기까지 넓고 비옥한 땅입니다. 이 땅은 화왕산이 지켜 주니까 평안합니다. 왜구가 쳐들어와도 화왕산에 올라가 산성 안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화왕산이 지켜 줍니다. 앞으로는 낙동강이 지켜 줍니다. 공산군이 쳐들어와도 낙동강을 넘지 못하고 저지당했습니다. 그러니 창녕은 비옥하고 평안이 있는 곳입니다. 샬롬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창녕은 평안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평강이 있습니다. 참된 샬롬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평강이 있고 하나님의 복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나의 어여쁜 자여”, “나의 완전한 자야”라고 부르시는 사람들입니다. 술람미 여자들입니다. 비록 검지만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완전한 자입니다. ‘완전한 자’라고 불리는 자들입니다. ‘거룩한 자들’, ‘성도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거룩하다고, 의롭다고, 완전하다고, 어여쁘다고 불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또 이 창녕 땅을 좀 더 착하고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동네로 만들기 위해 힘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나의 완전한 자야”라고 불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좀 더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024년 9월 22일 주일 오후 창녕제일교회 여전도회 헌신예배 설교 by 변종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