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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장 일생사
○ 1. 일생사 연구의 의의
○ 2. 박일채씨의 일생사 / 신혼시절
○ 3. 박일채씨의 일생사 / 집안의 몰락
○ 4. 박일채씨의 일생사 / 일제강점기 때의 생활
○ 5. 박일채씨의 일생사 / 한국전쟁 중의 생활
○ 6. 박일채씨의 일생사 / 남편의 사망과 상례
○ 7. 박일채씨의 일생사 / 과천 서울대공원 건설
○ 8. 박일채씨의 일생사 / 출산과 혼례
○ 9. 박일채씨의 일생사 / 회고
▣ 1. 일생사 연구의 의의
일생사(一生史)는 한 개인이 일생 동안 겪어온 삶의 경험을 자신의 말로 이야기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주】1) 지금까지 각종의 민속조사나 향토지에서 그 지역의 생활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일생사를 주요 조사항목으로 다룬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한국정신문화연구원(韓國精神文化硏究院)에서 1992년에 발간한 『韓國의 鄕村民俗誌(I)-慶尙北道篇-』에서 「개인생활사(個人生活史)」라는 조사항목으로 최초로 시도되었다. 조흥윤은 이 책의 서평에서 “이 향토민속지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는 것은 「개인생활사」이다. 한 마을에 하나, 그것도 어느 마을의 경우 불과 15쪽 분량으로 서술하고 있어 아쉽기 그지 없으나, 한 마을의 주민이 어떻게 일생을 살아왔는지를 통하여 그 마을문화를 역동적으로 이해하게 해 주고 있다. 생활사는 클라우센(J. A. Clausen)의 고백처럼 고려되어야 할 요소와 차원이 워낙 방대하고 다양하여 수 많은 관점이 가능하다. 이 책에서는 역사적 사건이 개인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주안점으로 하고 있는 바, 마을문화의 역동적 이해와는 약간의 거리를 갖는다. 여하튼 앞으로 향토민속지의 각 항목에도 생활사의 접근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크다”고 하여 한국의 향토문화를 기술하는 데 있어 개인의 일생사를 조사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가를 강조하고 있다.【주】2>
구미에서는 인류학이나 사회학 분야에서 한 지역의 사라진 문화를 이해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일생사에 대한 연구가 오래 전부터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미국 문화인류학(文化人類學)의 경우, 사라진 아메리카 인디언의 문화를 한 개인의 생애를 통해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생애사 방법이 나왔고, 미국 사회학의 시카고 학파는 일탈행위가 일어나는 사회적 상황을 행위자의 어린 시절을 통해 생생하게 그리기 위해 생애사를 수집하였다고 한다.【주】3)
일생사는 개인이 경험한 사실을 이야기체로 기술한 것이라는 이유로, 일생사에 대한 그 동안의 연구는 일생사를 다른 조사분석을 위한 하나의 기초자료로서만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사회과학에서 요구하는 자료로서 평가하려고 하여 일생사에 대한 자료의 대표성(代表性)과 수집된 자료의 진실성과 객관성 만을 문제로 삼는 정도에 그쳤다. 그 결과 일생사를 그 지역의 향토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자료로 인식하지 않았다. 또한 일생사 자체가 이야기이고 또 이야기체로 서술하였기 때문에 문학적인 가치를 논하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 되어 버리는 경향이었다. 그래서 생활문화를 이해하기 위하여 일생사 자료를 이용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생사 자료의 분석과 해석을 통한 문화의 이해는 기대하기 힘들었다.
일생사는 그 지역에서 일생을 살아온 한 사람의 관점에서 자기문화를 표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일생 동안 경험한 일련의 체험을 통해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문화를 주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한 마을에 살고 있는 내부자의 관점에서 자기 문화에 대해 느끼는 감정, 즉 주관적인 인식을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일생사는 한 개인이 그 지역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고, 또 어떻게 대처하면서 일생을 살아왔는가를 통해 그 지역의 향토문화는 물론 서민들의 생활문화를 역동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는 데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일생사의 연구는 한 사람의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그 시대의 생활문화를 살펴보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역사적 기록에는 국가를 단위로 하는 큰 사건만 기록될 뿐이지 어느 한 농촌에서 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의 평범한 삶의 행태는 기록되지 않는다. 또한 한 지역을 단위로 하여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 한 개인, 나아가서는 마을 주민이 어떻게 대처하며 그들만이 지니는 문화를 지속하여 왔는가는 기록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향유하는 문화에 대해 그들 자신이 어떻게 인식하는가도 기록으로 남길 수 없다. 우리의 민속은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보다는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경험 속에 더 많이 남아 있다. 일생사를 기록하는 이유는 바로 역사적 기록에서 제외되는 사람의 삶을 통해 그 시대의 생활문화는 물론 그 지역의 향토문화와 지방사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물론 선조들의 문집을 통해서도 이러한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문집은 정해진 격식에 따라 쓰여졌기 때문에 서민들이 겪었던 삶의 참모습을 제대로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일생사는 한 시대를 살아온 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살아온 경험을 이야기체로 기술하여 당시의 사회문화와 생활문화, 나아가 문화변동의 일면을 살펴보려는 의도에서 시도되는 것이다.【주】4)
여기서는 과천에서 일생을 살아온 한 여인(박일채(朴日彩; 女, 85세))의 일생사를 이야기체로 기술하였다. 물론 여기에 기록하는 사람의 일생사가 과천에 살고 있는 모든 주민의 일생사를 대표하는 대표성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한 사람의 경험이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주민의 경험일 수는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일생사를 통해서만이라도 과천을 고향으로 하는 사람들의 자기문화에 대한 인식과 생활문화의 일부분이라도 보여줄 수 있으리라 기대되기 때문에 시도하는 것이다. 또한 여자이기 때문에 남자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읽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남자 중심의 사회와 문화에서 소외되었던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과 여성의 삶의 일부라도 읽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시도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현재 과천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이 글로 인하여 제보자의 사생활을 침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대부분 가명을 사용하였음을 밝혀 둔다.
▣ 2. 박일채씨의 일생사 / 신혼시절
박일채(朴日采)씨는 고령 박씨로 1909년(己酉生)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송림리 양지말에서 박수림(朴秀淋)씨의【주】5) 2남 2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주】6) 9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박씨는 18살에 과천(果川) 막계(莫溪)에 살고 있는 전주 최씨(全州崔氏) 최병훈(崔炳勳, 1871∼1930)씨의 맏며느리로 시집을 와서 봉제사(奉祭祀)와 생업을 감당하느라 갖은 고생으로 일생을 보낸 분이다.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후처로 시집을 와서 2남 5녀를 낳고, 전처 소생 1남 2녀를 포함하여 총 3남 7녀를 키우며 85년의 세월 동안 갖은 고생과 함께 근대사의 격변을 겪었다. 현재는 장남 내외의 부양을 받으며 과천시 K동에서 편안히 여생을 보내고 있다. “시집을 오자 마자 고생을 한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지, 이제는 자식들도 모두 안정되어 다른 걱정은 없지만, 가끔 자식들이 아프다고 하여 걱정이라고”하시면서 빙그레 웃으시는 주름진 얼굴에서 박일채씨의 일생 동안의 경험을 피상적으로라도 읽을 수 있었다. 요즘은 주로 마을 경노당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으며, 85세의 나이에 비해 근력이 정정하다.【주】7)
조사자가 살아온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니까 그런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고 못내 거절을 하시다가 마지못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자면 눈물이 나서 못해요. 열여덟에 시집을 왔는데 속아서 왔어요. 나이도 속고 아이들도 속고…” 박일채씨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후처로 시집을 왔다. 이 당시의 관습에 따라 박일채씨는 선도 보지 않고 집에서 시집을 가라고 하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혼인을 하였다. 중매(仲媒)는 친정어머니의 6촌 동서의 시누이가 하였다. “형문이 고모가 보고 가서 강제로 무작정 사주를 보내서, 그때는 사주만 보내면 뺏기는 거여(시집을 가야 한다). 사주(四柱)를 도로(되돌려) 보내느냐 어째느냐 하면서 말이 많다가 박사(博士)까지 한 양반집에서 어떻게 돌려 보내느냐. 그런 법이 없다”하여 결국은 혼인을 하게 되었다. 간선은 원래 당숙부가 하기로 했는데 당숙부가 박씨 형님의 간선을 잘못 해서 욕을 먹게 되자 간선을 않겠다고 하여 하는 수 없이 어머니가 직접 간선을 하였다. 그러나 간선을 하긴 했지만 이미 사주단자를 받은 상황에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중매로 혼인을 결정하던 시대에 박일채씨는 남자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황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혼인을 하였다.
“내가 18살 먹었던 해(1926년) 10월 초열흘날 시집을 왔는데, 강제로 시집오다시피 했어요. 왜냐하면은 죄(모두) 시켜서 속아서. 나이도 속고 아이도 속고, 죄 속혔어요. 열여덟 살이고 서른네 살이니 거 어느 부모가 줄라(시집보내려고) 그러겠어요.” 박일채씨는 1남 2녀의 아버지이고, 3남 2녀 중의 장남 최완규(崔完圭, 全州崔氏, 1893년생)씨의 후처로 시집을 왔다. 시집을 와서 보니 전처는 1926년 정월에 죽었고 젖먹이 아이까지 딸려 있는 참으로 기막힌 상황이었다. 요즘 사람들 같으면 벌써 되돌아 갔겠지만, 당시에는 한 번 시집을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친정의 수치였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이 그대로 눌러 살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박일채씨 자신의 의사결정에도 친정에서 받은 엄격한 유교적 가정교육이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최씨는 종손에다 나이는 34살이며, 거기에다가 아이도 1남 2녀가 있었다. 제일 큰 아이는 11살, 둘째(여)는 7살 그리고 셋째(여)는 3살이었다. “지금 나 같으면 어린애 안줘요.”하지만 시어머니는 잠을 잘 때도 막내 젖먹이 아기를 데리고 자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시집을 온 꽃같은 새댁이 “그야말로 꽃같은 새댁이” 아기를 데리고 잘 수밖에 없었다. 막내 아이는 늦게까지 젖을 먹다가 어머니가 갑자기 죽게 되자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젖이 부족해서인지 밤낮 먹으려고만 하여 시도 때도 없이 똥을 쌌다. “정월에 죽고 가을에 시집을 왔으니 상청(喪廳)을 해 놨어. 그 밑에 똥을 싸고” 그것을 치우려면 남편이 미안했던지 “가마(그냥) 있어봐 내가 치께” 하면서 궂은 일을 대신 해주었다. 즉, 다행히 남편은 아내인 박일채씨가 나이가 어려서인지는 모르지만 여러 모로 끔찍히 아껴 주었다고 한다.
비록 신랑의 나이와 후처인 사실, 아이가 딸려있다는 것을 모르는 상황에서, 즉 속아서 시집을 오기는 하였지만, 마을 근방에 있는 땅은 거의가 시댁의 땅이었다. 나이를 32살이라고 속이고 아이가 셋씩이나 있다는 것을 속이기는 했지만, 남편은 “나이는 좀 많아도 일단 재산이 있으니 살 만 할 거야” 하면서 위로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나 속이 상하는지 견딜 수가 없었다. 분을 참지 못하여 저녁이면 머리를 쥐어 뜯어 엉망이 되곤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빗으려고 하면 빗이 내려가지 않아 머리를 싸안고 울상이 되어 웅크리고 앉아 있으면, 남편이 일어나 “왜 그래” 하면서 대신 머리를 빗겨서 쪽을 쪄 주곤 하였다.
▣ 3. 박일채씨의 일생사 / 집안의 몰락
박일채(朴日采, 여 85세)씨가 시집 와(1926) 그 다음해 설을 쇠고 얼마 안되어 집안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시아버지가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남편이 나에게 ‘집도 없이 쫓겨나게 됐어. 다 쫓겨나게 됐어’ 하는데도 나는 설마 했어요.” 그러나 “한해 명일(明日, 설을 말함)을 쇠고 나니 2월에 나가래요. 앞이 캄캄했어요. 시부께서 남의 재판 뒷돈을 대다가 집채 땅채 그냥 홀딱 넘어갔단 말이래요. 사전에 자손들이 장성하니까 얘기를 하셨으면 그게 딴 사람에게 안 넘어가게 할 수 있었는데 당신도 설마설마 하시다가 별안간에 다 넘어가게 됐어” 집안의 아는 사람이 “재판 뒷돈을 대주면 나중에 갚을 때는 2배로 갚아주겠다” 는 꼬임에 빠져 시아버지가 조금씩 돈을 빌려 주다가 재판 기간이 길어져 돈이 모자라니까 토지를 저당 잡히고 돈을 빌려서까지 재판 뒷돈을 대주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 생각과는 달리 재판이 쉽게 끝나지 않아 먼저 빌려준 돈을 받으려고 계속 돈을 빌려 주다가 나중에는 전 재산을 잡히게 되었다.
그런데 재판 결과는 반대로 돈을 대 준 쪽이 불리하게 되어 결국은 재판에 패소를 하게 되었다. 결국 이 때까지 빌려준 돈은 고사하고 담보로 잡힌 토지는 채권자에게 모두 넘어가게 되었다. 박일채씨는 시집이 부자여서 그래도 견딜만 했으나 시집온 지 6개월도 안되어 졸지에 알거지가 되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채권자는 재산을 차압하는 것은 물론 집까지 비우고 나가라고 하였으나 막상 나가서 살 집도 없고 막막해서 그냥 눌러 살았다. 그 해 1년 농사를 짓고 나서도 집을 비우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 해 한 해 농사를 짓고 안내놓으니, 지금은 양복쟁이가 흔하지요. 그 때는 양복쟁이가 귀했어요. 귀한데 열한명인가 양복쟁이가 들이닥쳐요. 들이닥치더니 장농이나 저런 데다 그냥 요만한 거로(것으로) 문에다 차압을 시켜요. 간신히 농사지은 것을, 내가 장농해온 것도 붙이고 하니 내가 가슴이 떨려요. 무섭고, 방안에 가만히 있었어요. 쥔양반이(남편을 말함) 들어왔어요. 내가 무서워 떨고 있으니 위로를 했어요. 미안하니까. 그러지 말라고…, 괜찮다고…” 채권자가 돈을 받기 위해 집과 전 재산을 포기하고 나가라고 했으나 나가지 않고 있으니까 드디어 차압을 붙여 법적으로 내쫓았던 것이다. 아마도 양복쟁이들은 사복경찰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박일채씨는 양복입은 사람들이 많지 않던 시대에 양복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쳐 집안에 있는 모든 세간살이에 차압을 붙이니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집안에 온통 ‘차압을 죄다 붙였으니’ 살 수가 없어 집을 비우기로 하였다. “그 때는 마차도 귀했어요. 그것을 그래도 한 해 농사지은 거를 죄 쪽바리로 실어다 팔았어요. 팔아도 턱도 안됐어요. 한 해 겨울을 나고는 나가래요” 한 해 농사 지은 것을 팔아서 어떻게 변제를 하려고 하였으나 그 엄청난 돈을 마련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2월 초에 나가기로 하고 나갈 준비를 하였다. 당시의 습속대로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으며, 거기다 부잣집이었기 때문에 식구는 많아서 시부모, 박일채씨 부부와 전처 소생 아이 셋, 막내 시동생 부부와 아이, 일군 한 사람, 시누이 둘을 합쳐 13식구나 되었다.【주】8) 그 많은 식구를 데리고는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차압을 붙이는 등 나가라고 성화가 심하여 2월 초에 나가기로 채권자와 약속을 하였으나 제사날을 빌미로 날짜를 미루었다. “2월 초하루가 시조부(媤祖父) 기고(제사날)예요. 제사 지내고 나간다고 초승(초순)에서 스무날로 나갈 데가 없어서” 겨우 날짜를 미루었다. 그렇게 미루어 놓고 살 집을 찾으니까 마침 빈집이 하나 있었다. 6촌 당숙이 살던 집에 빈방이 있어서 우선 그곳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그런데 둘째 시동생이 “형님네는 식구가 더 많고 우리는 식구가 적으니까 형님은 우리집으로 오고 우리가 그쪽으로 가겠어요”하였다.
이 집은 둘째 시동생이 혼인하여 분가할 때 지어준 집이었다. 그런데 집이 작아서 대식구가 들어가기에 좁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시동생 집으로 이사를 했다. “외채집을 시동생에게 지어 줬는데, 집이 작아서 세간살이를 둘 데가 없어요. 그래서 뒤에 ‘의짓가리(헛간)’를 해서 거기에 살림살이를 넣었어요” 그런데 동서가 “큰집 하나 있었는데 형님네한테 뺐겼다고” 늘 불평이었다. 하지만 무어라 할 말이 없어 못들은 척하고 눌러 살았다. 방이 모자라서 막네 시동생은 시동생의 처가집 근처에 방을 얻어 3식구를 내보고, 이 때 일꾼도 내보냈다. 그래도 남은 식구는 박일채씨 부부와 아이, 시누이, 시부모 모두 10식구였다. 겨우 밤이슬을 피할 집은 구했지만 농사지을 땅도 없고 당장 살길이 막막하였다.
지금은 토지가 있어서 소작(小作)을 시킨다고 하더라도 지주(地主)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산업화되기 전인 1920년대 말에는 농업이 가장 큰 생계수단이었기 때문에 토지를 소유한 사람의 권리와 횡포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반대로 토지가 없어 소작하는 사람은 전혀 권리를 내세울 수가 없었다. 소작을 하지 못하면 생계를 이을 수가 없는 상황에서 소작인은 지주가 원하는대로 굽신거리며 살아야 했다. “소작하는 사람은 힘이 없었에요. 내놓으라면 다 내놨지. 홀랑 다내놨지” 다행히 담보를 잡은 집에서 논 3마지기를 소작하라고 마름집을 거쳐 통보를 해왔다. “그 때는 소작을 반으로 나누었어요. 시동생은 내보냈지만 시누이 둘하고 우리 식구 멀로 먹고 살아요. 그래도 그것 만큼은 잊어버렸어요” 지금은 소작료 없이 거저 농사를 지어 먹으라고 해도 농사를 짓는 사람이 없어 토지가 묵는 형편이지만, 그 때는 소작인이 소작료 흥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주가 원하는대로 소작료를 주더라도 농사지을 땅이 모자라는 형편이었다. 기분은 나빴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그것만이라도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소작을 하였다. 논 3마지기 소작하여 소출의 반을 소작료로 주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지만, 그만큼이라도 해결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한다.
집 뒤에 전주 최씨 종중산(宗中山, 문중산이라고도 한다)이 있었는데 시아버지가 이 산까지 저당을 잡혀 몽땅 넘어갔었다. 그러나 종중(宗中)에서 종중의 산을 넘겨 줄 수가 없다고 하여 억지로 다시 찾았다. 종중산을 다시 찾았기 때문에 그 산의 나무는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 산은 내 산처럼 해먹으니까. 그땐 낭구장사(나무장사)를 했어요. 장작해서 쪽바릴에 싣고 서울에 가서 팔아서 좁쌀 댓되(다섯되)도 사고 한 되도 사고…, 쌀 섞어서 사서 먹었어요” 다행히 종중에서 억지로 찾은 종중산 덕분에 나무장사를 하여 간신히 끼니는 이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국 전재산을 사기 당하여 잃어버리고 최악의 상황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 때 생각하면 기가 막혀요” 결국 주변의 땅이 모두 내것이라는 부자였던 재산은 지금도 찾지 못하였다.
종중에서 종중산을 되찾고 남편 최완규씨의 딱한 사정을 이해해 주었기 때문에 산에 있는 나무는 마음대로 벌채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연탄이나 가스, 기름이 연료로 사용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나무가 주 연료였다. 서울에서도 마찬가지로 장작이 난방과 취사의 주 연료로 사용되었다. 당시 노들(노량진), 검은돌(흑석동), 새창(마포구 공덕동) 등지는 장작을 사기 위한 사람과 장작을 파는 사람이 모여드는 곳으로 나무시장을 이루었다고 한다. “배겉양반(남편)은 장작을 해주고 나는 갖다 팔구” 남편이 종중산에서 나무를 해서 일정하게 잘라 패서 장작을 해 놓으면 박일채씨는 이것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남편은 부자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농사일은 전혀 모르고 공부만 하는 선비였다. 그러나 전재산이 남의 손으로 넘어가고 나니 생계를 이어 나가기 위해 책상을 물리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농사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시아버지는 경절공파(敬節公派)에서 양자를 왔다.【주】9) 재산을 모두 차압 당하고 겨우 시동생 집으로 이사를 와서 한 달 쯤 같이 있다가 자식들 볼 면목이 없었는지 생가(生家)에 가 있었다. 원래 부자집에서 공부만 하고 선비로서 유림(儒林) 출입만 하여 농사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생계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하고 당장 끼니도 어려운 상황에서 자식들을 보기 민망했던지 생가에 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부는 자식들 볼 낯이 없었는지 큰집(생가를 말함)으로 가서 들락날락 하면서 한 4년을 살았나? 그러다가 큰 집에서 돌아가셨어요. 아마 그 때가 첫아이 가졌을 때였에요.” 이 때가 1929년 9월이었는데, 시아버지의 나이 59세 때다.
시아버지는 “큰집(생가)에 가서 계시다가 9월인데 인제 거기서 돌아가셨어요. 거기서 돌아가셔서 모셔다가 장사 지냈어요”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일째에 상여를 꾸며 집으로 모시고 왔다. 습(襲)과 염(殮)의 절차는 생가에서 하고 3일째 저녁에 상여(喪輿)로 모시고 왔다. “밖에서 죽은 사람은 방에 안모신다고들 하는데, 마지막인데 안모시면 서운하다고 해, 그래 방에 모셨에요” 3일 동안은 큰집에서 묵고 집에서는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5일장을 한 셈이다. 시아버지의 장사는 성대하게 치뤘다. 장지는 과천 막계에 있는 종중산인 선산(先山)에 모셨다가 1979년 과천 서울대공원 건설로 경기도 용인군 완장리로 이장을 하였다. 마루에 상청(喪廳)을 모시고 당시에는 어느 집에서나 그랬던 것처럼 3년상을 하였다. 삼년상을 모시는 동안 상식(上食) 올리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사를 잘 모실 형편이 못되었어요. 큰 집에서 잘 살았기 때문에 많이 보탰어요. 그래서 장사를 잘 지냈어요” 장사를 어떻게 치렀는지 잘 모르고, 다만 “아무 소리 말라고 하여” 시키는대로 따라만 했다고 한다. 그 많은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고 시아버지의 장례조차도 치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생가에서 이 사정을 잘 알고 장례비용을 거의 책임지다시피 하여 다행히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해 어찌하여 논 5마지기를 더 소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논 8마지기와 종중밭 800평, 그리고 문 앞에 있는 밭 3마지기를 소작하였으나 형편은 마찬가지였다. 종중밭은 “종중에서 제사 지내고 그것을 해먹으라고 해서” 소작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형편이 조금 나아지기는 하였으나 소작료를 제하고 나면 형편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 4. 박일채씨의 일생사 / 일제강점기 때의 생활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들 등살에 박일채(朴日采, 여 85세)씨도 지금까지 지켜오던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침해당하면서까지 엄청난 고생을 했다. 당시에는 여자들은 논일을 하지 않았으며, 또 논밭을 갈고 써(고르는)는 일은 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어 여자들이 이런 일들을 하면 웃음거리가 되는 시대였다.【주】10) 또한 못줄을 이용한 줄모를 심는 것이 아니라 벌모내기를 하였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와서 줄모내기를 하라고 하여 줄모내기를 하였다. “일본사람들이 와서 여자들도 모심기를 하라고 하여 모심기를 하고, 논갈이 하라고 해서 했에요. 여자들더러 논갈라고 간섭을 해서 논도 갈았에요. 마음에는 똑바로 갈 것 같았는데, 이리갔다 저리갔다 이리갔다 저리갔다 똑바로 안가데요. 사람이 붙잡고 있는데도. 모도 심었는데 잘은 못해도 하는 척은 했어요.” 일본인들이 옆에서 지키고 서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남자들과 똑같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농번기에 품앗이 등으로 사람을 사서 일을 하면 일을 시키는 집에서 점심과 새참을 제공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점심시간과 참시간이면 휴식을 취할 겸 쉬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이것도 못하게 하여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가서 일을 하였다. “밥을 먹지 말고 제각기 싸 가지고 가서 이집 거(것) 다하고(일을 마치고)나서 저집 거 하고 동네사람들이 몰려 댕기며 그렇게 하라고 해서, 못견뎌서 그렇게 했에요” 아마도 강제적으로 공동두레노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이 될 때까지 일본인들이 시키는대로 이렇게 일을 하였다. 해방이 되고나서는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일본사람들이 지키고 서서 일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정치 때 가마니를 천 장 이상 쳤어요. 겨울에” 일본인들이 가마니를 치라고 하여 겨울이면 가마니를 쳤다. 아이들이 그 때 과천국민학교에 다녔는데, 학교를 마치면 집에 와서 새끼를 꼬고, 또 소가 있으니까 소풀을 베어오고 하면서 가사를 도왔다.
큰 아이들이 어릴 때 처음으로 집터와 거기에 딸린 밭 300평을 “몇섬지기(많은 양의 토지를 말함) 장만하듯 어렵게” 샀다. 그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즈음 아이들이 크면서 집이 좁아서 도저히 생활할 수가 없었다. “뒷동산에 종중산이라도 있으니까 낭구(나무)를 베다(벌채하여서) 행랑을 아무렇게나 지었어요” 원래 일자집 안채만 있었는데 거기에 행랑채를 건축하여 다행히 어느 정도 집 걱정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 후에 여섯 마지기를 더 소작하게 되었는데, 지주가 서울로 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없으니 당신이 사라”고 해서 돈을 세 번 정도 벌어 모아서 샀다. 이 논 역시 나무장사를 해서 돈을 모아 샀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4마지기를 더 구입하게 되었다. “그 사람이 나하고 똑같은 처지야 그 사람도 후추(후처)고, 내가 그 사람보다 생일이 먼저라 나보고 형님이라 그랬에요. 나도 속상한 일이 있으면 그 사람한테 가서 털어놓고 얘기를 하고, 그 사람도 속상한 일이 있으면 나한테 털어놓고…, 서로 그렇게 지냈에요.” 이 사람은 중오 어머니란 사람으로 마을에서는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꽤 가까운 사이였다. 중오네 논 4마지기를 소작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중오어머니가 집에 사정이 있어 그 논을 팔게 되었다면서 박일채씨에게 사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형편이 안되어 “내가 무슨 형편이 되나” 하면서 논을 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중오어머니가 “형님이 산다면야 돈을 한꺼번에 안받고 돈이 되는 데로 저금하듯이 해라”고 해서 그 논을 사기로 하였다. 장작을 해서 갖다 팔은 30원씩을 모아 1년만에 논 값을 모두 지불하였다고 한다.
“낭구장작 30개비 사당동【주】11) 가면 15원 줬어요. 넷째 딸(1938년생)을 데리고 가요. 나하고 둘이” 당시에는 산림녹화라는 명목으로 산림간수들이 입산금지를 시키고 나무를 못하게 하였다. “중간에서 못가게 붙잡아요. 낭구를 못가주 가게 붙잡아요. 그래서 붙잡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산꼬불테기(산능성이)를 넘어 갔어요. 그 사람 피해서…” 어떻게든 돈을 모을 생각으로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나무장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장작 30개비를 한 단으로 하여 박일채씨가 한 단, 딸이 한 단을 이고 지고 장작을 팔러 다녔다. 장작 30개비를 지고 다닐 수 있는 나이였으니 넷째 딸의 나이 열 살은 되었을 때였던 것 같다. 아마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일 것으로 추측된다.
“가면은 다른 사람은 서른 개피지만 무거워도 두개피만 더 가져가요. 갖다 때는 사람은 나만 기다리고 있어요. 두 개피씩 네 개피 때문에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다른 사람들은 30개피를 가지고 와서 팔지만 박일채씨는 2개피를 더 가지고 가기 때문에 그 2개피 때문에 나무를 팔기 위해 기다리지 않고 바로 쉽게 팔 수 있었다. 나무를 팔러 온 사람들이 나무를 내려 놓고 구매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박일채씨의 장작은 한 단에 두 개피가 더 많기 때문에 남들보다 쉽게 빨리 팔 수 있었다. 한 단에 2개피가 많은 것을 노려 박일채씨를 기다리다가 박일채씨가 가면 나무를 갖다 달라고 해서 갖다 주곤 하였다.
중간에서 산림간수가 나무장사를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산길로 장작을 팔러 다녔다. 박일채씨와 딸이 각기 한 단을 가져 갈수 있었으니 한 단에 15원씩 쳐서 하루 30원을 벌 수 있었다. “그 때는 호떡이 이만해요(양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그거 먹으면 요기(끼니)가 되요. 그건 1원이거든. 나무는 15원이고…. 1원을 안줄라꼬(호떡을 사기 위해 1원을 쓰지 않으려고) 그냥 데리고 와요. 데리고 와서 밥을 먹고” 1원이 아까워서 어린 딸에게 호떡을 사주지 않고 그냥 데리고 왔을 만큼 억척으로 돈을 모았다.
그렇게 돈을 모아서 몇 차례에 걸쳐 논값을 지불하였다. “지금 돈으로 치면은 이거 돈 천원 되겄지. 15원씩 한 거를 뫄가지고(모아서) 가서 이거 며칠 몬(모은)거야. 이렇게 주는 게 미안한데 … ” 그러면 중오어머니는 “아이 괜찮아, 거져도 드리는데 그렇게 해주는 것만도 고마워요” 하며 전혀 싫은 내색을 않고 도리어 위로까지 했다고 한다.
하루에 30원씩 벌어서는 논값을 다 지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 앞에 왕골을 심어서 돗자리를 짜기도 하였다. “왕골을 심어다가 째개서(쪼개서) 말려 돗자리를 하나 치면 500원이야. 그렇게 돗자리를 하나 쳐서 갖다 주구 그렇게 너마지기(4마지기)값을 다 갚았어요.” 논을 살 욕심에 단돈 1원 한푼이라고 아끼려고 딸을 굶겨가면서 돈을 모아 1년 만에 논 4마지기 값을 갚고 등기까지 마칠 수가 있었다. 그래서 농토는 먼저 구입한 6마지기와 함께 10마지기가 되었다. 열마지기 농사를 지었지만 어떤 해는 겨우 양식을 충당할 수 있었고 어떤 해는 모자라기도 하였다.
남편은 다른 집 일을 다니지는 않았지만 집안 일은 하였다. 박일채씨가 품을 팔러 다녔기 때문에 모내기와 같은 바쁜 시기에는 다른 사람의 일손을 빌려 농번기를 넘길 수 있었다. “우리집 노인네(남편을 말함)가 책상 물리고(공부를 그만두고) 나무장사 하는데, 나무하고 했지만, 남의 일은 안댕기고 남의 일은 나 혼자 댕겼어요(다녔어요)” 다행히 남편은 품앗이를 하러 다니지는 않았지만 논을 갈고 썰어 삶는, 여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은 해주었다. 논 열마지기 농사를 지으랴 남의 품앗이 하러 다니랴 박일채씨 집의 일은 늘 다른 사람들보다 늦을 수밖에 없었다.
모내기를 할 물,【주】12) 일꾼, 시기를 놓치기 않고 모내기를 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저녁에 못자리에 나가 모를 찌곤【주】13) 하였다. “당신 일 안댕기면 일 안댕기는 대신 오늘 저녁에 가서 모를 찌라고, 내일 모심는데, 밤에 달밤에 모찌러 나가면 둘이 밤새도록 찌면 이튿날 셋이 넷이 모낼 거를 쪄놔요. 나가면 그 양반 세 춤【주】14) 찌면 나는 두 춤백이(밖에) 못쪄요. 암만 부지런히 해도” 일반적으로 모내기를 할 때면 아침에 모를 쪄서 본논에 모내기를 하기 때문에 모를 쪄내는 시간만큼 모내기하는 시간이 줄어든다. 모를 미리 쪄 놓으면 모를 쪄내는 시간만큼 시간을 벌어 그만큼 많이 모를 낼 수 있기 때문에 미리 모를 쪄놓을 정도로 밤낮없이 일을 하였다. “그렇게도 해보고 만고평생(온갖고생) 다 겪은 사람이 이 사람이에요” 열 마지기의 농사가 작은 농사는 아니지만 박일채씨가 품앗이를 해서 농사를 지었다. 남편은 논갈고 썰고 삶는 큰일인 ‘대두머리’【주】15)만 해주었는데, 박일채씨는 남편이 이것만이라고 해주어서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 5. 박일채씨의 일생사 / 한국전쟁 중의 생활
박일채(朴日采, 여 85세)씨네 집의 논이 열 마지기로 불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터졌다.
“난리 날 때는 중공군이 들어 온다고 해서 반공구뎅이(방공호)를 먼저 팠어요. 그 때는 서숙도 숭구고(조도 재배하고), 쌀도 좀 있고 해서 중공군이 들어 오기 전에 앞에 밭에 죄다 파묻고 쪼끔만 냉기고(남기고)” 아마도 중공군에게 식량을 빼앗길까 싶어 모두 땅에 묻었던 모양이다. 이 때가 한국전쟁이 발발한 그 해 겨울이었는데, 시집보낸 큰딸과【주】16) 서울로 시집 가 있던 전처 소생의 딸이 딸을 데리고 피난을 와 있었다. “중공군이 들어오면 해꼬지(해롭게) 한다고” 해서 마루바닥의 판자를 뜯어내고 사람이 출입할 수 있도록 문을 만들어 달고 딸들을 거기에 들여 보냈다. 중공군 몰래 저녁이면 들어 와서 저녁, 다음날 아침, 점심을 지어서 마루 밑에 넣어 주고 오줌통도 함께 넣어 주었다.
전쟁 당시 남자들은 모두 군으로 차출되거나 징용되었다고 한다. 징용을 피하려고 “남자들은 죄다 붙잡아 가니까 재(맏아들을 가르킴) 아부지하고 예(장남)는 그 때 9살인데 멱목바위(혹은 명마바위)라고 있는데, 그 바위 밑에 쌀 한 말 하고 김치 한 가지 하고 석유 하고 줘서 부자(父子)는 거기 보내고, 나 하고 우리 시어머니 하고는 집에서 반공구뎅이에서 살고, 방은 그거 중공군들이 와서 살고, 한 달을 그렇게 사는데 중공군들이 해꼬지 한다고 했는데 해꼬지 안해요” 남자들은 모두 피난을 시키고 박일채씨는 피난을 가지 않고 사랑방과 건넌방, 아랫방 등은 중공군들이 차지하고 시어머니(1869∼1956)와 함께 방공호에서 살았다고 한다. 당시 박일채씨는 갓 마흔을 넘겼고 시어머니는 81세였다.
전쟁 당시에는 거의 매일 폭격을 하여 많은 피해를 보았다. “섣달인데 비행기가 하도 댕기면서 폭격을 하니까 저기 보면 불이 환하게 났는데, 우리집이 여기 있는데 지붕에 다섯 구녕이 눈속으로 총알이 들어갔어요. 비행기 폭격에. 그래 들어갔는데, 아니 남자들은 하나도 없지. 그래서 부자(父子)가 석유가 떨어졌다고 내려와서 올라가라고 했는데 안올라 가고 있는데, 집에 사다리가 있어서 내가 지붕에 올라가 보니 요렇게 다섯 구녕이 총알 들어간 다섯 구녕이 눈속으로 났어요. 그 때는 두레박 우물인데 딸들이 다 나와서 물을 길어다 퍼다가 붓는데, 아무리 부어도 연기가 꾸역꾸역 나요. 이엉집이니까, 암만 부어도 구멍에만 부우니까 이렇게(손으로 비스듬하게 들어간 시늉을 하며) 들어간 게 여전히 불이 안꺼지지. 여전히 타지요. 그래서 중공군 하나가 나와서 물을 퍼다 주고, 같이 불을 잡는 데도 영 안되더라구요. 어쩔 수가 없어 낫을 가지고 이엉을 끊어서 소스랑도 가지고 파내리고 … 파내려도 연기가 나요” 저녁 여섯 시 경에 비행기 폭격으로 지붕에 불이 붙어 다음날 새벽 6시까지 불을 껐다.
당시에 어린 나이로 현장에 있었던 맏아들의 이야기는 박일채씨와 조금 다르다. 당시 중공군이 와서 사랑방, 건너방, 아랫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제보자와【주】14) 아버지가 생필품을 가지러 집에 와 있었다. 오후에 폭격을 하니 피할 곳이 없어 피난온 누이들과 맏아들, 아버지 등 온식구가 안방 아랫목에 쪼그리고 앉아 벽장에 있는 이불을 모두 꺼내어 머리 위에 쓰고 있었다. 폭격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박일채씨의 남편은 마루로 난 문에 붙여 놓은 유리로 밖을 내다 보았다. 중공군이 밖에 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나와 보니 초가지붕의 추녀 밑으로 연기가 둘러쳐져 있었다. 남편이 먼저 중공군과 함께 지붕에 올라가 보니 총알구멍이 있었다. 다른 중공군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고 몇 명이 남아서 물 긷는 것을 도와 주었다. 뒤안에 꽤 깊은 우물이 있었는데 우물 바닥이 드러나 개울의 얼음을 깨고 중공군과 함께 물을 길어 왔다. 온 식구가 이엉을 끊어 내리고 물을 길러 퍼부어 새벽에야 겨우 불을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다른 피해는 없었으나 중공군이 다리에 부상을 입고 기둥이나 지붕에 파편이 박혀 있었다. 집안에 돈이 조금 있었는데 총탄을 맞아 갈기갈기 찢어졌다고 한다. 당시 지붕에서 나온 경기관총의 철갑파편과 파편이 박힌 저울, 그리고 폭격에 맞은 비석은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이 때가 1950년 12월과 1951년 1월 경으로 겨울 중 가장 추운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불을 끄려고 추운 줄도 모르고 밤을 새며 동분서주하였다. “밤 꼬박 새서 파내려서 불을 잡았어요. 파내린 게 추녀 끝에 닿아요. 손시러운지도 모르고 파내렸는데 날이 훤히 밝아요. 잡고 나니까 그 때 와서 보니 이게(치마를 만지며) 얼어서 치마가 얼어 붙어서 덜거덕 덜거덕 해요. 버선을 뺄려니까 얼어붙어서 안빠져요. 그래 아궁이에 불을 때서(지펴서) 버선을 빼고. 불 잡을 욕심에 추운거 발시러운거도(것도) 모르고 이런 거(옷을 가리키며) 죄다 얼어 붙어도, 그래 잡았어요”
6촌 동서집, 시동생네 집에 한 사람이 피난 와 있었다. 그래서 6촌 동서가 논두렁 건너에 있는 부자집에 쌀을 사러 갔는데, 낮에 그 집으로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폭격을 하여 폭격에 맞아 그날 밤에 죽었다. “6촌 동서가 쌀 사주러 갔다가(비행기 총격에) 뒤통수를 맞아서 업어다가 건너왔는데 밤에 죽었에요” 동서 집에서는 사람이 죽어 경황이 없어서 박일채씨 집에 불이 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불 끌 적에는(불을 끌 때는) 내 생각에 한 울 사이에(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면서 어찌 대가리도 안들여다 보나 속으로 그러고 있었더니 아침에 소식을 들으니까 폭격에 뒤통수를 얻어 맞아 죽었어요. 그 집에는 사람이 죽어서 정신이 없고 우리는 불 끄느라고 정신이 없고 그렇게 난리를 쳤어요” 전쟁 통에 폭격을 맞아 옆집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온 식구가 불을 끄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을 보다 못한 중공군 하나가 나와서 물을 길러다 주고 함께 불을 꺼 주었다. 애를 써서 고마운 마음에 폭격에 맞아 죽은 닭을 볶아서 주었더니 “행여나 약이나 넣은 줄 알고” 먹지 않아서 박일채씨네 식구들이 먹었다. 중공군들은 낮에는 모든 방을 차지하여 자고 밤에는 나가서 돼지 등 가축을 잡아 왔다. 돼지를 잡아서 콩을 넣고 끓여서는 한 냄비씩 주면 그것을 얻어 먹곤 하였다. “낮에 나가 댕기면 아주 못나가게 질색을 해요. 비행기가 맨날 돌고 사람만 들어가는거 보마 치니까(폭격을 하니까). 세 채 아주 홀딱 했어요” 낮에는 비행기가 돌면서 집에 사람이 들어가는 것만 보이면 폭격을 하였기 때문에 중공군들이 낮에는 절대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중공군들은 주로 밤에 활동을 하고 낮에는 방에서 잠을 자거나 활동을 하면서 주민들까지도 낮에는 활동을 못하게 하여 박일채씨도 주로 밤에만 활동하였다.
집에 불이 난 지 한 열흘 후에 중공군들이 후퇴를 하고 미군들이 들어왔다. 그러나 미군이 이 마을에 상주하지는 않았다. 중공군이 후퇴하자마자 동네 사람들이 와서 “이래서 어떡하냐구, 소깝(소나무 가지) 이런 거 쳐다가 지붕에다 얹고 서까래 부러진거(부러진 것) 막대기를 걸치고 이엉을 해서 덮고” 동네 사람들이 와서 우선 비가 새는 것은 막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 때 중오네 집, 당숙네 집, 상복이네(용대)집 등 3채가 폭격을 맞아 모두 불에 탔다고 한다. 중공군이 후퇴한 후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전쟁 당시 박일채씨는 먹고 살기에 바빠 언제 어떻게 휴전이 되었는지도 잘 모른다고 했다. 1956년 시어머니가 향년 87세의 고령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나 이 때 어떻게 하였는지 박일채씨는 전혀 기억을 할 수 없다고 한다.
▣ 6. 박일채씨의 일생사 / 남편의 사망과 상례
1973년 1월 24일 박일채(朴日采, 여 85세)씨의 생일이 지나고 나서 남편이 위독하여 자리에 누워 일주일을 견디다가 향년 81세로 돌아가셨다. 이 때는 장남이 진천에 있는 군부대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때였다. 1주일 동안 가족들과 친지,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남편이 누워 있는 방을 지켰다. “며느리가 애를 많이 썼어. 3년을 뒤를 받아 냈는데 내가 그것을 한번도 받지 못했어. 얼음이 얼어도 가서 깨고 빨았어. 금방 가서 빨아오고. 하루에 세 번 싸도 금방 빨아오고 고생 많이 했어요. 말이 삼 년이지 하루에 두 세 번씩 그게 좀 어려워요” 하면서 며느리의 고생한 이야기를 하면서 고마운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으로 옆에 있는 며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편은 약 3년 동안 병석에 누워 대소변을 받아내야만 했다. 맏며느리가 3년 동안 대소변을 받아 내면서도 한마디 불평을 하지 않고 그 일을 해냈다고 자랑스러워 한다.
박일채씨의 남편은 3년 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만 있었는데, 맏며느리가 불평없이 뒷수발을 다하였다. 망자가 보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운명을 못한다고 하여 3년 동안 보지 못한 둘째 딸(전처소생)에게 연락을 하여 운명 전날 와서 하룻밤을 잤다. 그리고 아침 일찍 약수동에 있는 집으로 떠난 지 약 1시간 후에 운명하였다.【주】18) 박일채씨, 맏며느리, 둘째 아들 등이 방에 있는데 낌새가 이상하여 7촌 당숙을 불렀다. 딸꾹질을 3∼4회 하고는 자는 듯이 운명하였다. 그래서 부랴부랴 전보를 띄우고 장남에게 전화를 하여 급히 오게 하였다. 7촌 당숙이 보고는 운명하셨다고 하여 운명을 확인하였다. 상례 일은 주로 7촌 당숙이 하였다.
평소 남편은 돌아가시기 전에 다음과 같이 유언을 하였다. “논이 10마지기 있는데 좋은 걸로 네 마지기는 종수 어머니, 건답 서 마지기는 장남, 나머지 서 마지기는 내 명의로 해 두었으니 그리 알아라”고 했다. 그래서 7촌 당숙이 “왜 형수님께는 좋은 거를 했어요(왜 좋은 땅을 형수에게 주었느냐)” 하니까 “세상이 이러니 내가 죽더라도 혹 나쁜 며느리가 들어오면 그 땅 가지고 혼자 살라고 그렇게 했다”고 하였다. “서 마지기는 내꺼니까 막내 아들꺼(것으로)로 하면 된다” 그래서 7촌 당숙이 “종손 모가지가(몫이) 적지않느냐?” 하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이 유언의 전부였다.
운명을 하고 나서 박씨의 며느리가 너무 슬피 우니까 당숙이 나가서 사자밥을 차리라고 내보냈다. 현재의 기억으로 사자밥은 다음과 같이 차렸다고 한다. 작은 상을 준비하고 그 위에 밥은 접시에 담아 4그릇을 놓고 그 밥에는 동전을 한 닢씩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종지에 술을 담아 3그릇을 놓고 그 앞에 동전 몇 닢을 놓았으며, 상 아래에는 망인이 신었던 신발을 놓았다고 한다. 사자밥을 차려 문 앞에 내놓고 나서 바로 초혼(招魂)을 하였다. 초혼은 7촌당숙이 하였다고 하는데 앞 마당에서 망자의 이름을 부르고 복복복을 3번 외친 후 속적삼을 지붕으로 던졌다고 한다. 그리고 전보를 치고 부고를 띄웠다. 부고는 일부는 사람을 시켜 보내고 일부는 우편으로 보냈다고 한다. 운명한 다음날 저녁에 성복을 하고 상주들 먼저 상복을 입혔다. 상복은 굴건제복을 격식대로 갖추어 만들었다. 그 때는 상복을 파는 곳이 없어서 집에서 만들었는데 양이 너무 많아 상주를 제외하고는 다음날인 장사날에야 상복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가정의례준칙을 선포하여 굴건제복을 하지 못하게 엄격하게 단속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혹시나 단속이 나오지 않을까 몹시 걱정을 하였는데 단속은 없었다고 한다. 상복을 간소화하려고 하였으나 주위에서 “복을 입어야 할 사람은 모두 입어야 한다”고 하여 이종사촌까지 모두 상복을 갖추었다고 한다. 그 결과 상복으로 두루막을 무려 40개나 만들게 되었다.
운명한 다음날 염을 하고 입관하였다. 당숙이 종주의 길흉사(吉兇事)를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습과 염은 주로 7촌 당숙이 하였다. 종중산(宗中山)이 있어서 장지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맏사위가 사는 동네에 있는 지관을 불러서 답산(踏山)을 하고 장지를 정하였다. 발인날에는 며느리가 너무 울어 기절을 하였기 때문에 산에는 따라 가지 못하게 하고 박일채씨와 함께 집에 있었다.
장지를 잡아 장일 하루 전에 참파를 하였다. 장일 아침에 발인을 하고 점심 때 쯤 하관을 하였다. 임시로 만든 관을 해체하여 하관을 하고 위에 횡대를 덮고 그 위에 석회반죽을 하고 달구질을 했다. 횡대는 썩지 말라고 옻나무를 썼는데 사전에 만들어 놓은 것을 썼다.【주】19) 달구질을 할 때 상두꾼들이 자꾸 돈을 내라고 해서 나중에는 “돈이 줄에 찼다고” 했다. 즉 광중의 중심을 잡기 위해 꽂아 놓은 막대기에 매단 새끼 줄이 꽉 차서 더이상 돈을 끼울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냈다고 한다. 또한 남편의 장례에는 손님이 너무 많아서 양조장의 술이 다 떨어졌다고 한다. 장례를 마치고 졸곡까지는 일반적인 상례 절차에 따라 진행하였다.
마루에 상청을 설치하고 초하루, 보름으로 상식을 올렸다. 3년 탈상을 하려고 하였으나 가족의 의견을 모아 1년 탈상을 하였다. 신주를 벽감에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담제·길제를 지내야 하지만 생략하였다. 상복은 어머니가 살아 있고 아버지가 먼저 죽으면 어머니의 상때 그 상복을 그대로 입는다고 하여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장사를 지내고 나서 자리걷이를 하면 남아 있는 사람들이 편하다고 하여 자리걷이를 하였다. 이 때 맏며느리가 까무러쳐서 시아버지가 했던 이야기를 했다. “인제 넋대를 딸이 잡았는데 며느리가 까무러쳤어요. 그래고는 한 시간 동안 입이 터져서 말을 하는데 며느리가 시집오기 전에 저 시아버지가 한 이야기를 모두 했는데 지금은 잊어 버렸어요.”【주】20) 망자의 혼령이 씌워서 망자 대신 이야기 한 것이라고 한다. 맏아들이 녹음기를 가지고 와서 녹음을 하려고 하였으나 녹음기가 고장이 나서 녹음을 할 수 없었다. 당시 박일채씨는 “저거 실성하면 어쩌나. 말은 안했지만 속으로 걱정 많이 했에요”하면서 그 때 일을 회고하였다.
남편의 장례를 마치고 맏아들이 직장으로 가면서 10살된 손녀와 7살먹은 손자에게 “나 없는 동안에 할아버지 산소에 식전마다 매일 가라고요. 그랬더니 논두렁을 건너서 백일을 꼭 다녔어요. 이슬을 차면서 백일 동안 다니니 두루마기가 나달나달 다 헤졌어요.【주】21) 남매가 눈이 와도 가고 비가 와도 우산을 쓰고 백일을 꼭 다녔어요” 하면서 못내 기특해 하였다. 철없는 어린 손주들이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열심히 산소 성묘가는 것이 무척이나 기특했던 모양이다.
▣ 7. 박일채씨의 일생사 / 과천 서울대공원 건설
“우리 넷째 사위가 대목(목수)이여” 넷째 사위가 대목이었던 덕택에 시동생집 빼앗아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원래의 집을 헐고 다시 지었다. 이 집이 과천 서울대공원이 들어서기 전까지 박일채(朴日采, 여 85세)씨가 살던 집이다. 이 때는 형편이 조금 나아서 집을 지을 수는 있었지만, 더 이상 농토를 장만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과천 서울대공원이 들어설 때까지 10마지기만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1년만에 집 지었에요”
집을 짓고 4년을 살았는데 대공원이 건설된다고 하여 집이 헐리게 되었다. 박일채씨는 고생하고 집 지은 걸 생각하면 서울시에서 보상하는 가격으로는 도저히 억울해서 집을 내놓고 나갈 수가 없었다. “보상 받아야 몇 푼 받아요. 그까짓느므꺼(그까짓것) 거저 뺏다시피 한 거, 그냥 뺏겼지요”
서울시에서는 집과 땅을 등급에 따라 보상하였다. 당시 보상가격은 평당 4천원에서 6천원 정도였다고 한다. 서울시에서 집을 헐기 위해 사람들이 오면 박일채씨는 “이 집 내놓고 나는 못나간다” 하면서 그 사람들과 싸웠다. “나를 직이고(죽이고) 이 집을 뺏어라 그렇지 않으면 집 못내놓는다. 그래 내가 낫을 들고 가서 이걸로 날 죽여. 나 죽으면 뺏어가. 처음 싸울 때는 그랬어요. 집 헐겠다고 몇 번 왔어도 내가 있으면 그냥 왔다 가. 내가 쫓아가서 어거지(억지)쓰니까. 그러다가는 결국 뺏기고 나왔에요.” 그 때는 큰 아들이 진천에서 올라와서 삼화왕관이라는 회사에 다닐 때였다. 조상들의 산소 이전은 장남이 나서서 했다고 한다.
과천 서울대공원 공사라는 대공사로 인해 그렇게 힘들여 지은 집에서 단지 4년 밖에 살지 못하고 새 집을 버리고 나와야 했다. 서울시에서는 고시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이 이주할 수 있는 이주단지를 만들어 주었다. 보상받은 금액으로는 집을 지을 수가 없어서 융자를 받아서 현재의 집을 80년도에 지었다.
박일채씨 부부는 금슬이 좋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맏며느리가 “세상에 어머님 아버님만큼 정답게 지내온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부부의 정이 있었다. 박일채씨는 “남편이 돌아가실 때까지 남편과 싸워보지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내가 속이 상해 머리를 쥐어 뜯어 빗이 안내려가서 이러고(머리를 싸안고) 있으면 일어나서 ‘왜 그러느냐’고 하면서 머리를 빗겨 쪽을 지어 줬어요” 남편이 반 년을 새벽마다 일어나서 쪽을 쪄 줄 정도로 남편 사랑은 대단했다고 한다. 동네에서는 호랑이 할아버지라고 별명이 붙었지만 아내에게만은 자상한 남편이었다. 남편은 밖에 나갔다 오면 그 집에서는 잔치를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이야기를 다 해주었다고 한다. “배깥양반은(남편) 내가 나이가 어려서 그랬는지 돌아가실 때까지 나를 어린애처럼 대해 줬에요”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약주를 작은 잔으로 드리면 큰 잔에 부으라고 하여 조금씩 남겨서 아내에게 주었다고 한다.
박씨는 일생을 살면서 생전에 남편으로부터 잘못했다고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살았다. 하지만 그것은 남편이 좀 못마땅한 일이 있었을지라도 속으로 참고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한다.【주】22) 후처, 후일의 가난 등으로 속은 썩었을지라도 대우받으며 살았다고 며느리는 말한다. 박일채씨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지 않으면 안방에서 나가지 않고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 8. 박일채씨의 일생사 / 출산과 혼례
박일채씨는 2남 5녀를 낳았다. 1929년 박일채씨가 22살 되던 해 겨울에 첫딸을 낳았다. 그리고 1933년에는 둘째 딸을, 1936년에는 셋째 딸을 낳고, 1939년에 넷째 딸을 낳았다.【주】23)
박일채씨는 2남 5녀를 낳고 3남 7녀를 키우면서도 삼신할머니에게 빌거나 아들 낳아 달라고 비는 일은 하지 않았으며, 초·재·삼칠 같은 행사라든가, 돌잔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것 하지 않아도 자식들이 모두 잘되었기 때문에 기쁘다고 한다. 단지 첫아들을 낳고는 동네잔치와 돌잔치를 크게 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하라고 하여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시집보낸 둘째 딸이 아들을 못낳아서 친정어머니가 해준 것처럼 딸에게도 도끼를 만들어 베개에 넣어 주어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1941년 6월 위로 딸 넷을 낳고 드디어 첫아들을 낳았다. “딸만 낳는다고 우리 친정어머니가 ‘영감하고 살다가 헤어져서 딴 영감하고 살다가 헤어져서, 딴 영감하고 살다가 다시 그 영감만 못해서 처음 영감한테 와서 사는 집 칼을 몰래 훔쳐와서 도끼를 쳐서 몰래 베개 속에 넣어 주었어요. 그걸 다리를 놔서 훔쳐 오느라고 돈을 많이 줬어요” 박일채씨는 후처로 들어와서 딸만 넷을 낳아서 많은 걱정을 하였다. 마을에서도 딸부자라는 소리를 하였다. 친정어머니가 도끼를 베개 속에 넣어서인지는 몰라도 그 후에 첫 아들(1941년생)를 낳았다.
딸만 낳다가 아들을 낳으니 세상에 없는 아들이라고 동네 사람들이 잔치를 하라고 해서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했다. “걔를 낳았을 때 세상없다고 그냥 아무개가 아들 낳았다고 동네잔치를 하라고 해서 잔치를 했어. 남이 없는(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아들 낳은 것마냥 동네에서 야단 법석이었어요.” 그래서 큰아들 낳았을 때는 백일과 돌도 그럴싸하게 치렀다. 1년 후 아들의 돌잔치를 크게 하여 동네잔치를 했다. 그러나 그렇게 귀한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큰 아들이 군에 입대했을 때 돈이 없어서 면회 한 번 가지 못했었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리고 해방 전 해에 다섯째 딸을 낳고, 1948년에 둘째 아들을 낳았다.
1932년 전처 소생 큰아들을 15세 되던 해에 장가를 보냈다. 7살 때 청계골에 살고 있는 이서방네 딸(당시 6세)과 정혼을 했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생모가 1926년 정월에 죽게 되자 청계골 이서방네 집에서는 “계모한테는 딸 시집보낼 수 없다고 해요. 그래 계모라고 장가 못보낼까 싶어 열다섯에 장가를 일찍 들였어요. 그런데 장가를 일찍 들여선지 별안간에 죽었에요. 걔는 사월 초하룻날 죽고, 며느리는 병원에 가서 칠월 이십일엔가 죽었에요. 별안간에” 박일채씨가 시집온 지 6년 째, 계모이기 때문에 아들을 장가보낼 수 없을까 싶어 일찍 장가를 보냈다. 그런데 그 이듬해 영문도 모르게 일찍 죽어 몹시 안타까웠다고 한다.
1933년 전처 소생 맏딸을 시집보내고, 1940년에는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1949년 자신이 낳은 맏딸을 시집보내고 이어서 1957년에는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그리고 1961년과 1962년에는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시집보냈다. 다른 딸들은 모두 구혼식을 했지만 넷째 딸은 신혼식을 하였다. 이것은 신랑 집에서 신혼식을 하자고 하여 서울 을지로에 있는 건설예식장에서 신혼식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신혼식을 하여도 폐백은 집에서 하였으나 이 때는 예식장에서 폐백까지 하였다고 한다.
혼수는 기본적으로 장롱·요강·대야·이부자리·옷 이었다. “광주간 딸(둘째딸)은 엄청 해줬는데. 아주 니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그랬더니 딸하구 데리구 가서 대야을 샀는데, 나두(나도) 미련하구 딸두 미련해서 무거우면 좋은 줄 알고 무거운걸 샀어요. (딸이) 제일 무거운 걸루 사달래. 가져오니까 그게 젤(제일)로 언잖에” 둘째 딸은 형편이 어려워 어릴 때 방직공장에 보냈다. 방직공장에 다니면서 번 돈에다가 집에서 조금 보태서 혼수를 장만하였다. 그래서 “장농도 좋은 걸루 해주구, 이부자리도 세 채씩” 해 주었다고 한다. 둘째 딸을 시집보낼 때는 다른 딸보다 혼수를 많이 했다고 한다. 그 많은 딸들을 시집보내는 데 있어 혼수는 남보다 잘해 주지는 못했어도 빠지지는 않게 해 주었다고 한다. 형편이 어려워도 해 줄 것은 모두 해서 시집을 보냈다고 한다.
이에 반해 박일채씨는 시집올 때 장롱(외장롱이라고 하였다)과 함께 몇 가지 혼수를 장만하여 왔다. 그리고 친정에서는 여자가 제사에 참석하기 때문에 제복으로 옥색 한복을 한벌 만들어서 가지고 왔다. 제사지낼 때는 반드시 이 옷을 입고 참사(參祀)하였다. 그러나 요즘에는 여자들이 제사에 참석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까지 장농 밑에 넣어 두고 있다고 한다.
1963년에 장남(당시 23세)을 장가 보내 한양 조씨(漢陽 趙氏) 조용기(趙龍起, 1941∼)씨를 며느리로 맞았다.【주】24) 이 때는 맏아들이 부산 인쇄공장에서 군대생활을 하던 때였다. 혼인식은 처가에서 했는데, 집에서 사당에 고유를 하고 함진애비와 기럭아비를 앞세우고 사모관대를 가지고 갔다.【주】25) 혼인식날 저녁에 혼수를 싣고 신행을 왔다. 3일 후에 폐백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국수를 올리고 원삼족두리를 입혀 사당에 참배를 시켰다. 오후에 친정으로 재양을 보냈다. 재양을 갈 때는 별로 음식을 해 보내지는 않았다. 약 석달 후에 술과 떡, 엿을 만들어 친정으로 근친을 보냈다.
1974년에 막내딸을 시집보냈다. 그리고 1976 여름에 둘째 아들을 장가 보냈다. 시속에 따라 안양에 있는 원앙예식장에서 신식 혼례를 하였다. 손님들이 가기 전에 폐백을 하여 당일 집에서 폐백을 받았다. 신혼여행은 가지 않았다. 얼마 동안 같이 살다가 “세간을 내주어” 분가를 시켰다.
▣ 9. 박일채씨의 일생사 / 회고
박일채씨가 시집와서(1926년) 제일 어려운 일은 제사 참사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제사 참사하기가 어렵드라고, 제사 차려놓고, 옷 갈아 입고 어쩌고 그게 어렵드라고, 바쁘기도 하고, 명주니까 옥색 들여서 한 건데. 명주는 물만 떨어지면은 얼룩이 지거든. 그니까(그러니까) 이제 제사지내고 벗어놓고. 여러 집안네가 그냥 다 모있는데(모였는데), 다 밥도 차려 먹고 그래니까 아주 거추장시럽다고. 몇 해를 두고 지내다가 제발 이거 제사 여자들 지내는 거 없애자고. 내가 (남편에게) 그래가지고 없앴어. 안지내 지금” 이 때의 제사방법은 조금 특이하다. 보통 삼헌으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인 제사 절차지만, 이 때에는 삼헌을 하고 직계 자손이 모두 잔을 올린다. 그리고 여자들이 잔을 올린 후에 다음 절차를 진행하기 때문에 제사지내는 시간이 상당히 길었다고 한다. “지금 제사는 소꼽질이야. 둘째 아들이나 오고. 제사 때 돌아오면 아주 어려워요. 한두 시간을 지내야 제사가 끝나요” 이런 방법으로 제사를 지내니 자연 제사를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제사를 지내면 곧바로 음복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옷 갈아 입고 음복준비 하자면 그렇게 바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내 며느리는 이거 안시킨다고” 생각하고 남편에게 “여자들 뭐하는 거” 그만 두자고 하여 요즘은 제사 때 여자들이 참사하지 않는다고 한다.
박일채씨는 22살에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상당히 많은 양의 담배를 피우고 있다. 처음에는 남편이 화를 풀어주기 위해 권유하여 호기심에서 피우기 시작하다가 차차 습관이 되어 이제는 끊을 수 없어 피우고 있다. “그 때는 담배 이름이 ‘피죤’이었에요.【주】26) 만날 품을 팔고 속이 상해 하니까 그거를 한 각씩 사다 주면서 이거 먹으면 화가 풀려 먹어봐 하면서 하나 빼서 불을 붙혀 주면, 먹어 보면 씨기만(쓰기만) 하지 무슨 화가 풀려? 그러면 본인 앞에 집어 팽개치면, 이거 먹으면 화가 풀린다니까 하면서 자기가 먹고 …. 일년을 뫘더니(모았더니) 요렇게 층이 쌓이더라고, 주는 거 하나씩만 먹고 팽개치고 팽개치고 뫄뒀더니 그렇드라고요. 21살 때부터 담배를 사다주기 시작했어요. 어른들이 계시니까 조금씩 빨아보라고 하면 빨다가 화장실에 가서 빨다가 차차 인이 배겨서 22살 때부터 피기 시작했어요. 인이 배겨서(습관이 되어서) 지금까지 피고(피우고) 있에요” 그렇게 남편의 권유로 배운 담배는 아이를 가졌을 때도 가리지 않고 피웠으며, 지금까지도 피우고 있다. 집안에 담배 피우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끊으려고도 생각을 했으나 “이거 먹으면(피우면) 얼마나 먹나” 하고 아예 끊을 생각을 않는다. 단지 애들이 언짢아 할까봐 걱정이 된다고 한다.
박일채씨에게 있어 며느리는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이다. “아들 며느리만큼 잘하는 사람은 없에요. 며느리만한 사람없에요. 며느리 애를 무척 썼어요. 노인네들 앉아 있지. 그 몇 대조 산소를 다 벌초를 했지. 돈이나 넉넉했으면 푹푹 사람을 사서 했으깬데(하였겠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벌초까지 했어요. 그 때 생각하면 호박이 넝쿨채 굴렀는데 아프지를 말아야 되는데 가끔 아프다 그래서 그게 걱정이네요. 딴건 (다른 것은) 걱정없어요” 하면서 며느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남편이 돌아가셨을 때 “삼년 동안 며느리가 똥치느라고 고생을 했는데 곡하다가 까무러쳤어요. 그래서 꼭 붙잡아서 산에 못가게 했에요”
아들과 며느리가 너무 잘 받들어 모시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살고 있다고 박일채씨는 말한다. 요즘은 주로 낮 시간에는 노인정에 가는데, 자식이 잘하기 때문에 노인정에서도 자랑스럽다고 한다. “아들이 노인정에 주로 다닌다고 쌀 한가마, 연탄 사다주고, 며느리가 반찬해서 갖다주고 해서 며느리만한 사람 없다고 생각해요” 며느리는 이러한 효성과 시아버지의 노년 병치레로 효성이 지극하다고 하여 1975년에 시흥향교(始興鄕校)로부터 효부상(孝婦賞)을 받았는데, 박일채씨는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 며느리가 효부상을 받았에요. 그 얘기를 꼭 해줘요” 하면서 며느리에 대한 사랑과 자랑이 대단하였다. 그리고 둘째 아들도 매달 15만원씩 보내고 하여 부족한 것이 없지만 자식들이 아프지 않아야 한다고 걱정을 한다.
지금까지 박일채씨의 일생사를 자식의 출생과 혼인, 개인의 습관과 현재의 생활, 의례를 행하는 방법 등 몇 가지로 나누어서 기술하였다. 박일채씨는 평범한 혼인이 아니라 후처로 들어와 그 집의 문물을 익히며 그 시대의 문화를 후처라는 상처를 가지고 격어 온 사람이다. 그러나 박일채씨의 삶 속에는 그런 그늘을 보이지 않는다. 한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한 문중의 소생을 합해 무려 3남 7녀를 키운 장한 한국의 어머니임에도 틀림이 없다. 박일채 할머니는 일제의 강점, 한국전쟁, 5·16혁명 등 지금까지 현대사의 격변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20세기를 통채 살아온 역사의 산 증인이다. 그러나 박일채씨에게 있어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제외하고, 역사에 기록될 만큼 굵직한 사건은 별 의미가 없었다. 서민들 누구에게나처럼 생계를 위협하고, 가족의 안녕을 위협하는 일, 그리고 자식을 낳고 길러 출가시키는 일만이 생애의 가장 큰 사건으로 남는다.
일생사의 조사는 제보자와 장시간의 면담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70~80년 이상의 살아온 이야기를 단 시간에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박일채씨의 살아온 이야기는 기억을 못할 뿐이지 지금까지 기록한 것의 몇 배는 될 것이다. 또한 차마 이야기할 수 없는 사건과 사실은 기억할 수 없다는 말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그 속에는 여기에 기록할 수 없었던 생활문화의 일면을 볼 수 있는 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이다. 박일채씨가 이야기해 주기를 망설이는 자신의 이야기와, 차마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사건, 그리고 박일채씨의 더듬을 수 없는 기억 속에는 20세기의 또 다른 역사가 배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의 면담을 통한 박일채씨의 일생사의 기록이지만, 박일채씨의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한국 여성의 삶의 방식과 사고, 농촌을 지키며 살아온 서민들의 생활문화를 일부분이라도 보여 줄 수 있었다면 다행이다.
【집필자】 金時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