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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분쟁
▲ 개요
팔레스타인 분쟁은 유태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성서의 2천 년 기록을 근거로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이스라엘 국가를 건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서기 135년경 이 곳에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이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아랍인들에 통치되어 왔다. 아랍인들은 사라센제국의 건설 이후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예루살렘을 성도로 삼아왔다. 그 후 이 지역은 십자군 원정이 있었을 때 기독교도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당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아랍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원인과 시발점을 찾아볼 수 있다. 주전 13세기,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와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이집트로부터 탈출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간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간 비슷한 시기에 남부해안 지역으로 해양민족인 필리스틴 사람들이 이주하고 양 민족간에 영토 분쟁이 시작된다. 필리스틴은 영어로 Philistine이고 이 사람들이 현 팔레스타인(Palestine)이다. 따라서, 바로 이 시점이 팔레스타인 분쟁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주전 1020년경, 이스라엘 민족은 필리스틴을 비롯한 가나안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다윗왕 영도 하에 통일왕국을 이룬다. 그러나, 이후 분열하여 주전 63년경 로마에 의해 점령당하고 주후 135년경에는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이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아랍인들에 통치되어 왔다. 아랍인들은 사라센제국의 건설 이후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예루살렘을 성도로 삼아왔다. 그 후 이 지역은 십자군 원정이 있었을 때 기독교도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당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아랍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반유태인 운동이 전개되고 그에 대응하여 유태인들이 '조국의 건설'을 목표로 민족주의 운동을 확산시켜 나가면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유태인들은 1897년 8월 스위스의 바젤에서 개최된 제1차 시온주의자회의에서 자신들의 조국을 팔레스타인 지역에 건설한다는 이른바 '바젤계획'을 채택하였다. 그들은 이 계획에서 ① 유태인 농업, 공업 노동자에 의한 팔레스타인 식민지화 촉진, ② 각 국의 법률에 따라 적절한 지역적 또는 국제적 기관에 의해 유태인 전체의 조직화와 결속 도모, ③ 유태인의 민족적 감정 및 의식 강화, 육성, ④ 시온주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 국 정부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예비적 조치 강구 등을 결의하였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오스만제국의 약화와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미끼로 이율배반적 약속을 하면서 아랍민족과 유태인들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방책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먼저 아랍민족의 협력을 얻어 오스만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 독립국가를 창설시켜준다는 약속을 하였다. 당시 주카이로 영국 고등판무관 맥마흔(Henry Macmahon)은 1915년 1월부터 1916년 3월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전시외교정책의 내용이 담긴 서한을 멕카의 태수 후세인(Hussein)에게 전달하였는데(맥마흔-후세인 서한), 그 내용은 한결같이 아랍인들이 참전하면 전쟁 종결 후 그 대가로 후세인이 요구하는 아랍지역의 독립(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국가 건설 포함)을 보장해준다는 것이었다. 아랍인들은 이러한 서한의 내용을 믿으면서 오스만제국에 반기를 들고 영국의 편에 서서 전쟁을 수행하였다. 영국은 유태인들에게도 똑같은 내용의 약속을 하면서 그들의 전쟁 지원을 유도하였다. 영국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유태인들을 이용하여 미국의 대독일 전쟁 참여를 유도하고 유태인 재벌들의 재정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1917년 11월 발포어(Balfour) 외상이 영국 국적의 저명한 유태인 로드쉴드(Rothshild)에게 서한을 보내 유태인들의 민족향토를 팔레스타인 지역에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발포어 선언문).
그러나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이와 같은 약속을 모두 저버리고 1920년 4월 상 레모(San Remo)회의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라크 및 요르단과 함께 자신의 위임통치 하에 편입시켰다. 영국은 그 후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오히려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해오는 유태인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태인들은 유럽으로부터 이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오기 시작하였으며, 19세기 말 러시아와 폴란드에서의 반유태인 운동, 1933년 이후 나치 독일의 유태인 박해 등이 유태인의 이주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유태인들의 이주가 증가됨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태인 토지 소유가 늘어났으며, 이것이 아랍인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반유태인 운동을 촉발시켰다. 아랍인들의 반발은 반유태인 운동을 넘어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조직화로 나타났다.
아랍민족의 저항이 격화되자 영국은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지역 이주를 규제하기도 하였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아랍민족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 유태인 이주를 강력하게 억제하였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이미 준군사적 단체인 이르건(Irgun)과 하가나(Haganah)를 조직하여 반영국 테러를 전개하면서 국가의 창설을 추구하였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영국은 아랍민족과 유태인의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1946년 7월 양측간의 협상을 주선하였다. 그러나 이는 유태인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그렇게 되자 영국은 1947년 4월 유엔사무총장에게 팔레스타인문제에 관한 특별회의를 소집하도록 하여 골치 아픈 이 문제를 유엔에 떠넘겼다.
이에 따라 11개 국가로 구성된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 UNSCOP)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회는 팔레스타인문제에 관한 조사를 실시한 후 1947년 8월 보고서를 작성하여 유엔에 제출하였는데, 내부의 이견을 조정하지 못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과 유태인의 지구로 분할한다는 다수안과 아랍인과 유태인을 포괄하여 연방국가를 창설한다는 소수안 두 가지를 건의하였다. 이에 아랍 측은 이를 모두 거부하고 소수민족의 권리와 성지 보호 의무를 지닌 팔레스타인 통일국가 수립 안을 독자적으로 제출하였다. 그러나 1947년 11월 29일 제2차 유엔총회에서 표결을 통해 다수안을 채택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 구역과 유태인 구역으로 분할시켰다. 유태인들은 이를 기꺼이 수락한 반면 아랍 측은 거부하였다. 마침내 유태인들은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다비드 벤구리온을 수상으로 하는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하였다.
이로써 아랍 측과 이스라엘 측의 지루한 전쟁이 잉태되었으며, 이후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이른바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불리는 제1차 전쟁은 이스라엘 건국 직후 이집트를 비롯한 7개 아랍국가들이 무력적 항쟁을 벌이면서 발생되었다. 이스라엘 측은 이를 독립전쟁 또는 해방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이 전쟁은 유엔안보리의 지속적인 중재로 1948년 11월 16일 중지되었으며, 1949년 2월 14일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이스라엘과 레바논, 이스라엘과 요르단,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에도 휴전협정이 성립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라크의 경우는 이스라엘과 별도로 휴전협정을 체결하지 않았지만 다른 아랍 국가들의 휴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전쟁의 종결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80%를 차지하는 전과를 성취하였고, 팔레스타인인들은 90만 명이 유랑민으로 전락하게 됨으로써 훗날 중동지역의 최대 골칫거리를 유산으로 남기게 되었다.
그 후 1956년 10월 이른바 '수에즈 전쟁'으로 불리는 제2차 중동전쟁이 발생하였다. 이는 이집트의 낫세르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함으로써 발생되었다. 이집트가 수에즈운하를 국유화시키자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 공격에 나섰고, 이스라엘도 이에 편승하여 이집트를 공격하는 데 참여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찌란해협을 일방적으로 통제하였고 가자지구에서도 빈번한 무력 충돌이 발생하여 이집트에 대해 군사작전을 감행할 의도가 있었던 차였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을 통해 시나이반도의 요충지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쟁은 미국과 구소련이 영국과 프랑스 및 이스라엘의 대이집트 군사공격을 비난하면서 군사력 철수 압력을 가하고, 그 국가들이 점령지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중단되었다.
1967년 6월 5일에는 시리아, 이집트 연합세력과 이스라엘간에 이른바 '6일 전쟁'으로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이 발생하였다. 시리아와 이집트는 각기 자신의 대내외적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1966년 10월 군사동맹을 맺고 주변 아랍국가들과도 협력체제를 강화하면서 대이스라엘 군사공격을 준비하였으나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양측간의 전쟁은 6일만에 종결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에서 시나이반도, 골란고원,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 등 본토의 5배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기습적으로 공격함으로서 이른바 '라마단 전쟁' 또는 '욤 키푸르 전쟁'으로 불리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였다. 낫세르의 뒤를 이은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 점령당한 지역을 회복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대이스라엘 강경 정책과 반서방 노선을 추구하고 있는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을 끌어들여 수에즈 지역과 골란고원 양 전선에서 이스라엘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쟁 초기의 열세를 만회하고 골란고원에서 일방적으로 승리를 확보한 후 시나이반도의 이집트군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전쟁을 유리하게 전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3년 10월 28일 유엔이 긴급군을 수에즈 지역에 파견하였고, 그 해 11월 11일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휴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이 전쟁도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종결되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싼 아랍 측과 이스라엘 측간의 분쟁은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른 끝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우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국제적 공인을 받게 되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산유국들이 석유를 무기화하고, 그에 비례하여 아랍국가들의 국제적 지위와 역할이 크게 증대함에 따라 그 동안 소외되었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정치적 위상도 커졌다. 마침내 1973년 11월 알제리에서 개최된 아랍정상회담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대표로 승인되었다. 유엔 역시 총회 결의로서 팔레스타인 인민들에 대하여 외부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치권, 민족 독립과 주권을 가질 수 있는 권리, 중동 평화 달성을 위한 중요 당사자로서의 지위 등을 인정하였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대해 유엔 옵저버 자격까지 부여하였다. 이로써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단순한 테러집단이 아닌 정치적 실체로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또 하나의 중대한 변화는 이집트와 이스라엘간의 평화협정(캠프 데이비드 협정) 체결이다. 이는 1977년 11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미국의 주선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함으로써 가시화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이 지역에서 자신의 입지와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아랍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면서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평화협상을 적극적으로 주선하였다.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측은 드디어 1979년 3월 26일 미국의 캠프데이비드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이스라엘과 국교를 수립하고 평화적 관계를 정착시키는 한편 잃었던 시나이반도를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는 다른 아랍국가들과의 상의와 협조 없이 독자적으로 이 협정을 체결하였기 때문에 아랍세계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으면서 고립되었다. 평화협정 자체도 이집트와 이스라엘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주안을 두었고, 팔레스타인 문제와 이스라엘 점령지 반환 문제 등과 같은 중동 평화 전반의 현안 쟁점을 포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정한 '중동평화안'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아랍측을 대표하여 전쟁의 주역을 담당하여 온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것은 중동지역의 평화와 안정 분위기를 성숙시켰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이와 같은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양국간의 관계를 안정화시킬 수 있었으나, 팔레스타인 분쟁의 근원적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스라엘은 어렵게 조성된 중동지역의 평화 분위기를 외면하고 1967년과 1973년 전쟁에서 점령한 동예루살렘과 가자지구 및 골란고원을 1980∼1981년 기간동안 자신의 영토로 공식 합병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7년 12월 이스라엘의 점령 지역에서 인민봉기가 발생하였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평화회담을 제의하였으나,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1991년 4월 이를 거부하면서 유엔 감독 하의 국제회의 개최를 제의하였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마침내 1993년 9월 13일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에 관한 원칙 선언에 합의, 아라파트 의장과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미국의 백악관에서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 이러한 화해의 분위기 속에서도 양측간에는 불미스러운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1994년 2월에는 유태인 정착민이 요르단강 서안 헤브론 사원에서 예배를 보고 있는 신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최소한 29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또한 1994년 4월에는 이스라엘 북부 아풀라에서 이슬람 과격파들이 차량 폭탄 테러를 자행하여 8명이 사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1994년 5월 4일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내 예리코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자치권은 인정하되 유태인 정착민 보호를 위해 이스라엘 경찰을 주둔시킨다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에 따라 이스라엘은 1994년 5월 13일 가자지구 내 군사기지를 팔레스타인 경찰에 이양하였다. 1994년 7월 1일에는 아라파트 의장이 가자 자치지구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7월 5일 아라파트 의장과 각료들이 예리코 자치지역에서 취임식을 거행하고 자치정부의 수립을 공식 선언하였다. 그 후 1995년 9월 28일 양측간에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995년 11월 2일에는 이스라엘이 점령지 철수계획에 따라 요르단강 서안내 예닌 경찰서를 팔레스타인 측에 양도하였다.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1998년 10월 25일 '와이 협정'(Wye River Memorandum)을 체결함으로써
양측의 핵심문제에 접근하게 되었다. 동 협정에서 이스라엘은 1967년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을 단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이양하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라는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1998년 12월 요르단강 서안지역에서 1단계 철수를 마쳤으나 1999년 초 요르단강 서안에서 폭력사태가 잇따르자 철군을 중단하였다.
1999년 5월 평화공존을 공약으로 내 건 바라크가 이스라엘 총리로 당선된 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상이 재게되고 양측은 9월 와이협정의 후속조치로 이스라엘 점령지역의 일부 영토에 대한 추가 이양에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2000년 3월에는 이스라엘 정부가 요르단강 서안의 땅 6.1%에서 철군하는 계획을 승인한 바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에 핵심쟁점에 대한 타결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핵심쟁점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양도하는 영토의 범위와 시기, 이를 바탕으로 한 팔레스타인의 독립국가 선포 시기 및 예루살렘 문제 등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게 요르단강 서안 땅 66%를 양도하고 일단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세우는 대신 동 예루살렘의 지위문제 등은 추후 논의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양측 평화협상이 교착된 상태에서 2000년 9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순례자 간의 투석으로 촉발된 충돌에 이스라엘 경찰이 발포하여 팔레스타인 7명이 사망하고 220명이 부상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동사건을 계기로 반 이스라엘 봉기인 인티파다가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에서 발생하였다. 팔레스타인의 폭력적 데모와 간헐적 대이스라엘 테러에 대하여 이스라엘군은 탱크와 미사일 등을 동원하여 보복하는 등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었다. 양측의 충돌로 12월까지 약 300명이 사망하였다.
2001년 1월 미국-이집트-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4자회담이 카이로에서 개최되었으나 유혈사태의 원인에 대한 견해차로 합의에 실패하였다. 이스라엘측은 인티파다의 중단을 요구한 반면 팔레스타인은 봉쇄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의 선 해제를 주장하였다.
양측의 핵심 쟁점은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문제이다.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는 자국내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 예루살렘의 관할권의 상당부분을 팔레스타인에게 양보하는 대신 약 370만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을 포기하는 내용의 미국 중재안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였다. 문제는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장의 결단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 국가를 수립하려는 주 목적이 이들 난민의 귀환을 위해서 이기 때문임을 감안할 때 귀환권 포기는 아라파트의 정치생명에 치명적 영향을 줄 수 있고 나아가 강경파에 의한 암살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다.
2000년 9월에 시작된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는 2001년에도 지속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내 이스라엘 정착촌에 대한 박격포 공격을 가하고 이스라엘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팔레스타인 마을을 파괴하는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의 무차별 자폭 테러도 지속되고 이스라엘은 특공대와 헬기 등을 동원하여 테러범을 개별적으로 암살하는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철저한 감시와 대비로 팔레스타인의 자살 폭탄 테러의 대부분이 사전에 적발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평화협상은 완전히 답보된 상태이다. 2001년 중순경 미국의 CIA 테넷(George Tenet)국장의 중재로 양측이 정전에 합의한 바 있으나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양측은 정전의 합의, 파기, 교전의 수순을 반복하면서 진지한 평화협상을 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10월 이스라엘의 레하밤 지비(Rehavam Zeevi) 관광장관이 팔레스타인 해방대중전선(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 PFLP)에 의해 암살되어 양측간의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기도 하였다.
911 미국 테러사건 이후 부시 대통령의 대팔레스타인 정책의 변화가 일부 감지되고 있으나 전망은 그리 밝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2001년 2월 새로 총리로 당선된 강경파인 샤론 총리가 평화협상에 적극적이지 않다.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강경파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PA의 아라파트 수반도 팔레스타인의 불만을 통제하면서 이스라엘과 협상을 이루기에는 정치적 자산이 빈약하다.
또한, 핵심 쟁점인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내의 이스라엘 정착촌 철거 문제도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스라엘 정착민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샤론 총리는 요단강 서안지역에 정착촌 확대를 승인한 바 있다.
2002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지난 2년간 양측의 충돌로 팔레스타인 1,943명과 이스라엘인 637명 등 총 2,629명 사망이 사망하였다 (2002년 10월말 현재). 팔레스타인 과격분자가 민간인을 포함한 이스라엘인에 대한 자폭 테러를 감행하고 이에 대해 이스라엘이 테러분자 색출을 명목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 군 병력을 투입하는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 특히, 2002년에 들어서는 가자지구내에서 충돌이 격화되었다. 하마스 조직원이 민간인을 방패로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고 이스라엘은 이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과 충돌하여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2001년에 충돌 강도가 C에서 B로 높아졌다고 판단된다. 주된 이유는 이스라엘의 대응이 소규모에서 장갑차와 헬기, 스마트 폭탄, 미사일 등의 무기를 동원한 국지전급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적극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진입하여 테러조직원을 색출하고 관련된 시설을 파괴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자폭테러를 막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예를 들면,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엄격한 통행금지와 통제를 실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지역과 이스라엘로 연결되는 주요 지점에 통제소를 설치하고 팔레스타인인의 이동을 제한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테러활동을 효과적으로 감소시켰지만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지역은 감옥화되가는 실정이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통제로 인하여 이스라엘인 직장에서 일하는 팔레스타인인의 출근이 어려워졌고 그 결과 실업률이 급격히 증가하여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충돌 이후 10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일자리를 잃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을 점차적으로 비 이슬람권에서 온 노동자로 대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스라엘은 또한 팔레스타인 테러단체 지도자와 폭탄제조자의 검거 및 사살에 중점을 두고 있다. 2002년, 이스라엘은 헬리콥터 등을 동원한 공격을 실행하여 팔레스타인 테러단체 지도자 50여명을 사살하였다.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은 지도자의 손실로 폭탄테러 및 자살 테러가 사전 적발되거나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정보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폭탄테러를 사전 적발하는 작전을 효과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팔레스타인의 대이스라엘 항쟁의지는 점차적으로 꺽이고 있다. 이스라엘의 강력한 대응과 경제적 어려움 등의 원인외에도 팔레스타인 테러조직들의 비인간적인 숙청도 대이스라엘 항쟁의지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지난 8월 이스라엘 경찰이 팔레스타인 테러용의자 20명을 체포하자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은 정보원으로 추정되는 팔레스타인 200명을 사살한 바 있다. 이외에도 이스라엘 민간인 공격으로 인한 국제 여론의 악화도 한 몫을 하고 있다. 현재까지의 희생자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경우, 어린이와 여자를 포함한 민간인이 대다수를 차지한 반면 팔레스타인의 경우 성인남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8월까지의 희생자 중 이스라엘여성은 184명 사망한 데 반해 팔레스타인 민간인 여성은 52명이 사망하였다. 전체 사망자의 비율을 볼 때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에 비해 약 2.6배에 달함으로 이스라엘 여성의 피해가 큼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샤론정부는 2001년부터 이미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협상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 2002년에 들어서 이스라엘은 아라파트가 보호하고 있는 테러분자의 양도를 요구하면서 집무실을 포위하고 주변 건물을 파괴한 바 있다. 여론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이스라엘인의 약 80%가 아라파트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 이스라엘은 모든 협상에 앞서 팔레스타인 자폭 테러의 즉각 중지를 우선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팔레스타인 과격단체에 의해 행해지는 테러를 통제한 능력을 사실상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의 전제 조건을 충족할 수 없다. 이스라엘도 이 점을 잘 알고 협상을 포기하고 테러분자에 대한 적극적인 소탕과 테러 방지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의미 및 영향
이스라엘의 건국과 그에 대한 아랍국가들의 강경한 저항으로 촉발된 팔레스타인 분쟁은 민족, 영토, 종교, 분리 독립, 식민유산 등 다양한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을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의 대부분 국가들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안전과 평화에 있어서 핵심 관건이 되고 있다. 특히, 이 분쟁은 네 차례의 전쟁을 발생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주변 아랍국가들의 영토를 점령하고 팔레스타인 주민을 추방함으로써 이집트-이스라엘간 분쟁, 시리아와 이스라엘간 분쟁, 요르단과 이스라엘간 분쟁을 파생시켰고, 중동지역을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 의한 무장테러의 백화점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가 하면 이 분쟁은 당사자가 상호 실체와 공존을 허용하지 않고 어느 일방의 존재를 위해 다른 일방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극단적 입장과 자세를 고수하여 왔다는 점에서 당사자들끼리는 해결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유엔과 미국을 비롯한 세계적 지도국가들의 객관적이고 진지하며 적극적인 중재가 요구된다. 이러한 점에서 이 분쟁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평화적 분쟁관리 및 해결 능력을 시험하는 아주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다. 과거 아랍국가들은 이 분쟁의 과정에서 석유를 무기로 활용함으로써 두 차례에 걸쳐 세계적인 석유위기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볼 때, 이 분쟁은 세계경제의 장래에도 엄청난 영향을 파급시킬 잠재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국내에서 소비하는 석유의 대부분을 이 지역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이 분쟁의 귀추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 분쟁에는 난민의 구제와 정전 감시를 위해 여러 유엔활동이 전개되고 있어 한국의 참여가 요청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 대비책을 세워놓아야 할 것으로 분석된다.
▲ 추후 전망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본원인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국가간에는 상호 실체 인정과 공존을 사실상 원치 않는데 있다. 이는 3000년 이상 지속된 양측의 뿌리 깊은 역사적 반목과 종교적 이유에 기인하고 있다. 따라서, 동 분쟁은 항상 아랍 대 이스라엘의 국제적 분쟁이 될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시리아, 이란, 이라크 등은 이스라엘에 대해 특히 반감을 갖고 있는 국가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스라엘과 전쟁도 불사할 가능성이 크다. 한 예로 1999년 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평화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란은 팔레스타인 전 지역의 해방을 주장하면서 투쟁을 천명한 바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내부 문제도 평화 정착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성서에 나오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인 요르단강 서안의 이양을 반대하는 이스라엘의 유대교 원리주의자와 이스라엘 정부에 퍼져 있는 강경주의자들도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원치 않고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도 이스라엘과 협상을 원하는 세력, 독립국가의 즉각적인 선포를 주장하는 세력, 이스라엘과의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하마스 등의 세력으로 나뉘어 있다. 결국 문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 문제해결을 위한 통일된 국론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양측이 합의에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든지 일방에 의해 무효화될 수 있어서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되기 매우 힘든 상황이다.
단기적으로 볼 때도 전망이 밝지 않다. 샤론정부는 아라파트가 물러날 때까지 대화를 제기하지 않을 방침이다. 2003년 1월 팔레스타인 총선이 계획되어 있으나 선거에 불법이 난무하였던 과거를 볼 때 이스라엘이 바라는 것처럼 온건한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 아라파트가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인 아니면 가까운 측근을 후계자로 내세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누가 PA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이 원하는 대이스라엘 폭력 종식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이다. 샤론 정부는 이를 명분으로 새로운 지도자와의 대화도 거부하고 강경정책을 고수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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