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잡고 가보자,같이 가보자
히로오카 마나미 , HIROOKA MANAMI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맑고 높은하늘. 여기는 금수강산 대한민국이다.
난 16년전에 일본에서 한국에 왔다. 통일교회에서 소개받은 한국남자와 결혼하기 위해서다.
난 일본에 있었을 때 도시에 살았었다. 걸어서 마트, 은행, 우체국에 언제든지 갈 수 있는 편리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집은 시골에 있었다. 산에선 꽃향기가 나고 강에선 시내물 소리가 들리는 평화로운 곳이였다.
남편은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소를 키우고 쌀농사를 짓는 집이었다.
난 처음으로 눈앞에서 소를 보았고 처음으로 벼농사를 짓게 되었다. 난 조금씩 남편과 시어머니를 따라가 일을 배웠다.
모자를 쓰고, 장화를 신고, 손수레를 밀며 점점 시골의 아줌마가 되었갔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몸이 쇠약해지셨고 점점 몸이 아파지셨다.
남편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대부분의 농사일을 하게 되었다.
특히 4년전, 이맘때쯤 가을이 제일 생각난다. 아이들 아버지가 일 때문에 몇주일동안 집에 없었을 때였다.
가뜩이나 바쁜시기인데 남편이 없으니 나 혼자서 추수일을 해야되었다. 벼를 말리고, 그 멀린벼를 포대에 담고,
그 포대를 창고에 넣고, 남은 짚을 말리고, 그 짚을 정리해서 창고에 넣는다. 이 산더미같은 일을 생각하면 앞이 막막했다.
그나마 큰딸과 아들이 도와 준다고 했지만 어쩐지 불안했다. 아침부터 저녘까지 열심 일했다.
매일 집안일을 하고, 소를 키우고, 추수 작업도 해야하는 바쁜 날이었다. 고사리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느날이었다. 오늘은 비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벼가 젖지 않도록 이제막 시트를 덮으려 할 때였다.
예상보다 빨리 비가 오기 시작했다. 벼가 비를 맞으면 또 다시 말려야 된다. 그 때 아이들은 학교에 있었다.
난 당황했다. 난 달리고 또 달려 벼에 시트를 모두 덮을 수 있었다. 몸은 땀과 비에 흠뻑 젖어 버렸지만 마음은 뿌듯했다.
시간이 지난후 비가 그치고 아이들이 집에 돌아왔다.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더욱 기뻤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포대를 창고에 옮겼다. 가족이 함께 힘을 모아 산 같은 일을 다 끝내니 정말 마음이 놓였다.
그와 동시에 농사에 대한 자신감도 가지게 되었다.
농사도 힘들지만 소키우는것도 여간 힘든일이 아니였다. 매일 3번 짚과 물을 줘야하니 볼일이 있어 밖에 나갔을 때면
시간을 봐가며 집에 돌아와야 했다. 특히 소똥을 치우는것이 가장 힘들었다.
소똥을 치울 때면 지독한 냄새가 옷에 배이고 그 소똥이 얼마나 무거운지 다 치우고 나면 몸에 안 쑤신곳이 없었다.
하지만 매일 하다보니 점점 익숙해져서 요령도 알았고 몸이 튼튼 해졌다.
그런데 이 때 까지 난 소가 순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도 난 소집에 들어가서 소똥을 치우고 있었다.
소집안에는 송아지와 큰소가 있었는데 큰 소는 송아지에게 젖을 먹여야 되니 끈을 풀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엔 온순하던 큰소가 갑자기 머리로 날 들이받았다. 난 벽과 소 사이에 끼여버렸다.
당황하여 큰소리를 질렀지만 웅크려 운좋게 소 밑으로 도망쳤다.
팔엔 커다랗고 시퍼런 멍이 생겼고 한달동안 사라지지 앉았다. 그와 함께 소에 대한 두려움도 오래갔다.
몇년전엔 일본에서 친한 친구가 놀러왔다. 친구는 나의 생활과 환경을 보고 날 많이 걱정했다.
이런 시골에서 불편하지않냐며 자신이라면 절대 이런 생활을 못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난 도시보다 여기가 더 좋다고 했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무엇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자연속의 생활은 정말 좋다.
시골생활에 적응하는것도 힘들었지만 또 하나,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이 있다. 바로 시어머니다.
옛날부터 "시어머니와 며느리사이는 좋지 못하다" 라는 말이 있는데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시어머니는 내가 하는 것에 참견하시고, 트집을 잡으시고, 흉을 보셨다. 셩격도 나와 하나도 안 맞았다.
그리고 남편은 언제나 시어머니편 이었다. 여러가지 시어머니와 문제가 생겨도 이해하라고만 했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봐도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냥 모든것을 참고 또 참았다.
어떻게 하면 이 집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방법이 없었다.
나의 부모님은 내가 한국에 가는것을 반대하셨기 때문에 작은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에 돌아갈 수 없었다.
남편은 장남이니까 시어머니와 따로 살 수 도 없었다. 그리고 난 무엇보다 한국과 일본, 두나라사이가 개선되기
위해서 결혼했기 때문에 이혼하면 그 의미가 없어진다. 내가 타혈 해야하는데 타혈 하려는 생각이 점점 없어졌다.
난 그냥 내 팔자로 생각하고 단념했다.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엔 없었다.
이런 날들이 지나가고 3년전에 난 큰병을 얻었다. 유방암이었다. 수술을 받아 몸이 약해졌다.
아이들이 4명이나 있고 시어머니는 편찮으셔서 할 수 없이 소를 팔고 쌀농사도 그만해야했다.
그런데 얼마지나지않아 시어미가 입원하시고 3개월후 돌아가셨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무거웠던 짐을 모두 내려놓은 것 같았다.
저물어 가는 서쪽 하늘을 보면서 옛날일들을 생각 했다. 난 모든것을 버리고 한국에 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한국에 와서 아이를 낳고 바쁜 날들을 보냈다. 만약 아이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로 아이들이 없으면 지금 내가 한국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난 시어머니께 해드렸던 것이 없었다. 도무지 시어머니껜 마음을 열 수 없었다.
이제와서 후회해봐야 소용없다....결국 난 시어머니께 손자를 보여드린것 외에 잘 해드린게 없었다.
이제 나의 아이들은 많이 컸다. 큰 딸은 고등학교1학년, 아들은 중등학교 1학년, 둘째딸은 초등학교 5학년,
막내딸은 초등학교 2학년이다. 난 아이들을 위해서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난 잔소리 많은 엄마다.
걱정되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그래서 난 아이들에게 여러가지 잔소리를 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간섭할 턱이 없다.
사랑의 잔소리... 문득 시어머니가 생각났다. 시어머니는 나를 딸 처럼 여기셔서 잔소리를 하셨을까.....
이런일도 있었다.소에게 풀을 주었는데 잘못하여 소의 목에 뭔가가 걸렸다.
소는 계속 구역질을 했고 점점 힘이 없어졌다. 수의사가 봤는데 손쓸 도리가 없었다.
나의실수 때문에 소중한 소가 죽어버렸다. 다 내 탓이었다. 정말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남편도 시어머니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좋지않은일이 많았지만 고마운 일도 있었다.
그 당시는 잘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후 생각해보면 시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깨닫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언제나 잡초를 뽑고 계셨다. 지금은 내가 뽑고 있다.
앞으로는 내가 시어머니대신 이 집을 잘 가꾸고 지켜야 되겠다고 다짐했다.
난 결혼을 하기전에 한국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냥 이웃나라, 역사시간에 공부했던 나라, 그 정도였다.
친구가 한국에 여행간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한일역사문제도 잘 몰랐다.
그런데 한국에 살다보면 한일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일이 꽤 많다.
몇일전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공개의 날이었다. 시간이 좀 남아서 학교벽에 결려있는 졸업사진을 우연히 보게되었다.
제일 최근 사진인 우리 아들 졸업사진부터 시작해서 먼 옛날사진을 보면 그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은 점점 흑백사진이 되어갔다. 그런데 한 사진에서 내 눈길이 뭠추었다.
차려입은 학생들뒤에 일본국기가 걸려있었다. 왜 한국의 학교에 일본국기가 걸려있을까?
난 일제시대때 찍은 사진이란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제시대에 관해서는 알고 있었는데 내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도 이런일이 있었던것을 생각하니 정말 놀랐다.
그 사진을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그 사진 앞에서 고개를 숙이니 눈물이 흘러내렸다.정말 슬펐다.
한국의 학교인데도 일본국기앞에서 졸업사진을 찍어야 하는 학생들의 슬픔을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 뿐이였다.
지금은 독도문제, 위안부문제로 양국간에 마찰이 심화되고 있다. 그 뉴스를 볼때 마다 슬프다.
마찰이 해소되어 한시라도 빨리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회복되길 빈다.
첫댓글 왠지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마나미님 메일 주소 좀 적어주세요. 제가 일본어 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