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산 남쪽 기숡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인 미륵사터는 사적 제150호. 〈삼국유사〉 권2 무왕조(武王條)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 무왕(600~641)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로 향하고 있었을 때 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소원하여 못을 메우고 탑과 법상, 미륵삼회전, 낭무(廊무)의 건물을 건립하고 미륵사라 이름했다고 한다.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7세기경에는 이미 폐사되었으며 현재는 반쯤 파손되어 있는 서탑과 당간지주 등 일부만 전해지고 있다.
미륵사지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서 일제강점기 때 이미 조사되기 시작했으며 그뒤 1980년대 문화재관리국의 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본격적인 발굴조사의 결과로 동탑과 서탑 사이에 목탑을 세워서 일직선상에 탑 3개를 배열하고, 각 탑의 북쪽편에 금당을 1개씩 둔 가람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한 쌍의 금당과 석탑에는 각기 회랑이 둘러져 있어 탑과 금당을 1개의 절로 생각할 때 마치 3개의 절이 모여 있는 듯한 3원식(三院式)의 구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3개의 금당에 모두 지하공간이 있는 특이한 구조의 건물이다.
이 절터에서는 막새기와·토기·불상 등을 비롯하여 1만여 점의 각종 유물이 나왔으며 특히 '미륵사'라든가 '국5년경진'(國五年庚辰)·'요봉원'(姚奉院)·'지원4년'(至元四年)·'천력3년'(天歷三年) 등의 문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 미륵사지는 미륵삼존불의 출현으로 절을 짓게 된 창건동기나 미륵이 이 세상에 와서 3번의 설법을 하기 위한 3군데의 장소를 마련하고 있는 점, 그리고 미륵이 머무를 장소로 금당에 지하공간을 설치했다는 점 등에서 미륵불이 이 세상에 내려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고 백과사전에서 알려준다.
[미륵사지(彌勒寺址) 안내도...]
미륵사의 창건에 대해 알아보면 5세기 중엽부터 백제의 지방중심세력으로 형성되었던 익산 지역은 7세기를 전후하여 금강변의 웅포 지역보다 내륙지방에 위치한 금마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백제문화의 꽃을 활짝 피웠다. 익산 지역의 금마를 중심으로 한 백제문화는 30대 무왕(武王, 600∼641)과 많은 관련을 맺으면서 미륵사지(彌勒寺址), 왕궁평성(王宮坪城)을 비롯한 많은 유적들이 조성되었다. 이 무왕의 탄생과 성장과정, 그리고 미륵사지의 창건과정에 대해서 『삼국유사(三國遺事)』 무왕조에 그 내용이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백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장(璋)을 낳았던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薯'자는 마를 의미하는 것으로 마동과 같은 뜻)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 이름지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인 선화(善花)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날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이내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그것은 이러하다.
[주차장에서 들어서면 만나는 미륵사지 전시관...]
동요가 서울에 가득 퍼져 대궐 안까지 들리니 백관들이 임금에게 심히 간(諫)해서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하여 장차 떠나려 하는데 왕후가 순금을 주어, 노자로 쓰게 했다. 공주가 귀양지에 도착하려 하는데 도중에 서동이 나와 공주에게 절하면서 모시고 가겠노라고 하였다. 공주는 그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를 믿고 좋아하며 서동을 따라가며 정을 통하였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동요가 맞은 것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왕후가 준 금을 꺼내놓고 살아나갈 계획을 세우려 하자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게 무엇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공주가 말하기를 ‘이것은 황금이니 백년의 부를 누릴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서동이 말하기를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덩이처럼 쌓아 두었소’라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공주는 크게 놀라면서 ‘그것은 천하의 가장 큰 보배이니 지금 금이 있는 곳을 아시면 그것을 우리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보내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자 서동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금을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현재의 미륵산)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이것을 실어 보낼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말하기를 ‘내가 신통한 힘으로 보낼 터이니 금을 이리 가져오시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공주가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금을 사자사(師子寺) 앞에 갖다 놓았다.
그러자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동안에 그 금을 신라의 궁중으로 보냈다. 진평왕(眞平王)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항상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으며, 서동은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라고 미륵사를 창건하게 된 배경을 유물전시관 자료실에서 알려준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복원된 9층 동탑...]
[미륵사지 서탑(국보 11호) 복원 외건물...]
미륵사지석탑은 미륵사 절터의 서쪽에 있는 백제시대의 석탑. 국보 제11호. 높이 14.2m. 한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으로 중국에서 전래된 목탑양식을 석재로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현재 6층의 탑신이 남아 있으나 일부가 붕괴되어 시멘트로 보수한 상태이며 원래는 7층 또는 9층이었다는 설이 있다. 낮고 작은 기단 위에 건립되었으며 각 층의 탑신은 각 면이 3칸으로 되어 있다. 1층 탑신은 네 귀퉁이에 배흘림이 분명한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탱주를 새겼으며 각 면의 중앙에는 내부로 통하는 문이 1개씩 설치되어 있다.
내부 중앙에는 십자(十字)로 교차되는 점에 탑을 지탱하는 석조의 찰주가 세워져 있다. 각 층의 옥개는 얇고 넓은 편으로 중앙에서 직선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끝부분에서 약간 위로 올라간 모습이며 옥개석은 3단받침으로 되어 있다. 2층 탑신은 1층에 비해 높이가 현저하게 낮아졌으며 옥개부분도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되어 전반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준다. 이 석탑은 〈삼국유사〉에 보이는 기록이나 석탑의 양식적 특징으로 볼 때 백제 말기인 무왕대에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석재들 야외 전시장...]
미륵사지 출토 석조물(石造物) - 이 곳에 전시된 석조물(石造物)들은 1980년부터 1996년 까지 17년간 미륵사지 발굴조사에서 수습된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것이다. 전시된 석조물은 22종류 60여 점으로 동원 9층석탑 부재(東院 九層石塔 部材), 석등 부재(石登 部材), 당간 부재(撞竿 部材), 건물 기단 석(基壇石), 맷돌, 다양한 형태의 건물 초석(礎石) 등이다. 이중에 정말 멋진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도 있고 또는 그냥 버려진 돌같은 것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하니 정이 가는 마음에 한번더 자세히 보게 되는 돌 들이다.
[끝없이 늘어선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석재들 야외 전시장...]
[미륵사지 당간 지주와 우측 복원된 동탑...]
미륵사지당간지주(彌勒寺址幢竿支柱)는 1963년 1월 보물 236호로 지정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당간 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미륵사터의 남쪽에는 2기의 지주가 약 90m의 간격을 두고 서 있는데, 크기와 양식, 조성수법이 같아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지주를 받치는 기단부(基壇部)는 완전히 파괴되어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이며,
약간만이 드러나서 그 원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지주는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마주 보는 면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다. 바깥쪽 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띠를 돌린 후, 그 중앙에 한 줄의 띠를 새겨두었다. 당간을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키기 위해 지주의 안쪽 면에 3개의 구멍을 각각 뚫어놓았는데, 맨 위의 것만 직사각형 모양이고 나머지는 둥글다. 고 문화재청에서 알려준다. 당간지주의 높이는 약 4m 정도 이다.
[미륵사지 당간지주...]
[미륵사지 우측 연못...]
[미륵사지 좌측연못...]
[복원될 서탑의 돌들을 전시해 놓고 ...]
[멋지게 복원된 동탑의 장엄함...]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
미륵사지의 복원중인 서탑의 반대편에 복원을 마친 9층동탑이 자리하고 있다. 동원 9층석탑(東院 九層石塔)은1974년 동원 탑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기단의 규모와 형태 및 출토유물로 보아 동원 탑지에 서탑과 같은 백제시대의 석탑이 있었음을 알 게 되었다. 그 탑에 1991년부터 석탑으 복원을 시작하여 1992년 에 완공하였다. 복원에 따른 고증자료는 서탑과 동원 동탑 기단부 및 1980년 이후 동탑지 주변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노반석을 비롯한 탑 석제가 활용되었다. 복원된 탑은 하층기단이 1변,12.5m, 상층기단이 10.5m인 2중 기단으로 되어있다.
9층으로 지면어세 상륜부 까지 총 높이는 27.8m이며, 탑의 내부는 1층 탑신에 +자형 통로가 있고 2층 부터는 공간이 없이 막혀 있다. 옥개석과 상륜부에 달린 풍탁은 동탑지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금동풍탁을 복제한 것이다. 탑 복원에는 익산 황등에서 캐낸 화강암, 총 2,000 여 개 2,700여톤이 사용되었으며 백제시대 석탑 기단석과 탑신석 35개가 포함되어 있다. 고 한다. 현 시대의 석수장이와 백제시대 석수장이들의 작품이 합작을 한 셈이 되는 동탑은 아무래도 내가 보기에는 낯설기만 하다.
[미륵사지 동탑의 끝은 어디에...]
[탑 처마에 달린 금동풍탁(金銅風鐸)...]
풍탁(風鐸이라 함은 건물의 처마에 매달아 소리를 나게 하는 장엄구(莊嚴具)로 풍경(風磬) 또는 풍령(風鈴)이라고도 한다. 이 풍탁은 삼국시대 유일의 백제 풍탁으로 통일신라시기에 제작된 경주 감은사지 출토 청동소종등 우리나라 범종 형태의 원류로 보는데 부분적으로 중국 용죵의 형식을 띄우면서 동시에 신라종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종은 아니고 내부에 혀가 부착되었던 흔적으로 보아 탑의 지부에 달았던 풍탁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어 복제하여 달아놓았다. 원형은 현재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으며 전체 크기를 보면, 높이는 14cm, 구경은 8.5cm, 전후 폭은 4.5cm로 되어있다.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 내부에 들어가 보면...]
[미륵사지 9층 동탑의 아름다운 선...]
[미륵사지 동금당지...]
[뒤로 미륵사지 강당지가 넓게 자리하고...]
[금당지 끝 멋진 나무가...]
[미륵사지 석등 하대석...]
[석등하대석 뒤로 중금당지와 멀리 강당지가...]
[금당지 안내문과 뒤로는 강당지가...]
미륵사의 금당은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삼금당(三金堂)이다. 동, 서, 중, 삼금당을 그 세워진 위치에 따라 동금당, 서금당, 중금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는 동원금당, 서원금당 이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각 금당지에는 남북과 중앙에 돌계단이 있고, 같은 양식의 이중 기단과 높은 초석이 있다. 초석은 한 면 이 105cm 정도의 정방형 초반석 위에 각 변의 중앙에 위의 긴 초석의 모서리가 위치하도록 하여 초석을 누르는 건물의 전체적인 무게를 8곳으로 분산시켜 받도록 하였다. 각 초 정면에는 초석의 움직임을 막고,
그 위에 마루를 깔기 위한 나무 보가 놓여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홈이 파여 있다. 삼금당은 모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칸수는 같지만 각 칸의 너비에 따른 기단의 전체적인 크기는 중금당의 것이 동서 금당의 2배정도 이다. 삼금당 중 동금당이 제일 먼저 소실 되었다, 동금당지에 서는 금동제 장식과 납유리가 출토되었다. 서금당 지에 서는 토제 나발(螺髮)과 연우(延祐) 4년, 1317)글자가 있는 기와가 나왔다. 이것과 같은 시대의 암수 막새가 많았다. 이로써 볼 때 서금당 지에서는 고려말까지 건축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사지 서금당지...]
[미륵사지 서탑 복원 작업장...]
[미륵사지 서탑 복원 작업장...]
[미륵사지 서탑 복원 작업장안의 해체된 서탑...]
[미륵사지 서탑 복원 작업장안 서탑 해체 장업중...]
[미륵사지 서탑 복원 작업장안 서탑 해체 장업중...]
[미륵사지 서탑 복원 작업장...]
[미륵사지 서탑 복원 작업장안의 뒤퉁이에 서있는 석조물...]
[미륵사지 서탑 복원 작업장안의 뒤퉁이에 서있는 석조물...]
[서탑중 해체하고 있는 블록 부분...]
[이쪽은 복원중이라 탑모습이 조금...]
[건물 같이 외곽을 막은 이 안에 복원중인 서탑이...]
미륵사지 서탑은 돌로 만든 석탑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다른 석탑과 달리 이 탑은 탑이라기 보다는 목조건물로 보인다. 기둥돌이 그렇고 지붕도 그렇다. 목조 건축물의 특징 하나 하나를 돌로 정교하게 깍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백제는 초기에 목조 탑이 크게 유행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인들이 만들어 놓은 일본의 목조 탑을 보면 얼마나 정교하고 잘 만들었는지 그 기술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인들의 목조탑 만드는 기술이 얼마나 정교하고 뛰어났으면 신라가 황룡사 9층탑을 세울 때 백제 기술자를 초빙했겠는가? 그 정교한 백제의 목조탑을 나무가 아닌 돌로 재현해 놓은 것이 바로 미륵사지 석탑이다.
그래서 목조탑의 특징을 지닌 석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베흘림기법이 분명한 기둥돌과 지붕을 받치고 있는 도리, 장혀, 평방과 창방 등이 너무 정교하게 잘 표현되어 있다. 1층 이후는 건물의 규모나 안정감을 위해 대폭 축소시켜 놓았다. 사면으로 나있는 1층 문사이를 보면 가운데 상당히 굵은 직사각형 돌로 중심축인 찰주를 세워놓았다. 그리고 사방에는 그 탑의 수호신인 것으로 보이는 다 닳아 형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석상이 있는데 하나는 없어지고 세 개가 남아있다. 우리 아이들은 한눈에 자신있게 원숭이라고 하던데 난 지금도 모르겠다.
라고 신승훈의 신한국기행이 자세히 서술해 놓았다.
[주차장엔 미륵사지 않내판이 멋지게 그려져 있고...]
[어찌 저리되도록 방치를 했는지 하는 생각이...]
해체 복원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작업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어렵게 생겼다. 물론 위의 그림과 같이 없어진 돌은 동탑 모양 다시 새돌로 끼어 맞추기를 하면 되겠지만 누구의 아이디어로 그렇게 해놓았는지 부서진 부분을 맞지도 않는 돌을 시멘트로 쌓아 놓은 것이 정말 한심하기 그지 없다. 차라리 쇠로 받쳐 놓던가 아니면 다른 돌을 고여서 부서지지 않게 만들면 될 것을 시멘트를 써서 아주 못쓰게 만든 그사람이 정말 미울 정도이다. 물론 문화재를 아끼는 사람들의 작품이겠지만 지금도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다.
이때만 해도 서동요 보다는 무왕을 중심으로 생각해서 이곳에 저수지를 메우고 사찰을 만들었다는데 여러 가지 학설이 많아 하여튼 미지의 속에서 더욱 빛나는 미륵사지가 아닐 수 없다. 지난번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을 둘러보았는데 이 탑이 백제 미륵사지의 양식을 충실이 따른 탑이라 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처마가 멋지게 들린 것이 밑어 의심치 않는다. 뒤로 보이는 미륵산(용화산)을 쳐다보며 한참을 그려 보았다. 그리고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남겨둔 채 서울로 가기 위해 논산을 향해 힘껐 달려본다.
[익산에서 출발후 40여분 만에 도달한 곳은 논산시 노성면...]
[공주시 계룡면에서 계룡산을 옆으로 보며 달려가는 시각은 오후 5시가 조금 넘었고...]
[오후 7시가 넘었는데도 환한 5월의 해는...]
미륵사지를 돌아본 후 논산을 경유 천안 쪽으로 그냥 국도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시간도 촉박하지 않기도 하지만 하늘도 맑아 계룡산을 보며 달리는 기분은 고속도로 보다는 국도가 더욱 좋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갑사가는 길목 저수지에 잠시 들러 저수지를 보며 휴식도 취하는 여유도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천안에서 안성까지 많이 밀리는 경부고속도로가 오늘은 그런대로 빠지는 형편에 그래도 공주에서 서울까지 두시간 정도에 주파하였다. 서울에 도착해 남부 순환로에서 신호에 걸려 예술의 전당 포스터를 보고 있는 시각은 7시가 조금 넘어서 인데 해가 길어져서 이시각까지도 해가 중천이었다. 이제 사당을 지나 금방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