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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간 조선의 선비들
김경숙 . 이순
조선통신사는 조선 후기 17세기~19세기 초 까지 일본에 파견되었던 문화사절단을 뜻한다. 1607~1811년 모두 12번의 사행이 있었다. 참여 인원은 각 사행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해도 대략 470 명 가량이었다. 기간은 평균 1년 정도 걸렸다.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사행길에 올라 1년 가까이 동거동락하며 외국을 경험했다.
고려시대에는 후기로 갈수록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일본을 '왜구'로 인식하며 문화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일본에 대해 그다지 우려하지 않았으며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일본 사회와 정치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외교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일본에 대한 이런 무관심과 무지 때문에 임진왜란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후 조선 정부는 도쿠가와 바쿠후의 요청을 받아들여 1607년 사행을 파견했다. 이 후 일본에 파견된 사행을 "조선통신사"라고 하게 된것이다.
조선에서 사행을 파견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평화를 위해서였다. 또 한편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피로인들을 쇄환하기 위한 것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일본 으로 끌려갔다.
한편 일본이 조선에 사행을 요청한 일시적인 이유는 새로 건립한 바쿠루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조선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본은 또 조선이 군비를 확장하는 것이 일본을 침략하기 위한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그래서 바쿠후가 적극적으로 조선통신사를 요청했던 것이다.
조선은 일본을 원수의 나라로 증오하고 적대시 했다. '오랑캐 나라'라서 멸시해 왔다. 사대부들은 되도록 삼사에 뽑히지 않을 방법을 모색했다. 사행을 가는 것은 고생길일 뿐이라는 인식이 지배적 이었다.
조선에서 신분적으로 열세에 있던 서열이나 중인들은 '우물안 개구리'의 우울한 삶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자 했다.
1636년 사행에서는 '도덕적 교화'와 '문화적 교양'을 목표로 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조선통신사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을 통해 임진왜란 보다 더 한 고통과 치욕을 우리민족에게 안겨주었다.
조선통신사는 한양에서 출발해 부산에 도착한 후 사행선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바닷길을 항해 일본 쓰시마 ㅡ 아카마가세키.지금의 시노모세키) ㅡ 교토(경도. 사행록에는 '서경') ㅡ 나고야 ㅡ 에도 (지금의 도쿄)에 이르렀다.
여기서 국서를 전달하는 전명식을 거행하고 여정을 다시 되짚어 귀국했다. 부산에서 에도까지 왕복만 해도 9~11개월이 걸리는 고달픈 여정이었다.
470여명의 사행원들이 오랑캐 나라로 목숨을 건 험난한 여행을 한다는 것은 두려움과 함께, 낮선 이국에 대한 알수없는 기대와 설램을 안은채 부산을 출발하는 배에 올랐다.
조선통신사에는 공식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 외에도 문화교류를 위해 문사를 비롯한 음악, 미술, 잡기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다양한 지역의 인물들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문화를 전파하면서 동시에 일본의 문화를 흡수하는 문화 사절단의 역활을 수행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교린외교 회복, 포로쇄환 문제, 두나라 사이의 외교적 심리를 위한 신경전, 조선과 일본의 조선관, 쓰시마 문제, 왜관문제등이 중요하게 연구되었다.
사행은 일기 형식으로 서술되었는데, 대의적 측면 뿐만 아니라, 사행원들의 공식적 행사와 사적인 행사, 그리고 자잘한 일상에 대한 기록까지 아주 자세하다. 하루 세끼 식사를 했는데 아침과 저녁 식사는참소에서 했지만 점심은 행진을 하다가 잠시 멈춰서 했다.
1장은 조선 통신사의 일상 생활과 조선 통신사의 문화교류다. / 2장은 통신사들의 생일과 명절 쇠기(설, 한식, 단오, 추석,
동지) / 3장 상사와 문사의 작시 행사와 자운시(그들의 시문 창화 :사행원들이 홀로 있을 때 시를 짓는 경우)
문화교류는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루어진다. 조선 통신사에게 일본 여성은' 美의 대상' 이며 '삶의 영위자'로 인식되었다.
부산에서 배편으로 출발한 조선 통신사의 여정은 크게 해로, 강로, 육로로 나뉜다.
해로는 부산 ㅡ 쓰시마 ㅡ 오사카의 시리나시가와 어귀 까지 3.190리다.
조선 배인 사행선에서 머물렀고, 일본의 관소에서 묵기도 했다. 사행선은 여섯 척으로 구성되다./ 기선: 사신이 타는 배) /
복선: 사신의 짐을 싯는 배)
정사의 기선ㅡ 정선, 상선, 상기선, 일기선 부사의 기선 ㅡ부선 또는 부기선 종사관의 기선 ㅡ 종선 또는 삼기선
정사의 복선ㅡ 정복선, 상복선, 일복선 부사의 복선 ㅡ 부복선, 이복선 종사관의 복선 ㅡ 복선= 삼복선
조선 통신사가 부산에서 타고 간 조선의 사행선은 판옥선으로 16세기 개발된 우리나라의 배로 2층은 상갑판을 만든 뒤 다락도 있있고 1층은 널판으로 되어있다.
조선 후기의 배들 ㅡ 전선, 방선, 병선 을 판옥선이라 한다.
통신사 부사 서기인 원중거는 파도를 네 종류로 구분했다.
풍도: 바람이 몰아치는 파도,
우도: 비가 몰아치는 파도
한도: 추위와 함께 밀어치는 파도
누도 : 비바람은 이미 그쳤으나 파도는 그치지 않은 파도
일본 본토로 간 사행은 열 한차례의 기간으로 10년(1607~1763) 걸렸고 가장 짧은 경우 7년 (1617~1624),/ 가장 긴 경우 29년 (1719~1748)이고 마지막 사행은 12회이자 마지막인 1811년 이었다.
사행록에는 ( 관소: 통신 사행 전체가 묵는 숙소, 사관 : 삼사가 , 처소: 그외의 사행원들이 묵는 숙소)가 있었고, 사행록에 기록된 명절은 제석, 설, 대보름, 삼짇날, 초파일, 단오, 칠석, 추석, 중양절, 동지이다)이다. (17세기 후반 ~18세기 후반)
제석은 1655~1719년은 12월 29일 1763년은 12월 30일 이었고 삼짓날은 한 달의 첫 사흘로 봄에는 삼짓날 3월3일, 가을에는 중앙절, 단오 날은 집에 등불을 달고 짐승과 새 혹은 사람의 모양에 기괴한 모습, 백중에는 묘에다 등불을 켰다.
일본인은 이 날을 제일 좋은 명절로 여겼다. 지진과 폭풍이 잦은 섬나라의 특별한 기후와 환경탓이다.
한.일 두 나라의 서적 교류는 왜관과 서신 왕래로 이루어지다. 부산 초량의 왜관에 살면서 무역에 종사하던 일본인과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조선통신사등에 의해서 이다.
18세기의 사행은 1711년 (신묘) 임수관의 동사일기
1719년 (기해) 신유한의 해유록, 남옥의 일관기, 원중거의 승사록, 성대중의 일본록
1748년 (무진) 조명채의 봉사일본시문견록
1763년 (계미) 조엄의 행사일기 등 현존하는 사행록을 중심으로 일본의 서적 교류를 고찰했다.
조선 서적이 일본에서 유통된 사실은 사행록을 통해 확인된다. 1711년 사행 당시 부사 임수간의 동사일기에 일본인이 읽은 것으로 기록된 조선의 서적은 신숙주(1417~1475)의 <해동 제국기>다.
신숙주가 1471년 일본에 다녀온 자신의 견문을 바탕으로 문헌을 참고해 해동 제국의 조빙(朝聘), 왕래(往來), 관곡(館穀), 예접(禮接)에 대해서 구례(舊例)를 찬술한 책이다.
해동제국이란 일본과 류쿠를 말하는데, 일본은 본토와 구슈, 쓰시마, 이키노시마로 구분된다. <일본국기>, <유구국기>, <조빙운접기>로 구성된 이 책은 해동제국총도, 일본본국도, 일본국대마도도, 유구국도등 여섯장의 지도를 담고 있다.
사행의 예절과 범례를 참고하기 위해 조선의 기록을 근거로 들어 자신들의 주장에 힘을 삳고자 한 것이다.
또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1542~1607)이 1604년경에 저술한 임진왜란 기록인 징비록의 초간은 1633년 서애집을 낼때 아들 유진에 의해 수록했고, 1695년 교토의 대화옥에서 중간되었으니,조선에서 간행된 후 일본에서 중간되기 까지 50년도 되지 않았다.
1647~1695년에는 1655년과 1682년 두차례 통신사행이 있었고, 일본인의 조선왕래도 많았으니, <징비록>은 이런 경로를 통헤 일본에 유출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간행본과는 달리 조선의 군(郡), 주(州), 부(府), 현(懸)의 이름과 수가 자세히 적힌 도표가 있다. 조선 서적을 가져다 자체적으로 정보를 보태 간행한 것이다.
두나라 사이에 비밀을 기록한 것이 많은 글인데 '적을 정탐한 것을 적에게 고한 것이니" 조선으로서는 누설되어서는 안 되는 민감한 사항이지만 일본 쪽에서 보자면 외교를 위해 어떻게든 수집하고자 한 정보였다.
신유한에 의하면 <퇴계집>이 일본인에게 숭상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명현의 문집 중 일본인이 높이고 숭상하는 것이 <퇴계집>만한 것이 없어 집집마다 외우고 모든 선비가 필담으로 물음에 반드시 <퇴계집>을 첫 번째로 삼았다는 것이다.
1748년 사행록중 종사관 조명채에 <봉사일본시문견록)에는 그전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서적이 등장한다. 어숙권의 고사촬요, 여지승람, 병학지남, 김지남(1654~?),의 통문관지, 김부식(1075~1151)의 삼국사기, 서거정(1420~1488)의 동국통감,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등 새로운 서적이 나타난다.
<봉사일본시문견록> 5월 24일의 기록에 의하면 후지와라 아키토(1697~1761)가 조명채와 필담하면서 <삼국사기>, <동국통감>, <용재총화>, <<고사촬요> 를 읽었다고 했다.
1525년에 간행된 <용재총화.는 고려~15세기까지의 민속, 문화, 역사, 지리, 음악 등을 다루고 잇어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느데 큰 도움이 된다. <고사촬요>와 같은 맥락의 도서이다.
,삼국사기>는 다 알가시피 신라, 고구려, 백제 세 나라의 역사서이며, <동국통감>은 1485년 서거정등이 신라 초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한 책이다. 일본인들의 관심이 우리나라 고대사에까지 확산된 것이다.
조선의 서적들이 일본에 유입되어 <해사록>, <징비록>, <간양록>등이 오사카에서 출간된 점에 대해 "적을 정탐한 것을 적에게 고한 것"이라며 안타까워 했는데 신유한은 국가의 기강이 엄하지 못해 역관들의 밀무역이 이와 같았으니 한심한 일"이라고 서적이 유출된 원인으로 역관들의 밀무역을 지목했다.
조명채도 당시 <병학지남>, <통문관지>가 유입된것에 대해 훈별(訓別:동래부에서 일본인과 관련된 업무를 보던 하급 역관)
이 통신사행에 차출되어 통역의 임무를 맡았다.
왜관은 조선 초에는 한양과 부산포, 염포, 제포등에 있다가 1510년 이후 제포로 한정되었고, 다시 부산포로 옮겨졌으나 임진왜란으로 폐지되었다. 그후 쓰시마의 요청에 의해 1678년 부산의 초량에 세워졌다.
조선통신사 사행원들은 공적.사적으로 서적을 가지고 갔다. 사행원의 수는 대체로 470명 정도였는데, 가져간 물품이 다양했고, 서적도 중요한 품목이었다. 1763년년 사행의 정사 조엄은 <해형총재>를 가져가 요점을 추리고 분류해 사행에 도움이 되고자 했다.
다른 사행원들도 개인적으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시집이나 직접 추려만든 사선집을 가져갔으며, 언문소설을 읽으며 타향에서의 외로움을 달래기도 했다.
일본으로의 사행은 조선인의 일본에 대한 시각을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통신사행이 일본의 출판문화를 접하게 된 일차적인 문헌은 통신사행의 창화집 이었다.
제술관과 서기등의 문사가 일본 각지에서 일본의 유생이나 문인과 나눈 시문창화의 기록이 창화집으로 묶여 일본에서 간행되고 조선으로 유입되었다. 짧은 기긴에 간행되엇다는 점이 조선인을 놀라게 했다.
18세기 사행 기록 가운데 우리나라로 유입된 일본서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748년과 1763년의 사행록과 관련적들이다. 일본 서적은 두종류로 하나는 공적인 서적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문집과 저서다.
공적인 저서로는<고금문인간행록.,<연대기>, <무인병술>,<화한삼재도회>,<지세론>, <격조선론>, <무감>, <원세조정토사기>등이 있는데, 일본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다이부쓰지 옆에는 일본군이 임진왜란 때 조선 사람의 귀와 코를 베어놔 묻은 귀무덤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이곳에서 통신사행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 때문에 늘 마찰이 생겼다. 1719년을 끝으로 이곳에서의 연회는 사라졌다.
한.일 서적 교류에는 두 나라 사이만큼 상이함이 존재했다. 조선은 서적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금했다. 이는 조선의 기밀 혹은 정보, 나아가 일본에 대한 인식이 일본에 전해지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서적 교류, 혹은 매매는 대체로 밀무역이라는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밀무역에도 제한이 따랐고, 그래서 일본은 조선 서적을 구하려고 더욱 애를 썼다.
조선 서적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찬성하는 입장은 1763년에 가서야 확인된다. 원중거를 중심으로 한 문사들의 시각으로 일본을 보는 조선 지식인들의 시각이 개방적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무엇보다도 조선의 일본 관련 서적이 유입되어 간행, 유통되었다. 이는 조선이 자신들의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에서 촉발된 것이다.
좀 더 깊이 들여다 보면 임진왜간을 겪은 뒤 조선이 일본에 복수하고자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저들의 위기의식 때문이다. 이 위기 위식은 1760년대에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었다.
다음에 조선에 학문에 관심이 있었다.일본이 조선의 서적을 구하기 위해 간파쿠까지 나섰던 것과는 달리 , 조선 지식인에게는 일본 서적에 대한 갈망이 별로 없었다. 사행록에 꾸준히 등장하는 서적은 중국 책이다.
일본은 일찍이 네델란드에 개항해 나가사키를 통한 무역이 활발했는데, 중국 서적 또한 나가사키를 통해 활발히 구매했다.
원중거는 기무라 겐카도(1736~18020가 중국 난징의 서적을 나가사키를 통해 많이샀고, 그의 집에는 서적이 3만권이나 있다고 했다. 서적의 매매와 유통이 활발하니 장서가도 많아지고 자연히 서적에 대한 수요가 증가 하면서 출판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행록에 일본 서적이 다수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748년 사행부터다. 일본이 통신사를 대하는 자세가 오만하게 변하고 일공(日供)등이 허술해진것은 1748년 사행부터다.
조선 지식인들이 일본을 단지 오랑캐로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일본의 정치, 사상, 문화 전반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한 시기에 일본은 반대로 조선에 대한 태도를 바꾼 것이다.
서로에 대한 태도 혹은 인식이 변화 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조선의 경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간 반면 일본은 부정적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조선이 타국의 실체에 관심을 갖고 주체성을 이해하고자 한, 즉 열린 시각을 지니게 된 점만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 바탕에 조선통신사와 그들을 서적 교류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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