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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학의 명예와 멍에
오 탁 번
밥숟갈에 떨어진 눈물방울
충북 제천 백운이 고향인데 내가 제천이나 충주에서 중학을 다니지 않고 강원도 원주로 진학한 것을 두고 요즘 사람들 중에는 내가 부잣집 아들이라서 큰 도시로 유학을 한 줄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백운면은 충주 제천의 경계에 자리잡은 곳으로 북쪽 백운산 너머는 바로 강원도 원주 땅이다. 원주 신림면 흥업면 귀래면이 제천의 백운면과 붙어있다.
6.25 사변이 나자 인민군들이 진주했지만 총소리 한 번 나지 않았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 다시 국군이 수복할 무렵 후퇴하는 인민군과 전투가 일어나서 방공호에 들어가 숨기도 했다. 겨울에 다시 국군이 후퇴하는 바람에 우리 집도 충주-문경-상주까지 엄동설한에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듬해 봄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 동네는 모조리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된 것이었다. 미군들이 무슨 군용비행장을 닦는다고 집과 전답을 모조리 불태우고 갈아엎어버린 것이다. 중공군이 후퇴하면서 전선이 북쪽으로 옮겨가자 그대로 방치해버린 것이었다. 우리 집뿐만이 아니라 온 동네가 모두 기아걸식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것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유엔에서 원조해준 쌀로 흰죽을 쑤어 주는 학교에 부지런히 나갔다. 공부하러 다니는 게 아니라 죽을 얻어먹으러 다닌 셈이었다. 찐 우유와 흑설탕도 배급으로 받아왔고 어른들은 산나물을 뜯어서 죽을 쑤었다. 아침 먹고 오는 학생은 한 학년에 두 명도 안 되었다. 언제나 아침밥을 굶고 학교에 가서 멀건 흰죽을 한 그릇 얻어먹는 게 고작이었다.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아홉살짜리 나는 저녁이면 어머니가 끓여주는 산나물죽을 먹었다. 산나물 냄새가 독해서 내가 보채면서 잘 먹지 않으면 위의 형들이 자기들 죽그릇에서 쌀이나 보리밥 건데기를 한 숟가락씩 떠서 내 죽그릇에 넣어주곤 했다.
절대절명의 궁핍이었다. 전염병이 돌면 아이들이 맥없이 쓰러졌다.
3학년 때 충주사범을 갓 졸업한 권영희 선생님이 새로 부임하여 우리 학년 담임을 맡았다. 우리 동네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하면서 교편생활을 하던 권선생님이 어느날 하교길에서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탁번아. 내 동생되지 않을래?”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사변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오빠 하나뿐인 권선생님은 평소에도 우리집에 자주 와서 우리 어머니를 잘 따랐고 온 식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는 사이었다. 그 후 권영희 선생님은 우리 집의 큰딸이 되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고 집에 오면 ‘누나’가 된 것이었다. 점심시간 도시락을 먹을 때면 다른 아이들은 짠지에 콩자반을 해서 먹었지만 누나는 나에게 삶은 달걀도 몰래 건네주곤 하였다.
내가 6학년 때 조중흡 교장선생님이 새로 부임해 오셨다. 콧수염을 살짝 기른 무서운 선생님이었는데 방과 후에 문예반 지도를 직접 하셨다. 학년마다 우등생을 뽑아서 교장 선생님이 직접 글짓기 지도를 하신 것이었다. 어느 날 내가 쓴 글을 칭찬하시더니 월요일 전교생 조례시간에는 나를 칭찬하시면서 무슨 상장까지 주셨다. 기억을 되살려 보면, 교장선생님이 칭찬해주신 그때 내가 쓴 글은 아주 짤막한 것이었는데, “바람이 옥수수 잎을 어루만지며 지나갑니다”라는 글귀였다. 그분은, 내가 커서 알게 되었는데, 「낙동강」을 쓴 작가 포석 조명희의 조카되는 분으로 문학에 뜻을 둔 선생님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시골학교에서 교장의 신분으로 문예반을 만들어 학생들은 직접 지도까지 하시는 열정을 보이셨던 것이었다.
6학년 1학기에 권영희 누나가 결혼을 하게 되어 사표를 내게 되었다. 누나의 오빠가 원주에서 살고 있었는데 육군 경리부에 근무하는 장기복무자였다. 누이동생과 함께 충주사범을 졸업하고 입대하여 결혼도 한 군인이었다.
6학년 2학기 어느 날 원주에 가 있던 권영희 누나가 우리 집에 왔다. 어머니에게 나의 중학교 진학문제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그저 농사짓다가 나이 들면 군대에 가는 거였지 우리 집 형편으로는 충주나 제천 읍내로 진학을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부잣집 아들 한두 명이 진학을 하면 그게 다였다. 나도 중학교에 보내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
“원주중학으로 보내세요. 오빠네 집에서 다니면 돼요. 입학금도 오빠가 내준댔어요”
누나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중학교 진학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몰랐지만 누나의 말을 듣는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 어머니는 물론 우리 집 식구들도 다 놀랐다.
당시에도 우수학생 무시험진학제도가 있어서 나는 원주중학교에 무시험으로 합격이 되었다. 시골 학교이기는 해도 6년간 내리 1등을 하고 도지사상까지 받았으니 무시험으로 합격이 된 것이었다. 입학식날 금빛 <中>이라는 모표가 붙은 모자를 쓰고 등교할 때 나는 하늘로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날 중학교 모자를 쓰고 입학식 날 등굣길에 서있는 <나>가 그 순간부터 내가 생각하지도 못할 운명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까머리 어린 나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농사짓고 지개 지고 나무하는 <나>가 되는 게 내 인생의 궤도였을텐데 권영희 누나로 인하여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입학식이 끝나고 반 편성 시험을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원주는 규모가 큰 군인도시였으므로 원주 중학교는 한 학년이 여섯 반이나 되었고 일반 전형은 몇 대 일의 경쟁을 치루고 합격이 되었다.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나는 5반에 편성이 되었다. 아, 이젠 반장을 하지 않아서 좋겠다. 초등학교 내내 반장을 하느라고 장난도 치지 못하고 지냈는데 이제 원주에는 아는 친구들이 아무도 없으니 맘껏 놀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임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더니 한마디 했다.
“오탁번! 네가 임시반장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360명 중에서 내가 5등을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중학교 3년 동안 또 반장을 하게 되었다. 백운초등학교 같은 시골 학교를 나온 학생은 아무리 1등 짜리라도 읍내로 진학하면 반에서 5등하기도 바빴는데 전교에서 5등이라니! 우리 집은 물론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에서도 모두 놀랐다. 특히 어머니는 당신의 믿음이 증명되었다는 듯 숙연한 표정까지 짓는 것이었다. 세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4남1녀의 막내로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란 나는 어머니의 유일한 꿈이었는지도 몰랐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 일류 학교를 수석으로 입학 졸업하고 일류 대학을 수석으로 합격하는 천재나 이름난 수재의 경력이 있는 사람한테는 우습게 들리겠지만, 백운초등학교를 나온 시골뜨기가 대도시 원주중학교에 5등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내 고향에서는 잊혀지지 않는 토픽이 되었던 것이다.
1학년을 마치고 나는 2학년 2반이 되었다. 1년간의 평균석차가 360분의 2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 옆에 방 하나를 얻어서 어머님이 나를 건사해주었다. 삯바느질을 하시고 치악산 발치까지 가서 땔나무를 해서 머리에 이고 오시면서 어머니는 오직 막내를 공부시키기 위하여 온 정성을 기울이셨다. 앞에서 말한 권영희 누나의 오빠가 철원으로 부대이동을 가는 바람에 나는 졸지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할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수업료는 면제 받았지만 먹고 잠잘 데가 없어져버렸으니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가 없으니까 어머니가 내 바로 위의 친누나를 데리고 아예 원주로 와서 어렵사리 방을 얻어 나를 뒷바라지해주었던 것이다. 그때 내 나이가 열여섯이었다. 결혼해서 춘천에서 신접살림을 차린 영희누나는 나보다 열 살 위 겨우 스물여섯이었고 오빠인 영철 형님은 서른 살도 채 안 된 청년이었다. 이런 청년들이 무슨 장학사업을 할 리도 없고 불우이웃을 도울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그냥 情 때문에 앞뒤 재지 않고 나를 중학교에 꼭 진학시켜야한다면서 원주중학교를 입학시켜 주었던 것이다. 몇년전 오탁번시전집 출판기념회에 권영희 누나 내외를 초대하여 참석자들에게 소개한 일이 있다. 나의 시 중에 「영희누나」라는 시도 있지만, 그날 일흔 한 살 된 ‘영희누나’는 그 어느 천사보다도 더 아름다워 보였다.
그런데 요즘, 특히 내가 스물아홉 살에 대학의 전임이 된 이래 35년 동안 대학교수로 근무하는 것을 보고는 뭣도 모르는 이들은 내가 부잣집 아들이어서 일찍이 중학교 공부도 대도시인 원주로 유학을 간 줄 아는 사람이 많으니 참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중학교를 다닐 때 나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 영어와 수학 참고서를 하나 사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참고서 하나 사보지 못하고 졸업하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 학원이라는 청소년 잡지에 내 글이 처음 실렸다. 맨 처음 실린 글은 산문이었는데 문학적인 것이 아니고 기억이 아리송하지만, 무슨 <청소년과 과학>이었지 싶다. 자신감이 생긴 나는 학원에다가 시를 써서 보내기 시작했다. 보내면 매번 평과 함께 실렸다. 초등학교 때의 조중흡 교장 선생님과 학원이 나의 문학적 소양을 일찍 눈여겨본 셈인데 오늘의 ‘시인/작가’ 또는 ‘교수/문인’이라는 묘하게도 피차 배타적인 이중적 신분이 이때부터 싹이 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 정도로 공부깨나 하는 친구들은 다들 서울의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오셔서 뒷바라지해주던 나의 생활은 우리 집이 풍지박산이 되는 바람에 그나마도 여의치 않게 되어 나는 원주고등학교에 무슨 꼭 찌꺼기같이 입학하고 나서는 아예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같은 반 친구 김세호 집에서 밥을 한 학기 얻어먹다가 3학년 때는 또 같은 학년의 집에서 입주 가정교사를 하게 되었다.
3학년 2학기 어느날, 입주 가정교사로 있는 친구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밥숟갈에 갑자기 물방울이 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그 물방울이 다름 아닌 내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3이었지만 나는 나의 처지를 비관하고 막 나가는 사춘기 학생이었고 이미 술과 담배도 다 배운, 학교에 나가면 마지못해 모범생 반장 행세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조폭과도 같은 不良끼로 무장된 상황이었다. 밥숟가락에 눈물방울이 떨어진 것을 본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대로 학교를 더 다니다가는 아예 미쳐버리든가 원주역전 깡패들과 어울려 놀다가 교도소 단골이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3학년 2학기를 반쯤이나 다녔을까. 나는 학교를 그만 두었다. 졸업장은 우편으로 받았다. 그때 선생님들이 왜 나를 中退로 처리하지 않고 졸업을 시켜준 것일까.
虛數의 운명
한 해를 놀면서 온갖 나쁜 짓을 하면서 지내다가 나는 엉뚱하게도 고려대학에 입학원서를 내게 되었다. 이때의 이야기는 이미 여기저기서 한 적이 있으니까, 건너뛰어서 입학시험 볼 때의 이야기를 하겠다. 35년 전에 진학이라는 학생잡지에 낸 글 중에서 내가 봐도 절묘한 콩트 같은 삽화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 삽화에 등장하는 운명의 주인공은 바로 나다.
1960년대 초반 내가 대학 입시 수험생이었을 때도 추위는 지독했다. 나는 그때 서울에 무슨무슨 대학이 있는지도 모르는 시골 학생이어서 별달리 입시 공부를 할 생각도 않고 그냥 막연히 입학 원서를 냈었다. 석탄연기를 내뿜는 야간열차를 타고 처음 서울에 내렸을 때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전차를 타고 가다가 또 걷고 하면서 간신히 K대학을 찾아 예비소집 장소에 도착하니까 벌써 다 끝난 후였다.
이튿날이 시험이었다. 둘째시간이 끝나고 나는 시험장 밖에서 피워놓은 모닥불로 가서 언 손을 녹이고 있었다. 워낙 날씨가 추워서 그랬겠지만 사람들이 어디서 나무토막을 주워다가 모닥불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모닥불에 손을 쪼이면서 불이 잘 붙도록 나무를 얼기설기 쌓아 놓았다.
“아니, 자네 시험 치는 학생 아닌가?”
한참 신나게 모닥불을 지피고 있을 때 어느 아저씨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가슴에 붙인 수험표를 부끄럽게 의식하면서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그 당시 나의 가슴속에는 비현실적이고 엉뚱한 생각만이 가득 차 있어서 대학에 진학하는 녀석들을 속물로 비웃어 주는 마음이 많았다. 그래서 나 스스로 수험표를 붙이고 입시를 치르는 꼴이 공연히 부끄럽고 민망하다는 생각이 있었으므로 모르는 사람 앞에서 내가 수험생으로 낙인찍히는 것이 기분 나쁘기도 했다.
“이 녀석아. 셋째 시간 시작한 지가 20분이 넘었어.”
그 아저씨는 손목시계를 내보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모닥불 옆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킥킥 웃으며 또는 혀를 끌끌 차며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모닥불을 쪼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피하지만 할 수 없었다. 나는 뒤통수를 긁으며 얼른 시험장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야?”
내가 허겁지겁 시험장으로 들어서자 감독 선생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우물우물했다. 수험생들이 나를 흘낏 쳐다보며 비웃었다. 그때는 예비고사도 없었기 때문에 경쟁비율이 보통 10:1을 넘었다. 그 시험장에서는 60명 정도의 수험생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므로 그 가운데서 대여섯 명만이 합격할 정도였다.
“나갓!”
답안지에 날인을 하던 감독 선생은 나를 돌아보며 외쳤다. 그 순간 두 번째 줄 중간에 내 자리가 텅 비어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왜 늦었나?”
교탁 앞 의자에 앉아 있던 다른 감독 선생이 물었다. 날인을 하는 젊은 선생보다는 인자한 목소리였다. 백발의 노교수였다.
“모닥불을 피우다가 늦었습니다.”
“흐흐…….”
노교수의 웃음소리는 묘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는 뜻일까. 나는 되돌아서서 밖으로 나오려 했다.
“자리에 가 앉아.”
“선생님, 규정상 퇴장시켜야 합니다. 25분이나 늦었어요.”
젊은 감독이 말하자 노교수는 빙그레 웃으며 어서 자리에 가 앉아 시험을 보라는 시늉을 내게 했다. 그러면서 젊은 감독에게 말했다.
“그냥 둬. 결시가 되면 괜히 성가시다고.”
이렇게 돼서 나는 수학시험을 치를 수가 있었다.
그냥 백지 답안을 내려고 하다가 나는 3번 문제에 눈이 갔다. 그때는 시험지는 학생이 가지고 가고 답안지만 제출하게 돼 있었다. 3번 문제는 허수 문제였다. i가 나오는 문제는 늘 해답이 간단해서 0 또는 1, -1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문제는 굉장히 복잡하고 길지만 해답은 간단한 게 허수 문제의 특징이다. 나는 무턱대고 3번 답안에다가 <-1>이라고 썼다. 이튿날 조간신문에 난 모범 답안을 보니 이게 바로 그대로 들어맞았다.
허수의 개념이 뭔지 다 까먹어서 이제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나와 있다.
허수(虛數) □명 「수」 복소수 중에서 실수가 아닌 것. 제곱하여 음수가 되는 수를 가리킴. ↔실수. ▷복소수.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복소수, 음수, 실수 항목을 다 찾아봐도 더 아리송할 뿐이다. 나는 작은 글을 쓸 때도 꼭 사전을 많이 찾아보는 편인데 이 사전이란 것이 어떤 때는 정말 웃길 때가 있다. A라는 말의 뜻을 찾아보면 B의 반대어라는 표가 나온다. 그래서 B를 찾아면 또 A의 반대어라는 표가 나온다. 그러니까 A의 반대어가 B이고 B의 반대어가 A라는 물리적인 뜻(?)은 훤히 알아도 정작 A와 B의 참뜻은 오리무중이다. 虛數라는 말을 소재로 이야기를 하는 마당이니까 독자들에게 그 말의 뜻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싶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나중에 알아보니, 내가 수학시험 볼 때 나를 내쫒으려고 한 젊은 감독은 그 당시 박물관 직원인 윤세영 선생이고 나를 구원해준 백발의 노교수는 국문과 구자균 교수였다. 평민문학을 연구한 우리나라 국문학계의 개척자의 한 분인 구자균 교수는 약주를 너무 즐기시다가 정년도 못 맞고 일찍 돌아가셨고 윤선생은 그후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를 하다가 몇 년 전 정년을 했다. 그 당시에는 科落 제도가 있어서 한 과목의 점수가 영점을 받으면 불합격시키게 되어 있었다.
내 인생의 멍에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지만 왕년에 공부깨나 하던 놈이 생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대학에 다닌다는 게 정말 창피하였다. 영문과를 택한 것도 국문과나 불문과보다 커트라인이 높아서 였지 무슨 놈의 영국문학을 공부한다는 생각 같은 것은 추호도 없었다. K대학도 대학이랍시고 입학한 학생들과는 다르게 뭔지도 모를 아직 형성도 되지 않은 음모를 혼자 꿈꾸면서 외로운 1학년을 보냈다. 그해 겨울에 신춘문예에 시를 응모했는데 최종심에서 떨어졌다. 당선작품을 보니까 내 시보다 좋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2학년 봄에 대학신문사에서 연락이 오기를, 견습기자는 이미 다 뽑았지만 문화면 담당기자가 그만 두게 되어 나를 특채로 뽑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남들보다 뒤늦게 대학신문 견습기자가 되었다.
원고지에 기사를 쓰면 당장 그날로 활자화가 되는 신문 제작과정이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나는 기자 생활에서 비로소 대학생활의 활력을 찾았다. 문화부장을 거쳐 3학년 2학기에는 편집국장이 되었다. 강의시간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오로지 무슨 대단한 언론인이나 된 듯 대학신문의 리더가 되어 대학내의 문학활동을 주도하면서 한일협정 반대투쟁 데모를 하면서 캠퍼스를 누비고 다녔다. 신문사에서 학생기자에게 등록금 액수만한 장학금을 주었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면서, 아무런 확신은 없었지만, 어느 날엔가는 나의 문학적 천성이 인정받으리라는 막연한 예감 속에서 질풍노도의 대학생활을 이어갔다.
2학년 2학기 초겨울이었다. 각 신문사 신춘문예에 시를 응모하였다. 내 시에 대한 자부심이 워낙 대단해서 동일인이면 여러 편을 당선시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신문사마다 응모자의 이름을 다르게 했다. 신춘문예 당선은 받아놓은 밥상이라고 스스로 믿었다. 마침 동료 학생기자가 동화도 한번 응모하지 그러느냐고 생뚱맞은 소리를 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얼마전 신문에 실을 학생작품이 마땅하지가 않아서 내가 편집실 책상에서 부랴부랴 가명으로 짤막한 콩트 하나를 써서 주간 교수 모르게 싣고 원고료를 타서 친구들과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그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것을 동화체의 문장으로 바꾸어 동아일보에 응모하였다.
적어도 서너군데 신문사 신춘문예 시부문을 석권할 수 있다고 믿은 나의 시는 예심에도 못 들고 나가떨어졌다. 그런데 뒤늦게 우연찮게 응모한 동화 「철이와 아버지」가 당선된 것이었다. 그 당시 K대 재학생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놀랠 만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3학년이 되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소설 습작에 매달렸다. 또 신춘문예 철이 돌아왔다. 소설을 다섯 편인가 써서 각 신문사마다 응모하였다. 나의 시를 이 시대가 알아주지 않으니까 아예 소설 쪽으로 나의 운명을 걸었던 것이다.
소설을 다 응모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대로 시를 포기한다는 게 서운했다. 소년시절부터 <시인>이 되기를 갈망하면서 생애의 벼랑을 기어오지 않았던가. 그래, 시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런 심정으로 시 세 편을 써서 창간된 지 1년밖에 안 된 중앙일보에 응모하였다. 결과는? 소설은 다 떨어지고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응모한 시가 당선됐다. 이렇게 하여 1967년 1월, 나의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가 설경을 찍은 사진과 함께 중앙일보 한 면을 장식하게 되었다.
영문과 3학년 학생이 신춘문예에 연달아 당선되었고 또 대학신문의 날리는 편집국장이니까 이 정도면 그냥저냥 쉽게 대학생활을 해나가도 좋으련만 나는 소설 쪽으로 나를 더 세차게 밀어붙였다. 밥숟가락에 떨어지던 눈물방울이 나를 더 처절하게 사회의 부조리와 맞서라고 부추켰는지도 몰랐다. 가난한 소년이 배고파서 울고 돈이 없어서 참고서 한 권 못 사면서 겪었던 분노와 좌절을 표현하려면 나약한 시는 적당한 장르가 못 된다고 느꼈다. 내가 가진 무기는 오직 소설이었다.
그해 나는 열 편도 넘는 소설을 써서 신춘문예에 응모하고 당선소식을 기다렸다. 당선되는 것은 뻔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러나 결과는 모조리 낙선이었다.
1968년 2월 대학을 졸업하자 올데갈데도 없는 무소속 낭인이 된 기분이었다. 이 세상을 폭파해버리고 싶은 적대감을 키우면서 죽기살기로 술을 마시고 순진한 여자들에게 공수표를 남발하면서 다니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진학! 국문과는 공부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니까 전공을 바꾸기로 했다. 그러나 무슨 돈으로? 돌파구는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상금을 듬뿍 타는 것 밖에는 없었다. 잠시 어느 신문사에 낙하산으로 취직되어 다니다가 집어치우고 원고지와 만년필 하나를 들고 영등포 구석 단칸방으로 두 달 동안 잠적하였다.
소설 세 편을 완성하여 원고지에 정서를 하고 조선일보 한국일보 대한일보에 각각 다른 이름으로 응모하였다. 먹는 것도 재대로 못 먹고 술만 마시면서 과로를 한 탓에 응모작을 접수시키고 광화문 네거리로 걸어나왔는데 하늘과 땅이 샛노랗게 보이는 것이었다. 곧 쓰러질 듯한 현기증을 간신히 이겨내고 무교동 낙지골목으로 친구를 불러내어 술을 진탕 마시고 정신을 잃었다.
1969년 1월 나의 소설 「처형의 땅」이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었고 나머지 두 편도 최종심에서 당선이 유력했는데 이미 전날 심사가 끝난 대한일보의 당선자와 글씨체나 원고지로 보아 동일인물이라고 어느 심사위원이 말하는 바람에 아깝게 밀려났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후일담으로 들었다. 그해 1월 한국일보에서 발행하던 유력 주간지 주간한국에 <신춘문예 3종3연패>라는 제목으로 인터뷰 기사가 크게 실렸다. 나는 졸지에 전국 규모의 유명인사가 돼버린 셈이었다. 기아선상에서 헤매던 소년이 자라서 이룩한 이 찬란한 명예! 나는 비로소 세상에 대한 원한과 복수의 감정이 어느 정도 풀렸다.
그때 상금이 13만원이었는데 요즘 돈으로는 한 천만 원쯤 됐는지도 모른다. 여기저기에서 빌려 쓴 돈을 갚고 국문학 책을 사서 벼락치기로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여 합격하고 나머지로 대학원 입학금을 냈다.
삼사십 대에는 소설을 많이 썼다. 그러나 내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특히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평론가들은 늘 이렇게 말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아무렴, 오 아무개는 재주 좋으니까’. 코피를 흘려가며 밤새워 쓴 소설이 한낱 재주 있는 사람의 솜씨자랑으로 밖에는 대접을 못 받는다는 생각이 나를 주눅들게 하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이야 오만잡것들이 교수입네 하는 세상이 됐지만, 나는 정식으로 석박사과정을 밟은, 35년이 넘은 정통 교수이고 보니 누가 내 문학의 진정성을 허심탄회하게 인정할 수 있었겠는가. 미움뿐이었을 것이다. 신춘문예에 세 번이나 당선 된 놈의 이름은 잠결에서도 듣기가 싫었을 것이다.
대학에서 강의하랴 논문 쓰랴 하면서 소설을 쓴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이러다가는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시는 마음의 평화를 주지만 소설은 암세포와도 같고 나의 생명과 재산을 노리는 자살폭탄조 같은 놈이다.
사십 대를 넘기며 젊은 시절 소홀히 했던 시창작을 다시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낸 일곱 권의 시집과 여덟 권의 창작집을 보면 공연히 눈물이 난다. 가난하게 살아오면서도 어쩌자고 이렇게 어린 아이와도 같은 고운 심성이 고스란히 남아있단 말인가.
이제 나는 알겠다. 신춘문예에 세 부문이 당선되고 일류대학에서 30년 넘게 교수를 한 나에게 그 찬란했던 명예는 더 이상 명예가 아니라 좀체 벗을 수 없는 ‘멍에’가 돼버린 것을 이제 알겠다.
나는 지금까지 문단의 놀음에는 낀 적이 없으며 내 작품에 대한 평이나 기사를 잘 내달라고 누구한테 눈웃음 판 적이 없다. 이름을 가리고 작품을 써도 제대로 평가되는 진정한 문학의 시대, 그런 익명의 시대가 온다면 나는 당장 교수직을 내던지고 전업작가 전업시인의 길로 나서겠다고 흰소리를 쳤던 젊은 날이 어제 같다. 일락서산, 이제 정년을 했으니 그야말로 전업작가의 길을 쉬엄쉬엄 걸어가야겠다.
뒷짐 지고 노을지는 서녘 들판을 거닐며, 그 옛날 밥숟가락에 문득 떨어지던 눈물방울을 그리워한다.
오탁번(吳鐸藩)
출생 : 충북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 169번지
학력 : 백운초등학교/ 원주중․고등학교/ 고려대 영문과, 대학원 국문과
등단 :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1967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69 대한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수상 : 한국문학작가상(1987), 동서문학상(1994), 정지용문학상(1997), 한국시협상(2003)
시집 : 겨울강 1미터의 사랑 벙어리장갑 손님 [사랑하고 싶은 날]등
소설집 : 처형의땅 저녁연기 순은의 아침 등
현재 : 충북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 198번지 <원서문학관>
서울 성동구 도선동 22-1 다남매타워 1303호 계간시지 <시안>
고려대 명예교수. 한국시인협회장 역임
010-5473-1305 e메일: ohtakb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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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1학년 오탁번 생각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
나하고 놀자
-국민학교 1학년 국어시간
어미개 때려 잡아서
가마솥에 삶아 먹는
어른들
-국민학교 1학년 하교 길
제 어미가 죽은 줄도 모르는
바둑이가
몽당연필 따라
마분지 공책 위에서
깡종깡종 나하고 논다
-국민학교 1학년 국어숙제
어른들은
개고기 먹고 술에 취해
쿨쿨 잔다
-국어숙제 끝
배꼽시계
불알시계는
하루에 10분 씩 빨리 가고
아빠의 손목시계는
하루에 5분 씩 늦게 간다
밥 때 되면
종을 치는
내 시계가 최고다
내가 커서
레스토랑을 차리면
간판을 이렇게 달겠다
‘배꼽시계’
짝젖
엄마 젖은
짝젖
내가 한쪽 젖만
자꾸 빨고 만지는 바람에
짝짝이가 됐다고
엄마는 눈을 흘긴다
-나중에 커서 돈 벌면
엄마 젖 성형수술시켜 줘야돼!
누나 젖은
양쪽이 봉긋하니 똑 같다
나하고 띠동갑
우리 누나는
엄마가 바쁠 때면
날 데리고 목욕탕에 간다
내 손이 살짝
누나 가슴에 닿으면
-나도 짝짝이 만들거야?
누나도 괜히 눈을 흘긴다
그 옛날의 사랑
지붕 위에 널린 빨간 고추의 매운 뺨에
가을 햇살 실고추처럼 간지럽고
애벌레로 길고 긴 세월을 땅 속에 살다가
羽化되어 하늘을 날으는 쓰르라미의
짧은 생애를 끝내는 울음이
두레박에 넘치는 우물물만큼 맑을 때
그 옛날의 사랑이여
우리들이 소곤댔던 정다운 이야기는
추석 송편이 솔잎 내음 속에 익는 해거름
장지문에 창호지 새로 바르면서
따다가 붙인 코스모스 꽃잎처럼
그때의 빛깔과 향기로 남아 있는가
물동이 이고 눈썹 훔치면서 걸어오던
누나의 발자욱도
배추흰나비 날아오르던
잘 자란 배추밭의 곧바른 밭이랑도
그 자리에 그냥 있는가
방물장수가 풀어놓던
빨간 털실과 오디빛 참빗도
어머니가 퍼주던 보리쌀 한 되만큼 소복하게
다들 그 자리에 잘 있는가
툇마루에 엎드려
몽당연필에 침발라가며 쓴
단기 4287년 가을 어느 날의 일기도
마분지 공책에
깨알처럼 그냥 그대로 있는가
그 옛날의 사랑이여
연애
자가운전하는 예쁜 여자가
내가 달리는 차선으로
얌체같이 끼어들기하고는
차창 밖으로 흔드는 하얀 손을 보면
무 베어먹듯 그냥 한 입 물고 싶다
눈 마주치면 눈흘레나 하고 싶다
뒤에서 들이받을 생각 아예 말고
살가운 접촉사고나 내고 싶다
―지금쯤 고향의 억새밭 물녘에서는
무지개도 뛰어넘을 만한 힘센 황소가
녈비에 황금빛 털이 간지럽겠다
밤길에 잽싸게 끼어들기하고는
점멸등 깜박이며 달아나는 차를 보면
반딧불이가 반딧반딧 짝을 찾는 것 같다
나도 한 마리 반딧불이가 되어
하늬바람에 공중제비하고 싶다
홰친홰친하는 낚싯대 펴고
동동거리는 형광찌 불빛따라
얄미운 붕어 한 마리 잡고 싶다
―지금쯤 고향 집 지붕에는
하양 박꽃이 환하게 피어
은하수까지 다 물들이겠다
佛頭花
바람결에 자늑자늑 흔들리는
곱슬머리 백발을 한 부처님들이
단체사진 찍고 계신다
부처님들이 떼를 지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애련리 원서헌으로
遠足을 오셨나?
하나 둘 셋, 김치!
가지가 척척 휘도록
부처님들의 곱슬곱슬한 머리통은
참 예쁘게도 크기는 크다
점심공양 알리는 雲版이 울면
모란꽃 산목련 이팝꽃
자밤자밤 골고루 넣은
점심공양 맛있게 잡수신다
黃砂 날리는 날
눈썹도 예쁜 나비보살들이
佛頭花 송이송이
수련이 벙그는 원서헌 연못물로
머리를 감겨드리면
부처님 큰 머리통에
연못물이 하냥 넘쳐서
실크로드 건너
天竺의 雪山도 다 적시겠다
忍冬
어린 冬柏나무 한 그루가
힘겹게 겨울을 견디고 있다
南道 시인이 뜻밖에 가져온
첫돌 된 내 손녀 키만 한 冬柏나무를
麻袋로 칭칭 밑동을 싸주고
왕겨를 두텁게 깔아주었다
앙당그리고 서 있는
冬柏나무는
1.4 후퇴 피란길에
찰가난한 어머니가
무명 포대기에 싸서 업고 가던
눈깔이 화등잔만 한
연약한 내 어린 몸 같았다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천등산 박달재의 강추위 속에서
小雪 大雪 小寒 大寒
사나운 눈보라에 마주서서
호젓이 겨울을 견디는
안쓰러운 冬柏나무는
1.4 후퇴 피란 갔던 尙州 땅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겨우겨우 숨을 이어가던
손님이 든 어린 나 같았다
소소리바람 아직 차가운
立春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冬柏나무 보러 나갔다가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눈에 띌락말락 좁쌀만 하던
冬柏나무 꽃봉오리가
어느새 강낭콩만큼 자라서
길둥근 冬柏잎 사이로
거먕빛 볼을 반짝 쳐들고 있다
목숨 부지한 冬柏나무여
호되고 하전한 生涯를 견디는 것이
이토록 찬란하다
遮日
새벽에 오줌이 마려워서 잠이 깼다
어?
웬 일이지?
아직 동도 트지 않았는데
웬 遮日을 다 치시나?
어제는 혈당 검사 받느라고
피도 꽤 뽑았는데
무슨 기운이 남아서
아닌 꼭두새벽에
內服빛 遮日을 다 치시나?
소나기 주룩주룩 퍼붓는
대낮 길가에서도
한밤 막소주 마시는
포장마차 동글의자에서도
불끈불끈 遮日을 치던
그 옛날의 靑年이
하도 반가워서
잠든 아내
슬쩍 건드려나 볼까 했는데
나 원 참,
볼일 보고 나니
금세 쪼그랑 막불겅이가 되네
妻福
나하고 자치동갑 Y시인은
자기가 내 原妻라고 대놓고 말한다
안동 양반의 후예 아니랄까봐
本妻보다 한 끗발 높은
原妻로서의 권위가 서릿발 같다
여자가 시집가면 남편 本籍을 따르고
원래 본적은 原籍이 되어 물러나지만
原妻야말로 진짜 오리지날 와이프란다
本妻야 어쩌다가 도장 찍게 된
언제나 되물릴 수 있는
아티피셜 와이프이지만
原妻야말로
거웃이 거뭇거뭇 날 때까지
등목 시켜주던 막내 庶姑母 같은
뗄 수 없는 血緣이란다
콧대 높은 나의 原妻에게
河回 마을 아흔 아홉 칸 기와집 한 채와
도지 일백 석 받는 고래실논을
등기이전해 줘야겠네
나하고 동갑내기 S시인은
忘年會에서 만날 때마다
자기가 내 別妻라고 까놓고 말한다
밥하고 빨래하는 本妻 자리는
아예 넘보지도 않겠다는
나붓나붓한 나의 別妻는
내가 딴 여자 볼까봐 강샘도 부린다
생활비 안 준다고 생떼를 쓰면
황진이가 쓰던 常平通寶 몇 만 고리와
빳빳한 紙錢 뭉치 퀵 서비스로 보낸다
내 生涯 끝나는 날
宇宙의 어느 行星에서도
주민등록초본 하나 남기지 못하고
자동 소멸되는 운명인 줄도 모른 채
내가 土星의 고리로 만들어준
빛나는 금반지 끼고
먼 銀河水 호젓한 물녘에서
몇 劫 동안 날 홀리고 싶단다
내 別妻 자리 하나 얻으려고
새파란 띠동갑 시인들의 메시지가
와이브로 통신으로 수신되는
太初 후 46억 년 지난 어느 봄날
별처 1, 별처 2, 별처 3.....
이렇게 번호 매겨 順番을 정해
큰곰자리 작은곰자리 거문고자리에
놋요강과 자개문갑과
鶴이 우는 베개와 비단 衾枕 나붓한
별채 하나씩 뚝딱 지어줘야겠네
아아 나는 왜 이다지도 妻福이 많으냐
상처한 놈은 소피보면서 웃는다는데
몇 백 光年 후
원처 본처 별처 하나씩 눈 감으면
함박웃음 짓다가 틀니 다 빠지겠네
젠장 미운 本妻에게는
매달 쥐오줌 만큼 나오는
연금밖에는 없다 없어!
絶世美人
― 2006년 3월 21일 오후 3시
조선시대 다식판 하나 사려고
앙성면 골동품 가게에 들렀는데
늙은 주인은 어디 가고
갓 스물 된 아가씨가 손님을 맞는다
볼우물이 고운 복숭아빛 뺨과
몽실몽실한 가슴을 보며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희고 미끈한 종아리는
왜무처럼 한입 베어먹고 싶었다
다식판은 보는 둥 마는 둥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 2006년 3월 21일 오후 4시 반
천등산 손두부집에 들렀는데
삼원색 요란한 월남치마에
발목 다 보이는 나일론 양말 신은
젊은 아낙이 배시시 웃으며 인사한다
브래지어 한쪽 컵이 망가졌는지
짝짝이 가슴이 봉긋봉곳한
주근깨도 예쁜 아낙의 얼굴을 보며
식사주문도 잊은 채
정신이 휑하니 아득해졌다
― 2006년 3월 21일 오후 6시 반
늙은 느티나무가 새잎을 피우고
저녁놀이 서녘 하늘 물들일 때
내내 방망이질한 가슴 진정시키려고
솔잎술 한잔 마시며
옛 사진첩을 그냥 뒤적거렸다
내가 서른여섯 살 되던 가을
서른한 살 아내와 함께
설악산에서 찍은 사진을 보다가
나는 깜짝 놀라 술잔을 엎질렀다
골동품 가게 아가씨보다도
손두부집 젊은 아낙보다도
몇곱절 예쁜 젊은날의 아내가
방긋 웃으며 내 옆에 서 있었다
그날부터 지갑 속에
아내의 사진을 넣고 다니며
아침저녁 새새틈틈 보고 또 본다
어느날 다따가
絶世美人이 된 줄도 모르는
아내는
달팽이관이 고장 나서
메슥메슥 입덧하듯 토하고 있다
아아 아득히 흘러간 젊은 시절
아내가 아기 배고 입덧할 때
귤 하나 사다줄 생각 못했던 나를
호되게 벌주고 있다
― 2007년 1월 12일 오전 9시
새해 들어 입덧 더 심해진
絶世美人의 손을 꼭 잡고
영하 12도 눈보라 치는 날
춘천 성심병원 이비인후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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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