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는 목적은 다양하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여행에 대해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망설임에 비례한다고 할까. 여행은 분명 추상명사가 아닌데도 행복이나 자유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듯 잠시 머뭇거리게 하는 것은 여행이 주는 묘미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기준이 분명하면 행복도, 자유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듯이 여행도 떠나는 사람의 기준이 분명하면 추상명사보다 쉽게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보통명사다.
누구나 그러하듯 나도 여행을 떠나기 전 먼저 지도를 펼친다. 지도를 보면 지명이나 지형이 특이하여 관심을 끄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곳은 대개 명승지나 이름난 유적지의 유명세에 가려 사람의 발길이 뜸하기 때문에 오히려 한가하게 여행할 수 있는 잇점이 있다. 생소한 곳에서 조상의 숨결을 느끼고 그 곳의 사람을 만나는 것도 명승지에서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기쁨이다. 여행은 목적에 따라 오지나 미개발 지역을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여주에서 세종대왕릉(英陵)을 답사한 사람들이 같은 영내에 있는 효종대왕릉(寧陵)을 찾지 않는 것은 바로 여행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비근한 예다. 대부분의 왕릉은 정자각쪽에서 올려다 봤을 때 좌측에 왕이 묻히고, 우측에 왕비가 묻히는 쌍릉이거나 합장릉이다. 정비의 오른 쪽에 계비를 묻은 삼연릉(24대 헌종의 景陵)도 있고, 같은 능원이지만 무덤을 다른 언덕에 조성한 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 세조의 光陵과 문종의 顯陵)의 형식도 있다. 그런데 효종대왕릉은 다른 왕릉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다. 왕비가 앞에 묻히고 왕이 뒤에 묻힌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이다. 단순히 왕의 무덤만 보는 것이 아니라 왕릉의 묘제까지 보려는 사람은 오히려 세종대왕보다는 효종대왕을 찾는다. 여행의 목적은 이렇게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데서 오는 맛이 있다. 효종대왕릉의 한적함은 바로 세종대왕의 유명세에 가린 쓸쓸함이다.
* 무안에서 만난 사람
이번에는 여행의 목적을 달리하여 바람의 고장 무안을 찾았다. 무안에는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가 많지 않으나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맛과 멋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무안을 중심으로 지도를 한참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그림을 읽을 수 있다. 서해안과 남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이라서 여간한 눈짐작이 아니고서는 정확히 그리기 힘든 곳인데, 특히 고창군과 영광군을 지나면서 함평 무안 신안 목포 지역을 지나는 해안선은 고난도의 꺾은선 그래프를 그리듯 들쑥날쑥 제 멋대로다. 그래도 남해안은 해남과 강진만, 장흥과 보성만 고성과 순천만 여수와 광양만 남해와 진주만 사천과 고성만 통영과 진해만 등이 어떤 규칙을 지키듯 교차하면서 차례로 늘어서 있기 때문에 같은 리아스식 해안이라도 서해안보다는 순편하다. 무안의 해안선은 바다를 향해 돌진해 있기 때문에 섬인가 하면 육지이고 육지인가 하면 바다다. 그래서 이곳은 바람의 세상이다.
바다는 육지의 끝이 아니다. 뭍의 시작이다. 그래서 나는 “해남은 땅끝 마을이 아니라 육지의 시작이다.”라고 강변한다. 땅 이름을 짓는데도 뱃사람보다는 뭍사람의 입김이 셌던 모양이다. 바다를 기준으로 했으면 바다가 안고 있는 육지는 땅끝이 아니라 땅의 시작이어야 한다. 무안은 그렇게 시작과 끝이 혼재한 곳이다. 더구나 산은 산이 아니라 언덕이다. 무안의 제일봉 승달산은 고작 해발 318m이고 나머지는 200m 정도다.
바다를 향해 내달리던 호남정맥의 산자락이 숨고르며 가슴을 열어준 땅이 무안이다. 주민들은 땅을 부쳐 힘만 쓰면(務) 편안히(安) 먹고 살 수 있도록 후히 인심을 쓴 땅이기에 이름도 務安이다. 바람의 땅 무안. 그 곳은 바다를 둘러싼 언덕이요, 언덕 같은 제방에 갇힌 바다다. 멀리서 보면 육지에 갇힌 바다는 바다가 아닌 호수다. 그래서 아무리 바람이 사나워도 파도는 잔잔하다. 아니 파도가 바람을 잠재우는 서해의 지중해(地中海)다. 그러나 바다는 바람이 있어야 바다답다. 바다에 몸을 담고 사는 사람은 바람에 단련되고 바람과 더불어 살아야 제 맛이다. 일년 열 두달을 바람만 맞고 살면서도 인간 본연의 순수한 심성을 잃지 않는 무안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들을 단련시키는 바람은 어떤 바람인지 정체가 궁금하다. 그래서 먼저 무안의 어른을 찾아뵈었다.
깡마른
볏짚 한 잎
꿀꺽 삼키고
머언 하늘
커다란 눈망울
구울리다
음매애-
앞 뒤뜰 논 갈아
멍에자리 혹이 터도
선하게
선하게
꼬리치는……
큰 눈엔
저녁놀이 탄다
----「소」전문
서오근 시인의 시다. 이 시에 등장하는 「소」는 무안 사람을 대변한다. 마른 볏짚 한 잎밖에 먹을 수 없는 현실이지만 불평 대신 허허롭게 먼 하늘 바라보는 여유는 찬 물 먹고도 이 쑤시는 선비의 여유다. 주어진 삶을 살면서 멍에자리에 피터지는 고통이 있을지라도 이를 거부하거나 비관하는 일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선하게 받아들여 두 눈에 저녁놀을 담아내는 아름답고 긍정적인 삶이다.
서오근 시인은 현직 무안 문화원장으로서 지역문화 창달을 위해 애쓰는 분이며 아동문학가로서 이미 7권의 시집을 발간한 문단의 원로이시기도 하다. 그래서 문단의 선배인 서오근 시인께 무안의 문화에 대해 자문 받고자 문화원을 찾은 것이다.
문화원장이라는 직책은 무보수 명예직인데도 그 많은 일을 처리해 내며 한참 늦은 시각까지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더운 기운이 사무실에 훈훈히 맴도는 석양녘. 나는 서오근 시인의 얼굴에서 선하디 선한 무안 사람의 표정을 읽었다. 운명처럼 어깨에 걸치고 살아야 할 멍에를 거부감 없이 감내하며 그 피곤한 시간에도 저녁놀을 두 눈에 곱게 담아 내는 서오근 시인의 「소」를 본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소처럼 순하고 근면한 무안 사람의 정체를 이해하게 되었다.
* 무안의 맛과 특산물
여행의 즐거움은 먹는 재미에도 있다. 평소 소식하는 사람도 여행을 할 때면 과식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여행의 분위기 때문에 오는 현상이다. 무안에는 다섯가지 맛이 있다. 사창 돼지 짚불고기, 명산 민물 장어, 양파 한우 고기. 무안 세발 낙지. 도리포 숭어회가 그것이다. 1박 2일로 여행하면 다섯 가지의 별미를 모두 먹을 수 있는 맛의 고장이다.
사창 짚불 돼지 고기는 숯불이나 장작으로 돼지 고기를 굽는 것이 아니라 볏짚으로 굽는다. 몽탄역 부근의 사창리에 가면 식당이 있고 명산리의 민물 장어도 몽탄면에 있다. 특히 양파 한우 고기는 무안의 특산물인 양파로 잰 한우 고기를 말하는데 육질이 부드럽고 담백하여 누구나 잘 먹는다. 무안읍내에 있는 한우고깃집은 모두 양파에 잰 한우고기를 사용한다. 세발 낙지야 두 말할 필요가 없고 도리포 숭어회는 일출보다는 일몰을 보고 출출할 때에 먹으면 제 격이다.
무안은 양파의 고장이다. 우리나라 양파의 24% 생산하는데 그 맛이 달큼하고 생으로 먹어도 맵지 않다. 양파를 이용하여 만든 음료수는 무안에서만 맛볼 수 있고 장아찌를 담아 반찬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고구마도 밤고구마라서 퍼슬퍼슬하여 맛이 있고 마늘의 품질도 좋다. 농산물들의 품질이 좋은 것은 토질도 토질이려니와 바람과 햇살이 조화를 이루어 온도가 고르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해 볼 뿐이다.
* 풍력발전연구소
그래서 무안은 겨울에 가보는 것이 더 인상적이다. 거친 바람에도 들녘은 항상 푸르다. 그 바람 때문에 무안은 키가 큰 농산물을 재배하지 않는다. 땅바닥에 바싹 엎드려 바람에 살아있음을 확인하며 땅의 자양분을 채취할 수 있는 강인한 생명들만 골라 재배한다. 그래서 양파와 마늘은 무안의 특산물이 되었다. 무안에서 겨울 바람이 세다고 깡마른 들녘을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언제나 진록의 들, 검푸른 바다가 어울린 상록의 겨울이다. 거기에 망운면에 가면 풍력 발전 연구소가 있어 이국적 풍치를 구경할 수 있다. 바람개비의 하나의 날개만 하도 길이가 20m가 넘는 대형 발전 시설이 6기가 있어 하늘을 올려다 보는 답사객을 압도한다. 지금은 3기가 부서지고 3기만 우두커니 서서 빈 하늘을 지키고 있는데 주민의 얘기에 의하면 무안 비행장 때문에 시설을 가동을 중지했다는 설명이다.
* 무안의 인물
전술한 바와 같이 여행은 목적에 따라 행선지가 달라진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질펀하게 즐기는 여행을 많이 했다. 술 많이 마시고 노래방에서 실컷 노래하고 숙소에서 날 새도록 고스톱을 치고는 잘 놀았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문화에 식상한 의식 있는 사람들이 시끌시끌한 유원지보다는 가족끼리 조용한 곳을 찾는다.
필자는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것은 여행이라기보다 현장 답사라 해야 옳겠지만 혼자서 다니는 어려움을 대신할 장점이 더 많기 때문이다. 다니고 싶은 대로 다니고 조사하고 싶은 대로 조사하여 눈도장을 찍어두는 것이 아주 유익했다. 가족과 같이 고향 부모님께 다녀 올 때도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여러 국도를 번갈아 가며 주변의 유적지를 찾아다니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 어쩌다 동료들과 같이 역사 속의 인물을 찾아 비석을 보거나 무덤을 찾으면 자기 아버지 묘에 성묘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여행이 어디 재미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가. 역사의 현장에서 先代를 살았던 선각자의 숨결을 느껴 보는 것은 나를 되돌아 보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한다.
무안 사람들이 제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초의선사를 만났다. 초의선사는 불교계의 큰스님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즐겨 마시는 차를 우리 생활의 주변에 가까이 접근시켜 준 차문화의 중흥조로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그의 영정을 보면 어느 스님의 영정보다 세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고, 지적인 시선과 뚜렷한 윤곽에 비만하지 않은 용모는 선에 심취한 불자에 그치지 않고 유학과 도학, 시(詩) 서(書) 화(畵)의 예술에도 정진한 학자와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항상 깨어 있는 선각자의 모습. 그것은 초의선사의 영정이 뿜어내는 마력인데 나는 그 마력을 나는 차(茶)에서 찾는다. 차에는 카페인이 있어 정신을 맑게 하는 기능이 있고 조급하지 않게 명상에 잠겨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초의선사는 무안 삼향면 왕산리에서 우리나라 문예 부흥기라는 1786년(정조10년)에 태어났다. 성은 장씨요 법명은 의순이다. 어린 시절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면서 그의 삶이 기록에 나타난다. 누구나 평범한 가운데서 인생의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생사를 가름하는 어떤 획기적인 사건에 의해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거나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초의선사도 그랬다. 그가 5세 때 마을 주변의 개울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다는 기록을 보면 그도 생사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애를 썼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결국 15세 때 나주 운흥사로 출가하여 불자의 길을 걸으며 19세에는 영암 월출산에서 바다로부터 떠오르는 달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 해남 대둔사(대흥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수행정진하여 명성을 얻는데 그 명성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수행에 지장을 느낀 선사는 41세에 대둔사 일지암으로 은거, 80세의 수명을 다 할 때까지 차와 선은 하나라는 茶禪一味의 독특한 경지를 정립하였다.
차 마시는 일을 도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한 선사의 행적을 차의 경전 茶神傳이나 東茶頌의 편찬에서만 찾는다면 그것은 선사의 한 쪽만 보는 우를 범한 일이다. 다신전은 선사가 45세 때 한강변에 기거하고 있는 스승 정약용을 찾았을 때 중국의 백과전서 萬寶全書 중에서 茶經採要를 초록한 것인데(원전은 명나라 張源이 쓴 茶錄) 일종의 차 생활의 지침서다. 그 내용은 찻잎의 채취에서부터 차의 식별법, 차의 보관, 물 끓이는 법, 차 마시는 법 등에 이르기까지 22개 항목을 자세히 서술해 놓았다. 특히 앞에 소개한 찻잎 채취 부분은 차에 대한 기본 상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기에 소개한다.
(찻잎을 따는데는 그 시기가 가장 중요한데, 그 시기가 너무 이르면 찻잎의 향이 온전히 배어 있지 못하고, 절기가 너무 늦으면 차의 신비한 향이 사라진다. 곡우(穀雨) 전 5일에 따는 것이 차의 품질이 가장 좋고, 곡우 후 5일에 따는 것이 버금가는 것이며 그 재 5일 후에 따는 것이 그 다음이다.)
여기서 곡우라 함은 24절기 중 6번째 절기로 4월 20일이나 21일을 말한다. 곡우가 되면 봄비가 내려 온갖 곡식의 결실을 좋게 하는데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나 말라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옛날 벼농사는 그 시기에 못자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곡우는 그만큼 우리 생활에 중요한 시기다. 차도 그 시기에 채취하여 곡우 전후를 기점으로 차의 이름과 그 효능을 구분하였다.
차에 대한 명칭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역시 곡우를 전후로 한 명칭을 보면다음과 같다. * 다 성 사 ( 茶 聖 祀)
곡우 전에 채취한 것은 곡우(穀雨) 전(前)이라 하며 雨前, 우전 다음에 채취한 어린 잎은 세작(細雀), 中雀은 大雀과 細雀의 중간 시기에 채취한 것을 말한다. 사실 대작은 품질도 떨어지고 인건비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생산하지 않는다. 지역에 따라 곡우 전에 채취할 수 없는 곳이 많기 때문에 4월 중순부터 5월 초순까지 채엽하는 것을 첫물차, 6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두물차, 8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세물차, 10월 초순부터 중순까지를 네물차로 구분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우전(雨前)과 세작(細雀)을 마시고 일반 대중은 값이 저렴하여 대중화된 중작을 마신다. 여기 명칭에 사용한 雀은 참새를 말하는데 어리고 여릴 때 채취한 잎은 참새의 혀와 같다 하여 작설(雀舌)이라 한다. 흔히 듣는 작설차가 바로 이것이다.
東茶頌은 초의선사가 일지암에서 차밭을 일궈 가꾸면서 우리차의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해 쓴 책이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정조의 사위인 홍현주가 茶道에 대해 물어 오자 여기에 대한 답으로 쓴 책이다. 모두 17송으로 되어 있는데 중국차에 비해 우리 차가 더 좋다는 차의 예찬이다. 동다송 제 12송의 九難四香(아홉가지 어려움과 네 가지 향기)의 註를 보면 지리산 화개동에 차나무가 4,50리에 걸쳐 있는데 우리 나라 차나무 자생지는 이보다 넓은 곳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화개사 입구에는 차 시배지 기념비가 있다.
1997년 5월 문화 공보부에서 이 달의 인물로 초의선사를 선정하자 무안군에서는 삼향면 왕산리에 그의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초의선사는 차의 성인으로 추앙받기 때문에 그의 사당도 다성사(茶聖祠)라 하였는데 그 다성사는 병풍처럼 둘러 친 봉수산 자락에 아담한 팔작지붕으로 내려 앉아 훤히 트인 속세를 내려다 보고 있다. 사당 건물인데도 초의선사가 속세를 사랑하는 모습인 양 포근하기만 라다. 경내에 추모각, 추모비, 유물 전시관, 다도관도 건립하였고 출생지에는 생가도 복원하였다.
* 무안의 명소
1. 승달산
승달산 僧達山은 무안의 상징이다. 무안을 한 눈에 품고 내려다 볼 수 있는 이 승달산은 고작 318m의 낮은 산이다. 그러나 무안 사람들은 태백 준령에서도 승달산을 자랑한다. 바로 이 고장의 기상이 살아 있고 이 산의 정기를 보고자 전국의 유명한 풍수지리가들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찍이 도선은 그 비기에서 무안을 비롯하여 순창, 장성, 태인 등 호남의 4곳에 명당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승달산은 승려가 부처님께 절하는 모습의 老僧禮佛형(또는 好僧禮佛형)의 혈자리가 있는데 그 곳에 묘를 쓰면 49대에 걸쳐 영화를, 98대에 걸쳐 香火를 받는다고 했다. 그런데 속설에 의하면 순창, 태인, 장성은 이미 혈자리에 주인이 들어갔고 승달산 혈자리만 비어 있다는 것이다.
승달산은 명칭부터 재미있다. 僧達이라 하면 스님이 도에 통달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불교적 설화나 전설이 있어야 한다. 이를 뒷받침하듯 고려 인종 때 원나라 스님 원명이 이 산에 있는 절에서 크게 교세를 떨쳤는데 그의 제자 500명이 모두 도에 통달(達道)하여 승달산이라 했다고 한다.
최창조 교수는 우리나라는 아시아대륙의 동북쪽을 향하여 서서히 움직이며 황금알을 낳은 거북이형이라고 한다. 그 알은 제주도에 해당하는데 그렇다면 전라도 무안은 황금알을 품고 있던 자궁 자리다. 이렇게 거북이가 황금알을 낳는 땅을 풍수에서는 金龜沒泥形(금구몰니형)이라 하는데 장차 개벽의 시대를 열어줄 기가 막힌 명당자리라는 것이다. 무안은 바로 그 정점에 있다. 도청 소재지를 무안으로 옮기는 일이나 무안 국제 비행장의 건설은 금구몰니형과의 연관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안이 앞으로 황금알을 낳는 지역이 될 공산이 큰 것은 사실이다.
또 무안의 승달산을 길지로 꼽는 이유로 가까이에 있는 목포의 儒達山과 영암의 仙皇山을 꼭지점으로 하여 선을 그으면 그 삼각형을 이룬다. 그 삼각형 안쪽이 무안이므로 무안과 승달산은 명당이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즉 유교의 儒達山과 불교의 僧達山, 도교의 仙皇山이 기를 합하면 유불선 3교가 모든 것을 융화하여 형통케 한다는 것이다.
그 승달산은 법천사와 목우암을 품에 안고 있어 많은 중생을 제도하고 있다. 다행히 두 곳의 입구는 같은 길에 있고, 산길의 중간쯤에서 갈라지기 때문에 답사하기에 용이하다. 더구나 절 입구까지 승용차로 오를 수 있어 편리하다. 평지나 다름없는 산길을 오르다 직각에 가깝게 왼쪽으로 꺾어지는 곳에 이르면 한 쌍의 돌장승이 길을 지키고 있다. 창녕 관룡사 입구의 돌장승과 비슷한데 오른 쪽에 있는 것이 할아버지 장승 왼 쪽에 있는 것이 할머니 장승이다. 사찰의 입구에 장승을 세우는 것은 무속과 불교의 융합에서 온 현상으로 잡귀를 막거나 신성한 곳의 영역을 표시하는 구실을 한다.
산은 높고 깊어서만 명산이 아니다. 낮은 들녘에 나지막히 솟아 있어도 우뚝 솟은 정기를 뿜어 낼 수 있는 산, 산에 기대어 사는 수많은 민초들의 애환을 어우를 수 있는 산이 명산이요, 태산이다. 그렇기에 승달산은 바로 무안의 태산이다.
2. 회산 방죽의 백련
* 회산 방죽의 수련
무안군에는 행정구역상 무안읍과 일로읍, 그리고 7개 면이 있다. 인구가 7만여 명 정도여서 군청 소재지는 아직도 읍이다. 무안읍에서 남서쪽으로 12km쯤 내려가면 무안읍에 견줄만한 도읍지가 있다. 일로읍이다. 이 곳에는 한국 제일의 흰 연꽃 자생지 회산방죽이 있다.
연꽃은 인도가 원산지로 알려져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축물이나 기와 등에서 영화문蓮花紋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훨씬 그 이전에 도입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중국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연꽃을 생활에 활용했다하니 우리나라도 중국과 때를 같이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그 신성성에 먼저 빠진다. 더구나 심청전을 통해서 불교적 윤회사상이 실현되는 장면을 수없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불자들은 환생의 소망을 빌어보기도 하는 꽃이다.
어린 시절에 할머니에게 심청전을 전해들을 때는 물론 붉은 꽃이다. 하얀 꽃은 상상한 수도 없었다. 붉은 연꽃이 통통하게 살이 오른 요조숙녀 같은 아름다움이라면 흰 연꽃은 청순하면서도 선녀 같은 이미지가 있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순결함이다. 오히려 붉은 연꽃이 더 다정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차가운 듯 하면서도 고고한 멋을 지닌 흰 꽃은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이 곳 무안의 회산 방죽은 요염한 아름다움의 세계보다는 영혼의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신비의 세계다.
10만여 평의 저수지에 하얗게 열린 꽃 세계. 그것은 현세가 아닌 극락이요 천국이다. 그 저수지 한 가운데로 난 나무다리를 걸으며 꽃을 보면 세상은 온통 신선한 아름다움이다. 속세의 티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간간이 어린 시절로 끌어가는 실잠자리, 고추잠자리, 퉁방울 같은 눈망울을 껌벅거리며 느릿느릿 울어대는 두꺼비, 수면 가까이 떠올라서 햇빛을 즐기는 가물치, 꽃 속에 묻혀 꽃봉오리를 통째로 흔들어 대는 꿀벌, 떼지어 빙빙거리는 눈금쟁이 등 그 무엇 하나 이승의 아웅대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주어진 대로 원시의 삶을 한껏 누리는 그들만의 천국이다.
회산 방죽은 일제 때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서 축조했다고 한다. 이제는 영산강 종합개발 공사가 끝나 원래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메마른 현대인의 가슴에 신선한 아름다음을 제공하는 자연 생태 학습장으로 탈바꿈했다. 이렇게 농업용수를 위한 저수지가 우리 나라 제일의 백련 자생지로 바뀌게 된 데는 고 정수동님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수동님은 한국 동란이 끝난 1955년 여름 어느 날 아이들이 발견한 12주의 연뿌리를 저수지 가장자리에 심어 정성껏 보호했다. 마침 전날 밤 꿈에 학 열 두 마리가 저수지에 내려와 앉는 것을 보았던 터라 그의 정성은 대단했다. 그 작은 노력이 오늘 날 한국 제일의 생태 공원을 만들었다.(참조:무안군 관광안내)
홍련은 한꺼번에 꽃망울을 터뜨리기 때문에 빈틈이 없는 연꽃 군락을 감상할 수 있지만 백련은 꽃피는 시기가 꽃마다 차이가 있어 홍련 같이 빽빽한 군락을 보기가 어렵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꽃 피는 시기가 비슷하면 지는 시기도 비슷하여 오래 볼 수 없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오랜 기간에 걸쳐 피는 백련은 한 달 상관으로 찾아가도 꽃 군락을 볼 수 있다.
(무안 농업기술센터 전풍진 계장은 백련은 사흘이 지나면 꽃이 시들기 시작한다고 설명한다. 첫날 피기 시작한 꽃은 그 다음 날이 가장 아름답고 사흘째부터는 시들기 시작한다고 한다.)
8월 15일을 전후하여 현지에 가보면 하얀 선녀들의 품에 폭 안길 수 있다. 무안 농업기술센터에서 관광객을 위해 저수지 주변의 700여평에 희귀한 수생식물을 심어 편리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부레옥잠, 물채송화, 물아카시아, 물양귀비, 물배추 등 수생식물의 학습장으로 제격이다. 시심에 잠기거나 자연과 물아일체의 경지를 체험하고 싶은 사람은 한 번쯤 꼭 들러볼만 한 곳이다.
무안군에서는 1997년부터 연꽃 대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제는 널리 알려져 전국에서 관광객이 많이 몰려들고 있는데 그 기간에는 사람 반 꽃 반일 정도로 붐빈다. 특히 전국의 문인을 비롯한 예술인들을 초청하여 예술적 감각을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어 감사할 뿐이다.
참고로 무안을 찾을 때는 서해고속도로의 일로 나들목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회산 저수지를 먼저 찾는 것이 가장 쉽고 편리하다. 길바닥에 “연꽃”이라는 글씨로 이정표를 새겨 놓았기 때문에 길을 놓칠 염려도 없다. 꽃 이름으로 이정표를 새긴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3. 도리포의 일출
“바다가 펄펄 끓는다는데 정말인가……?”
혼잣말처럼 내게 던진 그 한마디. 누군가가 일출이나 일몰을 보고서 어머님께 자랑했던 모양이다. 평생을 고향에서 사셨기 때문에 지평선 아래로 지는 해는 숱하게 보았고 서해에서 가까운 곳이니 바다 속으로 쏙 빠지는 해도 본 일은 있었을 터이다. 그런데 米壽를 코앞에 둔 나이에 일출을 보고 싶다면 뭔가 생각이 있어서 그러실 것이다 싶어 새벽길을 나섰다. 마침 서해안에서도 해돋이를 볼 수 있다며 당진의 왜목이 대대적으로 매스컴을 타고 있을 때였다. 목이 왜소하다커니, 왜가리 목과 같이 생겼다커니 하여 붙인 이름의 왜목. 나는 이미 다녀 온 길이어서 늦지 않도록 현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해돋이를 보는 어머님의 표정을 살폈다. 인생의 황혼녘에 해돋이를 보는 그 감상을 읽으려 정말 펄펄 끓느냐고 물었다.
“응 정말 끓는 물에 고추장 풀어놓은 것 같다”
그 말에 아내가 감탄하고 어머니 팔을 끼고서 아침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변을 거닐었던 6년 전의 일이 엊그제 일같이 생생하다. 그렇게 왜목은 서해의 해돋이가 아름답다는 것을 광고하며 관심을 끌더니 1999년 이후에는 무안의 도리포가 서해 일출의 명소로 떠올랐다.
지도를 보면 무안은 반도로 이루어졌다. 동쪽으로는 영산강이 흐르고 있어 무안반도는 어쩌면 섬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 섬 같은 육지 무안은 또 해제반도와 망운반도가 매달려 있는데 해제반도는 포구를 감싸듯 방파제처럼 바다를 향해 내달리다 멈춰 섰다. 이 해제반도의 끝에 있는 자그마한 포구. 그 곳이 바로 도리포다.
도리포 앞바다는 겨울이면 함평만의 바다에서 뜨는 해를 볼 수 있고 여름이면 영광의 산쪽에서 뜨는 해를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황혼에 칠산 바다로 지는 해가 뻘겋게 고추장을 풀어 하루를 마감하는 광경을 볼 수 있어 해 뜨는 동해와 해지는 서해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최근에 관광 명소로 각광받기 시작했지만 숙박할 곳이 없는 것이 흠이다. 이제는 교통도 편리해졌기 때문에 앞으로 밀려올 관광객을 위하여 오붓하게 쉬어 갈 수 있는 시설을 마련했으면 한다.
한 때 도리포 앞바다에서는 어부들이 그물에 그릇을 자주 건져 올렸다. 영문을 몰랐으나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당국에서 3차례에 걸쳐 수중 탐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14세기 후반에 강진에서 제작한 청자 639점을 인양하였다. 이 유물은 주로 왕실이나 관청에서 사용하는 상감청자인데 고려 후기 청자 형태나 문양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지금은 목포시 용해동에 있는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4. 원갑사
* 원갑사 무량전
이른 아침 산사는 조용했다. 산이라고 해야 납작 엎드린 어부의 등 같은 무안 땅에서 애당초 큰 사찰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인지도 모른다. 해제면 산길리. 말 그대로 산길에서 조금 비킨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담장 하나 없이 휑하니 열려 있는 절집. 고즈넉하기보다는 아직 불사가 끝나지 않아 어디부터 찾아야 할지 망설이다가 세월의 무게가 실린 무량전을 찾았다. 마침 마당에서 풀을 뽑고 있던 비구니 스님과 인사를 나누고 절의 내력을 들으며 아침을 먹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아침 공양은 했습니까?”
아직 9시가 못된 답사객의 아침은 식사 전일 수밖에 없다. 아직 못 했노라는 대답을 뒤로 하고 한참 얘기를 나누는 끝에
“부께미라도 드십시오. 밥이 없어 보살님이 찹쌀 부께미를 부쳤습니다.”
얼마만에 들어 보는 말인가. 부께미는 빈대떡이나 전병 등을 이르는 부침개의 사투리다. 전라도에 왔으니 전라도 사투리를 듣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린 시절에 듣던 말은 들으니 새로운 정감이 솟는다.
원갑사는 전라도 3갑의 하나에 속한다. 영암의 도갑사. 영광의 불갑사. 무안의 원갑사가 그것이다. 갑은 으뜸이며 시닥이란 뜻이니 원갑사도 한 시절에는 그 甲에 이르는 寺勢를 이루었으리라. 처음에는 강산사였기에 강산사 현판이 남아 있어 그 현판을 통해 역사를 읽을 수밖에 없다. 통일신라 의상의 창건했다는 전설도 사적기가 없어 허구로 들릴 뿐이고 지금은 정우 스님이 연차적으로 불사를 추진하고 있어 사찰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요사채 마루에서 정우 스님이 아쉬움에 젖어 설명하는 원갑사의 범종에 대해 알아 보았다.
원갑사가 소장하고 있던 범종이 지금은 함평 보광사에 있다. 그 연유야 사찰이 폐사되는 과정에서 관리를 위해 오고 갈 수도 있다지만 30년 이상 소유했던 물건은 옛 주인이 나타나도 현재 소유자의 몫이 된다는 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의 품에 안긴 내 자식을 바라보듯 안타까워 할 뿐이다. 강산사(원갑사의 전 명칭)에서 소장하던 범종은 강산사가 폐찰되면서 함평의 용천사로 옮겼는데 6.25때 용천사마저 불타고 버리고 범종이 방치되자 1967년에 지금의 보광사로 옮겼다고 한다.
이 범종은 1990년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종각 건립은 물론 관리에 필요한 지원을 받는다. 원갑사가 애석해 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절집에 종각이 갖추어져 문화재급 범종이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그 절에서 울려나는 불심의 품격은 그만큼 상승 효과가 있으리라는 기대와 신념 때문이다.
범종은 높이가 2.1m 윗둘레 2m. 밑둘레2.65m 직경 0.83m의 대형 종이다. 몸 하단 부분에 “정해삼월”이라는 명문이 있어 1767(영조 43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비천상 대신 보살상이 갖추어졌고, 정상부위 용뉴는 두 마리 용이 반대 방향으로 종을 들어 올리는 모양를 취해 조선 후기의 범종 연구에 좋은 자료다. 더구나 조선 후기의 범종은 1m정도로 작게 조성하는데 이 종은 대형에 속하며 그 소리도 맑고 깨끗하여 우수한 범종으로 평가받고 있다
쑥을 섞은 찹쌀 가루로 오목하게 송편처럼 만들어 설탕과 함께 내 놓은 “부께미”로 요기를 하고 다음 행선지로 향하면서 나는 정우 스님의 따뜻한 인정에 고마움을 느꼈다. 여승과는 그렇게 따뜻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백석 시인의 “여승‘이란 시가 떠올라 기억을 더듬어 외워 보았다. 그런데 왠지 정우 스님께는 어울리는 시가 아니라는 느낌에 미안하기도 했다. 첫 연밖에 떠오르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다. 남은 연을 기억해내지 못 하는 것이 오히려 예의인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아직 크게 불사를 일으킬 만큼 젊음과 정열과 확고한 의지가 보이는 스님이었기에.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백석 시 「여승」의 제 1연
5. 각설이 타령의 발상지
각설이 타령 하면 먼저 품바를 떠올린다. 품바는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변강쇠가”에 처음 나오는데 각설이 타령의 후렴구에 사용되는 장단의 일종으로 의성어다. 달리 입으로 장단을 맞추고 흥을 돋군다 하여 “입장고”라고도 했는데 그 뜻은 결국 “입으로 뀌는 방귀”라는 뜻이다. 판소리에서 관중이 박자를 넣거나 흥을 돋구어 주는 추임새와 같으나 그 깊은 의미는 다르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품바가 각설이나 거지를 이르는 말로 사용하고 있어 의미의 변화를 보인다. 봉산 탈춤에서 말뚝이가 양반들을 풍자하듯 각설이도 세상의 암적인 권력층에게 풍자하는 해학적인 놀음이다.
각설이 타령은 식민지 시대부터 1950년대까지 전국을 떠돌며 살다 간 각설이패 대장 천장근(김작은이. 김자근이라고도 함)의 일대기를 무안의 향토시인 김시라가 채록 각색하여 4000여회 이상 공연한 대표적인 향토극이다. 覺說이가 깨닫게 하는 말이라는 뜻이라면 각설이가 던지는 해학과 풍자를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되뇌어봐야 하겠다.
충북 음성군에서는 전국 품바 공연 대회를 열어 품바왕을 선발하는 등 품바 정신을 이어가는데 앞장서고 있다. 품바 정신은 거지처럼 먹을 것 없는 이들이 모여 함께 나누고 공동체 생활을 하던 유무상통(有無相通)의 나눔 정신이다. 그 품바 정신 꽃동네가 있는 음성에서 그 취지를 살려 문화 상품화하여 크게 확산시키고 있다. 각설이 타령은 무안 일로읍의 천사촌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품바 발생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무안의 근황
1. 개발 특수
지난 2~3년 동안 수도권에서 새로 조성할 신도시 문제로 시끌시끌했던 적이 있다. 판교와 김포 연천 등이 신도시를 조성하되 어떤 규모로 하느냐 등의 문제로 한참 세간의 입에 오르내린 것이다. 그런데 수도권도 아닌 한적한 지방에서 수도권 못지 않게 홍역을 치른 곳이 있다. 그 곳이 무안이다.
전라남도 의회는 93년에 도청 이전 특위를 구성하고 무안군 삼향면 일대를 후보지로 선정했다. 그 이후 98년 도청 이전 계획 수립 방침을 선언하고 99년에 도청소재지 변경 조례안이 통과되자 무안의 삼향면 남악리 일대 400여만 평에 2004년 말 입주를 목표로 도청 이전 공사를 시작했다. 이 곳은 목포시 흑암동과 영암이 인접해 있어 주변지역에 논밭뙈기 몇 평씩 가지고 있는 주민들은 개발의 혜택을 누려보려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다. .
그러다 보니 이곳 삼향면 남악리 일대는 격랑이 일기 시작했다. 남악 신도시 개발의 이익을 노리고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 그 동안 쓸모 없이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던 습지와 암반층까지도 10-20배 이상 값이 뛰어 평당 2-4만원대의 땅값이 40만원 이상을 호가한 것이다. 이제 무안은 웬만한 돈으로 땅 몇 평쯤 사려는 사람에게는 무안(無顔)을 주는 투기 과열 지구로 변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서해고속도로가 뚫리기 전의 무안을 찾는 외지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특별히 자랑할 만한 문화재나 명승지가 있어 돈 있는 사람을 불러 모을만한 입지 조건을 지닌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개발논리에 밀려 지역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서해안 시대가 열리면서 무안은 달라졌다. 예전의 무안이 아닌 것이다.
거기에 이미 망운면 피서리 일대는 99년 12월에 무안 국제 공항이 착공되어 2005년에 1차 공사를 마친다는 계획아래 공사를 공사를 활발히 진행해 왔으며 2020년까지 2차 확장 공사를 마친다는 계획도 수립해 놓았다. 무안은 그 동안 개발의 뒤안길에 밀려 있던 아쉬움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곳곳에서 개발 특수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황 때문에 무안은 우리 나라에서 단기간에 가장 땅값이 많이 오른 지역으로 기록된다. 볼모지나 다름없던 땅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해버려 그 옛날 호미로 콩밭 매던 여인들의 모습은 아예 찾아보기 어려운 그림이 되었다.
2. 님비를 핌피로 극복한 사람들
님비현상( NIMBY : not in my back yard )은 혐오시설을 내가 사는 고장에 설치할 수 없다는 지역 이기주의를 말하고, 핌피현상 ( PIMFY : please in my front kyard )은 이로운 시설을 내가 사는 고장에 설치해야 한다는 지역이기주의를 말한다.
님비나 핌비나 타 지역에 비해 내가 사는 고장의 환경이 좋아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 문제로 생존과 환경의 함수 관계를 생각하면서 심각하게 대두된 사회문제다. 한 때 태안 반도가 원전 폐기물 처리장 때문에 떠들썩하더니 서울 원지동에 추모 공원 설립 문제로 한동안 서울이 시끌했다. 요즈음엔 또 다시 부안이 다시 떠들썩 하다. 모두가 님비현상이다. 그래도 아직은 핌비현상으로 떠들썩하지는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인간의 생존에 환경이 절대적이다 보니 님비현상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사회의 문제로 비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런데 무안에서는 이상한 일로 지역간의 감정이 대리되는 현상을 보였다. 무안읍 성동리 복용마을은 쓰레기 처리장 유치에 성공하여 마을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쌓였다. 님비 현상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무안의 9개 마을이 서로 자기 고장으로 쓰레기 소각장을 유치하겠다고 경쟁을 했다. 공모에서 평가까지 주민의 힘으로 이루어 냈다 하니 어둠 속에서 빛을 보는 느낌이다. 이는 경제적 지원이 연계되어 있어 경쟁이 더욱 치열했다 한다. 아무튼 님비현상을 지혜롭게 해결한 좋은 선례를 보인 무안 사람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3. 도깨비 같은 땅
땅값이 치솟아 전국을 놀라게 했던 황금 덩어리의 땅 무안, 그러나 그 이면에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있었다. 2000년 초가을 어느 무렵에 TV와 일간지가 집중 보도한 내용은 무안 사람들을 불안의 극치로 내몰았다. 무안읍 성남리의 주택지가 어느 날 갑자기 땅이 푹 꺼져 집이 기울고 땅이 쩍쩍 갈라지는가 하면 창고의 밑바닥이 땅 속으로 가라앉아 비료와 선풍기 등 가전제품이 땅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원인도 모르는 지반 침하. 이는 한 두해의 일이 아니고 93년부터 8회에 걸쳐 나타났는데 무너진 집 지하에서 석회동굴과 같은 큰 구멍이 2개나 발견되었다.
학계에서는 작은 규모의 단층운동의 영향과 지하수 개발로 인한 석회암질의 용해가 원인일 수 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래서 군에서는 지하수 개발을 자제하고 주민들에게도 지하수를 농용수로 사용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재해위험지구로 지정하여 중앙정부 차원에서 조사 관찰을 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필자도 밤 9시에 TV 뉴스를 보며 의아해 했던 기억이 새롭다.
지 표 면
토 양 층
기 반 암 층
땅은 기반반암 위에 토양층이 있고 토양층 위에 표토가 있는데 표토와 기반암반층 사이에 있는 토양이 지하수의 영향에 의해 밀려가는 수가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이를 도시혈(盜屍穴)이라 하여 묘자리로는 좋지 않은 장소로 친다. 중간 흙에 묻힌 시체가 무덤의 제 위치에 있지 않고 토사와 함께 밀려나 엉뚱한 곳에 있기 때문에 시체를 도둑맞았다 하여 도시혈(盜屍穴)이라 한다. 이 시체는 토사와 함께 밀려가면서 엎어져 있을 수도 있고 모로 누워 있을 수도 있으며 심할 경우는 서 있을 수도 있다. 중국에서도 이런 예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풍수지리가 발복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은 아닌가 싶다.
서울 근교에서는 고종과 순조가 묻힌 남양주의 홍유릉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홍유릉 영내의 나무들은 반듯이 서 있지 못하고 비스듬히 기울어 있는 것이 이를 실증하기 때문에 도시형의 지세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지표의 변동이다. 그러나 무안의 예는 도시형보다 더 심한 경우라서 지진혈이라 해야 할지 땅꺼짐혈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학계의 조사 연구대로 작은 단층 운동의 영향이라면 이는 지진의 변형일 수도 있기 때문에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리라 본다. 또 다시 무안이 매스컴의 전면에 부상하는 일이 없기를 기대해 본다.
* 지방자치제가 되면서 각 지방단체는 관광객 유치를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그 중에 가장 바람직한 일은 훌륭한 인물의 발자취를 찾아 복원하는 일일 것이다. 무안에서 초의선사의 생가터와 기념관을 건립하여 관심 있는 사람의 발길을 끈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전라남도 장성에 홍길동의 생가터를 발굴한 일이나 남원에 흥부마을을 지정한 일 등 소설 속의 인물을 실제의 인물처럼 복원한 것도 허구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이어 주는 가교역할을 하여 흥미 있는 일이지만 실존의 선각자를 찾아 흔적을 찾을 수 있게 한 일은 훨씬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그런 일이 많을수록 답사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은 새로운 삶의 모델을 찾아 이 사회에 적용해 보려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선각자들의 삶을 통해서 이 사회를 되돌아 보고 방향도 없이 급변하는 사회의 급변하는 가치관에 제동을 걸며 사회의 바른 방향잡이가 되는데 기여할 것이다.
런던에서 150km나 떨어진 Stratford-upon-Avon 마을은 세익스피어 때문에 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계의 관광객이 많이 몰린다. 이는 그의 생가에서 그 시대의 분위기에 젖어보며 세익스피어를 느껴보려는 것이지 영국의 풍경을 구경한다거나 질펀하게 놀아보려는 것은 아니다. 세익스피어의 생가가 시사하는 바를 각 지방 자치단체는 깊이 깨달아야 하리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