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니시(varnish)
수지를 휘발성 기름 또는 건성 기름에 용해한 것으로서, 유화의 용해유, 가필용, 마무리용의 세 종류로 구별할 수가 있다. ① 용해유로는 묘화용 바니시가 있다. 주요한 목적은 그림물감 에 감칠맛을 주어 화면에 물질적인 밀도를 나타내는 것인데, 이 바니시는 그림을 그릴 때 그림물감에 섞어서 사용한다. ②가필용 바니시는 그리는 도중에 그림의 일부가 건조에 의해 휘도를 잃고 제 페이스를 잃었을 경우, 페이스를 되찾아서 그려 나가기 위해 사용한다. 비베 르 및 뒤로제의 바니시가 유명하다. ③ 마무리용 바니시는 화면의 보존을 위해 사용한다. 또 한 윤기를 지우고, 광택을 가라앉히고 싶을 경우에는 광택을 지우는 바니시가 있다. 셀로니 스는 대표적인 것이며, 마무리용 바니시는 그림을 완성한 후, 일정한 기간이 지난 다음 칠한 다.
바로크
대략 1600년부터 1750년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카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 양식을 말한다. '바로크'는 예술에 관한 문헌에서 역사적이며 비평적인 의미로 통용되는 용 어로 그 어원은 불확실하다. 바로크가 '불규칙한'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은 그 단어가 불 규칙한 진주 라는 뜻의 포르투갈어 'barroco’에서 유래했기 샔문인 듯하다. 이 말은 부르크 하르트와 뵐플린(1888)에 의해 미술사 및 비평 용어로 사용되면서 전문적인 용어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바로크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첫째, 미술사에서는 매너리즘과 로코코 사이, 즉 대략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까지의 양 식을 말한다. 둘째, 특정한 양식에 대한 관념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일정 기간 - 보통 17세기를 말한다. 따라서 '바로크 시대, 바로크 정치, 바로크 과학' 이라는 말이 있을 수 있다. 셋째, '바로크'라는 말은 지금은 거의 경멸적인 의미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으나, 아직도 예 술에 관한 문헌과 비전문적인 의미의 일상어에서 '변덕스러운', '장식이 지나친', '현란한'이 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바로크 예술은 전체에 종속되는 부분들의 조화를 통한 균형을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균형이란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상이었던 각각으로도 완벽한 부분들이 이루는 전체적인 균형 과는 다른 것이지만 매너리즘의 종종 고의적으로 조화를 깨뜨리는 점이나 로코코의 신경질 적인 단편성보다는 오히려 르네상스에서 말하는 균형과 공토오디는 점이 더 많다. 바로크가 추구하는 화합은 형식적이고 자기 만족적인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수단 을 동원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신체적인 참여를 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정신적인 참여를 하 게 하는 것이 바로크 작품의 특징이다. 바로크는 16세기 고전적 르네상스의 조화·균형·완 결성 등에 대하여 경탄과 현혹을 지향하여 양감, 광채, 동감에 호소하고 있다. 그리하여 건 축에서는 거대한 양식, 곡선의 활용, 자유롭고 유연한 접합부분 등의 특색을 나타내고 , 조 각에서는 비상하는 동적인 자태와 다양한 의복의 표현 등을 특색으로 하였다. 회화에 있어 서는 대각선적인 구도, 원근법, 단축법, 눈속임 효과의 활용 등이 전체적인 특색이다. 18세기 에 들어와서도 바로크는 로코코 양식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1580년대쯤, 16세기의 우세한 양식이었던 매너리즘은 참신한 노력을 불러일으키기에는 그 열기가 너무 식어 있었다. 그 결과 16세기 말의 새로운 두 가지 경향, 즉 구상주의에 있어 자연주의적인 것과 고전적 풍의 것이 예고되었고, 두 가지 모두 바로크의 기본 성격속에 병 합되었다. 첫째, 자연주의적 추세를 부활시킨 카라밧지오는 예술의 원천으로 추세를 부활시 킨 자연의 관찰을 강조했다. 둘째, 전성기의 르네상스 고전기와 로마 고대 풍습으로의 복귀 였다. 셋째, 필수적이며 가장 지속적인 요소로 베네치아 - 특히 티치아노의 전통이다. 이러 한 전통과 코렛지오(Correggio)의 예술에서 이탈리아 바로크의 색깔과 빛·풍요로움이 비롯 된다. 이 세 요인으로 1620년대에 바로크 양식은 루벤스와 로마 화가들에 의해 최초로, 또 놀라운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바르비종파 Ecole de Barbizon (불)
프랑스 근대 풍경화 그룹. 1830년경부터 파리 근교 퐁텐블로의 한촌 바르비종을 중심으 로 활약하였다. ' 1830년 파' 또는 '퐁텐블로 파'라고도 한다. 쥘 뒤프레, 트르와용, 테오도르 루소, 도비니, 카 미유 코로, 이외의 스페인사람 디아스가 포함된다. 그들은 종래의 아틀리에 내에서의 제작을 지양하고 직접 자연 속에 캔버스를 놓고, 풍경이나 동물의 생태를 파악하는 것을 신조로 하 였다. 대표적인 화가는 코로인데, 밀레는 나중에 친밀한 자연 묘사에서 인간으로 관심을 돌려 집 밖에서 열심히 일하는 농부나 목자를 테마로 삼았다. 또 트르와용, 샤를르-에밀 쟈크 등은 동물화의 영역에서 독특한 재능을 보였다. 바르비종 파의 화가들은 우정으로 맺어져 있었지만, 하나의 유파를 결성하거나 예술운동을 촉진시킨 것은 아니다. 자연에 대한 애정-이것은 본래 개인적인 것으로, 그들의 화풍은 각 기 달랐다. 단, 그 밑바닥에 흐르는 것은 낭만적인 릴리시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 르비종파는 훗날 독일의 보르프스베데 파의 표본이 되었다
바로크 미술
17세기초 일어난 계몽주의 사상은 존엄성을 가진 주체로서의 '인간'을 인식하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르네상스가 神 안에서의 神과 가까워짐으로 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려 했다면, 계몽주 의는 절대 권위에서 독립함으로서 인간의 자주성, 개성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개념이 바로크 미술을 형성하는 토대가 된다. 바로크 양식이 일어나는데 또 하나의 배경을 이루는 것이 후기 르네상스의 매너리즘 양식이 다. 매너리즘은 표현 양식이 극도로 형식화되어 과장되고 왜곡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이것은 성기 르네상스의 엄격한 비례와 균형, 조화 기법이 매너리즘 시기에 식상하게 된 연유도 있 고, 또한 성기 르네상스 시기의 대가들의 위대한 작품들을 그대로 모방하려는 데 재능의 한 계를 느낀 그들이 천재 작가들의 예술 세계를 그 내면까지 습득하지 못한 채, 외면상의 기 교만을 흉내내려 한 결과 기교만능주의의 모방이 된 것이다. 이러한 매너리즘에 반발하고 나선 것이 바로크 미술이다. 오랜 종교 분쟁에서 벗어난 카톨릭 교회는 다시금 옛 영광을 찾으려는 움직임으로 새롭고도 다양한 양식의 교회와 궁전을 짓게 되었고, 이 결과 로마는 바로크 양식의 중심지가 되면서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예술가, 학도들의 집합지가 되었다. 유럽 중심의 도시 로마와 국제적 연계를 맺은 국가들은 각자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바로크 예술을 화려하게 꽃피우게 된다. 특히 17세기부터 18세기초에 걸친 루이 14세의 프랑스는 정치와 문화 예술 면에서 비중 있 는 역할을 맡게 되고, 자타가 인정하는 유럽의 새로운 중심지로서 발돋움하게 된다. 이로서 바로크 양식은 유럽 가지로 뻗어 나아갈 수 있는 국제 양식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바로크 양식의 전체적 특성은 풍부한 곡선, 복잡한 구도, 명암의 강한 대비 등이다. 바로크 (Baroque)라는 용어는 원래 '일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는 포루투갈어에서 나온 것으 로, '기 이한, 변태적인'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말은 건축양식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장식 문양에서 기인한 것으로, 18세기말 고전주의를 추종하는 예술 이론가들에 의해 부정적인 의미에서 17세기 미술, 특히 건축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17세기의 미술 전체를 바로크 양식으로 단일하게 해석하는데는 무리가 따른다. 즉, 네덜란드 회화에서 보이는 사실성은 위에서 말한 바로크 양식의 특징인 과장과 극적 효 과의 추구와는 무관한 것이고, 17세기 후반의 프랑스 미술은 르네상스에서 유래하는 규범에 서 이탈하기는 커녕 이 규범을 더욱 엄격하게 계승하고자 하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런 지역적 특색에도 불구하고 바로크 미술의 공통적인 성격은 존재한다. 즉 17세기 미술 경향이 전반적으로 르네상스의 엄숙한 이상세계의 추구에 비해 훨씬 자유스 러우며 따뜻한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에의 관심이 양식과 주제 양면에서 강해지고 풍속화, 풍경화, 정물화 등 현실과 밀 착된 장르가 독립적으로 발전한다. 빛의 효과에 대한 관심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베네치아파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은 몇몇 북부 화가들은 종교화의 성스러움과 풍경화, 초상 화의 시간적 개념을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빛의 효과를 이용했다. 즉 바로크의 전체적인 특색은 사실적, 경험적 표현 양식이다. 바로크는 고전, 절대, 사실주의로 나뉜다. 고전적 바로크는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위에서 설명했고, 절대적 바로크는 성기 르네 상스와는 대조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혹은 매너리즘적 기교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미술이 플 랑드르 회화의 주류를 이루며, 사실주의 양식은 바로크 양식 중 가장 새로운 면이 강한 네 덜란드, 북부 독일에서 보이는 미술이다. 네덜란드의 초상화, 풍경화에서 비치는 인간 내면 의 깊이 있는 탐구는 바로크 미술의 귀중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카라밧지오, 베르니니, 루벤스, 푸생, 벨라스케스, 할스와 램브 란트 등을 들 수 있겠다. 로코코 미술 로코코 미술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말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유행한 미술 경향을 말한다. '로코코(Rococo)'의 어원은 바로크 정원의 인공 동굴에 붙여진 조개 껍데기를 박아 배열한 장식의 명칭인 '로카이유(rocaille)'에서 나왔다. 애초에 장식 디자인에 사용된 이 명칭이 지금은 그 당시의 예술 경향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 로 사용되고 있다. 흔히 로코코를 귀족 중심의 궁정 예술이라고 일컫는데, 이것은 불란서, 남부 독일, 오스트리 아 등지의 왕족과 귀족 계층 사이에서 크게 선호 받았기 때문이다. 16세기 말부터 차츰 강 력해지고 비대해진 귀족 계층은 18세기에 들어서 정치, 경제적인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사회 문화적으로 유한계급으로서 사치와 향락을 누리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나타나게 된 로코코 미술의 특징은 건축의 화려하고 경쾌한 장식과 공예품 등에서 볼 수 있으며, 특히 회화의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화풍이 강하게 나타 난다. 로코코 회화의 채색 기법은 터치가 살아난 밝고 화려한 것을 특징으로 견고하거나 뚜렷한 윤곽선 대신 화면 전체가 서로 어울려 하나로 뭉치는 속성을 보이고 있다. 비현실적인 배경과 비합리적인 구도가 합리주의나 이성에서 반하는 감성주의의 팽배를 보인 다. 이러한 감각적인 느낌은 환상적 구성과 과장된 육체 표현, 흐릿한 윤곽선에 의해서 두드러 지며, 주제 또한 유한계급의 낙천적이고 사치스러운 놀이 문화를 많이 다루었다. 밝은 분홍 색과 싱싱한 초록색 등으로 채워진 화면에서 유미주의 극치를 맛 볼 수 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는 장 앙뜨완느 와또, 오 오노레 프라고나르, 게인즈버러,프랑소 와 부쉐, 장 그뤼즈 등을 들수 있다. 또한 귀족들이 추구한 삶의 기쁨과 향락은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나타나게 되는데, 이들이 거주한 궁전과 저택 실내에는 가구와 여러 종류의 공예품이 갖추어져 로코코 시대 는 공예 의 황금기로 일컬어진다. 현란한 곡선, 도금 장식,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도자기 문양 등 각 분야에서 질 높은 작품들이 생산되었다. 일종의 사치품으로 분류되는 이러한 장식품들은 그 당시 귀족계급이 누렸던 사회적 위치와 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바실리카(basilica)(라)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에 재판소나 집회장 . 시장 등의로 사용한 장방형의 회당을 지칭하 는 건축 용어. 로마 주택의 열주가 있는 큰 방을 가르키기도 한다. '바실리카'라는 말은 '왕족의' '왕에 관한' 이라는 뜻의 그리스 어에서 나온 것이며 그리스 신전을 본떠 로마인들이 발전시켰다는 것이 알반적인 견해이다. 고대 이집트의 궁전에서 전형적인 형태의옥좌가 놓인 정방형의 방은 폭이 짧은 쪽 벽에 입 구가 하나 있고, 두 줄로 나란히 열주가 늘어서 있으며 천정창이 있는 등 건축사가들이 보 통 '바실리카' 라 부르는 양식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나 이는 우연의 일치이다. 최초의 바실리카로 알려진 기원전 2세기초 로마에 건설된 건물들은 이런 형태를 하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포름 에 인접한 '지붕이 가리워진 시장' 으로 개방된 주랑을 토해 안으로 들 어가게 되어 있다. 공화정 시대의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바실리카는 주랑이 아닌 폭이 긴 쪽 의 벽에 나 있는 입구를 통하서 안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더 많다 . 바실리카가 상업적 용도보다 재판소로 사용되는 경우가 늘자 입구 맞은 편에 아프스를 덧 붙여 판사석으로 사용했다. 바실리카는 이런 형태로 제정 초기 여러 지역으로 전파됐다. 기 원 후1세기 후반 로마의 궁정에서 발견되는 긴 측랑과 동쪽 끝에 아프스가 있는 '집회실' 을 일컷어 바실리카라고 하기도 했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장방형의 집회장을 포함해서 여 러 형의 공공건물을 칭하기도 하였다. 2세기경 로마에서 처음 등장해 지중해 중심과 동부의 여러 지방에 전파된 바실리카는 312 년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 후 교회건물에 사용되었다. 4세기 문헌에서는 콘스탄틴 황 제 시대의 교회뿐만 아니라 다양한 건축 양식에도 바실리카라는 이름이 나타나 있다. 대체로 바실리카라는 말은 특정한 건축 유형을 칭하는 것이 아닌 건물의 용도를 일컫는 말 로 사용된 듯하다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1969)에 의해서 1919년 4월에 정식으로 출범한 바 우하우스라는 이름의 교육기관은 모든 조형미술의 궁극적인 목표는 건축에 있다는 생각과 조각가, 화가들은 모두 공예가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기본 이념으로 하였다.
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란 이름은 '건축가의 집'을 의미하는데 설계와 건축이 바우하우스 교육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로피우스가 초안한 [바이마르의 국립 바우하우스의 선언과 강령]에서 그는 예술과 생활을 융합시키기 위해서는 건축을 중추로 하는 여러 예술종합을 추구하고 있다. 이 선언문과 강령의 표지를 장식한 목판화에서 뾰족탑을 한 대사원이 건축가들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화가와 조각가를 배치하고 있는 것을 상징으로 세계의 빛나는 별을 배경으로 나 타내고 있다. 바우하우스 교육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순수예술과 공예는 기본적으로 상이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적 모태에서 나온 두 가지의 갈래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로피우스는 미술이론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신선한 예술적 개념들을 포용, 흡수할 수 있는 현대적 정신을 가진 화가들을 학교의 교수로 걸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로서 그는 칸딘스키, 클레, 파이닝거, 슐렘머등의 순수미술가를 새로운 조형시대의 디자인 을 창출할 학생들의 선생으로 맞이하였던 것이다. 또한 유겐스틸이나 표현주의의 기본이념이 그 속에 넣어져 있었고 조형활동에 있어서 수공 작의 중시는 Art and Craft Movement의 영향을 받고 있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 창립 선언문에서 뚜렷히 밝히고 있는 이러한 생각은 그만의 독창적인 것만은 아니고, 산업혁명 이후 생산기술의 진보로 인한 사회 변화 속에서 일부 예 술가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생성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장인적인 숙련성이 강조되어 예비교육 시스템을 확립시켜 나아갔다. 6개월 동안 계속되는 예비과정은, 교육에 특히 관심을 두었던 화가 요하네스 이텐이 주관하 였다. 교육의 중심은 새로운 예술적 감성과 종래의 수공작 기술을 결부시켜 조형소재의 체험적 학 습을 숙련시키는 것이었다. 여기서 소재의 특성이나 조형적 기능성을 스스로의 손에 의해서 학습하고 개개의 창조력을 신장시켜 나아가는데 역점을 두었다. 석사 학위를 얻기 위해서는 예비과정을 거친 다음 특정한 공예분야에서 일정한 기간의 연구 를 해야 했다. 1923년 이후 바우하우스 공방활동이 활개를 띄게 되었다. 지방의 전통산업 부흥에 기여한 도자공장, 공업에 의한 대량생산 방식의 연구에 착수한 금속공방, 가구공방, 건축과의 융합 에 힘쓴 조각공방, 벽화공방등의 다채로운 공방이 바이마르에서 운영되었다. 공방교육에서는 실제 제작기술을 가르치는 공작 마이스터와 근대적인 조형교육을 지도하는 형태 마이스터의 협동으로 행해졌다. 전자는 공예의 전통적인 기술을 습득한 수공작 장인들이고, 후자는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나 클레(Paul Klee:1877-1940)등의 당대 유수한 예술가 등이 해당한다. 그들의 활동에 의해서 근대 미술에 있어서의 새로운 조형의 원리가 디자인의 미적 형태 형 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기술적으로, 형태적으로 만족을 얻는 디자인이 부각되기 시작하여 산업계에서의 호응과 더불어 바우하우스의 평판이 점점 높아져 갔다. 1926년에 바우하우스는 정치정세의 변화에 따라 데사우(Dssau)로 이전했다. 이 새로운 환경 에서 바우하우스는 스스로 이상을 구체화시켜 나아갔다. 새로운 校舍의 설계를 담당한 그로 피우스는 건축물의 제 기능에서 출발, 건물의 구조와의 기하학적 질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게 하였다. 그가 제창한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일을 구체화시킨 이 새로운 교사는 합 리주의적인 근대 건축의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바우하우스의 교육조직은 데사우시에서 더욱 충실하였다. 제작기술과 근대적 조형력을 겸비한 바우하우스의 수료생들은 공방의 마이스터가 되었고 따 라서 공방들은 새롭고 당대에 필요로 하는 대량생산의 원형을 창출하고 개량해 나가는 실험 공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로피우스의 후계자로 지명된 한스 마이어 (Hannes Mayer:1889-1954)는 철저한 기능 주 의자로서 예술과 디자인을 명확히 구별하여 디자인을 예술가로서가 아닌 어디까지나 기능과 경계에 의한 사회적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기하학적으로 추상적인 조형방식을 따른 바우하우스의 스타일을 엄격히 비판하고 조형 성보다 경제사회의 측면을 중시하는 디자인의 방향으로 전환하여 과학적,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는 건축교육을 지향하였다. 또 그의 실용주의적 지도는 공방의 생산활동을 높이고 경제 상의 성과를 높이었다. 바우하우스의 전람회는 각지를 순회하면서 폭을 넓혀 나갔다. 그러나 파시즘의 대두가 바우하우스의 발전에 검은 그림자를 던졌다. 바우하우스는 전통에 반대했고, 외형상 국제주의를 지향하여 당시 독일 국가사회주의자들의 견해와 자주 총돌하 는 등의 이유로 1933년 박해 끝에 학교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1920년대의 바우하우스는 건축과 디자인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큰 자취를 남겼다. 바우하우스는 국제적 양식의 창출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으며, 그 영향은 바우하우스의 구성요원들이 해외(미국등) 로 활동영역을 넓힘으로서 더욱 활발히 진행되었다. 20세기 현대미술의 추상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는 또한 추상미술 과 미술에서의 현대성(모더니즘)을 체계적으로 정립시킨 이론가로서 그 명성이 높았다. 그는 1910년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하는 미술이론서를 출판하고, 이듬해 독 일화가 마르크와 함께 '청기사'라는 그룹을 결성하게 된다. 이 그룹은 결코 유사한 조형적 특성에 의해서 묶인 것이 아니라, 미술에 대한 의견을 같이 하는 작가들의 모임이었다. 18921년 3월,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 벽화 강좌의 주임교수가 되었고 형태와 색채론에 관한 그의 강의 내용이 [점, 선, 면]이라는 논문으로 출간되기도 하였다. 그는 바우하우스가 나치 에 의해 폐교될 때까지 교편을 놓지 않았다. 1923년에 그린 [수채 NO. 77.]과 [바이올렛]은 그가 바우하우스에서 미술과 미학에 관한 이 론을 강의할 때 그린 작품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직선과 사선, 점과 면들의 자유로운 조화는 색채와 형태, 구성의 조화가 이루어 내는 화면상의 상응의 효과를 낳고 있다. 칸딘스키의 유명한 색채이론은 색채의 모 든 요소와 잠재력들, 예를 들어 음향 또는 물리학과의 관계, 상징 의미들을 포괄하고 있으 며, 무엇보다도 그는 색채의 본질이 말의 언어보다 감정의 느낌들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 는 시각언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바우하우스에서 색채이론에 대해 강의하면서 형태와 색채의 상응개념을 설명했다. 1928년 그린 [수채 NO. 268 :느슨한 연결]에서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면구성에 있어서 도 수평적 구성은 차갑고 수직적 구성은 따뜻하며 눈을 위로 향하게 하는 구성은 자유롭고 가벼우며, 아래로 향하게 하는 것은 반대로 무겁고 우울하게 한다는 방식을 나타내고 있다. 걸려 있는 그림의 화면에서 관람자가 느끼는 총체적인 느낌을 그 화면 형태, 구성, 색채로서 분석해 설명하는 그의 이론은 바우하우스 교육에서 미술에 관한 기초적인 개념을 성립하게 하는 것이었다. 파울 클레(19-897-7940)는 스위스 음악가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음악교육을 받아 12살이 되던 해 교항악단과 바이올린 협연을 가질 정 도로 수준있는 음악적 재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배경은 그의 회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하게 된다. 그는 칸딘스키 와 청기사파, 입체파등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작품을 보면 그만의 독창적인 회화세계가 확립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클레 특유의 추상성과 장식성, 우울함들은 그의 내재적인 성격과 함께 예술가와 여행가로 서의 경험에서 나오는 그만의 세계였다. 1918년의 [집들이 있는 나무]는 그가 바우하우스의 교수로 초빙되기 전의 작품이다. 여기서 그는 다양한 재료와 기술을 실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종이위에 거즈를 겹친다음 수채로 그림을 그려 촉각적인 물질감과 화면천체에 고루 퍼지 는 환상적인 배경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동화책의 삽화를 연상시키는 이 그림은 작은 오두막 집들이 여러 층으로 세워져 있고 그 집 들을 연걸시키는 사다리 맨 아래에 한 사람이 올라가려고 하고 있다. 파울 클레는 1920년에 바우하우스 교수로 초빙되어 1931년까지 교편을 잡게 된다. 그는 학생들에게 그림의 일루젼(눈속임의 환영)을 구체적 작업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 그림 [빨강. 녹색의 방 투사도-1921] 을 그린다. 이 화면에는 1점 원근시점에 의해 깊이감을 느낄 수 있는 사각형과 원의 무수한 집합체가 구성되어 있다. 질서정연하고 정확한 직선 투시도법의 선들은 우리의 시각을 중앙 왼쪽에 있는 방추 모양을 향하게 하고 있으며, 사각 입방체와 원형들은 공간을 깊이감 있게 만들고 있다. 화면 가운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기묘한 생물이 전방을 향하는 화살표를 들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저 깊숙한 원근의 초점으로 시선을 유도하고 있다. 뉴욕에서 태어난 리오넬 파이닝거(1871-1956)는 소년시절 음악가인 부모님을 따라 독일로 이주한 후, 19살 때부터 풍자만화와 삽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이후 베를린의 여러 신문과 잡 지에 정치만화평을 그리는 시사만화가로 명성을 얻게 된다. 1919년 당시 바이마르 소재 바우하우스의 교장이었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의 요청으로 바우하우스의 판화공방을 맡아 후진을 양성하게 된다. 그는 1933년 이 학교가 문을 닫게 될 때까지 재직하면서 당시 이 학교의 교수로 있었던 칸 딘스키, 클레등과 교분을 갖게 된다. 1932년에 그린 [강둑]과 38년경에 그린 [무제: 푸른 해안]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교차하 는 예리한 선들로 구성된 드로잉과 판화, 회화들을 주고 제작하였다. 이러한 그의 양식은 그가 바우하우스의 교수로 재직할 때와 그 후 자신의 개인적인 판화 제 작에서도 비슷하게 이어졌다. 오스카 슐렘머는 1889년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1920년에 바우하우스에 초빙된 슐렘머는 석조의 제작과 지도를 맡는 한편, 무대예술의 실험 에도 열중하였다. 1923년 제작한 [추상적 인물, 원형 조각]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직선과 곡선의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한 인체를 부조로 만들었다. 그는 건축 공간적인 구성에 맞추어 모든 자연행태를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하면서도 그것들 에 대상적인 성격을 가미한 독특한 추상양식을 창안하였다. 그는 1929년 바우하우스를 그만 들 때까지 [3인조 발레공연]을 바우하우스 행사 주간 동안 극장에서 상연하기도 하며, [바우하우스의 무대(1925)}이란 책을 저술하기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바이오모픽 아트(Biomorphic Art)
추상미술의 한 형식. 주로 1940년대의 장 아르프, 호아니 미로, 아실 고르키, 윌리엄 배지오 티스, 데오도로스 스태모스, 드 쿠닝 등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살아있는 유기체에서 그 포름 을 구하고자 했던 경향을 가리킨다. 구성주의와 같은 추상운동이 그 추상적 포름을 주로 기 하학적인 기반에서 찾으려고 했던데 대해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바이오모픽 아트는 인간이나 생명을 가진 유기체, 또는 그와 관련된 신화 등에서 구하고자 했다.
바토니 (Pompeo Girolamo Batoni,1708~1787)
이탈리아의 화가. 루카에서 태어났다. 1728년로마에 가서 라파엘로의 작품과 바티칸 궁전의 고대 조각 등을 연구하고, 고전주의의 표현 수법을 익혀 산그레고리오 성당과 산체르소 성당의 제단화를 그려 명성을 얻었다. 그뒤 〈막달라 마리아〉 〈프로메테우스〉〈메레아그로스의 죽음〉, 베를린 미술관의〈푸슈 케의 결혼〉, 산타마리아 데리 앙제리성당의 〈마술사 시몬의 타락〉 등을 클래식풍의 화려 한 필치로 그려, 당시 로마에 있던독일 화가 라파엘로·멘구스와 신고전주의회화의 정상을 다투었다. 정밀한 초상화가로서도 호평을 받아 교황·황제 등의 초상화를많이 남겼다.
박래현
1920년 평남 진남포시에서 출생. 경성관립여자사범학교를 나와 잠깐 교사롤 재직한 후 동경에 건너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 화가로서의 길에 들어섬. 43년 선전에 특선, 46년 화가 김기창과 결혼 이후 지속적으로 부부전을 가짐. 56년 대한미협전과 같은 해 국전에서 동시에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여류화가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함. 67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참가한 후 남미 각국을 순방하고 68년 뉴욕에 체류하면서 새롭게 판화의 기법을 수학함. 잠시 귀국후 75년 다시 도미했으나 병이 생겨 돌아옴. 다음해에 타계하였다. 노점A (1956) 종이에 수묵 채색235*180cm 금붕어 B (1960 )종이에 수묵채색 55.5*69.5cm 작품6 (1965) 종이에 채색 120*105cm 작품22 (1965) 종이에 채색 135.5*169.5cm
박서보 (1931~)
1931년 경북 예천에서 출생. 홍익대 서양화과를 나옴 58년 현대미협에 가담, 현대미술운동의 중심에서 활동 61년 세계 청년화가 파리 대회에 참가한 이후, 파리 청년작가 비엔날레, 상파울루 비엔날레 등 여러 국제전에 출품. 75년부터 에콜 드 서울을 조직, 현대미술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감. 서울,일본,미국 등지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1964년부터 홍익대 교수로 재직, 원형질 시리즈 이후 70년대부터 묘볍 시리즈로 일관해 오고 있다. 묘법 No 5-78 1978 마포에 연필 130*162cm 묘법 No 57-84 1984 한지에 혼합매체 52*82.5 묘법 No. 910827 1991 91*73cm
박수근
1914년 강원 양구에서 출생 독학으로 그림을 수업. 18세 때 선전에 초입선함으로써 화가로서의 길에 들어섬. 국전에 수차에 걸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고, 50년대부터 그 특유의 조형세계인 거친 마티에르와 서민의 생활을 모티브로 한 소박한 자연주의 화풍을 확립해 나갔다. 반도화랑을 통해 많은 작품들이 해외로 팔려나갔다. 간경화와 백내장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다가 65년에 작고함. 이후 여러 화랑에서 유작전과 회고전이 열렀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평가가 이어졌다. 맷돌질하는 여인 1940년대 후반 하드보드에 유채 21.5*27cm 독서 1950년대 하드보드에 유채 21*13cm 나무와 두여인 1962년 캔버스에 유채 130*89cm 박수근 - 朴壽根 (1914~1965) 화가.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독학으로미술을 공부하고, 1932년 제11회 선전(조선미술 전람회)에 입선하여 화단에 나왔다. 8·15 광복 후 월남하여, 1952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하고, 미협전에서도 입상하였다. 1958년 이후 미국 월드 하우스 화랑, 조선일보사 초대전, 마닐라 국제전 등 국내외 미술전에 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1959년 제8회국전에서는 추천 작가, 1962년 제11회 국전에서는 심사 위원을 지냈다. 작품 경향은 회백색을 주로 하여 단조로우나 한국적 주제를서민적 감각으로 다룬 점이 특색 이다. 주요작품으로는 〈소녀〉 〈산〉 〈강변〉 등이있다.
박트리아 미술(Bactria Art)
아므- 다리아(그리스명은 옥서스 강)의 중류에 남북으로 걸친 고대 박트리아 지역(토카리스 탄이라고도 함)에 보이는 미술. 북쪽으로 자라후샨 산맥 이남의 소련령에서부터 남쪽으로 힌두쿠시 산맥 이북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분포하며, 시대적으로는 기원전 3세기의 박트리 아 왕국 시대부터 7세기 후반 쿠샨 시대까지 미친다. 알렉산더 대왕 군대의 후예인 그리스 계의 태수가 건국한 박트리아 왕국은 그리스 문화를 중앙 아시아에 이식하는 역할을 하였으 며, 이 지역에서는 파르티아나 인도계의 문화도 유입되어, 이들을 혼합한 독특한 미술이 탄 생했다. 박트리아 왕국의 유적은 아이카눔 이외에는 그다지 확실한 것이 없으며 미술 자료 도 많지 않으나, 그 전통은 쿠샨 시대에도 계승되었다. 건물은 태양에 말린 연와와 돌을 병용해 썼으며, 인 안디스 식의 집이나 이완풍의 현관이 있는 궁전 등이 있는데 아티카식의 옥연과형이 있는 초석이 쓰여졌다. 조각은 그리스의 대 리석을 흉내낸 백색 석회암을 소제로 하여, 아칸서스 문양 사이에 악사나 불상을 넣은 프리 즈나 주두 및 코린트 식 주두에 이란적인 사자 이빨 문양을 새긴 독특한 작품이 있다. 데르 메스 부근의 아이르담 카라 - 테베나 북부 아프가니스탄의 쿤드즈, 샹카라, 스르쿠 콘탈 등 에서 출토되고 있다. 또한 테라코타 제의 등신대 인물상이 아이 카눔, 칼차얀 등에서 발견되 고 있다.
반 다이크 (Anthony Van Dyck,1599~1641)
벨기에(플랑드르)의 화가. 1615∼1620년 루벤스에게 그림을 배웠고 그 조수가 되었다. 영국·이탈리아·프랑스 등지를 돌아다니며 초상화를 주로 그렸으며, 이것들을 손수 또는저 명한 판화가들의 손을 빌려 판화로 옮겼다. 찰스 1세의 초청을 받고 다시 영국으로가 궁정의 수석 화가가 되어, 국왕 일가를비롯한 궁 정인들의 초상을 그리다가 런던에서 죽었다. 루벤스에 버금가는 플랑드르파의대가로 많은 걸작을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마기의 예배〉 〈승천〉 〈성아우구스티누스〉 〈성고〉 〈성모〉 〈얀 보스의 성모〉 등이 있다.
반 에이크1 (Hubert Van Eyck,1370?~1426)
네덜란드의 화가. 플랑드르파의 기초를 닦고,유화의 기법을 개량한 에이크 형제 중의 형. 아우와 함께 부르고뉴 공 필립을 섬겼다고하나, 확실한 기록이 없어 경력은 분명하지않다. 대표 작품으로는 형제 합작의 서명이있는 성 요한 성당의 제단화가 있는데, 그의구상에 의 하여 착수되고, 그가 죽은 후인1432년 아우의 손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반 에이크2 (Jan Van Eyck,1395?~1441)
네덜란드의 화가. 형인 에이크와 플랑드르파의 기초를 닦고 유화의 기법을 개량하였다. 1422~1424년 헤이그의 궁정 화가로 일하였으며, 한때 필립과 포르투갈의 왕녀 이사벨의결혼 을 위한 사절단과 함께 리스본에 간 일도 있다. 종래의 양식이나 구도에 구애되지않고 눈에 보이는 자연 그대로의 그림을 그렸으며, 냉엄하 고 신비적인 분위기로 종교적경건과 신앙을 표현하였다. 또한, 플랑드르에초상화 장르를 확립하였는데, 새로운 시야와기교는 후세 회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요작품으로는 〈무덤가의 세 마리아〉 〈젊은남자의 초상〉 〈헨트 제단화〉, 그리고 형 제 합작인 성 요한 성당의 제단화와 그 밖에종교화·초상화 등이 있다.
반예술(anti-art)
마르셀 뒤샹이 제기한 후 현재까지 폭넓고 다양한 뜻으로 사요오디고 있는 개념이다. 대부 분의 비평가들은 미술 및 기성 가치의 부정을 표명했던 취리히의 '다다' 에서부터 반 예술 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출발은 역시 뒤샹에게서 찾 아볼 수 있다. 뒤샹은 1916년 반에술이라는 이름 아래 그 자신도 위원으로 있었던 앵뎅팡당전에 가명으로 변기를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여 반입했었지만 거부당했다. 예술과는 전혀 관계없 는 영역의 바로 이 변기가 기성 가치의 부정을 위한 한 상징으로 등장된 뒤에,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것이 예술의 전개 및 그 개념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것처럼 ‘반예술'이 라는 개념도 실상은 예술과 관계가 깊은 개념이다. 비평가들이나 일반인들은 모든 새로운 운동을 반예술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 새 로운 것은 필연적으로 기존의 것에 도전하기 샔문이다. 허버트 마르쿠제는 반예술 작품을 그림이 있기는 하지만 예술로서 의도되지 않은, 예를 들어 낙서같은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 레고리 배트콕은 기존 도덕을 위반하는 것, 예를 들면 불법 섹스 만화 따위를 반예술로 보 고 있다. 미국의 미학자 조지 디키는 예술을 관습으로 보고 진정한 반예술이란 그 관습 안 에서 일어나는 행위로 이루어지면서도 관습의 규범을 교묘히 이용하여 어떠한 예술 장르에 도 포함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70년대 중반까지 그 '반'의 대상을 앵포르멜과 추상 표현주의에 두고 출현했었다. 신사실주의, 팝 아트, 미니멀 아트, 개념 미술이 바로 그것이지 만 이러한 경향들은 반예술적 성분을 다다와는 다른, 외재적인 바판을 점차 중지하고 예술 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내재성 속에서 검토하여 찾았던 것이기도 하다.
발라(Giacomo Balla)-(1871~1958)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한 그는 1900년 파리로 이주, 그곳에서 인상주의와 분할주의를 접한 다. 그가 초기의 작품에서 소재로 삼은것은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노동의 세 계로 1904년 작 '노동자의 하루'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당시 그의 화실에는 아카데미즘 미 술에 염증을 느끼던 세베리닝와 보치오니와 같은 젊은 작가들이 자주 드나들었고, 1909년에 는 마리네티가 그를 미래주의 이론으로 전환시켜 빛의 분해를 그린 '활모양의 전등'과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발라는 현대적 주제를 취급하면서도 분할주의적 기법을 지속하여 사 용한다. 1910년부터는 동작의 분석을 시작, 1912년에는 움직임의 메카니즘을 해부했다. 또한 전속력 으로달리는 자동차를 관찰하여 움직임을 종합적 그래픽으로 표현하는 일련의 작품을 제작한 다. 이렇듯 발라의 작품은 미래주의이론을 극단에까지 몰고가 기하형태를 통한 추상화과정 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1차 대전후 발라는 리듬감있는 작품을 계속 창작했고 1920년대초에는 기하추상 계열로 기 운다. 그후 1937년이후 구상미술로 귀환한다
발묵 [潑 墨]
중국 회화의 기법.전하는 바로는 당의 우앙 스기 흰 종이에 먹을 뿌리고 발로 차고 손으로 문지르다가 그 형상을 따라 바위,구름,물을그렸다는데 마음 먹은대로 손을 놀려 구름과 노 을 빛 비바람을 그려 내니 신의 기교를 부린 듯 아름답고 엎드려 보아도 먹이 얼룩진자국이 없었다. 한다. 후세에는 먹물이 품부하고 시세기 가득한 모든것을 다 '발묵'이라 불렀다. 현대에도 채색을 위주로 붓놀림이 호방한 화법을 '발채'라고 부른다
백남준 (1932~)
서울 부호의 집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 홍콩으로 일가족 이주했는데, 다시 50년에 귀국. 다시 6.25 동란을 피해 부산에서 고베로 이주하게 됨 동경대학에서 미학과 미술사학과 졸업. 이후 서독으로 건너가 뮌헨대학에서 음악학과 미술사를 배움 '존 케이지에 바치는 경의'(1959)를 시작으로 전위적인 퍼포먼스를 많이 함. 60년대부터 비디오아트 시작. 처음에는 TV수상기의 외형을 변형시키거나 방송 이미지를 왜곡시키는 형태였다. 이후 휴대용 비디오 촬영기가 발명됨으로 손쉽게 작업을 하고, 대중의 인식도 확산되었다. 백남준의 TV작업은 관객의 참여를 위한 노력으로 일관되었다. V-yramid 1982 뉴욕 희트니 미술관 침입자들 1984 요셉보이스 필름 1992 비디오 설치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모짜르트 장송곡을 조용히 연주하다. 1997
베로키오 (Andrea del Verrocchio,1435~1488)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금세공사.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안드레아 디 치오네. 화가 발도비네티와 조각가 도나텔로 등에게서 배웠다. 특히, 조각과 금세공 분야에 가장힘을 기울였다. 회화에서의 대표작은 〈그리스도의 세례〉와 〈피스토이아 대성당 제단화〉 등 몇 개 안 되 지만, 과학적 탐구를 지향한 15세기 후반 피렌체파의 대표적 자연주의자의 면모는 뚜렷이 엿볼 수 있다. 그의제자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크레디·페루지노 등이 있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돌고래를 안은 소동상〉 〈귀부인상〉 〈다윗〉〈성 토마스의 회의〉 〈콜레오니 장군 기마상〉 〈가타멜라타 기마상〉 등이 있다.
베엠페테
1967년에 네 명의 프랑스 미술가 - 뷔랑, 모세, 파르망티에, 토로니- 에 의해 조직된 그룹. 베엠페테는 이들 이름의 첫 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이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은 회화에 있어 서 이른바 영도(zero degree)를 의미한다. 즉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방법에 의해 순식간에 제 작할 수 있는 평범한 패턴(줄무늬, 점, 원 등)으로 이루어진 최소한의 추상적 화면을 구성하 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의 작품은 이 그룹의 누구라도 작업을 진행할 수 있을 만큼 극히 단순하고 비개성적이다. 실제로 이들은 그들의 작품이 상호교환이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재능이나 취향, 능력 등은 그 계획으로부터 배제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작업이 회화에 대한 하나의 비평행위가 될 수 있음을 주장했으며 현장 작 업을 보여주는 모임을 개최함으로써 대중에게 그 의도를 알리기도 했다
벨라스케스 (Diego Rodriguez de Silva Velazquez,1599~1660)
에스파냐의 화가. 세비야에서 태어났다. 초기의 작품은 당시의 에스파냐 화가들과 다름없이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명암법으로 경 건한 종교적 주제를 그렸으나, 민중의 빈곤한일상 생활에도 관심이 많았다. 1622년 수도마드리드로 가서, 이듬해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되어, 평생 왕의 예우를 받았 으며 나중에는 궁정의 요직까지 맡았다. 왕족의 그림을 주로 그렸지만, 궁정의 어릿광대·난쟁이 등의 초상화도 다수 그렸다. 이 그림들이그를 미술사상 초상 화가의 대가로 만들었다. 그가 불행한 사람들을 왕족들을 그릴 때와 다름없는 담담한 필치로 묘사한 것은 인간 존재 의 중요성을 통하여 그들의 비극을승화시켰음을 보여 준다. 만년에는 독자적인그의 세계가 이루어졌으며, 광선과 공간을다루는 솜씨는 후에 들라크루 아·드가 등에게 이어져 근대 회화의 길을 열었다. 주요작품으로는 〈주정뱅이들 耗蔗봉 대관〉〈브레다 성의 항복〉 〈궁녀들(라스 메니나 스)〉 〈직녀들〉 등이 있다. 베엠페테 1967년에 네 명의 프랑스 미술가 - 뷔랑, 모세, 파르망티에, 토로니- 에 의해 조직된 그룹. 베엠페테는 이들 이름의 첫 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이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은 회화에 있어 서 이른바 영도(zero degree)를 의미한다. 즉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방법에 의해 순식간에 제 작할 수 있는 평범한 패턴(줄무늬, 점, 원 등)으로 이루어진 최소한의 추상적 화면을 구성하 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의 작품은 이 그룹의 누구라도 작업을 진행할 수 있을 만큼 극히 단순하고 비개성적이다. 실제로 이들은 그들의 작품이 상호교환이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재능이나 취향, 능력 등은 그 계획으로부터 배제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작업이 회화에 대한 하나의 비평행위가 될 수 있음을 주장했으며 현장 작 업을 보여주는 모임을 개최함으로써 대중에게 그 의도를 알리기도 했다
변관식 - 卞寬植 (1899~1976)
동양화가. 호 소정.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났다. 관립 조선 총독부 공업(陶畵) 수업을 받은 뒤, 외조부인 소림 조석전습소 도기과에서 도화진 이 관여하던 서화 미술원에서 이당 김은호·심산 노수현·청전 이상범 등과 함께 공부하고, 1925년 일본에 가서 도쿄 미술 학교를 수료하였다. 8·15 광복 후 초기 국전에참여하였으나 심사 부조리를 개탄하여, 국전을 외면하고 이후 작 품 제작에만 몰두하였다. 화법의 특징은 첫째, 화면상의 시점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형태인 심원의 형식이면서다각적 인 방향에서의 시점을 구사하여 박진감과 입체파적인 면을 보인다. 둘째, 적묵법에 의하여 변화를 주었으며 관념적인 산수가아니라 엄격한 사실화를 바탕으로 한 한국적풍치가 배어났으며, 해학적인 모습에서 우러나는 정취를 맛볼 수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외금강 삼선암〉 〈내금강 진주담〉 〈옥류청풍〉 〈이어〉 〈농촌의 만 추〉 등이 있다.
보나르 (Pierre Bonnard,1867~1947)
프랑스의 화가. 파리 근교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법률 공부를 하였으나, 그림에 흥미를 느껴 틈틈이 아카데미 쥘리앙과 미술 학교 에 다녔다. 1889년 그림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나비파를 결성하였다. 초기에는 주로차분한 색감으로 파리 시민의 일상 생활을상징적으로 그렸으나, 40대에 접어 들면서는밝은 색조로 바뀌었다. 독특한 시각에서 잡는 구도로 풍경·정물·사람이 모인 부드러운 실내 정경 등을 소박하면 서도 친근감 있게 그려 대표적인 앵티미스(친밀파)로 높이평가되었다. 색채에 대한 관심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깊어져 색채의 세계를 확립,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남프랑스의 르 카네에 틀어박혀제작에 몰두하였다. 대표 작품으로는 〈빛을등지고 있는 누드〉 등이 알려졌으며, 이 밖에 유화와 구아슈(불투 명 수채화)·수채화·석판화 등의 작품도 많이 있다.
보디 컬러(body color)
백색을 섞은 불투명 수채화 물감. 또 투명 묘법에 대한 물감의 불투명한 효과를 말한다. 과 슈와 마찬가지로 색지나 이미 수채로 그린 데생에 잘 쓰여 하이라이트의 효과를 높이거나, 고유색이 강하게 쓰인 경우에 액선트를 주기 위하여 쓰여진다.
보치오니(Umberto Boccioni)-(1882~1916)
새로운 분할주의 기법을 발굴하여 형태의 테두리를 불분명하게 표현함으로써 감정과 기억을 추상적으로 연상시키도록 한다. 동시성과 역동성에 대한 미술이론도 발달시킨다. 미래주의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났던 보치오니는 1910년에서 1911년사이 [일어나는 도시]라 는 미래주의 사상과 일치하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 가로 길 3.1m의 이 대작은 밀라노에서 공사중인 건물을 배경으로 원경에는전차와 기관차가 힘차게 김을 내뿜으며 달리고, 공장에서는 기다란 굴뚝에서 연기가 하늘을 채우고 있다. 또한 전경에는 크고 사나운 말이 압도적인 자세로 무거운 침을 이끌고 있다. 그 앞에는 말 을 힘겹게 모는 노동자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그림은 역동적인 행위, 속도, 빛에 의한 물 질의 해체와 바로 그 빛에 의한 회화의 재통합이라는 미래주의 추기의 특징을 표현한 최초 의 중요한 회화이다. 화면을 메우고 있는 일하는 노동자와 말들은 미래주의적인 신념의 한 측면을 나타내고 잇 다. 즉 솟아오르며 울부짖는 사나운 말들에 의해 상징되는 강력한 힘을 지닌 현대 산업사회 에서의 노동과 작업의 역동성이 그 것이다. 보치오니는 1912년 이후 조각을 시작한다. 그는 파리에서 브랑쿠지와 뒤샹, 비용 등과 교제 하였으며, 미래주의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장르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해 4월 [미래주의 조각, 기술선언]을 발표하면서, 그는 이 선언문을 통해 미래주의의 선언 을 구체적인 3차원 조형언어로 나타낸 구체적인 작품을 다음해에 발표하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공간 속에서의 연속성의 특이한 형태]이다. 대상을 입체주의적으로 해체시킨 작품을 발표한다. 그는 조각에 있어서 영속적인 가치들-'운동양식'과 '환경으로서의 조각', 그리고 '제한된 산과 닫힌 조각에 대한 절대적이고 완전한 철폐, 인물을 해체시켜 그것을 환경 속에 가두어 두는 것'등-을 추구했다. 그는 형태모방으로서의 조각가의 의무에서 해방됨을 주장하였고, 모든 종류의 재료들-우리, 나무, 판지, 철, 시멘트, 말총, 가죽, 천, 거울, 정구 등-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조각에 대한 선언문은 이후 구성주의조각,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앗상블라쥬, 실제로 움 직이는 키네틱 조각, 1960년대의 팝 아트와 대지미술에 이르기까지 전개 과정을 예견하고있 다. 그의 [공간 속에서의 연속성의 특이한 형태]는 브론즈로 제작된 것인데, 마치 그의 그림 을 입체적인 조각으로 옮겨 놓은 것같은 인상을 준다. 울통불통한 곡면으 로 이루어진 인물 은 흡사 길거리를 힘차게 활보하는 인물과 같다. 이 조각은 한 순간의 정지된 형태를 모방 해 놓은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움직임속에서 활동이라는 움직임이 자아내는 분열적이나 통일된 순간들의 집합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내부와 외부가 융해되고 현실과 기억의 감각사이로 오가는 세계를 지향하고 종합적인 단일 이미지를 발달시킨다. 여기에서는 공간속에서 형태가 움직여 나가는 역동적 방향을 나 타내는 강조선이 특징으로 등장한다.
보티시즘(Vorticism)
소용돌이파. 영국의 화가이며 소설가인 윈덤 루이스가 주창한 예술 혁신 운동. 1914년 잡지 <질풍(Blast)>의 제1호 (성명서) 간행과 동시에 발족하였다. 보티시즘이란 이 잡지의 부제, 소용돌이(vortex)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와즈워즈나 로버츠와 같은 화가, 고디에-브르체스 카나 엡스타인과 같은 조각가가 참가하였다. 문학 방면에서는 미국의 시인인 에즈라 파운드 가 협력하였다. 이 그룹의 이념은 미래파의 문학·사회 이론 및 입체파의 이론에 바탕을 두 고 있다. 에즈라 파운드는 "소용돌이는 에너지의 최고점이며, 메카닉 가운데 가장 큰 효과를 나타낸다 "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소용돌이를 세계관의 상징으로 삼는 역동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영국의 정적인 예술 전통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이 운동은 중단되었지만, 전후 'X그룹'(1920년 결성)이라고 불리는 새 단체에 의해 계속되 었다. X그룹은 루이스, 에드워드, 와즈워스, 위리엄 로버츠 등 보티시즘 본래의 작가들에 런 던 그룹의 진보적 회원인 찰즈 기너, 프랭크 돕슨, 맥나이트 코퍼, 프레드릭 에첼즈 등을 추 가하기도 한다.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1445?~1510)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피렌체에서태어났다. 필리포 리피에게 그림을 배웠으며,이어 베로키오와 폴라이월로로부터 사실주의화풍을 배웠 다. 초기에는 자연 연구에 대한소박한 정열을 보이다가 인문주의의 영향을받았다. 1482~1491년의 약 10년 동안은 점차사실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미술의 세계를 열었으며, 가 장 충실한 원숙기를 전개하였다. 특히, 〈비너스의 탄생〉은 사실주의를 무시하고 양식화된 표현과 곡선의 묘미를 구사하여, 장식적 구도 속에 시적 세계를 표현한걸작이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마르스와비너스〉 〈수태 고지〉 〈성모 대관〉 〈피에타〉 〈신비의 강탄〉 등이 있다H
볼스(Wols)-(1913~1951)
바우하우스에서 모흘리-나기의 지도를 받은 적이 있으며, 뷔페, 포트리에와 '타시즘' 을 결 성하였다. 독일출신의 화가이자 사진작가이다. 음악, 기계,지질학에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그는 드레스텐에서 사진 수업을 받았으며 데사 의 시절 바우하우스의 우수한 학생이기도 했다. 1932년 클레를 만난 볼스는 같은 해에 파리로 이주하여 정착한다. 사진작가로 일하며 초현 실주의자들과 가까이 지내게 되면서 그는 먹으로 데생을 그리기 시작한다. 1934년-1940년 사이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감옥살이를 하게 된 그의 미술세계는 더욱 강력 함을 띠게 된다. 1938-1939년사이에 환상적 구상회화가 사라지고 형태의 테두리가 희미해지며 중앙의 축을 중심으로 구성된 선적 형태가 태어나게 된다. 그후 1942년부터 전쟁이 끝날때까지 구성적인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고 유기적 형태가 자리 잡은 새로운 세상을 그린다. 파리로 돌아와 1946-47년 유화물감을 사용하여 칠해놓은 물감을 손가락으로 문지르거나 못 이나 붓대로 끌어낸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다. 얼룩과 기호를 사용하여 그는 대상과 인물이 마치 무의식 세계에서 솟아오르는 것처럼 묘 사했고 이것은 앵포르멜 회화의 도화선이 된다.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의 한계에 마주친 그는 삶의 전율과 공포를 묘사할 수 있는 독자적인 방법을 모색한 것이었다. 주요 작품 : 콤퍼지션, 회화 등
부조(relief)
조소 기법 중의 하나. 평면에 형상이 도드라지게 하는 조형기법으로 평평하게 표현된 점에 서는 회화와 가깝지만 입체적인 감각으로 표현된 점에서 조각의 일종이다. 릴리프라는 용어 는 '렐리보(relievo)’라는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한 말이며, 형상이 돌출된 정도에 따라 고부 저, 반부조, 저부저로 구분된다. 고부조란 돌출된 부분의 두께가 다른 부위의 반 정도 되는 경우를 말하며, 반부조는 돌출 부위의 두께가 다른 부위의 반 정도 되는 경우를 말한다. 저부조란 돌출 규모가 훨씬 덜할 때, 혹은 하부 도려내기(under cutting)가 전혀 없을 경우를 말한다. 소재면에서 뒤로 움푹 들어가도록 음각한 것을 일컬어 '요조(intaglio)'라고 한다. 원칙적인 부조의 양식은 부조의 부분이 벽면을 뚫고 나온 느낌을 주는 그리스 부조와, 주위의 벽면이 액선트가 되는 앗시리 아 부조 등이 있다. 동양에 있어서의 부조는 한 대의 화상석에서 그 원시적인 형태를 찾아 볼 수 있으나, 그 후 그리스나 인도 부조의 영향을 받아 육조에서 당대에 걸쳐 발달하여 와 전이나 거울 뒷면의 장식 등에 사용되었다.
분청사기(粉靑沙器)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를 줄인 말. 삼도우(三島牛)라는 일본인들의 명칭에 반대하여, 고유섭(高裕燮)이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 한국 도자기의 일종을 지칭하는 학명으로 널리 통 용되고 있다. 고려 말기 쇠퇴한 상감청자가 조선 창건과 더불어 신흥국가의 새로운 문화의 기운을 타고 다시 정착되고 변모한 사기(沙器)이다. 15, 16세기에는 그 생산이 백자를 훨씬 능가하는 전 성기를 맞이했으나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분기점으로 사라졌다. 명칭에서 알수 있듯이 기본적인 형태는 철분(鐵分)이 있는 회청색의 사기질 그릇 위에 백토 (白土)를 입힌 것이지만, 분장(粉粧)의 기법에 따라 다양한 장식 효과를 낼 수 있다. 태토(胎 土)는 회색, 회흑색이 많고 특히 활달하게 도식화된 문양의 표현은 매우 신선하고 자연스러 운 서민적인 소박함을 지니고 있다
분할주의
색채 분할이라고도 번역한다. 인상주의의 필촉 분할의 근거가 된 생각 및 그 생각이 이론화 된 것을 가리킨다. 즉 태양 광선은 스팩트럼을 분석해보면 알 수 있듯이, 밝은 무지개 빛깔 로 성립되어 있다. 따라서 태양에 비친 바깥 풍경은, 밝고 순수한 색(삼원색 및 제1차 혼합 색)의 빛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림물감의 색은 빛과는 반대로 수많은 종류를 혼합시키면, 차차 밝기를 잃고 검정에 가까워진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인상주의 화가들은, 밝기를 유지하 기 위해 그림물감을 팔레트 위에서 섞는 것을 지양하고, 순수한 빛을 표현하고자 시도했다. 중간색이 필요한 경우에는 혼합해야 할 물감을 작은 필촉으로 분할되고 색채도 순수한 색으 로 분할되었다. 분할주의는 이런 묘법을 뜻한다. 이 수법은 일찍이 컨스터블의 풍경화에서도 부분적으로 쓰였으며, 또 들라크루아도 상당히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을 제작의 기본 원리로 삼은 것은 모네, 피사로 등의 인상주의의 화가들이었다. 신인상주의의 쇠라는 이것을 이론화하였으며, 그 이론은 시냑의 <외젠 들라크루아로부터 신인상주의까지>(1899) 에 의해 일반적으로 보급되었다. 그들의 작품은, 색의 미세한 점으로 그려졌으므로, '점묘파 (Pointillisme)’라고도 불렸으나, 시냑은 이 명칭을 거부하고 끝까지 ‘분할주의'라는 이름 을 주장하고 있다.
브라만테 (Donato Bramante,1444~1514)
이탈리아의 건축가·화가. 우르비노에서 태어났다. 건축가로서 르네상스의 대표자 중한 사람이다. 밀라노에서 일 모로의 거성 카스테로 스포르체스코 성의 개축과 실내 장식에도 종사하였으 며, 파비아 대성당의 건립에도 관여하였다.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 수도원을 설계하였는데, 1층과 2층의 기둥 구성에 세심한 배려를 한 복도에는 그 전의 건축에서 볼 수 없는 장중한 느낌이 넘친다. 또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수도원의 템피에토에서는 고대의 원형 신전을 본뜨면서도 이를 새 시대의 새로운 건축 이념에 맞춰, 단정한비례와 조화 있는 공간 구성으로 아름다운상승 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가 직접 만든 바티칸 궁전 벨베데레(전망대)는 이 시기의 가장 아름다운 구성으로 유명하 다.
브라크(Georges Braque)-(1882~1963)
세잔의 이론을 가장 충실하게 전개시켜 나갔으며, 프랑스 특유의 정서가 깃든 작품을 그렸 다. 피카소와 같은 작업실을 사용하여 입체파의 이론을 확립하였다. 브라크의 집안은 조부 때부터 간판을 그리는 직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브 라크도 어릴 때부터 페인트를 칠하고 간판을 그리는 기법을 자연스럽게 익히게되었다. 1900 년에 파리로 간것도 실은 그러한 간판 그림의 기법을 더 닦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화 가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서면서 그전의 그의 간판 기법이 입체주의 작품에 반영된다. 작 품의 문자와 숫자 도입은 그의 성장배경과 관련을 갖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분석적 입체주의 시대의 브라크의 작품은 피카소의 당시 그림과 거의 구별이 안되는 유사 함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이 브라크의 예술적 독자성을 흐리게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 둘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당시같은 아틀리에를 쓰며 공동작업에 몰두하고 있었고, 서로가 서로의 그림에서 영향받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브라크는 피카소가 다른 화풍으로 전향한 후에도 진정한 입체주의자로 남아 입체파를 완성시키는 업 적을 이루게 된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브라크를 피카소가 주도하는 입체파를 형성하 는 무리 중 한 화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1911년에 이르면, 피카소와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른 브라크의 요소가 차차 엿보이기 시작한 다. 이 그림에서도 보게 되는 숫자나 문자의 도입이 그것이다. 브라크의 1938년작인 [과일과 기타]는 브라크의 예술이 가장 다채롭게 무르익던 시기인 1930년대 사이에 그려진 장식성 짙은 일련의 작품의 하나이다. 독특한 구성의 짜임새는 양 쪽 주황색 벽면 사이에 가져온 테이블에 비쳐 든 빛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그리고 정물들은 캔버스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따스한 광선을 받으며 놓여 있다. 이 화면에서도 입체주의의 전형적인 수법이 반영되고 있으나, 과거의 엄격한 입체주의 의 논리에서 벗어난 그만의 독자적인 화풍이 완성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주제의 대상들은 마치 불 속에라도 빨려 들어간 듯부풀어 있고, 윤곽선은 유동적이다. 가령 자주 등장했던 기타의 곡선은 불에 녹아 버린 듯 호리병같은 단순한 유기적 형태로 변화되 어 있다. 그리고 이 기묘한 된 기타는 그 왼쪽의 과일, 꽃병등의 정물체들과의 조형적 균형 에 의해 미묘한 생명을 부여받고 있다. 레스타크의 집들이라는 작품은 원근법을 버리고 색 채로써 형태를 구축하였다. 그는 빛이 한곳에서만 비치는 풍경대신 각각의 형태들이 따로따 로 빛을 받게 했다. 주요 작품 : 물고기가 있는 정물, 에스타크의 집들, 파이프를 물고 있는 남자, 커다란 누드 등 브라크 (Georges Braque,1882~1963) 프랑스의 화가. 파리 근교에서 태어났다. 피카소와 함께 큐비즘(입체파)을 창시하고 발전시킨 작가로서, 20세기 미술에 결정적인역할 을 하였다. 1900년 파리로 나와 아카데미 쥘리앙에 들어간 뒤 포비슴(야수파)에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피카소와 알게 되어, 함께 큐비즘을 창시하였다. 피카소가 카멜레온처럼 자주 변모하는 데 비하여, 그는 자신의본래 개성에 따라 차분히 큐 비즘의 가능성을탐구하였다. 초기에는 풍경을 주로 그렸고,중기 이후는 정물·실내·인물 등을 주제로삼았는데, 그 구성 의 밑바탕에는 항상 이성과 감각의 미묘한 조화를 최대로 중시하는프랑스적인 전통이 풍긴 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감은 만년에 이를수록 더욱우아한 세련미를 더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앙베르 항구〉 〈레스타크의 짐들〉 〈기타를 든 남자〉 등이 있다.
브뢰겔 (Pieter Bruegel the Elder,1525~1569)
네덜란드의 화가. 16세기의 가장 위대한 플랑드르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반 에이크이래 북유럽 자연주의에서 출발한 그는 이탈리아 유학 도중에 알프스의 풍경에 감 명을받고 스케치한 풍경화를 남겼는데, 그 중 21점이 전한다.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주로 민간 전설·습관·미신 등을 주제로 하였으나,브뤼셀로 이주한 뒤로는 농민 전쟁 기간의사회 불안과 혼란 및 에스파냐의 가혹한 억압 정치에 대한 격렬한 분노 등을 종교적 제재를 빌어서 표현한 작품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 뒤로는 점차 구도가 단순화되고 인물수도 적어졌으며, 극적 요소를 버리고 순수 하게 사실적으로 때로는 비유적으로 농민의실상을 묘사하여 최초의 농민 화가가 되었으며, ‘농민 브뢰겔’로 불린다. 그는 엄격한선의 묘사를 통하여 독특한 스타일을 표현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사육제와 사순절사이의 다툼〉 〈아이들의 유희〉 〈바벨탑〉 〈네덜란 드의 속담〉 등이 있다.
브루좌 리얼리즘(Bourgeois Realism)
지난 1970년대의 전반기 5년 동안에 초창기 근대 미술의 최대 적수었던 이른바 살롱화 (salon painting)에 관한 다수의 책이 출간되고, 전시회도 빈번히 열렸다. 이때 부제로 W.A.Bougereau, 라이튼(Lord Leighton), 들라로시(Poul Delaroche), 글라이르(Charles Gleyre)등과 같은 관변 화가들의 작품에 대해 '부르좌 리얼리즘'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절정기에 달한 중류 계급의 사회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었 다.(보다 정확히 얘기해서 이용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응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 다.) 1850년대에는 살롱화가 '소방수의 미술'이라고 불린 적도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림속 에 묘사되고 있는 고대의 영웅들이 일반적으로 당시 프랑스 소방수들이 쓰던 헬밋과 닮은 투구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1876~1958)
블라맹크는 야수주의 작가중에서 가장 야수적인 정열을 소유한 작가였다. 빨강과 녹색의 대 비를 통해 강렬한 느낌을 주는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블라맹크는 한때 음악에 열중하기도 하고, 자전거 경주 또는 프로 레슬러와의 시합등 당당 한 체구와 성격에 어울리는 활동적인 경력을 소유한 사람이다. 정규교육이라고는 받은적이 없는 그는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순수한 색채를 튜브에서 직접 짜서 그림을 완성하고 싶다. 여태까지 나는 나의 파괴 적인 본능을 실감하고, 이를 생생하고 자유로운 세계를 재창조하는데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야수주의 작가들이 귀스타브 모로의 화실에서 공부한데 비해, 모든 전통적인 기 법과 소재를 거부하면서 내적 표현의 매체로 색채의 자율적 가치를 강조한다. 그는 "예술은 본능이다." 라고 단언하면서 자신의 내적 충동을 과감하게 분출시켰다. 회화에 의해서 무엇보다도 자기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회화라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생명 표현의 한 수단으로 나타났다. 색채의 불협화음과 과장되고 기괴한 분위기의 작품을 주로 제작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속에 흐르는 개인적인 분방한 성격때문이었다. 또한 아카데믹한 권위를 무시하고자한 반항적인 의지에서 유래하는 것이었다. 1904~07년까지는 튜브에서 짜내는 물감을 그대로 캔버스에 칠하는 기법으로 색채를 구사한 다. 1906년에 그린 [빨간 나무가 있는 풍경]과 [서커스]는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의 직관적인 정열이 낳은 강렬한 원색의 힘찬 선은 진정 야수주의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1907년 세잔느의 작품과 만난 이후 그의 작품은 강렬한 원색의 빛이 사라지고, 흐린 청색 또는 다갈색을 주조로 한 구성적인 방향으로 전환된다. 1910년 이후 그의 작품에는 힘이 있고 일반적으로 세느강 풍경이나 일-드-프랑스 지방의 경치를 소재로 한다. 대전후 블라맹크의 사실주의는 점차 강화되고 독일 표현주의와 네덜란드 자연주의적인 화 풍에 근접해갔다. 세상과의 교류도 없이 폭풍이 휘몰고 간후 황량한 풍경을 탐색으로 표현 한 그림을 그리며 여생을 마쳤다. 주요 작품 : 붉은 나무가 있는 풍경, 초가집, 풍경 등 블라맹크 (Maurice de Vlaminck,1876~1958) 프랑스의 화가. 대표적인 포비슴 화가로 손꼽힌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유 방임적 가정 환경에서 자라나 12세부터 독학으로그림 공부를 하고, 악단에서 바 이올린을 연주하거나 기계공 등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이어갔다. 화가를 지망하였으며 고흐의작품들을 보고 정열적인 작풍에 깊이 감탄하여 강렬한 원색과 분방한 필치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또 입체파 화가들과도 사귀어 감화를 받기도 하였으나, 자기 나름의정열적인 작품 세계로 돌아갔다. 그 뒤부터즐겨 그린 거친 날씨의 어두운 풍경화나 정물에는 힘찬 데포르마시옹(변형, 과장) 과 비극적인 느낌을 바탕으로 표현주의적인 기백이 넘치며, 본래의 특색인 야성의 부르짖음, 생명감의 약동이 일관하여 엿보인다.
블레이크 (William Blake,1757~1827)
영국의 시인·화가. 런던에서 태어났다. 정규교육은 받지 못하였고, 15세 때부터 판화가밑에서 일을 배웠으며, 왕립 미술원에서 공부 한 적도 있다. 1783년 친구의 도움으로《습작 시집》을 출판하였으며, 1784년 아버지가 죽은 뒤 판화 가게 를 열어 채색 인쇄법을 고안하였다. 어릴 때부터 비상한 환상력을 지녀 창가에서 천사와 이야기하고 언덕위에 올라 하늘을 만진 체험이 있다고 하며,그러한 신비로운 체험을 최초로 표현한 것이《결백의 노래》이다. 이 시집은 자연과 인간의 세계에는 순수한 사랑과 아름다움으로가득 차 있다는 사상이 바탕 을 이루며 그는인간의 근원에 있는 2개의 대립된 상태, 즉이성과 활력의 조화가 새로운 도 덕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경험의 노래〉 〈아메리카〉 〈유리젠서〉등이 있다.
비구상
피규라티프의 부정형. 피규라티프는 이탈리아어로 조형 예술 일반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지 만, 프랑스어로는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 대상을 재현한 회화 또는 조각, 즉 구 상 미술을 가리킨다. 따라서 비구상은 그러한 구체적 대상에 부정적·추상적인 경향을 띠는 작품을 의미한다. 엄밀하게는, 예컨대 바젠, 마네시에, 에스테브 등과 같이 뚜렷이 구상적 이 미에서 출발하여 차차 그 이미지를 추상화하고, 최종적으로는 무엇을 그려놓았는지 재인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경우를 의미하므로, 칸딘스키나 몬드리안과 같이 처음부터 추상적 원리 에 바탕을 두고 제작하는 순수 추상 미술과는 구별되어야 할것이나 흔히 추상과 구별없이 쓰고 있다.
비디오 예술(Video Art)
비디오 즉 텔리비전을 매체로 하는 현대 예술의 한 경향. 비디오 예술의 발전에 대한 기본 전제는,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표현 방법을 제공하는 색채 유희, 빛의 유희같은 키 네틱적인 발명들이다. 그러나 50년대까지 영화가 텔리비전에 비해 우세한 위치에 있었던 반 면에 60, 70년대의 현대적인 비디오 기술의 발달은 20년대의 전위 영화처럼 비디오 예술이 나 전자 예술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텔리비젼을 통한 새로운 예술 매체를 가능하게 하였다. 즉 예술적인 텔리비젼의 첫 생산물은 50년대에 일반화된 텔리비젼 수상기에 힘입어 나타났 으며 영화 매체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키네틱 예술가들의 광선 쇼 이외에 네오 다다이즘적 행위예술과 오브제 예술은 창조 행위 자체에 텔리비전 장치를 끌어들였다. 그래 서 1959년에 포스텔(Vostell)은 해프닝 <백만을 위한 텔리비젼>을 기획했으며 웨셀만은 1963년의<거대한 눈>에 텔리비전 장치를 설치했다. 1963년 백남준과 포스텔은 전자식 텔리 비전의 기술적이 방법을 조형적인 매체로 이용했다. 그들은 텔리비전 화면을 전자기장의 조 작을 통해 해체시킴으로써 정상적인 화면을 추상의 연속으로 왜곡시켰다(텔리비젼 데콜라 주). 캐프로는 자신의 해프닝 예술에서 감독과 베우사이에 사용되는 도구들이라고 할 수 있 는 텔리비젼 카메라와 모니터를 관객을 위해 활용했다. 비디오 예술은 1969년 첼리스트 샬 롯테 무어맨이 백남준의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자>라는 기상천외한 플룩서스 행위 예술에서 사용함에 따라 예술의 장르에 들어오게 되었다. 백남준은 나체의 여자 첼리스트 무어맨의 유방에 꼭 묶여진 두 개의 모니터를 통해 객석의 모습 혹은 첼로 연주를 FM방식 으로 방영했다. 1969년 비디오 예술을 위한 <창조적 매체로서의 TV>라는 기획전이 뉴욕 하워드와 와이즈 화랑에서 개최되었다. 게리 슘은 프로세스, 대지 미술, 그리고 개념 미술 등을 위해 '비디오 엔솔로지 대지 미술전'(1969)을, 그리고 유럽과 미국의 예술가들과 공동 으로 '식별(identification)전’(1971)을 열었다. 텔리비젼 행위주의는 70년대에 발리 엑스포트와 피터 웨이블의 연출을 통해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1970년 백남준이 개발한 신디사이저를 이용한 최초의 텔리비전 조각이 만들어졌으 며 이것은 바지크나 데이비스 같은 예술가들에 의해서도 이용되었다. 그와 동시에 광선 쇼 와 유사한 비디오 인바이런먼트(Video Environment) 와 팝 음악을 결합한 작품이 등장했으 며, 여기에서 환상적인 옵토포네틱(Optophonetik)을 포착하려는 시도들이 경주되기도 했다. 70년대의 매체인 비디오는 무엇보다도 신체 미술이나 퍼포먼스에서 제스처를 강조하거나 변 화 과정을 보여주려는 예술가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엔나
환상파 정확하게 말하면 비엔나 환상적 리얼리즘파. 제2차 세계대전 후, 비엔나 미술학교의 알베르 트 파리스 귀터슬로 교수밑에서 공부하며 제작을 시작한 루돌프 하우스너, 에리히 브라우어, 안톤 렘덴, 볼프강 후터 등의 화가들과 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표현양식을 말한다. 초현실 주의 계보를 떠나 시종일관 구상 회화에 집착했던 그들은 화려한 색채와 정밀한 묘사 기법 으로 극히 문학적인 회화 세계를 이룩했다. 일반적으로 의식 밑의 영역에 대한 동경이 강하 고, 침울한 환상과 묵시록적 비젼을 특징으로 한다. 당시 미술계의 일반적인 동향과 비교해 보면 그것의 모습은 지극히 이질적이었으며 그런만큼 그것의 등장은 층격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많은 후계자가 생겨, 특히 1960년대 이래 국제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다.
비엔날레
격년제라는 의미로, 미술의 분야에서는 2년마다 열리는 전람회 및 그밖의 행사를 말한다. 따 라서 세계 각지에 갖가지 비엔날레가 있지만, 가장 역사가 길고 권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것은 베네치아(베니스)시에서 짝수해마다 개최되는 비엔날레이다. 그밖에 브라질 상파울루의 '국제 비엔날레', 파리의 '국제 청년예술가 비엔날레', 토쿄의 '국제 판화 비엔날레'가 있다. 어느 경우도, 널리 국제적인 행사로서 각국의 기예의 예술가들이 모여 솜씨를 겨루는 대결 장이 되고 있으며 현대 미술의 발전에 커다란 자극을 주고 있다. 그러나 수상 전형을 둘러 싸고 갖가지 논쟁과 때로는 정치적 상업적 거래가 벌어지거나, 예술가의 매명행위가 보이기 도 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한편 3년마다 개최되는 같은 종류의 행사는 '트리엔날레', 4 년마다 개최되는 것은 '쿼드리엔날레'라고 불린다.
비잔틴 미술(Byzantine Art)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동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한 330년부터 시작되어 터키 의 오토만 제국에 의해 점령된 1453년까지 동방 기독교 사회에 발전한 기독교 미술. 비잔틴 제국은 11세기 동안 존속하면서 처음에는 지중해 연안 대부분을 차지하였지만, 7세기 이후 점차 영토를 잃어갔다. 그러나 비잔틴 미술은 그 지리적, 정치적 영역에 국한되어 언급될 수 없는데,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고 난 뒤에도 그 예술적 전통은 지속된 바 있으며 러시아 등 슬라브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동방과 서방 간의 구분이 명확 히 설정되지 않아 지중해 연안의 여러 예술 형식들이 상호 교차하고 있었다. 비잔틴 미술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절 소피아 성당이 지어지던 때에 절정에 달하였다. 이 시기의 일반 적 경향은 로마 제국을 재건하여 비잔틴의 영광과 위대성을 찬미하는데로 흘렀다. 특히 8, 9 세기에 성상의 표현이 예배 대상으로 될 수 있으냐의 여부와 관련된 우상 파괴 논쟁이 있었 다. 두 번셉 황금기는 마케도니아의 여러 황제들이 통치하던 시기(867∼1057)에 도래하였다.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라 불리는 당시에 이슬람 예술의 소재가 풍미하였으며 고대의 유물들도 새로운 각도에서 수용되었다. 11세기 중기부터 서유럽 세력이 점차 확대되어 갔고 비잔틴에 대한 유럽측의 공격도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비잔틴 예술은 쇠퇴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후 비잔틴의 예술에서 새로운 양식이 등장하는데, 이 시기가 세 번째 황금 기에 해당한다. 비잔틴 르네상스라 불리는 이 시기에 비잔틴의 세력은 최악의 수준에 직면 하였지만 그 예술은 베네치아, 남부 이탈리아, 시칠리,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고 러시아로 침투해 들어갔다. 비잔틴 미술의 전반적인 성격은 몇 갈래로 나눠지는데, 종교적인 성격이 가장 두드러진다. 공예, 모자이크화 그리고 세속적인 그림 등 비종교적 미술도 있었지만 이는 기독교에서 소 재를 취한 미술에 비하면 미미한 편이다. 그리고 비잔틴 미술은 개인적인 해석의 자유를 갈 망하지 않고 오히려 정통 교리와 교회의 강령에 충실하였다는 의미에서 신학적인 성격을 지 닌다. 그러므로 비잔틴 미술들은 신학자들의 사상과 종교 회의의 결정 사항들을 신자들에게 미술의 언어로서 가르치고 유포한다는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비잔틴 미술은 익명적인 동시에 전통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자연히 미술가의 역할은 사제의 역할과 유사하게 되었으며 교훈보다는 예배적인 기능이 더 강하였다. 바로 이런 점에서 비 잔틴의 신학적인 미술은 본질적으로 중세 서양의 교훈적인 미술과 차이가 난다. 심지어 비잔틴 미술이 황제를 찬양하는 것일지라도 그 종교적이며 신권주의적인 성격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비잔틴에서 황제는 동방의 통치자요 신격의 현세적 이미지로 재현되 었다. 따라서 비잔틴 미술은 엄정한 양식화의 질서 내에서 진전되었다. 그리고 미술의 주제 가 인간과 그 유사물로서의 자연이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비잔틴 미술은 지상의 개인과 인간 을 피하고 초인, 절대자를 동경하였다. 정연한 양식을 이룩함으로써 비잔틴 미술은 예술에서 인간성을 타파하였고 형식에 무수한 성질의 상징을 불어넣었다. 즉 비잔틴 미술은 자연주의 적이지 않고 제의적이었다. 한편 비잔틴 미술은 환조보다는 채색품이 중시되고 풍부하며, 현란한 점에서 동방적인 성격 을 볼 수 있다. 비잔틴 미술에 대한 세부적인 고찰은 ① 건축 ② 조각, 모자이크화, 벽화 ③ 장식 공예로 나눠진다. 비잔틴 건축의 유적은 콘스탄티노플에만 남아 있으며, 절충주의적인 성격이 강하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건축가들은 잘라낸 석재, 얼주 그리고 목재 천정을 이용 하면서 고대의 시공법을 계속 사용하였다. 기다랗거나 바실리카형의 도면에 따른 건물은 교 회 전용의 것이었다. 교회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 이후 거대한 바실리카는 그리스-로마 지역권에서 전반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시기는 4∼6세기였다. 6세기 이래 비잔틴 건 축은 이전과는 달리 벽돌과 둥근 천장 그리고 돔을 사용하였고, 시공 방식과 도면도 달랐다. 나무를 쓰지 않은 둥근 천장이 다양하게 개발되었으며, 특히 궁륭 모양의 양식이 애호되었 다. 돔의 유형도 다양하였으나, 사각형에서 원형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그들은 더욱 의도적 으로 스퀸시(squinch)보다 펜덴티브(pendentive)를 더 애호하였다. 6세기 이후 비잔틴 건축 가들은 원형의 교회뿐만 아니라 바실리카 구조를 다소 간직한 성당도 지었는데, 목재 천장 대신에 둥근 천장을 이용하여 바실리카의 효과를 완전히 변색시켰다. 비잔틴 건축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유적은 537년부터 지어진 소피아 성당(콘스탄티노플 소재)이다. 교회 장식용으로 활용된 조각은 원주, 코니스 그리고 석재의 강당 칸막이에 국한되었다. 이 조각들은 저부조, 투명 세공 또는 샹르베 칠보(금속 바탕에 장식 무늬를 새겨 에나멜로 메 움)로 되어있다. 저부조가 마모된 부분은 모자이크화와 프레스코화로 채워졌으며, 이들 모자 이크화와 프레스코화는 처음에는 둥근 지붕과 천장에 등장하여 점차 벽에도 그려졌다. 더러 예외는 있으나 모자이크화는 오랫동안 특히 대형 기념물에서 빈번하게 나타났다. 그리하여 비잔틴 말기에 들어서서야 거의 독점적으로 채택되기에 이른 프레스코화의 중요성은 증대하 여 갔다. 비잔틴의 도상은 그 소재와 주제를 고대의 특히 알렉산더 시대의 예술에서 차용하여 가끔 상징적인 의미를 덧붙였다. 신자들을 교육시키고 경전에 대한 시각적인 해설을 도모하기 위 하여 신약과 구약을 대상으로 한 일련의 그림이 창안되었다. 우상 파괴의 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숱한 기념물이 파괴되었고, 한때 세속적 패턴의 회교권 미술에서 영향을 받은 장식물 이 대신 들어섰다. 하지만 우상 파괴 운동은 수도승들의 영향하에 새로운 종교적 도상이 형 성될 즈음에 절정에 달하였다. 르네상스가 시작될 즈음 비잔틴 제국은 쇠퇴하고 있었지만 비잔틴의 미술은 오히려 서 유럽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며, 도상과 더불어 그림의 양식도 변하여 갔다. 그림 장면은 더욱 증가하고 군상의 인물들이 화면을 채웠으며 소재는 보다 자 유분방하면서도 인간미가 넘치게 처리되었다. 비잔틴의 장식 공예는 그 윤택하며 세련된 문화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으며, 제국의 궁정과 대도시 귀족들의 취향을 반영하였다. 상아, 비단, 보석 그리고 필사본은 운반이 용이 하였으므로 비잔틴 양식의 전파에 이바지하였다. 상아로 된 인물상은 유명한 성당의 장식품 가운데서 빛을 발하였으며 모직물, 주단, 수예품은 비잔틴의 특산물이었다. 한편 금세공사의 작품과 칠보 제품도 비잔틴 인들이 애호한 공예품이었다.
비판적 리얼리즘(Critical Realism)
이 용어는 부르좌 사회으 해악들을 정확하게 묘사함으로써 사회주의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 킨 문학 작품들에 대해 러시아 문학 비평가들이 수십년간 사용해온 것이다. 헝가리의 지외 르지 루카치와 같은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는 비판적 리얼리즘을 러시아 혁명 이전의 상황에 적합한 양식으로 규정했다. (혁명 이후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비판적 리얼리즘을 대신하 게 된다). 시각 예술에 있어서 '비판적 리얼리즘'은 일군의 독일 예술가들 -한스 유르겐 디 엘, 볼프강 페트릭, 페터 조르게, 클라우스 포겔겐장 그리고 베티아 폰 마르님 등- 에 의해 채택된 용어였다. 이들은 신문이나 잡지에서 소재를 택해 포토 몽타주를 만들어 현대 문화 를 공격했다. 스웨덴의 페터 달은 자신의 그림<소파 모퉁이에서의 꿈>이라는 제목의 연작 들에 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 작품들은 스웨덴 왕의 인물을 성적인 환상을 느끼게 하는 이미지로 묘사해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빙켈만 (Johann Joachim Winckelmann,1717~1768)
독일의 미학자·미술사가. 슈텐달에서 태어났다. 매우 가난하여 고학으로 할레·예나대학 등에 다녔으며, 귀족의 도서실 사서로일하면서 고 대 그리스 문화를 연구하였다. 드레스덴으로 옮긴 뒤에 《회화 및 조각에있어서의 그리스 미술품의 모방에 관한 고찰》을 펴내어, 그 당시 일고 있던 고전주의사상의 선구자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같은 해 로마로 간 뒤부터는 그 곳에 수집되어있던 고대 유품과 각지의 유적에 대한 조사연 구 및 저술 활동에 전념하면서, 그 동안에바티칸 도서관 서기, 고미술 보존 감독관으로 일하 기도 하였다. 그 밖의 저서로는 《고대 미술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