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창림사지를 둘러보고
정석준
경주시가 최근 문화재 보존 및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경주남산 서쪽에 위치한 창림사지 발굴조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오릉을 지나 내남 가는 국도를 따라 가면 좌측 편에 나정, 육부전 푯말이 보이고, 그 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남간사지 당간지주가 나온다.
‘당간’은 절에서 불교 의식을 할 때 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이라는 깃발을 말하며, 이 당간을 받쳐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남간사지 당간 지주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그 구조가 단순하며 안정감을 주고 있다.
당간지주 앞으로 난 농로를 따라 800미터 쯤 가면 창림사탑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창림사가 창건되기 이전에 이곳에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께서 이곳에 최초의 궁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창림사지에는 궁궐의 자취는 찾아 볼 수가 없고, 절터로서도 너무나 흐트러져 버렸다. 절터의 석물들은 인근의 민가에서 건축자재로, 또는 분묘의 석물로 사용하기 위해 가져 가 버려, 지금은 일부의 토단과 석단만 남아 근근이 이곳이 절터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창림사터 윗쪽에 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 탑은 1824년 사리장엄구를 도굴하려던 자에 의해 도괴되었는데, 이 때 조탑 사실이 기록된 창림사 무구정탑원기(昌林寺 無垢淨塔願記) 동판이 나왔다. 이를 추사 김정희가 그대로 묘사해 두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창림사터 삼층석탑은 문성왕 17년(855년)에 세운 탑이라고 한다. 현재 탑의 높이는 7m로 남산 일대에서는 가장 크고 우람한 탑이다. 1979년에 이리저리 넘어져 있던 탑의 부재들을 모아 복원하였는데, 2층과 3층 몸돌, 그리고 기단부의 절반 정도를 새로 다듬어 끼워 넣었다.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인데, 위층 기단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팔부신중을 기단에 새긴 예는 남산의 동쪽에 있는 남산동 쌍탑 중 서탑에서도 볼 수 있으니, 남산을 부처님 나라로 여기던 신라 시대에, 남산의 해뜨는 쪽과 해지는 쪽에 같은 의도로 탑을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1층 몸돌에는 사방에 문 모양이 새겨져 있고 문고리도 쌍으로 새김 되어 있어 부처님의 영(靈)이 드나드는 문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탑이 무너져 있던 북쪽 골짜기에서 탑 위 상륜부의 일부인 앙화가 발견되어 지금 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여기에는 8개의 꽃잎이 벌어져 있는데, 사방에는 부처님 모습을 새겼고, 네 귀퉁이에는 날개를 활짝 편 극락조(極樂鳥)를 새긴 화려하면서 멋들어진 모습이다.
상층 기단부에 새겨진 팔부신중은 지금 네 개만 남아있다. 팔이 여덟인 괴상한 모습을 한 지옥의 왕 아수라, 사자탈을 쓰고 놀이를 주관하는 건달바, 오른손에 금강저라는 무기를 들고 악을 쳐부수는 천(天), 힌두교에 근원을 둔 뱀나라의 왕 마후라가, 이렇게 넷이다. 모두 구름을 타고 천의(天衣) 자락을 날리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인데, 풍성한 양감과 힘이 느껴지는 뛰어난 조각 솜씨이다.
탑 아래쪽 소나무 숲 속에 아주 이색적인 쌍두귀부가 있다. 비신(碑身)도 없어지고 거북의 머리도 다 떨어져 나가고 없지만, 살이 통통히 오른 동글동글한 앞발이며 서로 다른 쪽을 향하고 있는 모습들이 무척 귀엽다. 이 귀부 위에는 신라의 명필 김생이 쓴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원나라의 학사 조명부가 창림사비의 글씨를 평한 글 일부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21권 경주부에 "이 글은 신라의 스님 김생이 쓴 창림사비인데, 자획이 깊고 법도가 있어 비록 당나라의 이름 난 조각가라도 그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옛말에 '어느 곳엔들 재주 있는 사람이 나지 않았으랴'하였더니 진실로 그러하구나."라는 기록이 있는데, 진실로 그러하다.
『동경잡기』<권3 오산기승(鰲山奇勝)>에는 창림사비문과 관련된 서거정의 시가 소개되고 있다.
바닷가에서 금오산을 바라보면 좋기도 하나 풍류와 문물 모두 옛날과 다르다.
웅장했던 저택들 터만 남아 있는데 냉이풀이 우거졌고
이름났던 동산에는 주인도 없이 끊어진 다리만 위태롭구나
누가 쇠피리를 신이 나서 부르는가?
몇 년 전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소나무숲 언덕으로 변해버린 여러 곳에서 건물의 주춧돌로 쓰였을 부재들이 여기저기서 나뒹굴고 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쌍두귀부 옆과 법당 터, 그리고 삼층석탑 바로 앞에도 무덤이 들어서 완전히 무덤터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오늘 와서 보니 무덤을 전부 옮기고 소나무를 제거하는 등 주변을 깔끔하게 잘 정비하여 놓았다. 경주시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관광객이 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창림사지 앞 도로를 2차선으로 확장하고, 주차장도 마련할 것이라고 한다. 만시지(晩時之歎)의 감이 없지 않으나 시민의 한사람으로 큰 박수를 보낸다.
(경주문학 제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