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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우주관[4법계]과 성리학의 이기론
4법계(四法界)란 우주의 질서를 설명하는 화엄종의 우주관이다. 화엄사상의 기본 철학적 구조는 법계연기(法界緣起)이다. 즉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일이 없이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돼 중중무진(重重無盡, 끊임없이 이어짐) 관계로 엮임으로써 대립을 초월해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사상을 말한다. 무진연기(無盡緣起)의 법칙과 뿌리를 같이 한다.
화엄경의 교리에서 사법계란 법계(法界, 인식 대상)를 4가지 방면으로 관찰해 4가지 법계로 나누는 것이니, 곧 현상과 본체와의 상관관계를 사법계(事法界)·이법계(理法界)·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礙界)의 넷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사법계는 <화엄경>의 중요한 이치만이 아니라, 실로 대승불교의 철리(哲理)를 체계적으로 총괄한 것이다. 그러므로 4법계란 대승불교의 우주관 내지 궁극적 이치를 말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법계(事法界)
사법계란 현재에 생겨나고 변천하고 없어지고 하는 여러 가지 차별한 현상계(現象界)를 말하는 것이다. 이 현상계의 모양이 천태만상(千態萬狀)이어서 통틀어 표시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지마는, 불교에서는 이것을 5온(5蘊: 色ㆍ 受ㆍ 想ㆍ 行ㆍ 識)이라고도 하고, 75법 혹은 100법이라고도 하는데, 일체 만물이 끊임없이 생멸변화하여 한 순간도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질은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는 4가지 모습으로 잠시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의 육신은 생노병사(生老病死)하며, 정신 또한 생주이멸(生住異滅)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처럼 찰나 간에도 변화하는 사법계[현상계]이다.
모든 현상은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일어나는 생멸을 끝없이 반복한다. 이 생멸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없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리석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부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셨다.
부처님이 바라나시의 녹야원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부처님은 다섯 비구에게 설법 하다가 이런 질문을 했다.
“비구들이여, 내가 물을 테니 아는 대로 대답해 보라. 육체(色)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인가, 시시각각 변해서 무상한 것인가?”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한 것이라면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육체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나의 것(我所)이며, 나(我)이며, 나의 본체(我體)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가 아닙니다(無我).”
“그러면 정신의 세계인 느낌(受)과 생각(想)과 의지(行)와 의식(識)은 어떠한가?”
“그것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며, 즐거운 것이 아니며, 나의 것도 본체의 것도 아닙니다.”
“참으로 그러하다. 그렇게 관찰하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나의 성스러운 제자들은 모든 존재(五蘊: 色.受.想.行.識)를 싫어하게 된다. 모든 존재를 싫어하면 탐착하지 않게 되고, 탐착하지 않으면 마침내는 해탈(解脫)을 얻게 된다. ‘해탈을 얻게 되면 미혹한 삶은 끝났다. 더 이상 미혹의 삶을 되풀이 하는 일(輪廻)이 없을 것이다’라고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상윳타 니카야 23 : 13)
이법계(理法界)
이법계란 우주 만상의 참 성품인 본체계(本體界)를 말하는 것이니, 한량없이 차별한 현상계인 사법계는 만물이 생겨나서 변천하다가 필경에 없어지는 것이지만, 이 본체는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고 늘지도 줄지도 아니하면서 끝없는 세월에 변하지 않는 절대의 진리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만법의 참 성품인 본체계(本體界=理法界)를 공(空)이라고 한다. 공이란 결코 어떤 물건이 있다가 없어진 상태나, 텅 빈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범어 슈냐(Sunya)의 음역으로 실체나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니,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생기(因緣生起)하는 것이기에 시간적으로 무상하고 공간적으로 무아(無我)여서 결코 어떤 변치 않는 영원의 고정된 실체나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기는 곧 공인 동시에 현상계의 유(有)이며 이것이 또한 중도(中道)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은 공(理=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제법공상 불생불멸(諸法空相 不生不滅)-모든 존재의 본성은 공하여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불구부정 부증불감(不垢不淨 不增不減)-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반야심경)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철학도 많고 종교도 많지만, 불생불멸에 대해서 불교와 같이 이토록 분명하게 주장한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다. 그래서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불교의 전용이요, 특권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과학이 자꾸 발달하여서 요즘에는 불교의 불생불멸에 대한 특권을 과학에 빼앗기게 되었다. 과학 중에서도 첨단과학인 원자물리학에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데 성공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인데,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에서 등가원리(等價原理)라는 것을 제시했다. 자연계는 에너지와 질량, 이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전 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을 각기 분리해 놓고 보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에서는 결국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에너지라는 것이다. 즉 에너지와 질량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전에는 에너지에서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 질량에서는 질량불변의 법칙을 가지고 자연현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였는데, 지금은 에너지와 질량을 분리하지 않고 ‘에너지 보존의 법칙’하나만 가지고 설명을 한다. 곧 질량이란 것은 유형의 물질로서 깊이 들어가면 물질인 소립자이고, 에너지는 무형이 운동하는 힘이다.
이것을 물과 얼음에 비유하면 아주 알기 쉽다. 물은 에너지에 비유하고 얼음은 질량으로 비유한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면 물은 없어진 것인가? 물이 얼어서 얼음으로 나타났을 뿐 물은 없어지지 않았다. 얼음이 녹아서물이 되면 얼음은 없어진 것인가? 얼음이 물로 나타났을 뿐 얼음은 없어지지 않았다. 결국 물이 얼음으로, 얼음이 물로 나타났다 할 뿐이고, 그 내용을 보면 얼음이 곧 물이고 물이 곧 얼음인 것이다. 에너지와 질량 관계도 이와 같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나타나고 질량이 에너지로 나타날 뿐, 질량과 에너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질량 전체가 에너지로 나타나고 에너지 전체가 질량으로 나타는 이런 전환의 전후를 비교해 보면 전체가 서로 전환되어서 조금도 증감이 없다. 곧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불생불멸이니 마땅히 부증불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탓에 이런 표현을 그대로 말하지 못해도, 그 내용은 꼭 같은 말로써 에너지와 질량 관계가 잘 보존된다고 한다. 보존된다는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불생불멸, 부증불감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법의 세계, 곧 법계라고 한다. 항상 머물러 있어서 없어지지 않는 세계, 상주법계라는 말이다.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이상(理想)의 깨달음의 세계가 현실인 미혹의 세계와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는, 번뇌 즉 보리, 현실 즉 이상의 세계이다. 모든 현상과 진리는 일체불이(一切不二)의 관계에 있다는 세계관을 말한다.
이사무애법계란 차별한 현상계와 평등한 본체계와의 관계가 그것이 곧 그것이어서 서로 여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니, 하나의 이법(本質, 眞如)에 대하여 변하지 않는[不變] 뜻과 인연을 따르는[隨緣] 뜻이 있다는 것이다. 고요한 편으로 보면 이법에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 움직이는 편으로 보면 인연을 따라서 전체가 움직여서 온갖 현상으로 펼쳐진다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이법은 참되고 불생불멸한 우주만유의 본체라, 이런 이법이 생멸 변화하는 현상계의 만유를 연기시킨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대승기신론>에서는 이법(本質)엔 불변하는 면과, 수연(隨緣)하는 면과의 2면(二面)이 있다고 하여 그 연기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으니, 그 본체는 절대 불변이지만 현상적인 면으로 볼 땐 연(緣)을 따라 생멸 변화한다고 한다. 즉 이법은 그 본성을 변치 않고 연을 따라 온갖 차별현상을 나타낸다는 것이니, 비유하면 금으로 팔찌 반지 귀걸이 목걸이 등, 여러 가지를 만들어 제각기 현상은 다르지만 금으로서의 제 바탕은 한결같이 불변인 것과도 같다고 하겠다.
부처님은 이(理, 존재의 본질)와 사(事, 현상)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이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니라.(반야심경)
여기서 색(色, 事法界)이란 유형(有形)을 말하고, 공(空, 理法界)이란 것은 무형(無形)을 말한다. 유형이 곧 무형이고 무형이 곧 무형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유형이 무형으로 서로 통하는가? 어떻게 허공이 바위가 되고 바위가 허공이 된다는 말인가 반문할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질문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공이고, 허공이 바위이다.
어떤 물체, 보기를 들어, 바위가 하나 있다. 이것을 자꾸 나누어 가다 보면, 분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을 알 수 있다.분자는 또 원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이고, 원자는 또 소립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이다. 바위가 커다랗게 나타났지만 그 내용을 보면 분자→원자→입자→소립자 뭉치이다. 그럼 소립자는 어떤 것인가? 이것은 원지핵 속에 앉아서 시시각각으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하고 있다. 스스로 자기가 충돌해서 문득 입자가 없어졌다가 문득 나타났다가 한다. 인공으로도 충돌현상을 일으킬 수 있지만 입자의 세계에서 자연적으로 자꾸 자기충돌을 하고 있다. 입자가 나타날 때는 색(色, 유형)이고, 입자가 소멸할 때는 공(空, 무형)이다. 그리하여 입자가 유형에서 무형으로 움직임을 되풀이 하고 있다. 그러므로 공연히 말로만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아니다. 실제로 부처님 말씀 저 깊이 들어갈 것 같으면 조금도 거짓말이 없는 것이 확실히 증명명이 되는 것이다.
이법(本體)과 사법(現狀)의 2면(二面)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모순같이도 느껴지나, 그러나 이는 본체와 현상이 따로 없다는 것을 상기할 땐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다시 말하면 본체를 떠나서 현상이 있을 수 없고 현상을 떠나서 본체가 있을 수 없으니, 이런 관계를 일러 “하나도 아니요 그렇다고 또한 둘도 아니다(不一不異)”라고 한다.
이법(本體) 자체를 물에 비유하면, 고요하던 이(理)인 물이, 무명(無明)이란 바람을 만나면 곧 여러 가지 차별한 파도가 일어나는 것이며, 그렇게 한량없이 차별한 현상계도 그 자체나 성품으로 보면 오직 하나의 이법의 이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상계와 본체계는 한 진여의 두 가지 방면으로서 인연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 제 성품이 없는 줄을 알 것이니, 이것이 곧 이사무애법계라는 것이다.
색즉시공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하면 공견(空見)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또 공즉시색이라고 하셨다. 공이 곧 색이다. 공이라는 게 텅 빈 것 같지만 사실은 우주에 꽉 차있을 표현한 것이다.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가 보이지 않고 측정할 수 없지만 분명히 있다. 그 스트레스가 어디서 왔는가? 스트레스가 없는 곳에서 생겼다. 즉 색(스트레스)은 공을 의지해 나타난다.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흔히 공이나 색, 어느 한쪽에 기울어지기 쉽다. 공에 기울어지면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고, 색에 기울어지면 현실주의자가 되기 쉽다. 그 어느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는 것이 진공(眞空)이고, 묘유(妙有)이며, 중도(中道)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공은 세상에서 말하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공’을 가리킨다.
색즉시공에서 공에 기울어지면 참된 공이 아니다. 그래서 불가에서 기울어지지 않은 마음인 중도를 강조한다. 중도란 단지 ‘중간 쯤’이나 ‘적당히’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 그대로 중도이다. 불을 너무 가까이 하면 데이고, 너무 멀리 하면 춥다. 불을 잘 이용하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을 수도하는 쪽으로 돌려라 하는 말이다. 그리하여 밝고 맑은 눈으로 봐야 ‘색즉시공’이 바로 보인다. 하지만 중생의 관점으로서는 참으로 불가사의할 뿐이다. 보이지 않으니까.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색이 변화해 공이 되고, 공이 변화해 색이 되는 관계는 아니다. 시간이 경과하면 색이 변해 공이 되고 공이 변해 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색과 공이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색이 곧 공이고 공이 바로 색이라는 말이다. 공이란 색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지 색이 있는 자리를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반야심경>은 공과 색의 조화로 이뤄지고 짜여 있다. 그래서 공이 없는 색이 있을 수 없고 색이 없는 공도 또한 존재할 수가 없다. 이 둘이 공존해 동등함을 이루기도 하고, 혹은 공이 드러날 경우에는 색이 숨고, 색이 전면에 들어나면 공이 뒤에서 받침이 돼줘서 <심경>의 묘리를 더해 준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안목에 따라 보고 듣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 몇 가지로 분류해서 이야기한 것이 있다.
첫째, 보통 사람들, 즉 범부의 안목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집착해서 본다.
둘째, 성문(聲聞)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가르침에 의존해, 보이고 들리는 모든 존재들이 공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안다. 이와 같이 성문들이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공을 분석공(分析空)이라 한다.
셋째, 연각(緣覺)은 스스로 체험을 통해 모든 존재는 인연헤 의해 결합된 가유(假有)이기 때문에 공하다는 것을 안다. 인연공(因緣空)은 연각들이 이해하는 공이다.
넷째, 보살들은 모든 존재가 존재 그대로 공하다는 것, 곧 당체즉공(當體卽空)의 이치를 안다. 보고 듣는 일은 모두가 환영이며, 삼계는 실제 하지 않는 허공의 꽃(空華)과 같으니, 번뇌가 소멸된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그 모든 것이 꿈속의 일과 같다고 하는 <능엄경> 가르침은 보살의 안목으로 볼 때, 모든 존재가 그대로 공하다는 당체즉공을 말한다.
그런데 성문 연각은커녕 우매한 우리 중생의 흐린 안목으로 공의 세계를 바라보려니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그래서 헷갈리고 어려워서 상주론에 빠졌다가 단멸론에 빠지고 해서 허우적거린다.
여기서 청화 스님 말씀을 들어 보자.
“우리 중생 모두가 거품을 가지고 산다. 아무리 금붙이를 많이 지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림자에 그림자를 붙인 것이다. 마음 찾기에는 하등 도움이 안 된다. 일체물질이 사실은 텅텅 빈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에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했다. 물질 그대로가 공이기 때문이다. 과학자 같이 물질을 분석해서 아는 석공(析空)이 아니라, 당체즉공(當體卽空)이고,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 중생이 생사 윤회하는 삼계에는 오직 마음뿐이란 말이다. 색즉공(色卽空)은 그렇게 분석한 뒤에 공이라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바로 공, 당체즉공이란 말이다. 사람이 곧 공이고, 금즉공(金卽空), 금이 바로 공이란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당체가 바로 공인가? 모든 것이 인연법을 따르기에, 연기법은 우주의 대법(大法)이다. 우리가 불교를 생각할 때는 언제나 연기법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 중생은 연기법을 모르고, 성자는 연기법을 안다는 차이이다. 진여불성이 연(緣)을 따라서 잠깐 나타난 것이 세상 현상이다. 당체즉공이란 말이다.“
그래도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이 이해가 잘 안된다면 다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선재동자가 각양각색의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 중에 창녀를 만난 이야기이다. 이 창녀는 창녀이면서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어, 선재동자는 그 창녀를 만나서 묻는다.
“어찌 창녀의 신분으로 밖으론 사랑과 존경을 받고 안으로는 걸림 없이 자유의 즐거움을ㄹ 누릴 수 있느냐?
이에 창녀는 엷은 미소로 조용히 대답했다.
“나도 한때는 사내들에게 짓밟힌다는 수치심과 울분에 자신과 남을 저주하고 살았다. 그러나 한 생각 돌려 내가 (성에 굶주린)그들에게 베풀고 있는 소중한 나를 발견하게 되고 보니, 수치와 저주가 이해와 자비로 솟아나 모두가 한 몸임을 깨닫게 되고 보니, 모두를 진심으로 연민의 사랑을 하게 되더라.”라고 말했다.
그렇다. 수치와 저주가 한 생각 돌리니 이해와 사랑이 되나. 즉, 마음먹기에 따라 색도 되고 공도 되는 게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고,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고, 공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색불이공 공불이색-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는 세상일의 본질이 공한 줄 모르고 현상에만 꺼들리는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이다.
사사무애법계(事事无涯法界)
우주의 실상(實相)은 본체를 떠나서 현상이 없고, 현상을 떠나서 본체를 말할 수 없는 것은, 앞의 이사무애법계에서 밝힌 바와 같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면, 차별한 현상계의 온갖 사물(事物)도 그 서로서로의 사이에 번거롭고 복잡한 한량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사무애법계란 현상계는 삼라만상이 서로 걸림이 없이 교류해, 한 개와 여러 개가 한없이 관계하고 있다는 세계관을 말한다. 현실의 각 존재가 서로 원융상즉(圓融相卽)한 연기관계에 있다. 즉, 현상과 현상이 서로 방해함이 없이 교류· 융합하는 세계이다. 이 말은 어떠한 사물이건 고립돼 있지 않고 다른 것과 상의 상관(相依相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연기의 정의, 즉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말씀을 되새겨 보더라도, 이 세상의 천지만물은 서로서로 인(因)이 되고 연(緣)이 되고 과(果)가 되면서 끝없이 생성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주만물은 그 어느 것도 홀로 생겨났다가 홀로 없어지는 것이 있을 수 없고, 또한 이런 모든 연기하는 것이 어떤 본체를 떠나 있는 별개의 현상이라고도 할 수 없으니, 연기실상(緣起實相)을 사무쳐 보아 본체적인 실상의 면과 현상적인 연기의 면을 구분하지 않고 일관(一貫)하여 연기론으로 발전시킨 것이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화엄종(華嚴宗)에서 말하는 소위 법계연기론(法界緣起論), 다른 말로 무진연기론(無盡緣起論)인 것이다.
당나라 법장이 지은 「화엄경채현기(華嚴經採玄記)」에 보면 법계라는 말을 해석함에, 법은 자성을 가져 남이 알게 하는 것이란 뜻을 가진 말이고, 계(界)는‘원인이 된다',‘성품을 변치 않는다',‘나누어 구별 짓는다’등의 뜻을 가졌다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법계(法界)란 일체의 모든 존재가 각자 그 영역을 지켜 서로 엇갈리거나 뒤섞임이 없이 잡다한 가운데서도 질서를 가지고 정연하게 조화를 유지해 가면서 연기하고 있는 우주 만법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라 하겠다.
의상대사는 "하나의 먼지가 온 우주를 머금었고(一微塵中含十方), 한없는 긴 시간이 곧 한 생각(無量遠劫卽一念)"이라고 했다. 작은 먼지 하나를 내 밥그릇의 밥알 하나라고 생각해 보자. 밥알이 된 쌀 한 톨은 농부의 수고로움으로 영글었다. 그와 동시에 햇볕과 비와 적절한 거름과 땅의 힘 등이 또 작용을 했다. 내 앞의 이 밥이 이렇게 놓이기까지 물류를 도운 운전자와 중개를 한 상인들과 밥을 지은 주부의 노력이 모두 합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뿐 아니다. 이 쌀 한 톨은 그 전의 볍씨 한 개가 낳은 결과이고, 그 볍씨는우주일체와 사람들의 협동으로 형성됐고, 또 벼와 벼는 무한 상응 속에서 거슬러 올라간다. 이렇게 보면 내가 먹는 밥 한 알이 엄청나게 많은 다른 인연들과 관계 속에 상입상즉(相入相卽)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밥 한 알이 무수한 상입상즉의 연관성을 지니고 있듯이, 사회생활에서 한 개인의 생각과 행동 역시 전체 사회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또 사회전체 분위기는 자연환경과도 연관을 맺는다.
서로 미워서 적대감으로 엉킨 사회는 맑고 고운 환경을 만들지 못한다. 네 일이 곧 내 일이라고 여기는 일심(一心)의 상황이라야 한다. 사회에는 다양한 인격들이 있으나, 결국 그 다양한 인격들은 서로 직간접적으로 의존해서 통일된 그물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개인주의는 전체주의만큼 망상이고 허상이다. 사회 속에 개인이 독립된 단위가 아니듯이, 개인은 전체를 위해 강압적으로 희생돼도 좋은 하찮은 부품이 아니다. 개인은 일심( 一心)이다. 그 일심이 체적인 일심을 돕는 일심이 돼야 한다.
법계연기설은 곧 이러한 우주만법(宇宙萬法)은 어느 하나의 원인으로서 연기된 것이 아니요, 만법 그대로가 서로 서로 인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존재하고 있다는 우주만법 그대로의 현실적인 모습에서 연기의 실상을 밝힌 것이다.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
송대(宋代)에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고 민족의 주체성에 눈을 뜨면서 소위 정통성에 입각한 전통사상의 재정립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종래의 선진유학(先秦儒學)에 대하여 신유학의 기운이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불교가 이교(異敎)이고 또한 노장이 비정통이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유학을 대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노장의 현학(玄學)을 종합하여 새로운 시대와 사회에 맞는 유학을 건설하였으니 그것이 곧 성리학(性理學)이다.
성리학의 발생은 이미 그 시대의 인지가 선진의 실천유학인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윤리현상을 인심에 기초한 데서 비롯됨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선진유학에서는 인심이 선이라는 심선설(心善說)에서 성선(性善)을 말하고 있다.
본래 심선(心善)인 인심이 어떻게 하여 선ㆍ악으로 나누어지며, 인간이 선을 실천하기 위하여 어떠한 행위의 준칙을 삼아야 하며, 그때 마음을 어떻게 수양하여야 하는 문제는 아직 심화되지 못했다. 따라서 성리학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이어받아 본체론을 건립하고, 그 후 정이의 이(理)의 개념을 도입하여 주희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확립한다.
주희(朱憙, 1130~1200)를 흔히 주자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존칭이다. 주희는 북송의 여러 유교 사상들을 총합ㆍ정리하여 체계화된 사상 구조를 완성했다. 주희의 집대성은 사상의 면에 있어서, 그야말로 대심포니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선진유교ㆍ한당유교ㆍ노장ㆍ불교ㆍ도교 등 이전의 모든 사상체계가 주희의 사상 속에 녹아들어갔다.
성리학은 고려 말에 사회개혁사상으로 등장하여 조선의 개국과 함께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확립되었다. 조선 중기의 율곡 이이는 퇴계 이황과 함께 성리학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여러 학문에 능통했던 그는 주자의 성리학을 뛰어넘어 독자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먼저 성리학에서는 이(理)와 기(氣)가 모여 우주 만물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쉽게 이는 본질, 기는 변수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물을 예로 들자면 H2O 자체는 理, 물의 모양을 결정하는 그릇은 氣가 되는 것이다.
이이는 주자의 주장을 한 단계 발전시킨 퇴계 이황과 달리 독자적인 해석을 보여 준다. 성리학에서는 이와 기를 분리해 생각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기본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이는 여기에서 벗어나 이와 기는 ‘둘 같이 보이지만 사실 하나’라 주장했다. 이를 ‘일이이 이이일(一而二 二而一)’이라고 한다.
이이는 이는 형체가 없고, 기는 형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형체가 없는 이는 통하고, 형체가 있는 기는 국한 된다고 주장했다. 이를 ‘이통기국(理通氣局)’이라고 한다.
이는 형체가 없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고, 기는 형체가 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다(發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기가 움직일 때, 기에 타서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이를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l라고 한다.
유학자인 이이는 놀랍게도 승려가 되어 불교를 연구하기도 했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오랜 병환과 죽음은 그에게 심적, 정신적 충격을 주었고 시묘살이를 마친 뒤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지만 출가 후 1년 만에 환속하고 말았다.
이이는 “불교는 인간이 태어나고 왜 죽는가?에 대한 해답이 없다.”, “불교는 유교에 미치지 못한다.”고 환속의 이유를 밝혔지만, 이러한 그의 불교 폄하 발언은 입신(立身)을 위한 명분일 개연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왜냐하면 불교야말로 처음부터 인간의 생사를 문제삼는 가르침임을, 이이가 몰랐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이의 승려생활은 고작 일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불교는 그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화엄사상이 그의 성리학 사상에 짙게 묻어 있는 것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자의 이기이원론의 이(理)와 기(氣)는 불교 화엄경의 우주론인 4법계 중, 이법계(理法界;· 본질계)와 사법계(事法界; 현상계)의 이론을 원용한 것으로 보이며,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은 4법계 중, 이사무애법계(理事无涯法界; 현상계와 본질계가 걸림없이 통하는 세계)의 이론을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자나 이이는 그 근거를 밝히지 않았고, 이를 모르는 유생들은 성리학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불교를 인륜도 모르는 사교(邪敎)로 폄훼하고, 조선 500년 동안 사찰에 불을 지르는 등 갖은 만행을 서슴지 않았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사법계 동국대 역경원
백일법문 성철스님 백련선서간행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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