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국농촌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siin7004
작가 김 우 영
(1)
“신 작가 여길세, 여기 . . . . . . ”
“아, 벌써 왔군. 베트남 여행이 무척 기다려 졌나 보군 나은 작가.”
“하하하 물론이지. 참으로 꼭 가고픈 나라였지.”
“아암 그렇구 말구 .”
“같이 갑시다. 나도 한몫 해야지.”
H신문사의 주관으로 계획된 문화탐방으로써 동행취재 하게된 최성민 기자가 앞 부분이 긴 모자를 쓰고 특유에 몸짓으로 어슬렁어슬렁 거리며 늦게 나타났다.
신덕식 申德植 작가는 담배를 피워 물던 손으로 먼저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김나은 金羅恩 작가와 김규태 金圭泰 교수도 반갑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이미 약속한 것 처럼 세 사람은 오후 시간에 인천공항 환전소 앞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를 했다. 또 뒤늦게 합류한 경기 여주의 최흥기 崔興基 평론가도 일행에 포함되었다.
유리창 너머 저 멀리 영종도 앞 파아란 바다를 뿌우연 안개가 용트림하듯 휘감으며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신 작가와 나은 작가, 김 교수 그리고 경기도 여주에서 온 최흥기 평론가는 베트남으로 가기 위하여 예매한 티켓을 가지고 출구를 향했다. 네 사람은 운명적으로 또는 가정적으로 꼭 가야만 했던 곳이기도 하지만, 평소 잘 아는 최성민 기자가 그의 여행안내 책자인 ‘해외여행 이곳만은 가보자’ 에서 베트남을 너무 아름답게 집필하고 있어 이들 등을 떠밀었는지 모른다.
그의 말처럼 ‘인도차이나반도의 숨겨진 보석 베트남’ 으로 가기 위해 호치민행 ‘대한항공 UN 681호’ 41B, 42C, 43D, 44F와 45G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비행기 창을 보며 일행은 상념에 잠겼다.
인천공항 활주로에는 벌써 하루를 접는 듯 사위에 어둠을 뿌리고 있었다. 밀림과 열사의 나라 베트남을 향하여 시속 9백km, 고도 2만 피이드 상공을 5시간여 동안 날아 갈 것이다. 저 깊고 음습한 밀림 옆구리에 있는 검푸른 통킹만과 남지나해 위를 경유하여 낯설고도 우리와 가까운 나라 베트남을 향하여 일행을 태운 비행기는 고도를 잡기 시작한다. 비행기가 기체를 심하게 흔들며 이륙을 시작하고 기내의 안내방송이 흘러 나온다.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여러분을 호치민시까지 모시게 될 기장입니다. 이곳 김포공항을 출발 약 5시간에 걸쳐 운항하여 도착지인 호치민 탄숏나트 공항에는 오전 12시 9분에 도착 할 예정입니다.”
안전벨트를 착용하라는 스튜디어스의 눈짓에 벨트를 허리에 감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은은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 봤다.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얼마 전 신 작가의 사촌형 신정식 申政植 이 죽었다. 그때 친구인 관계로 김규태 교수와 최흥기 평론가는 상가집에 동행하여 갔었다. 그때 죽은 정식의 아내가 흰 소복 차림에 처연하리만치 땅을 치며 울부짓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휴, 흐으윽-- 그 놈에 월남이 우리 그이를 잡아 갔어. 흐흐윽-- 흐흐윽-- 월남에 가서 1년 동안 총 들고 싸우고 오더니 매일 술만 마시고 -- 온 몸이 가렵고 썩어 가더니만 기어히 죽었어요. 흐흐윽-- 흐흐윽--”
“형수님, 그만하세요. 그만아안--”
사촌 시동생인 덕식이 말리자, 이제는 덕식을 붙들고 울부짓었다.
“삼촌 이를 어찌지요. 흐흐윽-- 나 혼자 애들하고 어떻게 살라고오요. 흐으윽--”
덕식은 우는 사촌형수를 데리고 뒷방으로 부축하며 들었다. 사촌형의 사망으로 충격에 빠져 기진맥진한 형수를 방에 가까스로 뉘이고 상가 마당에 나오니 마침 나은과 김 교수, 최흥기 평론가가 술청에 앉아 있었다. 이때 슬픈 표정으로 상가를 맴돌고 신덕식 작가를 보고 김 교수가 소리쳤다.
“자, 신 작가 이리와. 한 잔 마시게, 너무 슬퍼하지 말고 . . . . . . "
"아니야, 괴로워. 김 교수도 알다시피 정식이 형이 벌어온 돈으로 내가 학교 다녔지 않았나?“
“그렇지 . . . . . . ”
“저 월남의 피 뭍은 돈으로 말이야.”
김 교수는 담배를 피워 물으며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 성태형이 월남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학교 다니고 교복 맞춰 입고 했지. 그런데 그 형도 지난해 고엽제를 시름시름 앓다가 갔잖아.”
술잔을 기울이던 최흥기 평론가도 무릅을 치며 말한다.
“맞아, 우리 형도 그 놈에 고엽제 때문에 지금껏 고생하고 있어.”
신 작가는 괴로운 듯 술잔을 들이킨다. 술잔을 입에서 떼고 속이 상한 듯 말한다.
“아아, 그 놈에 월남전쟁이 뭐길레. 이처럼 우리를 오랫동안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어. 도대체 월남전쟁이 끝난지가 언제인데 지금껏 고엽제 망령이냐구 망령이 . . . . . . ?”
“. . . . . . ”
이때 나은이 무엇이 생각난듯 말한다.
“신 작가, 자네 사촌형 상을 치루고 말이야. 우리 베트남에 한 번 다녀 오자구.”
그러자 김 교수의 눈이 번쩍했다. 옆의 최흥기 평론가도 맞장구를 친다.
“맞아, 한 번 다녀 오자구. 그 놈에 밀림이 무엇이고 아오자이가 뭐길레 우리의 가족들을 하늘로 데러가는지 가봐야 겠어. 내 눈으로 보고 와야 겠어”
“그으래, 한번 기행 삼아 가보자고.”
이렇게 제안된 네 사람의 베트남 기행과 마침 H 신문사에서 문화탐방 프로그램을 안내하고 있어 잘 되었다는 생각에 비로소 베트남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마침 베트남 전문여행 르뽀 작가인 최성민 기자가 동행하지 않는가.
일행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몇시간 후에 만날 낯선 이국 땅 많은 한국 군인들을 죽였고 가슴 아프게 했던 열사의 나라 베트남을 생각해 봤다. 우리 한국과 비슷한 운명을 안고 외세 外勢와 내홍 內訌 에 시달려야 했던 남쪽의 약소국 베트남은 도대체 어떤 나라일까. 신 작가와 김 교수는 최흥기 평론가는 베트남으로 오기 전 각종 자료를 보고 베트남에 대하여 공부를 열심히 했다. 넷은 수시로 만나 식사를 정보를 교환했다.
베트남(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아니 우리에게 월남으로 더 잘 알려진 전쟁과 아오자이의 나라. 지난 1964년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자유수호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명분 없는 전쟁에 참여를 했다. 이제와 생각하니 남의 나라 민족해방전선에 참여하는 그들과의 만남은 우울하기 그지 없었다. ‘베트남 전쟁’ 이것이 바로 미국 주도의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었다.
이때 미국의 요청(박정희 전 대통령이 미국에 먼저 국군 파병을 희망했다는 설도 있다 )에 의하여 우리 한국군은 1964년 베트남의 남부 휴양도시인 붕타우에 비 전투부대인 태권도와 의료진파병으로 시작되면서 한국과 월남의 미묘한 운명적인 만남의 블록이 형성된다.
그 후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월맹군에게 패망하기 직전 에 파병된 한국군도 철수를 한다. 남베트남이 월맹 호지명군에 의해 공산화된 이후 한국과 베트남은 한동안 정치적인 문제로 소강상태를 맞는다.
7년 후. 1992년 12월 한국이 37 번째 베트남과 수교국으로 정식 발족하고 양국에 대사관을 설치하고 국교 정상화를 맺는다. 이로써 한국이 베트남의 국내 교역면에서 6억불을 넘기며 현재 베트남내 전 세계 투자 순위 3위에 달하고 있다. 근래에는 민간과 정부 등 각 분야에서 고르게 상호접촉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잊혀진 전쟁으로 기억 저편의 편린으로 있어야 할 베트남 전쟁은 고엽제 후유증과 베트남 현지의 라이따이한들이 있어 더욱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우리의 파병용사들은 사망 5천여명, 부상자 2만여명과 몇만명으로 추산되는 베트남 파병용사들의 고엽제 후유증으로 지금껏 시달리고 있다. 고엽제 병마는 이들 세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제2세, 3세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또 베트남에는 1만5천여명이 넘는 한.베트남 2세, 3세 즉, 이른바 ‘라이따이한’들이 살아가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더욱 유발시키고 있다.
한참 눈을 감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 기내에서 뚜--뚜--하고 신호음이 들린다. 객석 앞 전면에 펼쳐진 스크린에 행선지 이동경로가 비행기로 투영되어 지도와 함께 동적이동 動的移動 을 한다. 일행이 탄 비행기가 한반도 제주해협 위를 지나 일본 해협 상공 위를 날고 있는 모습이 스크린에 손에 잡힐 듯 아이들 장난감마냥 나타난다. 중국 상해 부근의 상공에 접근 타이페이 인근 하늘을 선회하는가 싶더니 중국 광주와 홍콩, 통킹만 상공을 지난다. 몇 시간 후이면 남지나해를 거처 베트남 호치민으로 들어선다는 행로 움직임이 예상된다.
불과 몇 년 전 만해도 그저 비행기가 몇시에 출발해서 몇시에 도착예정이었는데 이제는 우리들이 타는 비행기 행로를 수시로 스크린 화면에 담아 보여주고 있어 참으로 여행이 생동감 있어 좋았다. 옆에서 잠 짓을 하던 나은이 한 마디 거든다.
“거, 참-- 세상 좋다아. 우리가 날고 여기가 그러니까 저기 지도처럼 보이는 남지나해란 말이네!”
“그럼, 예전 우리들의 선배 국군 장병들은 부산항을 출발하여 월남에 오려면 무려 1주일이나 걸렸다는군.”
“1주일만에 배 멀미에 설사에 고생, 고생을 하며 오던 월남을 이제는 5시간만에 바다와 대륙을 횡단하였으니 말이야. . . . . . ”
“으음, 세월 좋아졌지. 신 작가.”
비행기가 착륙 준비를 하는지 기체가 약간 흔들리며 안내방송이 나온다.
“승객 여러분. 이제 곧 호치민 탄숀나트 공항에 도착하니 안전벨트를 꼭 착용하시고 항공기가 착륙한 후 벨트를 풀어 안전하게 내리시어 입구에 준비된 리무진 버스에 승차하시기 바랍니다.”
대한항공 트랩을 내려 월남 땅 밤하늘을 보았다. 현지 시간 12시가 넘어 주변은 깜깜한 허공이었다. 서둘러 버스에 오르니 기내에서 미쳐 보지 못했던 외국인이 여럿이 눈에 띄었다. 미국인 일본인, 필리핀 등 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함께 버스에 어우러져 승차했다.
(2)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 정부군이 마지막 저항했다던 탄숏나트 공항.
“30여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내겐 1975년 4월 30일 바로 어제와 같이 느껴진다. 그 날은 참으로 맑은 날씨였다. 내 생애에 가장 맑은 날씨였다.”
라고 회고한 베트남의 참전작가 바오닌(남. 48세. 하노이 출생)의 말이 생각났다. 또 그의 유명한 소설 전쟁의 슬픔(Worrow of War. 1999.7 .예담출판사 번역소개)의 본문중에 이런 내용이 생각났다.
“날 미워하지마. 동지 우리 같은 전차병들은 항상 병사들의 시체 더미 사이로 다니지. 우리 전차 바퀴에는 시체에서 떨어져 나온 살 조각들이 붙어 다닐 정도야. 그 썩은 살덩이 냄새를 씻어내려면 전차의 몸체를 강물에 넣어야 돼. 그래서 그랬나봐. 그 놈이 여자 시체를 내동이치고 함부로 하는걸 보니 참을 수 없었어. 그 놈을 죽였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정말 네가 아니었다면 난 살인을 저질렀겠지. 그래봐야 소용도 없는 일인데. 우리도 다 똑같이 뭐. 시체 바로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잠도 자니까. 누구든 말도 안되는 핑계로 변명 할 뿐이지.”
위 글은 나은이 언제인가 읽었던 ‘전쟁의 슬픔’이란 소설의 내용중 일부이다. 주인공 ‘키엔’의 부대가 남베트남의 공수부대가 끝까지 저항하던 이곳 탄숏나트 공항을 점령한 뒤, 같은 어느 포병과 전차부대장이 싸우던 장면을 묘사한 소설 내용이다. 막바지 월남전의 허무한 내용을 적나라하게 그린 한 단면이었다.
어둠 건너편 공항 활주로 저만치 외등 사이로 A자형 시멘트 벙커가 어렴풋이 보인다. 당시 미국이 공군 군사기지로 사용했다던 이 벙커에 미군 전투기를 은폐시키고 저 산간 밀림의 베트콩을 공격하기 위해서 B-52 전투기로 대량의 융단폭격을 가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무자비한 전쟁에 소름이 끼친다.
허무한 이념의 대립과 무서운 전쟁에 대한 생각으로 치닫던 중에 활주로를 달리던 리무진 버스가 대합실 앞에 미끄러지듯 멈췄다.
큰 짐칸에서 한 무더기의 짐이 일시적으로 내어던지듯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일행은 베트남 여행 전문 기자인 최성민 기자를 따라 뒤를 따라 나섰다. 미리 연락이 된 것인지 호치민시의 현지 안내인 듯한 사람이 이곳으로 오라고 손짓한다. 버스에 다시 올라타면서 물벼락처럼 확 -- 달려드는 것이 있었다. 열대의 나라다운 특유의 무더위였다. 나은이 소리를 친다.
“이크-- 이, 더워. . . . . . !”
“ 5시간의 긴 비행 끝에 겨우 환영인사가 찌는 듯한 베트남의 무더위냐?”
하고 신 작가가 여행 뒤의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뱄었다. 한국 인천공항을 출발 할 때는 찬 바람으로 긴 소매옷을 여미었으나 이곳 베트남에 오니 무더위로 인하여 벌써 이마에 땀이 송알송알 솟기 시작한다.
현지 시간으로 자정을 넘긴 늦은 시간이라서 호텔에 여장을 풀고 일행은 베트남의 첫날밤 인상을 주고 받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부터 떠날 베트남의 행선지를 호텔방 천정에 그려봤다. 이 나라 옛도시인 사이공, 그러니까 지금의 경제도시인 호치민 시내의 관람을 시작으로 베트탐 문화탐방은 시작된다.
그리고 이어 중부지방인 후에시의 왕릉 방문을 시작으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 하노이, 바다의 숲 하룡만 下龍灣, 송차반도의 천연항인 다낭, 남지나해의 해변의 소도시 퀴논, 굴지의 리조트 해안도시인 아름다운 나트랑 항구, 옛 남베트남의 사이공이었던 호치민시, 해변휴양지 붕타우, 수상도시 메콩 델타, 베트남 전쟁 당시 해방전의 거점지인 구찌터널, 다시 호치민시, 우리의 핏줄인 라이따이한과의 만남, 베트남의 대표적인 작가 ‘구엔 반 봉’의 전쟁소설 ‘사이공의 흰옷’에 실제 주인공인 ‘웬 티 쩌우“선생과의 사이공 강 선상에서의 만남 등 . . . . . .
“꼬끼오--꼬끼오--”
하고 새벽닭이 운다. 김 교수는 문득 잠이 깨졌다. 내 고향 이불 속 꿈속인가 싶어 불현듯 눈을 뜨니 더블 침대가 있고 그 옆에 신 작가가 여독에 피곤한지 쿨-- 쿨-- 잠을 자고 있지 않은가?
‘아! 여기는 베트남 호치민시의 호텔인데 어찌하여 시가지 한복판에서 새벽닭이 우는고오 . . . . . . ?
하고 반가움과 의아함이 교차한 가운데 창의 커텐을 활짝 젖혔다. 그러자 저만치 아래 2층 단아한 가옥의 마당가에 서성거리는 우리의 알록달록한 토종닭이 ‘꼬끼오-- 꼬끼오--’ 하고 울고 있는 게 아닌가? 나은은 속으로 외쳤다.
'아, 우리의 것이 최고여! 바로 우리의 것이 여기에 있었구나. 한국의 농촌에서도 사라져가는 우리의 토종이 바로 여기에 있다니 오호통제 嗚呼痛哉라!‘
호치민의 아침은 비교적 싱그러운 초여름 바람 같은 기온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거리는 벌써 자전거와 오토바이, 시클로 (인력거)가 왁자지껄 하며 붐비게 오가고 있었다. 호치민시 인구가 4백만이라는 거대한 이 도시의 행렬의 물결은 마치 길거리에 규칙적으로 잘 펴진 로드레일이 길 위를 자동적으로 휘감고 움직이는 거대한 인파의 물결이었다.
그 사이로 흰색 아오자이를 입은 아가씨들이 옆구리 보드라운 살결(!)을 살짜기 드러내며 치마 자락을 펄럭이고 출근하는 모습이 참으로 싱그러워 보였다. 또 시가지의 매연방지와 뜨거운 태양볕으로 부터 고운 피부를 보호하려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 반을 수건으로 가리고 아오자이를 입은 아가씨들이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타고 휙-- 휙-- 지나는 모습이 이채롭다.
베트남하면 월남전쟁, 또 월맹의 베트콩을 연상이 되는지라 모자를 눌러쓰고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모습이 마치 호치민 외각을 잇는 구찌터널의 여전사 女戰士 를 연상하게 하는 것은 왜 일까 . . . . . ?
다음날 아침 일행은 시내로 나갔다. 호치민 중심부인 동커이 거리로 나갔다. 사이공 대교회에서 아사이공 강가 쪽으로 나있는 동커이 거리는 가로수가 아름다운 번화가이다. 외국인을 위한 선물코너와 카라벨 호텔 등이 있다. 그리고 레로이 거리로 갔다. 시민극장이 있어 써커스와 연극, 경극이 공연된단다. 시민극장 뒤로는 구엔후 거리와 호치민시 인민위원회 걸물과 고풍스런 프랑스 시대의 건물들이 보였다. 함기 거리는 구시장이 있는데 ‘초쿠’라는 야시장이 있었다. 김규태 교수가 야시장 포장마차를 보더니 술 생각이 나는지 한잔하자고 소매를 끈다.
“어이 우리 한잔 걸치고 갑시다.”
“좋지요. 그럼 그렇게 합시다.”
긴 의자에 쭈욱 앉아 주변에 있는 상가를 보며 ‘느억맘’ 이란 향채 생선소르로 만든 것에 새우와 오징어를 찍은 안주에 ‘뀍루이’ 라는 소주를 한 잔씩 했다. 나은 작가가 말한다.
“어이구 이 술 꽤 독한데 . . . . . !”
“그렇군. 한국의 소주보다 더 독하네.”
“베트남 전 당시 베트콩보다 더 독할까 . . . . . .?”
“허허허---하하하---”
나은과 최흥기 평론가는 웃으며 술을 들며 말한다. 오후에는 그 대통령 관저인 통일회당을 관람했다. 남 베트남 시절에는 독립궁으로 불렸는데 1962년부터 4년여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써 100개 이상의 크고 작은 방과 옥상에는 헬리콥터까지 있다. 또 지하로 내려가면 비밀 군사시설인 벙커가 나온다.
베트남은 1975년 4월 30일 베트콩의 전차가 이곳 관저의 철책을 돌파하여 무혈입성하므로써 사실상 베트남 전쟁은 끝이 난다.
이어 우리들의 관심사인 전쟁전시관에 갔다. 베트남 전쟁중에 수 많은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전시관이다. 전쟁에 실제 사용되었던 전차와 대포, 폭탄 등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어 전쟁의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신 작가가 신음 섞인 말투로 말한다.
“저 무시무시한 전차로 민간을 깔아 뭉게고 포탄을 날렸다니. . . . . 어허?“
“ 그러게 말이요. 신 작가.”
김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는다
전시관 한쪽에는 고엽제 枯葉劑 에 의한 피해상황이 분명하게 전시되어 있고, 고엽제로 피해를 입은 기형태아도 포르말린에 의해 유리병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 또 고문의 섬 감옥 ‘호랑이 우리’를 그대로 복원한 것도 있다. 이 우리 안에서 정부에 반대하는 국민들에게 처참하게 고문이 처해졌다고 말한다. 그 옆으로 옮겨 전쟁역사박물관에 갔다. 그 곳에도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해방되는 순간을 담은 사진과 전쟁을 중심으로 혁명의 경위가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2층에는 포탄과 무기, 옥외에는 미사일과 전투기, 고사포 등이 진열되어 있고 그 중의 트럭 한 대는 앞 유리에 관통된 탄환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당시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듯 하여 일행의 눈길을 끌었다.
박물관 전시관을 막 나오려고 하는데 최 기자가 나은의 소매를 잡고 끈다.
“저 친구 ‘끙’ 이번 문화탐방 중에서 확실하게 보여줄 전쟁의 상흔이 있다고 해요. 내가 특별히 팁을 주고 마련했어요. 이리와요.”
“그래요. 좋지요. 보러 가지요.”
현지 안내원 끙이 일행을 데리고 전시관 한쪽 비밀스런 문을 열고 안내한다. 마치 지하창고 같이 어두컴컴한 그곳에 들어가자 . 안내원이 불을 켠다. 그러면서 벽쪽에 붙은 전시관을 손으로 가르킨다. 최 기자가 설명을 해준다.
“저 것은 무엇일까요?”
그러자 김규태 교수가 말한다.
“저 유리병 속에 전시되어 있는 것은 버섯 같은데요?”
“그리고 저쪽도 잘 말려진 작은 표고버섯 같기도 하고. . . . . . ?”
현지 안내원이 끙의 통역을 받아 설명을 한다.
“맞아요. 앞에 것은 우산 모양같이 잘 말려진 송이버섯 모양입니다. 그렇치만 자세히 여기로 와서 보세요. 이것은 전쟁중에 여성의 5명분 유방 10개를 오려 철사줄에 이어 이 긴 유리병 속에 포르말린으로 보관해논 것 입니다.”
“1968년 2월12일 구정 휴일이 있은 며칠 뒤 한국군은 디엔반현, 탄퐁사, 퐁니촌에서 많은 양민들을 학살했지요. 다른 학살사건과 달리 이 사건은 적어도 쿠앙남에서는 매우 널리 알려졌습니다. 서구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언급할 정도였지요. 1972년 2월13일 ‘뉴욕타임스’ 기사는 미 국방성과 해병대 관리가 이 사건의 발생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에 대해 한국군 사령관에게 언급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현지 통역인 안내원은 말은 이어진다.
"당시 일단의 한국군이 1번 도로에서 매일 있는 도로 정지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어요. 퐁니에서 불과 얼마 안 된 거리에서 정찰부대가 대인지뢰에 걸렸다. 부락민들은 지뢰가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어요. 그러나 아무런 총성도 없었고 그 지역에서 교전이 이루어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폭발이 있은 뒤 얼마 안 돼 군인들이 도로변 바로 옆에 있는 퐁니촌으로 들어왔지요. 군인들은 주민들을 불러 모으고 인접한 들로 데려가 총살했다. 군인들은 집 안에 있었던 사람들도 쏴 죽였어요. 그리고 마을 전체에 불을 질렀다 이겁니다 . 어처구니 없이 . . . . . ."
“아. . . . . . 저런 쯧쯧쯧. . . . . .!”
“오, 마이 갓 . . . . . !”
눈이 휘둥그레 지면서 자세히 보니 송이버섯 같은 삼각형의 여자유방이 검은 유두를 드려내며 포르말린에 휩쌓여 약간 불어난 상태로 원형 그대로 철사줄에 길에 이어져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일행을 앞쪽으로 안내한다.
“또 저쪽을 보세요. 저 것도 얼핏보면 작은 표고버섯을 잘 말려 이어온 같은데 자세히 보세요. 남자의 귀 5명분 10개를 이어 포르말린에 보관해 논 것 입니다.
“오호, 저런 비참할데가 . . . . . . ?”
“저것은 한국군이 베트콩을 잡아 죽였다는 전과를 상부로 보고하기 위하여 전쟁중에 일반적으로 베트남 민간인 남자들의 귀를 잘라 갔다고 해요. 실제 전쟁중에 살아남은 민간인들중에는 귀가 없는 분들이 종종 눈에 띄었어요.”
민간인 만행사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1972년 6월 쑤옌푹의 ‘귀향마을’ 캠프가 조성됐지요. 미국 민간인 조사단이 그 캠프에 도착하자마자 사이공 정부 소속의 캠프 부소장이 이들을 만나러 왔다고 해요. 그리고 그는 이들을 그곳에 있는 동안 자기 혼자서만 얘기를 했지요. 처음으로 그가 한 말은 실제 한국군들은 양민들을 그렇게 해치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이 발언은 당시 옆에 참석한 몇몇 어른들로부터 야유와 비난을 받았다고해요. 그리고 그는 주위로부터 상당한 제지와 첨가와 잦은 교정을 받아가며 마침내 한국군 부대가 처음으로 그들의 주둔지인 캄하이에서 강을 건너 북쪽에 있는 쑤옌푹으로 온 것에 대해 우리에게 얘기해 주었어요. 쑤옌푹에서 있었던 단일 학살로 가장 참혹했던 것은 1968년 후반에 톤남(5촌)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다시 부소장이 혼자서 말을 도맡아 하기 시작했어요. 참석한 사람 중 아무도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했어요. 당시 북쪽의 4개 촌은 거의 소개된 상태였지만 5촌에는 아직도 50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한국군 부대가 무장 차량을 끌고 진군하는 것을 보고 마을을 벗어나 인접한 언덕의 숲에 몸을 감추었어요. 그러나 51명의 주민들은 고령과 불편한 몸 때문에 달아나지 못했습니다. 임신한 몇명의 부인네들도 그 가운데 있었어요. 남은 사람들은 숨으려고 하지 않고 서로 의지가 되고자 함께 모여 집 앞에 앉아 있었어요. 그들은 군인들이 자신들을 적군으로 잘못 보거나 위협적인 존재로 오해하지는 않으리라고 믿었어요. 그러나 군인들은 오는 즉시 모인 사람들을 향해 기관총을 뿜어 모두를 죽였어요. 3, 4일 뒤 군인들의 작전이 끝났을 때 다른 마을 주민들이 돌아와 주검들을 발견하고 매장했다고 합니다.
캠프의 부소장은 쑤옌푹의 원래 주민 1만5천명 가운데 4천명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했습니다. 2천명은 폭격으로 죽었고 나머지 2천명은 마을로 들어온 군인들에 의해서였다고 했습니다. 미국 민간인조사단이 그게 어느 군대냐고 묻자 그는 ‘미군과 한국군’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들은 베트콩들은 주민들을 죽이지 않았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물론 베트콩들도 사람을 죽였지요. 정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만 죽였어요.’라고 대답했어요.
조사단은 ‘베트콩들이 한국군과 교전한 적이 있느냐?’ 고 물었지요. 그는 ‘아니다. 그들은 결코 한국군들을 향해 총을 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국군들이 양민들에게 보복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군들은 싸움을 할 줄 모르는 군대였다. 그들은 한번도 제대로 베트콩들과 싸우러 나가지도 않았다. 그저 농민들이나 가축들을 이른바 VC, 베트콩 이라고 하면서 죽였을 뿐입니다.’ 라고 말 했어요.“
“오호, 저런 비참할데가 . . . . . . ?
“도대체 전쟁중에 누가 왜 그런 짓을 했지요?”
나은의 집요한 질문에 안내원은 눈을 감더니 힘없이 얘기한다.
“예, 바로 여러분의 형님이나 아저씨벌인 한국군 입니다.”
“예 . . . . . .?
“아, 이를 어쩌나 . . . . . . .?
“어떻게 선량한 민간인들을 이렇게 처참하게 죽인단 말인가?”
“그러게 말 입니다. 우리의 형님 선배들이 과연 이처럼 악랄했던가. . . . . ?
“ . . . . . . ?”
그러자 최 기자는 말한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상황은 그 당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릅니다. 전쟁의 후사가 後事家들의 잣대로 당시를 가늠하려면 여러 가지 오류의 진단을 하지요”
그러자 신 작가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피아간의 전쟁속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된 전쟁의 상흔이이야. 쯧쯧쯧.”
일행은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씻고 잠을 청하려니 잠이 안온다. 나은의 제안에 따라 최 기자, 김 교수, 신 작가 최흥기 평론가 등 5명은 한국에서 미리 준비해간 소주팩의 소주를 마시며 호치민에서의 객창 客窓에 외로움을 달랬다.
일행은 낮에 전쟁기념관에서 본 포르말린속의 유방과 귀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말을 주고 받았다. 의외의 충격과 전쟁이라는 극한적 상황속에서 어쩔 수 없는 불행이라고 말했다. 어서 빨리 이 지구상에서 살아져야 할 것이 이데올로기의 전쟁이라고 한탄하였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없기를 바라면서 밤 늦게 까지 대작을 했다.
다음날 아침 남베트남 정부군이 공수부대가 마지막까지 피 비린내 나게 저항했다던 탄숀낫트 공항으로 향했다. 중부도시 ‘후에시’로 가는 국내 비행기 수속을 밟기 위해서 이다. 공항주변엔 시클로와 택시 운전사 잡상인들이 요란하게 따라붙어 호객 행위를 한다. 공항에서 호텔에 이르기까지 라이타와 껌, 등 잡상인 아줌마와 어린아이들이 끈질기게 달라 붙었다. 어떤 때는 너무 귀찮게 굴어 신경질이 날 정도였다. 이런 현상은 인근의 동남아권인 중국, 몽고 등과 다를 게 없었다.
“헬로우, 원 달라, 원 달라 . . . . . . ”
“웰 컴, 원 달라, 원 달라 . . . . . . ”
끈질기게 달라붙는 여인들과 아이들을 뒤로 한 체 비행기 트랩에 올랐다. 승객을 실은 항공기는 천천히 기체에 힘을 받으며 탄숏낫트 공항을 이륙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베트남 호치민시는 참으로 싱그럽고 아름다움 자연 그 자체였다. 호치민시를 좌우로 흐르는 사이공강과 지류, 그 옆으로 나무와 숲들이 무성히 초록의 띠를 두르고 있었고 시가지의 집들이 게딱지처럼 옹기종기 붙어 사람이 사는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저만치 파랗게 펼쳐지는 산맥과 푸른 나무로 뒤덮힌 정글, 그 옆으로 넘실대며 흐르는 강물과 작은 지류들이 한데 어울어져 있었다.
물벼락처럼 확- 끼얹는 듯한 무더위와 무성한 정글, 그 사이사이로 넓다랗게 펼쳐진 월남 특유의 풍요로운 델타, 이 나라 젖줄인 풍족한 강물 등 아! 아름다운 나라 인도차이나반도인 베트남, 베트남이여!
(3)
후에시 공항에 도착하니 이곳도 역시 무더운 여름 날씨였다. 공항 광장에는 택시 운전사들의 호객과 시클로, 자전거와 많은 사람들로 붐벼는 통에 왁자지껄 시끄럽다.
베트남의 중부권 도시 ‘후에시’는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원조(元朝1802-1945년)의 도읍이다. 일찌기 세계 유네스코의 한 관계자는 후에시(훼)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다고 동행한 최성민 기자가 전했다.
“이곳은 여행자가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도시예요.”
“극찬해야 할 건축상의 시詩라고 말할까.”
옆에 있던 나은과 최흥기 평론가 일행이 박수를 치며 말한다.
“오우, 역시 베트남 여행전문 기자답게 표현이 기똥찹니다 그려!”
“맞아요 맞아.”
최 기자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곳 후에 왕릉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한 말 이란다. 칭찬에 빙그레 웃으며 최 기자의 안내는 계속된다. 베트남 전쟁의 영웅 국부 國父‘호치민’이 태어나 자란 ‘후에시’ 중심가를 유유히 흐르는 후옹강 주위에는 왕궁과 사원, 황제묘와 품위 있는 건축물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후에시 인근에 있는 다낭항의 번화함이나 호치민시 같은 소음은 거의 없다. 조용히 성안을 걷고 있으면 당시 격조 있던 왕조시대로 돌아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하이비스커스의 붉은 색이 눈부신 아름다움과 고도 古都의 커다란 성벽과 해자(성 주위에 파 놓은 연못)로 둘러 쌓인 왕궁은 자뭇 고요롭기까지 하다.
후에시는 후웅강을 사이에 두고 신 시가지와 구 시가지로 나뉜다. 이 두 곳을 잇는 찬티에 다리와 후스앙 다리로 나뉘는데 우리의 한강 철교 같은 분위기이다.
왕궁으로 가는 시민광장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 옆으로 흐르는 작은 시냇물은 오랜 후에시의 왕조에 역사를 휘감고 오늘도 흐르고 있었다. 저만치 사회주의 특유의 붉은 베트남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일명 베트남 ‘국기게양대’이다. 1809년 자롱 왕 시대에 만들어져 왕궁문에 접해있는 이곳은 대좌 臺座 3층 형식으로 되어있고 놓이는 17.4m로써 탑 꼭대기까지 합하면 29.52m가 된다. 현재의 건물은 1969년 세워진 것으로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일행은 왕궁을 구경하기 위해서 들뜬 마음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줄을 잇고 들어섰다. 높다란 왕궁문은 민망왕 때 창건하여 칸딘 왕 때 재건되었다. 돌계단 위에 2층으로 되어있는 중국풍의 건물로 문의 입구는 3곳이다. 중앙문은 황제가 외출할 때만 사용되었고 이 문에는 불사조가 그려져 있는데 오문午門이다. 이 말은 정오가 되면 이 건물 위에 태양이 걸린다는 뜻이다.
또 왕궁 주변에는 동바강을 비롯하여 4개의 강이 흐른다. 중국의 자금성을 본 따 만들었다는 왕궁문 정면에는 태화전太和殿이 있었다. 빨간색 지붕의 커다란 단층 건물인데 황제의 즉위식이 행하여졌던 곳이다. 황제가 앉았던 금박의자와 대좌가 한가운데 있다.
자롱왕이 처음 건설했다던 이곳을 조금 지나자 연못과 배전拜殿이 있고 바로 앞에는 돌 계단이 있는데 차례차례 3단의 넓은 공간으로 되어 있고 좌우에는 당시 귀족들이 서 있던 위치가 계급순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태화전에서 왼쪽으로 가면 원조元朝의 보제사菩堤寺 현임각顯臨閣이 있다.
왕궁 초입에는 베트남 전쟁 말기 당시 사이공 시내에서 타락한 월남 정부와 미국을 저주하며 분신자살을 하여 유명한 ‘턱광덕’ 스님의 기록이 있었다. 당시 턱 스님이 후에시에서 사이공까지 타고 간 오래된 차량도 보존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정원에는 역대 왕 이름을 적어놓은 청동솥과 대포 9개가 각 각 있었다.
현재 태화전 뒤쪽은 깨끗하게 정리되었지만 대부분의 건물이 베트남 전쟁중에 파괴되어 아무 것도 남아 있질 않아 이곳도 역시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엿볼 수 있었다. 최흥가 평론가가 아쉬운 듯 말한다.
“지식 있는 선진문화의 대국인 미국이 어쩌면 이렇게 참혹하게 세계적 문화유산을 파괴하였을까. . . . . . ?”
앞서가던 김 교수도 말한다.
“아무리 전쟁중의 적국이라지만 소중한 문화유산은 부수질 말아야 할 터 인데 말이야 . . . . . . ”
넓은 왕궁 전역에 걸쳐 철저하게 부숴진 벽돌과 헝크러진 건물의 잔재를 보며 일행이 자조 섞인 말을 건넨다
신 작가가 말을 이었다.
“김 교수, 이곳을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요. ‘전쟁통에 잠시 손을 놓쳐버린 누이의 손 같은 나라’로 말 이예요."
“야 드억. 안 로이 노이 둥! (좋습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더듬거리는 베트남어로 응답을 하니 나은 작가도 베트남어로 대답을 한다.
“어쭈 제법하시네. 나도 한 마디. 씬 깜 언 안 (고맙습니다.) . . . . . . !”
만지면 놓칠 듯, 놓으면 아까운 듯 연인 같고 누이 같은 보드라운 나라 베트남. 1년 내내 푸르런 산이 있고 파아란 벼가 들녘에서 자라고 그 옆으로 푸르런 강물이 흐르는 뜨거운 햇볕과 나트랑(나짱)의 녹주색 남지해의 강물. 시클로와 꽁까이 처녀들이 야자수와 나무가 즐비한 거리를 아오자이 치마자락을 휘-휘- 날리며 지나가는 역동적이며 풍광이 수려한 베트남.
일행은 후에시 왕릉을 구경하고 나오는 길에 성벽 해자 하천 河川부근에 민속무용을 하러 나온 여고생들이 예쁜 아오자이 차림으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를 촬영하기 위해 후에시 방송국 기자들이 진지하게 여고생들에게 다가서서 카메라에 담아내고 있었다. 르뽀 작가답게 최성민 기자도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아쉽지만 이들을 뒤로 하고 버스가 있는 곳으로 가는데 베트남 특유의 잡상인들이 거머리떼 처럼 달라 붙었다.
“레 떼엔 원 달라, 레 떼엔 원 달라(값이 싸다 1달라. . .. . .) ”
그러자 베트남어를 제법 구사 할 줄 아는 나은이 손사레를 치며 말한다.
“노우 노우, 또 이 콩 껀 까이 나이, (싫다, 나는 이것이 필요 없다) 노우 노우, 또 이 콩 껀 까이 나이"
그렇치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바짝 끝까지 따라 붙는 것 이었다. 그러다 문득 옆에 있는 흰색 아오자이 차림의 자전거를 탄 한 처녀를 보았다. 날렵하게 몸이 빠진 예쁜 처녀(환티홍)가 신 작가에게 베트남어로 계속 얘기한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 하는 외국인에게는 더욱 끈질기게 바짝 다가서는 것이 이들의 생리이다.
일행은 인근에 있는 동바 시장에 쇼핑를 하러 갔다. 아오자이를 한 벌 사기 위해서이다. 시장입구에서 부터 빛이 바랜 우표첩, 껌, 베트남의 사진첩과 베트남전 때 미군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그 유명한 지프라이타 등을 좌판에 깔고 파는 상인들이 즐비했다. 또는 팔이 하나 없거나 허름한 옷을 질 질 끌며 구걸을 하는 행색이 초라한 이곳 사람들. 발 딛을 틈도 없이 붐비는 동바 시장은 후에시 동바강을 옆을 끼고 있는 우리나라의 남대문 시장 같은 서민시장이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 카메라를 잡자 옆에 있던 10세 안팎의 소년이 셔터를 눌러 준단다. 최흥기 평론가가 옳다 싶어 손을 들었다.
“오우케이!”
감사의 표시를 하며 카메라를 주었다. 사진을 한 장 찍어주던 그 소년은 얼굴에 땟국물이 주르르 흘리며 허름하게 옷을 걸쳤다. 잠시 후 이 소년은 거칠게 손을 내밀었다.
측은한 생각이 들어 주머니를 뒤져 동행한 최성민 기자가 1 달라를 던져 주었다.
그 옆의 한 소녀가 또 손을 내민다. 다시 1달러를 주었다. 그러자 또 옆으로 한 떼의 어린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손을 내민다. 너무 심했던지 후에의 현지 안내원인 ‘미스터 끙’이 뜯어 말리고 그들을 보낸다.
이 와중에 김 교수가 길을 걷다가 리어카 옆에서 허름한 옷차림으로 누워 담배를 피우던 어떤 남자의 발목 끝을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그는 벌떡 일어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순간 김 교수는 당황했다. 최흥기 일행 등도 다가와 걱정스런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현지 안내인 미스터 끙에 의하면 괜히 잠자는 나를 건드렸으니 원 달라를 달라는 것 이란다. 과거 월남전 당시 가만히 두면 될 것을 너희 동양인이 우리나라 땅을 들어와 우리 월남인들을 죽이지 않았냐는 것이다. 일행은 어처구니가 없어 했다.
“에이, 더러워서 쳇. 김 교수가 까짓거 1달러 주고 가자구.”
“으으음 그렇게 해야 될까봐. 모르고 저지른 실수를 거지고 지난 역사까지 들먹이는군.”
나은이 거들며 말했다. 김 교수는 안주머니에서 1달러를 꺼내어 주고 얼른 그 자리를 뜨자고 했다. 김 교수가 말했다.
“아까 그 사람의 새까만 눈에서 월남전 베트콩의 섬뜩이는 눈빛을 보았어.”
“그러게 말이야, 그 주변에 있는 현지인들도 다 같이 눈을 부릅 뜨고 우리에게 물려들잖아. 마치 포위라도 말이야.”
“무서워 무서워.”
최성민 기자가 설명을 한다.
“이들은 대부분 지난 일은 잊고 앞으로가 중요하니 경제개혁(도이모이)을 하자고 했지만 아직도 저렇게 지난 전쟁 때 입은 상처를 치유 못하고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못해요. 이해하세요.”
“맞아, 하긴 우리나라도 일제 36년의 압제의 늘 원통해 하는 감정이 있잖아. 오랫동안 외국의 지배를 민족이니 그럴만도 하겠지.”
신 작가도 체념섞인 듯 말했다.
“그으래 우리가 이해하자고 허허허. . . . . .”
길을 걷다가 잠시 열을 보았다. 아뿔사! 그 옆으로 아까 후에왕릉에서부터 웃으며 유난히 접근하던 예쁘장한 처녀 ‘환티홍’ 꽁까이가 이곳까지 따라오며 웃고 서 있지 않은가. . . . . . ?
‘ 저 처녀가 어쩌자고 여기까지 따라왔을꼬오. . . . . . ?’
신 작가 옆에 서서 웃던 김 교수가 빈정 거린다.
“오오, 운명의 여신이여, 여기 라이따이한 2세 출연을 예고하는 이가 한국에서 또 왔나니 . . . . . . ”
김 교수 또 신파조 대사 한 마디.
“또-이 콩 궨 드억 롱 똗 꾸어 안 환티홍 꽁까이 (베풀어 주신 은혜 잊을 수가 없습니다. 환티홍 꽁까이. ”
환티홍 꽁까이는 아담한 얼굴 검으잡잡한 귀여운 모습으로 말한다.
“또-이 렅 띠엑 또-이꽁 꼰 어 더이-느어(우리는 여기 더 있을 수 없어 안되었습니다.)”
일행은 환티홍 꽁까이라는 처녀를 힐긋힐긋 뒤돌아보며 일행은 동바시장을 빠져 나왔다.
호텔에 오면서 최성민 기자는 말한다.
“한국과 비슷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베트남은 투쟁과 외침의 한 서린 나라였지요. 중국의 오랜 남진침략과 지배, 18세기 프랑스의 오랜 식민지 생활, 일본의 침략, 미국의 전쟁 등 . . . . . ”
이러는 과정에서 이들은 많은 시련을 겪었단다. 우리가 일제 36년 압제의 그늘과 6.25라는 전쟁의 상흔을 겪었던 것 처럼. 가난에 찌든 이들을 보면서 우리의 지나간 배고픈 시절이 생각이 나지 않느냐며 최 기자가 묻는다. 나은과 신 작가 일행은 약속이라도 하듯 말한다.
“암요, 암이고 말고 쯧쯧쯧. . . . . . 우리의 부모님 선배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어요.”
“맞아요, 나는 아까 동바시장에서 팔이 하나 없이 다니며 구걸를 하던 어느 아저씨를 보며 눈물이 핑 -- 돌았어요.”
호텔에 들어와 여장을 풀고 있자 호텔 웨이터로부터 밖에 어느 여자 손님이 나은 작가를 찾아왔단다.
“누구일까 . . . . . . ?”
“오호 우리 나은 작가 땡 잡았네.”
하고 의아심으로 나은이 정문에 나가보니 아까 후에왕릉에서 부터 물건을 사라며 달라 붙던 ‘환티홍’이란 처녀가 어느새 고옵게 아오자이를 차림으로 웃고 서 있진 않은가?
“또 이렅 부이 드억 갑 안(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러더니 얼굴 옆으로 손바닥을 두 손으로 대며 요염하게 웃는다. 무슨 뜻인지 몰라 호텔 웨이터에게 물으니
“오늘 밤 연인이 되고 싶대요. 손님이 좋으니 그냥 하룻밤만 이래요 . . . . . . ”
나은은 몇 년 전 일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 중국 내몽고內蒙古 ‘포두包頭를 갔을 때 만났던 우산을 쓴 '띵 짜우’란 미모의 여인이 있었다. 말이 통하진 않지만 유난히 별이 총총히 떠 손안에 잡힐 듯 환상적인 몽고에서의 밤. 머리와 옷에 이슬 촉촉이 맞은 초원草原위 춤판에서 못추는 춤으로 서로 ‘보디 랭귀지(!)로 주고 받던 띵 짜우란 여인의 눈을 닮은 듯한 베트남 후에시의 환티홍 꽁까이 . . . . . .
나은은 생각했다. 이억만리 베트남에서 외국 여인과 한밤에 데이트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환티홍은 자기를 따라 오라며 먼저 앞선다. 나은은 좋다며 뒤 따라 갔다. 저만치 가자 호텔 옆 골목에 시클로 몇 대가 가로수 등불 밑에 서 있었다. 그 옆으로 열사의 나라 특유에 인상인 검으잡잡하며 깡 마른 사내 몇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환티홍과 그들 이 몇마디 주고 받더니 시클로 한 대가 신 작가 미끄러지듯 굴러온다.
나은은 잘 되었다 싶어 시클로에 올라탔다. 그러자 준비를 한 듯 환티홍이 덥썩 신 작가의 무릅 위에 앉는다. 시클로 운전수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시클로 페달을 밟는다. 나은과 환티홍을 태운 시클로는 턴득당거리를 지나 사이공 강가로 향한다. 가는 길이 골목골목으로써 요동이 심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은 작가 무릅 위에 앉은 환티홍은 엉덩이를 요리조리 돌린다.
‘어휴 --- 이 아가씨가 가만히 앉아있지. 왜 이리 움직이나?’
신이 나는듯 시클로 운전수는 더욱 핸들을 좌우로 흔들며 페달을 밟는다. 거리는 베트남 전통가옥과 프랑스식 건물이 조화를 이루며 즐비하다.
‘자주와 자유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라고 말하여 유명한 베트남 근대사의 국부國父 호치민(1969년 사망)이 출생하고 원조 제1대 황제(1802년-)에서 부터 13대 왕조인 바오다이 황제(1945년)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릉이 자리한 곳이다.
동카인 왕릉, 티에우찌 왕릉, 카이딘 왕릉, 투둑왕릉 등 전제정권 시기의 대규모의 호화로웠던 베트남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도시였다.
그래서 미국 내셔널 지오그래픽 선정 ‘완벽한 여행자가 일생에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곳 50곳’으로 선정하였다. 베트남 후에시는 문명과 자연이 잘 조화된 비경의 중부도시였다.
어떤 이가 말한 것처럼 캄보디아 앙코르 왓트가 신神의 도시라면 베트남 후에시는 왕王들의 도시라는 평가가 적합하였다. 지금은 통일이 되어 없어졌지만 후에시는 DMZ라는 곳이 있었다. 1954년부터 1975년까지 북위 17도선을 남.북으로 나뉘어 이른바 월남과 월맹으로 상징적 경계선이 있는데 하노이 방향 북쪽으로 17km정도 가면 이 경계선이 있었다.
이곳도 역시 많은 자전거와 시클로, 오토바이 등의 행렬이 도시 길가에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길가 한쪽에서는 빵이나 팥밥 또는 퍼(베트남 가락국수. 3,000-4,000동 우리나라 돈으로는 400원 정도)로 아침을 먹는 근로자들의 서민적 모습이 눈에 자주 띈다.
투둑왕릉을 가기 위하여 후에시를 지나는데 안내원이 신 작가에가 말 한다. 저기가 바로 국부 호치민이 공부하던 ‘쿠억호크’라는 학교란다. 시내 길가에 있는 쿠억호크는 당시는 남자학교였지만 지금은 남녀 공학 고등학교가 되었단다. 벽돌 건물로 교정은 녹색으로 뒤 덮혀 우리나라의 대학교 같이 넓고 여유가 있다. 교실에는 낡은 책상과 의자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주로 문학과 수학을 가르친다고 했다.
후에시에서 7km정도 가면 투둑황제의 묘가 있다. 이 왕궁은 누가 보아도 산 속 남향에 위치하여 한 눈에 명당이라는 생각이 이내 들만큼 위치가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침 도착한 시간이 저녁나절로 황혼이 물들어 가고 있었다.산으로 둘러쌓인 주변은 조용한 산세에 적막감마저 들어 을씨년 스러웠다.
오랜 세월 전에 자리한 제4대 투둑황제(1848-1883년)의 왕궁이어서 그런지 계단과 대리석 등이 고생창연 하였다. 이끼 낀 돌계단 입구의 가장자리에는 금방 승천이라도 할 듯 용의 무늬가 새겨진 돌이 기염을 토하고 누워 있었다. 위로 올라가자 대전 양 옆에 도열한 투둑왕의 신하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같이 키가 무척 작았다. 약 1m 40cm정도 이었다. 이유를 물으니 실제 키는 이 보다 더 컸는데 투둑왕이 키가 작아 신하들을 더욱 작게 조형하여 세워 놓았다고 한다.
이 왕궁은 넓은 별장처럼 조용한 건물로써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정경이었다.1864년부터 1867년까지 약 3년에 걸쳐서 완공하였다고 한다. 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 커다란 연못이 있고 그 주위에는 조전釣殿과 시원한 목조건물이 있다. 연못 왼쪽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황제를 모신 절이 있다. 그 뒤에는 황제의 공적을 기라는 묘비가 있고 바깥쪽에는 베트남의 국화國花인 연꽃을 새겨놓은 탑이 서 있었다.
투둑왕궁을 다 둘러보고 나오는데 저만치 붉은 와인 색깔에 물들은 산 정상에 우리나라의 산불전망대 같은 조그만 원두막이 보였다. 그러자 문득 치열한 월남전 당시 베트콩을 감시하던 우리 청룡부대의 적 관망대처럼 보였다.
“저것이 혹시 월남전 당시 우리 국군들이 사용하던 정글의 전방 적 주시용 관망대가 아닐까요. . . ?”
“어허 그으럼 우리를 지금껏 저 관망대가 감시를 . . . ?"
우리 일행은 주옥같은 문화유산의 보고寶庫인 후에시를 뒤로하고 다낭시를 향했다. 앞으로 경우 3시간 정도 걸립니다. 원시적 비경의 ‘해운海運고개’ 초입에 접어 들었다.
고개 초입부터 짙푸른 남중국해의 바다와 깍아지를 듯한 절벽과 풍요한 자연의 원시 은 아! 하고 감탄이 나왔다. 그야말로 세계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추천한 완벽한 여행자 한 번은 가봐야 할 빼어난 풍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꼬불꼬불한 해운고개에 들어서자 현지 가이드가 말한다.
“이곳 베트남은 마치 양파껍질 같아요. 벗기면 벗길수록 알 수 없는 곳이 바로 베트남이예요. 마치 저기 고개 아래에 펼쳐진 구름처럼 아리송해요.”
오른쪽 산등성이로는 끝없이 펼쳐진 산과 정글들 왼쪽으로는 남중국해의 푸른바다를 안고 휘감으며 얕으막하게 생긴 야자수림 사이로 조용한 어촌들이 언뜻언뜻 내려다 보여 ‘이곳도 역시 사람 사는 곳이구나!’하고 생각이 들었다.
또 고개 중간쯤에 다다르자 무장한 군인들이 위협적인 표정으로 초소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 청룡부대 군인들과 이곳 베트콩들이 총 뿌리를 겨눈 채 싸웠던 월남전의 일들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듯 했다. 낡은 푸른색의 군복에 검으잡잡한 깡마른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모습은 섬뜩한 마음 마져 든다.
신 작가는 사촌형 정식으로부터 월남을 다녀 온 후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덕식아, 저 베트콩 녀석들은 당시 우리 국군 포로를 잡으면 사지를 찢어 나무에 걸쳐 놓았단다.” 참으로 지독하고 무서운 놈들이었지.“
“그런데 형 우리 한국의 해병이나 청룡부대도 베트콩보다 더 용맹 했었잖아?”
정식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물론 용맹무쌍했지. 베트콩들한테는 무서운 냠쥬딘 따이한 이었지. 그러나, 그러나 이 얘기는 다른데 가서는 하지 말아아. 나도 정글 수색중에 어느 마을을 포위하고 집에 불을 사르고 화염포로 공격을 하던 중에 부녀자와 아이를 죽였지. 내 손으로 말이야.”
“아니 형 그거 정말이야. . . . . ? 왜 민간인을 죽여 . . . . . . ?”
정식은 머뭇거리며 말을 돌려 얘기한다.
“으음 그들은 이들 민간인들 일부는 낮에는 우리 한테 협조하지만 밤에는 베트콩한테 정보를 주는 이중간첩이었거든. 그래서 싹쓸이를 하였지. 그런데 그런데 . . . . . 덕식아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우리가 선량한 민간인을 죽인 것 같더라. 어휴---- 이 손을 잘라버려야 할 터인데 . . . . ”
“형, 정말 그 --그랬어?”
“. . . . . . . . ”
그때 정식이 형은 방바닥을 치며 후회 하는듯 하더니 갑자기 집을 뛰어나갔다. 어디를 갔는지 궁굼하여 동네입구에 장 張씨네 가계를 가보았더니 그 가게 귀퉁이에서 혼자서 깡소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형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다 마신 빈 술병으로 오른손 등을 치고, 또 번갈아가며 왼손 등을 치며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아이구 이 저주받을 손아. 어서 죽어라. 어서 죽어 버려라. 흐흐윽---흐으윽---”
“. . . . . . !?”
덕식은 이런 사촌형 정식의 자주 보았다. 정식이 형은 그 후로 종종 헝클러어진 자세로, 더러는 아침 밥도 안먹고 식전부터 동네입구에 장씨네 가게에서 술을 많이 마시곤 했다. 아마도 월남전쟁 이후의 나름데로의 자괴감 전쟁의 공포에 치를 떠는 것 같았다. 그 후 신 작가는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월남전 이후의 국내의 경제성장과 참전용사들의 허탈한 모습 그리고 그 가족들이 겪는 정신적인 어려움에 어찌하여야 하나. . . . . ’
한참을 가다보니 랑고비치(Langco beach)라는 해변이 나왔다. 일행은 우르르 몰려나와 하이얗게 펼쳐진 백사장을 가로 질러 푸르런 남중국해 바닷가를 향하여 걸었다.
해변가 까지 잡상인들의 상혼은 뻗쳐있었다. 월남전 당시 미군과 우리 국군들이 애용했다던 지프라이터와 빛 바랜 우표첩등 잡다한 것들을 바구니에 담아온 소녀과 아주머니들이 끈질기에 달라 붙는다. 푸른 해변을 뒤로하고 오르니 코코넛을 판다. 지난 밤 후에시에서 마셨던 술 탓이 있어 코코넛을 한 개 사서 그 안의 물을 마시니 참으로 달콤하며 시원하였다.
그리고는 허리를 펴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남중국해의 넓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30여년 전 우리의 국군 청룡부대와 공병부대인 십자성 부대 장병들이 고국을 그리워하며 배를 타고 이곳 남중국해를 오갔다는 생각이 미치자 아득한 옛날일로만 느껴졌다. 또 이곳 해변과 저만치 정글에 이르기까지 전후방이 없는 게릴라전인 월남전을 치루면서 죽어간 우리의 선배 국군들을 생각하니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964년 한국군 베트남 파병을 시작으로 1975년 사이공함락으로 남베트남 정권이 붕괴되기까지 10여년동안 총 40여만명의 파병과 5천여명의 우리 국군이 전사하였다.
근간에 각종 국내외 언론에서 지적하는 것 처럼 과연 베트남에 대한 국군의 파병이 자유수호의 의지였는지, 아니면 단지 미국을 위한 용병이었는지, 또는 6.25전쟁으로 피폐해진 우리나라 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구실이었는지 이제와서 전후 前後 평가 評價 라는 애매한 잣대로 재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우리들의 형님이자 아저씨 같은 선배들이 수억 만리 멀리 이국 땅인 이곳 열사의 나라에서 따듯한 부모와 가족들을 뒤로하고 처연하게 죽어갔다는 사실이 가슴을 뭉쿨하게 메어지게 하고 있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이 일행은 태운 버스는 아슬아슬한 협곡의 고갯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아스라히 저 발 아래 펼쳐진 계곡 아래로 그야말로 해운海雲 고개답게 바다구름이 손에 손에 잡힐듯 운무雲霧를 형성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고개를 가는 사이에는 길 옆에 분수들이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것은 저 높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자연스럽게 호수에 연결하여 힘겹게 오가는 차량의 바퀴에 물을 뿌려 냉각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산중간에 우리의 시골집 뒷켠에 있는 장독대의 작은 신당 같은 것이 보여 물으니 저것은 어느 날 이 지점에서 차량이 굴러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망자亡者를 위로하는 한편 위험표시를 하기 위함이란다.
발 아래 낭떨어지로 자칫 구를 듯 또는 좁은 언덕길 소로를 따라 손에 땀을 쥐게 하듯 곡예운전을 하는 버스가 다다른 지점은 다낭시 못미쳐 ‘하이반 고개’였다. 이곳은 월남전 당시 우리국군의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해운고개가 끝날 무렵 저만치 송차반도로 둘러쌓인 천연항港인 다낭이 한 눈에 들어왔다.
(4)
후에시를 뒤로 하고 해운海運고개와 하이 반(바다와 구름의 뜻)고개를 힘겹게 달려 도착한 곳은 송차반도로 둘러쌓인 천연항구港口 다낭(Da Nang)항이다.
하얀 포말이 몰려오고 끝없는 진초록색의 남지나해를 끼고 야자수와 사탕수수나무가 백사장에 즐비한 아름다운 항구인 베트남 최대의 중부도시인 다낭.
옛 부터 동서무역의 중계지 역할을 했으며 중요한 국제 무역항으로써 번성했던 이곳은 2-15세기에 걸쳐 세력을 과시했던 참족의 나라인 찬파왕국의 왕도이기도 했다. 왕도는 다낭 시가지 근교인 차큐에 있었던 때도 있었는데 주변에는 미션聖地 등 찬파의 각종 문화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다낭 시내에 들어서니 이곳 역시 많은 오토바이와 자전거 시클로 등이 무수히 도로를 지나고 있었고, 인도에는 삿갓모양의 롱가이를 쓴 많은 사람들이 얇은 대바구니에 파인애플과 바나나를 담아 어깨에 막대기를 매고 힘차게 길을 지나고 있었다.
최흥기 평론가가 말한다.
“야호-- 저 전형적인 베트남 꽁까이들의 옷차림을 봐.”
“허허허 시원하군. 잘룩한 허리에 자전거라.”
런(삿갓)과 흰색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 여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밝은 모습으로 아오자이 치마자락을 흔들며 지나고 있었다. 이곳의 학교교육 기본 학제는 우리와 같은 12년 코스이지만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각 각 5년 과정이고 고등학교 과정이 2년이다.
다낭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베트남 전쟁 때 미군 최대의 공군기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1965년 미군은 이곳 첫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본다. 당시 미군 공군기지는 현재 베트남군이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월맹군의 본거지였던 하노이를 수시로 맹폭(융단폭격)하는데 이곳 기지에서 전투기 300대가 동시에 이. 착륙했다고 하니 당시 하노이에 대한 미국의 북폭北暴 피 어린 전쟁의 잔해가 눈에 보이는듯 했다.
최성민 기자가 다낭에 관련된 전사 戰史를 얘기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 사용되었던 폭탄 투하량이 635천톤이고, 2차 대전 때는 2,057천이나, 베트남전 때는 무려 7,859천톤이나 폭탄이 투하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융단폭격’이란 낱말도 베트남전 때도 나왔다고 해요. 월맹군은 본거지인 하노이를 출발 중부권과 사이공을 게릴리라식으로 침투했는데 이것을 일명 “호치민 루트”라고 하지요. 베트남 지형은 국도 1호선을 끼고 추옹송산맥長山이 길게 남북으로 이어져 있어요. 밀림에 은거하다가 침투하는 베트콩을 섬멸하기 위해서 미군은 B52 전투기와 헬뮤어 헬리콥터로 무수한 융단폭격을 퍼부었지요. 이로 인해 전쟁 당사국인 베트남은 물론 큰 피해를 입었지만 하노이 인근의 라오스와 중부권 다낭과 퀴논을 끼고 있는 산악지대인 캄보디아가 본의 아니게 폭격의 영향권에 들어 많은 인명과 재산상의 손실을 입었다고 합니다.특히 이곳 다낭 호이안 북쪽의 디엔증은 우리 청룡부대가 1967년부터 다낭 외곽 방어를 위해 주둔했던 곳이지요. 이곳엔 대민 봉사의 하나로 만들어 놓은 ‘살로 따이한도로’가 도로가 있어요.“
일행이 시내에 들어서자 시원하게 일자(-)로 쭈욱 뻗은 따이한로(남쥬딘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따이한로를 걸으며 그 유명한 신화속의 승리전투였던 “쨔빈동전투” 이야기로 최 기자의 전사는 이어졌다.
“1965년 11월 8일 1개월동안의 벌인 이 전투는 번개 1,2,3호이란 전투명의 작전이었지요. 이로써 한국 청룡의 맹위 무적을 세계적으로 부각하는데 큰 몫을 했고, 이른바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귀신(베트콩)잡는 해병”이란 말이 이 전투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신 작가는 시내에서 어느 노인을 잡고 물었다. 공병부대인 십자성부대의 주둔지를 물었다. 노인이 알려준 곳에 가 보았다. 왜냐하면 신 작가의 형 신정식이 이곳에서 잠시 근무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곳은 잡초 무성한 둑 아래에 롤러스케이트장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야자수 나무 옆은 청룡해병대의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남의 가정집으로 사용되고 있고 ,당시 한국무적의 태권도장으로 쓰였던 곳은 지금 스타디움으로 변해있었다. 신 작가는 말했다.
“정식이 형. 이곳에서 얼마나 고국의 가족을 그리고 저 빛나는 남십자성 별을 보며 외로운 상념에 젖어 있었겠지. 지금은 한 줌의 뼈로 변해있을 형의 흔적이여. 이곳에서 형은 피를 토하며 죽음으로 말했지. 자유수호와 조국의 평화, 안녕을 위하여 산화했노라고 . . . . . ”
“오오-- 걸은 간데 없고 세월만 먼지 속에 덮혀 있는 이곳 이억만리 타국 땅. 30여년 전 우리의 선배 국군들이 피와 땀으로 얼룩졌던 곳이라니, 아하 . . . . . . ”
김 교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김 교수의 형 김성태씨도 이곳 월남 땅에서 전장터를 삶의 터전으로 1년여 사투를 벌이다가 귀국하여 고엽제로 시름시름 앓다가 기어이 한 줌의 재로 산화하지 않았는가. 조국의 형제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월남전쟁 . . . . .
나은은 처연한 일행의 얼굴을 뒤로하고 조용히 곱씹었다.
‘전쟁, 그 후 . . . . . . 과연 지금은 그 결과가 무엇이란 말인가?’
일행은 과거 피 어린 전장터를 돌아보며 제 각기 생각에 잠겼다. 시내 중심가에는 ‘누 여인 동상’ 이 있었다. 누 여인은 일곱의 아들을 미군에 의해 희생된 여인으로써 베트남 통일의 애국에 상징으로 추앙 받고 있었다.
시내 가운데를 끼고 흐르는 항강을 따라가다가 쮸라이비치 해변을 향하였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과 우리의 청룡부대가 이 해변을 향해 상륙하였다고 한다. 저만치 배에서 내려 완전무장한 우리 청룡이 총을 들고 용감무쌍하게 쮸라이 해변 백사장으로 보무도 당당히 ‘우리는 청룡이다’ 를 외치며 오는 듯 싶다.
“삼천만의 자랑인 대한 해병대/ 얼룩무늬 번쩍이며/ 정글을 간다/ 월남의 하늘아래 메아리치는/ 귀신 잡던 그 기백 총칼 담고/ 붉은 무리 무찔러/ 자유 지키려 삼군 앞장서/ 청룡은 간다/(중략).
다낭시 쮸라이 비치 해변에서 끝없이 펼쳐진 남지나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다가 근처에 있는 해변 레스토랑에 들렀다. 전사와 전장터에 대한 설명으로 목이 마른 최성민 기자가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마자 큰 소리로 외친다.
“헬로우 .에에 . . . 아이스 비어. . . 아니, 쪼 쫑 또이 하이 쩌이 비어 으업 란.(시원한 맥주 한 두어 병 주세요)?”
베트남에서는 호치민과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영어가 잘 이루어지질 않는다. 그러자 젊은 여성 바텐더 베트남 맥주인 ‘산미걸(San Miguel)’을 가져왔다.
옆에 있던 또 한 사람 20세 전후한 예쁜 처녀가 우리 곁에 다가와 자연스럽게 말을 건다. 함께 간 가이드가 말을 받아 주었다. 그는 일본 통역사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일본인 행세를 했다. 몸집이 작고 얼굴이 희어서 정말 일본인이냐고 묻자, 그녀의 국적國籍위장은 이내 들통이 난다. 왜냐면 옆에 있는 최성민 기자가 외국전문통 기자라서 웬만한 외국어는 다 할 줄 알아 일본어로 직접 대화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을 못했다. 베트남 현지인 처녀로 밝혀지는 순간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어색한 순간이었다. 그러다 김 교수가 소리를 질렀다.
“아악, 저기 천정에 도마뱀이 . . . . . .?”
“어어, 저쪽 벽에도 몇마리 기어다니는데 . . . . .?”
그러자 홀 안에 있던 이곳 처녀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 처럼 웃으며 넘긴다. 밀림과 열대지방의 베트남에서의 도마뱀은 우리나라 집안의 파리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듯 했다.
나은은 베트남에서 현지인들과 일부러 많은 대화를 했다. 그들은 의외로 친절하고 순진했다. 거짓말로 외국인을 상대로 피해를 주는 등의 어슬픈 짓은 안했다. 일행이 만나본 이곳 사람들은 정글안의 싱그러운 잡초와 1년 사시사철 푸르런 논의 벼처럼 순박하고, 남지나해의 초록빛 물처럼 착함이 몸에 배었다고 생각되었다.
일행은 시내에서 20여분 거리에 있는 오행산으로 향했다. 투이손과 킴손, 토숀, 호아손의 다섯산로 되어 있어 오행산이다. 또는 산 전체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어 마블 마운틴이라고 불리고도 있다.그 가운데 가장 큰 쿠이손(108m)의 동굴에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어서 이곳 사람들이 오랫동안 신앙을 모셔왔음을 알 수 있다. 긴 돌계단과 산길을 오라가면 전망대가 있는데 전망이 좋았다. 뾰죽한 4개의 산과 강, 들녘을 끼고 있는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은 가히 절경이었다. 조금 더 뒤로 가면 1968년 미군의 폭팔로 생긴 깊이 10-15m의 굴이 있다. 이곳에도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 또 산기슭의 논누오크 마을에는 여러 가지 민예품을 팔고 있었다. 28도의 무더위로 콜라를 한 병 사 먹었으나 우리의 콜라맛이 아닌 매퀘한 향기가 들어있어 반은 남겼다.
일행은 다낭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참 조각 박물관을 방문했다. 찬파의 유적으로부터 출토된 조각 예술품과 석상을 모아놓은 박물관이었다. 창이 없이 탁 트인 구조였다. 정원에는 꽃들로 만발하여 바람이 불 때마다 주위는 달콤한 향기로 가득찬다. 내부에는 흰두교의 시바신과 가네쉬 신의 석상, 그림 등 참 예술의 우수한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인근의 미션유적지와 함께 들러볼 베트남의 다낭문화의 한 코스이다.
또 다낭 성당의 큰 위용도 보았다. 1923년 프랑스 통치시대에 세워진 하얀색의 카톨릭 교회인데 내부는 산뜻한 스테인글라스로 꾸며져 있었다. 가는 날 마침 저녁미사가 있었다. 성당안과 미처 못들어간 많은 신도들이 마당에서 미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호텔을 가기 전 인근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일행중의 최흥기 평론가가 엊그제 후에시 식당에서 먹은 베트남 고추장 ‘꽁비엣’ 맛을 못잊어 웨이타에게 시켰다.
“짜오 안, 꽁비엣 주세요?”
그랬더니 그 웨이터는 아무 응답을 안했다. 다시 ‘꽁비엣’이라고 소리쳤으나 그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것 같았다. 다시 옆에 있던 나은이 격앙스런 목소리로
“꽁비엣요 꽁비엣. . . !”
그러자 잠시 자리를 비웠던 가이드가 다가와 묻는다.
“무엇을 찾는데 시끄러워요?”
“엊그제 후에시에서 먹었던 꽁비엣 고추장이 맛있길레 달라고 했더니 말귀를 못알아 듣네요.”
그러자 가이드는 눈을 크게 뜨며 반문을 한다.
“꽁비엣은 베트남말로 잘 모른다는 뜻이예요.”
“그으럼, 후에시에서 ‘꽁비엣’ 하니까 고추장을 갖다준 사람은 무어요?”
“아, 그것은 피차 언어소통인 안된 상황에서 한국인이 고추장을 좋아하니까. 어쩌다 그렇게 된거죠. 눈 멀은 포수가 눈 멀은 참새를 어쩌다 잡은 것 처럼. 참-- 내 . . . . . . !”
일행은 눈을 감고 실소를 참아내고 있었다.
“오, 마이 갓. . . . . . !”
(베트남에서 우리의 고추장과 비슷한 ‘맘’이란 것이 있다. 일종의 매운 젓갈류이다)
(5)
인생도 나라도 의지하지 못하고 사시던/ 남지나해 멀리멀리 팜 할아버지/ 나는 그 할아버지와 마주 앉아/ 물소도 취하게 만드는 독한 술을 마셨다/ 그리고 서로 보듬고 월남 말로 울었다/ 내가 마치 한국 전쟁의 고아인 것 처럼/ 퍔 할아버지를 껴안고 / 나는 시금치처럼 시들시들 해지고 싶었다/ 아아! 도마뱀이 그렇게 많이 울던 월남 땅/ 60년대 우리가 벌거숭이로 스쳐간 월남 땅// -詩人 “김준태”의 베트남 추억 全文
한 다발의 비라 몇 장의 신문이/ 감쪽같이 감춰진 가방을 껴안고/ 행운의 빛을 전하는/ 작은 파랑새처럼/ 나는 깊은 잠에 빠진 사이공거리/ 여기 저기를 날아다닌다// (중략) 하지만 나는 슬퍼하지 않는다/ 사랑과 신뢰로 이어진 우리들의 삶/ 조국에게 동지에게 연인에게/ 굳게 맺은 나의 언약은 생명이 있는 한/ 변함이 없다// 죽음을 넘어 뇌옥의 쇠사슬로 끊고/ 암흑의 벽에/ 떨리는 손으로 쓴다 흰옷의 시를 / 방울방울 흐르는 선혈속에 뚜렷히/ 이 흰옷 더욱 빛나게 언제까지나 . . . //
-베트남 詩人 “레 아인 수앙”의 흰옷“중에서
나은 일행은 베트남의 중부도시 다낭항을 뒤로 하고 퀴넌을 거쳐 동양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 나트랑(나쨩)을 향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발 아래에는 파아란 인도차이나 해변과 수목으로 무성한 정글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나은은 비행기기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월남전 관련 시 두 편을 생각해 보았다. 위에 인용한 시는 '김준태'의 “베트남 추억”이다. “못난놈은 얼굴만 보아도 서로 흥겹다”는 우회적 표현처럼 전쟁으로 인한 동족상잔의 고통, 외세의 간섭이란 서룸의 동류의식이 짙게 배인 작품이다. 또 뒤에 인용한 시는 베트남의 대표적 시인인 ‘레 아인 수앙’의 “흰옷”이란 작품이다. 일행이 베트남기행 마지막 날 사이공 강 선상 크루즈 디너파티에서 만난 ‘구엔 반 봉“작가의 소설 ”사이공의 흰옷“이란 책 뒷 표지에 발표된 시이다. 베트남 전쟁당시 그곳을 무대로 학생운동을한 여류작가 자신의 이야기와 그의 연인(현재 남편)을 주인공으로 써 발표된 작품이다. 당시 ’고 딘 디엠‘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하여 저항했던 양상이 우리의 70년대 학생운동과 비슷하였다. 두 작품이 민중의 서룸과 전쟁이 빚은 인간의 아픔을 밀도있게 그려낸 서사적 메타포 표현방식의 시 작품이었다.
최 기자는 이곳은 십자성 부대가 몸소 희생을 감수하며 당시 베트남전을 성공적으로 치루어낸 아름다운 해변도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나트랑은 한국군의 동맥이라고 불리는 십자성부대(100군수 사령부)가 1966년부터 주둔했던 곳이다. 십자성부대는 1965년 10월 여의도 광장에서 맹호부대와 같이 출범하여 그해 10월 16일 부산항 3부두를 출발, 1965. 10. 22 퀴논에 애초에 상륙하여 베트남과의 인연을 맺는다.
맹호부대 사령부와 같이 퀴논 인접지역에 주둔하며 당시에는 군수지원 사령부로써 그 역할을 다하다가 1966. 6. 1 퀴논에서 부대명칭을 100군수 사령부로 개정하고 나트랑으로 이동하게 된다. 주둔인원은 약 600여명이 되며 이 가운데 전사 200여명이고 부상도 많이 입었다고 한다.
십자성부대의 군수지원은 10만여대의 차량수송과 39만여명의 병력수송 및 20동의 군수동 수송작전을 치루었다고 한다. 군수업무를 수행하면서 민사 民事 심리전으로 베트콩 침투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환자 진료와 구호품을 전달하여, 전쟁의 적은 있어도 인류의 적은 없다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주로 추진한 대민사업으로 학교, 사찰, 교회, 교량, 유치원 등을 설치해 주고 농사짓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어 한국의 혼을 심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우리 한국군이 빛나는 전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적기 적소에 군수 지원을 원활히 수행한 지대한 공로로 평가한다. 그러므로 파월 한국군 부대의 동맥과 젖줄로 그 소임을 다해 온 십자성 부대는 어머니상으로 영원히 기억된다.
이외에도 평화의 사도 비둘기부대(건설 지원단)이 있었는데 이 부대는 1964. 7. 15 서울 창동에서 환송식을 갖고 출범한 비전투 부대였다. 제1이동외과 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은 1964년 7월 28일 선발대로 하여 한국군이 부대로서는 최초로 파월된 비둘기 부대는 이름이 상징하듯이 의료진과 건설 공병으로 구성된 평화의 사도 전사부대이다. 바다의 제왕 백구부대(해군 수송부대)와 하늘의 보라매 은마부대(공군지원단)도 베트남 전쟁 군수지원에 크게 기여한 부대이다.
그리고 막강한 전투 주력부대인 청룡부대를 비롯하여 맹호부대, 백마부대 등도 전투와 병행하여 대민봉사에 노력을 기울였다. 베트남 국민의 숙원이었던 대동맥인 1번 국도를 완전개통하는 바람에 베트남의 하노이와 호치민을 잇는 오늘날의 국도와 철로로 활용하고 있다. 이 외에도 대민 농사의 노력봉사, 의료봉사, 도로 및 주택건설, 급수시설 등 우리나라의 새마을 사업의 붐을 일으켜 현지 주민들로부터 ‘고마운 따이한’으로 찬사를 많이 받았다.
각 지역에 세운 태권도장과 문화센터, 학교건물, 공원 팔각정을 건축하는 등 많은 대민지원사업을 벌였으며 환자의 진료와 식량지원, 의류, 농기구 보급, 가옥 및 학교 교실, 노후된 교량과 도로건설, 경로 및 어린이 잔치, 한국의 유명 연예인을 국내로부터 초청하여 현지 주민위안 연예공연, 자매결연 등의 결연사업과 대민사업을 병행실시로 인하여 진정한 우정을 심었던 탓에 베트남의 많은 마을에서는 오늘날까지 우리의 ‘남쥬딘 , 따이한’ 을 잊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최 기자의 장황한 설명에 나은이 분위기 전환을 위해 나선다.
“십자성부 부대 노래 한번 소개하지요.”
아세아 동부 땅에 태양이 밝아 그 이름 용맹스런 건아들/ 인류의 정의 위해 뭉쳐진 용사 화랑들 가는 곳에 평화가 온다/ 자유의 길 밝혀주는 십자성 같이 찬란히 빛나리라 십사성 부대/ 검푸른 남지나에 파도를 넘어 평화의 푸른 별을 여기 왔노라/ 세계의 평화위해 일어선 화랑 우리들 가는 곳에 평화가 온다/ 평화의 길 밝혀주는 십자성 같이 찬란히 빛나리라 십자성 부대/ 어둠의 장글 속에 광명 비추고 민족의 쌓인 원한 이제 갚으리/ 조국의 명예위해 싸워온 우리 승리의 굳은 결의 이곳에 심자/ 승리길 밝혀주는 십자성 같이 찬란히 빛나리라 십자성 부대//
“그 노래소리 들으니 엊그제 호치민시내 관람 때 전쟁기념관에서의 섬뜩한 전쟁의 참상이 잊혀져 가는 구려.”
“그러네요. 우리 한국군이 이렇게 민간인들을 위해서 봉사와 좋은 일도 많이 했구만요.”
“그래요 우리 민족이 남을 잘 돕고 정이 많은 민족이잖아요.”
“참으로 감사하고 보람스런운 국위선양을 했어요.”
이역만리 전장터에서도 우방을 위해 노력한 한국군의 대민노력에 감사해 하는 사이 비행기는 나트랑 공항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었다. 작게 닫힌 비행기 창밖을 보니 베트남은 참으로 아름다운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은 3,260㎞에 달하는 길고 긴 해변과 추옹송 산맥을 따라 남북으로 이어져 한없이 아름답고 자연이 풍요롭고 역동적인 나라이다. 30년 전 이곳 발 아래에서는 이른바 피 맺힌 월남전쟁이 일어났었다.
미국을 비롯하여 한국 등 자유진영의 우방들이 함께 참전 이 아름다운 땅 베트남 땅에 수 많은 폭탄과 총알 쏟아 부었다. 그러는 와중에서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과 민간인 수 백만명이 참혹하게 저 아래 정글 속 불 속에 던져져 죽어갔다. 언필칭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란 미명 아래서 . . . . . .
잠시 후 비행기는 나트랑 공항에 도착했다. 말 그대로 미국 남부 마이애미 항구를 닮았다고 하듯이 넓고 눈부신 해변과 시원시원하게 하늘을 향하여 뻗쳐진 야자수 나무 등이 휴양지로써는 최적지였다. 최성민 기자의 설명이 이어진다.
“이곳은 월남전 당시 한국군사령부와 십자성부대가 주둔했던 곳으로써 인구는 약 30만의 후카인성 성도省都 였지요. 굴지의 리조트 지역이기도 하며 명칭은 영어식 발음이므로 나트랑보다 나짱이 더 잘 통해요. 고대 참 왕국의 유적지가 많고 파랗게 빛나는 바다속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빨려들 것 처럼 옥주색이지요. 해변은 알록달록한 파라솔이 있고 건너편에는 작은 섬들이 몇 개 떠 있어요. 6㎞에 달하는 고운 모래사장에는 낭만적인 노천 카페들이 많아 여행객들의 천국 같았고 이곳 해변도로에는 ‘트레인 파우’라는 거리가 있지요. 월남전 당시 우리의 군인들이 태권도를 이 지역에 보급하기 위해 지었던 태권도장들이 아직도 있어요.”
다음날 일행은 가이드의 추천에 따라 카이 강 하구에서 빨간 파란색의 많은 어선을 보며 식당에서 신선한 해산물인 대하와 바다제비, 비둘기를 재료로 만든 ‘이엔보우카우’요리라는 명물로 별식을 먹고서 하노이 ‘하롱베이’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 내려 바이차이로 가는 버스를 타고 3시간 가량 갔다. 하롱베이는 얼마나 아름답기로 유명한지 중국의 명산인 태산이 와서 무릅을 끓고, 계림이 와서 울고 간 곳이라고 한다. 3천여개의 석회암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진 이곳은 1천여개의 기암이 잔잔한 해면에 그 모습을 비추고 있어 가히 환상적이었다. 바다의 숲으로써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적을 물리치고 보석을 얻었는데 그것이 기암이 되어 바다부터 외적을 막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수석을 전시해놓은 듯한 기암괴석과 각각 독특하게 죽순같이 솟아있는 섬들은 동양화의 한 장면 같았다. 또 이 부근이 미국의 월남전 개입 단초를 제공한 그 유명한 ‘통킹만’이다.
베트남에서 유명한 아니, 인도차이나반도에서도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곳으로 유명한 메콩강 델타. 쌀과 어류의 생산지대인 ‘메콩 델타지역’ 인 ‘미토’ 와 ‘빈룽’을 가기 위해서 아침 일찍부터 행장을 챙겼다.
드넓은 평야와 계곡 사이 사이 강가를 따라 조각배들이 끝없이 이어져 신선한 고기를 낚는 메콩강 즐기의 원주민들. 저 해맑은 하늘 만큼이나 순수하고 티 없는 그들을 만난다는 마음에 필자는 벌써부터 마음이 들떴다.
차량은 나은 작가의 고집으로 호치민에서 가장 가까운 남부지방의 휴양지인 해안도시 ‘붕타우’를 들렀다. 우리나라가 지난 1964년 맨 처음 월남전에 국군을 투입하면서 태권도와 의료반을 보낸 곳이 바로 이곳 붕타우였기 때문이다. 최성민 기자의 설명이다.
“요컨대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한 단초가 이른바 ‘통킹만’사건(훗날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이었다는 설이 있다.)이었어요. 따라서 우리나라는 태권도와 의료반으로 전쟁수행을 위한 민간단체 부분의 교류라는 미명 아래 바로 이곳에 따이한의 얼굴을 비로소 처음 드러냈기 때문이지요.”
이곳 붕타우는 1년 내내 해수욕을 즐길 수 있어 월남전 당시 주월 한국군의 장성과 미군의 고위층들이 수시로 ‘전쟁과 휴양은 별도’ 라는 신조어를 낳으면서 이곳 남국에서의 에메랄드 녹색 바다와 백사장 파라솔 아래서 여인들과 사랑과 낭만을 즐겼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는 많은 해수욕객으로 붐비고 있다. 이곳은 베트남에서 나트랑과 함께 남국의 경관을 즐기는 굴지에 해안 휴양지가 되었다. 또한 붕타우는 석유와 유전으로 유명하여 수시로 외국의 유조선과 대형 크레인이 출입을 하고 있었다.
메콩델타 입구의 도시인 미토에 도착 퍼와 비슷한 쌀가루로 만든 후티유면으로 허기를 채웠다. 망고. 랑트란 등이 풍부한 이곳은 각종 신선한 과일로도 유명하다. 특히 미토의 문화관광 백미白眉는 ‘메콩크루즈’이다.
우리는 작은 모터가 달린 나무배를 타고 타이손 섬을 향하여 출발했다. 강 양쪽으로 펼쳐지는 정글을 바라보면서 갈색빛이 짙게 베어나는 메콩가의 장엄함과 웅대함을 보고 놀랐다. 일행은 옆으로 이따금 스쳐 지나가는 벤처행 페리와 그믈을 던지고 검으테테한 얼굴의 어부들을 보며 강바람에 심호홉했다.
다시 미토에서 메콩강 지류의 하나인 티엔잔前江 페리를 타고 건너 빈롱으로 갔다. 강가에는 작은 배들이 노를 저어 천천히 강을 건너 갔다. 강위로 오가는 배와 어부들의 모습이 영화속의 한 장면 같이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했다.
빈롱의 아침은 해가 뜸과 동시에 강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뒤로하고 아침 안개속을 오가는 배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마침내 강가의 녹색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 할 때 쯤 시장에서는 베트남 메콩강의 하루를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인도차이나반도의 숨겨진 보석 베트남 기행을 끝내고 추억의 이곳을 뒤로 남기며 내일이면 신 작가 일행이 이곳을 떠난다. 신 작가의 사촌형 신정식씨를 싸늘한 주검으로 몰고, 김 교수의 형 김성태씨를 고엽제란 휘귀한 병으로 말라 비틀어 죽게한 월남 땅을 떠난다. 이억만리 멀리 비행기로 5시간을 허겁지겁 달려왔던 밀림과 아오자이의 베트남.
최성민 기자의 정리된 베트남 전사 戰史 가 다시 시작된다.
“베트남은 지난 1964년 월남전이 발발하면서 ‘따이한’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국군 31만여명이 참전하면서 4천여명이 사망하고 전상자 1만5천여명이 발생하는 아픈 역사가 있어요. 또 이 뿐만이 아니라 전쟁의 후유증이 지금껏 있지요. 그 예의 대표적인 것이 월남전 당시 무분별하게 살포되었던 이른바 ‘오랜지제’라고 불리던 고엽제의 피해이지요. 이 고엽제의 피해를 미리 인지못했던 순진한 우리 국군들은 이 약제를 모기에 안물리기 위해 몸에 바르거나 심지어는 그냥 먹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현재 약 1만여명이 이 병으로 인하여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나은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어느 병사가 한 말이 생각이 났다.
“나는 죽어서 천당에 갈 것이다. 왜냐면 나는 이승에서 ‘월남지옥’에 있었으니까. . . . !”
또 이 뿐만이 아니다. 베트남전과 동시에 발생했던 한인韓人 2세, 3세로 불리는 라이따이한이 현재 베트남에 1만5천여명이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한국인도 아니고 베트남인도 아닌 그저 혼열아라는 따가운 눈총속에서 학교와 취업, 결혼 등 각종 베트남사회의 불이익 속에서 하루 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일행은 이들의 현장을 보기 위하여 한국의 김용관 목사님이 라이따이한을 위해 설립 운영한다는 ‘휴먼 직업학교’를 찾기로 하고 호치민시에서 버스를 탔다. 2시간여 달려간 그곳엔 역시 우리의 모습을 닮은 라이따이한 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미싱돌리기와 텔레비전 및 라디오 부속품의 조립, 컴퓨터조작, 전기반으로 나뉘어 더운 기온에서도 구슬땀을 흘리며 공부하는 우리의 모습을 닮은 그들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른바 월남전 당시 따이한인 ‘김 金 상사’ ‘박 朴 병장’ ‘이 李소위’ 의 아들과 딸 쯤으로 회자膾炙되는 이들을 누가 이렇게 베트남의 구석에 몰아넣고 이처럼 정신적 물질적 빈곤속에서 살아가게 했는가. 월남전 당시의 국군들을 탓하기 보다 명분 없는 전쟁의 사지死地로 내몰은 당시의 위정자가 미웠다.
아픈 가슴을 뒤로하고 휴면 직업학교를 나와 차이나타운과 벤탄시장을 거쳐 19세기 중반 프랑스 통치시대에서부터 지어진 멋진 식민지풍인 콜로리얼 가옥들이 즐비한 호치민 시내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어 밤에는 사이강 선상 디너 크루즈 일정에 나섰다. 특히 기대되는 것은 베트남 전쟁의 허虛 실失을 국내에 최초로 알린 호치민대학 유학생 구수정女씨와의 만남과 베트남 전쟁을 실제 참전하면서 느낀 내용을 소설로 출판하여 화재를 모았던 ‘사이공의 흰옷’에 저자 ‘구엔 반 봉’ 부부를 만나기 위해서 벌써부터 마음이 들떴다.
사이공강의 아름다운 야경에 취했다. 강 양쪽으로 많은 배와그 뒤로 네온싸인이 반짝거렸다. 강가 대형 건물 옥상에는 ‘DAEWOO' 또는 ’LG'의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 광고판이 눈에 띄어 역시 ‘한국’이라는 자부심도 들었다.’ 대형 초호화 관광선인 크루즈가 강가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면서 선상 디너쑈는 절정에 오르고 선상 중앙 무대에서는 베트남 특유의 전통노래와 악기연주가 이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베트남에서 ‘전쟁의 슬픔’에 저자인 ‘바오닌’과 함께 대표적인 작가로 떠오르는 ‘구엔 반 봉’ 부부가 ‘한겨레 21’ 호치민 통신원이자 유학생인 구수정씨와 함께 나타났다. 우리와 반갑게 악수를 하고 술을 나누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베트남전쟁의 문제점과 미국, 그리고 한국의 참전 또 베트남 민족의 아픔을 함께 얘기했다. 조용하면서 마음씨 고와 보이는 표정이 밝은 이들 부부를 보면서 ‘과연 전쟁이 있었는가?’하고 스스로 반문했다. 구엔 반 봉은 우리들에게 자신의 저서인 ‘사이공의 흰옷’이란 책자에 서명해주며 얘기했다.
호치민에서의 마지막 밤을 끝으로 다음날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월남전쟁과 한국, 그리고 미국, 또 눈망울이 초롱했던 라이따이한의 그늘진 얼굴들 .
인도차이나반도의 숨겨진 보석, 3.260㎞에 달하는 아름다운 해안선, 변화무쌍한 자연환경, 역동적이면서 풍광이 수려하고, 메콩델타 지역 등 자연이 풍요로운 나라로 잘 알려진 베트남 구석구석의 진면목을 우리는 멋과 맛깔스럽게 보았다. 나은 작가 일행은 베트남 땅을 향하여 묵념을 했다.
“월남전에 참전하여 전사하신 국군장병과 유가족에게는 고개 숙여 추도와 위안을 드립니다. 아울러 지금도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에게도 정중히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름다운 아오자이를 몸에 걸치고 나은 작가와 잠시 연정을 나누었던 환상적인 그녀 ‘환티홍 꽁까이 ’
“잘 있으시오. 나는 간다아-- 깔은 몽”
베트남 호치민 탄숀나트 공을 이륙하여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은은 스스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언제인가 읽었던 장윤우 시인의 ‘우리의 젊은 피는 식을 줄 모른다’ 라는 시 전문을 떠 올리고 있었다.
건강한 아들들은 이제 돌아왔다// 異域 하늘 태극기 꽂고// 祖國의 부름으로/ 참으로 오랜 기간/ 살점과 피로 싸워왔던/ 형제들이 전우들이/ 검은 피부와 반짝이는 흰 이를 / 들내우며/ 귀유하는 것이다// 砲煙이 안개로 둘리고/ 敵彈이 빗발치는/ 現場에서 / 토이호야, 짜빈동/ 늪과 草原에서/ 쟝글과 砂丘에서/ 찬 이슬 맞으며 땅두더디처럼/ 十字星 지켜보던/ 민족의 아들들이/ 거룩하게/ 참으로 위대하게 오는 것이다// 血義를 다진/ 白馬와 비둘기/ 槐宸도 잡는 靑龍/ 猛虎 勇壯들이여/ 金上士, 李大尉, 꽁까이의 눈물 젖은 손길을/ 차마 못 부리치던 朴一兵// 戰魔 속에서 모두 비호같던/ 친구들이여/ 우린 무엇을 드려야 하는가// 오직 感泣 할 뿐/ 민족의 이름으로 꽃다발 드르느니/ 우리의 젊은 피는/ 식을줄 모른다//”
(The n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