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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년 가을 룻기(2)
룻기 2:1-3:18
룻기 3:13
기업 무를 자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룻은 시어머니를 사랑하여 시어머니를 따라 나섰습니다. 또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참 신으로 영접하고 부모와 고국을 떠나 하나님 백성의 고장 유대 베들레헴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에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현재 아무 것도 없었을 뿐 아니라 장래도 암담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룻은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그리고 룻을 도와주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I. 이삭 줍는 룻 (2:1-16)
2절을 보면 룻이 시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룻은 생계를 위해 고심하다 마침 보리 추수 때임을 알고는 이삭을 줍겠다고 했습니다. 이삭을 줍는 일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하는 무시 받는 일이고, 또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일해야 하는 고단한 노동입니다. 허리 펼 새 없이 하루 종일 주워도 지푸라기를 떨고 나면 얻는 양이 무척 작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이삭을 줍겠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형편이 어려워지면 옛날 좋았던 시절을 생각합니다. “내가 옛날에는 이삭을 흘리고 다녔는데 지금은 이삭을 줍고 다니다니, 아이고 내 신세야.” 하고 한탄하면서 비참한 심정으로 살아갑니다. 또는 “이렇게 한 포기 한 포기 주워서 언제 한 가마니 모으냐? 차라리 훔치는 게 낫지.” 하면서 왕창 모을 생각하다가 시간만 죽입니다. 그러나 룻은 이삭줍는 일이 비럭질이나 도둑질말고는 그녀가 현재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일을 하고자 했고, 아주 부지런히 했습니다. 그녀는 건성으로 마지못해 하거나 짜증내면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현재의 형편을 겸손하게 받아들였고, 현재의 형편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했습니다. 한 포기 한 포기 이삭을 주워 모았고, 그 하나 하나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도 그랬습니다.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되었지만, 거기서 그가 할 수 있는 일, 그러니까 간수장을 돕는 일을 열심히 했고, 그러다가 바로 황제의 술 맡은 관원장을 잘 돕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셉을 술 관원장을 통해 바로에게 인도하셨고, 거기에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유럽을 개척하라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빌립보로 갔지만 사람도 없었고 일 할 장소도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그저 강가에 나가 기도하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일을 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루디아라는 좋은 양을 만나도록 인도해 주셔서 빌립보와 유럽을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룻도 겸손하게 그가 현재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축복하시고자 보아스에게로 인도하십니다.
3절을 보면 룻이 추수꾼들을 따라가며 그들이 흘린 이삭을 줍다가 우연히 보아스라는 사람 소유의 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침 보아스가 추수 상황을 보기 위해 밭에 왔는데, 그동안 보지 못하던 처자가 눈에 띄었습니다(4).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였는데(1), 그는 현장 주임에게 “저 젊은 처자는 누구인고?”하고 물었습니다. 현장 주임이 대답했습니다. “나오미와 함께 온 모압 소녀인데, 우리 밭에서 이삭을 줍게 해 달라고 사정하더니, 잠깐 쉬고는 하루 종일 이삭을 줍고 있습니다.”(7) 보아스가 감동하면서 룻에게 말했습니다. “내 딸아, 다른 밭에 주우러 갈 필요 없이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8) 그리고 추수하는 청년들에게 룻을 건드리지 말라 일렀고, 일하다 목이 마르면 청년들이 길러온 물을 마시라 배려했고, 식사 때에는 그의 일꾼들과 함께 앉아 배불리 먹게 해 주었습니다(9-10). 뿐만 아니라 일꾼들에게는 추수하다가 일부러 곡식 이삭을 흘려서 룻이 많이 줍게 할 것이며, 절대로 부담 주는 말을 하지 말라고 일렀습니다(15,16).
보아스의 이러한 배려에 룻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말했습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10) 보아스가 말했습니다. 11,12절을 봅시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가 아무에게나 호의를 베푸는 사람도 아니었고, 또 룻이 젊은 미망인이라 해서 호의를 베푸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보아스는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즉 그는 룻에 대해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룻을 돕고자 했습니다.
룻이 고국 떠나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에 왔을 때 그녀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남의 밭에 들어가 추수하다 흘린 이삭을 줍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그 일을 부지런히 했습니다. 잠깐 쉰 외에는 하루 종일 허리 펴지 않고 이삭을 주웠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그녀를 보아스와 같이 좋은 사람에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어디 성경 공부 할 사람 없나 말 붙이고 다니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가 그저 세상 문화나 세상 욕심이 다 추수해 버리고 난 다음, 거기서 떨어진 이삭이 어디 없나 찾으러 다니는 심정입니다. 과거에 양들을 단으로 묶으며 흘리고 다닐 때가 그리워지고, 장래를 생각하면 고생스런 생각만 듭니다. 그러나 오늘 이삭을 주운 룻을 통해 소망을 갖습니다. 우리가 그 이삭줍기를 부지런히 그리고 끊임없이 하면, 하나님이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2. 시어머니에게 순종한 룻 (2:17-3:9)
보아스의 배려로 하루 종일 이삭을 줍고, 주운 것을 떨어보니 보리 한 ‘에바’가 되었습니다(17). 한 에바가 23리터라니까 약 열 두 되이고, 한 말이 넘는 분량입니다. 이삭 주워서 알곡으로 한 말이 넘었으니 대단한 수확량입니다. 누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룻은 저녁 때 집으로 와서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시어머니에게 말씀드리면서 그를 돌보아 준 사람은 보아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자기 밭의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자기 밭에서 계속해서 이삭을 주워도 좋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양식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반색하며 말합니다. “그 사람, 정말 하나님께 복 받을 사람이다. 그가 살아 있는 자에게나 죽은 자에게나 늘 은혜를 베푸는구나. 그 사람이 바로 우리 친척인데, 우리 기업 무를 자 중의 한 사람이란다.”(18-20).
‘기업 무른다(redeem)’는 말은 이스라엘에만 있는 독특한 전통인데, 성경을 보면 재산에 있어서도 기업을 무르고, 혈통에 있어서도 기업을 물러야 한다는 율법이 있습니다. 먼저 혈통에 있어서 기업 무른다는 말은 예를 들어서, 형이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 대신 대를 이어주어야 하는 율법입니다(신명기 25:5,6). 또 재산에 있어서 기업 무른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돈이 없어 자기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을 경우,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 땅을 사서 다시 돌려주는 제도입니다(레위기 25:24,25). 또 돈이 없어서 노예로 팔려 갔을 경우에도 그 친족이 돈을 주고 그 노예를 사서 자유를 회복해 주어야 했습니다(레위기 25:47-49).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혈통이나 재산은 ‘기업(inheritance; everlasting possession)’이었습니다. 반드시 지켜서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했습니다. 본인이 지키지 못하면 동족이 지켜주어야 했습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혈통적으로 기업을 지킬 수 없었고, 가난하여 재산상으로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자기 기업을 물러줄 수 있는 보아스가 룻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오미는 거기서 자기 기업을 무를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고, 또 룻의 장래를 열어 줄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3:1을 보면 보리 추수가 끝나는 날 나오미가 룻에게 말합니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해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룻을 코치합니다. “보아스는 우리 기업을 물려줄 수 있는 친족이다. 그런데 오늘이 추수 마지막 날이라 그가 낮에는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고, 밤에는 일꾼들을 위해 잔치를 벌이고 밭에서 잘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목욕도 잘 하고 옷도 깨끗이 입은 다음, 그가 눕는 곳을 알아두었다가 그가 잠든 다음 그의 그 발치에 가서 누워라. 그 다음에는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의 처분대로 하거라.”(2-4)
말은 길지만 간단히 말하면 룻더러 보아스에게 몸을 맡기라는 뜻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망측한 분부란 말입니까? 정숙한 여인으로서는 차마 하지 못할 일입니다. 거기다가 만일 보아스가 룻의 행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안 봤는데, 이 여자 행실이 영 안 좋구만…. 이방 여자들은 개 같다더니…” 이렇게 생각하면 그 수치가 얼마나 큽니까? 보아스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자기가 과부라고 해서 남의 남자 발치에 누워서 처분만 바란다는 것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5절을 보면 룻은 “어머니의 말씀대로 다 행하리이다.”고 말합니다(5). 그것은 사랑하는 시어머니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일일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율법이요 전통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로 가리라 결단할 때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을 자기 백성으로 여겼고, 자신을 유대인이라 여겼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행동 양식에 따라 행했습니다. 룻은 모압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익숙한 삶의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으로 따르기로 결단한 후로는 모압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 백성의 방식으로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면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의 의미는 아담안에 있던 나는 죽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살게 되었다는 고백이요 결단입니다(롬 6:1-4). 그런데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단하고서도 생활은 세상적인 사람들처럼 하거나 자기 좋아하는 스타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단하고서도 다른 학생들처럼 부정한 방법으로 시험을 치르고,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단하고서도 결혼은 믿음이나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나 사명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과 하고,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단하고서도 놀이나 문화는 세상의 그것을 따르고,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전도 같이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일은 하지 않고 자선사업이나 봉사활동 같은 일만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외곬으로 빠지지 않은 지혜로운 사람, 하나님을 믿지만 시대에도 뒤떨어진 않는 세련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룻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따르기로 결단했을 뿐 아니라, 기업을 무르기 위해 하나님 백성들이 하는 방식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이제 7절을 보면 보아스가 타작을 마치고 일꾼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난 다음, 곡식 낟가리에 누워 기분 좋게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어쩐지 이상해서 몸을 돌이켜 보니 한 여인이 발치에 누워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라 “당신 누구요?” 하자 여인의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당신의 여종 룻입니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당신은 제 시어머니의 기업 무를 분입니다.” ‘옷자락으로 덮어달라’는 말은 물론 자신을 보아스에게 맡긴다, 보아스의 사람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일 보아스가 받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 그 말을 하면서 룻이 수치와 두려움으로 얼마나 떨었겠습니까? 그런데 보아스가 말합니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10)
보아스는 룻의 행동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룻이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해서 단박에 ‘정숙하지 못한 여자다, 음흉한 여자다’ 이렇게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룻이 그런 여성이었다면 부자이건 가난한 자건 젊은 사람을 따라갔지, 아버지뻘 되는 자기에게 올 리 없을 것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겉 행동보다도 속마음을 보았습니다. 보아스는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고 말합니다. 보아스는 룻의 ‘인애’를 보았습니다. 그녀의 사랑은 육신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기업을 잇고자 하는 시어머니를 사랑하고자 하는 사랑이었고, 시어머니의 뜻을 좇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시어머니의 뜻을 따르고자 자기를 희생하고, 나이 많은 것을 마다하지 않고 자기에게 온 것을 도리어 귀하게 여겼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진심을 알았고 귀하게 여겼습니다.
세상에서 세상의 라이프 스타일로 살지 않고 하나님 백성의 스타일로 살고자 할 때 가장 힘든 것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오해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마치 룻의 진심은 시어머니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 백성의 율법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정숙하지 못한 여성이나 음흉한 여성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학생들은 우리가 선배라고 하면 존중하지만, 우리가 목자라고 하면 사람을 깔보고 귀찮게 여깁니다. 하릴없는 사람이나 광신자 취급하고, 뭘 잘 못 먹은 사람이나 뭐가 씐 사람 취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갈등은 참으로 큽니다. 그러나 이 시간 세상에는 우리의 진심을 알고 귀하게 여기는, 보아스 같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위로를 얻습니다. 또 처음에는 오해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진심을 확인하고 귀하게 여기는 양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우리를 자주 오해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겉 행동보다도 우리 진심을 알아주시는 분인 것을 생각하고 힘을 얻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을 때 사람들은 향유를 허비했다고, 어리석다고 분내고 책망했습니다(마가 14:4). 그러나 예수님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며, 도리어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마가 14:6). 예수님은 그녀의 다소 무리한 행동보다도 그 진심을 보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누가 21:3). 두 렙돈을 넣으면서 과부는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사람들은 그녀를 무시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과부가 얼마를 넣었는가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녀의 진심과 헌신을 아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우리의 진심을 알아주실 예수님을 믿고, 수치스런 일이라도 감당하고자 하는 소원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3. 기업 무를 자 (3:10-18)
보아스는 룻이 현숙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의 인애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룻이 그의 발치에 누워있었지만 그녀를 노리개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존중했고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11절을 보면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그녀를 위로합니다.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그리고 약속합니다. “내가 기업 무를 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보다 더 우선순위를 가진 사람이 있다. 아침에 그에게 물어보아서 그가 만일 기업 무를 책임을 이행하지 않겠다고 하면 내가 반드시 그 책임을 지겠다. 그러니 안심하고, 지금은 밤이니까 여기 있다가, 아침 일찍 아무도 눈에 띄지 않게 돌아가거라.”(12-14)
보아스는 룻에게 그가 ‘기업 무를 자’로서의 책임을 다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기업 무를 자’는 히브리어로 ‘고엘(לאנ)’이라고 하는데, 영어로 하면 쉽습니다. 'Redeemer'입니다. 우리 말로는 구속자, 또는 보호자라는 뜻입니다. 룻이 아무 것도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 올 때만 해도 그녀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고 장래도 불투명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녀에게는 삶의 터전도 없었고, 열매도 없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그저 이삭이나 줍다가 끝날 것만 같았습니다. 괜히 시어머니와 하나님을 좇아왔다가 고생바가지만 뒤집어 쓴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룻에게 기업 무를 자, 구원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가 보아스였고,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로서 룻과 그녀의 장래를 책임지고자 했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기업’이란 우리 삶의 터전이나 근간(根幹)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터전이 땅만은 아닙니다. 조국, 캠퍼스, 사랑하는 사람, 가족, 직업이 우리 삶의 터전이요 근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어느 순간 이런 기업을 잃어버립니다. 나라를 잃어버릴 때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가 있고 직장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어제 경기센타를 방문한 치아카 쿠미 선교사는 올 여름 갑자기 그의 남편을 잃었습니다. 지난해 여름 김태헌 목자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땅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무덤에 갇혔을 때, 막달라 마리아의 심정이 그랬습니다. 죽음은 우리 인생의 모든 기업을 무너뜨리는 최후의 원수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를 붙들어줄 수 있는 터전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마리아 앞에 나타나셨고 ‘마리아야’하면서 그를 불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의 남편이요 그의 삶의 터전이요 구속자가 되셨습니다.
오늘날 그 어느 것도 우리 장래를 보장해 줄 수 없다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대학생들은 안정된 직장을 찾지만 극심한 경쟁과 사회변화 때문에 안정된 터전을 찾는 시도는 무의미해졌습니다. ‘부동산(不動産)’이란 움직이지 않는 재산이란 의미인데 요즘 그 부동산 가격은 하루가 다르게 요동(搖動)칩니다. 부동산을 많이 사두었다가 대선에서 위기를 맞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보장이요 터전임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 14:1-3)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시며, 장래의 보장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태 7:24-27)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반석이요 터전이요 기업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맺는 말:
룻은 고국과 부모를 버리고, 아무 소망도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왔습니다. 그녀가 가진 것하나 없이, 그저 시어머니의 하나님, 그 하나님을 믿고 그의 날개 아래 보호받으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주웠고, 시어머니의 기업을 무르기 위해 유대인들의 율법에 순종했습니다. 그런 룻을 하나님은 구속자 보아스에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보아스에게로 인도해 주셔서 그녀의 고단한 삶을 감당해 주셨고, 그녀의 진심을 알아주셨고, 그녀의 모든 부끄러움을 가리워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예수님께 나가 기도합시다.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