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의 기본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
경전대전을 편찬한 세조
조선은 개창과 더불어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여 고려 말 이래의 각종 법령 및 판례법과 관습법을 수집하여 1397년(태조 6)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제정, 시행하였다. 그 전에 왕조 수립과 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한 정도전(鄭道傳)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바친 일이 있었지만 개인의 견해에 그친 것이었다. 《경제육전》은 바로 수정되기 시작하여 태종 때에 《속육전(續六典)》이 만들어지고, 세종 때에도 법전의 보완작업이 계속되지만 미비하거나 현실과 모순된 것들이 많았다. 국가체제가 더욱 정비되어 감에 따라 조직적이고 통일된 법전을 만들 필요가 커졌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당시까지의 모든 법을 전체적으로 조화시켜 후대에 길이 전할 법전을 만들기 위해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최항(崔恒)·김국광(金國光)·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강희맹(姜希孟)·임원준(任元濬)·홍응(洪應)·성임(成任)·서거정(徐居正) 등에게 명하여 편찬작업을 시작하게 하였다.
1460년(세조 6) 먼저 〈호전(戶典)〉이 완성되고, 1466년에는 편찬이 일단락되었으나 보완을 계속하느라 전체적인 시행은 미루어졌다. 예종 때에 2차 작업이 끝났으나 예종의 죽음으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성종 때 들어와서 수정이 계속되어 1471년(성종 2) 시행하기로 한 3차, 1474년 시행하기로 한 4차 《경국대전》이 만들어졌다. 1481년에는 다시 감교청(勘校廳)을 설치하고 많은 내용을 수정하여 5차 《경국대전》을 완성하였고 다시는 개수하지 않기로 하여, 1485년부터 시행하였다.
그 뒤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법령이 계속 마련되어 1492년의 《대전집록(大典輯錄)》, 1555년(명종 10)의 《경국대전주해》, 1698년(숙종 24)의 《수교집록(受敎輯錄)》 등을 거느리게 되었다. 1706년(숙종 32)의 《전록통고(典錄通考)》는 위의 법령집을 《경국대전》의 조문과 함께 묶은 것이다. 또한 반포 때에 이미 〈예전(禮典)〉의 의식절차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따르고, 〈호전〉의 세입과 세출은 그 대장인 공안(貢案)과 횡간(橫看)에 의거하도록 규정되었다. 또 형벌법으로서 《대명률(大明律)》과 같은 중국법이 〈형전〉에 모순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적용되었다.
시기가 많이 지남에 따라 후속 법전도 마련되었다. 1746년(영조 22)에는 각종 법령 중 영구히 시행할 필요가 있는 법령만을 골라 《속대전》을 편찬하여 시행함으로써 또 하나의 법전이 나타났고, 1785년(정조 9)에는 《경국대전》과 《속대전》 및 《속대전》 이후의 법령을 합하여 하나의 법전으로 만든 《대전통편》이 시행되었으며, 그 이후의 법령을 추가한 《대전회통(大典會通)》이 조선왕조 최후의 법전으로서 1865년(고종 2)에 이루어졌다.
《경국대전》은 조선왕조 개창 때부터의 정부체제인 육전체제(六典體制)를 따라 6전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기 14~61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졌다. 〈이전(吏典)〉은 궁중을 비롯하여 중앙과 지방의 직제 및 관리의 임면과 사령, 〈호전〉은 재정을 비롯하여 호적·조세·녹봉·통화와 상거래 등, 〈예전〉은 여러 종류의 과거와 관리의 의장, 외교, 의례, 공문서, 가족 등, 〈병전(兵典)〉은 군제와 군사, 〈형전〉은 형벌·재판·노비·상속 등, 〈공전(工典)〉은 도로·교량·도량형·산업 등에 대한 규정을 실었다.
짧게는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한 지 30년 만에, 길게는 고려 말부터 약 100년 간의 법률제정사업을 바탕으로 완성된 이 법전의 반포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밑받침하는 통치규범의 확립을 의미하였다. 또한 새로운 법의 일방적인 창조라기보다 당시 현존한 고유법을 성문화하여 중국법의 무제한적인 침투를 막고 조선 사회 나름의 질서를 후대로 이어주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형전〉의 자녀균분상속법, 〈호전〉의 매매 및 사유권의 절대적 보호에 대한 규정, 〈형전〉의 민사적 소송절차에 대한 규정 등은 중국법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유법이다.
한편, 당시 사회의 한계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국왕에 대한 규정이 없는 것이 한 예이다. 실제 정치운영에서는 점점 세밀한 규정들이 수립되어 국왕의 권한에 많은 제약을 가하였지만, 조선 사회의 기본 정치이념에서 국왕은 법률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관리의 자격에 대해 천민이 아닐 것 이상의 신분적 제약을 정해놓지 않아 중세 신분제의 극복과정에서 한층 발전된 수준을 보여주지만, 노비에 대한 규정을 〈형전〉에 자세하게 담은 것은 당시의 지배층이 노비제의 기반 위에 서 있었고 그들을 죄인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경국대전》은 조선시대가 계속되는 동안 최고법전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법률의 개폐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그것을 반영한 법전이 출현하였지만, 이 법전의 기본체제와 이념은 큰 변화없이 이어졌다. 《대전회통》에는 비록 폐지된 것이라 하더라도 《경국대전》의 조항이 그 사실과 함께 모두 수록되었다.
사회운영의 질서는 실질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고 따라서 법전의 시행 내용 또한 매우 큰 폭으로 달라져 갔다. 그것은 단순한 법질서의 혼란이 아니라 사회의 변동과 발전에 대한 체제의 적응 노력이었다. 예를 들어 최고위 관서로 의정부가 있고 그곳의 3정승이 관료의 정상을 이룬다는 기본구조는 19세기 말까지 변화가 없었지만, 조선 전기 3정승과 의정부가 비교적 강력하게 백관을 통솔하고 국정을 총괄한 반면, 조선 중기 이후로는 비변사(備邊司)가 국정을 총괄하는 관서가 되었고 3정승이 그곳의 대표자로서 권한을 행사하였다. 이때의 비변사는 고위관리의 회의를 통해 운영되는 합좌기구로서 당시 지배층의 확산에 조응하여 좀더 많은 사람의 의견을 끌어모으고, 더욱 복잡해진 국가행정을 전문적으로 이끌어간다는 의미를 지녔다. 물론 후기 법전인 《속대전》부터는 비변사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다.
매우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며 현대에 들어와서는 법제처가 1962년에 번역본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85년에 번역본과 주석서를 함께 간행하였다. 2007년 7월 13일 보물 제1521호로 지정되었다.
국가경영의 원대한 기획 경국대전
조선시대의 법제사적 특징으로는 지속적인 법전 편찬을 들 수 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즉위교서에서 의장(儀章)과 법제는 고려의 것을 준수하라고 천명하였으며 아울러 법전에 따른 법치주의를 표방하였다. 태조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鄭道傳)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찬술하여 법전 편찬과 통치 방침을 제시하였다.
1397년(태조 6)에는 『경제육전(經濟六典)』을 반포하였으며, 태종과 세종 때에도 법전을 편찬하였다. 이러한 법에 따른 통치의 방침은 세조를 거쳐 1485년(성종 16)에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집대성되었다. 법전 편찬은 조선시대 후기에도 지속되어 1746년(영조 22)에 『속대전(續大典)』이, 1785년(정조 9)에 『대전통편(大典通編)』이, 1865년(고종 2)에 『대전회통(大典會通)』이 반포되었다. 전시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법전이 편찬된 점을 생각하면 조선시대는 통일법전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을 건국한 주도세력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무인세력과, 성리학을 이념적 바탕으로 한 신흥사대부들이다. 그들은 고려시대 말엽, 아비도 없고 임금도 모르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회를 직접 눈으로 보고는 새로운 사회의 필요성을 몸으로 느꼈다. 대부분 지방의 중소지주층 출신이었던 신흥사대부들은, 그동안 고려왕조를 지탱해왔던 불교가 더 이상 사회통합의 이념으로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성리학을 새로운 이념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부의 권문세가가 권력과 재산을 독차지해서 평민들이 고통을 받는 현실에 대해 울분을 토로하였다. 그러나 고려왕조는 원의 간섭과 이에 기대는 친원세력 때문에 자체적으로 사회를 개혁하기에는 너무나 무력하였다.
이에 이성계 일파는 고려왕조를 대체할 새로운 왕조의 건설을 도모하였으며, 중국에서의 원(元)·명(明) 교체기를 이용하여 정치적·군사적 세력을 확대하였다. 우왕(禑王) 즉위 후 고려는 친원(親元)정책을 표방하여 고려와 명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388년(우왕 14) 명이 함경도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고하였다. 그러자 우왕은 최영(崔瑩)을 중심으로 요동정벌에 착수하였다. 당시 국제정세를 고려하여 이성계는 처음부터 반대하였고, 결국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 등 친원파를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하기에 이른다.
이어 그들은 창왕을 옹립하고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후 과전(科田)을 실시하는 등 각종 제도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친원세력의 잔존과 저항, 개혁파 내부의 노선 차이 등으로 개혁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를 중심으로 하는 온건개혁파는 집권관료제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하여 이전의 제도로 복귀할 것을 도모하였다. 이에 반해 정도전, 조준(趙浚) 등 급진파는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여 법과 제도를 전반적으로 철저하게 개혁하려고 하였다. 마침내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하여 급진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이성계는 국왕에 즉위하여 조선을 건국하였다.
고려시대의 법령제도는 당률(唐律)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여 필요에 따라 현실에 적용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법전을 편찬하지 않고 개별사안에 대해 왕법으로 판단을 하여 통치를 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 후기까지도 송나라의 칙법(勅法), 원나라의 법률이 뒤섞여 있는 등 법원(法源)이 통일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고려의 법은 사흘만 지나면 흐지부지된다는 뜻의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이라는 말에서 잘 드러나듯 법령의 개폐가 빈번하고 그것의 적용에 일정한 기준이 없었다. 따라서 신흥사대부들은 당대의 법제도에 대해, 권문세가와 관료들의 농단 때문에 항상성(恒常性)과 일정한 준칙이 없고 그래서 백성들의 일정한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며, 다만 유력자의 이익만 옹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한편으로는 사회질서와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을 보호하여 국가의 근간을 굳건히 하는 새로운 법의 정비가 시급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먼저 조선 건국기의 법령 제정과 법전 편찬과정에 대해 살펴보자. 법전에 수록된 조문은 입법과정의 결과물로서 어떤 조문이 법전에 수록되기까지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즉, 담당관서에서 제시한 안을 조정에서 검토하여 의견을 내고 최종적으로 국왕이 이를 승인하여 하나의 법조문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때 특정한 법안에 대한 최종결정, 즉 국왕의 명령을 '교(敎)'라 하였는데, 이것이 형식화된 것을 '왕지(王旨)', '교지(敎旨)'라 하고 각 관청에 하달된 교지를 '수교(受敎)'라 하였다. 육조 등 해당관청이 모두 이러한 입법을 하기 때문에 법의 수는 아주 급속히 늘게 되었다.
건국 초기에는 각종 제도의 정비, 분쟁에 따른 각종 민·형사 법규의 정립 등 새로운 법령이 계속 등장했는데, 그 결과 법령들이 서로 모순되는 등 통치에 적잖은 장애로 될 우려가 있었다. 이처럼 번잡하고 모순된 법령을 종합·정리하는 사업이 바로 법전 편찬이었다. 즉, 『경국대전』은 1388년부터 1485년까지의 다양한 수교들을 정리하여 종합한 것이다.
이성계가 칼로써 조선을 건국하였다면 정도전은 붓으로 국가를 기획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은 1395년(태조 4)에 『조선경국전』을 집필하여 법전 편찬의 기본원칙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서론인 정보위(正寶位)·국호(國號)·정국본(定國本)·세계(世系)·교서(敎書)와 본론인 치전(治典)·부전(賦典)·예전(禮典)·정전(政典)·헌전(憲典)·공전(工典) 등 6전체제로 되어 있다. 이는 원나라의 『경세대전(經世大典)』의 체제를 따른 것으로 이후 법전 편찬의 표준이 되었다. 특히 헌전의 총서(總序)에서는 형사법의 일반법으로 『대명률(大明律)』을 수용할 것을 언급한 내용도 있다. 『조선경국전』은 정도전 개인의 저작이지만, 실제로는 그를 중심으로 한 당시 집권층들이 갖고 있는 입법방침 내지 국가경영의 원칙을 종합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조선경국전』의 완성과 함께 통치의 근간이 되는 법령들이 점차 늘어갔다. 이를 종합하고 또 건국이념을 표방하기 위한 법전의 편찬은 필수적 요청이었다. 그리하여 1397년 12월 영의정 조준이 주재하여 조선조 최초의 성문법전인 『경제육전』이 반포되었는데, 이는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의 법령들을 수록한 것이었다. 특히 『경제육전』은 이용의 편의를 위하여 한문이 아닌 알기 쉬운 이두문(吏讀文)을 사용하였다.
『경제육전』의 편찬 후에도 새로운 법령은 계속 반포되어 이를 정리할 필요가 상존하였다. 그래서 1399년(정종 1)에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을 설치하여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였으나 미완에 그쳤다. 1404년에 '속육전(續六典)'의 편찬을 건의한 상소를 계기로 1407년에 태종은 속육전수찬소를 설치하여 1412년(태종 12)에 일단 『경제육전 원집상절(元集詳節)』 3권과 『속집상절』 3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조례가 번잡하여 시행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좇아서 다시 교정하였다. 이듬해에 『경제육전』의 이두를 한문으로 바꾸고 번잡한 것을 간결히 하여 반포하였는데, 원래의 경제육전은 '원육전', 다시 만든 법전은 '속육전'이라고 부른다.
『원육전』의 조문 가운데는 현실에 맞지 않는 것도 있고 또 후대의 법령과 모순되는 것도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는 창업주의 법전이므로 함부로 개정할 수가 없었다. 1415년,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는 원칙을 확립하였는데, 바로 '조종성헌존중주의(祖宗成憲尊重主義)'이다. 즉, 『원육전』을 기본으로 하여 이와 모순되는 조문은 삭제하되, 부득이 『원육전』을 변경해야 하는 경우에는 『원육전』은 그대로 두고 아래에 할주(割註)로 표기하도록 하였다. 조종성헌존중주의는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법전 편찬의 기본원칙이 되었다.1)
원육전과 속육전의 편찬 그리고 법전의 편찬원칙이 확립된 세종 때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422년(세종 4)에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여 위의 원칙에 따라 법전 편찬에 착수하였다. 『원육전』을 우선하여 이와 모순되는 것은 삭제하였으며, 『속육전』 반포 이후의 법령을 내용별로 종합하였다. 이 과정에서 법전의 편찬원칙이 새로 확립되었다. 영구히 준수해야 할 '전(典)'과 임시적인 '록(錄)'의 구별이다. 이는 법령을 내용적으로 구분한 것으로서 진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426년에 일단락되었으나 시행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어, 1428년에 육전 5권과 등록(謄錄) 1권을 완성한 후 1년 동안 검토하여 1429년에 반포하였다. 1430년에는 이두로 된 『경제육전』이 관리들이 이해하기 쉬워 집행하기에 편리한 이점이 있기 때문에 이를 인쇄하여 태종 때의 『원육전』과 함께 사용하기로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1433년 정전 6권과 등록 6권으로 구성된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을 반포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논란이 많았으며 또 누락된 조문이 발견되기도 하여 완벽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법전 편찬의 난맥상은 조종성헌존중주의와 현실적 수요 사이의 괴리 때문이었다. 조종성헌일지라도 현실과 맞지 않으면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있었지만, 섣부른 개정에 따른 폐단과 잦은 입법에 따른 민심의 동요를 우려하는 입장이 관철되어 단순히 법령을 정리하여 나열하는 방식의 법전 편찬이 계속되었다.
문종 때도 역시 법전 편찬 논의가 있었지만, 종합법전의 편찬은 수성의 군주인 세조에게로 넘어갔다. 1454년, 세조가 즉위한 직후에 양성지는 법제 정비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며, 2년 후에는 기존의 법전을 종합하여 만세불변의 종합법전을 편찬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세조는 국가의 근간이 되는 재정·토지와 노비·형벌·소송·상속 등을 규정하는 호전과 형전의 편찬에 착수했고 1460년에 완성하여 '경국대전 호전'이라는 이름으로 반포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형전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1466년(세조 12)에는 일단 6전 전체가 갖추어졌으며 검토 기간을 거쳐 2년 후인 1468년에 완성되었는데, 이를 '병술대전'이라 한다. 그러나 다시 검토를 하는 중에 1469년 9월 세조가 승하함에 따라 시행하지 못하였다. 세조는 중흥의 군주답게 모든 법령을 종합하여 새롭게 편성하였으므로 '경제육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큰 법전이라는 '경국대전'을 이름으로 결정하였다.
예종이 즉위하자 한명회는 병술대전의 재검토를 건의하여 그해에 완성한 다음 세조의 영전에 고하고 이듬해부터 시행하였는데, 이를 '기축대전'이라 한다. 이 '기축대전'은 형식상 법의 효력을 가진 최초의 『경국대전』이 되었다.2) 그러나 예종 역시 그해 승하(昇遐)하여 시행을 보지 못하였다. 게다가 이에 대해서도 교정의 필요성이 거론되어 1470년(성종 1)에 교정을 마치고 이듬해부터 시행하기로 하였으며 이를 '신묘대전'이라 했다. 그러나 이 역시 논란이 되어 1471년에 교정청이 신묘대전에 누락된 조문 130여조를 보고하였고 그것을 수정하여 1473년에 완성한 후 이듬해부터 시행하기로 했는데, 이를 '갑오대전'이라 불렀다.
조종성헌존중주의에 따라 누락된 조문은 대전속록으로 별도로 간행하였다. 그런데 수교가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완전한 법전이 있을 수 없었다. 1481년에 다시 논란되어 법전의 개수에 착수하여, 1484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불완전한 점이 있으므로 시행을 연기하여 더욱 완비된 법전을 만들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성종은 이는 신법을 창제하는 것이 아니라 수교와 속록에 있는 조문을 대전에 추가하는 것이며 또 개정할 곳은 있지만 많지 않다고 하여 강행을 명하였다. 성종의 단안으로 1484년 12월에 『경국대전』이 완성되어 1485년부터 시행하였는데, 이를 '을사대전'이라 한다. 오늘날에는 최종본인 이 을사대전만이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은 물론이고 을사대전 이전의 『경국대전』도 전혀 전해오지 않는다.3) 옛 법전에 익숙한 관리들은 편의에 따라 새 법전에 따르지 않아 법의 통일을 저해하고 나아가 통치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새로 법전이 반포되면 그 이전의 법전을 회수하여 소각하였다.
『경국대전』의 편찬은 조선 건국부터는 92년, 세조시대부터는 30년이 소요되었으며 무려 다섯 차례의 수정을 거쳤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경제육전』, 『속육전』, 『신찬경제속육전』 등이 있었다. 『경국대전』은 왜 이토록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많은 법전이 필요하였을까? 일차적으로는 법전 편찬의 방법을 이유로 들 수 있다. 독립적인 입법기관이 없던 당시에는 모든 행정기관에서 입법을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법령은 증가할 수밖에 없으며, 당연히 서로 모순되거나 선후의 법령이 어긋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법전 편찬은 이러한 법령을 종합하여 정리하는 것인데, '조종성헌존중주의'라는 원칙은 모순되는 법령을 정리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입법의 신중함이다. 입법자들은 항상 '고려공사삼일'을 경계하였으며, "법을 만들면 뜻하지 않은 폐단이 생기고, 법을 만들기는 쉬우나 집행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오랜 기간 동안 법전을 연마하여 편찬함으로써 법적 안정성을 추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의 안정과 국가의 안위를 보장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입법의 신중성은 오늘날 본받아야 할 덕목이다.
『경국대전』은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의 육전체제로 되어 있다. 육전체제는 주례(周禮)에 연유하는 것으로 천지춘하추동(天地春夏秋冬)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전에서는 하늘이 만물을 주관하는 것을 본떠 국가를 통괄하는 관료제도를 규정하고 있는데, 내명부(內命婦)와 외명부(外命婦)4) 등 29항목으로 되어 있다. 왕실, 중앙과 지방의 관부, 관리의 임명과 승진 및 상벌 등을 규정하였다. 다만 신성한 존재인 국왕과 세자에 대해서는 규정하지 않았다.
호전에서는 땅이 삶의 근본임에 비추어 재정과 경제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데 경비, 호적 등 30항목으로 되어 있다. 국가의 재정은 횡간(橫看)과 공안(貢案)을 사용한다고 하여 국가재정의 기본원칙을 규정하였고, 회계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토지·조세제도와 아울러 조운(漕運), 농경은 물론 토지와 관련한 매매 등 거래와 관련된 법을 규정하였다.
예전에서는 봄에 만물이 소생하는 것과 짝하여 각종 제도와 가족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제과(諸科), 의장(儀章) 등 35항목과 용문자식(用文字式) 등 25종의 문서양식을 규정하였다. 관리 선발을 위한 과거제도와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제도를 규정하였으며, 친족관계를 나타내는 오복(五服), 혼인과 상장례, 제사와 입후 등을 다루었다. 그리고 국가의 각종 의례와 관원들의 복식, 외교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각종 의식(儀式)의 세부적인 절차와 복식 따위의 내용은 법전에 수록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의주(儀註)'조에서는 '오례의'를 쓴다고 하였으며, 이에 따라 세종시대를 거쳐 성종 때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편찬되었다. 『국조오례의』에서는 각종 제사에 대한 '길례(吉禮)', 왕실의 혼인에 대한 '가례(嘉禮)', 외국의 사신을 영접하는 '빈례(賓禮)', 군대의 의식에 대한 '군례(軍禮)', 상장례(喪葬禮)에 대한 '흉례(凶禮)'를 자세히 규정을 하였다. 그리고 각종 문서양식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사회의 관료적 특성과 함께 계급사회의 속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병전은 맹렬한 기세를 떨친 여름을 닮아 군사와 관련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모두 51항목으로 되어 있다. 군제와 직업군인 및 군역의무, 국방과 관련된 교통과 통신, 궁궐의 보위를 다루고 있다.
형전은 한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가을의 취지에 따라 재판과 노비 그리고 상속에 대해 모두 28항목을 규정하고 있다. 먼저 형사절차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백성들의 생명을 아끼는 흠휼(欽恤)과 애민 정신의 표현이다. 노비에 대해 자세히 규정하고 각종 규제와 금제를 나열하고 있다. 상속에서는 재주(財主) - 현재의 법률용어로는 피상속인 - 에 따라 상속인의 몫을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는데, "분배하지 않은 노비는 아들과 딸의 생사를 막론하고 나누어 준다. ··· 부모의 노비 ··· 중자녀(衆子女)에게는 균등하게 나누어 준다"고 하여 남녀균분상속을 선언하였다.
첫 항목인 '용률'조에서 대명률을 적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유교적 명분에 근거한 『대명률』은 고려 말부터 주목을 받아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일반 형법으로 인식되었다. 『대명률』은 어려워서 이해를 돕기 위해 1395년(태조 4)에 이두로 번역되었는데, 곧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다. 『경국대전』 등 국전에 특별 규정이 있으면 이것이 『대명률』에 우선하여 적용되었다.
공전은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겨울의 의미를 되새겨 14항목을 두고 있으며, 도로, 도량형, 식산, 공장(工匠) 등에 대해 규정하였다.
국가의 틀이 채 갖추어지기도 전에 『경제육전』을 편찬하였고, 근 1세기 동안의 노력으로 영세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우리 실정에 적합하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대명률을 적용하기로 하여 번역까지 하였다. 그러면 왜 조선시대에는 지속적으로 법전 편찬에 경주하였을까?
법전 편찬, 즉 통일적이고 획일적인 법의 정비는 통치의 필연적인 요청이었다. 고려시대 말의 문란한 기강을 바로잡는 것은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법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신성한 존재인 국왕은 신성성만으로는 모든 백성을 포용할 수 없었다. 백성들은 국왕의 신성성이나 권세가의 무력에 굴복하지 않고 새로운 제도를 요구하였다. 이 점에서 법치주의는 신흥사대부나 국왕의 의지가 아닌 시대적 요청이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역사의 진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은 고대 중국을 이상사회로 인식하고 추종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이념적으로는 주자학을 수용하고 이를 사회에 실천하는 매개체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수용하였으며 또 『대명률』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유의 요소는 사라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남녀균분상속 등 고유법은 『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다. 위정자들은 이상만 추구한 것이 아니라 법의 실효성, 현실적합성을 존중하였던 것이다. 『경국대전』의 조문은 관료제도 등 편찬자의 이상을 제도로 한 것도 있고, 또 상속 등 당시 현실을 반영한 것도 있으며, 소송규정 등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정립해온 규정도 있다. 이렇게 정립된 규정은 조종성헌으로 존중되어 후대에 준수되었다. 이 점에서 『경국대전』의 편찬은 압도적인 중국문화의 영향 속에서 고유법을 수호하는 기능을 하였다.
『경국대전』 편찬자들은 법을 민본정책을 실천하는 수단으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법을 '좋은 법, 아름다운 뜻'으로 파악하였으며, 특히 오래 된 법을 존중하였다. 이 양법미의(良法美意)의 근거는 바로 백성의 뜻과 믿음이었다. 바로 『경국대전』은 백성의 뜻과 믿음을 성문화한 것으로 함부로 개정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백성의 뜻과 믿음을 구체화한 '양법미의'는 역사 속에서, 즉 조상들의 생활의 지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새롭게 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할 때는 역사성을 중시하였다. 이는 이미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실패할 가능성이 적으며 또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추상적인 백성의 뜻과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백성들의 의견을 묻기도 하였다. 양법미의는 때로는 새로운 입법의 근거로, 때로는 반대의 근거로도 이용되었다.
역사성의 강조는 조종성헌존중주의로 표출되었다. 이는 법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되나 사회의 변화에 법이 따라가지 못하여 입법의 발전에 장애로 작용하였다. 법의 현실적합성, 민본사상의 강조는 이 원칙과 모순이 된다. 이러한 와중에서 조종성헌존중주의는 초기에 법전편찬을 위한 임시적 원칙에 지나지 않았고, 15세기 중엽 이후에는 사실상 붕괴되어 형식적으로만 유지되었을 뿐이었다.
조선을 건국한 신흥사대부들은 그들의 이상사회를 『경국대전』에 규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에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한편에서는 이상사회상을 규정하고 다른 곳에서는 현실을 반영한 조문을 규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지향하면서 또 백성들의 권익을 옹호하려고 하였다. 나아가 강력한 왕권과 이를 견제하려는 신권을 적절히 타협하여 규정하였다. 그러면서 관료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조문도 산재해 있다. 이 모든 것을 육전체제에 따라 편성하면서 정합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구성하였다.
신흥 사대부들은 법을 이용하여 사회와 국가를 이상적으로 건설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어느 정도는 성공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는 변하고 역사는 발전한다. 그들이 구상한 이상사회는 더 이상 이상이 아니며 또 다른 집단에 의해 새로운 이상사회가 제시된다. 하지만 그 사회마저도 현실에서 실현되기에는 또 난관에 부딪힌다. 그러면서 법과 사회는 새로운 모습을 잉태하고 변해간다.
『경국대전』 체제는 완성과 동시에 붕괴되어 갔다. 유교적 사회를 지향하였지만 그 토대인 가족은 너무나 달랐으며, 이상적인 권력의 분점은 현실에서 용납되지 않았다. 법과 현실의 괴리는 새로운 법령이 메워갔다. 그리고 새로운 법령의 증가는 또 다시 법전 편찬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수요에 따라 영조시대의 『속대전』 등이 편찬되었다. 하지만 『경국대전』은 끝내 폐기되지 않았다. 조종성헌존종주의는 조상들의 위업을 볼 수 있는 그리고 후손들이 해야 할 바를 가리키는 거울이었다.
1. 법은 발전하는가?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 근거는 무엇인가? 오늘날 법이 서로 모순될 때 해결하는 원칙으로 '신법(新法) 우선의 원칙'이 있다. 그렇다면 법에서 역사성을 강조하고 실효성을 중시하는 입장은 현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법의 궁극적인 근원은 무엇일까?
2. 법의 이념으로 정의, 법적안정성, 합목적성을 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법적안정성과 합목적성 가운데 무엇을 우선해야 할까? 『경국대전』을 편찬한 사람들은 어떻게 사고하였을까? 또 그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3. 법치주의와 민본주의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조선시대에 『경국대전』, 나아가 법의 위상은 어떠하였을까? 『경국대전』을 헌법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조선시대에는 헌법과 같은 것이 있을까?
『경국대전(經國大典)』(번역편·역주편), 한우근 외 4명 옮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1986.
『경국대전(經國大典)』, 서울대학교 규장각,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