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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 제7. 화성유품(化城喩品)
교재 213쪽
안녕하십니까? 5월 12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부처님오신 날이 머지않아서 사찰마다. 부처님오신 날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한창 바쁘고 들떠 있습니다.
지난 5월 5일부터 공식적인 행사를 많이 하셨지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기도도하고, 좋은 행사도 하고 그렇습니다. 시내를 지나다 보면 평소에는 몰랐는데, 등이 내걸리는걸 봐서 이 부근에, 절이 있다는 것을 새삼 인식하게 되는 풍경들도 간간히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하는 불자들의 활동이 상당히 눈부신데, 과연 부처님의 올곧은 정신이 제대로 세상에 좀 펴지는가, 이런 점들도 한번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가시적인 풍성한 행사도 좋지만, 그보다는 정말 한 가지라도 나와 너를 떠난 전체를 생각하는, 세계일화라고 걸핏하면 잘 이야기하지요. 온 세계는 한 송이의 꽃이다, 전부 한 가족이라는 뜻으로 그런 표현을 쓰는데, 그야말로 나와 너 가 없는 부처님 마음 같은 마음을, 부처님 오신 날! 1년 중에 부처님 오셨을 때라도 우리가 한번 직접 써보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한번쯤 부처님 흉내를 내서,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너와 내가 동체라는, 同體大悲(동체대비) 思想(사상)을 한번쯤 몸소 실천해 보는, 그것이 늘 그렇지는 못하지만, 흉내라도 한번쯤 내보는 실속 있는, 부처님 오신 날의 행사가 되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는 왜 하필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냐? 하는 이유는 부처님은 출신이 어떻다 하는 것보다, 그분의 깨달음이 위대하고, 그 깨달음은 우주와 인생의 모든 존재의 내면을, 일반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원리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위대하다는 것이지요.
시대가 흘러가고 또 발전할수록 정말 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는, 부처님의 깨달음! 부처님의 가르침이 정말 진정 인생과 존재의 원리를 제대로 깨달으신 분의 가르침이라야, 비로소 진정 인류를 궁극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 그런 대안일 수밖에 없다고, 이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말도 불자니까 그런 소리를 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여러분들 잘 살펴보십시오. 무엇이 우리 인류를 제대로 구제할 수 있는 대안이 있는가?
기껏해야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너니, 나니 편을 갈라놓고, 서로 갈등하고 서로 이익을 추구하고 그러면서, 그런 것을 밑에 깔고 겉으로는 인류 평화니, 세계 평화니, 균형 발전이니, 무슨 분배니, 생산이니, 보수니, 진보니, 이런 등등을 명분 삼아 내세우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은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부터도 내 이익을 우선으로 하고, 그 다음에 그런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고 하는 것이 고작 해야 우리 중생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방법이지 않습니까?
결국은 그것 가지고 살아왔듯이, 수많은 전쟁과 전쟁을 통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하는 일, 그래서 억울한 일이 생기고 숱한 불행을 천재지변으로도 가끔 겪는데, 인간이 인간의 불행을 스스로 초래하고 스스로 만든다는 것은, 너무 어리석고 어이없는 일입니다.
부처님오신 이즈음에, 우리가 부처님의 마음에 견주어서 우리들이 해온 인류의 역사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어이없는 일이지요.
너다. 나다 나누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별 것이 아니지만, 나중에는 큰 갈등이 되어서 큰 불행을 몰고 오지요.
가끔 뜻하지 않는 아주 큰 불행한 일들이. 무엇으로도 해석할 수 없는 어이없는 불행들을 많이 겪지 않습니까?
몇 해 전 에 있었던 대구 지하철사건 같은 것! 참 기억하기도 싫지만, 정말 어이없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불행인데, 도대체 그런 일은 어떻게 해서 생길까?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
불교는 사실은 모든 존재의 원리를 설명해내야 할 책임이 있고,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좋은 일이든, 싫은 일이든, 어떤 특별한 일이든 간에 불교는 다 이해해야 되고, 이해했다면 불교는 그것을 설명해 내야 된다는 책임이 있습니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해요.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정말 인류 구제에 대안으로서의 그 어떤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고, 최상의 종교이고 모든 존재의 원리를 확연히 깨달은 가르침의 종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당당하게 그렇게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어떤 일까지도 그 원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떻게 돼서 그런 사건이 벌어졌다, 이렇게 까지는 모른다손 치더라도, 하나의 그런 해석, 이해와 해석이 당연히 나와야 된다고 생각 합니다.
불교인은 그런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 불교는 모든 존재의 원리를 깨달으신 분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 어떤 인연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모른다고 해버리면 그뿐이지만, 불교는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 것들도 너와 나는 너무 분별해서 편을 가르고 그렇게 나누어서 대립하고 상대적으로 생각을 해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는 내가 이겨야 되고, 내가 더 많아야 되고, 내 것이 더 빛나야 되고, 내가 항상 이기고, 내가 항상 일등을 해야 된다는, 마음으로 발전해 버리거든요.
너다 나다 그것을 나누기 시작 하면서부터 그야말로 毫釐有差(호리유차)에 天地懸隔(천지현격)” 이라고, 처음에는 조그맣게 출발하지만 나중에는, 아주 크게 발전을 해서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일로 발전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실은 처음부터 너다 나다 하는 분별을 안 하는, 분별이 없는 그런 것을 알고, 분별은 하지 말고 사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대구 지하철 사건 같은 것은 불교적인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되는가?
한 사람이 그 많은 사람의 생명을 어떻게 앗아 갈 수 있는가? 미친 사람의 우연한 일이지...
불교는 그렇게 표현을 하면 안 되지요, 그것은 세속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입니다. 불교는 그것이 다 인연이 있다는 것이지요.
인연이 있어서 그럴 수밖에 없는 그런 과보의 관계입니다. 그것이 마음에 안 들는지는 모르지만, 마음에 안 들어도 불교는 그렇습니다.
요즈음 제가, 또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새는데, “우리도 부처님 같이” 라는 표어를 내 걸었더라고요. 얼른 듣기에 참 좋은 말이지요.
부처님은 길에서 태어났는데, 그러면 길에서 “태어나고 싶습니까?” 내가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부처님은 길에서 사시다가 길에서 돌아가셨는데 그렇게 사시고 싶습니까? 우리도 부처님 같이라면…
무엇을 가지고 ‘우리도 부처님같이 라고 하느냐?’ 한번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출가 이후 돌아가실 때 까지 거지였습니다. 거지 왕이 이었지요. 거지 왕이지만 앉아서 얻어먹지 않고, 당신도 나가셔서 얻어 자셨습니다.
평생을! 수십 년을! 정말 그것을 닮고 싶어서 ‘우리도 부처님 같이’ 라고 하시는지, 글쎄 뭘 가지고 ‘우리도 부처님같이 라고’ 하는지, 한번 이럴 때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간단하게 제가 답을 드리자면, 너다 나다 피아를 관계하지 않는 한 몸으로 생각하는 동체대비 같은 마음, 같은 몸이라고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 그런 부처님 같이…
그런 마음을 쓰는 부처님 같이 나도 부처님이 되 보자. 이것이 ‘우리도 부처님 같이’ 뜻이 아니겠습니까?
길에서 태어나서 길에서 죽는 것이 뭐가 좋아서, 닮으려고 할 것이며, 평생 얻어먹는 것이 무엇이 좋아서 그것을 닮으려고 할 것이며, 부처님은 신 없이 맨발로 사셨습니다. 그것이 뭐가 좋아서 부처님 같이 하려고 하겠어요. 늘 떨어진 옷을 입고 사셨습니다. 그 생활이 좋아서 ‘부처님 같이’ 라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부처님 같이’ 라는 이런 표어를 내 걸어서 노래도 있습니다만, 그러려면 무엇이 우리가 부처님 같이 닮고자 하는가? 너와 내가 없는 동체대비, 한 몸처럼 생각하는 편 가르는 것이 없는 세상, 그런 마음을 쓰지 않는 사람같이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특수한 한 사람이 다수를 죽이고, 다치게 하고, 억울하게 만들고, 하는 그것은 어째서 그럴 수가 있는가?
나는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을 개최했을 때 그것을 느꼈어요.
아, 저런 일들이 대구지하철 같은 사건을 불러올 수 있는 그런 원인이 되겠구나! 그랬습니다.
먼 나라에서 와 가지고 임원진과 선수까지 합해야 백 명 정도 이내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붉은 옷을 입고 잡아 먹을 듯이, 그렇게 일방적인 응원을 합니다.
그랬을 때 저 같으면 운동장에 나가서 다리가 후들거리고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서, 겁이 나서 정말 걸음하나 제대로 못 옮겼을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다 무릅쓰고 그 사람들은 열심히 뛰었습니다. 죽일 수 있다면 죽이면서 까지 아마 이기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기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서 또 졌다면 얼마나 정말 온통 붉은 악마가 되가지고, 잡아먹을 듯이 응원을 하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하늘을 찌를듯한 증오를 품었을 거예요. 그건 저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그 소수가 거기서 당했을 때, 얼마든지 또 다수를 상대로 해서 소수가 다수를 그렇게 보복할 수도 있겠구나, 이것이 인과의 원리고 인연의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적인 정신은, 우리가 지금 부처님 오심에 대해서 그렇게 세상이 떠들썩하게, T.V다, 뭐다 할 것 없이 세상이 온통 등으로 내걸리고 그런 판에, 부처님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너와 나를 남으로 생각하고 편을 갈라 가지고, 일방적으로 주눅이 들게 그렇게 응원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부처님의 정신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까 소수가 다수에게 당하니까, 다수도 소수에게 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이 돌고 돌다가 여기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것이, 대통지승불의 그 오래고, 오랜 역사 속에 함께 하면서 얽히고설킨 인연들을 이야기해 나가는 과정인데, 우리가 그런 운동경기에서 그런 식으로 응원을 해서 상대들에게 그런 위협을 주었을 때, 상대들이 그 때 증오심을 품은 그 증오심이 돌고돌고 돌아서, 어느 때엔가는 그렇게 나타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假使百千劫(가사백천겁)이라도
所作業不亡(소작업불망)이니
因緣會遇時(인연회우시)엔
果報還自受(과보환자수)니라. 가령 백천겁 이 흐른다 하더라도 사람이 지은 업 이라고 하는 것은, 조그만 업이든 큰 업이든 간에 없어지지 아니하고, 인연이 어느 날 딱 맞아 떨어지면, 외나무다리에서 원수가 만나듯이, 맞닥뜨린 그 순간에, 과보를 환저수라, 그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 이것이 불교에서, 어느 종교도 어느 철학도 자랑하지 못하는 연기의 이치! 모든 존재, 모든 사건은 인연에 의해서 형성되어 간다는 것을 발견하신 것이, 부처님의 위대한 발견이고, 부처님의 깨달음인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님은 너와 나, 彼我(피아)를 가리지 말라고 同體大悲(동체대비)를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그런 부처님 정신을 잊어버리고, 알맹이는 어디 가버리고 겉만 핥고 있는 그런 식이지요. 참 안타깝습니다.
겉만 가지고 불교라고 하는 간판만 걸면 불교인 줄로 알고 있으니, 그런 것들이 안타깝고, 안타까운 뜻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부처님 오신 날을 높이 기리는데 이럴 때, 한번쯤 피아가 없는, 상대편을 갈라놓고 잡아먹을 듯이 응원하는 그런 마음 좀 자제하고, 너도 부처님이고, 나도 부처님이고, 어떻게 부처님이 부처님을 그렇게 사정없이 잡아먹을 듯한, 일방적인 응원을 우리가 할 수가 있겠는가? 그저 안 해도 그만인 스포츠, 그것 없이도 의식주 하고는 아무 관계없다고 생각 합니다.
요즈음은 의식주 문제를 그런 데서 해결하는 물론 많습니다만, 본래는 그것이 생산업도 아니고 사실은 없어도 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목숨을 매고, 그렇게 사람들이 그런 방향으로 세상의 역사가 흘러가고 있다는 것.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부처님의 시각에서 보면 참 잘못 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도 부처님오신 날을 맞으면서 한번쯤 짚고...
부처님오심의 진정한 뜻은 그렇게 편을 나누어서 서로 이기고 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한 몸, 한마음, 한 뜻으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자는 그것이 부처님이 오신 취지라는 것을, 이럴 때 한번 짚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여기에 대통지승불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사실은 석가모니부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부처님으로 출현하시기까지의 그런 수억 만 겁의 아주 길고 긴 세월동안에, 함께 더불어 존재해왔고 흘러 왔다는, 인연 이야기입니다.
십육 왕자가 출가하여 사미가 되다. 사미는 어린사람이 출가를 해서 승려가 되었을 때 사미라고 그렇습니다. 16 왕자의 제일 마지막 왕자가 결국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는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냥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그렇게 문득 태어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연과 무량 아승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그런 많은 인연들이 동원이 되어서 비로소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하게 되었고, 석가모니 부처님만 그렇게 탄생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 한 사람 한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무량 아승지 인연들이 동원이 되어서, 비로소 우리가 이 순간 이렇게 존재하고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 입니다.
서 정주 씨의 국화 옆에서 라는 시가 그런 뜻을, 연기의 이치를 아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소쩍새가 울지 않고는, 그렇게 울지 않고는 가을에 국화꽃 한 송이가 아름답게 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 전체는, 전 우주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동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디 국화꽃 한 송이만 그렇습니까?
부처님이 그렇고, 우리들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고,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 하나하나 다 그렇고, 존재하는 모든 식물, 모든 동물, 모든 광물이, 일체 사물이 다 온 우주가 다 동원 되어서 그런 하나의 하찮은 이름 없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를 존재하도록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를 해야, 대통지승불이 언제 부처님인지, 16 왕자는 우리와 무슨 관계인지, 이런 것들을 이해하고 소화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인즉슨 별것 아니지요.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에, 우주에 존재하는 우리들부터 모든 존재가 많고 많은 인연들이 동원이 되어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 입니다.
p.213
(6)십육 왕자가 출가하여 사미(沙彌)가 되다
27 그 때 십육 왕자들이 모두 동자로 출가(出家)하여 사미가 되었느니라. 육근(六根)이 영리하고 지혜가 총명하며, 이미 백천만 억 부처님께 공양하고 범행(梵行)을 청정하게 닦으며 최상의 깨달음을 구하려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느니라.
'세존이시여, 이 한량없는 천만 억 성문 대덕(大德)들이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석가모니도 그랬듯이, 대통지승불도 성도하고 설법하므로 해서 그 설법을 듣고 교화된 사람들을, ‘성문대중’ 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성문대덕이라는 말을 붙였는데, 부처님 당시 5비구로부터 우리들 까지도 대개, 법문을 공부하고 듣는 사람들을 성문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세존께서는 또 저희들을 위하여 최상의 깨달음의 법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저희가 듣고는 다 함께 닦아 배우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도 여래의 지견을 소원합니다. 마음으로 깊이 염원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잘 아실 것입니다.'
십육왕자가 부처님께 하는 말 중에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이 저희들도 여래의 지견을 소원 합니다. 바로 부처님 마음 같은 그런 마음을 소원 합니다. 부처님의 안목. 부처님의 깨달음 같은 지혜를 저희들도 소원 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다 할 수는 없지만, 오늘 이야기의 주제에 맞추어서 말씀드린다면, 제발 좀 잠깐 동안만이라도 나니 너니 하는 차별심. 분별심. 덜하고, 동체대비 한 몸으로 생각하는 그런 마음, 이것이 여래의 지견 중에 중요한 하나가 아닐까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여래의 지견을 그것 하나만으로 해석하기는 좀 부족 하지요. 마음으로 깊이 염원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잘 아실 것입니다. 어떤 신도가 기도하다가 부처님은 내가 일일이 내 소원 다 말 안 해도 다 아시겠지요? 이랬다는데, 여기도 말인즉슨 같습니다.
마음으로 깊이 염원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잘 아실 것입니다. 그 신도가 부처님 말 안 해도 다 아시겠지요? 한 것과 여기 십육 왕자가 말씀하신 것하고, 말은 같은데 속뜻은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이 때에 전륜성왕이 데리고 온 대중 가운데서 팔만 억 사람들이 십육 왕자가 출가하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출가하고자 하므로 전륜성왕이 허락하였느니라.
자기 아버지가 성도를 했고, 아들 16명이 출가를 했고, 또 그 외에 시방에서 전륜성왕들이 왔는데, 얼마나 많은 수행원들이 따라 왔겠습니까? 무려 시방에서 수행원으로 따라온 팔 만 억 사람들이 저 훌륭한 십육왕자가 출가 하는데 우리라고 못할 소냐고, 출가를 자기들이 섬기는 왕들에게 허락을 청했다는 것입니다.
사미들을 위하여 법화경을 청하다. 제가 법화경을 번역을 하고, 부제로 “이것이 불교다” 그랬습니다.
이 법화경에 근거를 하면, 부처님이 성도 하신 것도 이 법화경을 위해서 성도 하셨고, 평생 법화경을 설했고, 또 제자들도 법화경을 공부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공부했지, 그 외 다른 경전이 크게 소개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또 유의해야 됩니다. 물론 다른 경전들도 좋은 경전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법화경이 경중의 왕이다. 우리가 그렇게 古來(고래)로 칭해오고, 무슨 의미가 그렇게 법화경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내용인가? 이런 것들도 마음에 새기면서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7)사미들을 위하여 법화경을 설하다
28 그 때 저 부처님이 사미들의 청을 받고 이만 겁을 지내고나서 사부대중 가운데서 대승경전을 말씀하시었느니라.
뜸도 참 오래 들였습니다. 사미들이 부처님께 법을 청했는데, 부처님이 2만겁 이라는 세월을 뜸들이고 나서 대승경전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니라. 제가 말을 하자니 뜸을 들였다고 그랬는데, 물론 그런 의미는 아니지요. 그러나 그만치 무게를 실었고, 또 신중하게, 또 깊이 사유한 끝에, 정말 최상의 경전을. 최상의 가르침을 설해야 되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까지가, 2만 겁이라고 하는 세월에 이르렀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하신 말씀이 그랬습니다. 책이름은 묘법연화경 이고, 그 묘법연화경은 보살들을 가르치는 법이며, 최고 수준에 오른 사람들! 정신적으로 영혼이 가장 맑고 종교적으로 뛰어난 이들을 여기서 보살이라고 그러거든요. 최고 수준에 있는 보살들을 가르치는 법이며, 또 부처님의 많은 경전 중에서 부처님이 보호하고 아끼는 바이니라. 법화경을 그렇게 표현 합니다.
한마디로 “敎菩薩法(교보살법) 佛所護念(불소호렴)” 이것이 법화경이다. 그렇습니다. 보살들을 가르치는 법이라는 것은, 불교의 최고의 수준에 오른 사람들, 정신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다음에 이것은 또 부처님이 상당히 아끼고 보호한다. 아무렇게나 이야기 하는 그런 경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경을 말씀하시니 십육 사미들이 최상의 깨달음을 위하여 함께 받아 지니고 외우고 통달하였느니라. 이 경을 설하실 때 십육 보살사미는 모두 믿고 받아 지녔으며,
여기는 표현이 십육 보살사미 그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사미면서도 보살이라는 것이지요. 또 보살비구 이런 표현도 씁니다. 보살은 한국같이 여자신도를 지칭하는 말은 본래 아닙니다. 그야말로 보살사미, 보살비구 과거역사에 보면, 보살 누구누구 이렇게 표현을 한 책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아주 좋은 명칭이지요.
성문 대중 중에서도 믿고 이해하는 이가 있었으나 그 나머지 다른 천만 억 종류의 중생들은 모두 의혹을 품었느니라.
그렇지요. 설한다고 그 법석에 있는 사람들이 다 똑같이 잘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많은 대중 중에 천만 억 종류의 중생들은 모두 의혹을 품었다. 이랬습니다. 저 서두에서 오천 명이나 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들도 자리를 박차고 나갔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무 공덕도 없고, 아무런 조건도 갖추지 못했고, 어떤 내 놓을만한 수행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대로가 부처님이다.” “사람이 곧 부처님이다.” 라고 하니까, 자기들은 오랜 세월 이런저런 난행고행을 겪고, 육바라밀을 닦고, 수많은 공을 들여야만, 비로소 그것도 삼아승지 겁이라는 길고 긴 세월동안, 수천만 생을 반복하면서 수행을 쌓아야만, 비로소 부처님이 된다고 이렇게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의혹을 품을만한 일이고, 받아들여지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 번, 제가 강조하는 말씀이지만...
그래서 여기도 모두 의혹을 품었느니라. 아니, 자기는 공부를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전부 부처님이라고 하니, 의혹을 품을 만도 하지요.
불교경전 중에서 또 어떤 의미로 보면 최초에 설하신 것이 화엄경이라는 표현도 해요.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는 말씀인데, 최초에 설하신 화엄경에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세요. “야 신기하고 신기하다. 내가 깨달은 지혜의 눈으로 일체중생을 보니까, 내가 숱한 희생을 치른 태자의 지위를 버렸지. 피나는 고행을 6년이나 했지, 큰 깨달음을 이뤘지. 그리고 얻은 이 깨달은 안목으로 일체중생을 보니, 나하고 똑 같더라. 여래의 지혜와 덕상 과 자비와 여래가 갖춘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진 것 없이 가지고 있더라. 야 정말 신기하고 신기하다. 나는 이것을 알기 위해서,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가?
왕자의 지위도 버렸지, 그 고행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행을 하지 않았느냐? 무슨 그런 조건을 달아야만 비로소 성불을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서 깨닫고 보니까, 전혀 그런 수행과, 그런 고행과, 그런 희생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그대로 저 모든 사람들이 전부 여래의 지혜와 덕상 을 똑같이 가지고 있더라. 단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뿐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고, 저 사람들은 자기 살림살이고 자기 것이면서도 그것을 단 스스로 모르고 있을 뿐이더라.”
누가 뺏어 갈수도 없는 것이고, 더해 줄래야 더해 줄 수도 없는 것이고, 그래서 석가모니도 자기 아들 라훌라 에게도, 만분의 일도 주지 못했습니다. 전해준다는 표현이 있지만, 그것은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인증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고, 준다고 받을 수도 없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본래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이 갖추고 있는 무어라고 할 수 없는 아주 위대한 그런 내용입니다.
정말 불가사의 하고, 만행 만덕이 그 속에 다 갖추어져있는, 부처로서의 완전무결한 내용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것을 아무것도 희생을 치루지도 않고 수행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갖추고 있더라는, 화엄경의 그런 가르침! 법화경도 역시 내용은 같습니다만. 그런 말을 듣고 의혹을 품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분들도 아마 고개 설레설레 흔들면서, ‘아니야, 나는 아니야, 나는 부처가 아니야,’ 아마 거의 백이면 백, 죄송하지만 그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것을 감당 못한다는 것이지요.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알기로는 내가 부처가 아닌데, 그리고 또 막연하게, 석가모니든지 아니면 부처님이든 간에, 아주 막연하게 이상하게 휘황찬란한 존재로 부처님을 그리고 있거든요 머리속에, 너 나 없이 다 그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부처님같이’ 라고 하지요. 무턱대고 부처님같이...
사실은 부처님은 거지 왕 이지요. 진짜 거지왕은 밥 얻으러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거지 왕 이면서도 늘 같이 밥을 얻으러 가셨어요. 늘 누더기 입고 신발도 없이, 그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부처님같이’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부처님을 아주 휘황찬란하게 그렇게 상상하고 있다는 겁니다.
뭔가 풍요로워 보이고, 대단하고, 자비로워 보이고, 그야말로 만행 만덕을 갖추셨으니까 거지하고는, 탁발하고 처참하게 누더기 입고, 먼지 푸석푸석 나는 그 흙 길을 맨발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평소에 상상해 보셨어요?
그런 부처님! ‘그런 부처님을 우리가 닮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내면을 사실은 두고 하는 소리겠지요만, 누가 그런 것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면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의혹을 품을 수밖에 없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의 동등한 그런 위대한 부처님인데, 그것을 이해 못하는 사람은 의혹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제가 늘 주장하는 것은 人佛思想(인불사상) 사람이 부처님이다! 이것은 어떤 경전. 어떤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을 보더라도 부처가 아닐 이유가 없어요. 털끝만큼도 부처가 아닐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상태가 자기처지가 어떻다 하더라도... 그런 점을 이 법화경은 우리에게 깊이 심어 주고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오신 뜻도 거기에 있는 것이지요.
부처님이 팔천 겁 동안 이 경을 설하시며 잠깐도 쉬지 않으셨느니라.
팔천 겁 동안 이경을 설했다는 것입니다.
이 경이라는 것이 글자로 한정된 몇 페이지짜리 몇 권의 경, 이것이 아닙니다.
존재의 원리 입니다. 법화경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모든 존재의 원리는 이렇게 되어 있고,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인불사상!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그것을 설득 시키고 이해시키려고...
왜? 사람이 부처님인가? 또 부처님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인가? 하는 이러한 것을 설명하는데, 팔천 겁 이라는 세월을 투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잠깐도 쉬지 않으셨느니라. 우리는 자고 먹고 하는 데, 경전 에서는요. 설법을 하기 시작하면은, 먹고 자고 하는 시간은 싹 빠집니다. 거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설하시기를 마치시고는 고요한 방에 들어가서 팔만 사천 겁 동안 선정에 머무르셨느니라. 선정에 머무신 시간은 또 팔만사천 겁 입니다.
뒤에 나오지만 이 경전을 설하고 팔만 사천 겁 동안. 선정에 머무는 동안 십육 보살사미, 십육왕자들은 모두 뭘 했는가 하면 이들이 그동안 경전을 설했습니다.
이들이 자기인연 맞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많은 사람들에게, 법화경의 이치를 설했다는 이야기가 뒤에 나옵니다. 그것은 곧 이 인연의 원리에 의하면, 바로 오늘 이 순간 우리가 인터넷이라는 기술을 이용해서, 법화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 인연에까지 미쳐진다는 것입니다.
또 이것이, 이 인연이 또 앞으로 얼마나 발전하고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인연을 맺어질지, 틀림없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옛 인연을 말하다 에서, 석가모니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은 법화경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불기 2549 5월 12일 목요일
기록: 수경심, 정리: 진여혜, 강정은.
첫댓글 소쩍새가 울지 않고는, 그렇게 울지 않고는 가을에 국화꽃 한 송이가 그렇게 아름답게 피어날 수 없다는 연기! 크든 작든 그 어떤 사건도 소작업은 불망하여 호리유차에 천지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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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들을 위하여 법화경을 설하다.>... 법화경에 근거를 하면은, 부처님이 성도 하신 것도 이 법화경을 위해서 성도 하셨고, 평생 법화경을 설했고, 또 제자들도 법화경을 공부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공부했지, 그 외 다른 경전이 크게 소개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_()()()_
모든 사람들이 전부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똑 같이 가지고 있으나 나는 그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고, 저 사람들은 자기 살림살이고 자기 것이면서도 그 것을 스스로 모르고 있을 뿐이다...._()()()_ 진여혜님, 대원성님 수고하셨습니다..
부처님이 팔천 겁 동안 이 경을 설하시며 잠깐도 쉬지 않으셨느니라._()()()_
"저희들도 여래의 지견을 소원합니다"...<차별심,분별심을 덜하고 (동체대비)한몸으로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여래의 지견입니다...마음으로 깊이 염원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잘 아실것입니다. _()()()_
저희들은 여래의 지견을 소원합니다..바로 부처님 마음 같은 그런 마음을 소원합니다..부처님의 안목, 부처님의 깨달음 같은 지혜를 저희들은 소원합니다..._()_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_()()()_
마음으로 깊이 염원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잘 아실 것입니다...좋은 가르침 감사드립니다..._()()()_
이름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니라. 보살들을 가르치는 법이며 부처님이 보호하고 아끼는 바이니라... 감사드립니다... _()()()_
毫釐有差(호리유차)에 天地懸隔(천지현격)” 이라고, 처음에는 조그맣게 출발하지만 하지만 나중에는, 아주 크게 발전을 해 가지고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고 하는 그런 일로 발전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실은 처음부터 너다 나다 하는 분별을 안 하는, 분별이 없는 그런 것을 알고, 그래서 분별은 하지 말고 사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감사합니다//_()()()_
깨닫고 보니까 수행과 고행과 희생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그대로 저 모든 사람들이 전부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똑같이 가지고 있더라. 단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일뿐이다..._()()()_
연기의 이치, 모든 존재 모든 사건은 인연에 의해서 형성되어 간다는 것을 발견하신 것이, 부처님의 위대한 발견이고 부처님의 깨달음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너와 나, 彼我를 가리지 말라고 同體大悲를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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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들도 여래의 지견을 소원 합니다. 바로 부처님 마음 같은 그런 마음을 소원 합니다. 부처님의 안목, 부처님의 깨달음 같은 지혜를 저희들도 소원 합니다..잠깐 동안만이라도 나니 너니 하는 차별 심, 분별 심 덜하고, 동체대비 한 몸으로 생각하는 그런 마음 갖기를 소원 합니다..._()()()_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_()()()_
마하반야바라밀()()()
고맙습니다.
대통지승불의 16왕자 중에서 막내가 석가모니불로서 문득 태어난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인연들에 의해서 태어났듯이 우리도 마찬가지로 무수한 인연에 의해서 태어난 바꿀수 없는 생명이다.
고맙습니다.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한 번 쯤 흉내라도 부처님의 同體大悲를 실천해보록 하겠습니다
대통지승불의 16왕자가 대통지승불에게 청하는 말
--"저희들도 여래의 지견을 소원합니다"
대통지승불은 16왕자 사미들의 청법을 듣고 이 만 겁이 지난 다음에 법화경을 설하심
--이 때 16 보살사미,일부 성문은 믿고 이해했으나 천 만억 종류의 중생들은 의혹을 품었다
대통지승부리 팔 천 겁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법화경을 설하시고 팔만 사천 겁동안 선정에 드시고 그 동안은 16보살 사미들이 법화경을 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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