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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해방운동 - 8
행여나 손명화 선생에게 아기가 생기면 어떻게 하나 불안해진 진하는 명화네 집을 찾은 자신이 밉고 후회스러웠다.
불안해하는 진하와는 달리 성애를 즐기느라 황홀해진 명화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까 먹다 남은 술병을 가져와 술잔을 내 밀었다.
조금 전에 독하고 단백 하던 술 맛은 어디로 가고 맹물 같았다.
명화는 기분 좋게 잔을 비우더니 메인 목소리로 “고마워 진하씨!” 하며, 뜻하지 않게 소리를 내어 울었다.
비록 6년이나 연하이지만 늘 듬직하던 진하가 오래간만에 찾아와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겠다는 인생 중대사를 의논해주고, 비록 자기가 붙잡기는 했지만 굶주린 애욕을 달래주고 갔다가 오늘밤 다시 찾아와 이렇게 함께 해주는 우정이 고마웠다.
후배이면서 늘 듬직했던 진하와 같이 서린 회포를 풀고 나자 그간에 무섭도록 외로웠던 고독이 통곡으로 쏟아져 나왔다.
「명화」는 자기를 찾아와서 유학길을 의논해주고 굶주린 애욕까지 풀어준 진하에게 가슴 속에 쌓여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사무실에서 심부름하던 나는 박헌영 선생님의 권고로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나서 상하이로 가는 선생님 내외를 따라 상하이로 갔다. 선생님과 같이 사회주의 활동을 했지만 나는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보다 주세죽 선배와 박헌영 선생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고마워서였다. 주세죽 선배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상하이에서 서울에 오게 된 나는 가까운 사람 하나 없는 타향에서 적막한 고독과 싸웠다. 사는 것이 무료하고 허탈함을 신흥청년구락부에서 학습하는 것으로 달랬지만 밤마다 그리워지는 남자 생각에 산다는 것이 너무나 허무했다. 벼들이 피는 초가을이었다. 비가 올 것만 같아 종이우산(대오리에 기름종이를 발라 사용한 우산)을 챙겨서 구락부에 나가 학습을 하고 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마치고 나서도 계속 내렸다. 학생들을 보내고 가방을 챙겨서 나오니 소년 하나가 가지 않고 캄캄한 마루에 서 있었다. 이천에서 서울로 유학(遊學)을 와서 고등보통학교 다니는 학생이었다. 소년은 우비가 없어 못가고 있었다. 비오는 밤에 집이 먼 소년을 혼자 두고 차마 나 혼자 갈 수가 없어 우리 집으로 가자고 했다. 사양하는 소년에게 강요하다 시피해서 우산을 같이 쓰고 왔더니 두 사람 다 옷이 젖었다. 소년에게 입혀줄 옷이 없어 궁리하다가 허리에 고무줄을 넣어 집에서 입는 치마만 입혀놓고 소년의 옷을 모두 거실에 널어놓고 저녁을 먹는데 소년이 쑥스러워 하였다. 우리 집에 방은 이렇게 세 개나 되지만 내가 거처하는 안방 외에는 모두 창고처럼 어질러 놓아서 소년과 나는 한방에 잠자리를 폈다. 비오는 밤 소년과 한 방에 누워있으니 왠지 잠은 오지 않고 옆에 잠든 열여섯 소년이 남자로 보였다. 밤이 깊어지면서 몸이 뜨거워진 나는 소년을 더듬었다. 이렇게 시작된 소년과 나의 관계는 터진 봇물처럼 절제하지 못했다. 그렇게 자고 간 소년은 학교를 파하면 하숙집으로 가지 않고 찾아왔다. 양심으로는 이래서 안 된다하면서도 나는 소년과의 잠자리를 즐겼다. 욕정의 노예가 되어버린 나는 매일 같이 찾아오는 소년을 말리지 않고 오히려 반겼다. 열여섯 어린 소년에게 그것은 무리였다. 성의 노예가 되어 버린 소년은 기어이 그해 겨울 밤 몇 차례나 성애를 즐기려 덤비더니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을 하고 있었다. 소년의 얼굴색이 노랗고 머리가 불덩이처럼 뜨거운 것을 보고 인력거를 불러 동대문에서 일본인이 진료하는 병원을 찾아갔더니 과로에 독감이 들었고 하였다. 여러 날 다니며 치료하였지만 병세는 자꾸 나빠져 한기로 춥다고 떨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당황한 나는 어쩔 줄 몰라 이웃집에 가서 물어봤더니 명륜동에 가면 궁중에서 어의(御醫)를 지내다가 한의원을 하는 용한 의원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당장 인력거를 불러 명륜동으로 찾아갔다. 진맥을 마친 의원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어린 사람이 설정(泄精)을 많이 해서 기가 쇠하고 독감이 늙어서 폐렴이 되어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번했다고 하였다. 약을 지어주면서 소년에게 스무 두서너 살이 되도록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의원의 말에 나는 양심이 찔렸다. 어린 사람이 한창 농익은 여자와 저녁마다 그것도 몇 차례씩 미친 듯이 놀아났으니 병이 날만도 하였을 것이다. 한약을 먹고 기운을 차리게 된 소년을 시골집으로 내려 보내고 나서 나는 아무리 사내가 그리워도 다시는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겠다고 명세를 했다.】
「손명화」는 장황하게 자기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다말고 눈물을 흘렸다.
낮선 서울에서 외롭고 힘들었던 회한의 눈물이었다.
명화는 계속 신부님께 고해성사 하듯이 자신의 인생파노라마를 털어놓았다.
【나는 함흥에서 만석꾼의 손녀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청년의 날 나라가 외세에 시달리는 난세에 희망을 잃어버리고 낭인으로 간도와 연해주를 떠도는 건달이 되었다. 송화강과 목단강이 합류하는 이란(依蘭)에서 마적(馬賊)의 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빼어난 미인이었던 마적의 딸은 야생마처럼 제어할 수 없는 바람둥이였다. 이 여자를 좋아하게 된 아버지는 여자를 가운데 놓고 북만주의 건달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싸웠다. 싸움에서 승리한 아버지는 여자를 위해 낭인 생활을 접고 여자와 같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야생마 같던 바람둥이 여자도 아버지 품에서 순박한 가정주부로 변했다. 그러나 함흥에서 내 노라 하는 호족(豪族)이셨던 할아버지는 되놈 마적의 딸을 며느리로 받아 들리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셨던가봐.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도 할아버지가 엄마를 며느리로 받아주지 않자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심하게 다투고 가족을 데리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서양식 술집(bar)을 경영하며 행복하게 지냈다. 할아버지 반대에도 결혼한 부모님이었으나 내가 직장에서 만난 러시아 남자와 결혼하려고 하자 무척 반대하셨다. 부모님은 동양여자와 서양남자의 결혼이 얼마나 어설픈 것인가를 아셨는지 울면서 말리셨지만 나는 백러시아계인 노랑머리 남자와 기어이 결혼하여 모스코바로 직장을 옮긴 남편을 따라 모스코바로 갔다. 만주 사람인 엄마의 영향을 받은 나는 만주사람들처럼 청결하지 못하다고 남편과 자주 다퉜다. 서양남자는 동양남자와 달리 쉽게 이혼을 요구하였다. 내가 결혼하고 나서 연세가 많으신 할아버지는 엄마를 며느리로 인정하고 아버지를 부르셔서 아버지와 엄마는 고향으로 가버렸다. 이혼을 당한 나는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줄은 모르고 자포자기에 빠져 매일같이 술에 취해 방황하다가 밤길에 강도를 만났다. 절망에 빠져 만취한 나는 강도를 무서워하지 않고 욕설을 하며 덤볐다가 칼에 찔리고 발길에 차였다. 전신에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떠 보니 낮선 병원에 누워있었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교 옆에 있는 작은 외과병원이었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교에 다니는 중국인 학생이 길에 쓸어져있는 나를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다고 하였다. 칼에 찔린 상처는 대수롭지 않은데 발길에 차이고 주먹으로 맞아 전신이 멍들어 움직일 수 없도록 아팠다. 오후가 되자 미모의 조선인 여자 하나가 찾아왔다. 이 착한 여자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교에 근무하는 박헌영 선생님의 부인 주세죽이었다. 그녀는 학교에서, 길에 쓸어져 있는 조선인 여자를 이 병원에 데려다 놓았다는 중국인 학생의 말을 듣고 찾아 왔다고 하였다. 주세죽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같은 함흥사람으로 나보다 4살이나 더 먹은 선배였다. 퇴원하고 갈 곳이 없는 나를 자기 남편 박헌영 선생님 사무실에서 일하도록 주선해주었다. 주 선배님을 만나 새로운 용기를 얻은 나는 방황을 끝냈다. 박헌영 선생님은 나에게 동방노력자공산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라고 하였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교는 코민테른에서 세운(1921년) 학교로 공산주의 이론과 조직건설, 선동선전, 노조설립 등을 가르쳐 공산주의 혁명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폐교가 될 때까지 아시아인 학생들을 양성하였다. 중국의 등소평, 류소기, 베트남의 호치민, 조선에서도 조두원, 김정하, 권오직, 김응기, 조봉암, 주세죽, 김만겸, 허정숙, 김용범, 조일명, 한빈, 고광수, 정달헌, 오성륜 등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이 학교를 졸업한 나는 1932년 12월 상하이로 가는 박헌영 선생님 부부를 따라 상하이로 가서 「고려공산 청년회」 서무를 보았다. 서무래야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것이 아니고 고려공산청년회 회의 내용을 기록한 메모지를 원장(原帳)에 옮겨 정리하며 서류를 보관했다가 유사시에는 일본고등계 형사나 헌병들에게 문서가 들키지 않도록 소각하는 일이었다. 내가 잡히는 날이면 모든 서류와 비밀이 들어날 수 있으므로 박헌영 선생님의 지시로 나는 가명(假名)을 사용했다. 1933년 3월이었다. 아버지와 엄마가 상하이까지 찾아오셔서 집을 마련해 주고 가셨다. 프랑스 사람들이 지은 실내에 욕실이 있는 고급 주택이었다. 주세죽 선배가 축하 겸 집 구경을 왔다가 박 선생님이 출장 중이라 같이 자고 갔다. 밤이 깊도록 이야기 하다가 명화도 결혼을 해야지 하기에 조선에서 이혼한 여자를 누가 결혼해 주겠느냐고 했더니 “야! 「손 명화」 여성해방운동을 하는 사람이 무슨 그런 봉건적인 소리를 하느냐?”고 나무라더니 여자도 남자들처럼 성욕을 즐길 권리가 있다며, 여성해방운동을 하는 혁명가답게 미개하고 봉건적인 생각을 버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결혼을 못하면 연예라도 하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잠자리에 누운 주세죽 선배가 내게 가까이 다가와 가슴을 만지다가 서서히 배를 더듬어 내려가 배곱 아래를 만졌다. 싫지가 않아 다리를 벌려주며 선배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짜릿함을 견디지 못해 주 선배를 끌어않았다. 주 선배는 내게 입을 맞추며 성 장난을 쳤다. 처음에는 놀라고 당황스러웠으나 서서히 황홀해진 나도 선배를 따라했다. 놀랍게도 짜릿하고 상쾌한 장난이었다. 주 선배는 그날 밤 내게 성을 윤리도덕으로 매는 것은 봉건적인 사고방식이라며 마음껏 즐겨야 한다고 했다. 다음 날 주선배가 가고 난 후 할 일없이 방안에 뒹굴며 지난밤의 일들로 야릇한 상상에 젖어 있는데 공청(고려공산청년회)에서 회식(고려공산청년회 임원회의 소집을 회식이라 하였다)이 있다고 자주 모이는 삼류호텔인 「揚子江 飯店」으로 불렀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류의 변화를 토론하는 자리였다. 중국내 여러 곳에서 활발해 지고 있는 항일운동에 맞춰 상하이 조선 공산당 활동도 활발해졌다. 회식을 마치고 헤어지려는데 김단야 동지가 처음으로 나에게 술을 한잔 더하자고 하였다. 집에 가봐야 고독하고 무료할 뿐인데 위대한 혁명지도자가 술을 같이 마시자는 제안이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워 바(bar)로 들어갔다. 술을 마시면서 사회주의 혁명만이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김단야 동지의 변설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위대한 혁명 지도자인 남자와 같이 술을 마신다는 사실이 좋아 고개만 끄덕거리며 술잔을 비웠다. 지난 밤 주세죽 선배와 있었던 동성연애 탓인지 몸이 짜릿해 야릇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술잔을 거푸 비웠다. 김단야동지는 술을 거푸 마시는 나를 보고 너무 취했구나? 그만 일어나자했다. 내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척거리자 부축해서 객실로 데려다가 눕히며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다. 주세죽 선배의 성 해방론에 전도 된 나는 거침없이 김단야 동지를 끌어당겼다. 천하에 바람둥이 김단야와 한 덩어리가 된 나는 이렇게 놀다가 죽는다면 그것도 좋을 것만 같았다. 그날부터 몇 개월간 나는 김단야 동지와 밀회를 즐겼다. 1933년 여름 공청은 급박한 상황으로 분주해져 김단야 동지를 만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7월이 되면서 박헌영 선생님이 일본 경찰에 잡혀 경기도 경찰부로 압송이 되었다. 급박한 상황으로 불안해진 나는 회의록을 모두 땅에 묻어 놓고 메모지와 수첩은 모두 태워버렸다. 늦은 저녁에 피신해 있어야할 주세죽 선배가 찾아왔다. 이상하게도 남편이 경찰에 잡혀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의아했지만 먼저 위로 인사를 건네고 술을 내왔더니 술을 좋아하는 그녀는 독한 고량주를 몇 잔 마시고 취기가 오르자 “명화야 네가 김단야 동지를 잊어야겠다.”고 하였다. 깜짝 놀라는 내게 “김단야 동지와 네가 연애하는 것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김단야 동지와 내가 결혼하기로 했다 그러니 명화가 김단야 동지를 잊어주기 바란다. 우리는 사실 오래 전부터 좋아했으나 박헌영 선생과 김단야 동지가 싸우게 되는 것을 피하려고 우리는 서로 절제해 왔다. 이제 우리 박선생은 살아서는 나오지 못할 것이고, 우리 공청도 상하이에서는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참에 김단야 동지와 나는 모스코바로 가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아직 신분 노출이 안 된 명화가 서울에 있는 신흥청년구락부 학습을 맡아주면 좋겠다.” 주 선배의 일방적인 통고였다. 부인이 있는 김단야 동지를 나는 한 번 도 내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김단야 동지도 나를 장난하는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안다. 주세죽 선배의 통고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지만 이렇게 주세죽의 통고로 헤어지는 것이 불쾌하고 김단야 동지에게 섭섭했지만 쾌히 승낙하고 산 설고 낮 설은 서울로 들어왔다. 내가 서울에 올 때는 혁명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와보니 서울의 고려공산청년회는 몇 차례 일본 경찰에 쫓기면서 와해되고 없었다. 다만 화요회 멤버 몇 사람이 박헌영 선생님과 김단야 동지가 만들어 놓은 신흥청년구락부라는 작은 학습반만 있었다. 이 구락부를 통해 화요회 멤버들이 서로 연락을 취하며 학생들을 모아 사회주의를 학습하고 있었다. 모스코바에서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서 공부한 내가 학습지도를 맡았다. 그러나 김단야 동지가 주세죽 선배와 결혼하면서 몇안 되는 동지들 조차 흩어져 버리고, 나혼자만 남았다. 비록 김단야를 차고 갔지만 모스코바에서 나를 도와주었던 주세죽선배에 대한 의리와, 고독했던 상하이에서 서로 몸을 썪을 수 있었던 김단야 동지에 대한 애증 때문에 학습소를 지켰으나 조직을 이끄는 지도력이 부족하다보니 겨우 명맥을 유지할 때 진하가 나타났다. 그나마 진하가 나오면서 조금 활발해졌다가 진하마져 사라진 지난 1년동안에 절망적으로 쇠락해버렸다. 지난 여름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 함흥을 갔다가 내친 걸음에 주세죽선배와 김단야 동지가 있는 모스코바까지 갔다왔다. 서울의 사정을 들은 두 사람은 자기들이 귀국할때 까지만 참아 달라고 하였으나 돌아올 눈치는 아니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좋게 보지 않는 서울로 돌아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조금만 일찍 떠나어서도 진하를 보지 못할번 하였구나. 친구 하나 없는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준비하는 중이다. 내가 존경했던 김단야나 주세죽의 공산주의와 혁명은 개인의 영웅심의 허구로 거짓과 배신의 겉모양처럼 보인다. 고향에 가기 전에 감옥에 계시는 박선생님을 한번 면회 갈까 한다.】
자기 이력을 털어놓은 명화는 평소에 명랑하고 용감하던 모습과는 달리 초췌(憔悴)한 모습으로 “나 손명화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하는 모습은 가냘픈 여인이었다.
진하는 측은한 연민으로 손명화 어깨를 안아주자 안기며 흐느껴 울었다.
우는 손명화 선생을 혼자 두고 나가지 못해 같이 묵었다.
잠에서 깬 진하는 벌거벗은 자신을 부끄러워하는데 부엌에서 명화가 아침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저께 잠든 사이에 진하가 아침도 먹지 않고 가버린 것이 미안했다며 정성껏 아침상을 차렸다.
손명화는 진하에 대한 감정이 김단야에게와는 달랐다.
그렇다고 동거를 하고 싶은 욕심은 아니다.
자기를 성적인 노리개가 아닌 인간으로 찾아와 하룻밤일망정 자기를 위해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욕정을 풀고 싶어 잡았지만 지난밤에는 첫 순정을 바치고 싶은 남자에게처럼 진하의 장도를 위하는 마음으로 몸을 주었다.
오늘 아침 진하를 위해 정성을 다해 상을 차렸다.
“엄마가 있는 고향으로 가서 진하와의 일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살께. 유학을 잘 마치고 훌륭한 혁명가가 되어주기를 빈다.”
말을 마치며 진하 앞에 봉투를 하나 내 밀었다.
만만찮은 러시아 화폐가 들어있었다.
생활이 어려울 터인데 그만 두라며 받지 않으려 하였으나 “진하에게 주고 싶은 나 명화 마음이니 받아 주면 고맙겠다.”고 하였다.
진하를 주려고 준비한 돈은 아닐 테고 명화가 언젠가는 필요하리라 생각하고 오래 전부터 간직했던 것이라 생각하니 정말 귀중하고 고마운 정을 담은 돈이라 고마운 마음으로 받았다.
정사를 나눈 명화가 주는 그 마음을 생각해 봉투를 받아 넣는데 불쌍한 명화를 이용하려고한 자신이 죄스럽고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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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명화의 지난 얘기는 잘 읽었구요 이제 진하의 러시아활동이 시작되나요?
진하의 다음 활동이 기대됩니다.
명화의 입을 통해 조세죽(사회주의 여성운동 삼총사=허정숙, 고명자)의 유물론적 성해방의 실체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소위 진보라는 이름 뒤에 숨은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윤리도덕과 정신세계가 결코 우발적 산물이 아니라 오래전 사회주의 운동의 정신토양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편의 창작의 힘 많은 노력이 듭니다 수고하신 선생님 경의를 표합니다
늘 재미 없는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