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3 강 - 機緣品- 7
師曰, 經意分明커늘 汝自迷背로다 諸三乘人이 不能測佛智者는 患在度量也니 饒伊盡思共推라도 轉加懸遠이니라 佛이 本爲凡夫說이어늘 此理를 若不肯信子는 從他退席이니 殊不知坐却白牛車하야 更於門外에 覓三車로다 況經文에 明向汝道하시되
唯一佛乘이오 無有餘乘의 若二若三이며 乃至無數方便과 種種因緣과 譬喩言詞가 是法이 皆爲一佛乘故라하셨거늘 汝何不省고 三車는 是假라 爲昔時故며 一乘은 是實이라 爲今時故니 只敎汝로 去假歸實케함이라 歸實之後에는 實亦無名이니 應知所有珍財- 盡屬於汝라 由汝受用하되 更不作父想하고 亦不作子想하며 亦無用想이라야 是名持法華經이라 從劫至劫토록 手不釋卷하며 從晝至夜토록 無不念時니라
達이 蒙啓發하고 踊躍歡喜하야 以偈讚曰
誦經三千部가 曹溪一句亡이로다
未明出世旨하면 寧累生狂이리오
羊鹿牛는 權說이오 初中後에 善揚이라
誰知火宅內가 元是法中王이리오
師- 曰, 汝今後에 方可名念經僧이다 達이 從此領玄旨하고도 亦不輟誦經이러라
************************
師曰(사왈) 經意分明(경의분명)커늘→ 경의 뜻이 분명하거늘
汝自迷背(여자미배)로다→ 그대가 스스로 미혹해서 등지고 있다. 뜻하고는 등지고 있다.
諸三乘人(제삼승인)이 不能測佛智者(불능측불지자)는→ 三乘 = 聲聞(성문) · 緣覺(연각) · 菩薩(보살)을 三乘이라 그러지요.
그들이 불능측불지자 는. 능히 부처님의 지혜를 측량하지 못하는 것은, “삼승”이니 “삼승인”이니 하지만 “삼승인”이 본래 있는 것은 아니에요. 법화경에도 “없다.” 그랬어요. 無二亦無三(무이역무삼). 唯有一佛乘(유유일불승). 그랬어요. 오직 부처님이라고 하는 사실. 그것만 실재하는 것이고, 성문이나. 연각이나. 보살이나 하는 그런 중간계류의 단계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도-[豚(돈)] 아니면 모-[馬(마)] 라고 하는 식으로 그렇게 처음부터 이야기가 그리되면 수행할 사람이 몇이 없다는 겁니다. 앞에서처럼 아주 상 근기. 아주 특별한 빼어난 근기가 아니고는, 따라갈 사람이가 누가 있느냐 이겁니다. 중간 다리를 여러 개 놔서, 그 중간 다리 한 다리 건너서 거기서도, 괜찮다고 좋은 경지라고 이렇게 생각해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도록, 사람들을 그렇게 유인해야 보통 사람들도 수행할 맛이 나지,
아예 도 아니면 모 치기 라고 개-[犬(견)]도 있고 걸-[羊(양)]도 있고 그래야 그것이 윷 치는 맛이 나지,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근기는 다양한데, 그렇게 너무 철저한 가르침만, 어떤 완벽한 가르침만으로 말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래서 방편이 생긴 것이 성문. 연각. 보살이니, 또는 크게 늘리면,
52위. 또는 55위 지위점차가 있게 되고, 금강경 같은 데서도 보면,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아라한과까지 가는데도 그런 과정을 설정해 놓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용인즉슨 사실은 본래 부처 하나예요. 사람사람이 그대로 다 부처님이다 하는 것을 일깨워 주고자 하는 것이, 법화경이 결론적으로. 최후로 비장해 두었던 가르침이라고 법화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지요. 그 차별을 이야기해 달라고 하는 말인데요. 經義(경의)가 분명한데 네가 모른다는 것이지요.
諸三乘人(제삼승인)이 不能測佛智者(불능측불지자)는→ 부처님의 지혜를 측량하지 못하는 것은,
患在度量(환재탁량)이다→ 그 근심덩어리가 어디에 있는가?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度量. 헤아리는데 있다 이겁니다. 이래저래 자꾸 따지고 헤아리고, 분별하는데 거기에 문제가 있다.
饒伊盡思共推(요이진사공추)라도→ 설사 네가 모든 생각을, 생각을 할 수 있는 데 까지 다 동원을 해서 같이 미루어서 생각을 한다 하더라도,
轉加懸遠(전가현원)이다→ 더 멀어질 뿐이다. 생각 할수록 그 자리하고 더욱 더 멀어질 뿐이지, 생각 많이 해서 거기에 도달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생각 많이 한다고 도달하기로 할 것 같으면, 서양 철학자들 얼마나 생각이 많습니까?
생각이 깊어서 그 논리를 전개해 가는 것을 보면, 정말 정신없거든요.
칸트나 이런 사람들의 책 같은걸 읽어보면, 아유 그 생각 참 복잡해요.
서양 사람들이 그런 걸 읽다가 이 禪門(선문). 근래에 와서 선문을 읽으니까 너무 근사한 거예요. 간단명료하면서도 그 속에 뜻이 다 함축 돼있고요.
칸트의 “순수 이성비판” 이라고 유명한 책인데 그걸 다 읽으려고 시도한 것이 한 다섯 번인가 여섯 번인가 되는데도 결국 다 못 읽었어요. 어떻게나 힘이 드는지...
그것을 이해하고 전부 연결시켜서 하려고 하니까 도대체가 제 머리로는 따라가지지가 않더라고요. 어찌나 복잡한지... 그런데 그것은 괜히 생각이거든요. 여기서 말한 것처럼... 그대가 생각을 다 동원해서 공추한다. 같이 미루어서 헤아린다, 이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근본자리 하고는 더 멀어만 지지. 깨달음의 경지에 가까이 가는 것은 아니다 이겁니다.
우리의 기도나 참선은 생각을 없애는 작업입니다. 결국은 생각을 한 곳으로 몰아서 최종적으로 無念(무념)으로 돌아가는 작업이거든요. 불교하고 서양 철학하고는 정 반대지요. 그러니까 끝까지 思辨(사변)으로 가 봐야 妄想(망상)에 끝나고, 우리는 망상에서 시작해서 망상이 없는 데로... 有念(유념)에서 無念(무념)으로... 무념에 귀착이 된다고 그렇게 佛敎觀(불교관)은 돼있거든요. 저기서는 유념에서 유념으로... 생각이 있는데서, 생각이 아주 조리정연하고 논리적으로 생각을 펼쳐가고 이끌어가고 깊게 들어가고... 아무리 깊이 들어가 봐야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이지, 생각이 없는 자리는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멀어질 뿐이다. 그랬어요. 무념하고는 더욱 멀어질 뿐이지요.
佛(불)이 本爲凡夫說(본위범부설)이어늘→ 부처님은 본래 범부를 위해서 말하였거늘,
此理(차리)를→ 이 이치를
若不肯信子(약불긍신자)는→ 만약에 깊게 믿지 못 하는 사람은,
從他退席(종타퇴석)이니→ 그로부터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이치를, 마음을 깨달으면 그대로 자신이 미혹한 경우와 자신이 깨달은 경우. 이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肯信. 기꺼이 믿지 못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退席= 자리에서 물러나는 그런 일뿐이다. 이겁니다.
殊不知坐却白牛車(수부지좌각백우거)하야→ 그러니 모름지기 백우거에 앉아서, 자기가 백우거에 앉아 있어서
更於門外(갱어문외)에 覓三車(멱삼거)로다→ 다시 문밖에서 三車= 羊車(양거). 鹿車(녹거). 牛車(우거) 를 찾는 줄을 알지를 못 한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부처인데. (여기 내용은 그겁니다.) 자기 자신이 부처인데 그것을 믿지 못 하고= 不肯信(불긍신). 백우거를 타고, 우리가 찾으려고 하는 백우거에 앉아가지고, 다시 양이 끄는 수레를 찾으려고 하는 경우다, 이겁니다. 양이 끌고 사슴이 끌고 하는 시시한 수레. 그 아주 조그만 수레. 처음부터 있지도 않는 그 수레를 찾으려고 하는 얼토당토 않는 일과 같다.
況經文(황경문)에 明向汝道(명향여도)하되→ 밝고 분명하게 그대를 향해서 말하기를
唯一佛乘(유일불승)이오→ 오직 일불승. 부처의 경지만 있을 뿐이고,
無有餘乘(무유여승)→ 나머지 승은 없다는 겁니다. 있음이 없다.
若二若三(약이약삼)이며→ 둘이라는 이승 이라든지, 삼승이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唯有一佛乘(유유일불승)이요. 無二亦無三(무이역무삼)이라고 하는 것이 그 말입니다.
無有餘乘의 若二若三. 이렇게도 표현한 구절도 있고... 이승이나, 삼승은 도대체 있을 수 없다. 그래 사람이 모두 부처예요. 누가 성문이고, 누가 무슨 연각이고 그런 단계가 없다고요. 처음부터 부처일 뿐입니다. 唯有一佛乘입니다. 오직 일불승뿐이고 나머지 이승이나, 삼승은 없다.
乃至無數方便(내지무수방편)과→ 그 외에 온갖 방편. 무량한 방편과
種種因緣(종종인연)과 譬喩言詞(비유언사)→ 온갖 비유와 말이,
言詞가 是法(시법)이 皆爲一佛乘故(개위일불승고)라하셨거늘→ 이 법은 다 일불승을 위한 것이다. 오로지 부처님을 위한 것이다.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라는 사실입니다. 그것뿐이에요. 법화경에 이렇게 분명히 되어있다고요. 이렇게 분명하게 되어있는데 법화경을 가지고 자꾸 엉뚱한 데로 설명을 해나가면, 그것이 이상한 경우는 邪私(사사)한 데로 풀어가고...
法華經(법화경)할 때, 빛날 華(화)자를 가지고 꽃 화자로도 씁니다.
그것을 破字(파자)를 한다고요. 어디 또 우리나라에 지금 어떤 부처라고 이름나있는 그런 사람을 보면, 그것을 파자를 해서, 아이, 법화경이라고 하는 흰 연꽃을 갖다가, 본래는 인도에서는 “쿤다리카”라고 그렇게 했지 법화경이라고 했나요? , 연꽃 이라고 할 때... 그런데 그 연꽃이라는 화자를 그냥 중국 글자 漢字(한자)를 파자 해서 법화경을 해석 하거든요. 그것은 당치도 않는 일이라고요.
연꽃이라는 말 뿐이지 그 외에 무슨 법화라는 화자가 위에 초 두 가있고, 하나 끌고 사람인 자가 두 개 있고 밑으로 하나 끌고 어쩌고저쩌고, 이런 식으로 파자를 해서 설명 하는데, 또 묘하게 거기에 혹한 사람들도 많아요.
법화경 잘못 공부 하는데 인연 맺어 놓으면 아주 삿되게 되기가 일쑤라고요. 그런 곳을 우리는 아무리 봐도 없는데 그렇게 해석을 해요 어쨌거나... 여기도 이렇게 분명하게 되어 있잖아요? 이것이 법화경의 要旨(요지)거든요.
皆爲一佛乘(개위일불승)이라했지 않습니까? 다 일불승을 위한 것이다. 무슨 이야기든지...
種種因緣(종종인연)과 譬喩言詞(비유언사)가 無數(무수)한 方便(방편). 그래서 법화경에는 혹 있는 이야기도하고 혹 없는 이야기도 한다. 부처님말씀 중에는 없는 이야기가 더 많아요. 경전에 보면 실지로 있는 이야기보다 없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해놨어요. 그 당시 뭐 역사가 그리 깊고, 인간사회가 복잡하다고... 지금 같으면 있는 이야기만 해도 참 많을 겁니다.
부처님같이 총명한 분이 온갖 역사. 온갖 동서양에 일어난 사건들. 그런 것 다 기억해서 있는 사건만 가지고 착착 집어서 이야기를 해도 충분히 되겠지만, 그 당시는 기록된 역사도 거의가 짧고 없고요. 그리고 동서양의 교류 같은 것도 없던 시대인데, 사실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알겠어요?
아이들 표현처럼 공자님은 요즘 중학교 1학년생 정도의 지식밖에 안 된다고 아이들이 그런 말을 한다는데, 사실 그런 소리도 할 만 하거든요.
중학교 1학년생 지식하고 공자님 지식하고 별 차이 없다고요 지금...
오히려 중학교 1학년이 더 많을지도 몰라요. 그냥 지식만가지고 따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심성의 깊이 같은 것은 천지 차이지요또...
어림도 없는 것이지요. 얄팍한 지식만가지고 따지면 그런 말도 할 만 하다고요.
상황이 그런 시대이다 보니까 부처님이 법화경에서는 없는 말도 많이 했다 아닙니까. 사실 없는 말도 많이 했습니다. 목적은 어디 있느냐? 중생을 깨우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아이 울음을 그치게 하는데 목적이 있지, 밖에 호랑이가 왔느냐 안 왔느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 상관없거든요. 밖에 호랑이가 왔든 안 왔든... 호랑이 한 번도 못 본 사람이 밖에 호랑이 왔다. 이러거든요. 그런 식입니다. 아이 울음만 그치게 하면 되는 거거든요.
그런 식으로 부처님도 중생의 마음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온갖 비유와 여기 無數方便(무수방편)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무수방편. 種種因緣(종종인연). 그리고 온갖비유. 온갖 이야기. 이걸 가지고 8만4천 법문을 했는데 이러한 것들이 다 一佛乘(일불승). “사람이 부처님이다.” 라는 깨우침을 위해서 하신 법문이다. 그렇거늘
汝何不省(여하불성)고→ 그대는 어찌하여 살피지 못 하는가? 깨닫지 못 하는가?
三車(삼거)는 是假(시가)라→ 아주 완전히 가짜다 이겁니다. 양거. 녹거. 우거. 성문. 연각. 보살. 이거는 가짜다 이겁니다. 없는데 괜히 設定(설정)해 놓은 것. 가설해 놓은 것이다 이겁니다.
爲昔時故(위석시고)며→ 옛날 때 옛날을 위한 것이다.
一乘(일승)은 是實(시실)이라→ 실다운 것이다. 是假. 是實.
爲今時故(위금시고)라→ 지금을 위한 것이다. “昔時” 라는 것은 그런 단계까지 오도록 하나의 과거의 방편이다. 이겁니다. 이 단계에 오면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이것이지요. 그건 옛날 것이고요. “일불승”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우리가 필요한 것이다.
只敎汝(지교여)로→ 다만 그대로 하여금
去假歸實(거가귀실)케함이라→ 거짓은 제거해 버리고, 실다운 것. 진짜. 알맹이에 돌아가게한 것이다.
歸實之後(귀실지후)에→ 실다움으로 돌아간 이후에는
實亦無名(실역무명)이다→ 실다움이라는 것은 그것도 또한 이름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부처라고 이름 붙이니까 부처지, 그것도 할 수 없이 부처라고 이름을 붙였을 뿐이지 언제 뭐 붙이라고 했나요? 그것도 그냥 假數(가수)라고요.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것도 “無名”이예요. 이름이 없는 것이다. 이겁니다. 본래대로 돌아가 버리면 뭐라고 굳이 이름 붙일 것이 없는 것이다.
應知所有珍財(응지소유진재)가→ 응당히 알아라. 꼭 알아야 될 것은 소유한 바 진재가
盡屬於汝(진속어여)라→ 모든 재산. 모든 보물. 외국에까지 잔뜩 투자한 것. 빚 줘 놓고한 것. 그것이 “珍財”거든요. 보물과 재산이 진속어여라. 전부 네게 돌아간다. 이것은 간단한 몇 글자이지만, 법화경의 궁자비유를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궁자가 어려서 아버지하고 헤어져서 한 50년이라는 세월을 거지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품팔이할 데가 있을까 하고 이집 저집 기웃거리다가, 어느 아주 거부장자의 집 문 앞에 가서 어슬렁거리게 되었지요.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 여기는 왕이 사는 덴가? 아니면 왕의 버금가는 그런 사람이 사는 곳 일거다. 그러니 저 위에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그쯤 될 것이다.
왕이거나 왕하고 거의 버금가는 사람일거다. 하고 기웃기웃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왕처럼 차리고 앉아 있던 사람이 그냥 버선발로 쫓아내려오는 것이 꼭 잡으러 오는 것 같거든요. 그래 도망가다가 기절해버린다고요. 그런데 그 왕처럼 내려다보고 앉아 있던 사람은 바로 이 아들을 찾기 위해서 50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리던 아버지예요.
오늘이나 만날까 내일이나 만날까 내가 재산을 이렇게 이 세상에서 제일 많은 재산을 가졌고, 곳곳에 논 밭 전지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창고에 보물은 가득가득하고, 외국에 투자한 것도 어마어마하게 많고, 이것을 전부 물려줘야겠는데 물려줄 자식이 있어야지요. 옛날에 잃어버린 그 자식하나 찾아야 될 판인데, 그러고 있는데 그 거지가, 보니까 옛날 자식이거든요.
그래서 너무 반가워서 그 아들에게 다 물려주기 위해서 쫓아갔는데 이 아들은 그것도 모르고, 워낙 거지생활만 하다 보니까 그냥 마음이 쪼그라들어서 기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왕이 나를 잡으러오는 줄 생각하고... 그래 그 아버지가 방편을 써서 하인들에게 네가 입고 있는 옷 벗어버리고 제일 떨어진 옷. 제일 못난 옷 입고, 거기다 얼굴에 흙까지 칠하고 저 사람한테 가서 방편으로 잘 구슬려서, 저기 어디 가면 품 팔데가 있는데 거기가면 품삯을 배로 준단다. 우리 거기 가서 일 하자. 그렇게 해서 그 집 어느 끄트머리 어디에 가서, 슬슬 품팔이를 하기 시작 했지요. 거부 장자가 자기 아버지인데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모르고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지요.
糞尿(분뇨)도 치우고 청소도 하고 그렇게 출입 하다가, 세월이 얼만치 가서 그 집 재산 상황을 알고 보니 어마마한 부자예요. 그 집 재산 상황을 다 알게 되고, 그 재산상황을 다 알게 되고는 나중에는 그 아버지가 왕도 부르고, 변호사까지 다 불러 앉혀 놓고는, 이 사람이 본래 내 아들인데, 오늘까지 이러고저러고 해서 이러한 상황이 됐다. 그러면서 재산을 전부 아들에게 상속하는 그런 잔치를 벌이게 되지요.
법화경에 있는 이야기인데요. 그것이 결국은 부처님이 깨달은 대로 중생들에게 그대로 물려줬는데. 설해줬는데 그것을 “화엄경”이라고 그러지요. 그 소리를 듣고 제대로 이해할 사람이 없다. 전부 기절했다. “窮子驚愕華嚴時(궁자경악화엄시)”라. 못난 자식이 경악해서 놀라 자빠졌다. 그것은 화엄경을 설하던 때다. 그렇게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그래선 안 되겠다싶어서 온갖 거짓말. 방편. 뭐 재미있는 이야기. 무슨 설화. 이런걸 잔뜩 그 좋은 머리로 다 꾸며내 가지고 근기를 성숙시키기 위해서 설법한 것이 아함12. 아함경 12년동안 아함부계통의 법을 설했다. 그것이 말하자면 “除糞定價阿含時(제분정가아함시)”라 그러거든요. 그 집에 청소해주고 거름 쳐주고 똥 쳐주고 품값을 받아서 겨우겨우 연명해 가면서 살던 그 시절이다. 그것이 아함경 설하던 시절이다.
그 다음에 出入自在方等時(출입자재방등시)라. 그렇게 청소를 하고 거름을 쳐주고 하다보니까 그 집에 이 구석 저 구석. 마음대로 출입하게 되었다. 이겁니다. 자유롭게 출입하던 때를 방등부의 경전을 설하던 때다. 그래서 8년간을 치지요. 8년간을 설한 걸로 그렇게 설정을 하고,
그 다음에 보물 내지 재산상황. 어디 논이 있고 밭이 있고, 외국에는 얼마나 투자를 했고 뭘 누구에게는 얼마나 빚을 줬고 하는 그런 재산상황을 싹 파악하게 된 시기를 令知寶物般若時(영지보물반야시)라 해서 21째 담반야. 반야경. 반야심경에서부터 금강경 내지 600권이나 되는 반야부 경전을 설하시던 때다. 해서 그건 21년간이나 걸렸다고 설정을 해요. 팔만대장경을 전부 그렇게 배대를 하면...
반야경은 보물. 부처님의 보물을 전부 다 파악할 수 있는 그런 경지다. 이것이지요. 그것은 대단한 경지입니다. 그래서 반야경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그거 제대로 하면 보물 다 아는 거니까요. 그런데 법화경은 보물을 아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 보물이고 재산상황이고. 일체재산을 전부 자기가 물려받아서 자기 앞으로 등기한 겁니다. 그것이 법화경을 설하던 때다. 법화. 열반. 열반경까지 그 속에 해당이 됩니다.
그것을 “종담법화우팔년”해서 마지막에 법화경을 또 8년간을 설했다. 그런 식으로 팔만대장경을 전부 배대를 하는데, 최후로 비장해 두었던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것은 보살들만 가르친. 가장 수준 높은 사람들에게만 가르치는 것. 그리고 이것은 정말 내가 아껴두었던 가르침. 이렇게 법화경에서 상당한 시간을 뜸을 들여요. 그러면서 5000명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래서 正實(정실)만 남았다고 그래요.
枝葉(지엽)은 다. 잎은 다 날아가 버리고 알맹이만. 정말 내 이야기를 제대로, 내 가슴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들을 사람만 남았다. 그러고 나서 한 소리가 뭔고 하니 결국 一佛乘(일불승). 白牛車(백우거)이야기. 일불승이야기라고요. 사람이 모두 부처님이다 하는 그 이야기라고요. 그 전까지는 그 이야기 못했어요. 물론 화엄경에는 그 이야기가 있지요. 화엄경에는 곳곳에 그 이야기가 있습니다.
화엄경에는 “천지만물. 삼라만상이 다 부처님이다.” 라고 이렇게 나가니까 더 말할나위도 없고요. 그래 법화경이 唯有一佛乘(유유일불승). 그 다음에는 온갖 별별 이야기가 많지만, 無數(무수)한 方便(방편)으로한 이야기가 많지만, 결국은 뭐냐? “일불승을 위해서다.”그랬습니다. “이승”이니 “삼승”이니 사람들의 근기에 맞추느라고. “이건 전부 방편설이다.”이겁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되어있는 것이 법화경의 전체 줄거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여기에 간단하게 뭐라고요?
應知所有珍財(응지소유진재)가→ 꼭 알아라.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보물과 재산이 盡屬於汝(진속어여)라→ 전부 너에게 속했다. 너에게 등기가 다 올라갔다, 이겁니다. 그때는 무슨 상속세도 없는 때입니다. 지금에야 상속세가 8~90% 된다고 하지만, 그때는 상속세도 없이 그냥 주면 다 그냥 자식이 물려받잖아요? 盡屬於汝라. 다 너에게 속했다.
由汝受用(유여수용)하되→ 너의 수용을 말미암되, “네 마음대로 수용한다.”이겁니다.
更不作父想(갱부작부상)하고 亦不作子想(역부작자상)하며→ “내가 아버지다.” 뭐 아버지한테 물려받았다고 해서 지가 아버지라는 생각도 아니 해요. 그리고 또 자식이란 생각도 짓지를 아니해요. 그냥 “나”일 뿐입니다. “나”일 뿐이라고요. 그것이 중요한 말이지요. 그냥 “나”일 뿐이다. “나”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지 거기서 뭐 아버지다 자식이다 어떤 차별을 두면 또 문제가 복잡해져요.
亦無用想(역무용상)이라→ 또 쓰되 쓴다고 하는 생각. 재산을 수용하되 수용한다는 생각도 없다.
是名持法華經(시명지법화경)이다→ 이것이 이름이 법화경을 가지는 것이 된다. 여기서 “가진다.”고 하는 말은 법화경을 제대로 읽는 것이 된다, 이겁니다. 법화경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것이 된다. 참 육조스님법문이 대단해요. 是名持法華經이라.
從劫至劫(종겁지겁)토록→ 겁으로부터 겁에 이르도록, “수많은 세월동안” 그 말입니다. 수많은 세월동안
手不釋卷(수불석권)→ 이것은 유교에 있는 말입니다. 手不釋卷이라.
손에는 책을 놓지 않았다. 공자가 그랬지요.
가장 좋은 태도. 공부하는 사람들의 가장 좋은 태도를 學不而厭(학불이염) 敎不倦(교불권). 배우기를 싫어하지 아니하고, 가르치는데 게으르지 아니했다. 공자와 맹자 같은 이는 學不而厭 敎不倦이라. 여기는 전부 그런 분들이지요. 배우기를 싫어하지 아니하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참 정말 좋은 말이지요. 學不厭(학불염) 敎不倦(교불권).
從晝至夜(종주지야)토록→ 낮에서부터 밤에 이르도록
無不念時(무불념시)니라→ 생각하는 때가 있지 않다. 말하자면 굳이 시간을 정한다던든지 그런 것이 아니라 통째로 밤낮없이 그대로 법화경속에 산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경을 꼭 가져야 手不釋卷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는... 영원한 세월을 법화경속에 산다, 이겁니다. 그쯤 되면 법화경 경자 하나 몰라도 상관없고요. 법화경이 몇 장 있는지 알 턱도 없고요.
從晝至夜(종주지야).→ 낮에서부터 밤에 이르도록 시간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도 전혀 시간이 없이 그대로 법화경속에 사는 것이지요. 진짜 그쯤 되며는...
達(달)이 蒙啓發(몽계발)하고→ 啓發해줌을 입고,
踊躍歡喜(용약환희)하야→ 아주 뛸듯이 기뻐해서
以偈讚曰(이게찬왈)→ 게송으로 찬탄해 말하기를, 자기도 게송으로 뭔가 한 마디 하는 것이지요?
(법달의 게송)→ 誦經三千部(송경삼천부)가→ 경 외우기를 3000부나 했는데,
曹溪一句亡(조계일구망)이라→ 조계산. 육조스님이 조계산에 계셨다고 해서 조계라고 표현해요. 조계산의 육조스님 한 말씀! 한 구절에 다 없어져 버렸다. 깡그리 없어져 버렸다. 법화경을 3000부나 읽었는데, 3000번이나 외웠는데 육조스님의 한 말씀에 그냥 깡그리 없어져 버렸다, 이겁니다.
조계일구망 이로다. 未明出世旨(미명출세지)하면→ 출세의 뜻을 밝히지 못하면, 寧累生狂(영누생광)이리오→ 어찌 누생동안 미친 삶을 쉴 수 있으리오? “출세의 뜻을 밝히지 못한다.” “출세의 뜻”이라는 것은, 이분의 표현으로는 어떤 “깨달음”이지요. 법화경의 진정한 뜻. 자신이 부처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돼요. 이것이 출세입니다.
자기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내가 중생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그것도 한두 해 미친 것이 아니고, 한생 두 생 미친 것이 아니고, 누생광이예요. 累生狂. 오랜 생을 거듭 하면서 정신 이상자. 정신 이상자로 살아온 그것을 쉴 길이 없다. 어찌 누생을 미친 것을 쉴 수 있으리오?
능엄경에서 그런 표현으로서 자기 얼굴 가지고, 얼굴 잃어버렸다고 거울을 보고는, 여기는 이렇게 이쁜 얼굴이 있는데 내 얼굴 어디 갔는가? 어디 간 적이 없거든요. 그렇게 찾는 거와 마찬가지로 將頭覓頭(장두멱두)라.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머리를 잃어버렸다고 찾는 거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현재 그 상태에서 부처가 아니고, 따로 “부처를 이루어야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머리위에다 머리하나를 더 올리는 격이다. 이런 아주 간단명료하면서도 의미심장한 표현들이 많아요. 법화경에서 참 좋은 것이...
근래에 제가 더 아주 법화경을 좋게 생각하는 이유가 좀 더 이해가 깊어지니까 그런지 좋게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런 내용들이 참 좋 찮아요?
唯有一佛乘(유유일불승)이라고... 살펴보니 아무것도 없어요. 누가 보살이고, 누가 성문이고, 누가 역사적으로 서산 사명이 성문이고, 무슨 원효 의상이 연각인가요? 아니면 임제나 황벽쯤 되면 무슨 보살이고요? 그거 없어요.
역사상 누구를, 성철스님쯤 되면 뭔가요? 성문 인가요 연각 인가요 보살인가요? 누구도 거기에 뭐라고 명명할 수가 없어요. 하게 되어있지 않아요아예. 그런 것이 당치도 않는 말이라고요. 그리고 또 그렇게 이름붙인 경우가 없습니다. 혹 이런 말이 있어요. 원효스님은 “8지보살이다.” 이런 말 간혹 있어요, 어쩌다가...
또 옛날에 어떤 스님은 평생에 옷에나 몸에 때가 안 낀다네요? 그래서 “離垢地(이구지) 보살이다.” 이구지는 제 2지인가 그래요. “이구지 보살에 올랐다.” 그런 이야기는 떠돌아요. 그런 이야기는 간혹 있지만 그거는 제대로 검증된 이야기는 아니고요. 어떤 수행을 얼마만치 했다고 해서, 거기에 특별하게 붙여지는 이름이 있고 그런 것 없습니다.
그냥 잘나면 잘 난대로 부처고 못 나면 못 난대로 부처예요. 그저 모순이 있으면 모순이 있는 대로, 번뇌가 있으면 번뇌가 있는 대로, 탐욕이 좀 있으면 있는 대로, 좀 덜하면 덜한 대로 그대로 부처라고요. 그것을 알아야 돼요. 이것이 법화경의 이야기는 그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 와 닿는 겁니다. ‘아이고 내같이 이렇게 모순이 많고, 번뇌 망상 투성이고 그냥 눈만 떴다하면 탐욕이고, 성 잘 내고 소견 좁고 이런데 뭘 어째서 부처라고 하는가?’ 이런 생각이 앞을 탁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소견 좁으면 좀 어때요? 소견 좁으면 좁은 대로 부처로 봐 줘야 됩니다. 거기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헤매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주 이쁘고 잘 생기고, 지혜총명하고 탐욕심 하나도 없고,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 까지 아니, 죽는 것도 없고, 그냥 일생에 아주 모범적이고 아주, 아주 모델로 정말 멋지게 남의 표본이 될 만한 삶만 살아온 인생이 부처다.’ 이런 생각만 자꾸 하는 거예요. 그럼 석가모니 같은 이는 부처님 자격이 없어요.
태어나고 7일 만에 어머니 잃어버린 부처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런 불우한 부처는 없는 거예요. 우리가 상상하는 부처님은 그런 불우한 부처님은 아니라고요. 그런데 그분은 부처님이잖아요. 제일 모범 부처님이잖아요. 그 분이 제일 표본이고요. 그걸 알아야 돼요. 그럼 그대로 다 부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고 급한 일이고 또, 바른 소견입니다. 正知見(정지견). 바른 소견이지요.
법화경의 이야기가 그겁니다. 오늘 법화경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드리는 말씀인데, 그렇습니다. 그래 累生狂(누생광)을 언제 쉬겠느냐? 이겁니다. “미친 짓이다.”이겁니다. 미친 짓...
羊鹿牛(양녹우)는→ 양거. 녹거. 우거는
權說(권설)이오→ 방편으로 施設(시설)한 거다, 이겁니다. 權說. 방편 권자입니다. 방편으로 시설한 거다. 방편으로 왜 이 權(권) 씨라는 권자. 이것이 또 저울대 權(권)자거든요? 저울은 상대의 무게에 따라서 오르락내리락 하잖아요. 저울추를 갖다가 맞추는 대로 가는 거예요. 그것이 방편입니다. 방편으로 시설한 것이고,
初中後(초중후)는 善揚(선양)이라→ 잘 드날린 것이다. 처음과 중간과 방편으로 절차를 시설해 놓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참으로 잘 드날리는 것이다.
誰知火宅內(수지화택내)가 元是法中王(원시법중왕)이리오→ 누가 이 火宅의 속이,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지요. 인간이 사는 이고해요. 火宅. 불타는. 불이 활활 타는 이 시시비비로 들끓는 이 火宅의 속이, 法中王. 법 가운데. 진리 가운데 왕이라고 하는 것. 원래로 본래로 진리 가운데 왕이 있는 그 자리라고 하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誰知! 참 멋진 게송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온갖 부정부패. 모순과 희로애락 투성이인 이 삶 자체가 그대로... 法中王은 누굽니까? 부처님! “부처님의 삶이다.”이겁니다. 부처님이 사는 곳은 극락세계입니다. 부처님이 사는 곳은 바로 진리의 세계입니다. 그것이 원래로 元是法中王(원시법중왕)이다. 그랬어요. 원래 法中王이다. 처음부터...
따로 어디 멀리 비행기 타고 가서 어느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불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이 고통. 바로 이 현실이 그대로 진리의 세계. 극락세계. 부처의 세계다. 원래부터. 元是法中王이다.’ 이라고 하는 사실을 누가 알았겠는가? 법달 스님이 깨닫고 나서 확실하게 게송을 여기서는, 저 앞에: (51강) 보다도 여기서는 더 분명하게 표현이 되었습니다.
師曰(사왈) 汝今後(여금후)에→ 육조스님이 말하기를 그대는 지금부터,
方可名念經僧(방가명념경승)이다→ 제대로 경을 외울 줄 아는 중[僧(승)]이다, 라고 이름 할 수 있다 이겁니다. 그전에는 뭐라고요? 經念僧(경념승)이라. 경이 이 스님을 생각하는. 경이 이 스님을 외우는 中이고, 지금은 경을 외우는 중[僧]이다.
達(달)이 從此領玄旨(종차영현지)하고→ 법달 스님이 이로부터 玄旨. 아주 현묘한 깊은 뜻을 알고,
亦不輟誦經(역불철송경)이러라→ 그러고도 또한 경 외우는 일을, 誦經하는 일을 거두지 않더라. 그렇지요. 그것이 자기 삶인데... 깨달았다고 경 외우던 일을 하루아침에 집어던질 일도 없지요. 깨닫고나 봐야 계속 그 삶이지요.
숨 쉬고 밥 먹고 잠 잘 때 되면 자고... 또 평생에 경을 외웠으니까 또 어제처럼 여전히 앉아서 경 읽는 것이지요. 깨달았다고 뭐 특별히 달라지는 것 없어요. 그 스님이 이 세상을 느끼는 것이 다르고, 세상을 보는 것이 다르고, 자기가 자기 인생을 보고 느끼는 것이 다를 뿐이지요. 그렇다고 생활이 달라질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또 그 보다 더 좋은 생활이 없고요.
평생 경 읽으면서 살아 왔으니까요. 그리고 인연이 닿아서 자기한테 와서 이렇게 육조스님처럼 제자들이 많이 따라와 가지고, 제대로 교화를 펼 수 있는 인연이 되면 펴고, 인연이 안 되면 말고... 그랬어요. 옛날 깨달은 스님들 보면... 법달 스님이야기로써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첫댓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_()_
한 구절 도와주신 천하정님! 감사합니다. _()_
誰知火宅內(수지화택내)元是法中王(원시법중왕)이리오. 이 火宅의 속이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지요. 인간이 사는 고해요. 火宅. 불이 활활 타는 이 시시비비로 들끓는 이 火宅의 속이, 法中王. 법 과 진리 가운데 왕이라고 하는 것. 본래로 진리 가운데 왕이 있는 그 자리라고 하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온갖 부정부패. 모순과 희로애락 투성이인 이 삶 자체가 그대로 法中王은 누굽니까? 부처님(우리)의 삶이다......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_()()()_
元是法中王이다...원래 법중왕,부처다.( 현실이 그대로 진리,극락,부처의 세계다.)...대원성님,고맙습니다.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_()()()_
未明出世旨하면... 출세의 뜻을 밝히지 못하면, 寧累生狂이리오 ...어찌 累生 동안 미친 삶을 쉴 수 있으리오 ... 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 _()()()_
誰知火宅內가 元是法中王이리오...불이 활활 타는 이 시시비비로 들끓는 이 火宅의 속이 원래로 진리 가운데 왕이 있는 그 자리라, 바로 부처님의 삶이다...대원성님, 고맙습니다. _()()()_
_()()()_
誰知火宅內가 元是法中王이리오...불타는 이 火宅의 속이 원래로 진리 가운데 왕이 있는 그 자리라고 하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대원성님,수고하셨습니다.._()()()_
감사합니다. 수고롭게 녹취해 주신 덕분에 알뜰히 공부합니다 _()()()_
마니주님! 저요, 참 신통방통 합니다. 뭐냐면 다른 사람의 글은 오타든지 틀린글이 잘 보이는데 제 것에는 안 보이거든요, ㅎㅎㅎ 마니주님을 철썩같이 믿겠습니다. _()_
저 역시... ㅎㅎㅎㅎ _()()()_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_()()()_
마하반야바라미ㄹ()()()
감사합니다 _()()()_
법화경의 진정한 뜻. 자신이 부처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_()()()_
_()_
삼배 올립니다
皆爲一佛乘이라했지 않습니까? 다 일불승을 위한 것이다. 무슨 이야기든지... 種種因緣과 譬喩言詞가 無數한 方便.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誰知火宅內 , 元是法中王 ......
이 삶 자체가 그대로 진리의 세계라..._()()()_
깨달았다고 뭐 특별히 달라지는 것 없어요. 그 스님이 이 세상을 느끼는 것이 다르고, 세상을 보는 것이 다르고, 자기가 자기 인생을 보고 느끼는 것이 다를 뿐이지요. 그렇다고 생활이 달라질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또 그 보다 더 좋은 생활이 없고요. ...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
인연이 되면 펴고 인연이 안 되면 말고 ...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唯有一佛乘 _()_ _()_ _()_
인연 닿는 대로 산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_()_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_()()()_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