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전쟁 100년사 (地圖 戰爭 100年史) 지금부터 100년 전 일본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제작한 조선반도 5만분의 1 지형도는 국가의 기본도로 일본군에 의하여 만들어지는데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주의 팽창의 일환으로 중국, 조선을 상대로 한 전쟁에 대비하여 조선의 침략과 합병, 강제 수탈의 목적으로 가장 중요한 기초인 지도(地圖)를 제작한다. 이들은 군사용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육군성 참모본부 소속의 첩보 장교들로 조직된 간첩대가 한반도에 침투 비밀측량을 목측에 의해 은밀하고 신속하게 노상측도를 한다. 최초로 1882년 일본군 중위 이소바야시가 시도하고, 이후 1883~1887년 간첩대가 우리나라 전역을 노상측도하며 이를 바탕으로 1:50,000 노상측도와 목측신속도(目測迅速圖)를 1898년에 제작하였다. 이후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승리로 1910년 8월 29일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고 식민지 통치하는데, 1910년 6월부터 1915년까지 삼각측량을 하였고, 1913년부터 지형 지물측량을 하였다. 1915년 제도와 제판 작업을 마치며 1918년에 조선반도 전역의 5만분의 1 지형도 722도엽을 완성하였다. 이 지도는 1898년에 발행한 조선 목측신속도를 바탕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아 일본의 조선 침략과 약탈 목적으로 제작된 지도인데 그 상세함은 놀라움 그 자체이다. 관공서 행정기관은 물론 논, 밭, 과수원의 경계, 마을의 모양, 작은 산, 침엽수, 활엽수, 산사태 지역, 문화재, 사찰, 하천, 모래, 신사 등 여러 가지 현황이 상세히 표시되어 구한말 당시 조선의 지리적 상황을 완벽하게 그려 놓았다. 예로, 지금의 금산군 금산읍 양전리, 음전리는(陽田里ヤムヂ ハツ トル)로 양지밭들, 음지밭들로, 추부면 평촌(坪村ポル マル)은 본말로 표기하여야 하며, 금산읍 새골은 신학(新鶴セツ ユル), 닭이봉은 계봉(鷄峰タルギ ボン)이라 쓰고 괄호 속에 음을 가타카나로 표기하였다. 또 금산읍 남산 232m의 서북쪽에 신사를 표기하는 등 한문과 일본어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오기나 음역한 부분이 있으나.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도와 비교해 보면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여 이들의 치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00년 전 우리 땅에 대한 최초의 실측지도 “조선반도 5만분의 1지도”는 귀중한 자료이나. 일제에 의해 제작되어 질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과 우리 민족의 비극은 돌이킬 수 없는 수모라 아니할 수 없다. 2015.2.5 동아지도 대표 안동립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