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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교도 아카데미 원문보기 글쓴이: 강대식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된 교회』, 부흥과개혁사, 2001
마이클 호튼의 『세상의 포로된 교회』는 호튼의 대표적 저서입니다. 1994년에 출간되어 1995년 미국 복음주의 출판협의회가 선정한 ‘기독교와 사회’ 부문 금메달을 수상한 뛰어난 작품입니다. 이 책의 강조점은 개혁의 일차적인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이며, 교회 개혁 내용의 일차적인 과제는 도덕이 아니라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호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개혁의 일차적인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다. 그리고 교회 개혁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행동의 개혁이 아니라 생각의 개혁이다.” 호튼은 21세기 예레미야로서 이 책에서 현재 복음주의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그 대안으로 주기도문에 담긴 진리로 돌아갈 것을 외치고 있습니다.
호튼은 이 책의 1부에서 현재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가장 심각한 질병은 세속화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즉 현대 복음주의자들이 세속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으며, 교회가 깊이 세속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속화된 교회는 세상의 정치와 문화와 도덕의 좌·우편에 둘러리를 서서 서로 싸우고 있으며 그러는 사이에 교회의 복음은 사라져 간다고 말합니다.
세속화란 무엇입니까? 세속화의 가장 큰 특징이 ‘인간중심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복음주의 교회는 세상 못지 않게 인간중심적이 되어 버렸다고 한탄합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가 세속화 되었을까요? 호튼은 교회 세속화의 근본 원인이 교회가 세속주의의 정확한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채 무분별하게 기독교 국가 건설의 허망에 빠져 있으며, 구원과 창조의 관계 즉 특별 은혜와 일반 은혜의 관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그렇다면 세속화의 포로된 교회, 세상의 문화에 포로된 교회가 어떻게 다시 구출될 수 있을까요? 호튼은 2부에서 세속화된 교회가 다시 거룩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주기도문의 진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즉 주기도문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만이 세속주의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임을 강조합니다. 주기도문의 전반부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것만이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호튼은 주기도문이 전반부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후반부에는 인간의 양식, 죄 용서, 영적 전투에 대한 내용을 함께 말해 주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과, 일반 은혜와 특별 은혜에 대한 균형 있는 강조를 해주고 있다고 봅니다.
교회와 세상은 항상 줄다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복음화 하려고 하고, 세상은 교회를 세속화 시키려고 합니다.
- 백금산 목사(예수가족교회)의 추천의 글에서
개인의 필요와 행복과 체험이 진리가 되고 있다
과거에 설교들은 죄와 은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제 설교들은 종종 중독, 회복, 느껴지는 필요들 및 여타의 심리학적 범주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예일 대학교의 신학부 교수인 조지 린드베크(George Lindbeck)는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의 시절에는 성경을 우롱하기 위해 자유주의적인 청중이 필요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로버트 슐러의 경우가 시사하고 있다시피, 자칭 보수주의자들이 성경을 말아먹고 있다”고 쓰고 있다. 실제로, 슐러는 죄에 대한 전통적 이해는 “인간존재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워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종교개혁의 신학은 죄의 핵심이 자긍심의 결여라는 점을 명확히 하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문제는 더 이상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이 아니라 “어떻게 내가 행복할 수 있는가?”이다.
종교의 최대의 이슈는 더 이상 “어떻게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내가 내 자신을 받아 들일 수 있는가?"이다. 슐러에게 있어서 지옥은 "자존심의 상실(the Ioss of pride)"이다. 지옥은 전혀 수직적인(즉 하나님을 향하는) 차원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자존심의 궁극적이며 확실한 원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이루시겠지만 말이다. 제임스 헌터는 복음주의가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수준으로까지” 자아에 대한 세속적 개념들을 취하고 있으며, “인간 본성의 의미가 이런 식으로 변질되어서, 전통적 개신교의 하부 구조가 침식될 정도”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제임스 헌터는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이 그들의 신학에 대해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아예 신학 자체에 대해 의심스러워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면에서는 성경에 대한 고상한 견해들을 팔아먹고 있지만, 보수적 크리스천들은 교회에 나가지 않고 떠도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비록 개별적이기는 하지만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만 활발히 유지하고 있다면, 교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아마도 ‘약발이 먹히고’ 혹은 ‘느낌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그 진리를 뒷받침해 주는 어떤 개인적인 체험에 근거해서 자기들의 신앙을 변호하려고 할 것이다. 루프(Roof)가 지적하고 있다시피, 크리스천들을 비롯해서, 현대인들은 “다른 이유가 아닌 그 체험의 ‘내재성’(inwardness)과 ‘내부성’(within-ness) 때문에, 직접적인 체험이 언제나 더 신뢰할 만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내재성과 내부성이라는 “이 두 가지 속성은 지극히 자기 표현적이며 자기 연민에 빠진 문화에서 크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 ‘간증’ (예수님이 내게 해 준 일)과 개인적인 체험들은 흔히 오늘날 복음주의 진영 가운데서 진리에 대한 가장 권위적인 텍스트가 되고 있다. 만약 무엇인가를 체험했다면, 그것이 진리가 된다. 이것 역시도 세속적 정신에 대한 승복이다. 왜냐하면 권위의 자리를 자아 가운데 어느 곳엔가 두고 있기 때문이다. (pp 85-87)
개인의 영적인 자서전이 나사렛 사람의 생애와 시대를 대신해 버렸다
전통적 복음주의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종교개혁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지만, 자기 연민과 주관주의의 압력들은 예배의 대상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자아를 바꾸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실재에 대한 해석상의 권위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자아와 바꾸어 놓았다. 성경이 하나님의 성품(고유한 신학)과 사람(인간론)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동(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에 대한 명제적 진술들로 가득 차 있는 한, 신학에 대한 거부는 곧 성경에 대한 거부다.
성경은 하나님과 자아와 인생 및 역사의 의미에 대한 핵심적인 물음들에 대해 단호하게 선언한다. 성경은 궁극적인 문제와 그 해결을 우리가 정의해 나갈 때 우선적인 결정권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사태들을 정의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신학이다. 만약 우리가 신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나 계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신문이나 텔레비전이다. 그것들이 우리의 실재,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게 된다.
복음주의자들은 융과 매슬로(Maslow)가 “휴머니즘(인본주의)적인 심리학” 아버지들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되려 기독교계의 출판물이나 설교, 방송사업 전체가 “마음 안에 있는 신”과 인격적이며 주관적이며 내부지향적인 체험에 쏠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역한 우리의 객관적인 죄와 죄책을 위해 거의 이천 년 전에 예루살렘 성 밖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는 일은 이제 멀리 사라져 버렸다. 이제 만약 종교라는 것이 어떤 ‘실천적인’ 의미를 가지려고 한다면, 종교는 나 자신을 좀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나를 내 속으로 들여보내 주어서, 영적인 체험들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간증들’을 생각 보라. 개인적인 체험들을 ‘나누는 일’이 공동기도와 공동 성경 연구, 예배와 증거를 대신하고 있다. 개인의 영적인 자서전이 저 나사렛 사람의 생애와 시대를 대신해 버렸다. 너무나도 흔히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행하심과 죽으심에 대해서보다는 목회자와 그의 삶이 성숙되는 것과 영성 캠프에서의 영적 위기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있다. 그런 사실은 토크쇼가 독서를 대체해 버리고, 우리가 실제로 알 수 있는 유일한 내용은 우리 자신의 체험일 뿐인 그런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조차도, 객관적인 진리로부터 후퇴하고 있는 현대 문화에 타협하고 있는 현실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제임스 헌터는 우리가 ‘알려진’ 것들로부터 ‘신념’으로 이동했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그 궁극적인 목적지인 ‘감정(느낌)에 도달하기까지 ‘종교적 견해’로 저락(低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초대 교회가 ‘그렇게 기록되었다.’ 는 확신을 변호했으며, 중세 교회가 ‘교회가 그렇게 말한다.’는 확신을 변호했다면,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은 흔히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슬로건에 호소하고 있다.
오늘날의 요구는 설교가 반드시 ‘실천적’이어야 하며 매일의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목표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며 인생을 좀더 성취하는 삶인가를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제임스 헌터가 지적하고 있다시피,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 선포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진리의 주관적 적용에 대한 관심으로 강조점이 변천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 구절이 무슨 뜻인가?’ 를 묻지 않고 “이 구절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묻고 있다. 자아는 만물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만물의 척도’가 되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바로 ‘세속적 휴머니즘’의 정의라고 한다면, 복음주의자틀은 다른 것들은 몰아 내고 있으면서도 이 미끼만은 꿀꺽 삼켜 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구속 자체에 대하여 변하고 있는 정의들에 대해 우리의 눈길을 돌리도록 만든다. 죄가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범죄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라고 재정의되고, 구원이 세속주의의 사상들에 따라, 심리학적인 범주 안에서 재정의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는 옛날 문제들을 대신해서 전적으로 새로운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 문제들에 맞추어 새로운 해결책들이 등장하고 있다.
만약 죄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서는 것이 문제라면, 속죄와 칭의가 그 해결책이다. 그러나 만약 기능 장애와 낮은 자긍심과 채워지지 않은 필요들이 궁극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해결책들은 신학적 용어로가 아니라 치유적 용어로 진술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저 현대의 청중을 위해 기독교 메시지를 ‘상황화’ 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현대의 청중에 맞추어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확하게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다 미국인 인구의 다섯 명 가운데 네 명 이상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선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은 저 밖에 있는 ‘세속적 휴머니스트들’일 뿐이지 않은가? 아니다. 그렇지가 않다. 복음주의 정통성을 구성하는 ‘중생한 크리스천들’ 의 77%가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런 세속적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구원에 이르면, ‘중생한’ 복음주의적 크리스천 다섯 명 가운데 네 명은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들을 도우신다”라고 믿는다. 실제로는, 복음주의자들이 비기독교들보다 이런 ‘자수성가 하라.’는 자력 성공 프로그램에 더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구속받는 일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신의 선함에 의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진정, 이런 생각의 틀 가운데서는 예수님은 그저 일종의 도덕적인 안내자로서의 역할 외에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이것이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이며 세상에 있을 때는 세속주의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우리 복음주의자들에게 조지 바나가 “우리 교회들에서는 현재 구원의 본질에 대해 어떤 가르침들이 가르쳐지고 있습니까?” 라고 한 질문을 물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pp 87-92)
‘간증들’ 은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삼푸 선전과 얼마나 다른가
복음주의가 더 대중적이 될수록 복음주의는 점점 현대 세계의 모양을 띄게 되고, 그 자신이 바꾸고자 노력하고 있는 바로 그 문화의 포로가 되어 간다. 복음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이웃들이 거리의 한쪽 구석에 성인용 도색잡지 서점이 하나 열리기를 바랄 경우 세속주의가 침범해 들어왔음을 인식할 수는 있지만, 자신들의 신념들과 전제들과 전략들이 세속적인 태도들과 세속적인 확신들에 휘돌아가고 있을 때는 그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교회는 도전보다는 일반 사회를 더 많이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뒤범벅이며 일반 사회만큼이나 혼란스럽다”(쥬드 다우거티). 복음주의 교회들이 얼마나 크게 시장에 의해 지배 당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우리의 ‘간증들’은 텔레비전에 등장하고 있는 삼푸 선전과 얼마나 다른가? 둘 다 실용주의(‘내게는 효과가 있었으니까 당신도 한번 써 보라’)와 나르시시즘(자기 성취)에 근거해 있다.
사도들의 증거는 이것이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합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바 된 이시니라”. 그들의 증거는 ‘가슴속에 타오르는 열정’이나 위기 체험이 아니라 법정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증언이었다. 그 증언은 성육하신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던 한 사람의 기적들과 교훈들과 죽음과 장사된 일과 부활하고 승천한 일에 대하여 증인된 삶을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의 정상적인 증언이었다. 우리의 주관적인 증언이 아니라 바로 이 증인들의 증언이 우리 교회들과 전도에서 최우선적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것이다.
존 리스의 말이다. “많은 설교들이 도덕적인 권면들이다. 이런 도덕적인 권면들은 로타리 클럽이나 키와니스 클럽에서 훨씬 더 세련되게 전달될 수 있는 권면들이다. 많은 설교들이 사회에 대한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판단들이다. 그런 판단들은 정치 집회들에서 훨씬 더 큰 지혜와 열정을 가지고서 제시되고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많은 설교들이 개인적인 치유를 제공하고 있는데, 이것들도 잘 훈련받은 심리치료사들(정신과 의사들)이 더 잘 제공해 줄 수 있는 것들이다.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으나 설교자만이 가질 수 있는 -교회만이 가질 수 있는-유일한 기술은 신학이다. 특별히 설교와 가르침과 목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와 교회가 세상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기술이다. 다른 곳에서 더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누가 교회에 오겠는가?”
우리는 지금 초월성을 가지고서 세속주의와 대결하고 수직적인 차원(하나님)을 가지고서 수평적인 차원(자신과 타인들)과 대결하는 대신에, 오히려 세속과 수평적 차원을 가지고 놀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점에 있어서 그다지 영악스럽지도 못하며 잘하지도 못해서 우리가 ‘적절한 연계성’을 찾아 달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연결점을 상실하고 말았다. 교회는 이 부질없는 세대가 경합하고 있는 목소리들을 뒤쫓아 다니기를 중단하고 우리 자신의 마음 속보다는 훨씬 더 실재적인 다른 곳에서 흘러나오는 찬란한 금빛 곡조를 들을 때에만 세상과의 연계성을 찾게 된다. (pp 97-100)
세속주의는 세상 뿐 아니라 교회까지도 포획했다
만약 교회가 하나님 중심적인 방식으로 인생의 모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결단코 세상이 아니다. “아, 예, 그것은 그저 신학일 뿐이구요. 나는 그냥 예수님만 사랑하기를 원해요" 라는 말은 오늘날의 교회 가운데서 아주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신조들과 고백들과 일반 교리들을 상당히 비실제적인 범주로 치부해 버리고 포기하면서, 크리스천들은 비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큰 그림’을 맞추는 작은 그림 조각들을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생각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 섭리, 기적, 죄와 구속, 역사의 의미, 교회의 맥락에 기초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사회에서 이런 신학적 추구를 대신하게 되었는가? 많은 사회학자들과 역사가들이 지적하고 있다시피, 사물들을 이름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은 근대성(모더니티)과 이제는 후기 현대성(포스트모더니티)의 세력들이다. 죄는 기능 장애 혹은 자긍심의 결여로 이해되고 있다.
왜냐하면 심리 치료의 혁명이 이제는 그와 같은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명령권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한 가지 특정한 시장을 타켓(target)으로 삼도록 설계된 ‘사용자 편의를 위주로 하는’ 기업이다. 왜냐하면 경영 혁명이 그와 같은 것들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문화 전쟁은 이미 일어나 있었으며 ...... 그리고 승리했다. 세속주의가 세상을 포획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까지도-심지어 복음주의자들까지도-포획했다.
세속주의는 교회로부터 기독교 신학을 무장해제시켜 버림으로써 승리했으며, 세대마다 전해 내려왔던 믿음을 개인의 체험으로 바꾸어 버림으로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초자연주의를 근대에 발명된 어떤 기계와 같은 일종의 도덕 체계로 바꾸어 버림으로써 승리했다. 올바른 버튼들을 누르기만 한다면, 심지어 하나님까지라도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중심적이며 세속화된 인식틀을 채택하지 않고서는 도덕성을 논할 수조차 없다. 교회는 그 자체가 그 중심부에서 세속적인 전제들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도덕적 혼란으로부터 ‘미국을 구할 수’ 없다. 상대주의와 공리주의적 실용주의를 절대적 도덕들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삼는 것은 어떤 상대주의자가 절대적인 진술들을 가지고서 상대주의의 참됨을 입증하려고한 것 만큼이나 어리석고 자기 모순적인 것이다.
세속주의가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 및 종교개혁과 부홍, 선포와 회심에 고정시키는 대신에, 우리 자신과 우리 나라와 우리 세계와 우리의 시간과 공간과 우리의 순간에 고정시키고 있음이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각 지역의 크리스천 서점들과 강단들과 주일학교 커리큘렴과 방송과 종교적 담화에도 확연히 드러난다. (pp 103-105)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에서 지혜와 순수성을 배워야 한다
구 로마의 귀족들과 교회 지도자들 간에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였던 어거스틴은 그의 대작인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을 써서 “하나님의 도성의 설립자보다도 자신들의 신들을 선호하는 자들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도성”을 변호하려고 시도했다. 어거스틴, “나는 인류를 두 줄기로 분류한다. 한 줄기는 인간의 기준을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며, 다른 줄기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두 도성이라는 말로 내가 뜻하는 바는 두 개의 인간 사회다. 하나는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서 다스리도록 예정된 사람들의 사회이며, 다른 하나는 마귀와 더불어서 영원한 처벌에 처해질 운명을 받은 자들의 사회다.”
크리스천들은 인간의 도성에 활발하게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그 도성을 도와 주고, 건설하고, 유지하며 그 열매를 즐겨야 한다. 왜냐하면 문명은 타락의 저주가 아니라 창조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물론 타락은 모든 지상적인 유토피아들을 끝내 버렸으며, 정부가 필요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성이 지상적인 영광을 초월하는 한, 그 성은 복음의 지식을 가지고서 무너져 내리는 제국의 조각을 헤쳐 나가면서 세상 끝까지 (비록 박해를 받을지라도) 당당하게 행진해 나간다. 제롬과 같은 많은 사람은 침략해 들어온 그 ‘야만인들’ 을 로마의 적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들을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오게 될 시민들’로 보았다.
어거스틴은 그 침공을 선교의 기회로 보았다. 그러나 제롬과 다른 사람들은 수도원 등지로 도피했으며, 여전히 여타의 사람들은 마치 로마가 하나님의 도성이라도 되는 양, 로마를 위해 싸웠다. 그렇지만 어거스틴은 땅끝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얼마나 빨리 기독교가 땅끝 까지 이를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그 침공은 교회를 위해서는 일종의 기회였다. 왜냐하면 교회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을 땅끝에까지 가지고 가야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어떤 특정한 문화나 제국을 변호할 사명이 없다. 헨리 채드윅, “어거스틴은 결코 로마제국의 이해관계들과 하나님나라의 이해관계들이 동일하다고 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를 공격했던 야만족들은 하나님의 도성에 반드시 적들은 아니었다. 새로운 야만족의 주인들을 개종시키는 일은 서방 교회의 임무일 수가 있었다" 결국, “인간의 참된 목적은 이 인생 너머에 존재하고 있으며 ...... 교회는 하늘의 나라를 위해 존재하고 있고, 오직 하나님만이 택함받은 자들을 아신다. 그래서 역사의 의미는 밖으로 드러난 사건들의 흐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와 구속이라는 감추어져 있는 드라마 가운데 있다고 어거스틴은 주장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 세계는 『하나님의 도성』만큼 더 지혜롭고, 시의 적절하며, 성경적으로 풍성한 기독교 고전을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초대 교회의 크리스천들이 한 편으로는 영지주의적이며, ‘피안적이며, 타세적인’ 수도원주의를 피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크리스천들이 국가를 떠맡는 일을 피했던 것처럼, 어거스틴은 복음의 순수성을 보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서방 교회가 두 왕국에 대한 건강한 성경적 견해로 향하도록 이끌고자 노력했으며, 그저 인간적이며 일시적인 세상적인 관점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통해 시대를 바라봄으로써 기회를 활용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pp 116-119)
인간의 왕국이 종교적인 열정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도달한 적은 없다
세기의 전환기에, 화란의 정치가이며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소위 영역 주권론(sphere sovereignty)을 주장했다. 수상으로 일하고 있었던 카이퍼는 예술과 교육과 과학(학문)과 교회와 가족과 같은 각각의 삶의 영역들이 그 자체의 고유한 성격과 사명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목적은 이 각각의 ‘영역’ 이 하나님이 정해 주신 각자의 기능을 성취할 수 있도록 그 영역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학교까지도 공무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정들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학부모-교사 회의만이 아니라 부모들이 모든 수준에 참여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부보다는 가정이 그런 문제들에 대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다수의 ‘영역들’에 대해 정당한 균형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부분적으로 우리가 전반적으로 정치가들에게, 특정하게는 대통령에게 부여해 준 권력 탓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대통령을 너무 사랑하고 동시에 너무 미워한다. 우리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서 그 다음에 그 우상을 때려 부수기를 좋아한다.
우리, 특히 크리스천인 우리는 큰 정부에 대해 불평하면서 대통령직을 과대평가하는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대통령은 기본적인 국내 정치의 목표와 우선 순위를 정하고, 다음 세기의 관료들을 임명하며, 외교 정책상의 목적들을 정하고 4년 동안 연설을 행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것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결코 중요치 않은 임무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궁극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임무는 아니다. 이들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지금껏 복음주의자들이 과장해 왔던 것이다.
카이퍼는 기독교가 특히 기독교에 대한 칼빈주의적인 표현이 세계관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자유와 정의와 시민적 선을 위한 세력으로서 자신을 입증해 왔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퍼 자신은 인간의 왕국이 세속적인 ‘진보’나 종교적이며 도덕적인 열정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도달한 적이 있었다는 환상을 결코 가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일반 은혜를 통해 이 세상 가운데 있는 악을 억제하시는데, 이런 일반 은혜에도 불구하고, 이 두 도성 사이의 ‘반립적 관계(antithesis)’는 언제나 그 둘 사이의 융합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의 타락의 운동을 억제할 수 있는 새로운 렌즈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이런 것이 ‘하나님나라’ 활동은 아니다. 그런 활동은 단순히 그 사회가 최악으로 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제재를 통해 그 사회를 보존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안목은 인간은 선하기 때문에 선한 사회적 구조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현대적 이단설을 너무 쉽게 수용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안목이다. 정치에서의 한 사람의 크리스천의 소명은 어떤 기독교적인 사회를 창조해 내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악을 억제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것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와 같은 부르심의 중요성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불의와 악을 억제한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회적이며 도덕적이며 정치적인 활동으로도 한 사회가 영적으로 다시금 바르게 형성될 수는 없다. (pp 130-133)
교육도, 예술도, 과학도, 구제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과 도덕성이 꼭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나치들도 매우 잘 교육 받았던, ‘서구 문화’의 문화적 보존자들이었던 것이다. 정부가 사람을 선하게 만들 수 없듯이, 교육은, 심지어 기독교 교육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들은 교육과 자기 자녀들의 교육을 열심히 추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육이 나쁜 자식들을 선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적어도 무지한 자가 좀더 잘 알 수 있도록 도와 주기 때문이다. 교육이 사람을 구속(救贖)해 줄 수 없다는 말이 곧 교육이 사람의 눈을 뜨게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술은 문화를 건설하도록 하나님이 주선 필수불가결한 선물이다. 그리고 예술은 타락의 산물이 아니라 창조의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좋은 정부나 좋은 도덕성이나 좋은 교육에 의해 구원받을 수 없듯이, 좋은 예술에 의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다.
예술의 목적은 사회를 개선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며, 개인을 개선시키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나치들은 병리 현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예술은 그 실용주의적인 용도를 위해, 도덕적 영향을 끼치기 위해 혹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은 세뇌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술이 좀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것이라는 믿음을 줄 수가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느 영역에 대해서도 마찬 가지다.
그 고유한 영역(자연 세계) 가운데서의 과학은 문화 가운데서 매우 유용한 목적에 기여해 왔다. 그러나 과학이 그 자체의 경계를 넘어 영적인 실재들을 설명하고 인생의 의미를 설명하려고 들 때, 과학은 두뇌 과학의 선구자인 존 에클스 경(Sir John Eccles)이 관찰했듯이, ‘하나의 미신’ 이 되어 버린다. 동시에 성경이 그 점에 대해 전적으로 함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이 지질학자들에게 지구의 나이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 역시도 목사로서의 영역의 한계를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홈리스(homeless, 부랑자들)를 도와 주고, 낙태하지 않도록 여인에게 상담 해주는 일은, 특히 그들이 크리스천일 경우, 우리 크리스천이 의당 개입해야 할 활동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활동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활동은 아니다. 그런 활동이 사회가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줄 수 있음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들 어 내고 말씀과 성령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것은 복음 자체다. 크리스천들은 두 왕국을 분명하게 구별하면서도 두 왕국 모두를 건설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pp 133-135)
인간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 사이의 구분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인간의 왕국 안에서의 영역 사이의 구분이다 그러나 두 왕국 자체 사이의 구분을 회복하려면, 두 왕국의 구별되는 본성, 목표, 목적, 사명에 대한 구분을 회복 하려면,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어거스틴의 시대에서 로마가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었듯이, 미국은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다.
도널드 블뢰쉬는 말한다. “하나의 교회로서 교회는 율법의 전파를 통해 사회에서의 중요한 도덕적 이슈들에 대해 말해야 한다. 교회는 방향들을 지적해야 하지만, 대체로 교회는 정치적인 지침을 제기해서도 안 되며 정책을 결정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
인간의 왕국(즉 문화)의 시민들로서 우리는 성경적으로 습득한 전망을 가지고서 우리의 소명을 탁월하게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비기독교인들이 설득 없이 그 전망을 수용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소금’ 이 되어 방부제 노릇을 하고, ‘빛’이 되어 죄와 구속의 드라마에 대한 열린 안목을 가져다주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oller)는 개혁파 목사였다. 히틀러를 반대했던 고백교회에서의 그의 리더십 때문에 그는 히틀러가 직접 관장하는 죄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묄러는 항상 강단을 영원한 진리를 설교할 기회로 사용했다. 그 영원한 진리들은 그가 직접적으로 그 국가 사회주의 체제를 비난했을 때 얻었을 효과보다도 더 깊이 임박한 위기에 대해 사람들을 더 흔들어 놓았다. 인간의 왕국 안에서 니묄러를 한사람의 영웅으로 만들었던 것은 그가 한 개인 시민으로서 행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의 설교는 그를 하나님의 도성에서의 한 사람의 신실한 사역자로 만들어 주었다.
세상은 교회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진정으로 그대의 전하는 메시지를 세상에 맞추어야 한다. 그대는 진정으로 그대의 신조를 현 세대와 조화있게 맞추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대는 다시금 영향력 있고 힘있게 될 것이다” 많이 듣던 소리가 아닌가?
거기에 대해 니묄러는 이렇게 응답하고 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소금이 어떻게 쓰여지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소금이 그 맛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전에 사용했던 오래된 슬로건을 적용하자면, ‘복음은 그 복음으로 남아야 하며, 교회는 그 교회로 남아야 하며, 복음적 크리스천들은 복음적 크리스천들로 남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제발 그 복음에서 독일적 복음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제발 독일적 교회 크리스천들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독일적’ 을 ‘미국적’ 으로 바꾼다고 한다면, 그의 시대의 국수주의적인 독일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니묄러의 메시지는 아마도 우리에게도 적절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은 덧없는 이데올로기와 자칭 중요한 로비스트와 정치가의 광적인 운동에 조금치도 의존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과 우리를 속여 정치가 진정으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라고 믿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계의 정기 간행물들이 성조기 게양대를 에워싸고서 기도드리고 있는 고등학생들의 사진을 실은 광고를 게재할 때, 두 왕국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치 못한다. 물론 우리는 우리 국가와 그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렇지만 기독교 국가(미국)에 대한 충성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속해 있는 거룩한 나라(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충성을 혼동하는 위험이 거기에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하나님을 시민 종교의 마스코트로 변질시키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
전국 복음주의자 연맹의 어떤 리더가 “만약 클린턴이 당선되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묻는 것을 들었을 때, 내가 “로마가 무너져 버린 이 때 교회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개탄했던 제롬의 말을 연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 언급은 정치가들의 힘에 대한 믿기 어려울 정도의 확신을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상의 왕국과 그 지상 왕국 안에 있는 어떤 특정한 의사 일정의 성공을 그리스도의 나라와 혼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성의 성공을 위해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성령만을 의지하면서, 좀더 성경적으로 사려 깊으며 시간이 증명해 주고 있는 창조적인 참여와 전문적인 지식으로 설득하는 정책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pp 135-139)
참 하나님을 미국의 부족신으로 전락시키는 찰스 피니식 도덕 운동
도덕주의가 지난 200년 동안 복음주의 안에서 상당히 우호적인 피난처가 되어 왔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19세기에 있었던 커다란 도덕 개혁 운동들은 시민 사회적인 의라는 명분에 사로잡혀 얼마나 쉽게 교회의 영적인 사명(잃어버린 자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이끌어 말씀과 성례를 통해 하나의 저주와 복을 선포하고 건전한 권징을 유지하는 일)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구원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도덕적 개선의 문제라고 보는 이런 사상을 복음주의자들이 가지게 된 그 뿌리는 찰스 피니(Charles Finney) 등의 사람들에게 있다. 그 사상을 확실히 하기 위해, 피니는 원죄와 전적인 무능력(즉, 인간의 본성이 죄에 속박되어 있다는 사실)과 같은 고전적이며 성경적인 교리를 땅 속에 깊이 묻어 버려야 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하면서 어떻게 도덕적인 캠페인을 벌일 수 있겠는가?
자아 및 자아의 죄악성에 대한 성경적 교리가 제거되자, 피니는 하나님의 주권 교리에 대한 운동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인간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중심적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대리적 속죄 교리(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대신해서 형벌을 당하셨다는 교리),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칭의 교리(그는 칭의 교리를 다른 복음이라 불렀으며, 칭의 교리가 도덕적 개혁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다)를 제거해 버려야 했다.
찰스 피니는 그 이단의 원흉인 펠라기우스의 노선을 따라 기독교 메시지를 완전히 탈바꿈시켜 버렸다. 이 노선은 역사상 다른 누구에 의해서 보다도 나중에 많은 교회 회의에서 정죄되었던 노선이었다. 데이비드 마틴이 말하는 바 ‘신학적 추구’는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쇼가 진행되고 있으며(전도), 도덕적 승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한(정치) 아무도 신학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현대 교회 성장운동과 기독교 우파운동은 미국의 부흥 운동 안에 도도히 흘러가고 있는 이런 도덕주의적 물결을 그저 영속화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보통 유일한 중보자며, 유일한 길이며, 진리이자 생명이라는 그리스도의 배타적이며 독점적인 주장들을 가장 큰 목소리로 옹호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도 아버지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다(요15장).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큰 목소리로, 대중에게 ‘미지의 신’ 에게 경배를 드리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으며, 그 신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신이나 중보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집단도 바로 그 집단들이다. (즉, 무슬림도, 유대인도, 힌두교도들도, 불교도들도, 뉴에이지 운동자들이나, 염소 숭배자들도 이 무형의 미국 신에게 기도드릴 것이 기대되고 있다.) 공화당사람들이나 민주당 사람들이나 모두 연설할 때마다 ‘하나님’ 이라는 말을 집어 넣어서, 미음을 사려고 노력하고 있는 집단이 바로 우리 복음주의자 집단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역사의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미국적 경험에 속하는 하나의 부족신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절대적인 진리의 수호자들이 되어야 할 바로 우리가 말이다. (pp 152-155)
문화적 승리가 아닌 십자가가 적대적인 우리를 하나로 묶어 준다
복음주의자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로울 수 있는가(복음)에 대해서보다는 시민 사회적인 의와 관련된 일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시민 사회적인 의가 우리의 담론에서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보스턴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인 피터 버거(Peter Berger)는 “배교의 본질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구원을 ‘믿음으로 들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가 아니라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 ‘율법의 행위’ 에서 찾는 것입니다. 배교의 구체적인 내용들, ‘공로적 의’의 내용들은 시대마다 다양합니다.”
“민주주의든지 자본주의든지, 중산층 문화에 속하는 특정한 가정 문화든지 간에 기독교적 생활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미국식 생활 방식에 대한 옹호도, ‘사회주의 건설’ 도, 심지어 ‘정의 사회 구현’까지도, 대안적인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죄에 의해 손상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다른 복음들’ 가운데 있는 ‘공로적 의’는 정확히 만약 우리가 이런 일을 행하기만 하거나 저런 일을 심가기만 한다면 구원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을 것이라는 암시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했던 바울의 책망이 우리에게 뚜렷하게 드러나야 한다. 복음에다가, 유대적 관습들과 의식 같은 것들을 덧붙임으로써 그리고 그런 것들을 고수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기독교적 정체성을 삼음으로써, 갈라디아교인들은 사실상 다른 복음을 수용했던 것이다. 그 다른 복음은 전혀 복음이 아니다. 우리는 복음을 보수적 복음주의자들로서 특정한 정치적 제휴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갈라디아교인들을 따르고 있으며, 갈라디아교회 에서 나타났었듯이,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나는 어떻게 참된 크리스천이 민주당원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하고 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오직 믿음을 통한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칭의보다는 문화적 세뇌 프로그램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받고 구원받는 일을 추구하고 있었다. ‘오직 믿음’ 은 공로적 의와 자기 의로 이루어진 다른 복음들을 파괴시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직 믿음’ 은 문화적이며 정치적이며 사회 경제적인 요인들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우리 주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 근거한 복음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오직 믿음은 또한 대속의 바다 가운데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악질적인 죄인들의 죄책과 정죄도 묻어 버린다. 복음은 포르노 중독자, 아동 추행자, 동성연애자, 마약 딜러, 심지어, 낙태 찬성론자들까지도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공동 상속자가 되도록 초청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우리의 사악함에서부터 돌이키고, 우리 자신의 의가 아무리 최선의 것이라 할지라도 ‘더러운 걸레 조각’임을 인정하고 우리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의 자비의 손에 의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적이었던 사람들을 십자가에서 함께 만나게 된다. 문화적 승리가 아닌 십자가가 마침내 서로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건설하시는 일에 대한 비전이다. 이 일은 복음의 선포들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전쟁의 수사어와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pp 155-160)
세속주의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
고전 서사시 오디세이에서 호머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절반은 여자이고 절반은 새인 이 여신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뱃사공들을 꾀어서 죽였다) 섬을 지나서 귀향해야 했다. 거부할 수 없는 멜로디로 선원들에게 최면을 걸어, 사이렌들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을 자기들의 소굴로 유혹해 들였다. 자기들이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곧 자기들에게 저항할 만큼 충분한 힘이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 사실을 알고 오디세우스는 자기 선원들에게 자기를 그 배의 뱃기둥에 묶어 달라고 부탁하고, 그 선원들의 귀를 왁스로 막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배는 무사히 그 섬을 지나면서도 사이렌들의 노래에 저항하고 다음 무대로 전진해 나갈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사이렌의 노랫소리는 세속주의다. 새속주의란 세속화 과정에서 비롯된 오늘날의 삶의 조건, 삶의 상태(condition)이다. 세속주의는 크게 두 가지 운동의 결과이다. 첫째가 근대성(mordernity)이다. 이 근대성은 계몽주의에 뿌리박고 있다. 계몽주의는기적, 구원, 계시 등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을 거부하고, 오직 자연의 법칙, 도덕적 개선, 진보, 이성과 같은 자연주의만을 인정했다. 둘째는 탈현대주의(postmodernity 혹은 후기 현대성)이다. 이 사조는 경험을 이성보다 앞세우며, 영혼의 내적인 실질을 객관적인 외적 세계의 실재들보다 더 강조함으로써, 근대성(모더니티)과 합리주의의 무미건조한 개선주의에 대해 여러 면에서 저항하고 있는 사조다. 둘 다 세속적 운동이지만, 크리스천들은 종종 무의식적으로 이 과정에 승복하고 있다. 종종 그런 일들은 ‘연관성(혹은 적실성, 적합성, 연결성)’ 의 이름으로, 그리고 오늘날 말하고 있는 소위 ‘상황화’의 이름으로 답습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의도적으로 양보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이 그냥 이 시대의 정신에 천천히 영합해 가서 그런 일이 생겨나기도 했다.
오늘날의 보수적인 크리스천들은 20세기의 주류 교단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자신들에게 충분히 있다고 과신한다. 즉 자기들은 교회도 잘 다니고 있고,자체적인 음악과 예술과 행사와 각종 회의와 책들과 방송을 지니고 있는 복음주의적 저변 문화에 깊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사이렌들이 노래하고 있는 섬을 안전하게 지나 항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 개개인은 자기들의 교회와 복음주의적인 저변 문화에 더 많이 참여하면 할수록, 세속주의의 최면의 힘에 이미 정복당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세속주의에 대한 우리의 위기에 대한 구제책은 (비록 기독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땅에 근거를 두고 있는 운동을 부흥시킴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비전을 회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 구제책은 주님의 가르쳐 주신 기도문, “하늘에 계신우리 아버지” 에 담겨 있는 그런 회복이다. 그리고 그 한 문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인격적인 측면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주권에 대한 초월적이며 영원한 관점 사이의 균형을 발견한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인격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오늘날 자유주의, 보수주의를 불문하고 크리스천이 너무 자주 장난처럼 들먹이고 있다. (pp 170-172)
복음주의자들은 권력과 영광을 추구하느라 초월성을 잃어버렸다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이 낮아지는 일을 거부하면 할수록, 거부하는 그 정도만큼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엄위와 거룩하심과 주권을 깨닫고서 느꼈던 해방감과 즐거움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의 손아귀에 권력이 들어오기를 추구하고 자신들의 찬란함을 추구하느라고, 적절한 공식을 통해 자신들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자기들 마음 속의 신을 추구하느라고 초월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스라엘 자손은 거듭해서 그들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길에서, 그들은 시편 121편을 노래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회복의 비전을 약속하신다.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사17:7~8). 현재 우리가 마치 이스라엘 자손처럼, 우리의 조건에서 우리와 만나주는 신, 우리를 즐겁게 해 주고 어떻게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지를 보여 주고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며 우리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현대의 교회 성장의 신을 얼마나 고집스럽게 섬기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신은 매우 ‘실질적이며’ 매우 ‘적절하다.’ 그 신은 거룩하지도 않고, 그의 창조 세계와 분리되어 있지도 않으며,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정원에서 나와 함께 거니시고 말씀하시는” 그런 하나님이다. 얼마나 계속해서 우리는 우리 손으로 만든 제단에-그 좋은 머리에서 만들어 낸 확실히 입증된 테크닉들과 프로그램들과 예배 스타일에-우리의 눈을 고정시키는 훈련을 계속하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심리학과 사회학과 비즈니스와 마케팅 전략들과 정치적 의사일정들과 이데올로기라는 현대의 제단들인 이 ‘산들(high places)’에서 온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이 자신들의 부흥과 구원에 대한 소망을 위해 갈보리가 아니라 캐피털 힐(미 국회의사당이 있는 언덕을 가리킨다)을 바라보고 있는가?
언제 우리는 그런 언덕과 산에서 눈을 돌려 하늘을 쳐다볼 것인가? 우리의 봉사와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인가, 아니면 인간 중심적인가? 우리는 우리의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는 훈련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성공과 쾌락과 자기 성취와 같은 지상적인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는 자아 성취라는 높은 언덕들과 산 위를 바라보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자신의 육체 대신에 하나님에게 우리의 신뢰를 두도록 인도해 주고 있는가? 그 예배에는 보좌에 좌정하신 천지의 주재의 거룩하심과 위엄이 칭송되면서 경탄과 존경과 초월에 대한 의식이 자리잡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세상이 엉거솔의 말처럼 “우리가 헛되이 그 높은 곳들 너머를 바라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pp 177-178)
패배의 상징으로 보이는 십자가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발견한다
근대성은 인간의 노력을 통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고 지상의 혼란을 천국의 평화로 변환시키려는 추구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메시지는 그와 같은 아담적인 신화에 대한 최대의 도전이다. 기독교 메시지는 어떤 사람이나 민족이나 국가나 인종도 그 사다리를 기어 올라서 하늘에 오를 수 없음을 얘기하고 있다. 기독교 메시지는 오히려 상실한 세계를 구원 하시려고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사람에 대해, 아니 하나님 자신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 세속주의는 초월성을 부인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초월적인 현존 속으로 뚫고 들어가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했듯이,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즉 데우스 누두스(Deus nudus, 벌거벗은 대로의 하나님)를 보려고 시도함으로써 긴장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을 보고서는 살 자가 없다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정말 거룩하시며, 놀랍도록 초월적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닌 모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초월성과 내재성은 하나님이며 사람이신, 한 위격 안에서의 두 본성이신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만난다. 승리는 인간성이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며, 어떤 사람이나 인종이나 국가가 구세주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 현대의 모든 도그마와는 얼마나 다른가! 패배의 상징으로 보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죽음의 권세들과 하나님의 진노를 이긴 궁극적인 승리를 발견한다. 그 위대한 승리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성취되었지, 우리가 워싱턴에서 이룬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대중 집회와 행진을 통해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죄와 구속에 대한 설명으로써 선포된다.
교회에게 존재 의미를 가져다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와 부활이지 무너져 내리는 아메리칸 드림을 치켜 세워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런 꿈은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순례길을 가는 데 있어서 그들의 눈을 흐리게 만들고 있는 또 하나의 바벨탑, 또 하나의 이교주의의 높은 성소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참 소망을 가지고서 하늘을 향해 우리의 눈을 들 수 있는 것은 그 십자가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이다(히12:29).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성경에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여 주신 대로의 그 하나님에게 우리의 믿음을 두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핵심이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티(근대성)의 우상들의 유토피아들과 만병통치약들을 크게 반대하면서, 초월적인 해결책과 ‘영적인 것’ 으로의 복귀를 많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은 인생에서 영적인 측면을 추구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이시다.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을 바라본다는 것도 아니며, 우리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도 아니며, 대의명분과 운동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며, 이데올로기나 전략을 바라본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영적 실재들을 바라본다는 것도 아니며, 예루살렘의 성문 밖에서 그 날 오후에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에 대해 승리하신 역사상의 그 언덕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pp 187-189)
상대적 적용이 아니라 보편적인 절대적 원칙의 적용이어야 한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오직 성경’ 이라는 개신교의 확신에 매여 있는 것은 정치 영역에서만이 아니다. 교리의 영역에 있어서도, 우리는 하나님 이 말씀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윤리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성경에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은 것을 요구하거나 반대로 금함으로써, (하나님이 묶어 놓으시지 않은 것을) 양심에게 명령할 하등의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
종교개혁 전통에서, 이 영역을 아디아포라(adiaphora), 즉 '상관 없는 것들'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어떤 규정된 입장에 묶임이 없이 크리스천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의 판단과 기독교인으로서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회색 지대’를 가리킨다. 우리가 특별히 정책 이슈들을 살펴보아야 할 자리가 바로 여기다. 모든 정책이 다 똑같이 좋다는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모든 크리스천은 인종문제에 있어서의 정의와 화해를 추구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기독교적 긍정은 소수계 우대 정책, 보건 정책, 프로그램들, 웰페어(welfare) 등을 둘러싼 찬반의 정책적 입장과 함께 가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이슈들 각각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우리를 위해 주신 ‘큰그림’ 에 만족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명령하고 계시는 것과 우리가 그와 같은 명령에 비추어서 우리 스스로 유추해 내거나 이끌어 낸 것 사이를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한다. 인간의 삶의 모든 단계에서 인명을 보호하라고 외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한 정당이나 어떤 정책들에 대해 하나님이 축복하섰다고 주장하거나 한 민족이나 한 국가 전체를 하나님이 선호하신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 마음대로 남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경우 하나님은 예레미야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말씀하셨다시피, “내가 그 선지자를 보내지도 않았고, 그자에게 내 말을 주지도 않았는데, 그 자가 내 이름으로 말하고 있구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발칸반도의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해, 우리 시대의 신실한 선지자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에 대해 말한다. 신실한 선지자는 공습과 같은 것에 대해 자신이 개인적으로 찬성하든, 반대하든지 간에 상관 없이, 공습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메신저일 뿐이고,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기록되어 있는 메시지, 즉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지를 전할 뿐이다. 그는 그를 보내신 분에게서 백지수표를 받은 것이 아니다. (pp 205-206)
우리는 하나님의 신용을 크게 훼손시켰다
만약 우리가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존중받는 것을 보고 싶다면, 세상부터 판단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집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 시대에 들어와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용을 크게 훼손 시켰다. 그리고 만약 개혁되어야 한다면, 바로 그 점을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중생받은 자이며,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다시 지음 받은 자다. 우리는 모든 종족과 언어와 민족과 나라들로부터 제사장들의 나라가 되도록, 현대 국가들의 소망 없는 도시의 한가운데서 소망의 도시가 되라고 하나님이 취하신 자들이다.
한 잔의 물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어질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부르심, 우리의 직업과 행하는 일을 탁월하게 행할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가 우리의 가족을 돌볼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을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이름을 존경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인간의 도성에 존재하고 있는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인종적 분야들의 연장일 뿐이다. 여러 통계를 보면 복음주의자들도 불신자들 만큼이나 물질주의적이며, 자기 중심적이며, 쾌락주의적임이 입증된다. 복음주의자들 자신들이 가장 세상적인 이 때에, 그들이 그토록 비판적이며 자기 의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한 설문 조사가 입증해 주고 있다시피 신자의 자녀들이 불신자의 자녀들보다 더 많이 MTV를 시청하고 있다면, 우리가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의 가정에다 냄새난다고 코를 들이대기 이전에 우리 자신의 가정에서 먼저 청소를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우리가 이 나라에서 낙태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면, 먼저 우리 자신의 교회에서 창조 교리를 설명함으로써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복음주의자들 이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낙태의 육분의 일에 대해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국가가 공공 기도를 강요해 주기를 원한다면, 오늘 아침에 우리가 우리 자녀와 더불어서 기도를 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학교들이 도덕을 가르치기를 기대하면서, 그 도덕이 우리의 원하는 특정한 도덕적 신념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화를 낸다면, 우리는 내가 내 자녀들에게 하나님, 죄와 구속,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 및 기독교 신앙의 다른 위대하며 필수불가결한 진리들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복음주의자의 세계는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다. 신학적으로 아무도 무엇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 것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윤리적으로 우리는 스캔들에 빠져 있으며,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세상적이 되었다. 사회적으로 우리는 세상과의 관계가 어떠해야하는가에 대해 혼동하고 있다. 교회 밖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판단에 관한 신약 성경의 경고들에 비추어 볼 때, ‘내 코가 석자’이며,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위기가 너무 심각하여 우리가 온 힘을 다 쏟아 고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개혁을 위해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이름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pp 218-219)
두 왕국 사이에는 반립적 성격이 존재하고 있다
화란의 신학자이자 수상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두 왕국의 관계를 반립(反立, antithesis)과 일반 은혜(common grace)의 맥락에서 설명하기를 좋아했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는 말을 듣는다. 나는 자라나면서 고등 학생들의 댄스 파티나 영화 제작, 소설가, 정치 및 가장 악하고 크리스천에게 있어서는기껏해야 시간 낭비라고 간주되는 여타의 분야로 진출하는 모든 일에 대해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을 들으면서 성장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말하고 있는 ‘세상’이 무슨 뜻인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그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 즉 ‘죄인의 욕망과 죄인의 눈의 정욕과 죄인이 가지고 있으며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랑’이다. 요한은 사람들을 미워하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다. 또한, 문화와 교육과 과학과 예술 등을 미워하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다. 사도 요한이 정죄하고 있는 것은 세상의 허영과 물질주의와 자기 연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과 비크리스천 사이에는 이런 반립(antithesis)이 있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교회와 세상 사이에도 반립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동생을 죽인 일에 대해 가인을 심판하셨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을 그 땅에서 내쫓는다면, 자신이 살해당할 것을 염려하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다짐해 주셨다(창4:15). 어째서 그런가?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일반 은혜 가운데서 가인으로 하여금 한 도성, 하나의 문명을 건설하도록 하실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여전히 문화적 활동을 중요하게 여기셨으며, 그래서 타락에도 불구하고 문명을 발전시켜 나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이런 활동이 더 이상 ‘하나님 나라’ 활동은 아니었다. 그 활동은 하나님이 섭리로 정해 주시고, 인정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공통적인 일이지만 거룩한 일은 아니었다. 그 일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의 일부가 아니었다.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창4:15~16). 가인이 ‘약속된 땅’에서 쫓겨 나가서 ‘에덴의 동편’에서 살았음에 주목하기 바란다. 거기에서 가인은 한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 곳은 하나님 나라 밖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물론 그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했으니 ---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5-26). 가인 후손들의 계보는 그 핵심적인 인물들이 어떻게 문화 가운데서의 다양한 활동의 창시자가 되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였다(21-22절). 그러나 우리는 바로 다음 구절에서 셋의 출생과 그의 계보로 인도된다. 셋의 자손이 문화 가운데서 이룬 업적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본문은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로써, 셋의 가문의 중요성을 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여기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두 개의 도성이다. 하나는 수평 지향적이며, 다른 한 도성은 수직 지향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가정(아담과 하와를 통한 인간 가정)을 통해서만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가정들을 통해 일을 하신다. 비록 셋의 자손도 문화에 동참하고 있지만, 그들은 하늘 약속의 상속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인 족속과 통혼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 그들의 신앙이 왜곡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구원은 도성을 건설하는 일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올 것임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어째서 이 모든 것이 중요한가? 왜냐하면 우리는 종종 이 두 왕국을 혼동해서, 비록 무의식적이라 할지라도, 구원이 그 도성을 건설하는 우리의 노력들을 통해 오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근대 시기 전체는 이 사상에 대한 하나의 실험장이었다. 즉 문화적 활동(정치, 도덕, 과학, 기술, 예술 및 교육 등을 통해 우리의 맨손으로 우리 스스로 에덴(세계 평화와 고난과 고통, 질병과 빈곤의 종식)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크리스천들에게 조차도 이 비전은 매우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선포하는 대신에,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처럼, 정치적이며 도덕적인 승리들을 쟁취하고 미국을 ‘크리스천 국가’로 만드는 맥락에서 구원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해 , 크리스천 국가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 정도는 다양하겠지만, 기독교적인 신념들과 가치들의 영향을 받고 형성된 국가들이나 민족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지상에 더 이상 특별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오래 전에 가인이 건설하기 시작했던 그 도성, 그 도시가 바로 오늘날 그 문화적 추구들을 통해 사람들이 건설하고 있는 바로 그 도성, 그 도시다. 그 도성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로 세워진 도시다. 그러나 타락 때문에, 그 도성은 마지막 때까지 구원의 영역너머 ‘에덴의 동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우리는 ‘소금’이 되도록 부름받은 크리스천들로서 사회를 보존하고 문화의 쇠퇴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어떤 나라도 어떤 제국도 세상은 고사하고서라도 그 자신도 쇠퇴로부터 구할 수 없다. 이 말을 처음 듣는다면, 상당히 비관주의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제 말씀하셨다시피, “이 세상에서 너희는 고난을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인이 영원히 아벨을 핍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왕 국 사이에는 일종의 반립적 성격이 존재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애굽과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혀가 있었을 동안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체로 대접을 잘 받았다. 그리고 그 외국 문화의 관습들과 시민으로서의 생활에 참여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을 만한 새로운 지식과 기술들을 가지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다. 이런 사실은 동전의 또 다른 측면을 보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 만약 ‘반립적 성격’이 두 왕국 사이의 역사적이며 종말론적인 투쟁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고 한다면, ‘일반 은혜’는 신자와 불신자가 모두 함께 공동으로 유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에 의해 공동으로 시도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pp 226-230)
일반 은혜로, 불신자들에게도 빛나는 하나님의 형상의 광채들이 있다
타락의 영향에 대해 설명하면서 칼빈은 우리가 초자연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믿음,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참사랑, 의로움에 대한 열망 등)과 우리가 자연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재능, 지혜, 지식, 이성 도덕, 창조성 등)을 구분하고 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면서 이 둘을 다 지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의 초자연적인 부분은 타락과 함께 상실되었다. 그리고 그 소유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자연적인 개입으로써만 회복될 수 있다.
사람들의 의지가 죄에 노예화되어 있고, 심지어 사람들이 행하는 선행까지도 이기적인 사랑에 의해 왜곡될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안에는 건강함이 전혀 없다는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한 채로 세상에 태어난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최선의 행위들에서조차 사곡(邪曲)함을 보실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서로 상대방의 사곡함을 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비록 우리가 타락 이후에 본성상으로 영적인 의로움에 대해 무능력할지라도, 시민 사회적인 덕은 행할 수 있다. 인간의 부패를 뚫고서 빛나는 하나님 형상의 광채들은 ‘그가 이성적인 존재임을 보여 주고 있으며, 그가 이해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를 야수들로부터 구별시켜 준다.’ 물론 그 이해력도 무지로 얼룩져 있지만 말이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도 땅의 것들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의 것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전2:14).
불신자들이 의로운 법률들과 좋은 음악과 건전한 교육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불신자들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자들이며, 여전히 빛의 광선들이 빛나고 있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적인 주권을 통하여 행사되고 있는 일반 은혜는 우리의 부패와 무지가 우리를 끌고 들어갈 수 있는 깊이까지 가지 못하도록 사악함과 악습과 무지를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우파의 많은 지도자들은 오직 크리스천만이 국가를 다스릴 권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비기독교인들의 글을 읽을 필요도 없으며, 그들의 말은 들을 가치도 없고 그들과 함께 하거나 그들의 작업도 즐길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고 가정하고 있는 근본주의의 일반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한번 나는 다음과 같은 칼빈의 통찰들이 여기서 정곡을 찌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세속 작가들에게서 이런 내용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 안에서 빛나고 있는 진리의 경탄할 만한 빛으로 하여금, 인간의 마음이 비록 타락했으며 온전함으로부터 왜곡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탁월한 선물들로 옷입고 있으며 장식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도록 하자.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진리의 유일한 샘으로 간주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불명예스럽게 하지 않도록, 진리가 나타날 때마다 그 진리 자제를 거부하지도 그 진리를 경멸하지도 않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처럼 위대한 형평성을 가지고 시민 사회의 질서와 기율을 확립했던 고대의 법률가들 위에 그 진리가 비추어지고 있음을 부인할 것인가? 자연을 세련되게 관찰하고 솜씨 있게 묘사하고 있는 철학자들이 눈이 멀었다고 말할 것인가? --- 의학을 발전시켜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노고를 마다하지 않은 그 사람들을 실성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 모든 수학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그 학문들을 미친 사람들의 헛소리들로 취급할 것인가? --- 성경(고전2:14)에서 ‘자연인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사람들은 진실로 땅에 속한 것들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예리하게 통찰을 한다. 따라서, 그 참된 선함이 훼손된 이후에라도 주님은 인간 본성에게 얼마나 많은 선물을 남겨 두셨는지를 그들의 예를 통해 배우도록 하자.(강조는 덧붙인 것임)
터어키의 무슬림들이 ‘기독교 세계’에 침공해 들어와서 유럽 전체를 삼킬 듯이 위협하고 있을 때, 마르틴 루터는 “차라리 나는 부정직한 크리스천보다는 정직한 터어키인의 지배를 받기 원한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비록 영적인 분별은 한 사람이 중생할 때까지 완전히 상설되어 있지만 불신자들도 가질 수 있는 자연적인 지혜와 탁월함과 덕성과 아름다움이 상당히 있다. 이런 선물들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온다. 비록 그 선물들이 그렇지 않은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또한 크리스천들 자신들도 중생했지만 여전히 죄인들이다. 그리고 분명 여전히 악하기도 하다.
구속은 문화에 대한 우리의 참여를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구속은 우리를 바꾼다. 그러므로 그 참여의 성격을 바꾸어 놓는다.
우리는 ‘일반 은혜’의 시기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 이 시기에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신다”(마5:45). 언젠가 한 사마리아 마을이 예수님 일행을 환영치 않았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렇게 물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러나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다”(눅9:54-'56).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올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세상의 마지막 때다. 지금은 올바른 때도 아니며, 우리 또한 올바른 재판장들도 아니다.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판단이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지만, 교회는 통치자들과 세속 권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롬13장). 이는 사악한 통치자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pp 230-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