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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항기 목사 “나는 그분 때문에 행복합니다” | ||||||||||||
자서전 <노래하는 목사 윤항기의 여러분> 펴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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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을 펼칠 수 있는 나이가 되지 않았나 해서 출간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많은 아픔을 겪고 성장했던 과정이 있고 일반인들과 달리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던 삶을 통해 모든 과정들을 이번 자서전에 담았습니다. 올해는 음악을 시작한지 만 50년이고 목사 안수 20년이 되어서 지금 자서전을 내는 것이 뜻이 있고 의미가 있겠습니다. 자서전은 가족사를 중점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자서전 출판을 기념해서 기념공연도 4월 30일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하기로 했는데 천안함 사태로 인해 가을로 연기했습니다. 예매했던 것도 환불했습니다.” △ 한국교회에서 음악목사라는 길을 처음 여신 걸로 아는데 힘들지 않으셨나요? “1990년에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한국사람으로 최초 음악목사로 안수 받고 미국에서 나온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목사로써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려웠습니다. 음악목사라는 직책이 당시에는 없어서 정말 생소한 분야였습니다. 지금은 교회 음악목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지만 그 때는 사역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목사가 된 뒤에 목회에 전념한 것보다는 음악신학교와 총회, 한기총 같은 곳에서 다양한 사역을 했습니다. 목회는 20년 했지만 음악 50년을 병행했기 때문에 다른 목사보다 4, 50년 목회를 한 것 같습니다.” △ 음악 목사라고 하지만 여전히 대중들에게는 가수로도 각인 되어 있습니다. 대중적인 활동을 하지 않지만 대중음악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중음악은 언제부터 했나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예술가이고 그 끼를 닮지 않았다면 문제가 있을 겁니다. 당신이 예술인의 길을 가면서도 아들이 예술인이 되는 것은 반대하셨습니다. 그 길이 힘들고 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딴따라라고 괄시받는 것을 아들에게까지 전수하고 싶지 않으셨나 봅니다. 그래서 동생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공연을 했는데 저는 극장 근처도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원망도 많이 하고 불만도 많았습니다.” △ 그래도 결국 가수의 길을 가셨잖아요. 자서전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음악을 시작했다고 써 있던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중학교만 나온 나로서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희갑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윤부길 아들이라고 말하고 음악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습니다. 1960년 작곡가 김희갑 선생님 제자로 연구생으로 들어가 드럼도 배우고 노래도 배웠습니다. 그해 미군 관객 앞에서 노래를 시작한 것이 올해로 만 50년이 됩니다. 이때 배운 음악 때문에 해병대 군악대를 들어갈 수 있었고, 1963년에 한국 최초로 그룹사운드 키보이스를 결성할 수 있었습니다. 음악을 생계로 하는 직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 한국에서 대중음악, 그것도 락음악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당연하지요.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우리더러 미친놈들이라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내가 결성한 키보이스는 최초의 보컬 사운드이지만 영국에서도 비틀즈가 활동을 시작했고 세계적인 추세였습니다. 대중음악으로서는 가장 앞서 나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키보이스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 자서전이지만 어릴 시절 특히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던데, 아버지 윤부길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주지요. “아버지 윤부길은 내 인생의 삶을 이끌어가는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분입니다. 그분의 DNA가 내 안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분처럼 음악을 선구자적으로 사신 분은 없을 정도로 천재적 기질이 있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개그맨이라고 할 만큼 그 분야에도 탁월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정에서 아버지 역할은 제대로 하지 못하셨습니다. 당시에 알고 지내시던 지인 중에 마약을 하시던 분이 있었는데 그 때 마약에 손을 댔습니다. 결국 중독이 되어 가산을 모두 탕진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지독한 가난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어머니는 우리를 끌고 청계천으로 가셨습니다. 지금이야 청계천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지만 그 때는 거지들이 사는 곳이라고 해야 할 만큼 더럽고 가난한 곳이었습니다. 땅을 파고 거적 같은 것을 걸쳐서 집이라고 지었지만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곳이었습니다. 신여성이었던 어머니가 오죽했으면 거기로 가셨겠습니까. 아는 분이 찾아와서 어머니는 다시 무대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약값과 우리를 돌보기 위해 객지에서 무대공연을 하다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 아버지를 미워하시다가 목회의 길을 가시면서 용서한 것으로 자서전에는 기록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를 용서한다는 것이 쉽지 않으셨을 같은데 어떻게 그런 결단을 하셨는지요. “아버지는 폐결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마약을 끊기도 하셨지만 중독은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았습니다. 너무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가지고 있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동생과 내게 내내 미안해 하셨습니다. 그 아버지를 쉽게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도 아버지는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목사 안수 받던 날 아버지를 용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의 길을 가는 내가 그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 의지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셨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 삶의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믿고 서지요? 하지만 극적인 전환점은 서울국제가요제라고 생각하는데…. 저도 그 가요제를 텔레비전으로 보았습니다. 그날은 국내에서는 굉장히 경사스러운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남매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증표로 날입니다. 완전히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의 확신이 서울국제가요제에서 경험을 했습니다. 1979년 6월의 국제가요제의 대상을 받았습니다. 동생은 외로움을 잘 탔습니다. 그래서 열아홉인가 스무 살 즈음에 결혼을 했습니다. 동생은 이 이야기만 나오면 그냥 넘어가려고 합니다. 부부간의 관계는 누구도 알 수 없듯이 70년대 중반에 파경을 맞았습니다. 동생이 그 때 낸 노래가 내가 만들어준 ‘나는 어떻하라고’입니다. 동생이 78년 봄에 같은 동료와 재혼했는데 그 이듬해 1월에 파경을 맞았습니다. 이 때 동생은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처음 실패 때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두 번째 결혼 때는 성령 체험을 한 뒤에 결혼한 터라 동생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나도 그 때 예수님을 믿었지만 제대로 된 신앙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왜 이 딸에게, 하나님만 외치는 딸에게 고통을 받게 하는지 몰라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으로는 너무 힘들어 하는 동생이 안쓰러웠습니다.” △ 동생을 위해 서울국제가요제에 나가셨군요. “결국 그런 셈이지요. 마침 MBC에서 남매를 한국대표로 나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정신적으로 국제가요제에 나갈 상황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동생의 아픔을 이 가요제에 나가 일어설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 나름대로 동생을 위해서 노래를 만드는데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42장 10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는 그 말씀 말입니다. 그 말씀을 펼쳐놓고 곡을 완성했습니다. 세계에서 유명한 작곡가와 혜은이, 길옥균 커플과 우리 남매, 그리고 다른 한 팀이 국내에서 참가해 전체 20개 팀이 참가했습니다. 우리주최측은 우리에게 한국에서 대상이나 은상, 본상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미리 선포했습니다. 내년에나 자국팀에게는 상을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동생과 참가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아예 상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실의에 빠진 동생을 위로하기 위해 참가하자는 생각만 했습니다. ‘여러분’이란 노래는 영어 가사로 보면 가스펠입니다. 한국가사에는 하나님이나 주님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가요제에서 1절은 한국말로 2절은 영어로 부르게 되어있었습니다. 한국어로는 종교적 표현을 쓸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들어갈 수 없지만 영어 가사에는 그 단어가 들어갔습니다. 동생에게 그냥 가요제 나가자고 하면 나가지 않을 것이 뻔해서 CCM으로 하자고 해서 설득해 출전했습니다. 문제는 가요제에서 노래를 부르자 일본 한국 심사위원만 빼고 홍콩, 싱가폴, 호주 미국, 프랑스, 영국 심사위원이 만장일치로 우리 남매 팀에게 만점을 다 주어버린 것입니다. 주최측에서 대상을 줄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결과가 그렇게 되자 할 수 없이 대상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최초 한국의 가스펠입니다. 또 우리 남매 삶의 역사적 전환점이 된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체험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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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는 이런 분야에서 종사하다가 주님을 영접한 분들에 대하여 좀더 너그러이 보고 대해주는 아량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삼 년 전인가 윤항기 목사가 국제가요제에서 여러분,,을 부른 것에 대한 배경 이야기를 하는 것을 방송을 통해 들었습니다..실은 자신의 신앙 이야길 노래로 만든 것인데 가요제이기 때문에 우리가사에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넣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그 노래를 감동있게 부르고 상도 탔지만 그들 남매가 그때까지도 거듭남이 없었다고 간증을 했는데 좋아하는 가수여서 그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