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육신 관란 원호 유적지 탐방
낭윤 김완기
광진문화원에서 우리나라 원로 시조시인 원용우 박사의 ‘시·시조강의’를 들으면서 우리의 전통문화가 살아서 숨 쉬는 시조에 대한 참맛을 느끼게 되었다.
2년째 수강을 하면서 시조쓰기는 나의 새로운 일과가 되었고 어느새 시조의 깊은 맛에 푹 빠져들게 되어 시조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사육신 원호의 시조 ' 00가 '를 공부하다가 작자가 사육신 중 한 사람으로 단종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원 교수님께 간청을 드려서 수강생이 함께 관란 원호 유적지를 탐방하였다.
제일 먼저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 대남송길 131-15 의 마을 뒷산에 자리 잡은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원호 선생의 묘부터 찾았다. 원호 선생은 세종대왕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고 한다. 17대손 원용걸 씨가 직접 나와서 안내하면서 원호선생과 묘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곳이 바로 조선시대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생육신 중 한 사람 관란(觀瀾) 원호(元昊 1396~1463)의 묘지이다. 대개의 경우 부부의 묘를 좌우로 나란히 쓰는데, 이 묘는 특이하게 앞쪽에 부인의 묘를 모셨고 그 뒤쪽에 남편인 원호선생의 묘가 있다. 원주 원 씨네 가문에서는 대대로 그렇게 써왔다는 것이 원 박사의 설명이다.
묘의 앞에는 묘비와 상석이 자리 잡고 양쪽에 문인석 1쌍이 묘지를 지키고 있다. 남향으로 양지바른 곳에 단종대왕 묘 장릉에서처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올라 둘러선 소나무들이 마치 원호 선생의 충성심과 절개를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역사상 유명한 인물들의 묘지에서 보아온 것처럼 그 위상이 범상치 않았으며 이곳이 바로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좋은 유택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 살아생전 그의 업적과 무관치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명당인 묘지를 정성껏 관리해온 후손들의 숭모정신 또한 돋보였다. 드디어 2009년 4월 30일 원주시의 향토문화유산 제2009-2로 지정됐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 다음 행선지로 충북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27에 있는 ‘원호 유허비와 관란정’을 찾아갔다. 영월 서강(西江) 가의 벼랑 위에 자리한 정자로,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안치되었을 때였다. 생육신 중 한 명인 관란 원호가 단종을 추모하며 영월 서쪽에 ‘관란재’란 집을 짓고 단종이 있는 영월 청령포를 향해 조석으로 눈물을 흘리며 망배(望拜)하다가 단종이 승하하자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지냈다. 이후 원주로 귀향해 평생 관복 입은 사람을 대하지 않았으며 호조참의로 임명한다는 왕명도 거절하고, 후손들에게 벼슬길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원호가 작고한 뒤, 후손들과 유림들이 원호의 충의를 길이 앙모하기 위해 헌종 11년(1845) 그 자리에 정자를 세우고 원호의 호를 따라 ‘관란정’이라 이름붙이고 유허비를 세웠다. 1941년 개축했고, 1971년에 보수했으며 관란정은 1994년 6월 24일 충북기념물 제92호로 지정되었다.
그의 시비가 관란정 옆에 돌에 새겨져 있어 몇 번을 다시 읽어보아도 원호의 임금님에 대한 애틋한 충성심이 확연히 드러난다.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가다.
이제 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고져, 나도 울어 보내도다.”
관란정에서 바라본 낭떠러지 아래 서강이 단종이 유배지 영월 청령포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원호의 시조의 종장에서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고져, 나도 울어 보내도다' 라고 읊었던 부분에 원호가 조석으로 흘러가는 물을 한결같이 바라보며 애석한 마음으로 단종을 기렸던 충성심이 잘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역사상의 많은 충신들의 시조가 회자되지만 '충신 불사 이군忠臣不事二君'을 뼈저리게 느기게 해준 시조는 고려말 정몽주의 '단삼가'에 버금가는 충격이 아닌가 생각된다.
'관란정'에 관해 설명을 마친 원용우 교수는 자신의 저서『원호와 원생몽유록』에서 저자는 원호가 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설명했다. 황패강 전 단국대 교수가 『원생몽유록』의 저자를 임제라고 했는데, 단종 때 태어나지도 않았고 100여 년 후인 명종 4년인 1549년에 태어난 임제가 어떻게 단종을 꿈속에서 만나 놀았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원생몽유록』에서 원생은 원호를 말하며 원호가 아니라면 그런 글을 남길 수 없다는 게 그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만약 임제가 단종과 꿈속에서 만나 놀았던 기록이라면 『임생 몽유록』이라고 했어야 맞지 않느냐고 했다.
역사와 국문학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노구에도 원생몽유록을 저술하면서 진실을 밝히겠다는 원 교수의 주장은 강력하고도 합리적이어서 설명을 듣는 많은 사람들이 적극 호응을 얻었다. 잠자고 있는 학계와 역사학자들을 일깨워서 머지않아 역사의 왜곡이 밝혀지기를 갈망한다.
오늘 탐방의 마지막 행선지로 청령포를 찾았다. 원호가 단종의 귀양지 강원도 영월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머 오매불망 임을 기렸던 바로 그곳이다. 청령포 앞 광장에 단종과 정순왕후의 사랑 “천상 재회”라는 동상이 서 있었다. 조선 6대 왕 단종은 원손, 세손, 세자에 책봉된 후 1452년 12세에 왕위에 올라 조선 27대 왕 중 누구보다도 정통성 있는 군주였으나, 1455년 15세에 세조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1457년 이곳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관풍헌(영월부 관아)에서 승하했다.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는 1454년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가 되었고, 단종이 승하한 후 종로구 숭인동 청룡사 근처에 초암을 짓고 살았으며 동망봉에 올라 단종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1521년 81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영월군민들은 단종과 정순왕후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천상 재회를 통해 이승에서 못다 한 사랑을 이루고 영면에 들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2024년 4월 9일에 세워진 이 동상으로 연유하여 영월군민들의 소망대로 단종과 정순왕후의 천상 재회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배를 타고 청령포에 들어가니 단종이 귀양살이 하던 초라한 집이 있는데 소나무 한 그루가 그 집을 향해 기지를 뻗고 있는 것을 보고 말 못 하는 소나무도 임금을 향한 원호의 충성심에 탄복해서 마음을 보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단종이 저항할 힘도 없이 괴롭고 기가 막힌 귀양살이를 했다고 생각하니 마음 편치 않았다. 마지막 배를 타고 청령포를 떠나오면서 단종이 겪었던 애석한 마음과 임금을 향한 원호의 일관되고 지고한 충성심이 겹쳐지면서 오늘의 관란 원호 유적지 탐방의 깊은 의미를 되새김질해 보았다. 청량포를 배경으로 붉게 물든 석양 하늘이 우리 일행의 떠남을 아쉬워하는 듯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