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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을에 처음 갔을 때, 이름 때문에 한참을 웃었다. 이름이 우스워서가 아니라, 그곳 사람들의 발음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처음 만난 김형려(77세) 할머니는 마을 이름을 묻자, '등미이.' 라고 대답했다. 몇 번이고 다시 물었지만, 대답은 똑같았다. 이번에는 할아버지 한 분에게 마을 이름을 물었다. 그랬더니 그 할아버지는 명확히 한자를 알고 있어서 '큰 덕, 밝을 밍.' 이라고 했다. 표준어로 명확히 표기하면 큰 덕(德) 밝을 명(明)이어서 '덕명' 이 되어야 맞겠지만, 그곳에서는 '덕밍' 이 되었다가 '등미이' 가 되었다가 하였다.
두 번째 여행길에는 일곱 살 난 아이와 동행을 하였다. 먼저 공룡 발자국 화석이 있는 바닷가로 갔다. 만화 영화나 여러 가지 캐릭터들의 영향 탓인지는 몰라도 아이는 공룡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다. 나도 외우지 못하는 몇 종류의 공룡 이름을 대면서 그들이 이곳에 살았냐고 묻는데,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발자국은 다양했다. 발자국 크기도 각양각색이어서 어떤 발자국은 아이의 몸만 하였다. 바다와 육지로 이어진 공룡의 발자국이 길게 늘어져 있는 곳도 있었다. 그새라도 바다 속에서 공룡의 무리가 뛰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이면 상족암 군립공원. 바닷가를 따라 길게 이어진 통로는 아이들과 거닐어도 무리한 거리가 아니다.
"아빠. 공룡들이 지금은 왜 없는 거야?"
"응.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어.
"언제?
"6천 5백만 년 전에."
"왜?"
아이에게 공룡의 멸종에 대해 설명을 하자니 난감해진다. 공룡의 멸종에 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운석충동설' 이 대표적이다. 작은 별 하나가 지구에 부딪혀 지구의 어느 곳에 거대한 홈이 파이고 거기에서 발생한 먼지가 하늘을 덮어버려 해도 달도 뜨지 않는 날들이 몇 년간 계속되었다는 것이 그 가설의 내용이다. 빛이 없는 곳에서 해가 뜨지 않자, 풀과 나무들이 말라버리고, 먹을 것을 잃은 초식 공룡들이 죽고, 마침내는 육식 공룡마저 전멸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공룡의 전멸에 대한 가설로는 '화산활동설' 이나 '해수준저하설' 등이 있지만, 아직까지 명확하게 증명된 것은 아니다. 현대과학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6천 5백만년 전 지구에서 일어난 일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 파도는 밀려온다. 연이어 밀려오는 파도지만, 언제나 같은 크기의 것은 아니다. 조금씩 낮은 곳에서 스러지는 파도가 있고, 이전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바스러지는 파도가 있다. 검게 패인 공룡 발자국이 신기한지 아이는 깡충깡충 뛰면서 공룡 발자국을 찾아다닌다. 몇 천년 전의 어미 공룡과 새끼 공룡도 우리처럼 바닷가를 뛰어 다녔을 것이다. 밀려오는 파도는 어제와는 다른 것이겠지만, 기질마저 다르지는 않다. 시간은 언제나 다른 것이지만, 시간의 피조물들은 각각 어떤 유사성을 지닌다. 아이는 지금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이 바닷가를 뛰어다니고 있지만, 언젠가는 아버지가 되어 거닐게 될 것이다. 파도의 갈피 어느 구석에는 6억 5,000만년 전의 시간이 스며 있을 것이다. 그 시간을 들춰보면 공룡들의 숨소리며 뛰어 다니는 소리도 들어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화석들의 주인공은 대개 쥬라기보다 후기인 1억 3,000만년 ~ 1억 6,500만년 전의 중생대 백악기에 생존했던 공룡들이라고 한다. 그때 이곳은 바다가 아니었고, 호수였다. 수많은 초식공룡들이 물가를 거닐며 풀을 뜯어먹었을 것이다. 화석은 상족암에서 실바위까지 6km쯤의 해안에 1,900여 점이 산재해 있다. 고성군 전체에는 무려 4,300여 개의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는데, 그 규모나 다양성 면에서 세계 3대 공룡 화석지에 든다고 한다. 예전에는 갖가지 전설의 모태가 되었던 발자국 화석들이 공룡 발자국으로 밝혀진 것은 20여년 전이다. 1982년 남해안 지질조사를 하던 한 학자에 의해 학계에 보고된 후, 그때서야 발굴조사를 하였던 것이다.
어느새 상족암 주차장에 이르렀다. 상족암 주차장 아래에는 600m에 이르는 몽돌밭이 펼쳐져 있다. 아이와 함께 돌밭을 거닌다. 아이는 몽돌의 부드러움에 빠져 자꾸 바다 쪽으로 향한다. 그러다 갑자기 덩치 큰 파도가 밀려오는 바람에 신발이 다 젖어 버렸다. 기회를 잡았다 싶었는지, 아이는 아예 맨발로 걷겠노라고 하였다. 그리하라고 고개를 끄덕인 후 보니, 돌 틈 사이에 병 조각들이 많다. 병 조각을 가리키며 안 되겠다고 하였더니, 아이는 양말을 벗은 후 신발을 신었다.
우리는 이내 상족암 쪽으로 향했다. 해식동굴이 뚫린 상족암은 멀리서 보면 밥상다리 모양 같다 하여 '상족암(床足岩)'이라 불렸다. 혹은 여러 개의 다리 모양 같다고 해서 '쌍족', '쌍발이' 라고 했다고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선녀들이 내려와 옥황상제에게 바칠 금옷을 짜던 곳이 상족굴이며, 굴 안에 있는 욕탕 같은 웅덩이는 선녀들이 목욕하던 선녀탕이라고 한다. 상족암을 지나자 다시 너럭바위가 바다에 닿아 있다. 멍게를 파는 사내는 쉴 새가 없다. 갓 바다에서 건져 올렸을 멍게를 익숙한 솜씨로 슥슥 잘라내서 속을 파내고, 그것을 바닷물에 헹군 후 준비해 온 민물에 한번 더 헹군다. 그렇게 안주를 준비하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오래 걸었더니, 아이는 다리가 아프다고 하였다. 아이를 목마 태운 채, 공룡 박물관으로 향했다. 12월에 완전 개장할 예정이라는 박물관은 이미 개장이 되어 있었다. '완전 개장' 과 '개장' 이 어떻게 다를까, 생각하니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박물관에는 제법 볼거리가 많았다. 각종 공룡 화석이 전시되어 있고, 공룡의 뼈도 만만치 않는 양을 갖추어 놓았다. 1~2층에 걸쳐 가장 큰 공룡이라는 세이모사우루스의 모조 뼈 화석이 중심에 놓여 있고, 공룡 관련 입체 영화를 상영하는 영상실도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아이와 함께 박물관 주차장 아래에 있는 덕명 마을로 향했다. 미리 준비해 간 소주병을 들고, 김형려(77세) 할머니 댁을 찾아가는데, 할머니 댁 앞의 아스팔트 위에서 한 할머니(김옥여 · 69세)가 깨를 털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나서 김 할머니께서 댁에 계신지 물으니, 계실 거라고 하였다. 김 할머니 댁에 가니, 할머니는 방아를 찧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소주병을 내밀었더니, "날 줄라고 사 왔오?" 하셨다. 그렇다고 했더니, '내는 술 안 묵어.' 하였지만, 이내 고맙다는 말을 반복해서 하였다. 할머니는 부리나케 포대 하나와 빗자루를 들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그러더니 곧장 그 포대를 든 채로 마당으로 들어섰다.
"댕기 담을락 했드니, 쥐가 쪼사 나삣어."
"댕기가 무언대요?"
"댕기가, 나락 껍디이. 아들이 낼 온다카네. 그래 쌀 줄라고."
할머니를 따라가며, "아드님이 오신다면, 직접 찧어서 가라고 하지 그래요?"하였더니, "오먼 선걸음으로 갈라하는데, 뭐." 하는 대답이 나왔다. 할머니의 말 끝에 문득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생각났다. 며칠 전에 찾아 뵙기는 하였지만, 나도 절을 하자마자 떠날 차비부터 하였던 것이다. 왜 그렇게 고향집에 갈 때마다 차분하게 머무르지를 못하는지, 항상 바삐 나서는 나를 보고 아버지는 서운한 기색을 보였고, 어머니는 "어여 가그라. 바쁜 사람 안 잡는다." 라고 말하곤 하였다. 두분 모두 자식에 대한 애정의 정도는 비슷하겠지만, 표현 방식에서는 차이가 났다.
할머니는 벼 포대에 바가지를 넣었다. 일일이 한 바가지씩 퍼서 방아를 찧을 듯해서 "제가 올려 드릴께요." 하면서 가마니를 잡았더니, "놔 둬라. 이래 퍼담으먼 된다." 하셨다. 나는 기어이 가마니를 들어 방아 위에 엎었다. 젊은 사람이 한 번 힘을 쓰면 될 일이더라도 나이 드신 분들은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해낼 수 있는 법이다. 입고 있던 흰옷이 더러워지기는 하였지만, 기분은 좋았다. 할머니는 전기 콘센트에 방아 플러그를 꽂았다. 윙 소리를 내며 기계가 돌기 시작하자, 먼지가 수북하게 일기 시작했다.
"먼지 나간다. 저 나무 밑 그늘에 가 있으라."
매캐한 먼지 속에서 할머니가 손짓을 곁들여 멀리 가 있으라고 하였다. 답답하고 조그마한 사각의 창고에는 먼지가 자욱했고, 할머니의 모습이 수근(박수근 화백)의 그림 속 여인들처럼 흐릿해졌다. 거기 한 어머니가 자식에게 줄 쌀을 찧기 위해 먼지 속에 서 있었다. 먼지를 피해 밖으로 나왔더니 여전히 김옥여 할머니가 깨를 털고 계셨다. 도로 가에 길게 눕혀진 그 깨를 다 털려면 오후 나절이 다 지나갈 것 같았다. 할머니는 이름을 묻는 내 말에, "구슬 옥(玉), 이문 여(璵)" 라고 대답한 후, "성은 박가." 라고 하였다. 공룡박물관이 들어서니까 어떠냐고 묻자, 대뜸 "쓰레기 따문에 못 살겠심더. 차로 오며 가며 떤져뿔고." 라고 대답했다. 친정인 하이면을 아입면이라고 발음하는 할머니는 비가 오기 전에 깨를 다 털 욕심으로 일을 서두르고 있었다.
"할무이 안 계시든가요?" 박 할머니가 내게 물었다. 아드님 온다고 방아 찧고 있다고 했더니, 이내 "딸 온다카든데." 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김 할머니 댁 사정을 잘 아느냐고 했더니, 망설이는 듯하다가 "우리 시누. 큰누나." 그렇게 대답했다. 두 분은 올케와 시누이 사이로 옆집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몇 번이고 주저앉아서 다리 아프다고 했던 아이가 더 참기 힘든지 "아빠 언제 갈 거야?" 하였다. 생각해 보니 아이에게는 고역이겠다 싶었다. 인사나 할 생각으로 다시 박 할머니 댁으로 가서 가겠노라고 하였더니, 그새 정이 들어서인지, 할머니가 아쉬움을 표했다. "벨 일 없으먼 자고 가라. 내 하고 저닉 묵고." 두 번 봤지만 어느새 식구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기어이 가겠다고 나서자 할머니는 몇 번이고, "은제 볼 끼가? 은제 볼 끼가?" 하였다. 기약하지 못하고 나서면서 나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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